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2주_고・탐] 서양 고대 철학의 인간관 (2)_서울대 철학과 강성훈 교수 특강
김민정2021-01-20 16:25
1기 이*현
앞선 논의에서도 밝혔듯,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했던 사람인 것 같다. 이를 플라톤이 개인과 국가를 유비 관계에 두고 한 설명에 빗대어 말하면, 국가 차원에 있어서는 통치자로서의 철학자의 능력을 맹신한 것 같다.
한 국가의 모든 계급이 각자의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중에서도 통치자 계급이 지혜를 갖춘 철학자들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국가의 올바름과 행복을 위해 사적 영역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는 아데이만토스의 지적에, 소크라테스는 그들 스스로의 행복이 아닌 국가라는 전체집단의 조화로운 행복을 위함이며, 그리고 이런 통치자 계급이 국가를 위해 사적 영역의 것을 자연히 희생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올바른 교육과 양육이라고 말한다. 우선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첫째, 통치자 및 시민들이 ‘곧이듣도록’ 할 수 있도록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허구의 전설을 만들어 통치자와 그 후손들에게 수호자 계급의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는 명백히 증명되었거나 합의된 바는 아니지만, 그저 철인이 통치를 하면 이롭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정당화의 과정일 뿐이다. 올바름을 주장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올바름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국가 전체의 행복이라는 명목을 빙자하여 교육을 통한 세뇌로 그들이 다른 기준의 행복의 존재를 탐색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올바른 교육과 양육을 통해 인간의 모든 욕망과 감정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 인간은 자연히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살거나 자신의 본능적 욕구가 이끄는 대로 살면 안 되겠지만, 인간에게 이러한 감정적 부분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철학자가 신이 아닌 사람인 이상, 이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이성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존재한다. 단순히 교육과 양육을 잘한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성을 탁월히 가꾼다고 해서, 이런 모든 욕망까지 억제할 수 있는 것일까? 심리학적으로 이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 사람을 타인과 공유해야 한다면? 진리를 향해 걷는 철인이라고 하여 이러한 상황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한 이상, 이는 어려울 것이다.
플라톤은 논의를 이어가며, 교육을 통해 철학자들에게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올바른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이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이 드러난다.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으나 분명 궁극적인 개념으로써 존재하는 ‘이데아’를 통찰과 생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의문이 많이 남는다.
우선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인간 누구도 아직 그 이데아에 완벽히 도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철학자가 통찰 끝에 도달한 진리가 진정한 이데아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는 철학자 스스로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깨달은 것이 이데아인지 아닌지, 무엇을 근거로 확신할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이데아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없다면 이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 결국, 통치자는 자신의 이성의 능력 한도 내에서 도달한 범위를 근거로 시민들을 통치할 것이다. 만일 인간의 이성이 진정으로 완벽하다면 통치자가 동굴 밖으로 나가 만난 것이 이데아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면? 첫째, 통치자가 진정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둘째, 나간다고 해도 그 동굴 밖에서 만난 것이 진정 이데아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셋째, 불완전한 이성으로 마주한 것을 근거로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와 같은 의문이 남았다.
진정으로 이상 국가가 가능하고, 이런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부여받은 기능을 기여함으로써 그 구성원인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로 나를 비롯한 모든 구성원이 그들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만일 구성원 중 일부분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즉 자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국가의 전체적인 기능에 손상을 주는 행동을 한다면, 결국 이는 나의 능력과 별개로 이상 국가 실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보면, 그러한 이상은 이상에 머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불가능한 이상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현재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나의 가족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나의 행복인 것 같다.
앞선 논의에서도 밝혔듯,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했던 사람인 것 같다. 이를 플라톤이 개인과 국가를 유비 관계에 두고 한 설명에 빗대어 말하면, 국가 차원에 있어서는 통치자로서의 철학자의 능력을 맹신한 것 같다.
한 국가의 모든 계급이 각자의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중에서도 통치자 계급이 지혜를 갖춘 철학자들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국가의 올바름과 행복을 위해 사적 영역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는 아데이만토스의 지적에, 소크라테스는 그들 스스로의 행복이 아닌 국가라는 전체집단의 조화로운 행복을 위함이며, 그리고 이런 통치자 계급이 국가를 위해 사적 영역의 것을 자연히 희생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올바른 교육과 양육이라고 말한다. 우선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첫째, 통치자 및 시민들이 ‘곧이듣도록’ 할 수 있도록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허구의 전설을 만들어 통치자와 그 후손들에게 수호자 계급의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는 명백히 증명되었거나 합의된 바는 아니지만, 그저 철인이 통치를 하면 이롭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정당화의 과정일 뿐이다. 올바름을 주장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올바름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국가 전체의 행복이라는 명목을 빙자하여 교육을 통한 세뇌로 그들이 다른 기준의 행복의 존재를 탐색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올바른 교육과 양육을 통해 인간의 모든 욕망과 감정까지 통제할 수 있는가? 인간은 자연히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살거나 자신의 본능적 욕구가 이끄는 대로 살면 안 되겠지만, 인간에게 이러한 감정적 부분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철학자가 신이 아닌 사람인 이상, 이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이성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존재한다. 단순히 교육과 양육을 잘한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심지어 아내와 자식까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성을 탁월히 가꾼다고 해서, 이런 모든 욕망까지 억제할 수 있는 것일까? 심리학적으로 이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느꼈는데, 그 사람을 타인과 공유해야 한다면? 진리를 향해 걷는 철인이라고 하여 이러한 상황을 전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한 이상, 이는 어려울 것이다.
플라톤은 논의를 이어가며, 교육을 통해 철학자들에게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올바른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이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이 드러난다. 경험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으나 분명 궁극적인 개념으로써 존재하는 ‘이데아’를 통찰과 생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의문이 많이 남는다.
우선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인간 누구도 아직 그 이데아에 완벽히 도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철학자가 통찰 끝에 도달한 진리가 진정한 이데아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는 철학자 스스로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깨달은 것이 이데아인지 아닌지, 무엇을 근거로 확신할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이데아라고 스스로 확신할 수 없다면 이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 결국, 통치자는 자신의 이성의 능력 한도 내에서 도달한 범위를 근거로 시민들을 통치할 것이다. 만일 인간의 이성이 진정으로 완벽하다면 통치자가 동굴 밖으로 나가 만난 것이 이데아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면? 첫째, 통치자가 진정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둘째, 나간다고 해도 그 동굴 밖에서 만난 것이 진정 이데아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셋째, 불완전한 이성으로 마주한 것을 근거로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와 같은 의문이 남았다.
진정으로 이상 국가가 가능하고, 이런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부여받은 기능을 기여함으로써 그 구성원인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로 나를 비롯한 모든 구성원이 그들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만일 구성원 중 일부분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즉 자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국가의 전체적인 기능에 손상을 주는 행동을 한다면, 결국 이는 나의 능력과 별개로 이상 국가 실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보면, 그러한 이상은 이상에 머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불가능한 이상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현재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나의 가족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나의 행복인 것 같다.
김민정2021-01-20 16:26
1기 박*민
*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수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인간이 좋음의 이데아를 완벽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현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해 플라톤은 어떤 해답을 주고 싶어할지 궁금합니다.
*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수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인간이 좋음의 이데아를 완벽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현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해 플라톤은 어떤 해답을 주고 싶어할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26
@김민정
1기 이*현
코멘트 감사합니다 박*민님! 아마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지혜로우면 '좋음의 이데아'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이는 제가 원글에서도 언급했듯, 플라톤이 인간 이성의 역할을 지나치게 완벽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지점에서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은, 일단 첫째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불변하는 이데아가 정말 존재하는가? 둘째로, 존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이성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완전한가? 였던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박*민님! 아마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지혜로우면 '좋음의 이데아'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이는 제가 원글에서도 언급했듯, 플라톤이 인간 이성의 역할을 지나치게 완벽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지점에서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은, 일단 첫째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불변하는 이데아가 정말 존재하는가? 둘째로, 존재한다고 하여도 인간의 이성이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완전한가? 였던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6
1기 박*슬
*현님의 글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깊어서 코멘트 남깁니다. 예전에 자전 수업에서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현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이 이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고 쉬운 이 원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를 종종 목격해서 안타깝곤 합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교육이 세뇌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부분 역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플라톤은 그가 제시하는 이상국가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확신하고 있으나, "명백히 증명되었거나 합의된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현님께서 잘 짚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국가>를 읽으면서, <국가>에 등장하는 다양한 비유가 정말 현실에 잘 대응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논리적 근거를 들어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님의 글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깊어서 코멘트 남깁니다. 예전에 자전 수업에서 "평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현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이 이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공동체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고 쉬운 이 원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를 종종 목격해서 안타깝곤 합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교육이 세뇌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부분 역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플라톤은 그가 제시하는 이상국가가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굉장히 확신하고 있으나, "명백히 증명되었거나 합의된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현님께서 잘 짚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국가>를 읽으면서, <국가>에 등장하는 다양한 비유가 정말 현실에 잘 대응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논리적 근거를 들어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민정2021-01-20 16:26
@김민정
1기 이*현
코멘트 감사합니다 *슬님! 제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관을 잘 정리해 주신 것 같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설명 방식이 지나치게 비유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도 예슬님께서 잘 집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슬님! 제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관을 잘 정리해 주신 것 같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설명 방식이 지나치게 비유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점도 예슬님께서 잘 집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27
1기 장*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참 많이 되었던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성이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삶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개인의 감정과 욕망이 없다면,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만약 이런 사회가 실제로 실현이 되고, 내가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옳은 것을 하고 있다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문득 스쳐갑니다.
다음으로 이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이성도 결국에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정말 최고의 이데아를 경험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이 정말인지는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한계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국가에서는 이성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만큼 이것은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참 많이 되었던 글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성이 욕망과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삶일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개인의 감정과 욕망이 없다면,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만약 이런 사회가 실제로 실현이 되고, 내가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옳은 것을 하고 있다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문득 스쳐갑니다.
다음으로 이성에 관한 이야기인데, 저 역시도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이성도 결국에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정말 최고의 이데아를 경험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이 정말인지는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한계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국가에서는 이성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만큼 이것은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7
@김민정
1기 이*현
코멘트 감사합니다 *균님! 만약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이 욕망을 잘 다스리고 이성적으로 살 수 있다면, 교육 받은 사람은 주어진 삶이 행복한 삶의 전부라고 인식하게 되므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해 주신 부분 인상깊었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균님! 만약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이 욕망을 잘 다스리고 이성적으로 살 수 있다면, 교육 받은 사람은 주어진 삶이 행복한 삶의 전부라고 인식하게 되므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해 주신 부분 인상깊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8
1기 장*균
책의 남은 부분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여성에 대한 생각이 인상깊었다. 앞부분에서 아내의 공동소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해도 플라톤 역시 당시 그리스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여성을 재산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플라톤은 남성과 여성의 힘의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일정 성향만 갖추어져있다면 여성 역시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상충되게 왜 하필 아내를 공유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만약 여자 통치자가 나타난다면 남편을 공유해야한다고도 주장할지 궁금하다.
다음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 시간까지만 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아기들이 태어나면 각자의 기능과 능력이 있으므로 그것에 맞춰서 양육을 하는,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가 일방적으로 개인을 교육하는 형태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성향을 파악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꼐 구체적인 교육 및 통치자 선발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뒷부분을 읽어보니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 생각과 달리 플라톤은 아기들에게 억지로 교육을 시키지 않도록 했다. 대산 장난스럽게 놀 수 있게 하면서 관찰자로서 쭉 지켜보며 성향을 파악하는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나이에 따라 어떤 것들을 파악해야하는지 나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어떤 것들을 가르쳐야하는지에 대해 근거를 바탕으로 과목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를 읽으며 당시 시대를 고려했을 때 가장 최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쪽으로만 바라봤던 시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여전히 감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은 남는다.
다음은 선천성과 후천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난 번 플라톤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관과 양육 방식을 통해서 플라톤은 개인의 선천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개인이 타고나지 않은 부분으로의 진입을 금지할 정도로 선천성에 대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뒷부분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후천적인 부분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훌륭한 자질이 있더라도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발현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빠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플라톤이 올바른 교육과 양육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모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주장을 해소하기 위해 플라톤은 훌륭함을 두가지로 나누어 신체적인 훌륭함들은 이전에는 그 안에 있지 않았으나 습관과 단련에 의해 나중에야 생기게 될 수 있지만 똑똑함의 훌륭함은 무엇보다도 더 신적인 것 같아서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으며 그 전환에 의해서 유용하고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반대로 무용하고 해롭게도 된다고 한다. 이는 역으로 말해 똑똑함의 경우는 후천성만으로는 힘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고려하려고 한 노력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플라톤이 생각한 후천성은 선천성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천성에 위배되는 후천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은 유형별로 나누기는 어려우며 같은 선천성을 가지고 태어나도 다른 후천성으로 인해 다양해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유형에 정답을 내린 느낌이 들어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은 통치자에 대한 생각이다. 지난 토론에서 문득 통치자가 꼭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아내를 공유하고 사유재산도 못가지는 이런 자리가 과연 좋은 자리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선발 과정도 굉장히 많은 고난이 필요하다. 이런 모습을 통해 플라톤은 통치자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자리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플라톤은 통치자가 자기가 통치를 하고 싶어서 열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자리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통치자가 되려는 분열과 혼란이 없어질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는 플라톤의 ‘내 것’과 ‘너 것’의 존재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생각과 일치하며 통치자의 사유재산 금지 논리와도 연결되게 된다. 이처럼 플라톤은 소유의 주인이 생기는 순간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들을 통해 봤을 때 결국에는 플라톤이 구상한 사회가 옳은, 행복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훌륭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 올바른 교육과 양육을 받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 감시자의 평가들을 통과하여 좋음의 이데아를 경험한 소수만이 어둠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행복을 달성하는 형태의 사회처럼 보이지만, 해당사회 속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진 사회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처음에 읽을 때는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느낌이 들어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계속 생각해보니, 이 책의 서술 자체가 통치자에게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사회적인 역할에는 그곳에만 꼭 중요한 능력과 성향 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치자에 대해 논했던 것처럼 다른 직업 혹은 사회적 역할을 달성함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들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만 보면 꼭 통치자의 희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을 가능하게 된 계기가 바로 통치자가 꼭 사회적으로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플라톤이 논의의 범위를 넓혔다면 통치자가 그랬듯이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책의 남은 부분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여성에 대한 생각이 인상깊었다. 앞부분에서 아내의 공동소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해도 플라톤 역시 당시 그리스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여성을 재산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플라톤은 남성과 여성의 힘의 차이는 인정하면서도 일정 성향만 갖추어져있다면 여성 역시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해보면 진보적인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상충되게 왜 하필 아내를 공유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만약 여자 통치자가 나타난다면 남편을 공유해야한다고도 주장할지 궁금하다.
다음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난 시간까지만 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아기들이 태어나면 각자의 기능과 능력이 있으므로 그것에 맞춰서 양육을 하는,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가 일방적으로 개인을 교육하는 형태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성향을 파악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함꼐 구체적인 교육 및 통치자 선발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런데 뒷부분을 읽어보니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 생각과 달리 플라톤은 아기들에게 억지로 교육을 시키지 않도록 했다. 대산 장난스럽게 놀 수 있게 하면서 관찰자로서 쭉 지켜보며 성향을 파악하는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나이에 따라 어떤 것들을 파악해야하는지 나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어떤 것들을 가르쳐야하는지에 대해 근거를 바탕으로 과목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를 읽으며 당시 시대를 고려했을 때 가장 최선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쪽으로만 바라봤던 시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여전히 감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은 남는다.
다음은 선천성과 후천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지난 번 플라톤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관과 양육 방식을 통해서 플라톤은 개인의 선천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개인이 타고나지 않은 부분으로의 진입을 금지할 정도로 선천성에 대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뒷부분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후천적인 부분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훌륭한 자질이 있더라도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발현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빠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플라톤이 올바른 교육과 양육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모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주장을 해소하기 위해 플라톤은 훌륭함을 두가지로 나누어 신체적인 훌륭함들은 이전에는 그 안에 있지 않았으나 습관과 단련에 의해 나중에야 생기게 될 수 있지만 똑똑함의 훌륭함은 무엇보다도 더 신적인 것 같아서 그 힘을 결코 잃는 일이 없으며 그 전환에 의해서 유용하고 유익하게도 되는가 하면 반대로 무용하고 해롭게도 된다고 한다. 이는 역으로 말해 똑똑함의 경우는 후천성만으로는 힘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고려하려고 한 노력이 인상깊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플라톤이 생각한 후천성은 선천성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천성에 위배되는 후천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은 유형별로 나누기는 어려우며 같은 선천성을 가지고 태어나도 다른 후천성으로 인해 다양해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유형에 정답을 내린 느낌이 들어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은 통치자에 대한 생각이다. 지난 토론에서 문득 통치자가 꼭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아내를 공유하고 사유재산도 못가지는 이런 자리가 과연 좋은 자리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선발 과정도 굉장히 많은 고난이 필요하다. 이런 모습을 통해 플라톤은 통치자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자리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문에서 언급되었듯이 플라톤은 통치자가 자기가 통치를 하고 싶어서 열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자리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통치자가 되려는 분열과 혼란이 없어질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이는 플라톤의 ‘내 것’과 ‘너 것’의 존재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생각과 일치하며 통치자의 사유재산 금지 논리와도 연결되게 된다. 이처럼 플라톤은 소유의 주인이 생기는 순간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들을 통해 봤을 때 결국에는 플라톤이 구상한 사회가 옳은, 행복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훌륭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 올바른 교육과 양육을 받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교육과 양육의 과정, 감시자의 평가들을 통과하여 좋음의 이데아를 경험한 소수만이 어둠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의 행복을 달성하는 형태의 사회처럼 보이지만, 해당사회 속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만들어진 사회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처음에 읽을 때는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느낌이 들어 여러모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계속 생각해보니, 이 책의 서술 자체가 통치자에게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사회적인 역할에는 그곳에만 꼭 중요한 능력과 성향 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치자에 대해 논했던 것처럼 다른 직업 혹은 사회적 역할을 달성함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들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만 보면 꼭 통치자의 희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생각을 가능하게 된 계기가 바로 통치자가 꼭 사회적으로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플라톤이 논의의 범위를 넓혔다면 통치자가 그랬듯이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민정2021-01-20 16:28
1기 조*준
의견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질문이 드는 부분도 있어 답변 남깁니다.
글에서 "통치자가 그랬듯이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하는 사회는 곧 능력주의, 자본주의, 경쟁주의적인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나라의 예로는 우리 나라가 떠오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자의 분야의 교육과 노력이 부족해서 행복하지 못한 걸까요? 우리 나라의 사회에는 큰 행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많은 걸까요?
의견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질문이 드는 부분도 있어 답변 남깁니다.
글에서 "통치자가 그랬듯이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한다면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를 구상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조금씩 희생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끊임없는 교육과 노력을 하는 사회는 곧 능력주의, 자본주의, 경쟁주의적인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나라의 예로는 우리 나라가 떠오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자의 분야의 교육과 노력이 부족해서 행복하지 못한 걸까요? 우리 나라의 사회에는 큰 행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많은 걸까요?
김민정2021-01-20 16:28
1기 권*현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일단 *균님의 통치자에 대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저번 토론시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통치자는 희생하는 존재,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저도 토론 이후에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치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균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통치자의 입장만을 바라봐서 통치자의 이득을 얻지 못하는 부분만 강조해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동의합니다. 플라톤은 어떻게 이야기 할지 궁금하네요. 만약 통치자 외의 사람들도 얻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그것에 해당할까요? 논의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일단 *균님의 통치자에 대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저번 토론시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면 통치자는 희생하는 존재,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저도 토론 이후에 어쩌면 남들이 보기에는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치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성균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통치자의 입장만을 바라봐서 통치자의 이득을 얻지 못하는 부분만 강조해서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동의합니다. 플라톤은 어떻게 이야기 할지 궁금하네요. 만약 통치자 외의 사람들도 얻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 그것에 해당할까요? 논의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51
1기 남*범
5권 앞부분을 재미있게 읽어서 *균님의 코멘트도 흥미로웠습니다.
아내의 공동소유는 말이 아내일 뿐이지, 남편 또한 포함하는 개념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훨씬 확장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이 개인에게 있어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 그러한 논리로 이해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을 예시로 들지만 461a부터의 논의의 경우 남녀 모두가 같은 자격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등, 한쪽이 다른쪽을 소유한다고 생각할지언정 나타나는 결과는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통치자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부분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사회의 구성원이 어느 정도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에 비해 개인의 이익이 너무 작아진다면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손해를 보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 희생일 지언정 사회적으로는 더 큰 행복일 것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5권 앞부분을 재미있게 읽어서 *균님의 코멘트도 흥미로웠습니다.
아내의 공동소유는 말이 아내일 뿐이지, 남편 또한 포함하는 개념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훨씬 확장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이 개인에게 있어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 그러한 논리로 이해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을 예시로 들지만 461a부터의 논의의 경우 남녀 모두가 같은 자격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등, 한쪽이 다른쪽을 소유한다고 생각할지언정 나타나는 결과는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통치자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부분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사회의 구성원이 어느 정도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에 비해 개인의 이익이 너무 작아진다면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손해를 보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어 희생일 지언정 사회적으로는 더 큰 행복일 것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9
1기 박*슬
<국가> 5-7권에는 ‘철인통치’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제시된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인식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기에 흥미롭기도 했다. ‘인식’과 ‘의견’의 구분은 현대의 인식론의 논의에서도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후대 철학자들이 ‘1차 자료’라고 부르는 것이 ‘인식’에, ‘2차 자료’라고 부르는 것이 ‘의견’과 대응되는 도식을 그려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인간이, 퀘스트를 수행하며 레벨 업을 하는 게임 속 캐릭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게임 속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의 예비 학문을 공부한 후에 변증술을 공부한 인간은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좋음 그 자체’를 볼 수 있으며, 통치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결국 삶이라는 게임 속 인간의 최종 퀘스트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학문들을 해낸 후, ‘좋음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인 거다. 그리고 이 퀘스트의 보상은, 자신이 인식한 바를 통치에 적용하고 타인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퀘스트를 수행한 사람에게는 통치자가 될 자격 뿐만 아니라 ‘의무’가 주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가 그의 본성을 온전히 발현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통치’라는 것을 퀘스트를 수행한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는 통치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번 주에 토론한 내용이 떠올랐다. 플라톤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국가에 그 능력을 환원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사상은 자칫 전체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수호자와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는 등의 제약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플라톤의 사상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한편 이번에 <국가> 중반부를 읽으면서 정말로 ‘좋음 그 자체’를 인식한 철학자라면 그에게 부과된 의무를 행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실제로 효율적으로 통치를 잘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이만큼 사회로부터 받았으니 이만큼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통치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내가 배우고 깨달은 바를 활용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배운 사람으로서의 선민의식이라기보다는, 그가 깨달은 바를 통해 국가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던 것 역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국가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희생’이며, ‘의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라는 단어가 가지는 거대한 이미지를 내려놓고 본다면, 내 주변 이웃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연대의 힘을 믿으며, 함께 살아갈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지난 몇 년 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플라톤의 글을 읽으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다소 이상적이고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고 또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늘 상기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의 삶 곳곳에 숨어있는 타인의 노고를 인지하며, 주변의 것들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질문] 플라톤은 본성상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인간이 한정되어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과연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가 조금 헷갈렸다. 생산자의 삶을 타고 난 사람은 절대 철학자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면 그는 한평생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모든 인간이 지혜, 인식, 지성에 의한 앎으로 대표되는 주관의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은, 살면서 단 한번도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이 본성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지난 시간에 지우님께서 남겨주신 코멘트와도 연관이 되는 질문인 것 같다. 지혜, 좋음 그 자체에 대한 인식 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면, 모든 사람에게 지혜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닐까?
<국가> 5-7권에는 ‘철인통치’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제시된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인식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기에 흥미롭기도 했다. ‘인식’과 ‘의견’의 구분은 현대의 인식론의 논의에서도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후대 철학자들이 ‘1차 자료’라고 부르는 것이 ‘인식’에, ‘2차 자료’라고 부르는 것이 ‘의견’과 대응되는 도식을 그려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인간이, 퀘스트를 수행하며 레벨 업을 하는 게임 속 캐릭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게임 속에서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의 예비 학문을 공부한 후에 변증술을 공부한 인간은 마치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좋음 그 자체’를 볼 수 있으며, 통치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결국 삶이라는 게임 속 인간의 최종 퀘스트는 앞서 언급한 다양한 학문들을 해낸 후, ‘좋음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인 거다. 그리고 이 퀘스트의 보상은, 자신이 인식한 바를 통치에 적용하고 타인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퀘스트를 수행한 사람에게는 통치자가 될 자격 뿐만 아니라 ‘의무’가 주어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철학자)가 그의 본성을 온전히 발현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사회에 기여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통치’라는 것을 퀘스트를 수행한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는 통치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번 주에 토론한 내용이 떠올랐다. 플라톤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국가에 그 능력을 환원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사상은 자칫 전체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수호자와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는 등의 제약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플라톤의 사상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한편 이번에 <국가> 중반부를 읽으면서 정말로 ‘좋음 그 자체’를 인식한 철학자라면 그에게 부과된 의무를 행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실제로 효율적으로 통치를 잘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이만큼 사회로부터 받았으니 이만큼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통치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내가 배우고 깨달은 바를 활용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배운 사람으로서의 선민의식이라기보다는, 그가 깨달은 바를 통해 국가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던 것 역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국가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희생’이며, ‘의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라는 단어가 가지는 거대한 이미지를 내려놓고 본다면, 내 주변 이웃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연대의 힘을 믿으며, 함께 살아갈 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지난 몇 년 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플라톤의 글을 읽으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다소 이상적이고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고 또 훌륭한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늘 상기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의 삶 곳곳에 숨어있는 타인의 노고를 인지하며, 주변의 것들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질문] 플라톤은 본성상 철학자가 될 수 있는 인간이 한정되어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과연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가 조금 헷갈렸다. 생산자의 삶을 타고 난 사람은 절대 철학자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면 그는 한평생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모든 인간이 지혜, 인식, 지성에 의한 앎으로 대표되는 주관의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은, 살면서 단 한번도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이 본성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 지난 시간에 지우님께서 남겨주신 코멘트와도 연관이 되는 질문인 것 같다. 지혜, 좋음 그 자체에 대한 인식 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면, 모든 사람에게 지혜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닐까?
김민정2021-01-20 16:29
1기 이*빈
교육받은 통치자라면 국가에 대한 의무를 희생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신선했습니다.
저는 글을 읽으며 플라톤이 전체주의자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있었는데, *슬님 글을 읽으며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범위를 줄여 생각해볼 수 있도록 내 주변 이웃으로 설명하셨는데, 이부분 또한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에 남기신 질문은 저번 시간부터 계속 이어진 궁금증인데, 수업시간에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교육받은 통치자라면 국가에 대한 의무를 희생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신선했습니다.
저는 글을 읽으며 플라톤이 전체주의자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있었는데, *슬님 글을 읽으며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범위를 줄여 생각해볼 수 있도록 내 주변 이웃으로 설명하셨는데, 이부분 또한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에 남기신 질문은 저번 시간부터 계속 이어진 궁금증인데, 수업시간에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29
1기 권*현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슬님의 플라톤이 이야기 하는 사회의 통치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희생을 희생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또한 지적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하는 행동에는 희생, 의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통치자들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슬님의 철학자가 아닌 사람은 평생 인간다워질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플라톤의 논의가 어느정도 통치자에 대한 논의로 치우쳐져 있는 것은 아닐까합니다. 예슬님이 생각하시는 플라톤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점은 통치자에게 한정지어 해당 되는 것이고 조금 더 넓게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될까하는 생각입니다...
무엇인가는 플라톤의 표현에 따르면, 타고난 성향에 맞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잘 읽었습니다:)
*슬님의 플라톤이 이야기 하는 사회의 통치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희생을 희생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또한 지적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하는 행동에는 희생, 의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통치자들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슬님의 철학자가 아닌 사람은 평생 인간다워질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플라톤의 논의가 어느정도 통치자에 대한 논의로 치우쳐져 있는 것은 아닐까합니다. 예슬님이 생각하시는 플라톤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점은 통치자에게 한정지어 해당 되는 것이고 조금 더 넓게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될까하는 생각입니다...
무엇인가는 플라톤의 표현에 따르면, 타고난 성향에 맞는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0
1기 송*우
원하지 않더라도 통치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면 통치자의 교육을 받고 의무를 져야 하는 플라톤의 관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읽는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슬 님의 코멘트를 읽고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플라톤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와 개인 중 꼭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이 곧 개인의 이익과 같음이 당연하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국가에 이바지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통치자들이 서로 통치하기 싫어하는 국가일수록 훌륭한 국가라는 플라톤의 말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됩니다.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이 제1선이지만 만약 국가가 너무 훌륭해서 자신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면, 그때 제2선인 자신(개인)의 욕망으로 돌아서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원하지 않더라도 통치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면 통치자의 교육을 받고 의무를 져야 하는 플라톤의 관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읽는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슬 님의 코멘트를 읽고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플라톤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와 개인 중 꼭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이 곧 개인의 이익과 같음이 당연하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국가에 이바지하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통치자들이 서로 통치하기 싫어하는 국가일수록 훌륭한 국가라는 플라톤의 말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됩니다.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이 제1선이지만 만약 국가가 너무 훌륭해서 자신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면, 그때 제2선인 자신(개인)의 욕망으로 돌아서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김민정2021-01-20 16:30
1기 권*수
플라톤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생각했던 인간은 이성과 욕망이 어우러져 있는 존재였던 것 같다. 특히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본성은 ‘이성’이다. 이는 그가 생각했던 ‘정의로움’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면 발견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개개인이 정의롭기 위해서는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의로움을 바라보면 세 계급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할 때 국가는 정의로운, 즉 옳은 상태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덕을 지닌 철학자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통치자 계급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소수의 지배자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써 아내를 공유하고, 사유재산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아주 엄격한 통제를 주장한다.
사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적인 국가관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을 해보니 플라톤의 국가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플라톤이 제시한 국가의 세세한 구성요건들은 당연히 오늘날과 맞지 않는 점이 많고, 더군다나 플라톤은 민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을 차치해두고 생각해보면, ‘이 사상 자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따르자는 것인지’를 고민함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이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엄격하게 수호자 계급을 통제하자는 주장에서 우리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청렴성과 지혜로움에 대한 강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양육과 이를 통한 계급의 결정은 집안이나 혈통에 따라 지배/피지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계급이 결정될 ‘기회’가 제공되어야 함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플라톤 철학에 던질 수 있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들이 옳다고 제시하는 것이 항상 참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철학자 계급으로 나뉜 집단도 결국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지혜와 덕을 지닌 것뿐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치자 계급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국가 통치에 있어 이들의 모든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정체는 옳지 못하다.
2주에 걸쳐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단편적으로만 접해왔던 ‘동굴의 비유’, ‘이데아론’, ‘철인통치’ 등에 대한 플라톤의 사상이 어떠한 흐름에서 등장한 것이었는지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데아’라는 완벽한 세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비판적인 입장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및 이와 연관된 철학적 개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옳은 것’에 대한 추구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우리 중 소수만이 이데아를 볼 수 있고 이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 대신, 우리 모두가 이데아로 여겨지는 완전한 것을,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선한 것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의 초반에서 치열하게 논쟁했던 ‘옳은 것’, 즉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통념적으로 보다 더 옳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좇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지 않을까.
플라톤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생각했던 인간은 이성과 욕망이 어우러져 있는 존재였던 것 같다. 특히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본성은 ‘이성’이다. 이는 그가 생각했던 ‘정의로움’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면 발견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개개인이 정의롭기 위해서는 이성이 기개의 도움을 받아 욕구를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의로움을 바라보면 세 계급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할 때 국가는 정의로운, 즉 옳은 상태가 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덕을 지닌 철학자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통치자 계급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소수의 지배자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로써 아내를 공유하고, 사유재산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아주 엄격한 통제를 주장한다.
사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적인 국가관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을 해보니 플라톤의 국가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플라톤이 제시한 국가의 세세한 구성요건들은 당연히 오늘날과 맞지 않는 점이 많고, 더군다나 플라톤은 민주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을 차치해두고 생각해보면, ‘이 사상 자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따르자는 것인지’를 고민함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이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엄격하게 수호자 계급을 통제하자는 주장에서 우리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청렴성과 지혜로움에 대한 강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양육과 이를 통한 계급의 결정은 집안이나 혈통에 따라 지배/피지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계급이 결정될 ‘기회’가 제공되어야 함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플라톤 철학에 던질 수 있는 비판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들이 옳다고 제시하는 것이 항상 참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철학자 계급으로 나뉜 집단도 결국에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지혜와 덕을 지닌 것뿐이지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치자 계급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국가 통치에 있어 이들의 모든 결정을 전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정체는 옳지 못하다.
2주에 걸쳐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단편적으로만 접해왔던 ‘동굴의 비유’, ‘이데아론’, ‘철인통치’ 등에 대한 플라톤의 사상이 어떠한 흐름에서 등장한 것이었는지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데아’라는 완벽한 세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비판적인 입장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데아 및 이와 연관된 철학적 개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옳은 것’에 대한 추구이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 우리 중 소수만이 이데아를 볼 수 있고 이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 대신, 우리 모두가 이데아로 여겨지는 완전한 것을,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선한 것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의 초반에서 치열하게 논쟁했던 ‘옳은 것’, 즉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통념적으로 보다 더 옳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좇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이지 않을까.
김민정2021-01-20 16:31
1기 박*슬
*수님에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 남깁니다.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결지어보는 것은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인식'한 것은 세계의 절대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지적해주신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저 역시 과연 정말로 '이데아'가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우며,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이를 인식할 수 있는지 더 깊게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지속되어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님에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코멘트 남깁니다.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결지어보는 것은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인식'한 것은 세계의 절대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지적해주신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저 역시 과연 정말로 '이데아'가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우며,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이를 인식할 수 있는지 더 깊게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지속되어야 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1
1기 이*현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정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긴 불가능하지만, 더 옳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좇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행복관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정의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긴 불가능하지만, 더 옳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좇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행복관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1
1기 권*현
저번 논의에 해당하는 <국가>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으로 바라본 나라에 가장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통치자)을 맡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이어서, 이번 주에 해당하는 책의 후반부에서는 플라톤이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지, 왜 일반 사람들보다 철학자가 통치자에 더 적합한지를 설명했다. 플라톤에게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추구하는 지식(앎)의 체계가 보통 사람보다 넓은 사람(가시적이고 감각을 통한 것에서부터 이데아와 같은 차원까지)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플라톤에게는 이런 지혜를 사랑함, 추구하는 지식의 폭이 넓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자산, 사랑, 가정을 포기하는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사회의 통치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아무리 본성적으로 지혜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변의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면 그 사람은 철학자, 통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플라톤은 개인적인 성향을 중요시 하는 만큼, 사회의 영향력도 중요시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전 통치자의 지배 아래의) 좋은 환경에서 타고난 성향을 잘 발전시킨 철학자이나 통치자가 후대의 철학자나 통치자를 위해서 통치를 맡아, 교육을 정비하고, 제대로 나라를 운영한다면, 성향이 드러나지 못 하고 져버리는 일을 만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저번 시간 논의에서 이야기했던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나라로부터의 받는 혜택에 대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사회인으로의 성장을 조금 더 무겁게, 진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름대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보았는데, 한편으로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 지혜를 사랑하는 것과 추구하는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 그것이 과연 행복일지에 대한 고민은 든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본성이 개인에게, 또 사회에게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개인의 삶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삶과 관계를 맺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함께 인식하다보면 비교라는 것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고, 그것에서 오는 감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본성이 개인, 국가에 온전하게 잘 발현되도록 하는 방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이성으로 쉽게 누를 수 있고,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큰 허점을 가지는 것 같다.
저번 논의에 해당하는 <국가>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가장 이상적으로 바라본 나라에 가장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통치자)을 맡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이어서, 이번 주에 해당하는 책의 후반부에서는 플라톤이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지, 왜 일반 사람들보다 철학자가 통치자에 더 적합한지를 설명했다. 플라톤에게 철학자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추구하는 지식(앎)의 체계가 보통 사람보다 넓은 사람(가시적이고 감각을 통한 것에서부터 이데아와 같은 차원까지)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플라톤에게는 이런 지혜를 사랑함, 추구하는 지식의 폭이 넓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자산, 사랑, 가정을 포기하는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사회의 통치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아무리 본성적으로 지혜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변의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면 그 사람은 철학자, 통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플라톤은 개인적인 성향을 중요시 하는 만큼, 사회의 영향력도 중요시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전 통치자의 지배 아래의) 좋은 환경에서 타고난 성향을 잘 발전시킨 철학자이나 통치자가 후대의 철학자나 통치자를 위해서 통치를 맡아, 교육을 정비하고, 제대로 나라를 운영한다면, 성향이 드러나지 못 하고 져버리는 일을 만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저번 시간 논의에서 이야기했던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나라로부터의 받는 혜택에 대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사회인으로의 성장을 조금 더 무겁게, 진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름대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보았는데, 한편으로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 지혜를 사랑하는 것과 추구하는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 그것이 과연 행복일지에 대한 고민은 든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본성이 개인에게, 또 사회에게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개인의 삶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삶과 관계를 맺게 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함께 인식하다보면 비교라는 것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고, 그것에서 오는 감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본성이 개인, 국가에 온전하게 잘 발현되도록 하는 방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이성으로 쉽게 누를 수 있고,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큰 허점을 가지는 것 같다.
김민정2021-01-20 16:31
1기 박*민
*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소현님께서 마지막 문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인간의 본성을 잘 발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려는 것이 허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현대에서는 어떻게 적용하면 바람직할지에 대해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소현님께서 마지막 문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인간의 본성을 잘 발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려는 것이 허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현대에서는 어떻게 적용하면 바람직할지에 대해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2
1기 장*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정과 이성, 개인과 사회의 측면으로 바라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인 성향, 사회적인 영향력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제가 구분한 선천성과 후천성의 생각과 유사해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플라톤이 생각한 행복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플라톤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너무 집중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전체적인 면이 아닌 개개인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과정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끝부분에 비교에 대해 언급해주셨는데,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플라톤이 개개인이 서로 비교하는 과정에서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이해했는데, 만약 플라톤이라면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정과 이성, 개인과 사회의 측면으로 바라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인 성향, 사회적인 영향력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제가 구분한 선천성과 후천성의 생각과 유사해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플라톤이 생각한 행복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플라톤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너무 집중한 것이 아니었나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전체적인 면이 아닌 개개인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과정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끝부분에 비교에 대해 언급해주셨는데,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플라톤이 개개인이 서로 비교하는 과정에서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이해했는데, 만약 플라톤이라면 이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2
1기 송*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통치자들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번 강렬한 쾌락을 누려본 자가 그 쾌락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듯이, 동굴에 갇혀서 그림자만 보다가 지상으로 올라가 태양을 인식한 자는 다시 동굴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를 다시 동굴로 내려보낸다는 것은 (앎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얻은 쾌락을 빼앗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전에는 몰랐던 끔찍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것은 내적 괴로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처럼, 동굴 속 죄수들에게 자신이 지상에서 본 것을 설파하려 한다면 낯선 것에 반발심을 느낀 죄수들이 그를 죽여 버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517a).
이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통치자들을 어느 정도 교육한 후 다시 동굴로 내려가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훌륭하게 자라난 통치자들은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훌륭한 교육으로 말미암아 탄생한다. 플라톤이 직접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나, 통치자 개개인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반이 잘되는 것이 목적이므로, 국가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개인에 우선하여) 국가가 잘되도록 봉사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받은 자들은 태양에서 멀어져, 일반 시민들과 노고와 명예를 나누는 속세적, 실천적 삶을 무려 15년간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괴로울지라도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인간은 혼 속의 좋은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4권까지 읽은 후에는 플라톤의 ‘올바름’의 정의가 새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체계화하는 방식이 다를 뿐, 지혜나 용기 같은 것들은 옛날 학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7권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플라톤의 올바름은 현재의 관점에서도 익숙한 것은 아니다. 앞서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를 먼저 정의한 뒤, 거기에 유비해서 올바른 인간을 정의했다. 그러나 결국에 올바른 국가와 올바른 인간은 별개가 아니다. 올바른 인간은 곧 ‘국가를 위해’ 올바른 인간이다. 책에서는 통치자들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마 다른 계급의 시민들에게도 같은 가치를 요구할 것이다. 생산자들은 모름지기 생산만을 잘하는 것이 미덕인데, 생산을 잘하는 것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유익해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조화를 위해 유익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유교와 성리학의 국가인 한국에서 ‘올바름’이라고 하면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선함, 너그러움, 효성이 깊음, 낭비하지 않음, 중용 등. 대체로 개인의 정신 수양과 관련된 성향들이지,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취존’ 문화가 자리잡은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사람은 자기만의 꿈을 좇을 수 있어야 하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현대인의 모토다. 그래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안정을 찾아 공무원 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은 거의 멸시마저 당한다. 개인과 개성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그만큼 중요해진 사회다. 삶을 바쳐 국가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역시, 누가 ‘행복한 사회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런 대답을 했을 것 같다. 모두가 부당함 없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 수업 교수님의 말씀 중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결국 가장 뛰어난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든 말든) 통치를 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개인이 중요해졌다 한들 인간은 공동체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꿈을 좇을 수 있어야 한다지만, 애초에 꿈 같은 것을 꿀 수 있는 것은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주의가 잘 자리잡으려면, 우선은 좋은 공동체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플라톤의 관점을 마냥 비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용하기 힘든 면이 있긴 해도 결국 국가가 좋아지는 것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완전히 희생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 선은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할까? 국가나 개인, 어느 한쪽을 설득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통치자들이 ‘다시 동굴로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번 강렬한 쾌락을 누려본 자가 그 쾌락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듯이, 동굴에 갇혀서 그림자만 보다가 지상으로 올라가 태양을 인식한 자는 다시 동굴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를 다시 동굴로 내려보낸다는 것은 (앎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얻은 쾌락을 빼앗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전에는 몰랐던 끔찍한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것은 내적 괴로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처럼, 동굴 속 죄수들에게 자신이 지상에서 본 것을 설파하려 한다면 낯선 것에 반발심을 느낀 죄수들이 그를 죽여 버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517a).
이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통치자들을 어느 정도 교육한 후 다시 동굴로 내려가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통치자들에게 일종의 의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훌륭하게 자라난 통치자들은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훌륭한 교육으로 말미암아 탄생한다. 플라톤이 직접 ‘의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나, 통치자 개개인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반이 잘되는 것이 목적이므로, 국가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개인에 우선하여) 국가가 잘되도록 봉사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받은 자들은 태양에서 멀어져, 일반 시민들과 노고와 명예를 나누는 속세적, 실천적 삶을 무려 15년간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괴로울지라도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인간은 혼 속의 좋은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4권까지 읽은 후에는 플라톤의 ‘올바름’의 정의가 새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체계화하는 방식이 다를 뿐, 지혜나 용기 같은 것들은 옛날 학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7권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플라톤의 올바름은 현재의 관점에서도 익숙한 것은 아니다. 앞서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를 먼저 정의한 뒤, 거기에 유비해서 올바른 인간을 정의했다. 그러나 결국에 올바른 국가와 올바른 인간은 별개가 아니다. 올바른 인간은 곧 ‘국가를 위해’ 올바른 인간이다. 책에서는 통치자들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마 다른 계급의 시민들에게도 같은 가치를 요구할 것이다. 생산자들은 모름지기 생산만을 잘하는 것이 미덕인데, 생산을 잘하는 것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유익해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조화를 위해 유익하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유교와 성리학의 국가인 한국에서 ‘올바름’이라고 하면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선함, 너그러움, 효성이 깊음, 낭비하지 않음, 중용 등. 대체로 개인의 정신 수양과 관련된 성향들이지,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취존’ 문화가 자리잡은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사람은 자기만의 꿈을 좇을 수 있어야 하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현대인의 모토다. 그래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안정을 찾아 공무원 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은 거의 멸시마저 당한다. 개인과 개성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그만큼 중요해진 사회다. 삶을 바쳐 국가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역시, 누가 ‘행복한 사회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런 대답을 했을 것 같다. 모두가 부당함 없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난번 수업 교수님의 말씀 중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결국 가장 뛰어난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든 말든) 통치를 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개인이 중요해졌다 한들 인간은 공동체를 벗어나서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꿈을 좇을 수 있어야 한다지만, 애초에 꿈 같은 것을 꿀 수 있는 것은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주의가 잘 자리잡으려면, 우선은 좋은 공동체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플라톤의 관점을 마냥 비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용하기 힘든 면이 있긴 해도 결국 국가가 좋아지는 것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완전히 희생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 선은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할까? 국가나 개인, 어느 한쪽을 설득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김민정2021-01-20 16:33
1기 조*준
안녕하세요,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적어주신 글을 읽고 든 생각을 적어 봅니다.
유교와 성리학의 국가인 한국에서 올바름과 관련된 성향들은 대체로 "개인의 정신 수양과 관련된 성향들이지,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성리학의 가치들은 가족, 가문, 국가에 대한 효, 충을 강조하는, 개인의 안녕을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교적 최근에 서양에서 발명된 개념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동양에서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 개인주의를 잘 받아들인, 서구보다도 더 서구화된 사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이 필요한데, 이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 것인가 하고 질문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적어도 국가의 입장에서, 물질적 이익의 입장에서 가장 교묘하게 잘 해결한 것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을(노동을) 돈으로 보상함으로서 희생을 희생이라 여기지 않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을(통치를) 돈으로 보상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통치의 과정에서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국가의 지도적인 이득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명예와 같은 수단으로 보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명예는 돈과 달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정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평판 포인트제와 같이 명예가 돈처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량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돈처럼 명예를 위해 서로 희생하려 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지금보다 긍정적인 모습일까요?
안녕하세요,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적어주신 글을 읽고 든 생각을 적어 봅니다.
유교와 성리학의 국가인 한국에서 올바름과 관련된 성향들은 대체로 "개인의 정신 수양과 관련된 성향들이지,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성리학의 가치들은 가족, 가문, 국가에 대한 효, 충을 강조하는, 개인의 안녕을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교적 최근에 서양에서 발명된 개념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동양에서 플라톤처럼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둔 가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 개인주의를 잘 받아들인, 서구보다도 더 서구화된 사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이 필요한데, 이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 것인가 하고 질문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적어도 국가의 입장에서, 물질적 이익의 입장에서 가장 교묘하게 잘 해결한 것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을(노동을) 돈으로 보상함으로서 희생을 희생이라 여기지 않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개인의 국가를 위한 희생을(통치를) 돈으로 보상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통치의 과정에서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국가의 지도적인 이득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명예와 같은 수단으로 보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명예는 돈과 달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정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평판 포인트제와 같이 명예가 돈처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정량가능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명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돈처럼 명예를 위해 서로 희생하려 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지금보다 긍정적인 모습일까요?
김민정2021-01-20 16:33
1기 박*민
지난 논의에 이어서, 6권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나라의 운영, 나라의 경영과 관련되는 것들이지만 정작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철학을 가볍게 보는 시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철학은, 그저 젊어서 잠시 해볼만한 것일 뿐, 철학에 긴 세월을 목매고 연구하다가는 그저 무능한 사람이 되버릴 것이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오래 전의 당대 사람들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금의 인식과도 별반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정말 신기했다. 사실 인문학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살며 이러한 인식이 너무 안타까웠다. 취업 시장에서도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 인문학은 경시되고 이공계 전공자 혹은 그나마 상경 계열이 인기있는 현상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다. 나 또한 기존에 철학 전공으로 진입을 했지만 그후 전공을 변경하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현실적인 조언 아닌 조언도 그 이유 중 은근히 한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철학을 경시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은 지금 이 시점이 오히려 인문학, 그리고 철학이 우리에게 사고하는 힘을 길러줄 것이라 믿는다. 나라 운영, 정치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지도자가 어떤 식으로 국가를 통치할 지에 대한 제대로 된 운영철학을 생각하고 고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라의 운영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하며 ‘좋음’에 대한 논의를 끝마친 뒤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하며 철학을 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가는데, 동굴 안은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세계지만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실재 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동굴 밖, 실재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바로 철학을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과정이 정말 여러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가능한데, 이마저도 정작 통치자가 되고 나면 사유재산부터 본인만의 가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소위 말해 ‘극한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공동체, 그리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이라는 일념과 막연한 희망 하에 그러한 것이라면 정말 가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본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선천적 재능에 의해 결정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통치자의 자질을 위한 좋은 교육 단계는 필수적이겠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 잘 맞게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플라톤은 인간의 사유과정과 철학, 이성적 생각을 중시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발언을 통해 나타난 것처럼 그는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제대로 된 운영을 위해서는 동굴 밖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교육 과정과 사유를 필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그의 생각과 함께 이러한 유능한 통치자가 운영할 국가의 국민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작 그가 생각하는 통치자의 삶이 행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다만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 맞게 논의해본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난 논의에 이어서, 6권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나라의 운영, 나라의 경영과 관련되는 것들이지만 정작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철학을 가볍게 보는 시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철학은, 그저 젊어서 잠시 해볼만한 것일 뿐, 철학에 긴 세월을 목매고 연구하다가는 그저 무능한 사람이 되버릴 것이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오래 전의 당대 사람들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금의 인식과도 별반 다름이 없음을 깨닫고 정말 신기했다. 사실 인문학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살며 이러한 인식이 너무 안타까웠다. 취업 시장에서도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인해 인문학은 경시되고 이공계 전공자 혹은 그나마 상경 계열이 인기있는 현상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다. 나 또한 기존에 철학 전공으로 진입을 했지만 그후 전공을 변경하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현실적인 조언 아닌 조언도 그 이유 중 은근히 한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철학을 경시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은 지금 이 시점이 오히려 인문학, 그리고 철학이 우리에게 사고하는 힘을 길러줄 것이라 믿는다. 나라 운영, 정치에 있어서도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지도자가 어떤 식으로 국가를 통치할 지에 대한 제대로 된 운영철학을 생각하고 고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라의 운영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하며 ‘좋음’에 대한 논의를 끝마친 뒤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하며 철학을 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가는데, 동굴 안은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세계지만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실재 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동굴 밖, 실재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과정이 바로 철학을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과정이 정말 여러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가능한데, 이마저도 정작 통치자가 되고 나면 사유재산부터 본인만의 가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소위 말해 ‘극한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공동체, 그리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이라는 일념과 막연한 희망 하에 그러한 것이라면 정말 가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본인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선천적 재능에 의해 결정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통치자의 자질을 위한 좋은 교육 단계는 필수적이겠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 잘 맞게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플라톤은 인간의 사유과정과 철학, 이성적 생각을 중시한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발언을 통해 나타난 것처럼 그는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제대로 된 운영을 위해서는 동굴 밖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교육 과정과 사유를 필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그의 생각과 함께 이러한 유능한 통치자가 운영할 국가의 국민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작 그가 생각하는 통치자의 삶이 행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다만 이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 사회에 맞게 논의해본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16:33
1기 김*현
관찰되는 인간의 모습, 속성으로서의 인간다움과 나아가야할 방향으로서의 좋은 인간다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철학자가 통치해야 하는 이유와 그런 통치자를 얻기 위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양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주 내용으로 읽혔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란 통치자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 자체의 모습이기 보다는 가장 이상적인, 좋은, 통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가장 좋은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진리,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보인다.
(476b,c,d)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언급하며 의견을 갖고 꿈을 꾸는 상태와 인식을 갖고 깬 상태를 구분한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좋은 인간이란 인식하는 인간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518e,519a)를 보면 똑똑함의 훌륭함은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똑똑함을 담는 그릇인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며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존재임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플라톤 스스로도 이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72e,536c). 한편으로는 지혜, 인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부차적으로 (505d)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는 것 같다. 플라톤이 보는 인간은 이처럼 진리, 지혜를 사랑하며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쁜 일들의 종식이 없을 것이라 말한다. 통치자의 자질로 이어지는 철학자의 성향, 최선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올바른 양육을 거칠 때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이를 위해 좋은 성향을 가진 이들이 양육의 신세를 지며 양쪽생활(520b) 즉 관상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 양쪽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통치자의 양육을 위하여 가장 견실하고 용감하며 잘 생긴 자, 교육에 적합한 성향을 지닌 자들을 선발하여 교육하여야 하며, 산술, 기하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이러한 과정 중에서 적합하지 않은 자가 논변에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539d). 마지막으로 관직에 일하는 등의 시험을 거치고 쉰 살이 되었을 때 모든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차례에 따라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나는 이러한 플라톤의 논의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나 대중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보다 당장의 자신의 편익을 위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아름다운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고 그렇게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플라톤의 기준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막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교육의 과정에서 시험을 거쳐 걸러낸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험의 평가과정이 올바르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감독관이 필요하다. 실현이 언제나 이상에 못 미치는 세상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좋은 성향이란 것이 좋은 양육환경을 만나지 못하면 흔한 성향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듯이,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방식은 완전하지 않다면 흔한 교육보다 못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육의 방식을 떠나 한편으로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사람이 통치를 하게 되는 구조 자체가 안정적 통치를 보장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아무리 철학자의 성향을 갖고 지혜를 사랑한다 한들 스스로가 열망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전력을 다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통치에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냐고 물으면 그것 또한 논의의 대상이겠지만 스스로 열망하지 않는다면 외부의 악영향을 받기 쉽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자의 교육과정에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부분은 논변에 참여하는 사람을 제한시키는 부분 이였다. 젊은이들이 논변을 맛보지 않도록 한다(539b)는것 자체가 젊은이들의 사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보였다. 진정한 철학자의 성향이 있고 통치자의 자질이 있다면 어떤 적합하지 않은 자가 접근하고 어떠한 논변의 남용이 이루어지더라도 자신의 뜻을 세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생각과 경험의 자유를 제한하는 부분에서 그 결과가 최선의 것이 될 수 있는지가 불확실해진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통치자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과연 그 결과물인 통치자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신과 같은 올바른 진리의 시각을 얻을 수 있게 해줌을 보장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현대의 민주주의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행복과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이 좋은 통치자에게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황에 따라서는 조용히 지내며 자신의 일을 찾아 하는 것이 행복과 좋은 삶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496d).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서 오는 제약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하며 성취를 이루어 가는 것이, 행복과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찰되는 인간의 모습, 속성으로서의 인간다움과 나아가야할 방향으로서의 좋은 인간다움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는 철학자가 통치해야 하는 이유와 그런 통치자를 얻기 위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양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주 내용으로 읽혔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란 통치자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 자체의 모습이기 보다는 가장 이상적인, 좋은, 통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가장 좋은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진리,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보인다.
(476b,c,d)에서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언급하며 의견을 갖고 꿈을 꾸는 상태와 인식을 갖고 깬 상태를 구분한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좋은 인간이란 인식하는 인간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518e,519a)를 보면 똑똑함의 훌륭함은 무엇보다도 신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똑똑함을 담는 그릇인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며 그렇게 완전하지 않은 존재임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플라톤 스스로도 이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72e,536c). 한편으로는 지혜, 인식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부차적으로 (505d)를 보면 많은 사람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는 것 같다. 플라톤이 보는 인간은 이처럼 진리, 지혜를 사랑하며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쁜 일들의 종식이 없을 것이라 말한다. 통치자의 자질로 이어지는 철학자의 성향, 최선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올바른 양육을 거칠 때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이를 위해 좋은 성향을 가진 이들이 양육의 신세를 지며 양쪽생활(520b) 즉 관상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 양쪽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통치자의 양육을 위하여 가장 견실하고 용감하며 잘 생긴 자, 교육에 적합한 성향을 지닌 자들을 선발하여 교육하여야 하며, 산술, 기하학, 천문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이러한 과정 중에서 적합하지 않은 자가 논변에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539d). 마지막으로 관직에 일하는 등의 시험을 거치고 쉰 살이 되었을 때 모든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차례에 따라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나는 이러한 플라톤의 논의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나 대중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보다 당장의 자신의 편익을 위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아름다운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고 그렇게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플라톤의 기준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막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교육의 과정에서 시험을 거쳐 걸러낸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험의 평가과정이 올바르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감독관이 필요하다. 실현이 언제나 이상에 못 미치는 세상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좋은 성향이란 것이 좋은 양육환경을 만나지 못하면 흔한 성향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내듯이,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방식은 완전하지 않다면 흔한 교육보다 못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육의 방식을 떠나 한편으로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사람이 통치를 하게 되는 구조 자체가 안정적 통치를 보장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아무리 철학자의 성향을 갖고 지혜를 사랑한다 한들 스스로가 열망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전력을 다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통치에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냐고 물으면 그것 또한 논의의 대상이겠지만 스스로 열망하지 않는다면 외부의 악영향을 받기 쉽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자의 교육과정에서 가장 의문이 들었던 부분은 논변에 참여하는 사람을 제한시키는 부분 이였다. 젊은이들이 논변을 맛보지 않도록 한다(539b)는것 자체가 젊은이들의 사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보였다. 진정한 철학자의 성향이 있고 통치자의 자질이 있다면 어떤 적합하지 않은 자가 접근하고 어떠한 논변의 남용이 이루어지더라도 자신의 뜻을 세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어졌다. 생각과 경험의 자유를 제한하는 부분에서 그 결과가 최선의 것이 될 수 있는지가 불확실해진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통치자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과연 그 결과물인 통치자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신과 같은 올바른 진리의 시각을 얻을 수 있게 해줌을 보장할 수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현대의 민주주의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행복과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이 좋은 통치자에게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황에 따라서는 조용히 지내며 자신의 일을 찾아 하는 것이 행복과 좋은 삶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496d). 선택하지 않은 환경에서 오는 제약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하며 성취를 이루어 가는 것이, 행복과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16:33
1기 이*빈
굉장히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교육을 거쳐 지혜를 갖춘 사람을 선발하는 것만으로 항상 이성적이고 올바른 통치를 하는 통치자를 뽑을 수 있는지,
이런 방식이 행복한 삶과 올바르게 운영되는 국가를 보장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굉장히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교육을 거쳐 지혜를 갖춘 사람을 선발하는 것만으로 항상 이성적이고 올바른 통치를 하는 통치자를 뽑을 수 있는지,
이런 방식이 행복한 삶과 올바르게 운영되는 국가를 보장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3
1기 남*범
안녕하세요, 김*현님의 코멘트를 흥미롭게 읽어서 댓글 남깁니다.
스스로가 열망하지 않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나는 하기 싫지만, 내가 하면 지금 지도자보다는 잘할 것이다” 라는 의도로 비꼬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시키는 그 주체가 누구인지 또한 답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플라톤이 추가적인 논의를 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철인이 업무 자체를 가장 잘할 사람이라면, 공동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그가 통치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언급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떤 정치체제에서든 자기만의 일을 해내는 것은 그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 왜 더더욱 그러한 자세가 중요한지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현님의 코멘트를 흥미롭게 읽어서 댓글 남깁니다.
스스로가 열망하지 않는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나는 하기 싫지만, 내가 하면 지금 지도자보다는 잘할 것이다” 라는 의도로 비꼬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시키는 그 주체가 누구인지 또한 답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플라톤이 추가적인 논의를 하지 않아 아쉽습니다. 철인이 업무 자체를 가장 잘할 사람이라면, 공동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그가 통치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또한, 마지막 문단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언급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떤 정치체제에서든 자기만의 일을 해내는 것은 그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 왜 더더욱 그러한 자세가 중요한지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3
@김민정
1기 김*현
플라톤이 교육을 강제할 수 없다고 말한것을 보면 통치 또한 철인에게 강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철인이 스스로 통치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 중에 통치를 하기를 약속하고 교육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교육대상자가 알 수 있게끔 교육하는것이 철인이 마지못해서라도, 자발적으로 통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생존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선 공동체와 관련된 일들 중 생존을 넘어선 일에 대한 논의 보다도 자기만의 일에서 행복을 찾는 자세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이 교육을 강제할 수 없다고 말한것을 보면 통치 또한 철인에게 강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철인이 스스로 통치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 중에 통치를 하기를 약속하고 교육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런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교육대상자가 알 수 있게끔 교육하는것이 철인이 마지못해서라도, 자발적으로 통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생존을 위한 노력의 과정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선 공동체와 관련된 일들 중 생존을 넘어선 일에 대한 논의 보다도 자기만의 일에서 행복을 찾는 자세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4
1기 김*범
플라톤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철학하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플라톤은 인간의 앎이 무엇인지를 계층에 따라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형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배움임을 밝혔다.
지혜 사랑을 개인으로써, 사회로써 가장 온전하게 발현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이들을 선발하여 교육하고 나라를 통치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플라톤은 대화에서 상당히 긴 부분을 할애하여 교육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각 과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체육 훈련과 시가 교육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와 계산, 그리고 평면/입체 기하학을 교육하여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수학적 대상 자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현대 대수학이 수학의 힘을 빌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는 설명하기조차 어렵거나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무한한 대상을 다루는 것을 생각하면 실용적인 산수뿐만 아니라 수학 자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도 유효한 것 같아 놀랍다.
행복 내지는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조금은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여기에서 욕구의 범위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 느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지도 못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욕구를 알고 있다’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 세상과 천체들을 보고 온 자가 다시 어둠 속으로 보내졌을 때 오히려 어둠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거리가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욕구를 추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욕구가 아닌 이상 아무리 그것이 좋다고 설득한들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거부를 무릅쓰고 밝은 바깥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과 지난 수업에서 제기되었던 ‘서울대학교의 존재 의의’에 대한 질문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은, 서울대학교는, 지혜를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춘 이들을 모아 ‘학문의 세계’로 내몰고 지혜 사랑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이 알게 된 지혜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을 것이고, 많은 학생들은 분명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질문은 학생 개인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국민들이 지원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학생들이 ‘예비 수호자’의 길을 걷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충분히 사회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계속해서 지혜를 추구하여 교수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수호자의 덕목으로, 스스로가 지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대학 졸업생의 일부가 ‘수호자’가 된다고 하면 교수는 후대의 수호자를 가르치는 셈이다. 현실에서 정치인이 직접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생겨난 일종의 지적 분업은 아닐까?
플라톤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그가 생각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철학하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플라톤은 인간의 앎이 무엇인지를 계층에 따라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형상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배움임을 밝혔다.
지혜 사랑을 개인으로써, 사회로써 가장 온전하게 발현하기 위해서는 준비된 이들을 선발하여 교육하고 나라를 통치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플라톤은 대화에서 상당히 긴 부분을 할애하여 교육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각 과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체육 훈련과 시가 교육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와 계산, 그리고 평면/입체 기하학을 교육하여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수학적 대상 자체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현대 대수학이 수학의 힘을 빌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는 설명하기조차 어렵거나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무한한 대상을 다루는 것을 생각하면 실용적인 산수뿐만 아니라 수학 자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도 유효한 것 같아 놀랍다.
행복 내지는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조금은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여기에서 욕구의 범위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 느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지도 못한 요구를 충족할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욕구를 알고 있다’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 세상과 천체들을 보고 온 자가 다시 어둠 속으로 보내졌을 때 오히려 어둠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거리가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욕구를 추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욕구가 아닌 이상 아무리 그것이 좋다고 설득한들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거부를 무릅쓰고 밝은 바깥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과 지난 수업에서 제기되었던 ‘서울대학교의 존재 의의’에 대한 질문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은, 서울대학교는, 지혜를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춘 이들을 모아 ‘학문의 세계’로 내몰고 지혜 사랑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이 알게 된 지혜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을 것이고, 많은 학생들은 분명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질문은 학생 개인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국민들이 지원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학생들이 ‘예비 수호자’의 길을 걷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충분히 사회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계속해서 지혜를 추구하여 교수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수호자의 덕목으로, 스스로가 지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대학 졸업생의 일부가 ‘수호자’가 된다고 하면 교수는 후대의 수호자를 가르치는 셈이다. 현실에서 정치인이 직접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생겨난 일종의 지적 분업은 아닐까?
김민정2021-01-20 16:37
1기 권*수
남*범님의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철학하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라는 표현으로 플라톤의 생각을 잘 드러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의 후반부에서 지난주 논의에 대한 의견을 적어주셨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동의하는 바가 많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도록 하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에 대학은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지원해주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대학과 학생들 역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모종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할 것이라 생각되고, 그 노력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지는 깊이 고민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남*범님의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철학하는 인간이 가장 인간답다'라는 표현으로 플라톤의 생각을 잘 드러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의 후반부에서 지난주 논의에 대한 의견을 적어주셨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도 동의하는 바가 많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도록 하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에 대학은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지원해주는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대학과 학생들 역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모종의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할 것이라 생각되고, 그 노력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지는 깊이 고민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4
1기 남*범
플라톤은 인간에게 영혼과 이데아가 있으며, 그 본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누구나 불변하는 강점과 약점이 정해진다고 논의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할 때,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가장 크며 자신 또한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인간다움은 공동체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런 일반적인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사물 너머에 있는 본질, 이데아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작중 소크라테스는 그 대중 속에서, 세상의 본질을 느낄 수 있고 또 알고자 갈망할 수 있는 재능을 이상적인 통치자의 자격이라고 말한다. 진리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이성을 인간의 특권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철인이기 때문에 이데아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이데아가 있다면, 그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 같이 가정을 줄줄이 이어간다. 그 가정들을 청자에게 매 번 이해시키며, 그것이 보편적으로 옳게 여겨진다는 것을 전제로 말을 이어나간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대부분의 인간이 우매하다고 주장했음에도, 그의 꿈 속의 이상적인 공동체에서는 인간이 진리의 존재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성과 철학이 인간다운 사회의 구성원의 가장 큰 덕목일 것이라는 가정이 논리의 기저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로서 인간다움이 발현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양성과 선별 모두 이루어지는 교육 절차로서, 수학과 과학 그리고 논증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공부한 진실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보며 실천의 영역을 깨우치는 것도 포함한다. 플라톤은 시험제도 또한 언급하며 모든 교육을 이수하고 쉰 세에 도달한 철인들이 통치하는 사회를 올바른 사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인간 사회를 동굴로 비유한다.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그림자를 만드는 빛을 이해하는 철인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교육에는 현실성뿐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가 존재한다. 닭과 달걀의 문제로, 누가 교육을 할 것이며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철인이 이미 존재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순환적인 문제가 된다. 이러한 모순 또한 인간 본성이 올바르며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물에 절대적인 정의와 선이 정의되지 않으며, 그 모습은 항상 변화하고, 그 본질이란 것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각자의 독립된 세계에 살며, 각자가 사물을 관측하고 생각하는 바가 바로 그 세계에 있어서 사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통치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개인의 세계 안에서는 본인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나갈지를 정하는 과정에 플라톤의 논의를 적용할 수 있다. 그 내부에서 자신이 철인이 되고자 한다면, 겉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또한 인간답고 행복한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에게 영혼과 이데아가 있으며, 그 본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누구나 불변하는 강점과 약점이 정해진다고 논의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인간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할 때,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가장 크며 자신 또한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인간다움은 공동체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런 일반적인 인간은 겉으로 보이는 사물 너머에 있는 본질, 이데아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작중 소크라테스는 그 대중 속에서, 세상의 본질을 느낄 수 있고 또 알고자 갈망할 수 있는 재능을 이상적인 통치자의 자격이라고 말한다. 진리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이성을 인간의 특권으로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철인이기 때문에 이데아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이데아가 있다면, 그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 같이 가정을 줄줄이 이어간다. 그 가정들을 청자에게 매 번 이해시키며, 그것이 보편적으로 옳게 여겨진다는 것을 전제로 말을 이어나간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대부분의 인간이 우매하다고 주장했음에도, 그의 꿈 속의 이상적인 공동체에서는 인간이 진리의 존재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성과 철학이 인간다운 사회의 구성원의 가장 큰 덕목일 것이라는 가정이 논리의 기저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로서 인간다움이 발현되려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양성과 선별 모두 이루어지는 교육 절차로서, 수학과 과학 그리고 논증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공부한 진실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보며 실천의 영역을 깨우치는 것도 포함한다. 플라톤은 시험제도 또한 언급하며 모든 교육을 이수하고 쉰 세에 도달한 철인들이 통치하는 사회를 올바른 사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인간 사회를 동굴로 비유한다.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그림자를 만드는 빛을 이해하는 철인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교육에는 현실성뿐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가 존재한다. 닭과 달걀의 문제로, 누가 교육을 할 것이며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철인이 이미 존재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순환적인 문제가 된다. 이러한 모순 또한 인간 본성이 올바르며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물에 절대적인 정의와 선이 정의되지 않으며, 그 모습은 항상 변화하고, 그 본질이란 것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각자의 독립된 세계에 살며, 각자가 사물을 관측하고 생각하는 바가 바로 그 세계에 있어서 사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통치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개인의 세계 안에서는 본인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나갈지를 정하는 과정에 플라톤의 논의를 적용할 수 있다. 그 내부에서 자신이 철인이 되고자 한다면, 겉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또한 인간답고 행복한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김*범
남*범님이 글에 남기신 "닭과 달걀의 문제"에 공감합니다. 저도 <국가>를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었던 문제인데,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정체를 이룩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후 행보를 고려해보면 그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철인을 양성해서 이상국가에 다가서기를 희망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화편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아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을 하는 것은 무리였겠지만, 교육 방법의 본을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남*범님이 글에 남기신 "닭과 달걀의 문제"에 공감합니다. 저도 <국가>를 읽으면서 내내 고민했었던 문제인데,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 유지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정체를 이룩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후 행보를 고려해보면 그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철인을 양성해서 이상국가에 다가서기를 희망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화편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아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을 하는 것은 무리였겠지만, 교육 방법의 본을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김민정2021-01-20 16:36
1기 김*현
본질이 보편적이지 않다는것에 동의합니다. 어떤 것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것이 실체와는 동떨어진, 완전한 허구의 것임이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를 갖는다는것에 동의합니다. 이런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라 물어봅니다.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인식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통치하는데 스스로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세계를 본인이 통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 플라톤의 논의를 그사람이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본질이 보편적이지 않다는것에 동의합니다. 어떤 것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것이 실체와는 동떨어진, 완전한 허구의 것임이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세계를 갖는다는것에 동의합니다. 이런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라 물어봅니다.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인식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통치하는데 스스로의 자유가 제한된다고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세계를 본인이 통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 플라톤의 논의를 그사람이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김*교
남*범 학우의 의견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한가지 의견이 궁금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저는 행복을 위해선 개인/국가와 더불어 문화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개인적이고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안정적인 정체여야하고 이를 돕는 것이 다양한 개인을 융화시키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화안에서 개인이 계속 희석되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 가지 비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육 역시 문화의 한 분류라고 생각한다면 남승범 학생인 이러한 행복의 정의에 어떻게 생각하실지, 개인은 어떻게 스스로를 철인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그 의견이 궁금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철인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어야 하는 데 타인은 그 완전함에 동의할 수 있을 지 역시 궁금합니다.
남*범 학우의 의견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한가지 의견이 궁금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저는 행복을 위해선 개인/국가와 더불어 문화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개인적이고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안정적인 정체여야하고 이를 돕는 것이 다양한 개인을 융화시키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화안에서 개인이 계속 희석되고 자신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 가지 비판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육 역시 문화의 한 분류라고 생각한다면 남승범 학생인 이러한 행복의 정의에 어떻게 생각하실지, 개인은 어떻게 스스로를 철인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그 의견이 궁금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철인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어야 하는 데 타인은 그 완전함에 동의할 수 있을 지 역시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4
1기 이*빈
플라톤의 논의를 보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하는 본성은 ‘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의 논의에는 인간의 욕망을 이성으로 다스려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하는 플라톤의 생각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개인에게서 이성이 인간을 지배해야함이 드러나듯, 국가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성의 덕목을 갖춘 통치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즉, 플라톤은 이성과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통치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적성에 따라 교육받고 역할을 부여받아 국가의 세 계층(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개인의 덕목을 가장 잘 발현하여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보고 있다.
국가를 읽던 중 문득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났다. 영화 아일랜드 속 인간들은 ‘올바름’이 무엇인지 일종의 세뇌를 통해 프로그래밍되어,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살아간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일종의 생산자이고, 통치자나 수호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역할만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속 세계관과 플라톤의 국가관에서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욕망의 통제여부이다. <아일랜드> 속 세계관에서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부여하여 통제하지만,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이성을 바탕으로 욕망을 제어해야하며, 따라서 이성과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통치해야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성을 갖춘 통치자, 그리고 교육으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방법에 가까울지, 욕망과 이성이 공존하는 것이 행복한 삶에 더 가까울지 의문이 든다.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이성을 바탕으로 통치해야 함은 동의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이성이 지배하는 이데아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되 공동선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이성이 개인의 욕망을 감시할 수 있는 삶이 더 행복한 삶이 될 것 같다.
플라톤의 논의를 보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하는 본성은 ‘이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플라톤의 논의에는 인간의 욕망을 이성으로 다스려 이성, 기개, 절제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추구하는 플라톤의 생각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개인에게서 이성이 인간을 지배해야함이 드러나듯, 국가에 대한 논의에서도 이성의 덕목을 갖춘 통치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즉, 플라톤은 이성과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통치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적성에 따라 교육받고 역할을 부여받아 국가의 세 계층(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개인의 덕목을 가장 잘 발현하여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보고 있다.
국가를 읽던 중 문득 영화 <아일랜드>가 생각났다. 영화 아일랜드 속 인간들은 ‘올바름’이 무엇인지 일종의 세뇌를 통해 프로그래밍되어,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하며 살아간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일종의 생산자이고, 통치자나 수호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역할만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와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속 세계관과 플라톤의 국가관에서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욕망의 통제여부이다. <아일랜드> 속 세계관에서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아일랜드’에 가고 싶다는 욕망을 부여하여 통제하지만,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이성을 바탕으로 욕망을 제어해야하며, 따라서 이성과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통치해야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성을 갖춘 통치자, 그리고 교육으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방법에 가까울지, 욕망과 이성이 공존하는 것이 행복한 삶에 더 가까울지 의문이 든다.
지혜를 갖춘 통치자가 이성을 바탕으로 통치해야 함은 동의하지만,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이성이 지배하는 이데아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되 공동선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이성이 개인의 욕망을 감시할 수 있는 삶이 더 행복한 삶이 될 것 같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송*우
플라톤과 반대로 <아일랜드>에서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만약 개개인을 통제 하에 두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면 <아일랜드>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억제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보상을 주겠다고 하는 편이 더 큰 인센티브가 되니까요. 하지만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욕망 자체가 국가를 위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통치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요.
플라톤이 개개인의 욕망(예를 들어 통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그리 큰 요소로 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개개인의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되 국가 차원을 위해 무시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되 교육을 통해 그 욕망이 엇나가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다스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영빈 님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플라톤과 반대로 <아일랜드>에서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만약 개개인을 통제 하에 두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면 <아일랜드>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억제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보상을 주겠다고 하는 편이 더 큰 인센티브가 되니까요. 하지만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욕망 자체가 국가를 위한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통치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요.
플라톤이 개개인의 욕망(예를 들어 통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그리 큰 요소로 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개개인의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되 국가 차원을 위해 무시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되 교육을 통해 그 욕망이 엇나가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다스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영빈 님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4
1기 조*준
나는 플라톤의 논의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본성은 좋은 것(선)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절대적인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과 의견의 대상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절대적인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철학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은 동굴에서 나가 동굴 밖 현실 세상을 보고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동굴 밖 세계를 알려주듯이 좋은 것(선)의 이데아를 보고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이들이 좋은 것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서는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체육 등등의 교육이 필요하고, 특히 변증법에 대한 교육과 탐구가 필요하다.
이를 개인에 적용한다면 플라톤은 철학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이성이 교육을 통해 좋은 것의 이데아를 배우고, 이를 통해 욕망과 열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통해 행복/좋은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플라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논리 전개는 이데아, 그러니까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유효하다. 그러나 어떠한 가치, 아름다움, 선함은 우리의 가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의견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본성,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개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사각형, 자연수와 같은 수학적 개념에도 적용된다. 자연수라는 개념은 일정하고 지속적인 존재와 분절성이 담보될 때 유효하다. 이처럼 정사각형, 자연수와 같은 수학적 개념, 더 나아가 존재와 절대성, 인과와 같은 개념 역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과 지각 속에서만 유효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행복/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복/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는 우리의 본성과 문화, 교육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의 본성을 이루는 각 요소들에 얼마나 신경쓸 것인지, 어떤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교육이 우리의 본성과 상충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우리의 상충되는 본성 중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여러 문화 에서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 공부하고, 나의 행복에 대한 인지에 나의 문화의 어떤 요소가 영향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크고 힘센 짐승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자. 어떻게 접근해야 되며, 어떻게 그걸 붙잡아야 하는지, 어떤 때에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장 다루기 힘들어지거나 온순해지는지, 소리는 어떤 조건에서 그때마다 내는지, 그리고 다른것이 무슨 소리를 낼 때, 그게 온순해지기도 하며, 사나워지기도 하는지.(493b)" 플라톤은 이것이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고, 이를 잘 길들이고,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행복/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나는 플라톤의 논의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본성은 좋은 것(선)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절대적인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과 의견의 대상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절대적인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철학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은 동굴에서 나가 동굴 밖 현실 세상을 보고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동굴 밖 세계를 알려주듯이 좋은 것(선)의 이데아를 보고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이들이 좋은 것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서는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체육 등등의 교육이 필요하고, 특히 변증법에 대한 교육과 탐구가 필요하다.
이를 개인에 적용한다면 플라톤은 철학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이성이 교육을 통해 좋은 것의 이데아를 배우고, 이를 통해 욕망과 열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통해 행복/좋은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플라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논리 전개는 이데아, 그러니까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유효하다. 그러나 어떠한 가치, 아름다움, 선함은 우리의 가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의견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본성,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개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사각형, 자연수와 같은 수학적 개념에도 적용된다. 자연수라는 개념은 일정하고 지속적인 존재와 분절성이 담보될 때 유효하다. 이처럼 정사각형, 자연수와 같은 수학적 개념, 더 나아가 존재와 절대성, 인과와 같은 개념 역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과 지각 속에서만 유효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행복/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복/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는 우리의 본성과 문화, 교육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의 본성을 이루는 각 요소들에 얼마나 신경쓸 것인지, 어떤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교육이 우리의 본성과 상충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우리의 상충되는 본성 중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여러 문화 에서 무엇을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 공부하고, 나의 행복에 대한 인지에 나의 문화의 어떤 요소가 영향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크고 힘센 짐승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자. 어떻게 접근해야 되며, 어떻게 그걸 붙잡아야 하는지, 어떤 때에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장 다루기 힘들어지거나 온순해지는지, 소리는 어떤 조건에서 그때마다 내는지, 그리고 다른것이 무슨 소리를 낼 때, 그게 온순해지기도 하며, 사나워지기도 하는지.(493b)" 플라톤은 이것이 지혜가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고, 이를 잘 길들이고,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행복/ 좋은 삶에 이르는 길일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권*수
조*준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이 우리의 관점에서 왜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핵심을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들, 즉 소위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등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지각과 감각의 세계를 떠나서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준님께서 언급해주신 것처럼 오히려 우리가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 가치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매번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준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이 우리의 관점에서 왜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핵심을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들, 즉 소위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등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지각과 감각의 세계를 떠나서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준님께서 언급해주신 것처럼 오히려 우리가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 가치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매번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이*현
조*준님의 글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이데아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 한,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삶이 행복한 삶'의 논리 전개 과정에는 큰 허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나의 행복에 대한 메타 인지가 행복에 가장 큰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조*준님의 글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이데아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 한, 플라톤이 주장하는 '정의로운 삶이 행복한 삶'의 논리 전개 과정에는 큰 허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나의 행복에 대한 메타 인지가 행복에 가장 큰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김민정2021-01-20 16:36
1기 김*범
"행복/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복/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이나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다양한 체험을 통해 "어떤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유년기에 어떠한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지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에 의해 들이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전제한 것과 같이 고정된 세계관과 고정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변화한다고 믿고 있지요. 유년기 교육이 본성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이후 자발적인 배움이 유년기 교육으로 형성된 행복/좋은 삶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행복/ 좋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행복/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이나 좋은 삶이라고 느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가 의문으로 남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다양한 체험을 통해 "어떤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유년기에 어떠한 문화와 교육을 받아들일지는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에 의해 들이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전제한 것과 같이 고정된 세계관과 고정된 인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 변화한다고 믿고 있지요. 유년기 교육이 본성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 이후 자발적인 배움이 유년기 교육으로 형성된 행복/좋은 삶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4
1기 송*재
최근들어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일상의 나를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답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때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히 일하며 잘 노는 삶이 인간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느긋하게 쉬다가도 열심히 과외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복하려면 열정을 다할 수 있는 직업 활동이 필요하고 그것이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맛있는 것을 먹고 누워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에도 행복하지만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사색에 잠겨 깊은 고민을 하는 시간도 다른 차원의 행복을 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행복한 삶,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본능과 쾌락의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막연한 생각 가운데 이성을 발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을, 플라톤의 논의에서 참고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자 덕성으로 ‘훌륭함’에 대해 역설하는데, 기본적으로 그러한 성향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쉬 배움, 기억, 용기, 고매함, 절제 등이 이 성향에 속한다. 그리고 이는 심화된 논의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본성과 그 과정에서 필요한 덕성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훌륭한 것의 원인’(516e)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주는 것’(508c)이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되기에 인식과 진리는 ‘좋음’의 처지이자 닮은 것이고 이데아는 이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좋음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선 즉 개인으로서 또 사회로서 온전히 훌륭함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동굴의 비유가 사용되는데,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통치자 계급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덕목인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을 위해 거쳐야 하는 교육과 훈련이다.
훌륭함의 성향 즉 철학적 성향의 성분들이 ‘나쁜 양육 상태’에 있게 될 경우 반대로 더욱 날카롭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대목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즉 참된 것들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동굴에서 벗어나 언덕을 끝까지 올라 빛을 보게 하는 과정으로 비유되는데, 힘든 과정일지라도 빛에 ‘익숙해지면’ 즉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 전보다 월등하게 잘 보게 될 것이며 동굴에서 보던 상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플라톤은 다양한 교과와 훈련 기간 등을 언급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후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히 본 통치자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죄수들 곁으로 내려가 노고와 명예를 나누어야 한다. 즉 온 나라 안에 올바름이 실현되도록 강구하고 공동체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자들 개인에게는 더 못한 삶이 될지라도, 올바른 나라를 위해 즉 사회로서 온전히 훌륭함을 발휘하기 위한 단계에 해당한다고 느꼈다.
결론적으로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훌륭함과 올바름의 덕성이며 교육과 훈련을 통해 철학적 성향을 보존해 이를 달성한 사람들은 사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 과정은 힘들지라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이다. ‘결코 황금으로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마땅히 풍부히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 즉 훌륭하고 슬기로운 삶으로 풍부한 자들이 통치하게 될 것’(520c)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논의에 대해 위와 같이 이해한 바, 현실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와 같이 불변하는 진리, 한결같은 것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추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사실 꽤나 의심해볼 법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의 행복한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생각과 같다. 나는 개인의 삶에서 ‘좋음의 이데아’ 즉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훌륭함이 존재하며 그것은 사랑, 성찰, 베풂과 같은 선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요소로 소급해 생각한다면 이들을 추구하는 것이 동굴의 비유에서 오르막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지라도 행복한 삶을 위해 이들이 옳다고 믿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과정이기에 플라톤의 생각에 동의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개인의 삶과 같이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처럼 타고난 성향의 사람들을 뽑아 통치자로 교육, 훈련시킬 수는 없더라도 우리 사회의 통치자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이 그 사회에 해당하는 좋음, 훌륭함을 인식하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것처럼 올바름을 통한 지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들어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일상의 나를 관찰하고 성찰하면서 답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떤 때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히 일하며 잘 노는 삶이 인간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느긋하게 쉬다가도 열심히 과외수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복하려면 열정을 다할 수 있는 직업 활동이 필요하고 그것이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한다. 비슷하게, 맛있는 것을 먹고 누워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볼 때에도 행복하지만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사색에 잠겨 깊은 고민을 하는 시간도 다른 차원의 행복을 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행복한 삶,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본능과 쾌락의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막연한 생각 가운데 이성을 발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을, 플라톤의 논의에서 참고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이자 덕성으로 ‘훌륭함’에 대해 역설하는데, 기본적으로 그러한 성향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쉬 배움, 기억, 용기, 고매함, 절제 등이 이 성향에 속한다. 그리고 이는 심화된 논의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본성과 그 과정에서 필요한 덕성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모든 것에 있어서 모든 옳고 훌륭한 것의 원인’(516e)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주는 것’(508c)이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되기에 인식과 진리는 ‘좋음’의 처지이자 닮은 것이고 이데아는 이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좋음의 이데아’를 알기 위해선 즉 개인으로서 또 사회로서 온전히 훌륭함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동굴의 비유가 사용되는데,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통치자 계급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덕목인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을 위해 거쳐야 하는 교육과 훈련이다.
훌륭함의 성향 즉 철학적 성향의 성분들이 ‘나쁜 양육 상태’에 있게 될 경우 반대로 더욱 날카롭고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대목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즉 참된 것들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동굴에서 벗어나 언덕을 끝까지 올라 빛을 보게 하는 과정으로 비유되는데, 힘든 과정일지라도 빛에 ‘익숙해지면’ 즉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 전보다 월등하게 잘 보게 될 것이며 동굴에서 보던 상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플라톤은 다양한 교과와 훈련 기간 등을 언급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후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히 본 통치자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죄수들 곁으로 내려가 노고와 명예를 나누어야 한다. 즉 온 나라 안에 올바름이 실현되도록 강구하고 공동체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자들 개인에게는 더 못한 삶이 될지라도, 올바른 나라를 위해 즉 사회로서 온전히 훌륭함을 발휘하기 위한 단계에 해당한다고 느꼈다.
결론적으로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훌륭함과 올바름의 덕성이며 교육과 훈련을 통해 철학적 성향을 보존해 이를 달성한 사람들은 사회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 과정은 힘들지라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이다. ‘결코 황금으로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마땅히 풍부히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 즉 훌륭하고 슬기로운 삶으로 풍부한 자들이 통치하게 될 것’(520c)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논의에 대해 위와 같이 이해한 바, 현실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와 같이 불변하는 진리, 한결같은 것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추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사실 꽤나 의심해볼 법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개인적 차원의 행복한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생각과 같다. 나는 개인의 삶에서 ‘좋음의 이데아’ 즉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훌륭함이 존재하며 그것은 사랑, 성찰, 베풂과 같은 선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요소로 소급해 생각한다면 이들을 추구하는 것이 동굴의 비유에서 오르막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지라도 행복한 삶을 위해 이들이 옳다고 믿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과정이기에 플라톤의 생각에 동의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개인의 삶과 같이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처럼 타고난 성향의 사람들을 뽑아 통치자로 교육, 훈련시킬 수는 없더라도 우리 사회의 통치자 계급에 위치한 사람들이 그 사회에 해당하는 좋음, 훌륭함을 인식하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것처럼 올바름을 통한 지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16:35
1기 김*교
절대적인 기준과 이를 기반으로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송*재 학우 동감하여 글을 남깁니다.
저는 그 절대적인 기준으로 종교를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신의 존재역시 플라톤의 존재와 동일하며 인간은 완전한 그 절대자의 통치 하에서 살아갑니다. 또한 이 절대자의 모습을 미약하게나마 닮아가려 노력하며 각자의 삶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종교 역시 다양한 비판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 역시 사람들의 비판에 마주할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이지 않게 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정도 대다수의 민중이 합의해야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러한 것으로 무엇이 있을 지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은 생각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과 이를 기반으로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송*재 학우 동감하여 글을 남깁니다.
저는 그 절대적인 기준으로 종교를 떠올려보게 되었습니다. 절대적인 신의 존재역시 플라톤의 존재와 동일하며 인간은 완전한 그 절대자의 통치 하에서 살아갑니다. 또한 이 절대자의 모습을 미약하게나마 닮아가려 노력하며 각자의 삶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종교 역시 다양한 비판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 역시 사람들의 비판에 마주할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이지 않게 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정도 대다수의 민중이 합의해야하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러한 것으로 무엇이 있을 지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은 생각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6:35
1기 이*일
정치 제체에 대한 주장을 이어나가면서 그가 수호자를 뽑고 양성하는 과정에서 우생학적인 관점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은 치자, 수호자에 가장 적합한 자를 뽑기 위하여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만 자녀를 가질 수가 있었고, 실제 덜 뛰어난 이들은 자녀를 낫는 것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과 같은 결을 보이고 있는 우생학적인 정치 제체와 철학을 사용했던 히틀러와 같은 결론이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한 그의 주장에 경계심을 세우게 된다.(물론 히틀러는 그가 말한 수호자에 맞는 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긴 한다.)
플라톤이 이러한 수호자들을 세우는 방법을 위와 같이 주장한 것이 그가 주장한 정치제체를 만드는 방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실패한 역사들이 이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사람이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논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동의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여러 상황들과 현실들에 기반한 것들에서 올바름을 찾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순간들이 있다.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옳지 않음이 어떤 것인지 이성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옳음을 파악해갈 수 있다고 본다.
정치 제체에 대한 주장을 이어나가면서 그가 수호자를 뽑고 양성하는 과정에서 우생학적인 관점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은 치자, 수호자에 가장 적합한 자를 뽑기 위하여 뛰어난 자질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만 자녀를 가질 수가 있었고, 실제 덜 뛰어난 이들은 자녀를 낫는 것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과 같은 결을 보이고 있는 우생학적인 정치 제체와 철학을 사용했던 히틀러와 같은 결론이 역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한 그의 주장에 경계심을 세우게 된다.(물론 히틀러는 그가 말한 수호자에 맞는 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긴 한다.)
플라톤이 이러한 수호자들을 세우는 방법을 위와 같이 주장한 것이 그가 주장한 정치제체를 만드는 방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실패한 역사들이 이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반면에 사람이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 비유적으로 논한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동의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여러 상황들과 현실들에 기반한 것들에서 올바름을 찾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순간들이 있다.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 옳지 않음이 어떤 것인지 이성적으로 알아가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옳음을 파악해갈 수 있다고 본다.
김민정2021-01-20 16:35
1기 정*호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이성에 뿌리를 둔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서 각각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이성이 전체적인 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 있어서 비로소 올바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는 인간을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혜, 용기, 절제와 같은 덕목으로 구분되며 올바른 국가란 각각의 덕목을 담당한 사람들에 의해 조화롭게 지혜, 용기, 절제가 실현되는 국가라고 말했다. 지혜를 담당하는 수호자의 계급이 사유재산을 비롯한 모든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구시대적으로 들리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지만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왈처의 정의론이 함의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복합 평등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한 왈처는 정의의 영역을 세분화하고 서로 다른 영역들의 가치는 서로 다른 기준들에 의해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를 피력했다. 어떤 시민이 한 영역 내지 특정한 사회적 가치에 대해 지니는 지위를 가지고 다른 가치 영역을 침해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왈처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수호자에게 통치의 역할만을 맡기면서 전제의 위험성을 다소나마 약화시킨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론은 개인의 본질을 상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 국가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자신의 본질은 굴레로 작용한다. 행복한 삶은 구태여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선언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환경에서 발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개인이 전개하는 삶의 지평을 배재하고 규정되어버린 본질의 틀에 자신을 맞추게 한다. 인간의 감정적인 본능을 따르는 것을 저급하다고 규정하고 이성에 틀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주장은 플라톤이 만들어낸 신화이며 후대의 인류에게 크나큰 불행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은 이성에 뿌리를 둔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서 각각이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이성이 전체적인 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 있어서 비로소 올바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는 인간을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지혜, 용기, 절제와 같은 덕목으로 구분되며 올바른 국가란 각각의 덕목을 담당한 사람들에 의해 조화롭게 지혜, 용기, 절제가 실현되는 국가라고 말했다. 지혜를 담당하는 수호자의 계급이 사유재산을 비롯한 모든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상당히 구시대적으로 들리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지만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왈처의 정의론이 함의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복합 평등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한 왈처는 정의의 영역을 세분화하고 서로 다른 영역들의 가치는 서로 다른 기준들에 의해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를 피력했다. 어떤 시민이 한 영역 내지 특정한 사회적 가치에 대해 지니는 지위를 가지고 다른 가치 영역을 침해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왈처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수호자에게 통치의 역할만을 맡기면서 전제의 위험성을 다소나마 약화시킨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론은 개인의 본질을 상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 국가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자신의 본질은 굴레로 작용한다. 행복한 삶은 구태여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선언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의 환경에서 발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개인이 전개하는 삶의 지평을 배재하고 규정되어버린 본질의 틀에 자신을 맞추게 한다. 인간의 감정적인 본능을 따르는 것을 저급하다고 규정하고 이성에 틀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주장은 플라톤이 만들어낸 신화이며 후대의 인류에게 크나큰 불행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16:35
1기 김*교
난 현대정치는 다양성의 존중이 중요시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플라톤이 강조한 ‘좋음의 이데아’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 혹은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집단에게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 필연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다양성이라는 이름 하에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우리나라 사회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을 가장 근본이 되는 기준이 있을 까? 플라톤은 이를 좋음의 이데아와 완전한 지혜로운 자(철학자)로 해결하려했던 것 같다. 그가 속해있던 고대 아테네 시기 역시 격변의 시기였고 분명 이를 그는 철학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앞선 토론에서 언급했듯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만으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모든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정체는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볼 것이 없다면 그 존재의 이유가 없다. 통치자는 올바른 통치의 ‘의무’가 있다. 의무와 책임이 없는 통치자는 올바른 통치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지속적으로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코스의 반박에 소크라테스는 현실적인 비판 역시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좋은 성향(진리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본인에 주어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쁘게 전락하는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진리를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우월함’, ‘부’, ‘세력’, ‘건강’ 등의 외적인 요인이 이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책임에 따른 온전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통치자들의 모습)에 어느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5권 초입에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남녀간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플라톤은 인지하고 있었다. 남녀의 성별 구별이 우선이 아니라 성향을 나누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당시의 만연하는 오래된 생각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다소 그 시도가 소극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무엇도 철학적 성향에 알맞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상을 위한 실천은 진실에 덜 미친다. 따라서 가장 가깝게 다스려지는 것을 찾아야하고 논의해봐야한다. 플라톤은 끊임없이 이상을 제시하려 했지만 아마 그 과제를 다음세대의 숙제로 남긴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행복 /좋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한다. 나는 현대정치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앞서 언급하였고 이는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밑바탕을 국가에서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다. 플라토는 국가의 모든 아비와 어미는 아이들을 공유함으로서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해야한다고 하였다. 한 몸처럼 국가가 돌아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자적 성향을 이해함으로서 왜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 지 이해하지만 한정된 자원 안에서 무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선 절대 실현 불가능한 구조이다. (때문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이 이데아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을 플라톤은 알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 강인한 육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그 개인은 행복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반응하여 어쩌면 더 나은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OECD는 ‘Better Life Index’라는 지표를 통해 각 국가의 행복을 평가하지만 이는 행복을 위한 기초적인 요소들을 나열한 것일 뿐 행복을 정의하지 않았다. 굳이 나는 행복을 정의하자면 개인과 국가를 구분지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다. 국가는 그 안에 속한 각 개인에게 적절한 책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행복을 권하는 사회를 조성해야한다. 원활한 갈등 조정과 적절한 사회 문화의 형성이 국가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난 현대정치는 다양성의 존중이 중요시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플라톤이 강조한 ‘좋음의 이데아’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 혹은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집단에게 혹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 필연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다양성이라는 이름 하에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우리나라 사회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을 가장 근본이 되는 기준이 있을 까? 플라톤은 이를 좋음의 이데아와 완전한 지혜로운 자(철학자)로 해결하려했던 것 같다. 그가 속해있던 고대 아테네 시기 역시 격변의 시기였고 분명 이를 그는 철학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던 것 같다. 앞선 토론에서 언급했듯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 자체만으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모든 개인과 집단, 나아가 정체는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 눈은 보기 위해 존재하고 볼 것이 없다면 그 존재의 이유가 없다. 통치자는 올바른 통치의 ‘의무’가 있다. 의무와 책임이 없는 통치자는 올바른 통치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지속적으로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코스의 반박에 소크라테스는 현실적인 비판 역시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좋은 성향(진리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본인에 주어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쁘게 전락하는 이유는 현실세계에서 진리를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우월함’, ‘부’, ‘세력’, ‘건강’ 등의 외적인 요인이 이들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책임에 따른 온전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통치자들의 모습)에 어느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5권 초입에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남녀간에 발생하는 불평등을 플라톤은 인지하고 있었다. 남녀의 성별 구별이 우선이 아니라 성향을 나누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당시의 만연하는 오래된 생각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다소 그 시도가 소극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무엇도 철학적 성향에 알맞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이상을 위한 실천은 진실에 덜 미친다. 따라서 가장 가깝게 다스려지는 것을 찾아야하고 논의해봐야한다. 플라톤은 끊임없이 이상을 제시하려 했지만 아마 그 과제를 다음세대의 숙제로 남긴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행복 /좋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한다. 나는 현대정치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앞서 언급하였고 이는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밑바탕을 국가에서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있다. 플라토는 국가의 모든 아비와 어미는 아이들을 공유함으로서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해야한다고 하였다. 한 몸처럼 국가가 돌아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자적 성향을 이해함으로서 왜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하였는 지 이해하지만 한정된 자원 안에서 무한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선 절대 실현 불가능한 구조이다. (때문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이 이데아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을 플라톤은 알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 강인한 육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그 개인은 행복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고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에 반응하여 어쩌면 더 나은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OECD는 ‘Better Life Index’라는 지표를 통해 각 국가의 행복을 평가하지만 이는 행복을 위한 기초적인 요소들을 나열한 것일 뿐 행복을 정의하지 않았다. 굳이 나는 행복을 정의하자면 개인과 국가를 구분지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다. 국가는 그 안에 속한 각 개인에게 적절한 책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행복을 권하는 사회를 조성해야한다. 원활한 갈등 조정과 적절한 사회 문화의 형성이 국가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서양 고대 철학의 인간관 (2)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모습(Plato)
토론 범위
『국가・정체』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5권 472a~7권 끝. (권장 : 8권)
토론 주제
여러분이 보기에 플라톤의 논의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본성/덕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플라톤은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개인으로서 또 사회로서 가장 온전하게 발현할 수 있다고 보며,
그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무엇이 행복/좋은 삶에 이르는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