[2020-2: 1주_고・탐] 서양 고대 철학의 인간관 (1)_『국가・정체』
김민정2021-01-20 15:48
1기 박*슬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올바름(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를 통해, (지속적이며 궁극적인)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국가> 1권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구성을 보인다.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 플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하는 올바름이 왜 올바름이라고 볼 수 없는지 사례와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진정한 올바름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에 속하는 <국가> 2권부터 4권에는 ‘제 일을 하는 것’이 올바름이며, 이는 국가 단위와 개인 단위 모두에 적용된다는 플라톤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윤리학과 정치 철학을 아우르게 된다.
국가의 구성원은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된다. 국가의 올바름이란, 국가의 구성원(집단)이 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영혼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부분, 격정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인의 올바름이란, 각 영혼의 부분이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국가 4권까지에 드러나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판에 마주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은 영혼과 도시국가를 유비 관계에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국가가 언제나 유비관계에 있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이 반드시 ‘(각 구성 부분이) 제 일을 하는 것’으로 동일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만약 이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행복을 논하는 것과 정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다.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4권 435a-435b를 참고할 때 플라톤은 <국가>의 초중반에서도 ‘이데아’에 대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올바름의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한 후, 국가의 올바름에 대한 탐구로부터 ‘올바름의 이데아’가 ‘제 일을 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서 개인의 올바름은 영혼의 각 부분이 제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올바름의 이데아’가 없다면 플라톤의 비유는 그 힘을 잃는다. 영혼이 이성, 격정(기개), 욕구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그들이 각각 고유한 역할을 가진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올바름의 이데아’를 미리 전제해 놓고, 그에 맞추어 영혼을 삼분하는 것은, 미리 정해진 결론에 과정을 끼워 맞춘다는 느낌이 든다는 아쉬움이 있다. 개인의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개별 사례를 통해 탐구한 후 일반화를 하는 것이 보다 나은 접근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플라톤은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축소하고 있다. 4권 444b에서, “‘올바름’을 생기게 함은 혼에 있어서 여러 부분이 서로 지배하며 지배받는 관계를 ‘성향에 따라(자연의 이치에 따라)’ 확립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올바름의 이데아는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그리고 플라톤이 앞서 국가의 올바름에 대해 논하던 바를 고려할 때) 플라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어떤 덕을 길러야 하는지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중 어느 계급에 속할 것인지는 환경에 무관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성장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적절한 환경과 교육이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더불어 플라톤의 주장은 더 나은 삶이나 발전을 향한 열망을 제한할지도 모른다. 물론 플라톤이 교육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시가, 체육, 철학 교육 등을 통해 저 세 계급을 갈라낼 수 있으며, “홀릴만한” 유혹(일종의 시험)에도 홀리지 않는 사람만이 통치자와 수호자가 될 수 있다는 설명도 제시한다. 그러나 교육의 역할은 본성을 발굴해내는 일종의 도구로 한정지어지기에, 이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타고난 본성을 바탕으로 각 계층, 각 영혼의 부분간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윤리학)은 다소 구시대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역자가 ‘올바름’이라고 번역한 dikaiosyne가 현대의 정의(justice)의 현대적 쓰임과도 맞지 않는 측면이 있기에, 현대의 관점에서 정의에 관한 탐구를 할 때 <국가>에 나타난 플라톤의 입장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플라톤의 논의로부터 현대에 적용할만한 통찰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때 인간 스스로도 불행하고 국가도 위태로워진다는 결론은 받아들일만하다. 적성을 탐구할 기회를 가지지 충분히 못한 채 대부분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획일화된 교과를 공부하는 한국의 교육 과정은 플라톤이 볼 때에는 매우 비효율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한다면, 국가의 ‘올바름’이 확립되는 동시에 개인의 행복도 증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올바름(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를 통해, (지속적이며 궁극적인)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국가> 1권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구성을 보인다.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 플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하는 올바름이 왜 올바름이라고 볼 수 없는지 사례와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진정한 올바름인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에 속하는 <국가> 2권부터 4권에는 ‘제 일을 하는 것’이 올바름이며, 이는 국가 단위와 개인 단위 모두에 적용된다는 플라톤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윤리학과 정치 철학을 아우르게 된다.
국가의 구성원은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구분된다. 국가의 올바름이란, 국가의 구성원(집단)이 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영혼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부분, 격정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인의 올바름이란, 각 영혼의 부분이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국가 4권까지에 드러나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비판에 마주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은 영혼과 도시국가를 유비 관계에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국가가 언제나 유비관계에 있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이 반드시 ‘(각 구성 부분이) 제 일을 하는 것’으로 동일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 만약 이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행복을 논하는 것과 정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다.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4권 435a-435b를 참고할 때 플라톤은 <국가>의 초중반에서도 ‘이데아’에 대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올바름의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한 후, 국가의 올바름에 대한 탐구로부터 ‘올바름의 이데아’가 ‘제 일을 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서 개인의 올바름은 영혼의 각 부분이 제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올바름의 이데아’가 없다면 플라톤의 비유는 그 힘을 잃는다. 영혼이 이성, 격정(기개), 욕구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그들이 각각 고유한 역할을 가진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올바름의 이데아’를 미리 전제해 놓고, 그에 맞추어 영혼을 삼분하는 것은, 미리 정해진 결론에 과정을 끼워 맞춘다는 느낌이 든다는 아쉬움이 있다. 개인의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개별 사례를 통해 탐구한 후 일반화를 하는 것이 보다 나은 접근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플라톤은 환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축소하고 있다. 4권 444b에서, “‘올바름’을 생기게 함은 혼에 있어서 여러 부분이 서로 지배하며 지배받는 관계를 ‘성향에 따라(자연의 이치에 따라)’ 확립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올바름의 이데아는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그리고 플라톤이 앞서 국가의 올바름에 대해 논하던 바를 고려할 때) 플라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어떤 덕을 길러야 하는지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중 어느 계급에 속할 것인지는 환경에 무관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성장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적절한 환경과 교육이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더불어 플라톤의 주장은 더 나은 삶이나 발전을 향한 열망을 제한할지도 모른다. 물론 플라톤이 교육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시가, 체육, 철학 교육 등을 통해 저 세 계급을 갈라낼 수 있으며, “홀릴만한” 유혹(일종의 시험)에도 홀리지 않는 사람만이 통치자와 수호자가 될 수 있다는 설명도 제시한다. 그러나 교육의 역할은 본성을 발굴해내는 일종의 도구로 한정지어지기에, 이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타고난 본성을 바탕으로 각 계층, 각 영혼의 부분간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윤리학)은 다소 구시대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역자가 ‘올바름’이라고 번역한 dikaiosyne가 현대의 정의(justice)의 현대적 쓰임과도 맞지 않는 측면이 있기에, 현대의 관점에서 정의에 관한 탐구를 할 때 <국가>에 나타난 플라톤의 입장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플라톤의 논의로부터 현대에 적용할만한 통찰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맞지 않는 옷을 입을 때 인간 스스로도 불행하고 국가도 위태로워진다는 결론은 받아들일만하다. 적성을 탐구할 기회를 가지지 충분히 못한 채 대부분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여 획일화된 교과를 공부하는 한국의 교육 과정은 플라톤이 볼 때에는 매우 비효율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한다면, 국가의 ‘올바름’이 확립되는 동시에 개인의 행복도 증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15:49
1기 조*준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점도 있고,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어 답글 남깁니다.
플라톤이 영혼과 국가가 유비 관계에 있고, 올바름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했는데, 이 전제가 과연 믿을 만한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해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네 번째 문단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백지상태로 태어나며, 적절한 환경과 교육이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셨지만 마지막 문단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백지 상태로 테어난다면, 학생이 어릴 때부터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지 발굴할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교육이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동일한 교육을 시키고 그 후에 각 직업에 특화된 교육을 받는 지금의 시스템이 적절하지 않나요?
즉, 각자의 적성을 탐구하는 것이 적절한 교육이라는 것은 곧 타고난 본성에 따라 해당하는 덕을 길러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같은 것 아닌가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해야 한다는 예슬 님의 주장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덕을 길러야 한다는 플라톤식 교육관과 어떻게 다른지, 플라톤식 교육관에서 단순히 계급이 직업으로 바뀐 것뿐인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점도 있고,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어 답글 남깁니다.
플라톤이 영혼과 국가가 유비 관계에 있고, 올바름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했는데, 이 전제가 과연 믿을 만한지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해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네 번째 문단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백지상태로 태어나며, 적절한 환경과 교육이 인간을 계몽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셨지만 마지막 문단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백지 상태로 테어난다면, 학생이 어릴 때부터 무엇을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지 발굴할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교육이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고등학교 때까지 동일한 교육을 시키고 그 후에 각 직업에 특화된 교육을 받는 지금의 시스템이 적절하지 않나요?
즉, 각자의 적성을 탐구하는 것이 적절한 교육이라는 것은 곧 타고난 본성에 따라 해당하는 덕을 길러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같은 것 아닌가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통해 각 학생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릴 때부터 발굴해야 한다는 예슬 님의 주장이 타고난 본성에 따라 덕을 길러야 한다는 플라톤식 교육관과 어떻게 다른지, 플라톤식 교육관에서 단순히 계급이 직업으로 바뀐 것뿐인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49
@김민정
1기 박*슬
코멘트 감사합니다!
우선 저는 교육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입장과 다른 점을 분명히 하자면, 플라톤은 미리 정해진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을 교육이 발굴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 반면 제가 하고싶은 얘기는 '교육을 통해 아이의 본성을 일깨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것을 접하면서 스스로의 능동적 사고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적성에 맞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경우 통치자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그렇기에 일종의 유혹들을 견뎌낸 아이만이 진정한 통치자의 자질을 가지고 났음이 확인되고, 그들이 통치자가 되는 다소 수동적인 모델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해진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교육에 아이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어떤 자질을 길러나갈지 보다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적었습니다.
제가 제시한 모델은 플라톤이 제시한 모델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체육에 재능이 없는 학생은(체육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은)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본성적으로 생산자일 것이며 따라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받을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제가 제시한 모델에서는 본성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본인이 원한다면 노력해서 체육에 관한 성과를 이루어내거나, 후속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선 내용과 이어지는 두 번째 장점으로, 제가 제시한 모델은 개인의 선호가 직업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지만,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는 분야에 노력을 기울여 성공한 사례도 종종 있습니다. 플라톤의 모델은 이런 경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본성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가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제 입장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능동적 선택을 보다 강조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과는 이론적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우선 저는 교육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입장과 다른 점을 분명히 하자면, 플라톤은 미리 정해진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을 교육이 발굴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 반면 제가 하고싶은 얘기는 '교육을 통해 아이의 본성을 일깨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것을 접하면서 스스로의 능동적 사고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적성에 맞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경우 통치자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그렇기에 일종의 유혹들을 견뎌낸 아이만이 진정한 통치자의 자질을 가지고 났음이 확인되고, 그들이 통치자가 되는 다소 수동적인 모델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해진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교육에 아이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의 어떤 자질을 길러나갈지 보다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적었습니다.
제가 제시한 모델은 플라톤이 제시한 모델과 비교할 때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체육에 재능이 없는 학생은(체육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은)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본성적으로 생산자일 것이며 따라서 통치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받을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제가 제시한 모델에서는 본성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본인이 원한다면 노력해서 체육에 관한 성과를 이루어내거나, 후속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선 내용과 이어지는 두 번째 장점으로, 제가 제시한 모델은 개인의 선호가 직업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잘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지만, 좋아하지만 재능이 없는 분야에 노력을 기울여 성공한 사례도 종종 있습니다. 플라톤의 모델은 이런 경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본성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가 정해져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제 입장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능동적 선택을 보다 강조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과는 이론적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50
1기 이*현
현대인의 필독서로 항상 거론되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을 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란 탐구해 알아내고 싶은 대상인가보다. 어쩌면 정의, 즉 올바름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그 결론에 다다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가지는 아주 근본적인 욕구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와 유사한 쟁점을 두고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바를 살펴보면 새삼 신기하다.
수 천 년 동안 갑론을박이 오갈 거대한 주제에 대해 거침없는 물음과 답변을 던지는 플라톤의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지만, 인간 세상은 결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주장한 모습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다. 되려 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한 글라우콘의 주장이 현대 사회의 모습과 더 유사해 보인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실제로 정의롭지만 보이기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실제론 정의롭지 못하지만 보이기엔 정의로운 사람보다 어떻게 더 행복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이면에는 한 사람이 실제로 올바른 삶을 사는지 아닌지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남들에게 얼마나 올바르게 보이는지가 그 사람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숨어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플라톤은 개인의 확장인 국가(polis)의 올바른 상태와 그곳에서 비롯되는 행복을 근거로 개인 역시 올바르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조화’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통치자, 수호자, 상인이 각자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상태이고, 이때 통치자가 나라를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는 자여야 한다. 이 논의를 개인에 적용하여 이성, 기개, 욕구가 조화를 이루어야 올바른 상태이며, 이를 제어하는 것이 바로 통치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성(logos)’이다. 즉 국가든 개인이든 정의란, 세 구성 요소가 지혜, 용기, 절제라는 각자의 몫을 조화롭고 충실하게 행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논의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인의 정의관을 단순히 국가 정의관의 축소판으로 비약한 점이다. 둘째,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맹신한 점이다.
작품 속 소크라테스의 논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개인의 확장인 국가의 올바름을 먼저 증명한 뒤 이를 개인에 적용하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올바름을 증명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나 현대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 자체가 모순적이다. 니부어가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개인은 선의지와 양심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지만 개인이 복잡하게 얽힌 국가의 경우 단순히 양심적인 구성원이 모여있다고 정의롭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 제도나 구조의 개선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플라톤 역시, 모든 개인이 지혜롭지 못하기에 계급을 나누어 통치자로 하여금 시스템적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과 국가의 정의의 원천 자체가 다른데, 이 둘을 논리 구조상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로 전제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다음으로, 기개와 욕구를 다스리는 주체로서 인간의 이성을 맹신한 플라톤의 생각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다수의 심리학 연구들에서 인간은 단순히 이성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지각, 감정, 생각 등 다양한 주관적 경험이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성으로 욕구를 잘 다스리기만 하면 마치 저절로 올바른 삶으로 인도 당할 것으로 판단한 플라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다소 환상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던 것 같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처한 인간 사고의 과정을 살펴보자. 인간은 ‘이 행동이 진실로 정의로운가’를 따지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어떠한 결론에 대해, ‘이 행동이 타인에게, 혹은 자신에게 얼마나 정의롭다고 판단되는가’를 따져 묻는다.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납득가능한 것인지를 설득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도 이유를 찾지만,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이유를 찾는다(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에서 인용).
또한 인간은 정의로운 삶이 옳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본능에서 유래되었든, 교육을 통한 것이든 무엇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못한지를 분별하는 능력은 대다수의 사람이 대부분 비슷한 기준에서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정의롭지 못한 자들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을 한다. 익명성에 숨어 언어폭력을 일삼는 악플러들, 청렴한 이미지 뒤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부패한 정치인들 등, 진정한 정의가 아닌 정의로운 ‘이미지’가 주는 보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플라톤이 주장한 바 대로 진실한 정의가 보이는 정의 그 이상의 행복과 보상을 준다면, 왜 인간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소크라테스가 장황하게 설명한 논의들보다, 몇 자 되지 않는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주장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는 결국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의’를 향해 인간이 내딛는 도약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궁극적 이데아를 향한 짝사랑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현대인의 필독서로 항상 거론되는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을 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란 탐구해 알아내고 싶은 대상인가보다. 어쩌면 정의, 즉 올바름이 무엇인지 고찰하고 그 결론에 다다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가지는 아주 근본적인 욕구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와 유사한 쟁점을 두고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바를 살펴보면 새삼 신기하다.
수 천 년 동안 갑론을박이 오갈 거대한 주제에 대해 거침없는 물음과 답변을 던지는 플라톤의 통찰력은 정말 대단하지만, 인간 세상은 결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주장한 모습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다. 되려 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한 글라우콘의 주장이 현대 사회의 모습과 더 유사해 보인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실제로 정의롭지만 보이기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실제론 정의롭지 못하지만 보이기엔 정의로운 사람보다 어떻게 더 행복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이면에는 한 사람이 실제로 올바른 삶을 사는지 아닌지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남들에게 얼마나 올바르게 보이는지가 그 사람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숨어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플라톤은 개인의 확장인 국가(polis)의 올바른 상태와 그곳에서 비롯되는 행복을 근거로 개인 역시 올바르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조화’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통치자, 수호자, 상인이 각자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상태이고, 이때 통치자가 나라를 조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는 자여야 한다. 이 논의를 개인에 적용하여 이성, 기개, 욕구가 조화를 이루어야 올바른 상태이며, 이를 제어하는 것이 바로 통치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성(logos)’이다. 즉 국가든 개인이든 정의란, 세 구성 요소가 지혜, 용기, 절제라는 각자의 몫을 조화롭고 충실하게 행하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논의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인의 정의관을 단순히 국가 정의관의 축소판으로 비약한 점이다. 둘째,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맹신한 점이다.
작품 속 소크라테스의 논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개인의 확장인 국가의 올바름을 먼저 증명한 뒤 이를 개인에 적용하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올바름을 증명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나 현대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 자체가 모순적이다. 니부어가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개인은 선의지와 양심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지만 개인이 복잡하게 얽힌 국가의 경우 단순히 양심적인 구성원이 모여있다고 정의롭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 제도나 구조의 개선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플라톤 역시, 모든 개인이 지혜롭지 못하기에 계급을 나누어 통치자로 하여금 시스템적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개인과 국가의 정의의 원천 자체가 다른데, 이 둘을 논리 구조상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로 전제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다음으로, 기개와 욕구를 다스리는 주체로서 인간의 이성을 맹신한 플라톤의 생각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다수의 심리학 연구들에서 인간은 단순히 이성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지각, 감정, 생각 등 다양한 주관적 경험이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성으로 욕구를 잘 다스리기만 하면 마치 저절로 올바른 삶으로 인도 당할 것으로 판단한 플라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다소 환상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던 것 같다.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처한 인간 사고의 과정을 살펴보자. 인간은 ‘이 행동이 진실로 정의로운가’를 따지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어떠한 결론에 대해, ‘이 행동이 타인에게, 혹은 자신에게 얼마나 정의롭다고 판단되는가’를 따져 묻는다.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납득가능한 것인지를 설득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도 이유를 찾지만,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도 이유를 찾는다(조너선 하이트, 『바른마음』에서 인용).
또한 인간은 정의로운 삶이 옳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본능에서 유래되었든, 교육을 통한 것이든 무엇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못한지를 분별하는 능력은 대다수의 사람이 대부분 비슷한 기준에서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정의롭지 못한 자들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을 한다. 익명성에 숨어 언어폭력을 일삼는 악플러들, 청렴한 이미지 뒤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부패한 정치인들 등, 진정한 정의가 아닌 정의로운 ‘이미지’가 주는 보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플라톤이 주장한 바 대로 진실한 정의가 보이는 정의 그 이상의 행복과 보상을 준다면, 왜 인간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소크라테스가 장황하게 설명한 논의들보다, 몇 자 되지 않는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주장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는 결국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의’를 향해 인간이 내딛는 도약은, 결코 닿을 수 없는 궁극적 이데아를 향한 짝사랑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김민정2021-01-20 15:51
1기 김*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의 정의관을 국가 정의관의 축소판으로 비약한 것이 모순적인 까닭을 현대 윤리 관점에서 잘 풀어내 주신 것이 특히 배워갈 만 했습니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인간이 왜 진실한 정의를 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 윤리와 생물학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잘 몰라서 자신은 없지만, 진화 관점에서 설명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결국 생존하여 자손을 남기는 데에 유리한 행동에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다른 개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평판이나 생존 가능성에 별다른 이득을 볼 수 없는 진실한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정의를 추구하는 편이 생존과 번식에 훨씬 유리하겠지요. 책에서도 국가 정의관에 대한 논의로 비약하기 이전의 논의에서 '올바르지만 올바르지 못하게 보이는 사람'과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사람'의 삶을 비교하여 후자가 주변 사람들과 신에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정의가 무엇인지 논하더라도 결국은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 또한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의 정의관을 국가 정의관의 축소판으로 비약한 것이 모순적인 까닭을 현대 윤리 관점에서 잘 풀어내 주신 것이 특히 배워갈 만 했습니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인간이 왜 진실한 정의를 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 윤리와 생물학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잘 몰라서 자신은 없지만, 진화 관점에서 설명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결국 생존하여 자손을 남기는 데에 유리한 행동에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다른 개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평판이나 생존 가능성에 별다른 이득을 볼 수 없는 진실한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정의를 추구하는 편이 생존과 번식에 훨씬 유리하겠지요. 책에서도 국가 정의관에 대한 논의로 비약하기 이전의 논의에서 '올바르지만 올바르지 못하게 보이는 사람'과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사람'의 삶을 비교하여 후자가 주변 사람들과 신에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정의가 무엇인지 논하더라도 결국은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정의가 무엇인지 또한 논의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정2021-01-20 15:51
1기 조*준
안녕하세요, 남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답변 남깁니다.
글의 뒤에서 두번째 문단에서 인간은 정의로운 삶이 옳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정의로운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의로운 이미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도, 해도 되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 중 정의로운 것을 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그러므로 진실한 정의가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 이상의 행복과 보상을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진실한 정의가 보여지는 것 말고도 본질적인 행복과 보상을 주지만, 그 정도가 다른 모든 이득들보다 크지는 않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남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읽고 여러 생각이 들어 답변 남깁니다.
글의 뒤에서 두번째 문단에서 인간은 정의로운 삶이 옳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고, 정의로운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의로운 이미지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도, 해도 되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 중 정의로운 것을 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그러므로 진실한 정의가 남들에게 보이는 '이미지' 이상의 행복과 보상을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진실한 정의가 보여지는 것 말고도 본질적인 행복과 보상을 주지만, 그 정도가 다른 모든 이득들보다 크지는 않기 때문에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52
1기 박*정
*현 학우님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논의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해주셔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의문점도 명확하게 풀린 것 같습니다. 특히 두번째로 지적해주신 내용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정의 뒤에 따라오는 보상을 위해 '정의로운 척'을 한다는 생각이 다소 염세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뉴스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너무 흔하게 사례를 찾아볼 수 있어서 마음이 기울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현 학우님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논의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해주셔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의문점도 명확하게 풀린 것 같습니다. 특히 두번째로 지적해주신 내용에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정의 뒤에 따라오는 보상을 위해 '정의로운 척'을 한다는 생각이 다소 염세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뉴스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너무 흔하게 사례를 찾아볼 수 있어서 마음이 기울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52
1기 장*균
국가 역시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논리에 공감하면서 글을 읽었다. 훌륭함과 올바름이란 어떤 것인지, 더 나아가 올바른 국가와 개인이란 어떤 것인지 논의하고, 또 그 둘의 유사성을 증명한 사실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훌륭한 안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올바름을 규정하기 위해 더 큰 단위인 국가에서 시작하는 논리 역시 흥미로웠다.
결국에 플라톤에게 있어서 올바름이란 ‘자연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가 자신들의 기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는 지혜, 용기, 절제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올바름이란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올바름은 앞서 말한 3가지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며 보전되도록 만들어준다.
개인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혼의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들의 조화를 통해 앞서 말한 3가지의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하며 무엇보다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들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이의 연장선으로 결국에는 올바름을 지닌 사람은 훌륭하며 훌륭한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 중 교육과 양육의 과정을 통해 위의 모습들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만이 수호자, 더 나아가 통치자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이를 비추어봤을 때 플라톤은 인간이 각자가 잘하는 기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기능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논의이긴 하지만 몇가지 의문과 아쉬움이 든다.
우선 언어가 지닌 추상성에서 오는 아쉬움이다. 이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비유와 논리들을 통해 올바름에 대해 정의내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언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올바른 사람이 각자의 기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적이고 이상적이다. 삶은 어떻게 보면 매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즉, 결국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실생활에서의 적용인데, 추상적인 단어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또한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말에서도 의문이 생긴다. 훌륭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의미하는지, 또 왜 훌륭함이 그렇게 정의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와 더불어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내린다면 더 좋은 논리의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국가 내에서 각자의 기능에 맞춰서 살아가야한다는 주장에도 의문이 든다.
첫 번째로, 각자가 선천적으로 기능을 타고 난다면, 그 기능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점이다. 수호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험 관문들을 통해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한다고 하지만 나머지 직업들에 대한 논의가 적다. 또한 수호자에게서 파악하려고 하는 속성들 역시 내면의 성격적인 측면으로 파악이 어려운 것들이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불만없이 적재적소에 배치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성격적인 측면들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수치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인간들을 유형화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었다. 과거에는 지금에 비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직업의 수가 적고 덜 복잡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가능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사회는 과거와 달리 수많은 직업들, 사회적인 역할들이 등장했고 구조 역시 복잡해졌다. 성격, 직업, 문화 등등 다원화된 사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호자를 찾는 것처럼 각자의 기능들을 유형화하고 이에 맞는 사람들을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과연 이런 사회가 행복으로 이어질까에 대한 의문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훌륭한 것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내 기능과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꼭 행복이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것들에 대해 찾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겪으며 극복해나가는 과정 또한 삶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 후에 찾아오는 더 큰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존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내면적으로도,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도 규정된 삶을 사는 것은 오히려 불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에서 오는 행복과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 간의 비교가 진행된다면 더 풍부한 논의가 될 것 같다.
올바름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나 꼭 한번쯤은 생각해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은 인상깊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한 사람들의 모습과 국가의 모습은 오늘날에는 실현이 조금 어려운, 말그대로 이상의 사회라고 느껴진다.
국가 역시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논리에 공감하면서 글을 읽었다. 훌륭함과 올바름이란 어떤 것인지, 더 나아가 올바른 국가와 개인이란 어떤 것인지 논의하고, 또 그 둘의 유사성을 증명한 사실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훌륭한 안목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올바름을 규정하기 위해 더 큰 단위인 국가에서 시작하는 논리 역시 흥미로웠다.
결국에 플라톤에게 있어서 올바름이란 ‘자연의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가 자신들의 기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는 지혜, 용기, 절제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올바름이란 자기의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에 종사해야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올바름은 앞서 말한 3가지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며 보전되도록 만들어준다.
개인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속성들이 존재한다. 혼의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들의 조화를 통해 앞서 말한 3가지의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하며 무엇보다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들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이의 연장선으로 결국에는 올바름을 지닌 사람은 훌륭하며 훌륭한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 중 교육과 양육의 과정을 통해 위의 모습들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만이 수호자, 더 나아가 통치자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이를 비추어봤을 때 플라톤은 인간이 각자가 잘하는 기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기능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논의이긴 하지만 몇가지 의문과 아쉬움이 든다.
우선 언어가 지닌 추상성에서 오는 아쉬움이다. 이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비유와 논리들을 통해 올바름에 대해 정의내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언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올바른 사람이 각자의 기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적이고 이상적이다. 삶은 어떻게 보면 매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즉, 결국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실생활에서의 적용인데, 추상적인 단어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또한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기 때문에 더 행복하다는 말에서도 의문이 생긴다. 훌륭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의미하는지, 또 왜 훌륭함이 그렇게 정의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와 더불어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내린다면 더 좋은 논리의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국가 내에서 각자의 기능에 맞춰서 살아가야한다는 주장에도 의문이 든다.
첫 번째로, 각자가 선천적으로 기능을 타고 난다면, 그 기능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점이다. 수호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험 관문들을 통해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한다고 하지만 나머지 직업들에 대한 논의가 적다. 또한 수호자에게서 파악하려고 하는 속성들 역시 내면의 성격적인 측면으로 파악이 어려운 것들이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불만없이 적재적소에 배치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성격적인 측면들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수치화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인간들을 유형화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었다. 과거에는 지금에 비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직업의 수가 적고 덜 복잡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가능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사회는 과거와 달리 수많은 직업들, 사회적인 역할들이 등장했고 구조 역시 복잡해졌다. 성격, 직업, 문화 등등 다원화된 사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호자를 찾는 것처럼 각자의 기능들을 유형화하고 이에 맞는 사람들을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과연 이런 사회가 행복으로 이어질까에 대한 의문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훌륭한 것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내 기능과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꼭 행복이라고 정의내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것들에 대해 찾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겪으며 극복해나가는 과정 또한 삶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 후에 찾아오는 더 큰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존재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내면적으로도,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도 규정된 삶을 사는 것은 오히려 불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에서 오는 행복과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 간의 비교가 진행된다면 더 풍부한 논의가 될 것 같다.
올바름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이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나 꼭 한번쯤은 생각해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했다는 점은 인상깊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한 사람들의 모습과 국가의 모습은 오늘날에는 실현이 조금 어려운, 말그대로 이상의 사회라고 느껴진다.
김민정2021-01-20 15:52
1기 이*현
잘 읽었습니다! *균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 남깁니다. 다양한 부류의 인간을 선천적인 기능에 따라 3가지로 유형화 하는 것부터 우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잘 설명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성균님께서 제시해주신 생각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칸트의 이론에서 법칙에 따른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맥락이 생각났습니다. 이성에서 도출된 법칙일지라도 법칙을 지키며 사는 삶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괴리감이 드는 데, 플라톤의 이론에서 역시 평생 한 가지 기능과 역할에만 몰두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 부분을 캐치해 주셔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균님의 글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 남깁니다. 다양한 부류의 인간을 선천적인 기능에 따라 3가지로 유형화 하는 것부터 우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책을 읽으며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잘 설명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성균님께서 제시해주신 생각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칸트의 이론에서 법칙에 따른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맥락이 생각났습니다. 이성에서 도출된 법칙일지라도 법칙을 지키며 사는 삶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괴리감이 드는 데, 플라톤의 이론에서 역시 평생 한 가지 기능과 역할에만 몰두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 부분을 캐치해 주셔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5:53
1기 박*민
*균 씨의 견해가 저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꽤나 상반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로워 코멘트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언어가 비록 추상적이었지만, 저는 이를 아쉽다기보다는 오히려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를 할수록 언어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만큼 통찰력 있는 글이라고 느껴서 좀더 긍정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고전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인 만큼 현대인이 이를 통해 바람직한 인사이트를 얻고, 그렇게 얻은 인사이트를 현 시점에 맞게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균 씨의 견해가 저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꽤나 상반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로워 코멘트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언어가 비록 추상적이었지만, 저는 이를 아쉽다기보다는 오히려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질에 가까운 이야기를 할수록 언어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만큼 통찰력 있는 글이라고 느껴서 좀더 긍정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고전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인 만큼 현대인이 이를 통해 바람직한 인사이트를 얻고, 그렇게 얻은 인사이트를 현 시점에 맞게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47
1기 김*범
글 잘 읽었습니다! *균 님의 의문점들에 공감합니다. 제가 다소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풀어내 적어주셔서 좀 더 배워갈 수 있었습니다.
"규정에서 오는 행복과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비교하자는 제안이 신선했습니다. 매체에서는 "규정에서 오는 행복"을 디스토피아적인 사회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주인공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사회에 맞서 싸워 이를 쟁취하거나 포기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질문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The Giver" (<기억 전달자>로 번역된 소설; <국가>에서 제시한 올바른 국가와 가까운 사회를 묘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서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 주인공이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저는 고정관념과 주인공에 대한 이입 때문에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규정에서 오는 그것에 비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지 왜 그런지는 고찰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서 오는 행복을 비교함으로써 행복이 무엇인지에도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균 님의 의문점들에 공감합니다. 제가 다소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풀어내 적어주셔서 좀 더 배워갈 수 있었습니다.
"규정에서 오는 행복과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비교하자는 제안이 신선했습니다. 매체에서는 "규정에서 오는 행복"을 디스토피아적인 사회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주인공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사회에 맞서 싸워 이를 쟁취하거나 포기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이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질문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The Giver" (<기억 전달자>로 번역된 소설; <국가>에서 제시한 올바른 국가와 가까운 사회를 묘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서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 주인공이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저는 고정관념과 주인공에 대한 이입 때문에 자유로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규정에서 오는 그것에 비해 당연히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지 왜 그런지는 고찰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서 오는 행복을 비교함으로써 행복이 무엇인지에도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김민정2021-01-20 15:56
1기 송*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꼽은 국가의 네 가지 덕목은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란 앞선 세 가지가 각각을 담당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오로지 그 사람들만에 의해 조화롭게 행해지고 있을 때 달성될 수 있는 상태이다. 플라톤은 인간을 확대한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의 덕목들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혼의 이성, 기개, 욕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하되 이성이 나머지 둘을 무사히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올바름이란 수단도,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2권에서 글라우콘은 올바름 자체보다 올바르다는 명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올바른 사람 행세를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보다 더 이득을 보지 않느냐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있고 그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이 있는데, 플라톤의 올바름은 어느 쪽에 속하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 플라톤은 둘 다라고 대답하며, 올바름이 유익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유익하다는 사실까지 논의에서 이끌어 낸다.
교육과 양육에 대해 여러 장을 할애하고 있는 만큼 플라톤은 아이들의 철저한 선별 및 맞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혜를 타고나지 않은 자가 통치를 하려 하거나 용기를 타고난 자가 농사를 지으려 한다면 그것이 나라에 ‘최대의 해악’일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일견 획일적인 기준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대신 각자가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 계급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을 잘 해내는 것이 국가에 최고라고 보면서도, 그러한 상태의 개개인이 최고의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예를 들어 생산자 계급인 자가 아무리 생산을 잘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관점에서 훌륭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이상향, 이데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최고인 인간과, 인간으로서 최고인 인간은 서로 다르다. 플라톤은 인간을 이루는 이성, 기개, 욕망 중 이성을 가장 탁월하게 타고난, 드물고 뛰어난 사람들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지배해야 하며, 기개와 욕망이 거기에 반목하지 않아야 올바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성이 셋 중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올바를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통치자 계급만이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사회 속 개인의 역할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지만, 여전히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통치자에게는 지혜에 관한 교육만을, 생산자에게는 생산에 관한 교육만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교육을 받더라도 충분히 지혜로워질 수 없다는 플라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데아에 가까울수록 훌륭한 인간이라면 왜 모두에게 지혜와 용기에 관한 교육을 하지 않는가? 생산자들에게도 지혜에 관한 교육을 한다면 첫째로 국가의 전반적인 지혜의 수준이 높아지므로 유익하고, 둘째로 통치자들과 생산자들의 지향이 일치하게 되므로 시민들을 통치하기가 보다 수월해질 것이다.
또 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자질이 교육을 통해 발휘될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플라톤이 교육을 중요시하되 우선 타고난 본성에 따른 선별을 주장한 것과 달리, 현대로 올수록 환경과 교육의 역할이 더욱 고평가되고 있다. 통치자에게서 태어났더라도 통치자의 자질을 지니지 못한 아이는 생산자 계급이 될 수 있고 또 반대 역시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당시 공고하던 신분제적 사고를 어느 정도 탈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교육 후 선별이 아니라 선별 후 교육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태생적 계급의 틀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교육 방식은 각자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체제이기보다는, 수능이 아니라 유년기에 계급이 갈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히려 현대 사회의 일차원적 평가 지표와 닮은 구석을 찾을 여지가 있어 보인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꼽은 국가의 네 가지 덕목은 지혜, 용기, 절제 그리고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란 앞선 세 가지가 각각을 담당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오로지 그 사람들만에 의해 조화롭게 행해지고 있을 때 달성될 수 있는 상태이다. 플라톤은 인간을 확대한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의 덕목들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혼의 이성, 기개, 욕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하되 이성이 나머지 둘을 무사히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올바름이란 수단도,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2권에서 글라우콘은 올바름 자체보다 올바르다는 명성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올바른 사람 행세를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보다 더 이득을 보지 않느냐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있고 그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이 있는데, 플라톤의 올바름은 어느 쪽에 속하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 플라톤은 둘 다라고 대답하며, 올바름이 유익하기 때문에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유익하다는 사실까지 논의에서 이끌어 낸다.
교육과 양육에 대해 여러 장을 할애하고 있는 만큼 플라톤은 아이들의 철저한 선별 및 맞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혜를 타고나지 않은 자가 통치를 하려 하거나 용기를 타고난 자가 농사를 지으려 한다면 그것이 나라에 ‘최대의 해악’일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일견 획일적인 기준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대신 각자가 타고난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 계급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을 잘 해내는 것이 국가에 최고라고 보면서도, 그러한 상태의 개개인이 최고의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예를 들어 생산자 계급인 자가 아무리 생산을 잘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관점에서 훌륭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이상향, 이데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최고인 인간과, 인간으로서 최고인 인간은 서로 다르다. 플라톤은 인간을 이루는 이성, 기개, 욕망 중 이성을 가장 탁월하게 타고난, 드물고 뛰어난 사람들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지배해야 하며, 기개와 욕망이 거기에 반목하지 않아야 올바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성이 셋 중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 올바를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통치자 계급만이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사회 속 개인의 역할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지만, 여전히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통치자에게는 지혜에 관한 교육만을, 생산자에게는 생산에 관한 교육만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혜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교육을 받더라도 충분히 지혜로워질 수 없다는 플라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데아에 가까울수록 훌륭한 인간이라면 왜 모두에게 지혜와 용기에 관한 교육을 하지 않는가? 생산자들에게도 지혜에 관한 교육을 한다면 첫째로 국가의 전반적인 지혜의 수준이 높아지므로 유익하고, 둘째로 통치자들과 생산자들의 지향이 일치하게 되므로 시민들을 통치하기가 보다 수월해질 것이다.
또 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자질이 교육을 통해 발휘될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플라톤이 교육을 중요시하되 우선 타고난 본성에 따른 선별을 주장한 것과 달리, 현대로 올수록 환경과 교육의 역할이 더욱 고평가되고 있다. 통치자에게서 태어났더라도 통치자의 자질을 지니지 못한 아이는 생산자 계급이 될 수 있고 또 반대 역시 그렇다고 말함으로써 당시 공고하던 신분제적 사고를 어느 정도 탈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교육 후 선별이 아니라 선별 후 교육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태생적 계급의 틀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교육 방식은 각자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체제이기보다는, 수능이 아니라 유년기에 계급이 갈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히려 현대 사회의 일차원적 평가 지표와 닮은 구석을 찾을 여지가 있어 보인다.
김민정2021-01-20 15:56
1기 이*빈
교육에 관한 언급이 굉장히 많으셨는데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
저는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가 있어 짧게 코멘트 남깁니다.
특히 통치자와 생산자의 지향이 일치할 수 있음에도 왜 지혜를 교육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매우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자질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선역할 후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교육에 관하여서는 수업에서 논의해보아도 흥미로울듯 합니다.
교육에 관한 언급이 굉장히 많으셨는데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
저는 생각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가 있어 짧게 코멘트 남깁니다.
특히 통치자와 생산자의 지향이 일치할 수 있음에도 왜 지혜를 교육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매우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자질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선역할 후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교육에 관하여서는 수업에서 논의해보아도 흥미로울듯 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56
1기 권*현
플라톤이 개인들을 세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에게 일정한 역할만 맡긴다는 생각을 해서 지금의 다양성을 내세우는 세상과는 다르다고만 생각했는데 지우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듣고 현실이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일차원적인 교육, 굳어버린 시스템 등으로 플라톤이 생각한 인간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플라톤이 개인들을 세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에게 일정한 역할만 맡긴다는 생각을 해서 지금의 다양성을 내세우는 세상과는 다르다고만 생각했는데 지우님께서 하신 이야기를 듣고 현실이 다양성을 표방하지만 일차원적인 교육, 굳어버린 시스템 등으로 플라톤이 생각한 인간관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5:57
1기 권*현
플라톤의 저서 국가는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과 올바른 것이 행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대답을 담고 있다. 이에 도달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즉 개인의 의견과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파악해야하는 논의의 연속이었다. 올바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했더니 그것이 의미가 아닌 올바름의 속성이었음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이해한 것에 따르면, 국가에서는 인간의 올바름, 올바른 생활, 올바른 행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 더 큰 범위인 국가의 올바름, 올바른 정치와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인간의 차원에 대해서 논의하며 두 올바름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올바른 정체를 가진 국가를 상정하고,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인 체육과 시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국가를 이루는 세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각 성향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받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이야기 하며, 이런 올바른 나라에 대한 논의를 개인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읽은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목표하고자 하는, 즉 논의의 시작점은 인간 차원에서의 올바름, 정의이다. 하지만, 책 제목에서부터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국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약 플라톤의 국가(政體)의 제목만 본 사람들은 플라톤이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이상적인 국가관을 제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책을 읽을 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올바름, 올바른 생활, 올바른 행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 더 큰 범위인 국가의 올바름, 올바른 정치와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인간의 차원에 대해서 논의하며 두 올바름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방향이긴 하지만, 과연 이런 방향으로 올바름이라는 주제를 다뤄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결국 국가와 인간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국가와 인간이 비슷한 올바름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국가의 올바른 정체와 인간의 올바른 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결국에는 둘이 비슷하여 논의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정체와 그 정체 속에 있는 사람들의 성향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렇다면, 같은 정체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향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플라톤이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성향도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파악했다. 즉, 플라톤이 바라본 사람의 성향은 ‘세 가지 틀 안에서 조금씩 다르다’라고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현실을 보았을 때, 그렇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플라톤의 국가에서 항상 이성, 올바름, 이상에 대해서 강조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보통의 철학책이 다 그러하지만). 이상이란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가 상정한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에 따라서라면 옳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 부유한 삶을 살고, 행복해 보이는, 모두가 꿈꾸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국가에 해당하는 논의에서 나온 올바름이 이상적인 국가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적인 올바름이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개인적인 철학에 대한 무지, 두려움, 거리감 때문에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하다.
플라톤의 저서 국가는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과 올바른 것이 행복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대답을 담고 있다. 이에 도달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즉 개인의 의견과 이성적인 판단을 제대로 파악해야하는 논의의 연속이었다. 올바름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했더니 그것이 의미가 아닌 올바름의 속성이었음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이해한 것에 따르면, 국가에서는 인간의 올바름, 올바른 생활, 올바른 행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 더 큰 범위인 국가의 올바름, 올바른 정치와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인간의 차원에 대해서 논의하며 두 올바름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올바른 정체를 가진 국가를 상정하고,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인 체육과 시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국가를 이루는 세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은 각 성향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받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이야기 하며, 이런 올바른 나라에 대한 논의를 개인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읽은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목표하고자 하는, 즉 논의의 시작점은 인간 차원에서의 올바름, 정의이다. 하지만, 책 제목에서부터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국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약 플라톤의 국가(政體)의 제목만 본 사람들은 플라톤이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지,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이상적인 국가관을 제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책을 읽을 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올바름, 올바른 생활, 올바른 행동에 대해 알기 위해서 더 큰 범위인 국가의 올바름, 올바른 정치와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인간의 차원에 대해서 논의하며 두 올바름의 유사성을 파악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방향이긴 하지만, 과연 이런 방향으로 올바름이라는 주제를 다뤄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결국 국가와 인간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국가와 인간이 비슷한 올바름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국가의 올바른 정체와 인간의 올바른 혼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결국에는 둘이 비슷하여 논의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정체와 그 정체 속에 있는 사람들의 성향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렇다면, 같은 정체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향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플라톤이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성향도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파악했다. 즉, 플라톤이 바라본 사람의 성향은 ‘세 가지 틀 안에서 조금씩 다르다’라고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 현실을 보았을 때, 그렇게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플라톤의 국가에서 항상 이성, 올바름, 이상에 대해서 강조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보통의 철학책이 다 그러하지만). 이상이란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가 상정한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에 따라서라면 옳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 부유한 삶을 살고, 행복해 보이는, 모두가 꿈꾸는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상적인 국가에 해당하는 논의에서 나온 올바름이 이상적인 국가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적인 올바름이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개인적인 철학에 대한 무지, 두려움, 거리감 때문에 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하다.
김민정2021-01-20 15:57
1기 김*현
추상적으로 쓰여진 글들은 그 해석의 자유도가 높아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상적 상황을 가정한 논의의 결과가 현실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왜곡이나 한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의도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논의 결과의 적용의 대상이 되는 현실의 세계는 시간이 지나며 끊임없이 바뀌지만 이상적 상황의 추상적 논의와 그 주제가 되는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추상적으로 쓰여진 글들은 그 해석의 자유도가 높아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상적 상황을 가정한 논의의 결과가 현실에 적용될 때 나타나는 왜곡이나 한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이 의도 된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논의 결과의 적용의 대상이 되는 현실의 세계는 시간이 지나며 끊임없이 바뀌지만 이상적 상황의 추상적 논의와 그 주제가 되는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5:58
1기 권*수
플라톤의 [국가]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많은 규정, 법률 등에 영향을 미친 플라톤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는 책이다. 본문은 소크라테스와 여러 대화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인물을 통해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글의 초반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존재했던 여러 정의관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도록 한다. 이때 특히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과 ‘글라우콘’의 정의관은 사실 굉장히 현실적인 측면을 꼬집어 낸다.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글라우콘’은 정의란 약자들이 손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지키기로 합의한 계약을 따르는 것이라 보았다. 즉, 트라시마코스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그리고 글라우콘은 약자들의 현실을 반영한 당대의 정의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이들의 주장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논박하며 그들의 정의관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이 논의가 전개되는 동안 플라톤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채 뒤이은 논쟁으로 넘어간다.
플라톤은 상대적으로 큰 단위인 ‘국가’를 대상으로 ‘올바름’을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유추해낸 특성을 개인과 연결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정의’가 무엇인지 도출해내고자 하였다. 우선 국가는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제공해주어야 하며, 최소한의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의식주의 충족으로는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부를 추구하게 된다. 늘어난 경제적 부를 지키고, 국가의 성장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자 계급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 중 특히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게 될 소수의 통치자 계급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여야 한다는 철인통치에 대한 옹호가 등장한다. 또한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은 용기를 지닌 자여야 하며, 마지막으로 피통치자들은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절제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수호자들이 부정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기제로써 엄격한 교육과 규범을 제시한다.
정리하자면, 훌륭한 국가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존재해야 하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 플라톤이 생각한 ‘올바름’, 즉 정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라는 대상을 통해 정의한 ‘올바름’의 특성을 인간 개체에 적용하여 플라톤은 ‘개개인의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구를 지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가지고 있던 인간관을 엿볼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인간을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이성’을 통한 절제가 필요하다는 논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는 국가 단위에서의 올바름을 고려하여 이를 개인으로 적용해보는 과정을 통해 도출해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올바름의 특성들이 “그대로”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플라톤은 크게 3개의 계층을 구분하여 이들의 지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정의로움’이란 각 계급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층이라는 것은 본성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점을 수립하는 데에 바탕이 된 ‘훌륭한 국가’에 대한 논지를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많은 규정, 법률 등에 영향을 미친 플라톤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는 책이다. 본문은 소크라테스와 여러 대화자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인물을 통해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글의 초반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존재했던 여러 정의관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개진하도록 한다. 이때 특히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과 ‘글라우콘’의 정의관은 사실 굉장히 현실적인 측면을 꼬집어 낸다. 트라시마코스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글라우콘’은 정의란 약자들이 손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지키기로 합의한 계약을 따르는 것이라 보았다. 즉, 트라시마코스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그리고 글라우콘은 약자들의 현실을 반영한 당대의 정의관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이들의 주장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논박하며 그들의 정의관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이 논의가 전개되는 동안 플라톤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는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채 뒤이은 논쟁으로 넘어간다.
플라톤은 상대적으로 큰 단위인 ‘국가’를 대상으로 ‘올바름’을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유추해낸 특성을 개인과 연결시킴으로써 보편적인 ‘정의’가 무엇인지 도출해내고자 하였다. 우선 국가는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제공해주어야 하며, 최소한의 분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의식주의 충족으로는 인간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부를 추구하게 된다. 늘어난 경제적 부를 지키고, 국가의 성장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자 계급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 중 특히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게 될 소수의 통치자 계급은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여야 한다는 철인통치에 대한 옹호가 등장한다. 또한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은 용기를 지닌 자여야 하며, 마지막으로 피통치자들은 이러한 통치 구조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절제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수호자들이 부정의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기제로써 엄격한 교육과 규범을 제시한다.
정리하자면, 훌륭한 국가에는 지혜, 용기, 절제의 덕이 존재해야 하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 플라톤이 생각한 ‘올바름’, 즉 정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라는 대상을 통해 정의한 ‘올바름’의 특성을 인간 개체에 적용하여 플라톤은 ‘개개인의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구를 지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가지고 있던 인간관을 엿볼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인간을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이성’을 통한 절제가 필요하다는 논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는 국가 단위에서의 올바름을 고려하여 이를 개인으로 적용해보는 과정을 통해 도출해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국가의 관점에서 바라본 올바름의 특성들이 “그대로”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에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플라톤은 크게 3개의 계층을 구분하여 이들의 지위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정의로움’이란 각 계급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계층이라는 것은 본성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점을 수립하는 데에 바탕이 된 ‘훌륭한 국가’에 대한 논지를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5:58
1기 박*민
1권의 소크라테스와 노옹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예시로 든 의술이나 조타술의 경우, 그러한 기술의 혜택은 결국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닌 기술의 효과를 받는 환자나 선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치술 또한 마찬가지로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은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에 나는 동의하였다. 사실상 치술이라는 것도 한 나라를 번영하도록 만드는 목표를 가진다는 점에서 항해를 떠나는 데에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조타술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전술이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적군이 아닌,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한 점에서 피지배층에게 나라의 지배층은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치술은 국가를 위해서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에서 그러한 ‘올바른’ 치술을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배층에게는 이득이 되어 호의호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전이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사회를 꿰뚫는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여러 사회적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그러한 도덕적 태도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지배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세 종류의 구성원, 즉 통치자에 해당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위해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이야기했다. 그러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여기에서는 아쉽지만 논외로 접어두고 기회가 생긴다면 논의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법보다도 우선하는 도덕적 양심이 이러한 인재 양성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자질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러한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대해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단지,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하는 ‘잘 살고 있다’라는 말이,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살고 있다’, ‘훌륭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훌륭하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제는 긴 시간이 지난 현대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도보다도 더 낮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자신이 속한 나라, 한 사회,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맡은 지배층을 신뢰할 수 없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과연 행복하다고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이어서 4장에서는 아데이만토스가, 나라의 수호자로서 선발된 사람들이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일반 시민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나라에 속한 시민들 전체의 최대 행복이 충족되리라는 기대 때문에 그러한 생활에 임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번에도 소크라테스의 답변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은 결코 그러한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개인 생활까지 침범당하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보람을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 대목을 읽으며 서유럽 국가의,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 방식이 떠올랐다. 각자 개인 직업을 갖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시민을 위해 무보수로 정치 활동에 임하는, 즉 순수한 봉사정신을 갖고 정치에 임하는 방식이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정말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1권의 소크라테스와 노옹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예시로 든 의술이나 조타술의 경우, 그러한 기술의 혜택은 결국 기술을 가진 사람이 아닌 기술의 효과를 받는 환자나 선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치술 또한 마찬가지로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은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점에 나는 동의하였다. 사실상 치술이라는 것도 한 나라를 번영하도록 만드는 목표를 가진다는 점에서 항해를 떠나는 데에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조타술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전술이 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적군이 아닌,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한 점에서 피지배층에게 나라의 지배층은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치술은 국가를 위해서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에서 그러한 ‘올바른’ 치술을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배층에게는 이득이 되어 호의호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고전이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사회를 꿰뚫는 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여러 사회적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그러한 도덕적 태도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지배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세 종류의 구성원, 즉 통치자에 해당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를 위해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이야기했다. 그러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여기에서는 아쉽지만 논외로 접어두고 기회가 생긴다면 논의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법보다도 우선하는 도덕적 양심이 이러한 인재 양성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자질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러한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대해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단지, 트라시마코스가 이야기하는 ‘잘 살고 있다’라는 말이,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살고 있다’, ‘훌륭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훌륭하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제는 긴 시간이 지난 현대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가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도보다도 더 낮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자신이 속한 나라, 한 사회,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맡은 지배층을 신뢰할 수 없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과연 행복하다고 우리는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이어서 4장에서는 아데이만토스가, 나라의 수호자로서 선발된 사람들이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일반 시민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나라에 속한 시민들 전체의 최대 행복이 충족되리라는 기대 때문에 그러한 생활에 임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번에도 소크라테스의 답변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은 결코 그러한 생활을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개인 생활까지 침범당하면서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보람을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 대목을 읽으며 서유럽 국가의,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 방식이 떠올랐다. 각자 개인 직업을 갖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시민을 위해 무보수로 정치 활동에 임하는, 즉 순수한 봉사정신을 갖고 정치에 임하는 방식이다. 물론, 당연하겠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정말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김민정2021-01-20 15:59
1기 박*슬
수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를 남깁니다.
(1) 소크라테스(플라톤)는 올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잘', '훌륭하게', 나아가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민 씨의 말처럼 그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드는 근거들이 과연 트라시마코스의 의문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올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이 그 나름대로 '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플라톤이 산파술을 통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사람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내가 관찰한 사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그가 말하는 이상 국가가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계의 인간이 모두 이상적 인간은 아니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2) 양심이 중요한 자질이라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나 하나 쯤이야'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은 큰 사회 문제를 낳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나라를 이끄는 역할을 맡을 지배층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뽑을 수 있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교육을 통해 양심있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도 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사회에서 그러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망의 틈을 좁혀, 누가봐도 '꼼수'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공정하고 투명하게 알리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시민이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주관을 확립하여 분별있는 사고를 하고, 이에 따라 정치인과 언론인을 자발적으로 감시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위해 주어진 자료를 통해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논술', '논리학' 등의 과목을 중고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를 남깁니다.
(1) 소크라테스(플라톤)는 올바르게 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잘', '훌륭하게', 나아가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민 씨의 말처럼 그가 이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드는 근거들이 과연 트라시마코스의 의문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올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이 그 나름대로 '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플라톤이 산파술을 통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사람을 목격한다면 우리는 이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내가 관찰한 사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그가 말하는 이상 국가가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 세계의 인간이 모두 이상적 인간은 아니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2) 양심이 중요한 자질이라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나 하나 쯤이야'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은 큰 사회 문제를 낳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민주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를 채택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해야 나라를 이끄는 역할을 맡을 지배층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뽑을 수 있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교육을 통해 양심있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정말로 양심적인 사람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도 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사회에서 그러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망의 틈을 좁혀, 누가봐도 '꼼수'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지 못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공정하고 투명하게 알리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시민이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주관을 확립하여 분별있는 사고를 하고, 이에 따라 정치인과 언론인을 자발적으로 감시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위해 주어진 자료를 통해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논술', '논리학' 등의 과목을 중고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민정2021-01-20 15:59
1기 이*일
*민님의 주장에서 동의되는 부분이 있고 논의할 만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간단히 코멘트를 남김니다!
'올바른 치술'이 모든 그 정치술의 적용 대상이 되는 사람(책에서는 피지배층)의 이득을 위한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가 됩니다. 또한 플라톤은 이러한 치술을 펼치는 통치자(수호자)들을 위한 교육을 시가, 체육을 통해서 통치자들이 가져야할 자질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통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올바름을 키울 수 있는 교육에 대해서 정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이 시가와 체육 교육을 수호자들의 교육에 필요다고 넣은 것은 혼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혼의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면(아마 이성을 추구하는 혼으로 생각됩니다)을 더욱 발전시킴으로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분간해내는 민감성과 이성을 얻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생각이 됩니다. 올바름이라는 추구할만한 가치가 왜 추구할만한지, 그러한 것을 추구할 때 그 이유가 남들에게 이득이 되고 결국 자신에게까지 이득이 될 수 있음(자신에게까지 이득이 돌아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 생각이 됩니다. 좀 넓은 범위에서 교육의 효용성에 대한 당연한 얘기를 한 것 같지만, 올바름(or 올바른 정치)이라는 것을 배우고 알아가기 위해서 도덕적 양심을 기르는 데 있어서 다른 분께서 논리학을 추천해주신 것에 이어서 역사를 통해서도 그러한 가치를 배워가고 추출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건에 일어난 사실만을 외우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배울 수 있다기 보다는, 여러 정치와 나라의 여러 체제들과 상호 간의 갈등 속에서 모두(범위를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또는 자신의 의사결정의 영향력의 범위까지를 고려해서)에게 이득을 구하지 못했던 사건들의 문제점이나 원인을 보고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함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님의 주장에서 동의되는 부분이 있고 논의할 만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간단히 코멘트를 남김니다!
'올바른 치술'이 모든 그 정치술의 적용 대상이 되는 사람(책에서는 피지배층)의 이득을 위한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가 됩니다. 또한 플라톤은 이러한 치술을 펼치는 통치자(수호자)들을 위한 교육을 시가, 체육을 통해서 통치자들이 가져야할 자질을 더욱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통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올바름을 키울 수 있는 교육에 대해서 정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이 시가와 체육 교육을 수호자들의 교육에 필요다고 넣은 것은 혼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혼의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면(아마 이성을 추구하는 혼으로 생각됩니다)을 더욱 발전시킴으로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을 분간해내는 민감성과 이성을 얻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생각이 됩니다. 올바름이라는 추구할만한 가치가 왜 추구할만한지, 그러한 것을 추구할 때 그 이유가 남들에게 이득이 되고 결국 자신에게까지 이득이 될 수 있음(자신에게까지 이득이 돌아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 생각이 됩니다. 좀 넓은 범위에서 교육의 효용성에 대한 당연한 얘기를 한 것 같지만, 올바름(or 올바른 정치)이라는 것을 배우고 알아가기 위해서 도덕적 양심을 기르는 데 있어서 다른 분께서 논리학을 추천해주신 것에 이어서 역사를 통해서도 그러한 가치를 배워가고 추출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건에 일어난 사실만을 외우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배울 수 있다기 보다는, 여러 정치와 나라의 여러 체제들과 상호 간의 갈등 속에서 모두(범위를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또는 자신의 의사결정의 영향력의 범위까지를 고려해서)에게 이득을 구하지 못했던 사건들의 문제점이나 원인을 보고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함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00
1기 이*빈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결국 올바름이 무엇인지와,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장에 관한 논의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를 위해 인간의 올바름을 국가의 올바름을 통해 설명한다.
플라톤에게 ‘올바른 국가’란, 각각의 계층이 ‘제 할 일을 하는 것(: oikeiopragia)’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계급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때 통치자는 이성을, 수호자는 기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목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개인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개인은 이같은 종류의 것을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판단’한다(4권 435b, 291p).
다시 말해, 국가에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가 각기 맡은 역할을 할 때 올바른 국가가 되듯이 개인도 이성, 기개, 절제를 가지고 이성이 기개와 절제를 통제해야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에는 인간이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인간이 모두 이성, 기개, 절제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함의되어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주장에는 제시할 수 있는 의문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먼저는 트리시마코스와의 대화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듯, 이익이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것이 결국엔 이익이 되는 것임을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반례는 우리 삶에서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기에 결국 ‘올바른 것’이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올바른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행복과 올바름보다는 행복과 이익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익이 되는 것이 결국 올바른 것인지, 혹은 올바른 것은 그 자체로서 행복을 주는 것으로, 이익과는 분리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올바른 국가의 원리로 올바른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로운 국가가 올바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간 또한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롭게 작용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도 드러나듯 인간은 3가지 요소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개인이 역할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교육을 받아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서 하나의 잘 작동하는 올바른 국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관 속에서 하나의 국가란 여러 인간의 속성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올바른 국가’의 속성이 인간의 내면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인간의 내면에 3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에서 3가지 요소가 ‘각기 제 일을 할 때’ 인간이 올바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를 통해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의 논의를 통해 ‘올바름이 무엇인지 찾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결국 올바름이 무엇인지와,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장에 관한 논의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를 위해 인간의 올바름을 국가의 올바름을 통해 설명한다.
플라톤에게 ‘올바른 국가’란, 각각의 계층이 ‘제 할 일을 하는 것(: oikeiopragia)’이다.
즉,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 계급이 자신의 역할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때 통치자는 이성을, 수호자는 기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목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개인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개인은 이같은 종류의 것을 혼 안에 지니고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의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로 인해서 나라의 경우와 똑같은 이름들로 불릴 자격이 당연히 있다고 판단’한다(4권 435b, 291p).
다시 말해, 국가에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가 각기 맡은 역할을 할 때 올바른 국가가 되듯이 개인도 이성, 기개, 절제를 가지고 이성이 기개와 절제를 통제해야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에는 인간이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인간이 모두 이성, 기개, 절제를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함의되어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주장에는 제시할 수 있는 의문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먼저는 트리시마코스와의 대화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듯, 이익이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올바른 것이 결국엔 이익이 되는 것임을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반례는 우리 삶에서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기에 결국 ‘올바른 것’이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올바른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냐는 의문을 갖게 한다. 행복과 올바름보다는 행복과 이익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익이 되는 것이 결국 올바른 것인지, 혹은 올바른 것은 그 자체로서 행복을 주는 것으로, 이익과는 분리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올바른 국가의 원리로 올바른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로운 국가가 올바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간 또한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롭게 작용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도 드러나듯 인간은 3가지 요소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는 개인이 역할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교육을 받아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서 하나의 잘 작동하는 올바른 국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관 속에서 하나의 국가란 여러 인간의 속성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올바른 국가’의 속성이 인간의 내면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인간의 내면에 3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에서 3가지 요소가 ‘각기 제 일을 할 때’ 인간이 올바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가를 통해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의 논의를 통해 ‘올바름이 무엇인지 찾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야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김민정2021-01-20 16:00
1기 권*수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에 제기하신 의문점들에 공감되는 바가 있어 코멘트를 남깁니다. 특히 과연 '올바른 것'이 항상 '이익이 되는 것'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주신 점에서 공감이 됩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가 생각한 상당히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표방하고 있고, 이것이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정의로움'을 상정하는 데에도 적용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특히 당대의 시대상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플라톤의 주장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분명 영빈님께서 제기해주신 의문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에 제기하신 의문점들에 공감되는 바가 있어 코멘트를 남깁니다. 특히 과연 '올바른 것'이 항상 '이익이 되는 것'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해주신 점에서 공감이 됩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가 생각한 상당히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표방하고 있고, 이것이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정의로움'을 상정하는 데에도 적용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특히 당대의 시대상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플라톤의 주장만 놓고 보았을 때에는 분명 영빈님께서 제기해주신 의문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01
1기 이*현
*빈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국가관에서 인간은 셋 중 하나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에서 3가지 요소가 각기 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해주신 부분이 특히 인상깊었습니다! 인간의 내면과 국가의 정의관에 대해 더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빈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국가관에서 인간은 셋 중 하나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에서 3가지 요소가 각기 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해주신 부분이 특히 인상깊었습니다! 인간의 내면과 국가의 정의관에 대해 더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01
1기 김*범
먼저, 라이프 아카데미 봄학기 첫 수업에서는 <다윈 지능>을 함께 읽으며 진화론 관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는데, 가을학기 첫 수업에서는 <국가>를 읽으며 근대 생물학이 생겨나기 한참 이전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어 느낌이 새로웠다.
논의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있어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어려우니 더 큰 대상인 국가의 경우를 탐구하자’는 주장(368e)이 가장 흥미로웠다. 국가 또는 사회를 인간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특성을 빌어 국가나 사회에서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여럿 보아왔지만 <국가>에서의 논의는 그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 덕분에 올바름 그 자체가 아닌 그 특성에 대해 따분하게 이어지던 논의가 끝나고, 그 이후의 논의는 당연하게 이어졌다. 마치 수학에서 명쾌한 건설적 증명을 보는 느낌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은 먼저 올바른 최소 국가를 건설한 뒤, 이 국가가 올바르게 될 수 있는 것은 세 계층이 각자의 할 일을 조화롭게 하고 있기 때문임을 밝혔다. 그리고 결국 국가가 가지는 특성은 개개인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논의를 통해 찾아낸 올바른 국가상이 올바른 인간상을 정의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올바름이란 인간의 혼을 구성하는 세 가지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조화롭게 수행하는 상태라고 정의하였다.
위와 같은 <국가>의 논의 전개 과정을 읽으며 나는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의문이 들었다. 논의를 통해 건설한 올바른 최소 국가가 올바르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기능 측면에서 수호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그 외의 시민 정도로 나누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올바른 국가상으로부터 올바른 인간상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가지는 특성이 반드시 구성원에게서 유래한 것일수밖에 없다는 주장(435e)에 동의할 수 없었다.
먼저, 국가를 이루는 사람들을 통치자, 군인, 그리고 그 외의 시민들로 나눌 때, 마지막 부류의 할 일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키잡이와 조타술, 의사와 의술의 경우는 논의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졌지만,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각자 할 일이 잘 정의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할 일은 변화할 수 있다. 어느 날 지중해가 말라 헬라스 사람들은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헬라스의 노련한 키잡이는 무엇을 해야 올바른가? 그가 올바른 키잡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타술을 통해 선원들을 이롭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더 이상 키잡이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생동안 익혀온 키잡이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면 능숙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올바르지 못하다.
또한, 국가가 가지는 특성이 반드시 구성원에게서 유래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은 마치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인 신에게서 유래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고 논증한 것과 같이 약한 주장으로 보였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 인간들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점으로 강조했다. 국가 또한 실존하지 않으며, 회사와 같이 인간들이 공동으로 상상해 낸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상 속 존재가 가지는 특성은 구성원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상상하기 위해 그러한 특성을 직접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위와 같은 의문을 제시하면서 볼 때, 플라톤은 인간들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작은 규모의 시간을 논하면, 국가를 이루는 세 계층의 사람들을 분리하고 계층 간 이동을 엄격하게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변하지 않음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큰 규모의 시간을 논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관점이나 해야 할 일이 변화할 수 있음은 고려하지 않고 정체가 유지될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사람들이 세대를 거듭하더라도 변하지 않음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라이프 아카데미 봄학기 첫 수업에서는 <다윈 지능>을 함께 읽으며 진화론 관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는데, 가을학기 첫 수업에서는 <국가>를 읽으며 근대 생물학이 생겨나기 한참 이전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어 느낌이 새로웠다.
논의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있어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어려우니 더 큰 대상인 국가의 경우를 탐구하자’는 주장(368e)이 가장 흥미로웠다. 국가 또는 사회를 인간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특성을 빌어 국가나 사회에서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여럿 보아왔지만 <국가>에서의 논의는 그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 덕분에 올바름 그 자체가 아닌 그 특성에 대해 따분하게 이어지던 논의가 끝나고, 그 이후의 논의는 당연하게 이어졌다. 마치 수학에서 명쾌한 건설적 증명을 보는 느낌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은 먼저 올바른 최소 국가를 건설한 뒤, 이 국가가 올바르게 될 수 있는 것은 세 계층이 각자의 할 일을 조화롭게 하고 있기 때문임을 밝혔다. 그리고 결국 국가가 가지는 특성은 개개인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논의를 통해 찾아낸 올바른 국가상이 올바른 인간상을 정의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올바름이란 인간의 혼을 구성하는 세 가지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조화롭게 수행하는 상태라고 정의하였다.
위와 같은 <국가>의 논의 전개 과정을 읽으며 나는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의문이 들었다. 논의를 통해 건설한 올바른 최소 국가가 올바르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기능 측면에서 수호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그 외의 시민 정도로 나누는 것이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올바른 국가상으로부터 올바른 인간상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가지는 특성이 반드시 구성원에게서 유래한 것일수밖에 없다는 주장(435e)에 동의할 수 없었다.
먼저, 국가를 이루는 사람들을 통치자, 군인, 그리고 그 외의 시민들로 나눌 때, 마지막 부류의 할 일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키잡이와 조타술, 의사와 의술의 경우는 논의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졌지만,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각자 할 일이 잘 정의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할 일은 변화할 수 있다. 어느 날 지중해가 말라 헬라스 사람들은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헬라스의 노련한 키잡이는 무엇을 해야 올바른가? 그가 올바른 키잡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타술을 통해 선원들을 이롭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더 이상 키잡이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생동안 익혀온 키잡이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면 능숙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올바르지 못하다.
또한, 국가가 가지는 특성이 반드시 구성원에게서 유래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은 마치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창조주인 신에게서 유래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고 논증한 것과 같이 약한 주장으로 보였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 인간들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강점으로 강조했다. 국가 또한 실존하지 않으며, 회사와 같이 인간들이 공동으로 상상해 낸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상 속 존재가 가지는 특성은 구성원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상상하기 위해 그러한 특성을 직접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위와 같은 의문을 제시하면서 볼 때, 플라톤은 인간들이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작은 규모의 시간을 논하면, 국가를 이루는 세 계층의 사람들을 분리하고 계층 간 이동을 엄격하게 막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플라톤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변하지 않음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큰 규모의 시간을 논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관점이나 해야 할 일이 변화할 수 있음은 고려하지 않고 정체가 유지될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에, 플라톤은 사람들이 세대를 거듭하더라도 변하지 않음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민정2021-01-20 16:01
1기 송*우
플라톤의 인간관을 '사람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로 정리하신 것이 인상 깊습니다. 이는 유년기에 보인 자질을 가지고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나누어 평생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직분의 교환 역시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플라톤의 방식의 중요한 특성인 것 같습니다.
다만 당시의 철학자들 중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상범 님의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에 사람의 변화가능성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것이 사람의 변화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러한 가능성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철학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변하지 않는) '본성'이란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시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의 관점이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플라톤의 인간관보다는 당시 철학의 당연한 전제였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상상의 존재에 불과하므로 인간의 특성을 닮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상범 님의 관점인 사회명목론에서 국가는 개인들의 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개인들의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국가가 개인들과는 별개로 실재한다는 관점(사회실재론)을 취할 때, 국가는 개인들과 닮아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신과 달리 국가는 (명목이건 실재건)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논증과는 조금 다른 사례인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인간관을 '사람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로 정리하신 것이 인상 깊습니다. 이는 유년기에 보인 자질을 가지고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로 나누어 평생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하고, 직분의 교환 역시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플라톤의 방식의 중요한 특성인 것 같습니다.
다만 당시의 철학자들 중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합니다. 상범 님의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에 사람의 변화가능성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것이 사람의 변화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러한 가능성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철학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변하지 않는) '본성'이란 게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시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의 관점이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플라톤의 인간관보다는 당시 철학의 당연한 전제였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상상의 존재에 불과하므로 인간의 특성을 닮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상범 님의 관점인 사회명목론에서 국가는 개인들의 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개인들의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국가가 개인들과는 별개로 실재한다는 관점(사회실재론)을 취할 때, 국가는 개인들과 닮아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신과 달리 국가는 (명목이건 실재건)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논증과는 조금 다른 사례인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02
1기 장*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존에 읽었던 책에서 얻은 생각과 비교하면서 읽으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제시하신 의문에 공감합니다. 주로 통치자와 수호자의 올바름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키잡이를 예로 드신 것처럼 시민들에게 올바름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엄격한 과정을 통해 선발된 통치자와 수호자는 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마다 다양한 직업을 지닌 일반 시민의 경우는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훌륭한 기능을 발휘한다면 문제없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건지에 대한 논의가 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다만 1권에서 통치자도 사람이라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는듯합니다.
인간관에 대한 플라톤의 경우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 근거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사회에 만약 현존한다면 어떤 식으로 정의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존에 읽었던 책에서 얻은 생각과 비교하면서 읽으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제시하신 의문에 공감합니다. 주로 통치자와 수호자의 올바름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키잡이를 예로 드신 것처럼 시민들에게 올바름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엄격한 과정을 통해 선발된 통치자와 수호자는 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마다 다양한 직업을 지닌 일반 시민의 경우는 어떻게 적용될지 궁금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훌륭한 기능을 발휘한다면 문제없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건지에 대한 논의가 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다만 1권에서 통치자도 사람이라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는듯합니다.
인간관에 대한 플라톤의 경우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 근거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사회에 만약 현존한다면 어떤 식으로 정의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김민정2021-01-20 16:02
1기 박*원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동양 철학의 성악설과 성선설과 비교가 됐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 그리고 그와 플라톤의 형들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즉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자신에게 가장 편익이 되는 행동이고, 올바른 행동은 더 강한자의 편익이라는 주장은 저에게는 동양의 법가나 유가의 사상중 핵심이 되는 한 마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가나 유가의 사상이 전국시대에 생겨나 군주들을 위한 통치사상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선설, 즉 사람은 태생부터 올바르니 자신의 본성에 맞추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는 말 뒤에는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이 사회에 혼란을 가져다 줌으로 통치자에게는 문제가 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자신의 본분을 알고 행동해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악설은 그 반대로, 모든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올바름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부수적인 이득 즉 사회적 평판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바른 길을 택한다는 글라우콘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이론 다사람의 양면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죠. 그런 사람의 양면성을 국가 1권에서는 고려를 해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올바른 자와 올바르지 못한 자로. 그럼 과연 소크라테스가 얘기한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못되고 무지하고 분별력이 없고 모든 것을 남보다 능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즉 유가에서 얘기하는 소인들과 같습니다.그에 반해 올바른 자들은 그 정반대인 군자와 비슷한 행동양식을 띄고 있습니다. 분별력있고 겸손하고 남이 능한 곳에서 절대로 남을 능가하려 하지 않는 행동양식입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글라우콘이 이야기 했던 가장 올바른 사람과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중국에는 진짜 소인 보다는 가짜 군자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라우콘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올바르게 보이게 하며 그런 이미지로 인한 모든 편익을 취하는 사람을 가장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가장 많은 이익을 쟁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가짜)군자라는 사람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즉 동서양은 시작부터 달랐지만, 사회에서 누가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결론이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동양 철학의 성악설과 성선설과 비교가 됐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 그리고 그와 플라톤의 형들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즉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자신에게 가장 편익이 되는 행동이고, 올바른 행동은 더 강한자의 편익이라는 주장은 저에게는 동양의 법가나 유가의 사상중 핵심이 되는 한 마디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가나 유가의 사상이 전국시대에 생겨나 군주들을 위한 통치사상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선설, 즉 사람은 태생부터 올바르니 자신의 본성에 맞추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는 말 뒤에는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이 사회에 혼란을 가져다 줌으로 통치자에게는 문제가 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자신의 본분을 알고 행동해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악설은 그 반대로, 모든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로부터 오는 악한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올바름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부수적인 이득 즉 사회적 평판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올바른 길을 택한다는 글라우콘의 주장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이론 다사람의 양면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죠. 그런 사람의 양면성을 국가 1권에서는 고려를 해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올바른 자와 올바르지 못한 자로. 그럼 과연 소크라테스가 얘기한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못되고 무지하고 분별력이 없고 모든 것을 남보다 능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즉 유가에서 얘기하는 소인들과 같습니다.그에 반해 올바른 자들은 그 정반대인 군자와 비슷한 행동양식을 띄고 있습니다. 분별력있고 겸손하고 남이 능한 곳에서 절대로 남을 능가하려 하지 않는 행동양식입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글라우콘이 이야기 했던 가장 올바른 사람과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중국에는 진짜 소인 보다는 가짜 군자를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글라우콘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올바르게 보이게 하며 그런 이미지로 인한 모든 편익을 취하는 사람을 가장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가장 많은 이익을 쟁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가짜)군자라는 사람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즉 동서양은 시작부터 달랐지만, 사회에서 누가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결론이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김민정2021-01-20 16:02
1기 송*재
박*원 학우님의 글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도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에서 어쩌면 성악설과 성선설에 대한 논쟁이 우선되어야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했었는데, 구체적인 사상가들을 통해 비교하신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올바른 사람들 또한 본성이 이타적이고 선해서 그렇다기보다 타고난 성향에 기르는 덕이 더해졌다는 것에서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쪽에 자신의 생각이 가깝다고 했을지 궁금했고, 수호자에 대한 대화에서 그들이 수많은 시험을 통과했음에도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박*원 학우님의 글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도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대화에서 어쩌면 성악설과 성선설에 대한 논쟁이 우선되어야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했었는데, 구체적인 사상가들을 통해 비교하신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올바른 사람들 또한 본성이 이타적이고 선해서 그렇다기보다 타고난 성향에 기르는 덕이 더해졌다는 것에서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쪽에 자신의 생각이 가깝다고 했을지 궁금했고, 수호자에 대한 대화에서 그들이 수많은 시험을 통과했음에도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09
1기 권*현
*원님의 의견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 즉 인간에 대한 논의에서 동양의 성악설, 성선설을 생각해서 동양과 서양이 비슷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아갈 수 있어서, 플라톤의 논의에서 참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들까지 나아가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동양의 성선설, 성악설이 전국시대의 상황에서 군주를 위한 이념과 함께 이해되는 것과 플라톤이 국가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원님의 의견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 즉 인간에 대한 논의에서 동양의 성악설, 성선설을 생각해서 동양과 서양이 비슷한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아갈 수 있어서, 플라톤의 논의에서 참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들까지 나아가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동양의 성선설, 성악설이 전국시대의 상황에서 군주를 위한 이념과 함께 이해되는 것과 플라톤이 국가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09
1기 남*범
근본적인 가정을 찔러주시는 것 같아 코멘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사람을 양분하는 것도 과연 올바른지 의심은 됩니다. 상황과 환경이 본성보다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 정의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동양과의 비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근본적인 가정을 찔러주시는 것 같아 코멘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사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사람을 양분하는 것도 과연 올바른지 의심은 됩니다. 상황과 환경이 본성보다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 정의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동양과의 비교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10
1기 박*정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올바름’에 대해 정의한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 등의 인물과 대화를 가지며 논의는 ‘올바름’의 정의에서 시작해, 각자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술과 교육 등의 소주제로 이어지다가 다시 ‘올바름’의 정의로 귀결된다. 여기서 그의 인간관에 대해 엿볼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인간(의 혼)은 이성.,기개, 욕구로 이루어지며, 각각이 제 일을 할 때 비로소 ‘올바르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했고 또 주목할 만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개인의 ‘올바름’에 대해 논하기 위해 그들의 집단인 국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 부분이었다.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큰 현상부터 따진 후 그것을 이루는 작은 부분들로 넘어가는 방식은 흔하면 흔했지, 분명 드문 방법론은 아니다. 그럼에도 해당 부분이 특히 인상 깊게 남은 이유는 아마 접근방식에 있어 완벽히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과연 국가의 특성이 그것을 이루는 모든 개개인의 특성을 전부 대변할 수 있을지부터 의심스러웠고, 더군다나 명쾌하게 구분되는 외적인 요소도 아니고 ‘올바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느껴졌다.
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나, 일상에서 ‘올바름’이라는 잣대는 국가라는 큰 단위보다는 한 명의 개인에게 더 자주 적용시키곤 했어서, 국가의 ‘올바름’을 논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이미 부적합하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비록 앞에서는 주장하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만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전반적으로는 인물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할 때마다 모두 맞는 말 같아 이리저리 휘둘리곤 했다. 이는 결국 어떠한 쪽도 완전히 틀린 의견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보다는 그에 반박하던 트리시마코스,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공감할 수 있는 바가 많아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특히 올바르지 않게 행동할 때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던 부분은 정말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기에 더더욱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정말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은 글라우콘이 올바름에 대하여-올바름의 실천과 마지못해 실천하는 올바름– 주장하던 부분이었다. 아주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언젠가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남을 도움으로써 얻는 성취감, 자기만족도 일종의 보상이고 여태 인지를 못했을 뿐 결국 나는 보상을 바라고 행동한 것이 아닌가?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이지 않은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어찌 되었건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으로 흐지부지 넘겨버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책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어 더더욱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이처럼 다른 인물들에 비해 이상적인 주장을 펼친 소크라테스에 비해, 트리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은 요즈음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들을 꼬집었기에 그들의 의견이 더 와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올바름’에 대해 정의한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 글라우콘 등의 인물과 대화를 가지며 논의는 ‘올바름’의 정의에서 시작해, 각자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술과 교육 등의 소주제로 이어지다가 다시 ‘올바름’의 정의로 귀결된다. 여기서 그의 인간관에 대해 엿볼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인간(의 혼)은 이성.,기개, 욕구로 이루어지며, 각각이 제 일을 할 때 비로소 ‘올바르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주목했고 또 주목할 만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개인의 ‘올바름’에 대해 논하기 위해 그들의 집단인 국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 부분이었다.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큰 현상부터 따진 후 그것을 이루는 작은 부분들로 넘어가는 방식은 흔하면 흔했지, 분명 드문 방법론은 아니다. 그럼에도 해당 부분이 특히 인상 깊게 남은 이유는 아마 접근방식에 있어 완벽히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과연 국가의 특성이 그것을 이루는 모든 개개인의 특성을 전부 대변할 수 있을지부터 의심스러웠고, 더군다나 명쾌하게 구분되는 외적인 요소도 아니고 ‘올바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느껴졌다.
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나, 일상에서 ‘올바름’이라는 잣대는 국가라는 큰 단위보다는 한 명의 개인에게 더 자주 적용시키곤 했어서, 국가의 ‘올바름’을 논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이미 부적합하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비록 앞에서는 주장하는 방식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만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전반적으로는 인물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할 때마다 모두 맞는 말 같아 이리저리 휘둘리곤 했다. 이는 결국 어떠한 쪽도 완전히 틀린 의견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보다는 그에 반박하던 트리시마코스,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공감할 수 있는 바가 많아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특히 올바르지 않게 행동할 때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던 부분은 정말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기에 더더욱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정말 공감이 많이 갔던 부분은 글라우콘이 올바름에 대하여-올바름의 실천과 마지못해 실천하는 올바름– 주장하던 부분이었다. 아주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언젠가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남을 도움으로써 얻는 성취감, 자기만족도 일종의 보상이고 여태 인지를 못했을 뿐 결국 나는 보상을 바라고 행동한 것이 아닌가?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한 행동이지 않은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어찌 되었건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으로 흐지부지 넘겨버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책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어 더더욱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이처럼 다른 인물들에 비해 이상적인 주장을 펼친 소크라테스에 비해, 트리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은 요즈음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들을 꼬집었기에 그들의 의견이 더 와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김민정2021-01-20 16:10
1기 권*수
*정님의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국가라는 아주 큰 단위를 전제로 하여 도출해낸 특성이 개인에게 정확히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제기해주신 의문점에 너무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특히 더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글의 뒷부분에서 언급해주신 내용인데, 저 역시 대화 속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주장들은 상당히 '이상적'이며, 오히려 트리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생각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논박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반영한 주장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견이라 여겨집니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여전히 '올바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관점에서 검토해보는 과정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님의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국가라는 아주 큰 단위를 전제로 하여 도출해낸 특성이 개인에게 정확히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제기해주신 의문점에 너무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특히 더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글의 뒷부분에서 언급해주신 내용인데, 저 역시 대화 속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주장들은 상당히 '이상적'이며, 오히려 트리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생각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논박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반영한 주장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견이라 여겨집니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여전히 '올바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관점에서 검토해보는 과정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10
1기 박*진
글 잘 읽었습니다! 올바름의 실천과 마지못해 실천하는 올바름에 대해 이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저도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실천하는 마음과 행동 모두가 올바를 때는 당연히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으나,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했으나 다른사람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일 경우,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행동했으나 결과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한 경우에 대해서는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봉사활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더라도 올바른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올바르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로 본인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올바름의 실천과 마지못해 실천하는 올바름에 대해 이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저도 무척 공감되었습니다. 실천하는 마음과 행동 모두가 올바를 때는 당연히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으나,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했으나 다른사람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행동일 경우,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행동했으나 결과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한 경우에 대해서는 그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봉사활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더라도 올바른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올바르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로 본인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민정2021-01-20 16:11
1기 이*일
*정 님의 코멘트 잘 봤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 외의 다른 인물들의 '올바름'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할 때, 올바름을 추구하는 그 자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음을 느끼기도 하며, 현실로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플라톤이 그들의 올바름의 정의들은 맞지 않거나 올바름의 정의에 부족하다는 점, 또 일부는 올바름의 특징으로 동의하는 과정에서 그가 올바르지 못한 것들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계속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가 인간을 3개의 혼의 특징을 국가 정치제치의 특징을 바로 가져온 것이 올바른 연결인가에 대한 생각이 저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올바름의 실천에 있어서 봉사활동에 대한 점도 많이 회자된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의 보상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봉사활동의 보상이며, 남에게 도움을 준 것도(실제로, 얼만큼 도움을 주었는가는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또 발전시켜야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봉사활동의 두 가지 측면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서 봉사활동이 서로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저도 이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 짧게나마 생각을 올려보고 싶어 써봅니다!)
*정 님의 코멘트 잘 봤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 외의 다른 인물들의 '올바름'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할 때, 올바름을 추구하는 그 자체라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가 문제점이 있음을 느끼기도 하며, 현실로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플라톤이 그들의 올바름의 정의들은 맞지 않거나 올바름의 정의에 부족하다는 점, 또 일부는 올바름의 특징으로 동의하는 과정에서 그가 올바르지 못한 것들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계속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가 인간을 3개의 혼의 특징을 국가 정치제치의 특징을 바로 가져온 것이 올바른 연결인가에 대한 생각이 저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올바름의 실천에 있어서 봉사활동에 대한 점도 많이 회자된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의 보상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봉사활동의 보상이며, 남에게 도움을 준 것도(실제로, 얼만큼 도움을 주었는가는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또 발전시켜야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봉사활동의 두 가지 측면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어서 봉사활동이 서로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생각을 해보니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저도 이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 짧게나마 생각을 올려보고 싶어 써봅니다!)
김민정2021-01-20 16:11
@김민정
1기 김*교
봉사활동에 대한 여러 학우분들의 의견이 흥미롭고 동의하는 부분 역시 많았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인데 봉사활동을 생각할 때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제 의견을 적어봅니다!
우리는 이득을 얻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이득을 통해 남이 해로움을 입을 땐 이를 한번 재고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사회의 절대 소수가 아니며 이를 올바르지 못하다고 규정하는 기준 역시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을 통해서도 누리는 만족감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이 헷갈리게 되는 데 저는 여기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1000의 여유가 있어서 이 중 1을 봉사활동에 선뜻 할애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아예 할애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1중에 1을 전부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영웅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성인, 성자, 위인 등으로 기록될 확률이 높겠죠.
봉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사회적인 이득, 임금의 상승 등은 실제로 봉사를 꾸준하게 이어가게 하는 데 좋은 요소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봉사를 통해 발생하는 개인적인 보람, 관계에서 느껴지는 행복/만족감이 봉사를 이어가게 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어떠한 '이득', '능력'을 유무에 따라 좋고 나쁘고로 나눈 방식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보다 세밀하게, 어느 부분에서 좋은 것인지, 올바른 것인 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다면 의미있는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제 생각을 조금 적어보았습니다. 또한, 실제로 봉사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임금이 상승하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임금이 상승한 사람이 봉사를 더 할 것 같다는 사회 통념과 원인-결과가 대치된 결과였지만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공유합니다.
봉사활동에 대한 여러 학우분들의 의견이 흥미롭고 동의하는 부분 역시 많았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인데 봉사활동을 생각할 때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제 의견을 적어봅니다!
우리는 이득을 얻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이득을 통해 남이 해로움을 입을 땐 이를 한번 재고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사회의 절대 소수가 아니며 이를 올바르지 못하다고 규정하는 기준 역시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을 통해서도 누리는 만족감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이 헷갈리게 되는 데 저는 여기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1000의 여유가 있어서 이 중 1을 봉사활동에 선뜻 할애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아예 할애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1중에 1을 전부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영웅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성인, 성자, 위인 등으로 기록될 확률이 높겠죠.
봉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사회적인 이득, 임금의 상승 등은 실제로 봉사를 꾸준하게 이어가게 하는 데 좋은 요소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봉사를 통해 발생하는 개인적인 보람, 관계에서 느껴지는 행복/만족감이 봉사를 이어가게 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어떠한 '이득', '능력'을 유무에 따라 좋고 나쁘고로 나눈 방식은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보다 세밀하게, 어느 부분에서 좋은 것인지, 올바른 것인 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눈다면 의미있는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이에 제 생각을 조금 적어보았습니다. 또한, 실제로 봉사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임금이 상승하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임금이 상승한 사람이 봉사를 더 할 것 같다는 사회 통념과 원인-결과가 대치된 결과였지만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공유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12
1기 조*준
올바름에 대한 소크라테스 선생과 당대 사람들의 대화를 보며 나 역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소크라테스 선생의 논의에서는, 작은 글씨로 씌어 있는 책을 읽기 위해 큰 글씨로 쓰인 책을 먼저 읽듯이, 개인에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기 위해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를 먼저 논한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올바름에 다가가는 방식은, 한 사람이 난 곳이 어딘지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없는 것처럼, 올바름을 알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우선 소크라테스 선생이 말한 것과 같은 국가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동방의 성북구의 전씨 성을 가진 사제와 그 추종자들은 그들이 북쪽에 나라를 넘길 붉은 자들이라 소리쳐 외칠 것이다.
또한 최소 집단과 부류에 의해, 그들의 지식에 의해 지혜로워지며(428e), 성향에 따라 수립된 나라, 시가들이 새로운 형식의 시가로 바뀌는 것을 나라 전반에 걸쳐 위험을 초래하는 것(424c)으로 받아들이고 황금의 방패를 통해 막는 나라로는 중국이 있는데, 과연 이 나라를 올바른 나라로 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머리 속의 생각하는 부분이 중국을 이끄는 시진핑을 닮은 사람이 과연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올바름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올바름이라고 받아들이는지 탐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대상이다. 맛있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보통 치킨을 맛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이 일주일간 매 끼니 치킨을 먹었다면 이는 역겨운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또 채식주의자에게 치킨은 역겨운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처럼 맛있음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주체가, 특성한 대상에게 부여하는 속성이다. 이와 같이 올바름이라는 것도,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게 올바른 대상이 존재할 뿐이며, 일반적으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올바름이란 가치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며, 올바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무가치한 것일까? 음식의 맛은 상대적이지만 설탕을 맛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처럼 모두가, 적어도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이는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가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설탕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게 신을 닮았기 때문이라거나 진화의 이치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넘어가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무엇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냐는 질문이 될 것이다. 우선 인간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올바른 것이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더라도 사탕 하나를 받고 처음 보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해 이외의 다른 가 작용한다. 이것은 다른 대상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공감 능력, 거울 뉴런, 사랑, 인(仁)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어떤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같은 고통이나 즐거움이 대상에게 가해져도 자신이 고통을 당한 것보다 더 크게 느낄 수도 있고, 대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이 대상은 사람, 동물, 심지어 무생물1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옳게 느낌과 옳지 않게 느낌을 종합하여 그 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판단한다. 이는 영혼이 (psukhḗ, “soul”) 고통받는 (páthos, “suffering”) 사람이 아닌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 하는 질문은 어떤 시점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행위의 결과가 불러일으키는 올바름이나 올바르지 못함의 총합이 올바르냐, 올바르지 못하냐 하는 질문이라고 할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의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는 말이나, 나사렛의 예수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76c
소크라테스 선생은 수호자와 혈통 좋은 개를 비교하며 개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친근한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 온순하려면 그는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배움을 좋아하는 이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가까운 과거에 발언자가 불분명한 군인은 집지키는 개라는 발언이 공분을 산 바가 있는데, 발언자는 사실 고전을 사랑하는 소크라테스의 후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437a-445d
인간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 식욕 등이 어느 것에 의한 욕망인지, 서로 분리될 수 있는지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고,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마실 것에 대한 욕구, 식욕을 담당하는 신경세포는 서로 다르고, 식욕 내에서도 배고픔에 의한 불쾌함을 담당하는 세포와 식사에 의한 즐거움을 담당하는 부분은 서로 다르다. 또한 배고픔에 의한 불쾌함은 만성적 고통에 의한 불쾌함을 억제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선생은 인간의 혼(신경계!)을 격정적인 부분, 헤아리는 부분, 욕구적인 부분으로 나누었지만 실상 격정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을 완전히 분리해 내기는 힘들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5&sid2=230&oid=030&aid=0002338771&viewType=pc
올바름에 대한 소크라테스 선생과 당대 사람들의 대화를 보며 나 역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소크라테스 선생의 논의에서는, 작은 글씨로 씌어 있는 책을 읽기 위해 큰 글씨로 쓰인 책을 먼저 읽듯이, 개인에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기 위해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를 먼저 논한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올바름에 다가가는 방식은, 한 사람이 난 곳이 어딘지를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없는 것처럼, 올바름을 알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우선 소크라테스 선생이 말한 것과 같은 국가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동방의 성북구의 전씨 성을 가진 사제와 그 추종자들은 그들이 북쪽에 나라를 넘길 붉은 자들이라 소리쳐 외칠 것이다.
또한 최소 집단과 부류에 의해, 그들의 지식에 의해 지혜로워지며(428e), 성향에 따라 수립된 나라, 시가들이 새로운 형식의 시가로 바뀌는 것을 나라 전반에 걸쳐 위험을 초래하는 것(424c)으로 받아들이고 황금의 방패를 통해 막는 나라로는 중국이 있는데, 과연 이 나라를 올바른 나라로 볼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머리 속의 생각하는 부분이 중국을 이끄는 시진핑을 닮은 사람이 과연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나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올바름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올바름이라고 받아들이는지 탐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올바른 것은 올바른 것이라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대상이다. 맛있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보통 치킨을 맛있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이 일주일간 매 끼니 치킨을 먹었다면 이는 역겨운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또 채식주의자에게 치킨은 역겨운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처럼 맛있음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주체가, 특성한 대상에게 부여하는 속성이다. 이와 같이 올바름이라는 것도,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게 올바른 대상이 존재할 뿐이며, 일반적으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시점에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올바름이란 가치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며, 올바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무가치한 것일까? 음식의 맛은 상대적이지만 설탕을 맛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처럼 모두가, 적어도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올바르다고 받아들이는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가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설탕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게 신을 닮았기 때문이라거나 진화의 이치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넘어가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무엇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냐는 질문이 될 것이다. 우선 인간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올바른 것이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더라도 사탕 하나를 받고 처음 보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해 이외의 다른 가 작용한다. 이것은 다른 대상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공감 능력, 거울 뉴런, 사랑, 인(仁)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어떤 대상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같은 고통이나 즐거움이 대상에게 가해져도 자신이 고통을 당한 것보다 더 크게 느낄 수도 있고, 대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또한 이 대상은 사람, 동물, 심지어 무생물1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옳게 느낌과 옳지 않게 느낌을 종합하여 그 것이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 판단한다. 이는 영혼이 (psukhḗ, “soul”) 고통받는 (páthos, “suffering”) 사람이 아닌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올바른가 하는 질문은 어떤 시점에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행위의 결과가 불러일으키는 올바름이나 올바르지 못함의 총합이 올바르냐, 올바르지 못하냐 하는 질문이라고 할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의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는 말이나, 나사렛의 예수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는 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76c
소크라테스 선생은 수호자와 혈통 좋은 개를 비교하며 개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친근한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 온순하려면 그는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 배움을 좋아하는 이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가까운 과거에 발언자가 불분명한 군인은 집지키는 개라는 발언이 공분을 산 바가 있는데, 발언자는 사실 고전을 사랑하는 소크라테스의 후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437a-445d
인간의 마실 것에 대한 욕구, 식욕 등이 어느 것에 의한 욕망인지, 서로 분리될 수 있는지는 신경과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고,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마실 것에 대한 욕구, 식욕을 담당하는 신경세포는 서로 다르고, 식욕 내에서도 배고픔에 의한 불쾌함을 담당하는 세포와 식사에 의한 즐거움을 담당하는 부분은 서로 다르다. 또한 배고픔에 의한 불쾌함은 만성적 고통에 의한 불쾌함을 억제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선생은 인간의 혼(신경계!)을 격정적인 부분, 헤아리는 부분, 욕구적인 부분으로 나누었지만 실상 격정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을 완전히 분리해 내기는 힘들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5&sid2=230&oid=030&aid=0002338771&viewType=pc
김민정2021-01-20 16:13
1기 송*우
올바름이 꼭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준 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도덕, 인권 등의 정의는 문화마다, 시대마다 달라 왔으니까요. 그런데 보통은 '올바름' 하면 선함, 효성이 깊음, 겸손함...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형준 님은 올바름의 예시로 맛있음, 즐거움, 고통 등을 드셨는데요. 그래서 혹시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인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대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라고 하신 걸로 보아 '즐거움=옳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더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올바름의 정의가 문화/시대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같은 문화 속의 개개인마다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름=도덕'이라고 할 때 도덕이란 사회가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인데, 개인마다 다른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이 문화적으로 학습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올바름이 꼭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준 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도덕, 인권 등의 정의는 문화마다, 시대마다 달라 왔으니까요. 그런데 보통은 '올바름' 하면 선함, 효성이 깊음, 겸손함...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형준 님은 올바름의 예시로 맛있음, 즐거움, 고통 등을 드셨는데요. 그래서 혹시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인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대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라고 하신 걸로 보아 '즐거움=옳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쾌락주의의 관점에서 책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더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올바름의 정의가 문화/시대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같은 문화 속의 개개인마다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름=도덕'이라고 할 때 도덕이란 사회가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인데, 개인마다 다른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이 문화적으로 학습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김민정2021-01-20 16:13
1기 김찬교
저 역시 올바름이란 절대적인 완전한 가치가 아니라는 *준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코로나 시대의 조기 종식을 선언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한 국가의 올바름만을 위해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올바름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 정세엔 힘의 논리가 만연합니다. 강대한 국가가 되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본성이자 욕망이며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대한 국가 건설이 올바름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대한 국가가 되고 난 뒤, 이를 뒤따라올 다른 국가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절제, 지혜 등) 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올바른 국가의 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학우분들의 의견이 궁금하여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올바름이란 절대적인 완전한 가치가 아니라는 *준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코로나 시대의 조기 종식을 선언한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한 국가의 올바름만을 위해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올바름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제 정세엔 힘의 논리가 만연합니다. 강대한 국가가 되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본성이자 욕망이며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대한 국가 건설이 올바름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대한 국가가 되고 난 뒤, 이를 뒤따라올 다른 국가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절제, 지혜 등) 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올바른 국가의 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학우분들의 의견이 궁금하여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13
1기 박*진
플라톤의 국가는 올바름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대항하여 올바름에 대해 몇 가지 주장들이 나왔지만 결국에는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대적인 올바른 것 혹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올바르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다른 관점에선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고, 또다른 관점에선 올바른 것도 아니고 올바르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것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책에 나온 주장들이나 나오지 않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장들도 올바른 것을 완벽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모두가 올바른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국가로부터 올바른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분들이 느꼈듯이 나도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과연 국가의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올바름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한가.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여기서 자신의 할 일이란 것도 정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이 과연 올바른 국가로 이어질 수 있는가. 현실에서 인간이 지니는 다양성과 수많은 변수들을 플라톤이 말하는 올바른 국가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인가.
국가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그 필요성에 맞게 국가가 추구해야할 방향성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행복보다 결과적으로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국가로서 올바른 상태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국가 이전에 자신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각자가 생각하는 올바름은 방향성이 없고 하나로 통일될 수 없으므로, 올바른 국가의 조건이 개개인을 올바른 이끌 순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고전들을 보면 현실보단 행복이나 정의, 올바름 등의 본질이나 이상적인 형태에 대해 다루는 것 같다. 하지만 고대의 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처럼 현실에서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도 상상속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상상해보면서 현실에서 가능한 자신만의 목표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플라톤의 국가는 올바름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대항하여 올바름에 대해 몇 가지 주장들이 나왔지만 결국에는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절대적인 올바른 것 혹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올바르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다른 관점에선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고, 또다른 관점에선 올바른 것도 아니고 올바르지 않은 것도 아닌 그런 것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책에 나온 주장들이나 나오지 않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장들도 올바른 것을 완벽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모두가 올바른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국가로부터 올바른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분들이 느꼈듯이 나도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과연 국가의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올바름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한가.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여기서 자신의 할 일이란 것도 정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이 과연 올바른 국가로 이어질 수 있는가. 현실에서 인간이 지니는 다양성과 수많은 변수들을 플라톤이 말하는 올바른 국가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인가.
국가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그 필요성에 맞게 국가가 추구해야할 방향성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행복보다 결과적으로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국가로서 올바른 상태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국가 이전에 자신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각자가 생각하는 올바름은 방향성이 없고 하나로 통일될 수 없으므로, 올바른 국가의 조건이 개개인을 올바른 이끌 순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고전들을 보면 현실보단 행복이나 정의, 올바름 등의 본질이나 이상적인 형태에 대해 다루는 것 같다. 하지만 고대의 철학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처럼 현실에서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다만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도 상상속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상상해보면서 현실에서 가능한 자신만의 목표를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김민정2021-01-20 16:14
1기 송*재
박*진 학우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코멘트 남깁니다. 국가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올바른 국가가 시민의 전체적인 행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또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인간의 다양성을 담기는 어렵다는 말에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이에 더불어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국가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여러 인간의 합으로 구성된 공동체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은 다른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즉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여러 논의를 배제하고 국가를 단순히 시민의 합으로 본다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건설한 나라의 올바름이 개인의 올바름으로 소급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진 학우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코멘트 남깁니다. 국가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올바른 국가가 시민의 전체적인 행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또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인간의 다양성을 담기는 어렵다는 말에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이에 더불어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국가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여러 인간의 합으로 구성된 공동체기에, 본질적으로 인간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은 다른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즉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여러 논의를 배제하고 국가를 단순히 시민의 합으로 본다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건설한 나라의 올바름이 개인의 올바름으로 소급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14
1기 이*빈
공감가는 내용이 많아 답글 남깁니다
올바름이라는 것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논의를 통해 찾아졌다기 보다 논의에서 개개인이 언급한 올바름이 모두 올바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를 통해 개인의 올바름에 대해 전개한 과정에서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욕망을 가진 개인의 올바름을 국가의 올바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저또한 의문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코멘트를 읽으며 시대적인 차이때문인지 다들 가지고 있는 의문과 전개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잘 정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공감가는 내용이 많아 답글 남깁니다
올바름이라는 것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논의를 통해 찾아졌다기 보다 논의에서 개개인이 언급한 올바름이 모두 올바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를 통해 개인의 올바름에 대해 전개한 과정에서 상당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욕망을 가진 개인의 올바름을 국가의 올바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저또한 의문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코멘트를 읽으며 시대적인 차이때문인지 다들 가지고 있는 의문과 전개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잘 정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16
1기 장*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의문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인상깊었습니다.
저도 제시하신 의견에 공감합니다. 저 역시도 국가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국가가 단순히 개인의 합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국가의 올바름이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올바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플라톤이 국가를 예로 든 이유는 국가 내에서 구성원들이 각자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지혜, 용기, 절제를 이룰 수 있듯이 개인도 혼을 통해 이것들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두가지 모두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저 역시도 공감이 잘 되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책에서 국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수호자,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공리주의적인 생각과 맞닿아 있는 이 생각 역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보면 이들에게는 정말 엄격한 삶의 규칙들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이들의 입장이었다면 엄청난 불만으로 가득할 것 같은데 과연 플라톤이 제시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을 통해 대의를 위한 희생이 가능할지, 또 이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의문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인상깊었습니다.
저도 제시하신 의견에 공감합니다. 저 역시도 국가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국가가 단순히 개인의 합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국가의 올바름이 무조건적으로 개인의 올바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플라톤이 국가를 예로 든 이유는 국가 내에서 구성원들이 각자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지혜, 용기, 절제를 이룰 수 있듯이 개인도 혼을 통해 이것들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두가지 모두 각자가 자신의 할 일을 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저 역시도 공감이 잘 되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책에서 국가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수호자,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느 정도 희생될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공리주의적인 생각과 맞닿아 있는 이 생각 역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보면 이들에게는 정말 엄격한 삶의 규칙들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이들의 입장이었다면 엄청난 불만으로 가득할 것 같은데 과연 플라톤이 제시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을 통해 대의를 위한 희생이 가능할지, 또 이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17
1기 박*정
*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올바름'에 대해 논하기 위해 국가부터 살펴보는 접근방식에 대해 의문을 느꼈었는데, 이에 대해 효진 학우님께서 개인이 지니는 변수들을 국가가 다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짚어주셔서 한 층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내내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있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었어서, 마지막 문단에서 고대의 철학자들도 마냥 생각처럼 이상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분명한 지향점이 존재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라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올바름'에 대해 논하기 위해 국가부터 살펴보는 접근방식에 대해 의문을 느꼈었는데, 이에 대해 효진 학우님께서 개인이 지니는 변수들을 국가가 다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짚어주셔서 한 층 더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내내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있어 현실적이지 못하고 이상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었어서, 마지막 문단에서 고대의 철학자들도 마냥 생각처럼 이상이 이루어질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던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분명한 지향점이 존재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라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18
1기 이*일
1권은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옹와의 대화 중, 노옹이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의 소유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정직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전에 빛진 것들에 대해서 되갚음으로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었음을 듣고, ‘올바름’을 정직함과 남에게 되돌려 주는 것으로 정의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본격적인 올바름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노옹에 이어서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와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시모니데스의 올바른 것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이어져 곧 시모니데스의 올바름은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어간다. 즉 옳바름이라는 정의의 틀을 누구(또는 대상)에게 합당한 무엇을 주는 것(or 기술)으로 가정하게 된다.
폴레마르코스는 옳바름을 친구에게는 이득을, 적에게는 손해를 주는 방법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해나가고 결국 올바름의 정의를 서로 찾지는 못한다. 이 때,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정의내려보라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의 정의를 말해달라 반대로 청하고,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을 ‘더 강한 저의 편익(benefit)’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이어서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잘 살고 있음을 말한다. (현재 이러한 상황이 지금도 반복되어서 올바른 것의 가치에 대한 희망과 현실과의 괴리가 사람들에게 충격과 또는 더욱 심각하게는 그렇게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는 것을 남몰래 또는 같이 추구하도록 하는 것 같다. 비리나 감춰진 죄들이 자신의 꾀와 생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인지할 수 있는 체계와 능력이 갖춰져 있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다른 방법들과 대안들에 대해서도 논의해봄직하다고 생각된다.)
2권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글라우콘이 더욱 되살려 내고 오히려 올바름이 보수와 평판의 결과물로 인해서 사람들이 낫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돈이나 명예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이 과연 추구할만한 삶인가에 대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더 큰 규모의 나라를 이상적으로 생각해본다. 그 나라는 개인의 성향으로 분업이 진행되고, 점점 더 성장해가며 전쟁에 대비하고 준비할 수호자들이 필요하며, 이러한 자리에 적합한 성향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또한 대두된다. 그러한 이들의 교육으로 사용될 시가의 주된 내용인 설화의 묘사의 범위와 대상에 관한 논의도 이루어진다.
3권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가, 체육 등의 과목을 논의하고, 그 과목들이 교육받는 이들로 하여금 이끌어내는 가치관, 시야, 성품 등을 얘기한다. 3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앞선 교육을 통해서 수호자들, 즉 통치자로 될 사람들을 시험하고 선별한 뒤, 그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생활의 기본 개념과 가치관으로 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4권에서는 시민 전체의 행복이 최대화된 나라가 바로 올바름이 실현되어 있는 것이라는 기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나라는 지혜, 용기, 절제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 3개의 계층이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올바른 나라의 특징을 개인의 삶과 혼에 적용시킴으로 혼의 3가지 영역이 대응됨 가정하고 논의한다.
플라톤은 사람이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보다 이득이 됨을 알아보려 하고 있다. 개인의 올바른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 사람이 각자가 자신의 성향을 가지고 모인 국가의 올바른 모습과 특징을 고려해보아 다시 개인의 시야로 좁혀 논의를 진행하였다. 플라톤은 사람의 혼에도 종류가 있어 지혜or 슬기(이성), 용기, 절제(욕구)의 혼이 있으며, 이성의 통치로 인한 지배, 복종이 조화가 될 때, 사람이 올바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을 알 수 있었다.
Question. 소크라테스카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의 정의에 대한 반박을 해나갈 떄, 어째서 기술을 잘 수행하는가 못하는가에 대한 기술의 적용 대상을 바르게 정한 것과 그 대상에게 기술을 잘 적용한 것을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시를 든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책의 P.71의 “그러니까 올바른 이가 돈을 간수하는 데 있어서 능하다면, 그는 훔치는 데에도 능하오.”라고 든 반박을 살펴볼 때, 이 예시만의 문장과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은 친구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친구의) 돈에 대해서 그것을 지킬 능력이 충분한 점이 올바르다라는 것이고, 또 (적의) 돈을 훔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는 올바르다 라는 식의 주장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덕적 뉘양스를 띄는) “올바름”에 대한 것이 마치 (기술적 또는 실력적)으로 “적당하게” 작용된 것과 동일하게 생각될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이 생긴다.
1권은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옹와의 대화 중, 노옹이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의 소유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정직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전에 빛진 것들에 대해서 되갚음으로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었음을 듣고, ‘올바름’을 정직함과 남에게 되돌려 주는 것으로 정의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본격적인 올바름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노옹에 이어서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와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시모니데스의 올바른 것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이어져 곧 시모니데스의 올바름은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어간다. 즉 옳바름이라는 정의의 틀을 누구(또는 대상)에게 합당한 무엇을 주는 것(or 기술)으로 가정하게 된다.
폴레마르코스는 옳바름을 친구에게는 이득을, 적에게는 손해를 주는 방법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해나가고 결국 올바름의 정의를 서로 찾지는 못한다. 이 때,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 정의내려보라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코스의 올바름의 정의를 말해달라 반대로 청하고,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을 ‘더 강한 저의 편익(benefit)’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이어서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잘 살고 있음을 말한다. (현재 이러한 상황이 지금도 반복되어서 올바른 것의 가치에 대한 희망과 현실과의 괴리가 사람들에게 충격과 또는 더욱 심각하게는 그렇게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는 것을 남몰래 또는 같이 추구하도록 하는 것 같다. 비리나 감춰진 죄들이 자신의 꾀와 생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인지할 수 있는 체계와 능력이 갖춰져 있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다른 방법들과 대안들에 대해서도 논의해봄직하다고 생각된다.)
2권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글라우콘이 더욱 되살려 내고 오히려 올바름이 보수와 평판의 결과물로 인해서 사람들이 낫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에서 돈이나 명예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이 과연 추구할만한 삶인가에 대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논의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더 큰 규모의 나라를 이상적으로 생각해본다. 그 나라는 개인의 성향으로 분업이 진행되고, 점점 더 성장해가며 전쟁에 대비하고 준비할 수호자들이 필요하며, 이러한 자리에 적합한 성향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또한 대두된다. 그러한 이들의 교육으로 사용될 시가의 주된 내용인 설화의 묘사의 범위와 대상에 관한 논의도 이루어진다.
3권은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가, 체육 등의 과목을 논의하고, 그 과목들이 교육받는 이들로 하여금 이끌어내는 가치관, 시야, 성품 등을 얘기한다. 3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앞선 교육을 통해서 수호자들, 즉 통치자로 될 사람들을 시험하고 선별한 뒤, 그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생활의 기본 개념과 가치관으로 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4권에서는 시민 전체의 행복이 최대화된 나라가 바로 올바름이 실현되어 있는 것이라는 기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나라는 지혜, 용기, 절제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 3개의 계층이 자신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올바른 나라의 특징을 개인의 삶과 혼에 적용시킴으로 혼의 3가지 영역이 대응됨 가정하고 논의한다.
플라톤은 사람이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보다 이득이 됨을 알아보려 하고 있다. 개인의 올바른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 사람이 각자가 자신의 성향을 가지고 모인 국가의 올바른 모습과 특징을 고려해보아 다시 개인의 시야로 좁혀 논의를 진행하였다. 플라톤은 사람의 혼에도 종류가 있어 지혜or 슬기(이성), 용기, 절제(욕구)의 혼이 있으며, 이성의 통치로 인한 지배, 복종이 조화가 될 때, 사람이 올바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함을 알 수 있었다.
Question. 소크라테스카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의 정의에 대한 반박을 해나갈 떄, 어째서 기술을 잘 수행하는가 못하는가에 대한 기술의 적용 대상을 바르게 정한 것과 그 대상에게 기술을 잘 적용한 것을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시를 든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책의 P.71의 “그러니까 올바른 이가 돈을 간수하는 데 있어서 능하다면, 그는 훔치는 데에도 능하오.”라고 든 반박을 살펴볼 때, 이 예시만의 문장과 폴레마르코스의 “올바름은 친구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친구의) 돈에 대해서 그것을 지킬 능력이 충분한 점이 올바르다라는 것이고, 또 (적의) 돈을 훔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그는 올바르다 라는 식의 주장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도덕적 뉘양스를 띄는) “올바름”에 대한 것이 마치 (기술적 또는 실력적)으로 “적당하게” 작용된 것과 동일하게 생각될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이 생긴다.
김민정2021-01-20 16:18
1기ㅣ 박*슬
*일 님의 질문과 관련하여 예전에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이 생각나서 코멘트 남깁 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덕, 기술, 지식이 덕=지술=지식으로 비유되는 도식이 종종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 셋은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이고, 가지고 있을 때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올바름'에 관련된 논의에서 기술의 비유를 든 것 역시 덕과 기술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해주신 것처럼, 기술과 덕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플라톤)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는 기술과 덕을 '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의 여부로 구분합니다. 기술은 나쁜 것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의학에 대한 기술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일종의 가치중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덕을 가진 사람은 나쁜 것을 저지를 수 없다는 점에서, 덕과 기술이 구분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기 대화편에서 특히 이들끼리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독자가 보기에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일 님의 질문과 관련하여 예전에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이 생각나서 코멘트 남깁 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덕, 기술, 지식이 덕=지술=지식으로 비유되는 도식이 종종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 셋은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이고, 가지고 있을 때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올바름'에 관련된 논의에서 기술의 비유를 든 것 역시 덕과 기술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해주신 것처럼, 기술과 덕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소크라테스(플라톤)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플라톤)는 기술과 덕을 '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의 여부로 구분합니다. 기술은 나쁜 것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의학에 대한 기술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일종의 가치중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덕을 가진 사람은 나쁜 것을 저지를 수 없다는 점에서, 덕과 기술이 구분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초기 대화편에서 특히 이들끼리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독자가 보기에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18
1기 송*재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만큼 상당히 유명한 책이지만 실제로 주위에서 이 책을 확실하게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만큼 기대되는 책이었고, 지식으로서 알고 있던 내용보다 훨씬 다양한 논의에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쟁점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인간의 올바름을 규정하기 위해 더 큰 단위인 국가의 올바름을 먼저 논의하는 흐름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쟁으로 옮겨가는 과정 또한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로 진행되는데, 그가 사용한 작은 글씨와 큰 글씨에 대한 비유가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순간 그럴듯하다고 느껴져 동의했을법하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로서 축소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글씨’가 더 ‘큰 글씨’로 적혀있는 것을 읽는다는 것은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단위인 국가의 올바름을 보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올바름을 보는 것이 정말 더 수월한 일인가? 개인의 것에서 나라의 것으로 논의를 옮겨가는 것은 단순히 크기 비교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개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나라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에서는 오히려 훨씬 복잡한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과 나라 자체의 올바름이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는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대화 뒤편에서 나라의 올바름의 속성이 개인의 영혼에도 내제되어 있다는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조금의 끼워맞추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생각이 심화된 것은 나라의 일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때는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2권 370b) 라는 대목이었다. 이 부분은 뒤의 내용까지 더불어 전체적인 논의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개인의 올바름을 위해 나라의 올바름을 살피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나라의 기계적인 작동에만 집중을 하고 그것이 전부인양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의 우리는,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인 우리는 각자의 맡은 일을 하는 사람이자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매진하는 자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친 후에는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며,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그러한 과정 안에서 좋은 나라가 유지된다고 본다. 또한 나라는 개개인의 단순한 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으며, 설령 그렇게 보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나라는 ‘필요’에 의해 개개인이 모인 것이기에 개인의 올바름과 나라의 올바름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를 뒷받침할 다른 논리가 필요해보인다.
나의 생각 또한 단편적인 이야기지만 인간 개인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뤄놓고 나라의 올바름을 규정한 뒤 이를 개인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전자에 대해서는 옳은 것일지 몰라도 후자에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수호자에게 필요한 온순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한 성품을 찾기 위해 ‘개’를 활용한 비유를 든 대목에서도 충분히 논리적인 대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개가 친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짖기에 대립되는 두 성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또 그런 식별을 위해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는 곧 ‘지혜’를 사랑함과 동일하다는 것은 정말 표면적으로 관찰했을 때 인간의 품성과 유사한 것이지 이것이 진정한 수호자의 ‘배움’, ‘지혜’, ‘품성’과 연결될 수 있을만한지에 대해서는 의아함이 들었다.
다소 협소한 지적이지만 <국가>의 일부를 읽으며 들었던 논의에 대한 의문이 대체로 이와 같이 다른 본질끼리의 비유 그리고 그 적용에서 오는 것들이었기에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느꼈을지 혹은 나의 이해력이 부족했던 문제일지 궁금해 적어본다.
덧붙여 각자 타고난 성향에 따라 다른 계급으로 나뉘어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큰 틀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개념적으로만 접했을 때에는 개인의 성향을 어찌 알 수 있는지, 또 알 수 있다 해도 ‘불평등’하기에 옳지 않은 것이 아닐지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말처럼 ‘올바르지 않은 것’이 더 쓸모 있는 사회,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1권 344a)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 올바름에 가까운 성향의 수호자 그리고 그 밑으로 보조자, 농부, 군인을 두듯 각자에 맞는 일을 나누는 세상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등하고 평화로운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학우들이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이런 방식에는 문제가 많고 이에 동의하지만 함께 충분히 논의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 만큼 상당히 유명한 책이지만 실제로 주위에서 이 책을 확실하게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만큼 기대되는 책이었고, 지식으로서 알고 있던 내용보다 훨씬 다양한 논의에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가장 큰 쟁점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인간의 올바름을 규정하기 위해 더 큰 단위인 국가의 올바름을 먼저 논의하는 흐름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쟁으로 옮겨가는 과정 또한 소크라테스 특유의 산파술로 진행되는데, 그가 사용한 작은 글씨와 큰 글씨에 대한 비유가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순간 그럴듯하다고 느껴져 동의했을법하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한 비유로서 축소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똑같은 글씨’가 더 ‘큰 글씨’로 적혀있는 것을 읽는다는 것은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단위인 국가의 올바름을 보는 것이 더 수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올바름을 보는 것이 정말 더 수월한 일인가? 개인의 것에서 나라의 것으로 논의를 옮겨가는 것은 단순히 크기 비교의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개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나라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에서는 오히려 훨씬 복잡한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는 나라를 이루는 구성원과 나라 자체의 올바름이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는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대화 뒤편에서 나라의 올바름의 속성이 개인의 영혼에도 내제되어 있다는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조금의 끼워맞추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생각이 심화된 것은 나라의 일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때는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에 있어서이네.”(2권 370b) 라는 대목이었다. 이 부분은 뒤의 내용까지 더불어 전체적인 논의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개인의 올바름을 위해 나라의 올바름을 살피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나라의 기계적인 작동에만 집중을 하고 그것이 전부인양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의 우리는,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인 우리는 각자의 맡은 일을 하는 사람이자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매진하는 자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친 후에는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며,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그러한 과정 안에서 좋은 나라가 유지된다고 본다. 또한 나라는 개개인의 단순한 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으며, 설령 그렇게 보더라도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나라는 ‘필요’에 의해 개개인이 모인 것이기에 개인의 올바름과 나라의 올바름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를 뒷받침할 다른 논리가 필요해보인다.
나의 생각 또한 단편적인 이야기지만 인간 개인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뤄놓고 나라의 올바름을 규정한 뒤 이를 개인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전자에 대해서는 옳은 것일지 몰라도 후자에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수호자에게 필요한 온순하면서도 동시에 대담한 성품을 찾기 위해 ‘개’를 활용한 비유를 든 대목에서도 충분히 논리적인 대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개가 친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짖기에 대립되는 두 성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또 그런 식별을 위해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는 곧 ‘지혜’를 사랑함과 동일하다는 것은 정말 표면적으로 관찰했을 때 인간의 품성과 유사한 것이지 이것이 진정한 수호자의 ‘배움’, ‘지혜’, ‘품성’과 연결될 수 있을만한지에 대해서는 의아함이 들었다.
다소 협소한 지적이지만 <국가>의 일부를 읽으며 들었던 논의에 대한 의문이 대체로 이와 같이 다른 본질끼리의 비유 그리고 그 적용에서 오는 것들이었기에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느꼈을지 혹은 나의 이해력이 부족했던 문제일지 궁금해 적어본다.
덧붙여 각자 타고난 성향에 따라 다른 계급으로 나뉘어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큰 틀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개념적으로만 접했을 때에는 개인의 성향을 어찌 알 수 있는지, 또 알 수 있다 해도 ‘불평등’하기에 옳지 않은 것이 아닐지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의 말처럼 ‘올바르지 않은 것’이 더 쓸모 있는 사회, 그리고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1권 344a)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진정 올바름에 가까운 성향의 수호자 그리고 그 밑으로 보조자, 농부, 군인을 두듯 각자에 맞는 일을 나누는 세상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등하고 평화로운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학우들이 지적해주신 바와 같이 이런 방식에는 문제가 많고 이에 동의하지만 함께 충분히 논의해보고 싶은 주제이다.
김민정2021-01-20 16:19
1기 박*민
저도 *재 님의 의견에 십분 공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각자 맞는 일을 담당하고, 그들이 본문에서 나오듯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훨씬 더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학우분들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직업을 세 종류로 유형화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개념적으로 완벽히 그대로 도입하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어떤 역할인지 살펴본다면 어느 정도 유형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의재 님의 견해처럼 각자의 일을 나누고 조화를 찾는 것이 훨씬 더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재 님의 의견에 십분 공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각자 맞는 일을 담당하고, 그들이 본문에서 나오듯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훨씬 더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학우분들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직업을 세 종류로 유형화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개념적으로 완벽히 그대로 도입하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어떤 역할인지 살펴본다면 어느 정도 유형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의재 님의 견해처럼 각자의 일을 나누고 조화를 찾는 것이 훨씬 더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0
1기 김*교
1권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와 그의 아버지 케팔로스를 만난다. 노옹의 생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묻자 케팔로스는 가진 가진 재산으로 인해 덕을 보았다고 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올바름은 갚아야할 자에게 갚는 것이 올바름이 아니라 한다. 한편 폴레마르코스는 계약 등의 금전 거래에서 올바름의 논의가 이뤄진다 말한다. 올바름의 사용은 쓰지 않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음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도덕적이 못한 일에 대해서도 사용되지 않음이 올바름인지 폴레마르코스의 답에 반문한다.
한편, 트라시마코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반문 형식에 반감을 가진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관철할것을 요구하는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그의 주장을 듣고자 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생각하는 올바름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었다. 강한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고, 이들이 제정한 법이 올바름이 이를 어기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올바름은 이렇듯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설명한다. 하지만 결국 올바름은 누군가가 혜택을 누리는 ‘득’ 혹은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능’의 기준으로 설명되었다. ‘득’으로 올바름을 생각하면 한정된 이득을 놓고 누군가 그 ‘득’을 누리는 것이 또 ‘올바른’ 것이냐 하는 질문을 마주한다. 여기서 생각해보았을 때 올바름이란 절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다 절대 진리인 ‘인권의 요소’ 혹은 각자의 종교적 가치 (‘희생’, ‘배려’,’사랑’ 등) 안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도덕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려 내리는 가장 적합한 판단이 ‘올바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 절대 진리인지는 수강생들과 논의하고 싶다. 민주주의의 키워드는 다양성 존중과 존중받기 위한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상위 규범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맞게 최선의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행동’이란 자신의 ‘판단’ 결과 무엇을 수행하지 않음 역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2권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에 비해 모든 점에 더 좋은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지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좋음에는 세 가지가 있어 오직 그 자체로 좋은 것, 결과가 좋은 것, 자체도 좋고 결과 역시 좋은 것이 있음을 말한다. 또한 ‘올바름’이란 그 자체와 결과 모두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글라우콘이 평판이나 명성 등의 매력적인 결과로 인해 좋은 것이며 그 자체로 좋은 것은 까다롭다고 이야기한다. 보다 올바름을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 자체로 좋지 않아도 결과가 좋기에 수행하는 것들이 있는 지 밝히고자 한다. 이는 결국 법으로 이어진다. 올바름을 규정함이 곧 합법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법의 태두리가 생기면 사람들의 행동엔 제약이 생기고 때론 자신의 욕망에 거짓 행동을 해야할 때도 생긴다. 즉, 올바름은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한편, 올바름과 ‘득’의 관계가 1권에 이어 다시 대두된다. 올바르면서 가장 좋은 이득을 얻는 쪽은 능력이 최고인 사람일 것이며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쪽은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올바름은 규정되었고(법), 이는 사람들의 욕망을 규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의 무절제는 올바르지 못하고 수고롭지 않다. 욕망의 절제는 올바르고, 수고롭고, 힘들다. 이러한 올바름의 한계에 다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마주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한 개인의 것과 국가 전체의 것이 있다고 말한다. 큰 규모인 국가의 올바름을 검토하기 더 쉽다. 나라가 구성되는 이유는 사람들 혼자만으론 삶을 유지하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구를 만족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며 공통의 규칙(화폐, 법) 등이 필요해질 것이다. 기준이 필요해짐에 따라 올바름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욕망이 만족되지 않을 경우 국가는 확장되어야 하고 이것은 전쟁의 이유가 된다. 이를 위해서 유능한 전사 집단이 필요하다. 이들은 기질이 용맹해야 하고 또 지혜로워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육성하기 위해선 적절하고 올바름을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올바름은 국가(대다수)의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 고대엔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신을 믿었다. 결국 이러한 올바른 이들을 육성하기 위해선 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설화가 필요하다. 신을 경배하고 신을 노래해야 하고 때론 법률로 규정하기도 한다. 2권의 내용을 통해 올바름의 기준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결국 국가간의 경쟁에 의해서 개인의 희생당하는 것은 올바름에서 무시되게 된다. 국가를 비난할 수 있어도 자신이 속한 국가는 강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국가를 비난하면서도 (삼성이란 거대 집단을 규탄하면서도) 이 집단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올바름과 타협해야 하는가? 올바름을 국가가 지배해야 하는 가? 올바름이 국가를 규정해야 하는 가?
-글이 점점 길어지게 되어 간결하게 생각을 이어가려 한다.-
3권은 개인으로서 (통치자든 수호자든 특정 사람으로서) 교육, 절제, 정직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룬다. 시가를 언급하면서 자연스러운 올바름의 교육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올바른 것을 쫓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싫어하게 되어야 한다. 절제를 통해 올바르고 정직함을 추구해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멀리해야 함을 강조한다.
4권에선 전반적으로 국가를 작동시키는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에 대해서 논한다. 이에 부와 빈곤에 대해서 언급한다. 부는 게으름을 유도하고 빈곤은 능력의 저하를 초래한다. 여러 국가들 간의 경쟁에서 강대한 한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선 통치자의 유능한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통치자는 각 구성원이 최선의 능력(올바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적절히 분배하고 지도하는 파수꾼의 역할이 필요하다. 수호자는 올바른 교육을 통한 지의 햠양 또, 절제의 함양을 통해 올바르지 못한 것을 멀리하도록 다음 세대를 교육해야 하고 문화와 규율을 형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용기는 소신의 산물이다. 훈련을 통해 자신의 기준을 관철시키는 올바름이 곧 용기이다. 지혜, 용기, 절제 이 세 가지가 국가의 힘을 기르고 이를 보전하는것이 올바름이다. 또한 국가의 올바름을 위한 이 세 가지는 개인의 올바름과도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개인은 하나의 상태로 조화로운 사람을 말한다. 지혜가 이를 관정하고 용기와 절제를 통해 꾸준히 개인의 혼을 가꾼다.
--------------------------------------------------------------------------
1, 2권을 정리하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다양한 생각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견과 논리 전개를 관찰하였고 이를 토대로 3,4권의 이해는 다소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플라톤은 자신의 이념을 굉장히 이상화하여 표현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구상하는 완전함의 요소가 있고 이를 위해 개인/국가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하고 교육해야 한다. 현실주의자 들의 비판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보다 주요한 (상위의) 가치를 설파하며 개인/국가 지녀야할 주요한 형태를 묘사해나갔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지나친 이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면 미묘한 사람들의 독특한 행동, 정치적인 요소 등을 감안하기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개인/국가가 인접해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많이 축소 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환경은 절대적인 상위 가치를 흔들 수 있는 요소이다. 이어지는 권에선 이러한 환경과 개인/국가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이 있는 지 궁금하다. 또한 토론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기적/이타적 국가의 특성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국가의 경계, 독립성이 점차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어떠한 형태를 갖추는 것이 가장 올바를 까? 이를 위해 한국을 미국, 중국 등의 주요 강대국과 비교해보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이다.
1권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와 그의 아버지 케팔로스를 만난다. 노옹의 생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묻자 케팔로스는 가진 가진 재산으로 인해 덕을 보았다고 답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올바름은 갚아야할 자에게 갚는 것이 올바름이 아니라 한다. 한편 폴레마르코스는 계약 등의 금전 거래에서 올바름의 논의가 이뤄진다 말한다. 올바름의 사용은 쓰지 않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음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도덕적이 못한 일에 대해서도 사용되지 않음이 올바름인지 폴레마르코스의 답에 반문한다.
한편, 트라시마코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반문 형식에 반감을 가진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관철할것을 요구하는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시 그의 주장을 듣고자 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생각하는 올바름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었다. 강한 자들이 정치를 하게 되고, 이들이 제정한 법이 올바름이 이를 어기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이다.
올바름은 이렇듯 사람들마다 각자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설명한다. 하지만 결국 올바름은 누군가가 혜택을 누리는 ‘득’ 혹은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능’의 기준으로 설명되었다. ‘득’으로 올바름을 생각하면 한정된 이득을 놓고 누군가 그 ‘득’을 누리는 것이 또 ‘올바른’ 것이냐 하는 질문을 마주한다. 여기서 생각해보았을 때 올바름이란 절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다 절대 진리인 ‘인권의 요소’ 혹은 각자의 종교적 가치 (‘희생’, ‘배려’,’사랑’ 등) 안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도덕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려 내리는 가장 적합한 판단이 ‘올바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 절대 진리인지는 수강생들과 논의하고 싶다. 민주주의의 키워드는 다양성 존중과 존중받기 위한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상위 규범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맞게 최선의 ‘행동’을 수행하는 것이 올바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행동’이란 자신의 ‘판단’ 결과 무엇을 수행하지 않음 역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2권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에 비해 모든 점에 더 좋은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지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좋음에는 세 가지가 있어 오직 그 자체로 좋은 것, 결과가 좋은 것, 자체도 좋고 결과 역시 좋은 것이 있음을 말한다. 또한 ‘올바름’이란 그 자체와 결과 모두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글라우콘이 평판이나 명성 등의 매력적인 결과로 인해 좋은 것이며 그 자체로 좋은 것은 까다롭다고 이야기한다. 보다 올바름을 수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 자체로 좋지 않아도 결과가 좋기에 수행하는 것들이 있는 지 밝히고자 한다. 이는 결국 법으로 이어진다. 올바름을 규정함이 곧 합법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법의 태두리가 생기면 사람들의 행동엔 제약이 생기고 때론 자신의 욕망에 거짓 행동을 해야할 때도 생긴다. 즉, 올바름은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 한편, 올바름과 ‘득’의 관계가 1권에 이어 다시 대두된다. 올바르면서 가장 좋은 이득을 얻는 쪽은 능력이 최고인 사람일 것이며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안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쪽은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올바름은 규정되었고(법), 이는 사람들의 욕망을 규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의 무절제는 올바르지 못하고 수고롭지 않다. 욕망의 절제는 올바르고, 수고롭고, 힘들다. 이러한 올바름의 한계에 다시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마주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한 개인의 것과 국가 전체의 것이 있다고 말한다. 큰 규모인 국가의 올바름을 검토하기 더 쉽다. 나라가 구성되는 이유는 사람들 혼자만으론 삶을 유지하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구를 만족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며 공통의 규칙(화폐, 법) 등이 필요해질 것이다. 기준이 필요해짐에 따라 올바름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욕망이 만족되지 않을 경우 국가는 확장되어야 하고 이것은 전쟁의 이유가 된다. 이를 위해서 유능한 전사 집단이 필요하다. 이들은 기질이 용맹해야 하고 또 지혜로워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육성하기 위해선 적절하고 올바름을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올바름은 국가(대다수)의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 고대엔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신을 믿었다. 결국 이러한 올바른 이들을 육성하기 위해선 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설화가 필요하다. 신을 경배하고 신을 노래해야 하고 때론 법률로 규정하기도 한다. 2권의 내용을 통해 올바름의 기준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결국 국가간의 경쟁에 의해서 개인의 희생당하는 것은 올바름에서 무시되게 된다. 국가를 비난할 수 있어도 자신이 속한 국가는 강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국가를 비난하면서도 (삼성이란 거대 집단을 규탄하면서도) 이 집단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는 올바름과 타협해야 하는가? 올바름을 국가가 지배해야 하는 가? 올바름이 국가를 규정해야 하는 가?
-글이 점점 길어지게 되어 간결하게 생각을 이어가려 한다.-
3권은 개인으로서 (통치자든 수호자든 특정 사람으로서) 교육, 절제, 정직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룬다. 시가를 언급하면서 자연스러운 올바름의 교육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올바른 것을 쫓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싫어하게 되어야 한다. 절제를 통해 올바르고 정직함을 추구해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멀리해야 함을 강조한다.
4권에선 전반적으로 국가를 작동시키는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에 대해서 논한다. 이에 부와 빈곤에 대해서 언급한다. 부는 게으름을 유도하고 빈곤은 능력의 저하를 초래한다. 여러 국가들 간의 경쟁에서 강대한 한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선 통치자의 유능한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통치자는 각 구성원이 최선의 능력(올바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적절히 분배하고 지도하는 파수꾼의 역할이 필요하다. 수호자는 올바른 교육을 통한 지의 햠양 또, 절제의 함양을 통해 올바르지 못한 것을 멀리하도록 다음 세대를 교육해야 하고 문화와 규율을 형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용기는 소신의 산물이다. 훈련을 통해 자신의 기준을 관철시키는 올바름이 곧 용기이다. 지혜, 용기, 절제 이 세 가지가 국가의 힘을 기르고 이를 보전하는것이 올바름이다. 또한 국가의 올바름을 위한 이 세 가지는 개인의 올바름과도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올바른 개인은 하나의 상태로 조화로운 사람을 말한다. 지혜가 이를 관정하고 용기와 절제를 통해 꾸준히 개인의 혼을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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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권을 정리하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다양한 생각을 소유한 사람들의 의견과 논리 전개를 관찰하였고 이를 토대로 3,4권의 이해는 다소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플라톤은 자신의 이념을 굉장히 이상화하여 표현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구상하는 완전함의 요소가 있고 이를 위해 개인/국가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훈련하고 교육해야 한다. 현실주의자 들의 비판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보다 주요한 (상위의) 가치를 설파하며 개인/국가 지녀야할 주요한 형태를 묘사해나갔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지나친 이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면 미묘한 사람들의 독특한 행동, 정치적인 요소 등을 감안하기 어려웠겠지만, 적어도 개인/국가가 인접해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많이 축소 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환경은 절대적인 상위 가치를 흔들 수 있는 요소이다. 이어지는 권에선 이러한 환경과 개인/국가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이 있는 지 궁금하다. 또한 토론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기적/이타적 국가의 특성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국가의 경계, 독립성이 점차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는 어떠한 형태를 갖추는 것이 가장 올바를 까? 이를 위해 한국을 미국, 중국 등의 주요 강대국과 비교해보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6:20
1기 남*범
마지막 문단의 질문들이 인상 깊고 공감됩니다. 플라톤의 시대와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의 경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생존을 위해 국가를 이루었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전쟁도 줄어들었으며 한 국가에 국한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며 다른 국가와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국민을 형성하는데에 중요한 논의점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의 질문들이 인상 깊고 공감됩니다. 플라톤의 시대와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의 경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생존을 위해 국가를 이루었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전쟁도 줄어들었으며 한 국가에 국한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며 다른 국가와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국민을 형성하는데에 중요한 논의점이 될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1
1기 남*범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책을 두 권 읽은 적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이다. 리바이어던에서도 국가를 바닥부터 구성하며,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평가한다.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인간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동기가 있으며 영혼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전제조건이 플라톤의 국가 1~4권의 내용과 상통한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야말로 개인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면, 개인이 모두 자기 집 안에서 자면서 꿈만 꾸거나, 극단적으로는 매트릭스 속으로 들어간다면, 비종교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지켜야할 도덕과 추구해야할 정의라는 것은 자기 만족과 본성 밖에서 전혀 없을 것이다. 국가라는 이해관계에 의해 뭉친 공동체가 존재함으로써 정의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을 덕목으로 삼는 것은 도덕적인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다른 국가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군대가 필요하며 지도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도층은 각 국민의 적절한 희생을 감수하며 국가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가진다. 이 때 희생과 이익이 무엇인지, 그 둘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지는 반드시 논의가 필요하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청자가 납득하는 일반 상식으로부터 쌓아올린다. 현대 사회에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최대한 체계적으로 다가가고자 한 것이 참신하였다. 다만, 사람들마다 도덕관이 다르기 때문에, 도덕과 양심에 따라 논리를 전개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플라톤은 인간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 욕구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영혼이 있다고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각 인간이 역할에 최선을 다해 최대 효율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기존의 전제조건들이 무너지는 현 상황에서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책을 두 권 읽은 적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이다. 리바이어던에서도 국가를 바닥부터 구성하며,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 모습을 평가한다.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인간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동기가 있으며 영혼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정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전제조건이 플라톤의 국가 1~4권의 내용과 상통한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야말로 개인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면, 개인이 모두 자기 집 안에서 자면서 꿈만 꾸거나, 극단적으로는 매트릭스 속으로 들어간다면, 비종교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지켜야할 도덕과 추구해야할 정의라는 것은 자기 만족과 본성 밖에서 전혀 없을 것이다. 국가라는 이해관계에 의해 뭉친 공동체가 존재함으로써 정의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을 덕목으로 삼는 것은 도덕적인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다른 국가가 존재하는 한 필연적으로 군대가 필요하며 지도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도층은 각 국민의 적절한 희생을 감수하며 국가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가진다. 이 때 희생과 이익이 무엇인지, 그 둘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지는 반드시 논의가 필요하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청자가 납득하는 일반 상식으로부터 쌓아올린다. 현대 사회에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최대한 체계적으로 다가가고자 한 것이 참신하였다. 다만, 사람들마다 도덕관이 다르기 때문에, 도덕과 양심에 따라 논리를 전개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플라톤은 인간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나, 욕구가 있고 개성이 있으며 영혼이 있다고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각 인간이 역할에 최선을 다해 최대 효율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이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기존의 전제조건들이 무너지는 현 상황에서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6:21
1기 김*현
공동체가 있어야 개인이 성립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책 속의 논리가 지금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라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인식 변화를 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승범님의 글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흥미로웠습니다.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이 줄어드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개인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질 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개인이 성립함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책 속의 논리가 지금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라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인식 변화를 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승범님의 글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흥미로웠습니다.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이 줄어드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개인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질 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1
1기 김*현
1권에서 케팔로스는 사람이 죽음이 다가옴을 느낄 때면 이승에서 옳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옳지 못한 짓을 했음을 알게 된 사람은 불안에 떨게 되고 자신이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은 ‘즐겁고 밝은 희망이 언제나 함께’ 하는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어떤 개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때는 그 개념 자체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 이유, 상황을 포함하는 맥락 또한 중요하다 생각한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논의할 때도 그것을 왜 논의하게 되었는지가 논의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1권에서 올바름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올바름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이해했다. 올바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만큼 중요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2권에서 개인의 올바름을 나라의 올바름에서 찾아보자고 하는데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다수의 개인이 모여 형성되는 집단인 국가는 한 사람과 같은 방향의 올바름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개인의 올바름이 같은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은 소수의 지배층이 국가의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때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의 뒷부분에서 민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책이 쓰인 시기의 국가의 정치제도 또한 민주주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글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3권에서는 통치자가 될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갖추어야 할 조건, 4권에서는 올바른 나라를 위해 나라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의 수립 목적이 특정 집단이 아닌 시민 전체의 행복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절제, 용기, 지혜 각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 계층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할 때 올바른 나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올바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지만 실제의 세계에서의 올바름의 문제는 이야기 속의 예시보다 훨씬 복잡하다. 또, 올바름이란 올바른 속성을 가진 것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올바름의 이데아 그 자체를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올바름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받아들이더라도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름이 무엇인지 개념적으로 논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 상황에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논의 중 전제로 하며 그냥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다. 이 이야기가 쓰일 때의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해졌다. 3권과 4권의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상황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논의 하는 것들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부작용이나 한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이 의도적인 침묵인지가 궁금해졌다.
1권에서 케팔로스는 사람이 죽음이 다가옴을 느낄 때면 이승에서 옳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옳지 못한 짓을 했음을 알게 된 사람은 불안에 떨게 되고 자신이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은 ‘즐겁고 밝은 희망이 언제나 함께’ 하는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어떤 개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때는 그 개념 자체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 이유, 상황을 포함하는 맥락 또한 중요하다 생각한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논의할 때도 그것을 왜 논의하게 되었는지가 논의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1권에서 올바름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올바름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이해했다. 올바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만큼 중요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2권에서 개인의 올바름을 나라의 올바름에서 찾아보자고 하는데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다수의 개인이 모여 형성되는 집단인 국가는 한 사람과 같은 방향의 올바름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개인의 올바름이 같은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은 소수의 지배층이 국가의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때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의 뒷부분에서 민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책이 쓰인 시기의 국가의 정치제도 또한 민주주의와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글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3권에서는 통치자가 될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 갖추어야 할 조건, 4권에서는 올바른 나라를 위해 나라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의 수립 목적이 특정 집단이 아닌 시민 전체의 행복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절제, 용기, 지혜 각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 계층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할 때 올바른 나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올바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지만 실제의 세계에서의 올바름의 문제는 이야기 속의 예시보다 훨씬 복잡하다. 또, 올바름이란 올바른 속성을 가진 것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올바름의 이데아 그 자체를 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올바름에 대한 통일된 정의를 받아들이더라도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름이 무엇인지 개념적으로 논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 상황에서 판단 기준으로 사용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논의 중 전제로 하며 그냥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다. 이 이야기가 쓰일 때의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해졌다. 3권과 4권의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상황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논의 하는 것들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부작용이나 한계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이 의도적인 침묵인지가 궁금해졌다.
서양 고대 철학의 인간관 (1)
『국가・정체』
플라톤 지음 | 박종현 , 역주 옮김 | 서광사 | 2005년 04월 30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30606233&orderClick=Lai&Kc=#N
토론 범위
1권~2권376d, 3권 412a~4권 끝
토론 주제
플라톤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정의/올바름'의 문제에 대한 논쟁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다.
그것도 근본적으로 '정의로운/올바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테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기나긴 논의이다.
플라톤이 '정의/올바름'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기르는) 덕성의 문제를
다시 국가/정체(politeia)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플라톤의 인간관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