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4주_고・탐] 인도 철학의 인간관 (1)_『담마빠다』 & 『바가바드기타』
인도 철학의 인간관 (1)
읽기 자료
담마빠다 (Dharmatrata/法句經), 제12, 14-17, 24-25권 (영문번역)
바가바드기타 (भगवद् गीता/Bhagavad Gītā), 6.24-28(영문번역)
토론 주제
- 1 -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하여 완벽하게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 의미가 있을 것인가?
혹은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 2 -
자기 자신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면서 이루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과연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길이 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연구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 없이 과연 가능할까?
- 3 -
다양한 문화권마다에서 다르게 일어나는 종교체험은
각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규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일까?
1.
모든 감정, 번뇌,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완벽한 평정심에 도달한, 즉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면 도덕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도덕’과 같은 개념을 인식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도덕은 사회 속에서 덕과 악덕을 구분하고 인간 행위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규범’이다. 도덕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향유하는 이유는 이러한 개념이 없을 때 인간 사회가 혼란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이 만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한 행위만을 행하는 존재였다면 인간 사회에 ‘도덕’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인간은 때로 악하고 이기적이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살기에, 이를 ‘도덕’이라는 규범을 통해 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가치는 ‘당위성’에 의거하여 전해내려져 왔으며, 대부분 도덕은 어떤 이유나 목적이 아닌 그저 그 자체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는다. 이는 교육을 통해 인간이 욕망과 감정에 휩싸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사회적 장치로써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간이 모든 욕망, 감정 등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스스로 하고자 하는 행동을 행해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함이나 선함과 같은 가치가 결부된 결과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행위가 비롯되는 내면 그 자체가 평온하며 평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라는 규범이나 일체의 규율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2.
인간은 진실로 ‘나’를 인식할 수 있는가? 책을 읽으며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바가바드기타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생겨난 적도 생겨나지도 않는 존재이다. 육신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그 육신의 주인인 영혼은 참된 진리와 ‘앎’에 도달하기 전까지 고통 속에 존재한다. 이는 즉, 내가 육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한 내가 ‘참된 진리’, 즉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진리를 아는 자는 듣고 보고, 먹고, 행위해도 이는 행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아는 자는 행위를 하면서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인식한다는 것 역시 일종의 ‘행위’일 텐데, 내가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 이는 결코 행위에서 벗어난 진리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지 않을까? 즉,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코 객관적이고 완전한 ‘자신’에 도달한 상태에 이를 수 없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보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지독한 모순에 휩싸인 느낌이 들었다. 존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행위해도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자신’이라는 존재는 존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미라는 것 자체도 무용한 것인지. 아르주나가 크리쉬나에게 계속해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달라고 물음을 던지는 것처럼, 나 역시 모순 속에서 한참을 허덕이다 읽기가 끝나버린 느낌이다.
3.
종교적 체험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 어떠한 형태로 인간에게 찾아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풋내기 심리학도로서 인간 내면의 무의식이 일정한 형태로 작용하는게 아닐지 추측할 뿐. 그러나 인간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는 종류와 형태는 다를지라도 ‘종교’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공유된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인간에게 진리와 선한 가치,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으로 보인다. 어느 종교에서도 악을 행하라는 이야기는 없으니. 그런 종교적 가르침 속에서, 인간 스스로도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적이고 생경한 체험을 경험하는 것이 일종의 ‘종교 체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즉, 종교의 존재가 보편적이라면, ‘종교 체험’ 역시 그에서 파생된 것이기에 어느정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맥락이나 내용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종교적 가르침이 조금씩 다르듯이 문화적 상대성과 특수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진리에 이른자는 행위를 하면서도 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인식하려는 '행위'가 존재하는 한 진리에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가 아닐까 하는 고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이수현님의 생각이 궁금해졌습니다. 진리의 이른 자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진리에 이르렀다고 판별할 수 있는 것인지, 진리에 이른 자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인 지 두 의견이 대립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이 개인을 스스로 '인식'하기 위해선 그 인식의 평가 기준을 세우기 위해 각자의 내면 세계(후천적 학습, 성향, 환경과의 상호 작용) 에서 정보를 끌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 함은 대다수가 특정 논의에 대해서 논의의 과정이 합리적이고 다수 동의할 수 있음을 말하는데, 개인의 인식을 위한 기준에 타인의 인정/동의의 과정이 있다면 객관적인 '인식'이라는 표현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을 풍부하게 성찰하는 인식의 과정은 주관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주관적인 '진리'라는 목표를 두고 삶을 살아가며 그 모순을 때론 직시하며 그 목표를 쫓는 삶이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1에서 악함이나 선함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어떤사람이 해탈하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욕망과 감정에서 벗어낫다 하더라도, 그사람의 행동이 선하거나 악한것으로 평가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또, 해탈한 사람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의문이 들었습니다. 악의, 감정이나 욕망이 없는 행위라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2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한 객관적일 수 없다는 생각이 인상적이였습니다. 관찰 자체가 관찰 대상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모순들을 해석하는 방식을 제공하는것이 종교이고 그 해석이 종교의 기반이 되는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번 문항에서 해탈한 사람에게는 도덕이라는 규범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에 공감되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도 인간인 필요에 의해 도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이기심과 악을 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완벽한 평정심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도덕이라는 잣대가 굳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다만 위의 김*현 학우님의 코멘트를 읽으니 그 사람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그의 행동을 도덕으로써 평가할 상황이 때때로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해탈에 이른 상황이라면 도덕의 개념이 완전히 필요 없을지 모르나, 나머지 인간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었던 두 읽기자료를 읽은 후 내가 이해한 바로는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현명한 사람,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사람이 가져야할 것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으로 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모든 욕망과 화를 포기하고 감정들을 통제하게 되면 평정심에 도달하고 참된 자아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면 참다운 나 안에서 모든 존재를 보게 되며, 이는 신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며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에게 도덕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나는 해탈에 이른 것과 더불어 요가와 같은 일정한 수행을 통해 참된 자기를 찾고 세상을 바라보는 진리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책에서 언급되어 있다시피 자신의 욕망과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모든 것들을 같게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행동을 함에 있어 이성적으로 옳은 것을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마치 플라톤의 국가에서 이데아를 경험한 사람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야한다고 했던 것처럼 이번 읽기 자료에서 역시 이런 경지에 이른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람에게 일반 사람들이 반대로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반성작용 등을 통한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나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냉철하게 스스로를 솔직하게 돌이켜볼 수 있는 존재 역시 자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생각과 탐구가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우리가 결국 사회 속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회를 배제하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만 해서는 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회 속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할 때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느낌을 갖는지 등등 사회 속에서의 나의 모습을 통해 나 혼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찾아갈 수 있다. 또한 내가 사용하는 언어, 생각들 역시 어쩔 수 없이 내가 속한 사회나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 부분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혼자 사유하는 것이 어렵다면 때로는 주변 지인이나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측면도 고려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체험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정의되지도,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보편성이라고 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그 두 사이의 중간 어디에 있을 것 같다. 종교의 기본적인 목적인 마음이 의지할 대상을 찾고 좀 더 올바른 삶을 위한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골격은 나라에 상관없이 같다. 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강조하는 부분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문화적인 맥락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에 대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같은 종교에서 출발하더라도 전파과정에서 조금은 변하기도 하고, 교리에 대한 해석도 사람마다 다른 경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역시 완벽한 보편성이라고 하기 어려운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방법만 다를 뿐 추구하는 방향과 성격이 유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완벽히 다르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반성 작용을 통한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인식이,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질문에서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정의라든지 개념에 관한 인식인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인 것인지가 약간 헷갈렸었습니다. 저는 전자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후자로 해석하고 글을 쓰신 *균님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돌아보는 것은 필수적이며 사회가 보는 나, 사회와 문화 그 자체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세 주제 모두 전체적으로 성균 님의 의견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플라톤에게는 해탈한 사람이 바로 통치자에 적합한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이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누군가 모든 욕망과 감정에서 해탈한다면, 그가 '나는 완벽한 도덕을 이루었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나는 도덕을 벗어났다'고 생각할지 궁금해집니다. 만약 전자라면 훌륭한 통치자가 되겠지만, 어떤 감정에서도 해탈하여 국가에 대한 애정 역시 벗어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도덕은 감정에 기반을 두거나, 적어도 그 대척점에 서야 발언권을 가지는 듯 하다. 일단 진화심리학적 설명으로써 도덕이 기본적인 호오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라는 점은 오랫동안 지적돼왔다. 이러한 과학적 설명 내지 최선의 방법으로써의 설명 이전에도 흄을 대표로 해서 도덕의 기반에 감정이 있음을 지적하는 사상의 역사는 더욱 오래되었다. 도덕이 기본적인 감정 내지 좋고 싫음의 토대 위에 서 있다면, 그러한 기반을 일소한 열반의 영역에 도덕 역시 의미를 잃은 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예를 드는 칸트를 생각해보자. 그에 따르면 정언명령으로써의 도덕은 호오라는 감정적인 목적에 의해 수단으로 시행되어선 안 된다. 물론 항상 배척하고 싶은 것들이 정언명령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지만, 세상의 정언명령이 실은 그런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감정이 도덕의 기반이 되거나, 혹은 도덕의 강조점이자 그것의 배타적인 지위로 있는 이상 열반의 경지에 도덕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
2. 객관적인 자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를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최소한 그 문맥에 적합한 형태의 인식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하는 자가 스스로의 정신작용을 반추하며 생각을 명료히 하고 잡념에서 벗어나는 바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태가 객관적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인가. 자기반성적인 삶이고 반추하는 자신은 맞을지 언정 말이다. 그럼에도 반성과 반추가 자아의 장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인도한다는 사실은 일반심리학은 물론 긍정심리학 연구에서도 일관성 있게 드러나는 바, 자신에 대한 연구에 이런 작용이 불필요하다는 주장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결과물이 객관적인 자기인식인지. 나에 대한 인식이 애초에 객관적일 수 있는지(결국에 그것이 물 자체라면 이는 우리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애초에 꽤나 널리 받아들여진 답변 아닌가)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3. 이 질문은 그리 잘 짜여진 바가 아니다. 흔히 황금률라는 주요 메세지가 종교의 다양성과 무관하게 드러나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체험과 양상도 그 본질적인 요소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신들의 행위가 아닌 그들을 숭배하는 인간의 행위인 이상 문화적 맥락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마치 좋은 대학교는 재능인가요 노력인가요?라는 공허한 질문처럼, 다양한 문화권마다 다르게 일어나는 종교체험은 그 문화적 맥락에 따라 일부 영향을 받으면서도, 숭배와 찬양 그리고 믿음을 통한 영성과 영생(실질적인 것이든 관념적인 것이든)의 추구라는 보편성을 함께 가질 것이다.
자기반성과 반추의 삶은 자신의 자아를 명확히 드러내지만 과연 그 결과물이 객관적인 인식의 결과인 지에 대한 심*범님의 의견에 공감하였습니다.
분명 종교에서 발생하는 신과의 교감, 깨달음까지 도달하는 과정엔 분명 각 국가의 문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안의 작은 집단에선 또 그 집단 만의 문화에 따라서 종교에 이르는 과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범님의 의견을 읽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종교의 문화체험을 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진리 자체가 상대적인 문화요소를 어우룰 수 있는 객관적인 무엇인지 의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담마빠다, 바가바드 기타’ 모두 열반, 해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담마빠다’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면 좋다,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바가바드 기타’는 대화체를 사용하고, 내용도 ‘담마빠다’에 비해 구체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 플라톤의 국가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읽기자료에서 Lord는 통찰력(insight)과 지식(knowledge)을 중요시하고, 이를 망치는 것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금욕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강조한다. 플라톤이 통치자에게 요구했던 것들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그보다 더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던 것들이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상태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신분이 고귀하든, 천하든 그런 외부의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인(仁)을 강조하고, 그를 깨우치는 것을 강조한다. 두 읽기자료 모두 통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1.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하여 완벽하게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 의미가 있을 것인가? 혹은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치를 깨닫고, 체화하며, 그것을 방해하는 욕망, 욕구들을 확실하게 제어해야 한다. 이런 수많은 노력들을 통해서,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사라지고, 완전한 평정심을 구현하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해탈에 이른다고 해서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 들였던 노력을 한 순간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노력들이 체화되고 자연스럽게 노력하지 않아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70세에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탈한 사람이 그 노력들, 즉 도덕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해탈한 사람들에게 도덕을 요구한다는 질문 자체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탈한 사람들이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말과 행동들, 경지에 오르고 난 후에 한 행동과 말들이 모두 도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자기 자신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면서 이루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과연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길이 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연구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 없이 과연 가능할까?
많은 사람들이, 도덕에 이르는 길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 멀고 험하다고들 이야기하고,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노력들이 꾸준히 요구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은 닮고, 나쁜 점은 본받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해서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정신작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서 살펴본다고 해도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자신에 대한 연구는 불완전하다. 멀고 험한 도덕, 해탈의 길에서 객관적인 자신의 탐구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다양한 문화권마다에서 다르게 일어나는 종교체험은 각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규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일까
나는 종교와 거리가 먼 사람이고, 종교체험을 경험한 적도 없다. 하지만, 수업에서, 혹은 뉴스에서 관련된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알고 보면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참 다양하다는 것에 놀란다.
대부분의 종교를 살펴보면, 사랑하라, 착하게 살아라, 남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 등과 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환경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종교체험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내용을 탐구하는 과정인데, 그 과정이 문화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해온 노력들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도 남아있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이미 도덕이라는 생각이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감정이 모두 사라질 정도의 어떤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도덕의 범주안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할 규범으로 도덕을 말하지만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해 완벽하게 평정심을 이룬 자의 도덕과 같을지 궁금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3번 문항의 내용에 공감되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도 다양한 종교의 이야기를 접할 때 사실 이것들이 하나의 큰 틀에서 같다고 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한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종교마다 더 중요시하는 것이 다르고, 관점이 조금 다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결국 표현의 차이이며 환경의 차이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 행복이나 불행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지 않으며 소위 ‘해탈’하다고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도덕이 의미 있을 것 같지 않다. 도덕은 어느 정도의 손익 개념을 동반한다. 설령 칸트처럼 도덕적인 행동이 이득이나 손해의 측면에서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지라도, 도덕적인 행동이 산출해내는 결과물은 (감정적이든, 물리적이든) 손익을 동반한다. 그 이유는, 도덕이 사회에서 일종의 “계약”처럼 유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간단한 예시로, ‘beneficial’, ‘good’, ‘happiness’는 우리에게 +, 긍정으로 여겨지고 ‘bad’, ‘evil’, ‘unhappiness’는 -, 부정으로 여겨진다. 읽기자료를 읽으면서, 세상은 “~이지 않으면서, ~가 아니지도 않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한 자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르면 해탈한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의미에서 이익이거나 손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사람이다. 따라서 해탈한 자는 (1) (비)도덕적 행동의 결과로 그가 갖게 되는 이득이나 손해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해탈한 자는 “완벽한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의 행동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도덕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다. 도덕적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는/하지 않는 사람이,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탈한 자는 정의상 (2) 어떤 행동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1)과 (2)에 의해, 해탈한 자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인도 불교 철학의 사상이 도덕적 허무주의를 동반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법구경에서는 ‘evil’, ‘bad’, ‘beneficial’, ‘good’과 같이 윤리적 의미를 내포한 개념을 사용하여 행위나 자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적어도 해탈 전까지의 행동을 제약하고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사용되는 개념으로서는 도덕이 그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해탈한 자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사회가 ‘도덕’이라고 여기는 것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읽기자료를 읽으면서 ‘아 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것이 많고, 그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어떠한 동기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도덕을 요구할 상황이 만들어지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어떠한 사람에게든 그가 사회적 계약으로서의 도덕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면, 사회는 그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해탈한 자 역시 사회 구성원이므로 그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2. ‘자신’에 대한 연구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 없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통용되는 도덕이 어떤 것들이며, 어떠한 행위를 윤리적/비윤리적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이 메타윤리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인식, 타인에 대한 비판적 고찰, 그리고 ‘자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이론적/실질적 탐구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연구 방식을 사용해서 그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자신의 정신작용만을 관찰해서는 객관적인 인식에 도달하기 어려울 테지만, 앞서 언급한 관련된 요소들을 함께 탐구한다면 그러한 길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3. 문화적 맥락에 무관한 보편적인 영적인 체험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을 해석하는 방법은 문화적 맥락에 종속적일 것이므로, 같은 체험이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잦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체험이 문화권마다 다르게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가 정확히 같은 ‘해탈한 상태’를 경험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철수가 속한 A 문화권(종교)에서는 이 경험을 “신의 형상에 가까워진 것”으로 해석하고, 영희가 속한 B 문화권(종교)에서는 이 경험을 “열반에 도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체험의 본질적 속성이 같을지라도 이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인식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동일한 종교체험이 문화권바다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사고실험을 통해 밝혀주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타인에 대한 비판적 고찰 또한 필요함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지난 학기에 공부했던 사이보그 담론과도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계망 속에서 나 자신만을 뚝 떼어놓고 고찰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무생물 등 행위자 네트워크의 다른 대상들에 대한 고찰이 결국 자신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슬님의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해탈한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행하는 이유가 그 행동의 결과 때문도, 혹은 그 행동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렇기에 해탈한 자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들에게 도덕은 사실상 필요하지 않지만, 사회의 규범적인 요소로써 사회는 원칙적으로 그들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는 있다는 점도 상당히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에는 보편적인 영적 체험이 존재할 수 있고, 그에 대한 해석이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설명은 오늘날 뿌리가 같은 종교임에도 국가마다, 혹은 작은 규모의 집단마다 종교활동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 일단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기에 앞서, 나는 여기에서 정의하는 ‘해탈한 사람’을 정말로 진정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가 살짝 의문이긴 하다. 모든 것에 대한 애정과 혐오 등과 같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정말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지난 학기 많이 다루었던 AI 쪽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감정이라는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면, 좋게 본다면 신의 경지이겠지만 나쁘게 본다면 감정 없는 기계나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질문의 가정대로 만약 정말로 그런 ‘해탈한 사람’ 이 있다고 친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은 충분히 의미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의무론이 이와 꽤나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칸트의 학문에 심오한 지식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주장과 더불어 정언 명령을 따르라는 그의 주장을 본다면, 감정을 배제하고서라도 도덕이라는 잣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사적 감정인 행복이나 측은지심, 만족감 등과 같은 감정이 사라지고 또 특정 대상에 대한 선호가 아닌 모든 생명과 무생명에 대한 동일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행위에 있어서 도덕 법칙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해탈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살고 있는 한 도덕은 필수로 요구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아무 감정이 없는 ‘해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도덕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대상에게 해를 끼치더라도 자신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할 텐데 그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2.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객관적인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한 일부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연구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불가능할 거라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반성이 없다면 자신에 대한 연구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자신에 대한 반성은 자신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다른 축은 바람직한 사회적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점검하면서도, 자신이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된 반성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준’이 필수적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기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적절한 판단과 반성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준에 비추어 본 나 자신을 보았을 때 진정한 반성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한다.
3. 여러 문화권에서 종교체험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이러한 종교체험이 완벽하게 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종교라는 것 자체가 갖는 특성으로 보았을 때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거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와 같은 동아시아에서는 서양과 달리 불교가 두드러지며, 이 외에도 서양의 기독교와 천주교, 서아시아의 힌두교나 이슬람교 등 문화권마다 다양한 종교가 있다. 그러나 무슨 종교를 믿거나 무슨 신을 섬기든, 거기에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고 공동체적 유대를 찾는다는 것은 보편적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서로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종교체험이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사뭇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본질적인 의도와 거기서 찾고자 하는 마음은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1번 질문에 대한 답변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말이 살짝 엇나가서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그 사람에게 도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도덕을 요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을 요구할 때 그 사람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주장으로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이러한 주장에 설득되어, 누군가를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을지는 살짝 의문이다.
글의 첫 부분이 공감되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는 특히 담마빠다 16장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감정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테니 해탈하라'고 일일이 나열하니 비록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라 해도 오히려 기계같이 느껴지고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추가로 남겨주신 코멘트에서도 과연 이런 사람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같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해탈한 사람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에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만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기쁨과 슬픔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닌, 그저 자연현상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아가서, 인간은 겉으로는 결국 여러가지 물리법칙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지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혼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종교가 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도 감정이 프로그래밍된 기계로 볼 수 있지 아닐까요.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1.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사라진, 평정심이 구현된 사람이 정말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해탈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가 가장 궁금해졌다.
나는 인간의 행동에는 분명히 호와 불호가 내재된 욕망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선한 일을 하는 것도 그러한 일에 대한 욕망이 작용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그러한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애정의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없다면 그러한 사람들에게 행동의 동기는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플라톤은 인간이 선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해탈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도덕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해탈한 사람이 정말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을 도덕에 의거하여 평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도덕이 하나의 규율과 의무로서 해탈한 사람들에게 행위의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를 다하는 것은 호불호의 영역이 아니기에, 해탈한 사람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에 드러난 해탈에 대해 생각해보면, (날 때부터 해탈한 사람이 아니라면) 해탈에까지 이른 사람이 도덕을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참 어려웠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과 반성은 분명히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과정 중 하나이지,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의 연구 방식을 조금 생각해보면, 한 사람에 대해 인식하고자 할 때, 예컨대 한 사람의 성격을 알고자 할 때에도 자기평가는 빠지지 않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등 환경에 의해 형성된 한 사람의 내면에 영향을 받는 과정이기에, 객관적인 검사와 타인의 보고가 필수적이다.
인도 철학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고자 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반성작용만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인식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나’를 알게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에 대한 인식을 얻는데에 필요한 중요한 재료가 될 것이므로, 자신에 대한 연구와 반성작용은 분명히 필요하다.
3. 다른 학우들의 의견도 거의 동일한 것 같은데,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구성되지도, 무관한 보편성이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참된 하나의 진리로서의 종교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문화적인 맥락에 영향받지 않는 보편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목격하는 종교 체험을 생각해보면, 이는 문화적, 시대적 맥락의 영향을 분명히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맥락에 구애받지 않는 어느정도의 ‘틀’을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체험으로부터 우리는 보편성과 문화적 맥락의 영향을 모두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모든 것에 대해 완전한 평정심을 갖춘 사람을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고 했을 때,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도덕’이라고 함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즉 당위성을 지니는데, 당위의 내용이 되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규범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범, 혹은 한 사회/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지켜야 하는 규범, 이것이 도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도덕의 역할은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담마빠다’와 ‘바가바드 기타’에서 설명하는 현명한 자는 속세와 관련된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말한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깊이 생각하고 명상에 전념하는 이는 속세를 떠나 안식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자이며, 이들은 신조차도 부러워한다’는 담마빠다의 구절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한 자는 궁극적으로 속세를 떠난다. 이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통념조차도 초월한 존재이며 모든 것에 좋고 싫음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탈한 사람에게 이 세상의 ‘도덕’이란 그저 행위를 규제하는 하나의 족쇄일 뿐이지 않을까 싶다.
2. ‘정신작용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자아’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기에 앞서, ‘객관적인’ 자아 인식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객관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 자체가 내포하는 바는 아마도 ‘주관성’의 배제를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관성을 배제하고 ‘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불가능에 가깝다’고 답을 하고 싶고,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신작용에 대해 성찰한다고 하여 완벽히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자신의 주관을 배제한 채로 ‘나’에 대해 인식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3. 다양한 문화권마다 다르게 일어나는 종교체험에는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증오하지 말라’는 담마빠다의 구절을 읽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정확히 같은 맥락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종교라고 하더라도 인류 공동체로써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아주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모습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종교’라는 것 자체가 인간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하는 보편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3번 문항에 대한 답변이 흥미로워서 코멘트 남깁니다. 모의고사 영어 지문 중에서, 혜수님의 답변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글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황금률에 관한 글이었는데, "내가 싫은 건 상대에게도 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버전과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라"와 같은 긍정적인 버전 둘 모두 "남을 배려하라"는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어떤 종교가(또 종교를 초월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가 존재하며 이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종교에 대해 공부를 해본적도 없어서 종교 경전의 내용같은 걸 잘 모르는데 경전끼리 비교한 연구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1.
도덕은 사회가 존재할 때 의미를 갖는다. 사회에는 해탈의 측면에서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해탈한 상태라면, 그때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을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정을 포함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해탈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평정심을 가진 상태에서 그저 자기 자신의 할일을 할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행위의 이유에 도덕이 영향을 줄 수 없기에 도덕이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해탈하지 못한 구성원이 존재한다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탈이라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해탈한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든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른 해탈하지 못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도덕적 판단과 요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록 그러한 도덕을 요구하는 것이 해탈한 사람에게 있어서 의미를 가지기 어렵겠지만, 해탈하지 못한 나머지 구성원들에게는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탈한 사람에게는 도덕이 의미를 갖기 어렵다. 해탈하지 못한 사회 구성원이 함께 존재한다면 도덕이 해탈한 사람에게 의미를 갖지 못할지라도 다른 구성원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갖게 된 나의 의문은 해탈의 상태가 실현 가능한지, 사회의 어떤 구성원이 해탈 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냐는 것이다. 2번 질문이 이러한 의문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관찰과 반성은 무엇인지도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타인과 외부의 정보를 포함하는 외부의 세계가 존재할 때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바깥에 있는 모든 세계가 내 안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관찰하여 만들어진 인식이 객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관찰하고 반성하며 이루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길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인식이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외부에 대한 나의 관찰과 외부의 나에 대한 관찰이 이루어져야한다.
자신에 대한 연구가 어떤 것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스스로가 어떤 방식으로 감각과 감정을 느끼고 욕망하며, 다양한 외부의 자극에 대해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 반응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반성작용 없이 좋은 연구는 불가능할 것 같다. 자신을 실험실의 실험용 동물과 같이 바라본다면, 반성 없이도 관찰만으로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연구의 대상이 앞서 말한 것처럼 복잡해질 때,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의 그릇인 ‘나’의 관찰이 있다면 그것이 없을 때와는 문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성작용 없이도 ‘자신’에 대한 연구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연구이고 반성작용이 있을 때 제대로 된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3.
문화적인 맥락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란 인간의 활동이기에 인간 없이 종교는 존재 불가능하다고 본다. 종교에서 보편성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화적 맥락’에 인간의 보편성이 포함된다면 종교체험은 각문화적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규정 될 수 있고, ‘문화적 맥락’에 인간의 보편성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인간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2번문항에 대한 생각이 제가 생각한 것과 유사하여 공감하면서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서 단어의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신 것, 바깥에 있는 모든 세계가 내 안에 그대로 존재할 때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번 문항에서 해탈한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든 해탈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도덕을 요구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해탈한 사람은 이치를 깨닫게 된, 흡사 국가 책에서 이데아를 경험한 철인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 도덕을 요구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재현님이 바라본 해탈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왜 도덕을 요구받는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해탈했는지, 해탈한 사람이 일부인지 등 사회 구성원들의 구성에 대해서는 나눠서 생각해볼 생각을 못 했는데,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또,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재현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생각해볼 거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점도 있고, 궁금한 점도 있어 코멘트 남깁니다.
저는 자신을 실험실의 실험용 동물과 같이 바라보는 편인데, '나'에 대한 관찰과 '나'에 대한 반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저는 '나'에 대한 이해와 '나'에 대한 평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나'에 대한 반성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현님의 세 번째 답변을 인간의 종교적 보편성은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하거나, 문화와 독립적인 인류 보편성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종교적 보편성이 인류의 보편적 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하더라도, 그 보편적 문화적 맥락이 보편적 인간 본성에서 기인했다면,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을 불러일으킨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서 기인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위 글을 노랫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보편적인 종교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종교
어쩌다 우연히 이 종교를 믿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의 사소한 맥락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원문: 브로콜리 너마저, 보편적인 노래
시간이 지나서 수정할 수 없기에 답글로 수정하고싶습니다.
2번 질문에 대한 제 생각에서 "그릇인 '나'의 관찰"부분의 '관찰'을 '반성'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반성을 관찰을 포함하는 행위로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관찰에 무엇이 더해지면 반성이 될 수 있는지는 역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성용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토론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거나, 새롭게 제기하고픈 생각이나 질문을, 각자 최소 1개씩 여기에 적어주기 바랍니다. 내일(09/25일) 자정까지 받겠습니다.
강의에서 자이나교와 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웠다.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상태로 3번 문항에 대해 답할 때, 종교마다 제안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다르다고 적었다. 적을 때만 해도 극단적으로 다른 경우는 많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를 보고, 특히 불교가 자이나교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나니 종교간의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불교에서의 수행의 방식(내 감각과 느낌을 오로지 느끼고 받아들이는)이 긍정임상심리학과 마음챙김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가능하다면 어떻게 전파되어갔는지 둘 간의 역사적인 흐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다.
제가 생각하던 것과 가장 달랐던 부분은 불교 가르침의 목적에 대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욕망을 떨쳐내는 수행을 견뎌내는 동기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집착을 버림으로써 윤회를 멈출 수 있다는 얘기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1번 질문에 대해 저는 해탈한 자에게는 도덕이 무의미할 것이라고 썼었는데, 해탈한 자가 오늘 들었듯이 카르마를 씻기 위해 해탈한 자라면, 해탈한 뒤에도 자발적으로 도덕을 행하려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해탈하면 바로 카르마가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청산을 위한 여정이라고 본다면 말입니다.
교수님의 강의 정말 재밌게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균님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불교와 자이나교의 유사점과 차이점 부분을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두 종교에서 모두 본인의 명상과 수행 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끊는 니르바나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은 유사점 같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는 등 수행 강도나 방식이 불교에 비해 다소 강렬(?)하다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대승' 불교, '소승' 불교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 전통에도 소승 불교에 대한 배척 사상이 들어있다는 점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이처럼 인도에서 파생된 철학과 종교관에 대해 다양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본주의적 정신과, 여행길에 오른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 인도 철학 및 종교의 관점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수업시간의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자이나교와 불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3번에서 서술한 것처럼 같은 수행의 목적, 가르침을 추구하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방법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잘 알려져있는 이슬람의 시아파, 수니파를 생각하면서 적었는데, 불교와 자이나교도 이에 맞춰 바라볼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고, 관심도 많이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수님의 강연을 듣기 전에는 두 텍스트가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한다고 뭉뜽그려서 크게 이해했는데, 교수님의 서로 다른 종교의 수행방식에 대한 말씀을 듣고나니 세세한 부분의 차이를 내가 놓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코멘트에서, '좋음과 싫음이 없는 완전한 평정심을 가진 사람에게 도덕이 행위의 동기로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통해 도덕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는데, 어제 강연을 듣고나니 해탈이라는 것이 자동차하나를 조립하듯이 조립이 완료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해탈에 이른 사람을 예시로 보진 못했지만, 해탈에 이르면 수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이 어떠하든(자이나교처럼 고행일 수도 있고, 불교와 같을 수도 있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행을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삶을 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이 필요할까?라는 물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또, 이전엔 몰랐던 자이나교에 대해 알려주셨는데, 조준희 교수님의 말씀처럼 자이나교와 불교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관계를 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와 관련해서 크게 두 가지가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soma"가 순환하는 그림입니다. 2번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는 데에, 이 도식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리는 비를 맞고 자란 풀, 그 풀을 먹고 사는 인간, 다시 제사를 지내서 하늘로 soma를 올려보내는 행위... 이렇게 돌고 도는 도식은, 나 자신이 무언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이 세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존재라는 표현을 쓰기도 애매한 것 같은데, 더 좋은 표현을 떠올리기 힘드네요.)라는 점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선 코멘트에도 썼지만, 자신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작용 외에도 다양한 것들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져야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카르마, 윤회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고등학교 때, 불교의 입장에서 "윤회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으면 90퍼센트는 틀린 선지라는 것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카르마가 전해지는 것이 완전히 끊이기 위해서는 윤회의 고리가 끊겨야 한다는 교수님의 설명이 이와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해탈을 향한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윤회가 무언가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있을리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한편 중간에 한 학우분께서 해주셨던 질문처럼, 열심히 고행을 해서 겨우겨우 마이너스(카르마)들을 없애나가고 있는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붇다의 이 가르침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음에 더 길게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해탈의 과정으로써의 고행에 대해 지아니교와 불교의 생각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참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이러한 인도의 철학 내지 종교가 21세기 사회변화(성적 자유의 주장 증대)내지 과학의 침입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또유연하게 (혹은 전혀 유연하지 않게) 대처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특히 기독교가 1960년대 성적 자유주의의 물결에 대응해 사회분열적인 양상을 보이면서도 종교의 실질적인 실천 양상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해 상당히 호혜적이면서 다양성 자체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양태로 강경한 목소리를 줄여나갔다는 점처럼 말입니다.
앞서 글을 올려주신 몇몇 학우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자이나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평소에 인도 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접해보지 못했는데, 이번 강의를 통해 인도에서의 종교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어 유익했습니다. 작년에 인도 대학 친구들과 함께하는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현지 요가를 배워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도인처럼 보이는 요가 전문가(master)분들이 생각보다 경건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전통요가를 가르쳐주셔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Yoga’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니 이제야 그때의 분위기가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들은 후 한 가지 궁금해진 점은 ‘세속적인 욕망을 떨치기 위해 고행을 하고 수련을 하는 자이나교와 불교 신자들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외부인의 관점에서는 행복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삶처럼 느껴지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들에게 ‘행복’이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습니다.
두 자료가 종교의 정신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강의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종교들의 관점의 차이, 수행의 차이를 알고 나니 그 당시 인도의 국가들의 사회구조,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생활모습을 포함한 실제모습은 종교에 따라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종교를 어느 계층 범위의 사람들이 믿었고 일상에서 어떤 종교의식을 치렀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이르기 까지 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확산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누군가가 해탈했음이나 깨닳았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정받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과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서로 같은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가바드 기타가 어떤 책인지에 대해 배경지식을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읽었던 부분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일차원적으로 '사람을 죽이러 가는 왕자에 대한 신의 훈계'라고 생각하여 그런 철학을 다루는 종교서구나 하였는데, 책이 쓰인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니 종교 간 가치관의 대립이 느껴졌습니다.
특히 그 결과 발생한 살생에 대한 견해의 차이점이 굉장히 재밌게 다가왔습니다. 바가바드 기타가 좀 더 평화적인 주제를 통해 기존 종교와 대립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굳이 생명이라는, 일반적으로 가장 신성하고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도전한 것이 놀라웠습니다. 당시 정서에 비해 굉장히 래디컬했을 힌두교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주도하고 누가 지지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미 많은 학우 분들이 앞서 말씀하셨듯, 저 역시 불교와 자이나교에 대해 설명해주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기독교, 천주교처럼 친숙한 종교가 아니라 직접 찾아보지 않는 이상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와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어 큰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단어들의 어원을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기도 하고, 그들의 수행 방식 또한 기억에 남는데, 예전에 한 교양 수업을 통해 시체의 부패과정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생명의 끝은 저렇구나, 하고 다소 충격을 받았었는데 같은 지구 어느 곳에서는 이를 통해 수행을 한다고 하니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담마빠다를 보며 해탈이란 뭘까 의아해했었는데, 아직도 완벽하게 이해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먼저 공지를 늦게 확인하여 기한이 지나고 쓰게되어 죄송합니다.
강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역시 자이나교의 수행 방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속세와 연을 끊고 해탈의 경지를 위해 고행을 이어가는 것은 다양한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죽기 직전까지 살아있는 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자이나교의 수행 방식은 그들의 사상과 역사를 듣지 못했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신께 제사를 온전히 지내야 이 세상의 것들이 온전히 돌아간다고 믿는 점, 그래서 완벽한 제사를 위해 엄청난 분량의 기도문을 '일단' 외우는 행위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때 종파의 전통을 이어가는 면은 이해가 되지만 이 내용들을 모두 암기해서 전승하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고행을 견디는 것 또한 인도의 전통이지만 아주 성적인 묘사와 행위 또한 인도 전통의 하나라는 내용이 잠시 소개되었는데, 이 둘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기회가 된다면 설명을 더 듣고싶습니다.
자이나교와 불교, 힌두교가 유사하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에서의 세계관 차이. 불교와 달리 힌두교에서는 생활하며 수행해도 카르마가 쌓이지 않는다는 논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또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의 관계가 무언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관계와도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각 율법과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기보다 그저 신에게 의탁하면 된다는 교리를 지닌 힌두교와 기독교가 각 계열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유대교 계열 종교들과 자이나교 계열 종교들이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태어나고 사는 건 고통이고, 육신을 가지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세계관은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인간 본성의 무언가일까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일까요, 아니면 이란 지역의 척박함과 같은 자연환경 때문일까요? 아예 다른 기원과 기후를 지닌 라틴아메리카계 종교나 아프리카계 종교에서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새 토론방이 올라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토론글을 이제야 확인해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에 대해서 거의 아는게 없거나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이들의 특징들과 차이점을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강성용 교수님께서 토론 주제로 던져주신 첫번째 질문에서,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로 완벽하게 해탈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지, 아니면 해탈이라는 것이 그저 종교적 관점에서 일생 전반에 걸쳐 이룰 수 없지만 이루고자 노력해야 하는 과업으로 인식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잘 모르던 분야에 대해서 흥미롭게 설명해주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토론방이 새로 개설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업로드를 기다리고 있다 기존 토론방의 내용을 확인하고 늦게나마 올립니다. 업로드가 늦어 죄송합니다.
종교의 탄생은 그 종교가 속한 국가의 문화적인 요소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는 데 같은 문화권에서 불교와 자이나교가 탄생하고 또 대립이 있는 과정을 교수님의 강연을 통해 알 수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추가적으로 문화와 종교의 관계성에 관심이 생겨 고전 인도의 역사에 대해서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적인 배경으로 (카스트제도의 견제) 인해, 또 기존의 삶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교/자이나교가 탄생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결국 고난의 받아들임, 절제, 수행을 통해 열반에 이름을 강조한 사상은 많은 가난한자의 위로가 되어주겠지만 부유한 계층의 심리적 지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서 의문,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교수님의 강연을 다음 기회를 통해 더 집중해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고전 문화와 종교에 대한 배움이 조금 시작된 기분이다.
먼저, 내 고전 가방끈이 짧아서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도덕관’, ‘칸트적인 도덕관’은 강성훈 선생님께서 플라톤 <국가>를 주제로 강의하실 때 이야기해주신 정도로밖에 알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리고 <담마빠다>에서는 해탈(Moksha)은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열반(Nirvana)이 등장하는데, 토론 질문에서 내린 해탈의 정의에는 열반 또한 부합하는 것 같아서 두 개념의 섬세한 차이는 잘 인지하지 못한 채 아래 글을 작성하였다.
고전적인 도덕관에 입각해서라면 해탈한 사람에게는 도덕을 요구할 수 없으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 의미가 없다는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탈에 이른 사람이 도덕적인 행동을 했다면 그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것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의 의미가 없는 것이지, 도덕이 의미가 없다고 해서 옳지 못한 행동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고전적인 도덕관으로 돌아와서, 도덕적인 행동을 했을 때 나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온다며 설득해도 이미 평정심을 구현한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도덕적인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반면, 칸트적인 도덕관에 입각해서라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덕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얻는 것은 이미 ‘객관적’이지 못하지만, 자신에 대해 연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연구하고자 타자에게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한다고 해도 정신 작용을 관장하는 기관을 직접 꺼내어 관찰하지 않는 이상 타자가 나에게 자극을 주고 나의 반응을 관찰하여 나를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나에 대한 기존의 내 인식이 개입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건을 경험하기 전 “너라면 어떻게 행동하겠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실제 상황에서의 행동과 동일한 답변을 내놓을까? 두 가지 이유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먼저, 답변하기에 부끄러워서 답변을 피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답변했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은 실제 상황에서 유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을 겪었을 때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은 다시 돌이켜 보더라도 “내가 왜 그랬지?”라고 물을 만큼 정신 작용을 예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체험을 겪으며 자기의 정신 작용에 대한 기록을 쌓아나가고, 이로부터 자기를 조금이나마 더 파악할 수 있다.
종교체험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소재는 문화권의 특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문화권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소재가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동양과 서양에서 동일한 시대의 인물이 둘 다 한밤중에 감자전만한 크기의 달을 보는 체험을 했다고 하자. 동양의 인물이라면 달을 보고 평온한 마음을 얻어 초월적 존재가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달을 불길한 존재로 여기던 서양의 인물이라면 달을 보고 겁에 질려서는 초월적 존재의 보호를 받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체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체험이 입을 통해서 또는 텍스트를 통해 전승되어온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여러 시대를 거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권 구성원들의 성향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메시지가 지금까지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게 충분히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 1번 문항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고전가방끈이 짧다고 하셨지만,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적용하신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저 역시도 스스로 하는 반성작용이 자신을 연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저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또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말슴해주신 것처럼 주변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정말 솔직하게 답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거짓을 말하더라도, 그 때의 내 반응과 내 속마음들을 파악함으로써 좀 더 객관성있는 나를 찾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3번문항에 대한 답변이 굉장히 와닿는 예시로 설명해주신점, 그러면서도 지니고 있는 보편성에 대해 잘 언급해주신점이 인상깊었습니다. 2번 문항에 대한 대답도 논리적이어서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1. 모든 감정과 욕구, 좋고 싫음이 없는 해탈에 이른 사람에게 도덕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 추구도 방해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이 싫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무의미해진 해탈한 사람에게 자신을 위한 도덕도, 타인을 위한 도덕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까. 도덕이 요구되는 이유는 결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탈에 이른 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속하여 살아간다면 아무리 본인에게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그들의 도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2. 객관적인 ‘자신’이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떠한 주관적인 생각이 배제된 객관적인 ‘자신’이 정의되어 있다고 했을 때,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인식해가는 과정은 분명 객관적인 ‘자신’을 찾는 것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알고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조차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분명 나만이 알고 있는 나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반성작용이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생각하는 ‘자신’과 제3자가 생각하는 ‘자신’이 다른 경우를 마주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고, 스스로나 주위 사람들이 판단하는 모습은 각자의 주관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관찰만으로 객관적인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단지 자신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의 때론 같고 때론 상충되는 의견들을 통해 주관을 벗겨내다 보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객관적인 ‘자신’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종교체험이 어떤 것일지 무신론자로서 상상할 수는 없지만, 종교를 통해 무언가 정신적인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문화적인 맥락에서 규정될 것 같다. 정신적으로 동일한 영적인 현상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드리는 종교의 교리에 따라,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교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보편성은 결국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성인 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종교들은 분명 다수의 믿음을 통해 유지되어 왔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종교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다수의 믿음이 종교의 보편성으로 남은 게 아닌가 싶다.
글 잘 보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행복 추구도 방해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이 싫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의 부분에서 해탈한 사람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는 것이 싫어하는 것을 느끼는 것을 감정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효진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다수의 믿음이 종교의 보편성으로 남았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정신적인 체험 또한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믿음에 부합하지 않다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종교 자체뿐만 아니라 종교체험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해석되더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아직 명료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신흥 종교의 경우에는 위와 같은 논의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적용할 수 없다면, 신흥 종교는 인간에게 보편적이지 않은 교리를 담고 있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종교체험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무의미해진 해탈한 사람에게 자신을 위한 도덕도, 타인을 위한 도덕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는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궁금한 것이, 이러한 도덕률을 따를 필요가 없음에도 사회의 일원으로 인간인만큼 그 도덕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할지, 나아가 그 충돌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등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불교와 힌두교는 자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르게 접근한다. 불교는 객관적인 자신 자체가 없으며 늘 변화하는 상태라는 입장이고, 힌두교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정한다. 이에 따라 해탈의 정의 또한 각 종교에 따라 다르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공통되나, 불교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해탈이라 하는 반면, 힌두교는 불변하는 자신의 영혼을 이해하고, 세상 모든 것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두 종교 모두 해탈한 존재가 굶주림도 개의치 않아 해탈 3일 뒤에 굶어 죽었다는 언급은 없다.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은 으레 자살하는데도 말이다. 이 두 종교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가 요구한다면 그대로 행하는 것에는 욕망이나 잡념이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이 굴러가는 것은 물리학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평평한 곳에 놓인 공은 가만히 있기도 하지만, 누가 살짝 건드린다면 한 방향으로 쭉 굴러가게 된다. 나는 해탈에 이른 사람을 평평한 곳에 놓인 공, 생존의 욕구를 공을 살살 건드리는 힘으로 비유하여 해석하였다.
인간은 좀처럼 초월적인 존재를 만날 일이 없다. 그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형성한다. 해탈에 이르지 못한 자는 울퉁불퉁한 비탈길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다른 공들과 늘 충돌하게 된다. 이 정도가 심해지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고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지며 모두가 죽게 된다. 그래서 정해진 것이 그 사회에 있어서의 법과 도덕이다. 모든 공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영역과 움직이는 속도에 제한을 건다. 이 규범은, 평평한 곳에서 휘둘리기만 하는 해탈한 공에게 있어서는 늘 따르고 있는 사항이다. 그들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으며, 도덕을 요구 받을 수 있지만, 언제나 도덕을 지키고 있다.
객관적인 자신이라는 말은 사실 여러 종교와 철학에서 부정하고 있는 개념이기에, 생략된 부분이 많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불교부터 객관적인 자신을 부정한다. 그리고 영혼적인 자신에 대해서는 앞서 다루었으니,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되는 자신을 객관적인 자신이라 생각해보자. 앞서 사용한 공 비유로는, 다른 공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제외한 부분이 바로 자신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물론 자신이 어떠한 자유를 가지고 있고, 어떠한 도덕적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공부할 필요가 있다. 비유를 들면 자신의 속도, 이동 가능한 범위는 자아성찰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사회에서는 이것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않다. 다른 공이 충돌해올 때 어떤 방향으로 튕겨나가는가, 다른 공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가. 나 자신 뿐 아니라 사회와 세상에 대한 탐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객관적인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체험을 가져본 경험이 없어 논리를 펼칠 수 없다. 다만, 문화에 보편성이 있다면 종교 또한 문화에 의해 정의되면서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화에 무관하지만 종교에는 보편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것은 초월적인 존재의 존재성이다. 이 존재성을 믿고 싶어하는 것은 문화 밖에서도 공통되는 인간의 특징이 아닐까? 반복하지만, 전혀 경험이 없고 지식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궁금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공,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힘을 공을 움직이는 힘으로, 공들의 충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을 규범, 도덕이라고 비유한 것이 참신하고 쏙쏙 이해가 잘 되는 비유 같습니다.
그런데 의문을 갖게 되는 건, 평평한 곳에서 휘둘리기만 하는 해탈한 공에게 있어서는 규범이라는 제한은 항상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따르고 있는 체화된 규범이기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져서 그 의미를 크게 인식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다 같이 수업시간에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의견 잘 읽었습니다 :)
개개인을 공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신점이 굉장히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해탈한 공은 평평한 곳에서 휘둘리기만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악함에도 휘둘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 해탈한 공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따로 있을 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 집니다.
재미있는 의견 감사합니다!
담마빠다, 바가바드 기타 두 읽기 자료를 읽으면서 과거 불교인으로서, 혹은 인도인으로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이 경전을 대했을 지 생각해보았다. 담마빠다를 읽으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따라야할 덕목, 가치관, 행동으로 무엇을 말하는 지 유심히 읽어보았고 과거에도 마냥 사상과 이념을 강조하는 것이라 아니라 실천하는 무엇의 중요성을 등한시 않았던 것 같다. 바가바드 기타는 보다 해탈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절제 뿐만 아니라 행동과 실천적인 면모의 철학을 제시한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담마빠다와 받았다.
1. 완전히 호불호의 감정이 사라지고 평정심을 갖춘 사람에게 도덕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사물에 대해 초연해지는 완전한 평점을 이룬 사람이 되기 위해선 끊임 없는 자기 행동과 생각의 절제와 정제 과정이 필요하다. 자기 반성과 실천적인 행동을 위한 노력이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해탈에 이르게 되는 데, 이러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순간 더 이상 ‘노력’의 여하가 해탈에 영향을 주진 않는 것 같다. 반면, 도덕은 한 집단을 공유하는 사회에서 공통되는 옳고 그름 (여기엔 감정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 동의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때문에 해탈의 영역에 이른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이 큰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두 책에 따르면 해탈한 사람은 이미 도덕적인 인식, 도덕으로 인해 촉발되는 생각과 감정의 완전한 절제와 분별 있는 받아들임, 즉 해방을 통해 완전한 평정을 누리는 자이다.
2. 담마빠다의 Self을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사고하는 지 그 방향과 비교해보았다.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나 뿐이며 이러한 모습의 왕의 자세이자, 소수가 행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절제된 행동을 통해 왕의 길에 이를 수 있다. 이 길에 내가 오르기 위해선 경전을 읽고 체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편, 객관적인 ‘나’의 인식을 얻는 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인데, 특히 과거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마주하는 현대의 ‘나’는 이러한 객관적인식을 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변화하는 ‘나’를 인식하기 위해선 나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노력을 통해 객관적인 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다만, 자기반성 없이는 나를 안다고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기에 사람은 최선의 노력으로 ‘자기 성찰’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3. 두 문화권의 경험이 있고, 종교를 가진 나에게 이 질문은 무척 흥미로웠다.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았을 때 종교체험은 문화적인 요소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각 사람이 가진 성향(편향)에 어떤 문화가 더 잘 어울리냐는 나를 둘러싼 사회에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편안함의 정도)를 결정짓게 된다. 갈등 혹은 편안함 속에서 종교체험이 시작됨을 관찰하는 것은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이는 문화가 바뀌는 시점 (거주하는 국가의 변화) 이후에서 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불교, 기독교, 혹은 다른 종교이던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 진리는 다르지만 개인이 이 종교의 진리를 체험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분명 문화적 맥락에 따라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자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현대 사회의 점차 더욱 빠르고 (또 복잡해지는) 현상에 맞추어서 생각해보는 시점이 개인적으로 새로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는 여러 다른 학우분들의 의견에서도 보이지만, 사회 또는 타인에 영향을 받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점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체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노력이 체화의 과정이라는 것이 모순적이면서도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 발전에 의해, 얼마 지나서는 현대 사회도 다시 느려지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지셨다는 종교체험이 정말 흥미로울 것 같아 추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인상적인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란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하여 완벽하게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 해탈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아직까지 그 의미가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모든 것에 있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며 어떤 행동을 할 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텍스트에서 언급된 바 있듯 깨우친 자(?)(Awakened)의 가르침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이라면, 해탈한 사람이 하는 행동 또한 결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도덕을 요구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도덕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하나의 규범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았을 때, 해탈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또한 도덕을 요구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연구만으로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는 없을 테지만, 마찬가지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완전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 해도 타인의 시선보다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이고, 아무리 타인이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고 전해준다 해도 내가 진심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경우 결국 다른 사람들은 이를 알 방법이 없다. 상투적인 답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둘 중 어느 것도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종교체험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문화적인 맥락과 보편성 둘 다 갖춘다고 생각한다. '경외감, 신성 의식, 청정감 따위의 정서적 특징을 수반하는 정신적인 경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바탕으로 생각한 것은, 어떤 개인이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난 뒤 그가 속한 공동체와 나눌 때는 문화적인 맥락이 크게 적용할 것 같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종교의 개인들이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들이 소속된 종교의 문화, 혹은 교리에 맞게, 사람들에게 조금 더 와닿는 방향으로 해석될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해석을 하는 이유, 그렇게 해석함으로써 얻고자, 확인받고자 하는 것은 종교의 차이, 문화적 차이를 넘어 보다 보편적인 가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 님의 의견 감사합니다. 저도 *정님과 많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어 코멘트를 적어 보았는데, 도덕은 해탈한 사람에게 의미가 없겠지만 공동체에서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견해가 같았습니다. 또한 종교 체험이 문화적 맥락을 가져 서로 다른 형태를 띄면서도 보편성도 갖춘다는 견해 또한 같았습니다. 다만 저는 해탈한 사람이 정말로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첫 주에 공부했던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진리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고 했듯이 과연 정말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1. 도덕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욕구가 다른 사람과 충돌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켜야할 도리나 규범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욕구를 도리와 규범에 의해서 절제하도록 정한 것이 도덕이라는 관점에서는, 질문에서 제시한 해탈한 인물은 도덕이라는 도리나 규범이 그에게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확히 생각되는 바를 말한다면, 그런 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할지에 대해서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사람은 선이라고 생각되는 가치를 이루기 위헤(어떻게 사람이 공통적으로 또는 일반적으로 선이라는 가치를, 양심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든다. 진화학적인 관점에서의 답이 있을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 또는 욕구에 의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행동하는데, 많은 경우 욕구에 의한 (그러나 규제 또는 절제되어있을 수 있는) 행동이 다수이므로 해탈한 이는 감정적인(욕구를 포함한) 것에 의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욕구와 선이 겹치지 않는다고 가정한 것임.) 남은 것으로써 선으로 생각되는 가치만을 따르는 인물이라고 볼 때, 과연 그가 추구하는 것이 '선'일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선'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동감으로부터 근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공감과 동감은 논리나 지식뿐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적인 요소가 사라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행동 또는 말과 생각이 '선'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위의 모든 주장이 '감정이 사라진'이라는 정의를 극단적으로 생각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 성인이나 도덕적 인물로 추앙받는 이들은 마치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 '어떤 방법'(그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것이 종교적인 교리와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됨)으로든 그것을 우선시하지 않고, '진리'나 '참'된 지혜를 깨닫고 설파하는 것을 보게 되어 마치 해탈한 것이나 무엇인가 알고 개척한 것과 같은면이 있기 때문이다.
2.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히 ‘객관적인’ ‘자신’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방법과 방식은 개인의 생각으로는 제한될 수 있는 가능생이 매우 크다. 다른 이들이 자신에 대한 인식과 생각을 공유함으로 인해서 각자의 주관성을 가진 생각을 서로 비교하고 일관되는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으로 ‘자신’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주관적인 생각들의 교집합을 객관성으로 생각하기에는 어렵고(물론 위와 같은 방식으로만 ‘자신’을 인식해간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객관성’이라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먼저 정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물체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무엇인지 다시 질문을 해보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생각하기가 어려워 ‘객관적인’ 자신의 조건과 정의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토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된다.
3.각 문화권에서의 종교체험이 각 종교(또는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일부의 종교체험은 해당 종교를 계속해서 갖도록(믿는) 보조하거나 돕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그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문화권마다 종교체험이 각자 다르게 일어나는 것으로 질문이 되었는데, 문화권 속에서 종교 체험을 겪는 것을 각자의 환경에서 상황에서의 생각(또는 묵상) 또는 행동을 통해서 얻는 경우가 많을 것일텐데(추측이라 정확진 않습니다) 결국, 각자의 여러 환경을 통한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얻는 ‘종교 체험’은 문화적인 맥락과 요소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물론 어떤 선행을 함, 사람 본성에 대한 절제 및 여러 깨달음 또는 ‘진리’로 표현되는 가르침들은 공통적인 부분들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문화적인 맥락과 요소에 무관한 것으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1. 저는 오히려 그렇게 무정무감, 즉 선하거나 악한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도덕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뭔가를 지키거나 뭔가를 파괴하려는 감정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것만 같다고 느낍니다. 제가 법구경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런 방식으로 도를 터득한다고 하면 일인득도 계견승천이 아닌, 한명의 장수가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만개의 해골이 말라간다에 가깝지 않을까요? 모든 사물에 대해서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일말의 죄책감이 없고, 선이라는 것이 없을 듯한데, 그런 사람에게 도덕이 없다는 끔찍한 상상은 하기 싫습니다. 모든 행동이 이성적인 사람이 과연 진짜 최고의 상태일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2.무협지에 보면 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심마로 인해서 출현 인물들은 주화입마에 빠져서 무공을 잃거나 죽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화입마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승천하는 인물도 있죠. 그럼 이 심마란 무엇이냐, 바로 자신의 여러가지 감정들이 특히 안 좋은 추억들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죠. 이런 존재가 무공을 배운다거나 어떤 경계를 돌파할 때 큰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심마를 되돌아 봄으로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아 돌파하는 데 발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런 심마가 꼭 무협지에만 있는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구경에서 강조한 자신을 아끼는 사람은 자신을 뒤돌아 보고 반성해야 한다는 게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쌓여온 심마를 없애거나, 행동으로 심마를 쌓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뒤돌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심마가 없을 때, 심마에 가려져 왔던 자신에 대한 어떤 사실이 보인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실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연구 아니겠습니까?
3. 제가 유투브에서 봤었던 영상중에 사후체험을 했던 사람들, 즉 사망선고를 받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의 일괄적인 증언은 바로 어떤 "하얗고 깨끗한, 그리고 순수해 보이는 장소"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 곳은 천국일 것이고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평화, 힌두교도들에게는 브라마의 품, 불교도들은 열반의 경지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보편적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문화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라, 어느 쪽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되려 감정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강한 도덕이 요구된다는 해석이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감정은 반드시 악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선한 작용 역시도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되려 평정심과 무감을 갖게된 인간의 행위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고 지적해주신 용원님의 의견도 매우 일리있다고 생각합니다.
1번에 쓰신 의견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욕망이나 감정도 없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시킬 동기도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행동을 할 때 그를 제어할 장치가 (도덕을 제외하면) 없으리라는 우려 역시 맞는 말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도덕의 상당부분이 죄책감이나 애정 같은 감정에 기대고 있다는 의미일 텐데요. 제 코멘트에 저는 '도덕은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규범'이라고 썼지만, 지금 생각하면서는 도덕에 있어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일지 궁금해집니다. 도덕이 감정 없이 오로지 규범으로서만 작동한다면 오래 가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더 이야기 나눠 보고 싶은 주제라고 생각해요. 글 잘 읽었습니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게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 더더욱 도덕이 요구된다는 용원 님의 주장이 저와는 다른 주장이긴 했지만 색다르고 또 일리가 있는 말이라 코멘트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감정이 없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일수록 말씀하신 것처럼 도덕을 더 요구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1에서의 답변이 흥미로웠습니다. 해탈한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행동처럼, 어떤 행동이 자연의 힘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다면 해탈한 사람은 어떠한 행동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부도덕적인 행위가 그를 행한 사람의 감정이나 감각, 욕망에서 출발하는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남겨주신 코멘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1번의 경우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용원님은 그렇기에 더더욱 도덕을 요구해야 한다고 하신 것을 보고 제가 너무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번, 3번 답변도 흥미로운 비유로 예시를 들어주시니 더더욱 직관적으로 잘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사물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과 끊임없이 이성적이라는 개념이 꼭 같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열반에 오르는 것 자체가 삶이 곧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고통 내지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한 시도인 만큼 이를 이성의 전적인 작용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합니다.
1. 해탈한 자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고, 또 그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도덕은 욕망을 자제시킨다. 모든 욕망은 결국 '나 자신의 더 큰 행복'으로 수렴하는데, 무한정 더 행복해지려는 욕망에 도덕이 제어를 건다. 남을 해하려는 욕망, 더 취하려는 욕망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담마빠다에서는 사랑까지도 괴로움을 유발할 뿐이므로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도덕은 욕망의 반대방향으로 작용한다.
도덕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면, 욕망에서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이고 개인들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욕망을 억제해가며 도덕률을 따른다. 욕망들이 대치되어 발생하는 충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도덕이 존재한다. 즉 도덕이 당위성을 갖는 이유는 바로 욕망이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탈한 자에게는 도덕이 무의미하다. 또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을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에게는 애초 도덕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욕망이 없으므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덕이 무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도덕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일지 모른다.
2. 객관적인 것을 '누가 보기에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한 인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누가 보기에도 그런 것'의 '누가'가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은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인식 역시 객관적일 수 없다. 그들은 나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객관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나의 인식이 보편적인 인식과 같은지, 내가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보통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지 확인함으로써, 나의 자기인식 방식이 남들의 자기인식 방식과 같은지 살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자신'을 온전히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만약 가능했다면 어떻게 평가했을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연구에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과, 외부에 대한 반성작용이 동시에 필수적이다.
3. 종교체험은 물론 문화적 맥락에 강한 영향을 받지만, 보편성 역시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신화를 들고 싶다. 각 문화는 고유한 신화를 가지고 있지만 신화들은 유형적/상징적 측면에서 유사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여성 신-남성 신 : 대지-하늘'의 대립, 물이나 공기로서 등장하는 최초의 존재 같은 상징이 수많은 신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공통적 요소들을 융은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보았다. 원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인류 공통의 정신, 지역이나 문화에 상관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집단무의식이 허구라고 하더라도, 서로 아무 교류 없이 형성된 문명들의 신화에서 유사한 지점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적어도 종교적 차원에서는 인류가 어느 정도 유사한 사고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신을 믿는 일 자체도 순전히 문화적인 것이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본성 중 하나일지 모른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신과 같은 추상적 존재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종들을 지금처럼 구분한 능력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를 믿는 것은 인류의 내재적인 능력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체험은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띠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종교체험의 구체적인 양상은 문화에 의해 정해지지만 그 원형은 선천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 도덕에 관한 생각에서 많이 공감하였습니다. 특히 '도덕이 무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도덕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일지 모른다.'는 부분을 잘 표현해주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인간에게는 욕망이 작용하기에 그로 인한 폐단을 막기위한 장치로써 도덕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도덕과 욕망이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표현해주신 부분에 동의합니다.
해탈한 사람에 대한 도덕의 불필요성을 '욕망'에 근거하여 설명해주신 점이 인상 깊습니다. 마지막 글에서 종교의 보편성을 '신화'의 예시를 들어 설명해주신 부분과 신을 믿는 일이 일종의 '본성'일 수 있다는 의견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종교를 문화적인 것으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면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의존은 스스로에 대한 보호본능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도덕은 욕망의 충돌에서 기인해 개인의 욕망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의견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 본인에게는 도덕이 의미가 없겠지만, 도덕에는 부당위뿐만 아니라 당위도 있습니다. 해탈한 사람이 군대에 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감옥에 가야 할까요?
또한 종교 체험의 구체적 양상은 문화에 의해 정해지지만 그 원형은 선천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종교 체험의 원형은 어떠한 본성적인 것이라, 인간이라면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든 그러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떠한 문화적인 원형이라, 인간의 모든 문화가 한 가지 종류의 종교적 체험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의 원형에서 뻗어나와 가능한 여러 종류의 문화적 체험 중 한 가지 종류의 종교적 체험만 하게 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다른 형태의 원형일까요?
어떠한 문화적 경로 의존성 때문에 가능한 다양한 종교 체험 중 한 가지만 하게 되는 것인지, 인간의 본성상 가능한 종교 체험은 지금의 종교 체험 뿐인지 궁금합니다. 만일 어떠한 문화적 경로 의존성 때문에 현대의 인간들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종교 체험 중 한 가지만 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종교 체험은 어떠한 형태일까요?
욕망의 관점에서 해탈한 인간에게 왜 도덕이 필요 없을지 설명해주셨는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제 글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사람이 한치의 욕망조차 없을 때, 과연 그 사람은 어떠한 행동을 할지, 한치의 욕망까지 모두 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1.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하여 완벽하게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 해탈에 이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이 의미가 있을 것인가? 혹은 해탈한 사람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도덕은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탈한 사람에게는 도덕이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도덕을 지키게 만드는, 더 나아가 어떠한 행동이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원인은 감정이다. 그것이 도덕이 지시하는 행위에 의한 감정이든,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의한 감정이든, 도덕와 연관되어 학습된 감정이든(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해탈자가 있다면, 그는 도덕적 행위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자기 외의 사람과 동물들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해탈은 사이코패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사이코패스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해 완벽하게 평정심을 구현한 상태라 본다면, 해탈한 사람은 자신에게까지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이겠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해탈자가 있다면, 그는 무기력증에 걸린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일 것이다.
2. 자기 자신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면서 이루어 가는 ‘자신’에 대한 인식은 과연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는 길이 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연구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 없이 과연 가능할까?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정신을 이루는 각 요소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나의 의식이 형성되는지를 뜻하는 것이라면, 나의 뇌의 모든 세포들의 연결과 그 세기를 알아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100년 후라면 몰라도 아직은 불가능하니 일단 자신의 정신이 어떤 자극이 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내는지 아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자. 자기 자신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면 어떤 자극이 올 때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는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중간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팔을 들거나 말을 할 때, 우리가 팔을 들고 말을 하는 행위는 우리가 팔을 들고 말을 한다는 인식에 선행하거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러니 우리의 인식만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얻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
3. 다양한 문화권마다에서 다르게 일어나는 종교체험은 각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완벽하게 규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일까?
종교적 체험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무언가 신비하다거나, 큰 감정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경험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개미나 생쥐가 종교적 체험을 하지는 않는다. 개들이 인간을 볼때 큰 감정적 변화가 생기듯이, 인간의 종교적 체험도(적어도 대부분의 종교적 체험은) 인간 전체가 공유하는 진화적 형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나'라는 개념이 생기고, 집단을 이루고 살며 '좋음', '선'과 같은 개념이 생겼으며, 자연스레 '나' 가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들이 생겼으며, 대부분의 종교 체험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일어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많은 종교적 체험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적어도 좋음, 선과 같은 개념은 인간이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기에 종교적 체험이 상당한 문화적 보편성을 갖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느냐일 것이다. 도덕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이다. 또한 규범이란 옳고 그름을 뜻한다. 즉 인간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심판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완벽한 평정심’을 구현한 사람 즉 해탈에 이른 사람에게 있어 그의 행동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 그에게 도덕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처음에 생각한 답은 ‘의미 없다’였다. 모든 것에 애정도 싫어하는 감정도 없는 이가 하는 행동이 어떻게 옳고, 그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만약 모든 인간이 해탈한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모를까,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덕이라는 규범이 필요한 세계에 살고 있는데 해탈한 자에게만 그 규범을 면제해주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만 한 것 같다. 해탈한 자 개인에게 있어서는 도덕이 의미 없을지 모르나 남은 우리가 그의 행동을 평가하고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로, 상황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자신의 정신작용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완벽히 객관적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또한 자신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관찰하고 반성하는 그 순간, 그 과정에도 나의 주관성이 다분히 개입되며 그 기준도 결국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인식과 평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 있기 이전에 솔직한 태도로 자신에 대해 관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객관적인 인식의 시작이며 기초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반성작용 없이 자신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완벽한 객관적 인식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제3자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3.
종교체험은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각 종교의 율법과 문화, 종교가 꽃피운 환경 등에 따라 중요시하는 것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종교체험은 하나의 큰 틀에서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 이승 이후 세계에 대한 불안함을 기대기 위해 만든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종교체험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의미도 문화적 맥락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남을 해치치 말고, 나를 절제하고, 사후 세계를 불안해하지 말라는 큰 가르침들이 그러하다. 일상에서 생각해본다면, 과거 기독교 신자였던 나는 힘들고 불안할 때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면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때로 기회가 될 때에 절에 가서 기도를 드려도 나름의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지탱해주고,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유지되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1. 도덕은 인간의 동물적인 충동에 대한 두려움에 기원해서 인간의 본능을 이성으로 제어하고자 하는 의도성이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이 충동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도덕을 요구할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탈한 사람은 사회의 기호와 부조화를 빗을 수 있겠지만 사회가 두려워하는 위험한 충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만약 도덕을 요구한다면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압일 것이다.
2. 객관적인 자신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에게 있어서 세계는 결국 자신 자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연구는 반성작용이 필연적으로 결부된다. 자신을 타자와 마찬가지로 객관화하는 관조의 과정조차도 자신에 대한 연구를 보는 과정에서 반성작용이 이루어진다.
3. 종교란 인간이 초자연적인 허구를 만들고 그것을 신봉하는 도그마라고 생각한다. 결국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기 때문에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는 문화적 맥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나는 보편주의에 몹시 회의적이다. 하지만 절대적 상대주의는 절대적 보편주의만큼이나 타당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체험의 양상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겠지만 다양한 종교체험에 있어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은 공유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