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5주_고・탐] 서양 고대 신화의 인간관 (1)_『일리아스』
서양 고대 신화의 인간관 (1)
『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 천병희 옮김 | 숲 | 2015년 06월 20일 출간 (1쇄 2007년 01월 20일)
토론 주제
호메로스가 기록한 대서사는 불멸하는 신들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뒤얽힘 속에서 역사가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보기에 <일리아스>는 어떻게 신에 비추어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가?
필사(必死)의 허무감 앞에서도 신과 세상과 겨루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와닿는 장면 혹은 구절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풀어주기를 바랍니다.
우선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전체적인 소감에 대해 적어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어려우면서도 놀라웠으며, 각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생각보다 세세하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길었던 이야기만큼 여러가지 생각할거리들도 많이 던져주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집중해서 보았던 것은 ‘신’의 모습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들이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고, 전쟁에 개입을 하며 심지어 진영을 나눠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신은 완전무결하며 언제나 평화, 사랑과 같은 이상적이고 옳은 것들을 추구하는 존재로 생각해왔기에 이같은 신들의 모습들은 충격이었다. 구체적인 장면들을 들자면 특히 아프로디테가 인간세계에서 아들을 구해서 데리고 갈 때 디오메데스가 그녀를 찌름으로써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마지막 부분에서 신들이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에 서서 전쟁을 벌이는 모습, 그리고 이것을 보던 제우스가 마음이 흐뭇해 웃었다고 하는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보며 전쟁이라는 끔찍한 일이 신들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정말 신이라면 아킬레우스의 부탁을 좀 더 현명하게 들어주었어야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를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이 같은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에 쉽게 공감하기도 했다. 어쩌면 오히려 인간 내면의 숨겨진 욕망, 욕구에 사로잡힌 존재가 신이 아니었을까, 혹은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의 근원을 신의 탓으로 돌리려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로 인상깊었던 것은 신이 주로 전쟁에 개입하는 방식이 용기를 북돋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부분을 자극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에 의해 전쟁의 양상이 변한다. 이를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육체에 비해 정신을 더 중시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라와 아테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힘과 용기를 북돋는 모습, 제우스가 아이아스의 마음에 공포감을 심는 모습, 포세이돈이 아카이오족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사기를 높인 장면들이 그 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장면, 헥토르 시신을 값을 매길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데리고 와 장례를 치르는 모습들을 통해 신체 역시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의 목적이 시신들의 혼을 위로해주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정신과 혼을 더 중요시함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렇다면 왜 ‘신‘의 존재를 등장시켰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 당시 사람들은 ‘철저한 원인 규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신의 행동들이 자연형상 혹은 개인적인 정신을 자극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을 봤을 때 원인 규명이 어려운 현상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정말 구체적으로 짜여진 논리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인간과 또한 결국 신들의 생각과 행동들도 인간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또다른 인간사회라는 생각이 들고, 이를 통해 실제 인간의 세상을 설명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평소에 이와 같은 신의 존재를 크게 신뢰하지는 않는 사람으로서 진실처럼 묘사된 또다른 사회를 통해 현세의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설명한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그렇다면 신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 즉 ‘필사’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들의 생각과 행동들도 사는 곳만 다를 뿐이지 올림푸스에 있는 인간 사회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유일한 차이는 인간은 필사의 존재라는 점이다. 책에서도 여러 신들, 그리고 인간들이 사람은 필사의 존재라는 점을 은연중에 언급하는 부분들이 많다. 아킬레우스의 경우는 심지어 명이 짧다는 것이 큰 이유가 되어 명성을 선택한 것처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변하게 된다. 또한 실제로 전쟁에 있어서 정말 수많은 인간들이 죽어나간다. 심지어 한명 한명 죽을 때마다 어느 부위를 찔렸는지, 어떤 과정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지가 언급되고 있다. 죽은 시신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들도 처참하기 그지 없다. 그렇다보니 끔찍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허무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묘사한 이유가 인간과 신의 차이를 강조하는 동시에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며 허무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불멸의 삶을 사는 신과는 달리 이런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싶다.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인간은 불멸의 신과 달리 인생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저도 일리아스를 읽는 동안 필사의 존재라는 점은 인간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인간만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의 시작점이라고 느꼈습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사의 신들과 다르게 많은 것들에 대해 고뇌하고, 포기하고, 선택함으로써 주어진 생을 가치있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망, 비이성적인 행동의 근원을 신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관점에 공감이 갔습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던 전쟁일지가 궁금해졌는데 찾아보니 트로이가 실존했다는 주장이 있음을 알게됐습니다. 전쟁이 실제로 있었던일이라면 신이 인간의 비이성적 행동의 근원을 신의 탓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생각에 더 힘이 실릴것 같아 호기심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어렸을 때 가나출판사에서 나온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로 접했는데, 이번 주에 일리아스를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만화 버젼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출판되네요 ㅎㅎ.
지금 와서 이 장대한 서사시를 다시 접하니, 등장 인물 사이의 갈등과 친분, 그리고 그리스의 문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신이란 존재는 예전에는 완벽하고 강하다는 이미지 였는데, 아레스가 전장에서 디오메데스의 창에 찔려 울부짖는 것을 보면서, 불멸의 존재인 신들이 권력을 잡은 이래로 고통이나 상실을 느끼지 못해서 고통을 느꼈을때 비루해 지지만, 필멸자인 인간들은 오히려 자신들은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고통을 겪어도 패닉하지 않는, 잃을 수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더 조심하고 여러가지 대책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인간은 용기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생명보다 소중시 할 수 있는 가문의 명예가 인간에게는 있었지만, 신은 생명을 걸지 않아도 어떤 초월적인 명성, 잔인한 아레스 조차도 살인마라는 호칭을 받을 정도의 명성이 있었기에, 모두 가진 신은 결핍이 부족해 만족을 모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영웅들의 이름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생명을 걸어가면서 까지, 지켜낸 자신들의 명예로 역사에 남아있지만, 그리스나 로마 신화의 신들은 추락한 것이라고 그저 문학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 글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불멸의 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죽지않는 삶이라는 게 과연 좋기만할까라는 의문이 들게 만들었던 책이었습니다. 경험하긴 어렵지만 책 속의 신의 모습들을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직시하고 있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신의 모습과 구분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주신 내용 중에서 '고통'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용원님께서 적어주신 것처럼 신이란 존재는 완벽하고 강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권력을 잡은 이래로 고통이나 상실을 느끼지 못해서 고통을 느꼈을 때 비루해진다'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제껏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고통을 느끼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이 책에서 신의 고통을 드러냈는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면 불로불사인 신들이 고통을 느끼는 장면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또 같은 고통을 느껴도 그것을 대하는 신과 인간의 자세가 다르리라는 것, 그 차이가 신들은 추락했지만 인간은 역사로 남아있게 했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신들이 추락했다고 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종교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까요?
*원 님의 글을 읽고 나니 만약 저희 문화에도 일리아스 같은 신화가 있었다면, 그래서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유한성을 가지지 않은 신들의 존재를 알고 자랐다면, 삶이 지금과 많이 달랐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의 유한성을 더 크게 인식하고, 그것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원님의 글 잘 봤습니다. 모두 가진 신은 결핍이 결핍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을 가졌고 그로 인해 신들은 추락하고 인간은 자신의 명예와 용맹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는 해석이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측면이어서 새로웠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것을 알고 모든 것이 가능한 (오각형 스텟에서 빠진 곳이 없고 꽉 채워진 존재) 신의 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각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능력을 갖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인성(엄밀힌 신성)의 모습과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당함을 겪기도 하죠.
용원님께서 신들의 추락으로 인해 문학의 일부분으로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은 왜 이러한 유형의 독특한 모습의 신을 구성해 신화를 만들었을 지, 용원님의 해석이 궁금하여 댓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신이 완전한 모습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거부했었을 까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인간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것들을 모두 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보통 신이라고 하면, 관대함, 자비로움, 통달함 등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이와 정반대에 있는 신의 모습을 그려낸다. 자신이 응원하는 인간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용기를 북돋거나, 적진에게 가짜로 신의 말을 전하기도 하며, 이를 빌미로 신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는 등 인간의 삶에 깊숙이 관여한다. 그래서 신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인적인 느낌은 현재 사회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신에 비추어 규정한 인간은 나와 같은가 다른가를 구분하고, 편을 가르며 편애하는 성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도 신도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편애하고, 다른 사람들은 적으로 간주하며 멀리한다.
인간들은 뜻을 같이 함에 따라 그리스군, 트로이아군으로 모이며, 각각 속한 집단을 믿으며,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창과 화살을 겨눈다. 신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든,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서로가 응원하는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을 북돋우며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까지 공격하도록 하기도 한다.
신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는 훌륭한 존재인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을 이와 같이 그렸다면, 그 때의 신이 가진 모습이 바로 인간이 가장 원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리아스]를 읽었을 때 그런 모습이 바로 같은 편을 만들고, 편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인 필사의 허무감 앞에서도 신과, 세상과 겨루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한계와 마주하고, 그에 맞서며 그에 따르는 명예로움에 대한 욕망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22장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헥토르는 죽음을 직면하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악한 죽음이 가까이 있고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으니 피할 길이 없구나. 그렇다면 이것이 전부터 제우스와 제우스의 멀리 쏘는 아드님의 염원이었던가! 그분들께서는 전에는 나를 기꺼이 도와주셨건만. 하나 이제는 운명이 나를 따라잡았구나!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는 싶지 않다.”(633면)
헥토르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운명을 예감하였으나, 물러서지 않고 아킬레우스라는 자신의 삶의 한계에 마주했고, 그 노력에 명예로운 전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으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며, 그에 걸맞은 명예를 얻은 것이다.
앞서 헥토르와 마주할 때 자꾸 공격에 실패하자 아킬레우스가 신들에게 한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들이 헥토르를 계속해서 보호하여 공격에 계속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도망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맞섰다. 그 이유에는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여 처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용사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글 잘 읽었습니다!! 신에 비추어 규정한 인간은 편을 가르는 성향을 드러내고, 이것이 인간들이 원하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저 역시도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신들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약 제우스가 전쟁을 유도하지 않고, 신들도 편을 나누어 싸우지 않았다면 인간 사회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회에서도 편가르기는 덜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이런 모습으로 규정한 이유는 그만큼 인간의 편가르기라는 것이 불멸의 존재이며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인간들의 모습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을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버지 제우스여! 어느 신도 그대보다 잔인하지는 않을 거예요. 알렉산드로스의 악행을 응징하는 줄 알았는데, 칼은 이제 손안에서 박살이 나고 창도 손에서 헛되이 날아 그를 맞히지 못했나이다.” … 그리고 그 자신은 알렉산드로스를 청동 창으로 죽이기를 열망하며 다시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가 여신의 힘으로 힘들이지 않고 그를 가로채어 짙은 안개로 감쌌다.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전투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트로이 전쟁이 이 둘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매우 사소하고, 거대한 전쟁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싸움에 신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신들은 저마다 편을 들어 전쟁의 흐름을 좌지우지한다.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전투에는 제우스와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며, 트로이 전쟁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매 순간 꼼꼼히 가설을 세우고 예측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측과 달라 절망을 하거나, 예측과 다르게 일이 잘 풀려 안도를 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일리아스>에서의 신은, 이렇듯 인간의 예측을 빗나가게끔 하는 일을 꾸미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예측과 벗어난 일은 지금껏 쌓아온 데이터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곤 한다. 다시 말해 <일리아스>의 신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 신은 인간 움직임의 틀을 만들고, 인간은 그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 행위에 동기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신이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데에 어떤 고결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살리는 데에 어떤 대의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분노하며, 서로를 이간질하고, 자신이 응원하는 편이 전쟁에서 이기도록 행동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어쩌면 일리아스의 신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을 더 받아들일만하게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존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우리 인간과 굉장히 비슷한 이유로 무언가를 행하는 신이 있어서 그 신의 뜻에 의해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당대 사람들이 더 만족할만한 답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될만한 답변일 수 있다.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며, 필사의 허무감 앞에서도 신과 세상과 겨루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바꿀 수 있는 세상의 범위와 한도를 신이 정할지라도,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행동을 추동하는 큰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리아스의 신과 비교할 때 인간만이 가지는 가치를 찾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신이 인간과 정말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인간이 추구하는 대부분의 가치와 의미를 신도 동일하게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신, 인간과 신이 같은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훨씬 간절하게 원할 수 있으며, 같은 일로부터도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신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무릅쓸 정도로 간절해질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 그 ‘무언가’가 설령 신도 추구할 수 있는 종류의 것(행복, 사랑하는 대상의 웃음, 복수의 성공, …)이라도, 신은 인간이 그것을 성취했을 때와 같은 희열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기적에 기댈 수 있다는 점에서 신과 차이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절망 속에 찾아온 한 줄기 빛. 신은 이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일리아스에서의 신의 존재가 인간의 운명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인상깊습니다. 말씀해주신 것과 같이 인간의 영역에서 이해하기 힘들거나 아무 의미 없다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에 대해 누군가 주관하고 있는 운명이라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종종 인물들에게 슬픈 일이 일어날 때 이를 위로하고 설명하기 위해 신의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고 후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꾸며 넣은 이야기라고 느꼈기에 토론글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헥토르의 행방을 위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됨됨이가 영웅으로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14권의 다음 대목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아무도 백성들의 목자를 찌르거나 맞힐 수 없었으니 그전에 폴뤼다마스, 아이네이아스, 고귀한 아게노르, 뤼키아인들의 지휘자 사르페돈, 나무랄 데 없는 글라우코스 같은 장수들이 다가와 헥토르를 빙 둘러싼 것이다." 이 대목은 헥토르의 영웅성, 그가 트로이아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리아스>에서는 영웅들간의 우정이나 경의는 많이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장수들이 합심하여 한 명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막아서는 장면은 이것이 유일하다. 헥토르는 전투에도 뛰어났지만 정신적으로도 트로이아인들의 지주였던 것 같다. 그가 죽는다면 트로이아의 패배가 거의 확실시되기 때문에 영웅들은 자신의 죽음을 감수해가며 헥토르를 둘러쌌다. 실제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도 한다. 다른 신들의 개입을 꾸짖었던 제우스는 눈에 띄게 헥토르를 편애하는데, 찾아보니 실제로 호메로스가 헥토르를 편애했다는 의견도 꽤 있었다.
영웅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은 거의 덧없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웅들은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분노하고 싸우며, 그러다 한순간에 죽어나간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이야기 속이라지만, 어떻게 저렇게 맹목적일 수 있을까? 그러다 토론 주제글의 '필사(必死)의 허무감'이라는 주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그 필멸성이 바로 그들의 맹목성의 원천이자 인간성의 원천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멸하는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그 욕망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일리아스 속 영웅들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죽음마저 감수할 정도로 인간들이 바랐던 것은 메넬라오스에게는 사랑, 아킬레우스에게는 명예, 헥토르에게는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일리아스 속 신들이 인간과 매우, 때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닮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이 죽음을 불사해가며 싸운 것은 필사의 존재로서 욕망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불사인 신들은 필사의 인간들만큼이나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의 신들이 매우 의인화되어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신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계속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신을 그렇게 인간과 닮은, 비이성적이며 욕망까지 가진 존재로 본 데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화를 통해 이상적 인간상 등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심판자인 신들이 인간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인간이 지닌 비이성이나 욕망 같은 속성들은 신을 닮은 경이롭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헥토르의 행방을 위주로 글을 읽게되었다는 게 공감되었습니다. 어릴 때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에는 메넬라오스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그리스가 착한 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하며 내용을 이해해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만화 각색의 한계로 인해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는 보다 다양한 인물에 주목할 수 있었는데, 그 중 특히 헥토르의 행방이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언급해주셨다시피 그리스에 대항하여 공동체를 지키는 영웅적인 면모가 인상깊었으며, 아이아스와 치열한 싸움 끝에 서로를 인정하며 결투를 멈추던 장면도 기억에남습니다.
코멘트 마지막 부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신이 비이성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인간의 그러한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참신했습니다!
앞서 보았던 <국가>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선,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올바른 삶이란 이성으로서 욕망과 기개를 절제할 수 있는 삶이었고, 그 안에서 행복한 삶이 실현되었다.
또한 지난주 살폈던 인도철학에서도, 인간의 이상향은 욕망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였다.
하지만 <일리아스>에서 신을 통해 규정된 인간의 모습은 선을 추구하고, 욕망의 절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애욕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이었다. 즉, 필사의 허무감에도 불구하고 신, 세상과 겨룰 수 있는 인간의 본성, 동기는 애정과 욕망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신의 모습을 통해 규정된 인간의 본성과 모습은 헤라가 제우스를 재우기 위한 계략을 펼치는 장면에 잘 드러난다. 헤라는 계략을 위해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요청할 때, 이와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 나에게 애정과 욕망을 주어요. 그것으로 그대는 불사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을 모두 정복하니까요”(p.413)
이 말에 이어 헤라는 잠의 신은 파시테에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여 설득하고, 제우스는 헤라에 대한 애욕을 이용해 꾀어내어 목적을 달성한다. 헤라의 대사, 그리고 신들의 행동과 모습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신은 일반적으로 절대적 선의 존재, 도덕적 이상향으로 표현되는 ‘신’의 모습이 아니라, 애정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임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들의 모습을 통해 투사되는 인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한 인간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랑, 욕망, 원한 등에 기반한다.
따라서 나는 위 헤라의 대사가 <일리아스>에 드러난 신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잘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필사의 존재라는데에서 신과는 차이가 있음에도, 신의 도움이 떠난 헥토르가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예감하면서도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전장에 나서는 모습처럼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운명을 거스르려 하기보다는 운명 속에서 명예를 좇는다는 점에서 욕망이나 애정을 넘어선 인간만의 가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고 생각한다.
애정과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는 신들의 모습에도 투영되어 나타난다는 생각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 역시 <일리아스>에서의 신들이 전적으로 선한 존재이거나 항상 '정의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 깊었고, 그러한 신들의 모습이 낯설게도 여겨졌습니다. <일리아스>에서는 왜 신들을 이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지, 이 부분에 있어 다른 고전들과 구별되는 차이는 무엇일지 앞으로 수업에서 다루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노래하는 서사시이다. 사실 처음에는 전쟁이 신들의 자존심 싸움일 뿐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희생되는 신들의 꼭두각시가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트로이 전쟁이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에게 던져진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황금 사과에서 촉발되었고, 신들이 각자의 구미에 맞게 인간을 조종하여 전쟁의 분위기를 뒤흔들어 전쟁의 판세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을 전지전능하며 한없이 도덕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일리아스>에서의 신들은 인간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 대체로 이들은 인간에게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인간의 탈을 쓰고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것일 뿐,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결정하거나 뒤바꾸지는 않는다. 또한 <일리아스>에서는 신들이 편향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마치 인간과 같은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신에 비하여 인간을 열등한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러한 열등성은 ‘죽음’으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나는 이 유한성이 신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것이며 이로 인해 인간 세상에서 따르는 여러 가치와 덕목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허무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일리아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운명에 대한 수용으로 인해 더욱 중요해지는 가치들의 역설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노래한 인간의 감정과 가치는 오히려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돋보인다. 헬레네를 향한 두 남자의 ‘사랑’은 전쟁과 목숨을 건 결투를 통해 가치 있어졌고,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인해 의미있는 것이 된다. 즉, 신과 달리 인간의 삶에는 끝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의 ‘과정’이 그 자체로 존엄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의미는 아킬레우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사 초반에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으로 받은 여인인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는 상실을 경험하면서 분노를 느낀다. 분노에 대한 표현으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데, 자신의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본인을 대신하여 전투에 나갔다가 죽게 되면서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죽음’이라는 또다른 상실과 분노를 경험한다. 자신의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게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하기 위해 전쟁에 출전하여 결국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태워 끌고 다니는 등의 잔혹성을 보인다. 그러나 서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아킬레우스는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온 프리아모스 왕의 부탁에 인간적인 슬픔을 느끼며 헥토르의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배려와 관용을 베풀어준다. 이렇듯 용맹과 분노를 대표하는 아킬레우스의 인간상이 변모하는 과정에서 그가 적의 수장에게 보인 인간적인 모습이 <일리아스>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가치가 아닐까.
글 잘 읽었습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살아있을 때도 둘의 우정은 가치있는 게 아니었나? 싶지만, 생각해보면 만약 둘 다 영생을 살았더라면 둘은 아마 서로를 그리 각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성과 관계없이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만약 없다면 인간과 신은 그 어떤 가치도 공유할 수 없을지 궁금해집니다. 인간이 인간성을 지니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하셨는데, 무한한 신은 인간성을 가질 수도, 인간성에 공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리아스에서 신은 불멸의 존재이지만 인간은 필사의 존재이다. 9권의 410행에서 아킬레우스는 스스로가 불멸의 명성과 긴 수명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권 420행에서 아킬레우스는 스스로가 이곳에서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전쟁에 나선다. 이처럼 죽음이 다가옴을 알면서도 명예를 위해 나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고, 이것이 일리아스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와 의미라 생각했다.
명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명성, 명예는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죽는 존재이기에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일리아스에서 보이는 전쟁터에서의 명예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싸움에 나서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죽음이 없는 신들에게는 전쟁터에서의 싸움이 명예를 가져다주기 어렵다. 명예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무엇이 명예를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신은 전쟁에 개입할 때 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이나 꿈에 등장하거나 용기를 북돋우는 등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신과 인간이 직접 충돌하는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앞서 말한 명예와 죽음의 관계, 인간과 신의 차이를 생각해볼 때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5권 855행에서 인간 디오메데스가 신 아레스를 창으로 찌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신 아테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라도 인간의 손으로 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 일리아스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당대의 사람들의 신에 대한 관점이 어떤 것이었을지 더 궁금해졌다.
24권에서는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가 화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사람은 각각 아들 헥토르를 잃고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었다. 두 사람 모두 가장 소중한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공유하기에 둘의 화해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불참하고 후에 다시 참여하는 것이 분노와 슬픔이라는 감정 때문으로 보였다. 명예라는 것이 이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결정들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과 불멸의 명예에 대한 욕구를 추진력으로 죽음의 두려움, 고통을 넘어서고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일에 도전하고 해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한다. 신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는 과정과 신이 전쟁에 개입하는 이유, 과정을 보면 감정에 있어서는 인간과 신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신에 비교하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죽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죽고 신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인간만의 명예와 가치가 생겨날 수 있고 인간은 불멸의 가치에 욕망을 느낄 수 있다.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가 화해하는 부분을 인상 깊게 읽었었는데, 굉장히 깊게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명예도 감정의 원동력 역할만을 한다고 하신 점이 참신하게 느껴졌습니다.
불멸에 대한 욕망은 사실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속 인간들을 이 종류의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필멸을 납득하는 점이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내내 든 생각은, 신의 개입이 과도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인물들을 북돋거나 조종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같은 진영의 장수를 지키기 위해 대놓고 나타나서 데리고 가버린 적도 있다. 이는 사실 인간에 대해서도 무례하지만, 게임의 규칙을 정해놓고 잘 즐기고 있는 다른 신들에게도 상당한 결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의 행동이 인간의 상식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작중 인간은 자신을 가지고 노는 신들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무조건 복종의 개념이 아니라, 불멸하는 신들을 거스를 수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나는 일리아스의 신들을,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자연스러운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 미지의 영역에서의 백스토리와 같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차츰 소설적인 재미를 첨가하기 위해 캐릭터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발달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신들 사이에서도 일리아스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자연의 불합리성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또한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인간들과 신들이 인간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신들은 마치 게임을 하듯이, 번갈아 턴을 가지고 인간 세상이라는 장난감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며 휘둘러댄다. 그들 간에 큰 분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며 울고 웃는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역시 24권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가 대화하는 장면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행위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꼈지만,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것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결국에 헥토르에 대한 화를 죽일 수 있었으며, 프리아모스 또한 자신의 아들의 죽음과 별개로 아킬레우스라는 사람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의 영역에 있는 삶과 죽음을 두 사람 모두 맞닥뜨렸기 때문에 공감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신과 대비되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본성을 논하라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분명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완전무결한 모습이 아닌 인간처럼 불완전한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이러한 선입견 때문인지 신들이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편애한다거나 다른 신을 질투하는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반복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된 헤카톰베를 바치고 기도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헤카톰베를 바치는 과정을 서술하는 문단에는 '그리고 (신 이름)은 기도를 들어 주었다' 식의 문장이 등장하는데, 트로이아 사람들이 제우스에게 기도할 때와 같이 신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 아무리 좋은 헤카톰베를 바치든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문장이 나왔습니다. 또한, 제우스가 사자를 보내 트로이아 사람들을 돕던 포세이돈을 막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포세이돈이 제우스를 질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로부터 <일리아스>에서 그린 그리스 신들은 인간을 편애하고 서로 질투하며 싸우는, 마치 인간처럼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들은 왕이나 더 강한 신의 명령에 대부분 순응합니다. 트로이아인의 편을 들들 아카이오이족의 편을 들든, 결국 신들은 제우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합니다. 헤라가 아레스를 자극하자 그는 당장 지상으로 뛰어가 전쟁에 자신의 뜻대로 개입하려고 했지만, 다른 신들의 만류에 그만둡니다. 헤라의 부탁으로 잠의 신이 제우스를 잠재운 틈을 타서 포세이돈이 전쟁에 개입하였지만, 제우스가 깨어나 사자를 보내자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신들끼리 전쟁을 하기도 하지만, 제우스가 이를 말리지 않고 흐뭇해하였다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 이 또한 그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간들은 왕이나 다른 사람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갈등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큰 예시입니다. 왕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순순히 그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브리세이스를 빼앗기자 이제는 이야기의 절반이 넘도록 오랜 시간동안 참전 명령에 불응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멤논이 거짓 꿈을 꾼 뒤 원로회의의 결정을 숨긴 채 거짓으로 철군을 지시했을 때, 그리고 신들이 트로이아인들에게 영광을 내렸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며 철군을 지시했을 때에도 오뒷세우스는 험악한 표현까지 사용하여 왕 아가멤논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일리오스>에 등장하는 장수들은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신과 나라의 명예나 이익을 해친다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만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유한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목숨은 결국 유한하기 때문에, 내가 전쟁터에서든 집에서든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남을 나의 명예를 높게 여기는 것이지요. 아킬레우스와 어머니 테티스의 대화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 드러납니다. 아킬레우스는 단명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에게 명예는 더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저는 여러 신들이 제우스의 말을 듣고 제우스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 세상에서 왕이 있고, 그 나라 자국민들은 왕의 말을 듣는 면과 비슷하다. 인간이 이런 질서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신들도 이런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상범님의 의견을 읽고 보니 신들과 인간들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고전문헌학 전공에서 라틴어 코스를 밝고 있었던 만큼, 워낙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과 인간에 대한 비교에 대한 수업을 많이 들었던 터라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일리아스>에서 요지가 되는 인간과 신의 대비는 수도 없이 들었던 것이라 이를 적절한 언어로 번역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신의 대비는 불멸성이라는 핵심 변인과 궤를 같이 한다. 전자는 필멸하기에 이른바 '유사 영생'을 추구하며 그에 따라 명예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리아스의 주인공들을 추동한다. 이들은 명예를 위해 단적으로 드러나는 테티스의 경고에서 불구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전쟁으로 나아간다. 명예를 존중하지 않다고 느꼈기에 아가멤논에 대항한 아킬레우스가 있었고, 명예를 위해 영원히 남을 이름을 위해 아킬레우스는 죽음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처럼 필멸성은 신으로 상정되는 불멸을 가슴 깊이 추동하며, 그에 따라 인간은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중요시하며 죽음을 넘어선 영생을 추구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필멸이라는 가치를 지니며 따라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 의의와 앞으로 걸어갈 길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가진다. 필사의 허무함은 오히려 삶에 대한 원동력으로 환원되며 그렇기에 신의 하루보다 인간의 일생이 보다 다채로울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고민은 필사를 인식하면서부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신은 감히 고민하지 못하는 존재의 의의를 고민하고 무엇을 남길지 고뇌하는 인간성을 만들어낸다.
간결하지만 *범님의 요약이 무겁게다가와서 글을 남깁니다.
신의 하루보다 인간의 일생이 보다 다채롭다는 해석은 인간중심의 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해석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불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마음/기준이 흔들리는 것이 나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준범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허무함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유능함에 다가가지만 모든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될 순 없고 모두가 유능한 것이 모든 인간이 누려야할 평등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준범님은 삶의 유의미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았는 지 듣고 싶어졌습니다.
<일리아스>에서 보여주고자 한 인간의 모습은 필멸자임에도 불구하고 매순간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불멸자이자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신들은 이야기의 초입부터 마치 게임을 하듯 서로 편을 나누고 인간세상의 일에 개입한다. 인간에게는 그들의 삶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지만, 신들에게는 그저 자존심의 문제, 혹은 부탁 한 번 말 한마디에 쉽게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문제일 뿐이다. 보통 '신'이라 하면 온갖 좋은 수식어구들이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는 오히려 신보다는 인간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이는 위엄있는 모습보다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 신들의 행적도 그렇지만, 그들에 비해 훨씬 나약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슬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비중있게 풀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전투 장면인데, 상황보다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독백?)가 기억에 남는다. 헥토르에게서 승리를 거둔 뒤 아킬레우스는 "죽어라! 내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때에 언제든 받아들이겠다." 고 말한다(635-636).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보니, 그와는 반대로 신탁을 통해 알게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오이디푸스가 떠오르기도 했고,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 파티'가 생각나기도 했다. 운명에 굴복하거나 벗어나려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말이 정확히 와닿지 않았었는데, <일리아스>의 등장인물들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불사를 꿈꾸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어떤 사람은 '어차피 죽을텐데'라는 생각으로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 이렇게 '언젠가는 끝날 자신의 삶'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리고 매일을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의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개개인의 삶의 모습과 그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다르며, 바로 이 부분이 인간 고유의 가치라는 *정님의 의견에 매우 공감합니다. <일리아스>에서의 인간들은 신보다 열등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불사'의 신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본인의 운명을 인정하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갑니다. 이런 점이 저 역시 인간만이 가지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도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일리아스에 나타난 신들의 모습에는 초월자답지 않은 인간다움이 느껴진다. 중립을 지키기 보단 편을 가르고 인간들의 전쟁에 관여하여 그들의 행동을 좌지우지한다. 호메로스는 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신을 등장시켰을까.
인간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자비한 전쟁 속에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죽음에 노출되고, 그 누구도 삶을 장담할 수 없다. 부당해보이기도 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들은 어떠한 이유가 필요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필멸자인 자신들이 휘둘리는 운명을 이해해보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신은 인간과 달리 죽음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겐 죽음을 무릅쓰고 행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신으로부터는 찾을 수 없던 인간만의 가치가 나타난다. 단명의 운명을 타고난 아킬레우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헥토르처럼 전쟁에 나선 많은 인간들은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분노로, 명예를 위해, 또는 지켜야 되는 것들을 위해 죽음을 마주한다. 이들은 운명에 체념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수용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했기에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필사의 운명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이 있음으로 슬픔, 분노, 사랑, 용기도 가치 있기에 죽음이 있는 인간이 오히려 신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진님의 의견에 매우 공감합니다! 저 역시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운명이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러한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들의 존재를 인간사의 부정한 일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제 3의 존재로 등장시켰다고 보신 부분 역시 저의 견해와 유사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운명에 체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수용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싸울 수 있었다고 하신 부분이 인상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생을 사는 존재에게도 슬픔, 분노, 사랑, 용기 등의 감정이 아예 의미가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죽음이 정해져있는 지금보다는 물론 훨씬 가치가 낮은, 아주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겠죠. 이런 감정으로 인해 때때로 고통받기도 하고 고뇌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런 감정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의견이 공감되어 이렇게 코멘트 남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렸을 때 만화로 읽은 그리스로마신화와 다르게 딱딱하고 지루할 것 같았던 <일리아스>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리스문학은 문체의 개성보다 작품의 질을 중요시하여 끊임없이 고쳐나간 결과물이며 따라서 전승된 현 상태가 시작점이자 곧 종착점이라는 것 즉 완성된 상태라는 점이 책을 읽는 내내 와 닿은 정도였다. 특히 수많은 인물들이 고뇌, 전투, 절망 등 비슷한 행위만 하는데도 그들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든 ‘호메로스’의 능력은 대단했다. 덧붙여 오랜만에 두꺼운 책을 완독하는 것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읽어나갈수록 인간과 신들의 이름 앞에 붙거나 이름을 대신하는 별명들이 나중에는 정이 들었던 것 같다. 대지를 흔드는 자(포세이돈), 웃음이 많은 아프로디테, 황소 눈의 존경스러운 헤라, 인간들과 신들의 왕이자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 등..
나는 책 뒤쪽의 해설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었는데, 호메로스의 신들이 절대자라기보다 다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은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귀족들의 모습과 심리를 투영한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이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서인지 ‘신이 어쩜 저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종종 이해를 하며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리아스> 속 신들의 모습은 사실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이 아끼는 이를 편애하고 이를 위해 다른 이들의 운명을 우선순위 아래에 둔다는 것, 매우 감정적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번복한다는 점,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권위를 이용한다는 점, 편을 나눠 가끔은 치사하게 싸운다는 점 등등. 단 인간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토론의 질문인 ‘신에 비추어 인간이 어떻게 규정되느냐’의 답일 것이다.
<일리아스>에서는 신에 비추어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인간은 자신이 가진 필사의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개척자와 같으면서도 결국 그 운명을 신에게 의탁해야 함을 아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신보다 뛰어난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에게 의지하고,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원망하는 모습에서 인간이란 한없이 유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나를 큰 미망에 빠뜨리셨소이다. 무정하시도다! 그분은 전에 튼튼한 성벽의 일리오스를 함락한 뒤 귀향하게 해주겠다고 나에게 약속하고 머리까지 끄덕여 다짐하시더니 이제 와서 사악한 속임수를 생각해내시어 나더러 수많은 백성들을 잃은 채 아무런 명예도 없이 아르고스로 돌아가라 명령하십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막강하신 제우스의 즐거움인가 봅니다.” -아가멤논, 256쪽 <아킬레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내다> 中
(그러나 신들의 고뇌를 볼 때면 때로는 이런 점조차 인간의 특권이 아닐까싶기도 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의지하듯 인간은 신에게 의지할 수 있지만 신은 ‘신’이기에 그들이 아무리 인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행동과 운명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면 자신의 운명을 종말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행위 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전부인 목숨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필사의 존재이지만 그 허무감 앞에서도 신과 세상과 겨루고, 목숨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책을 읽고 든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와 의미는 ‘필사’임에도 생기는 것이 아닌 ‘필사’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느꼈다. 우리에게 죽음, 끝이 없다면 현재의 가치들 중 많은 부분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고 마지막까지 피해야 할 존재이지만 참 많은 것들을 죽음보다 우선시하는 다소 모순적이고 위대한 순간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남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과 목숨을 내던지고 아킬레우스와 싸우는 헥토르, 동시에 사랑하는 전우의 죽음으로 인해 또한 그렇게 싸우는 아킬레우스의 대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또 그들이 ‘필사’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신보다 인간이 성스러워 지는 순간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또한 제 마음도 제가 살아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헥토르가 먼저 제 창에 맞아 목숨을 잃고 메노이티오스의 아들 파트로글로스를 죽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당장이라도 죽고싶어요! 전우가 죽는데도 도와주지 못했으니,,” -아킬레우스, 532쪽
‘한편 헥토르는 자신의 친동생인 폴뤼도로스가 내장을 손으로 움켜쥐며 땅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자 두 눈에 안개가 쏟아졌다. 더는 멀찍이 떨어져 보고 있을 수 없는 헥토르는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불길처러 아킬레우스를 향해 달려갔다.’ -590쪽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의 운명의 날을 맞기 전에는 나도 마음속으로 트로이아인들을 아끼고 싶어 많은 자들을 사로잡아 해외에 내다팔았다. 하나 신이 일리오스 앞에서 내 손에 맡기는 자는 지금부터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리라. 모든 트로이아인들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프리아모스의 자식들에 있어서랴!” -아킬레우스, 599쪽
인간은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서, 그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일리아스의 신들은 100% 전능하게 묘사되지는 않아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지는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신은 그럴 때에 딱히 탓할 대상이 없는데, 인간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신을 탓할 수 있고, 이러한 인간에는 특징이 적어주신 것처럼 ‘특권’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간절해질 수 있다는 요지의 글을 썼는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 ‘아니기때문에’ 목숨을 내던지고 무언가를 해내는 게 가능하다는 의재님의 글이 상당히 설득력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가진, 여러 완전한 속성은 모두 인간이 동경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의 완전한 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일리아스를 읽으며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신화에서는 신이 인간을 빚었다고 나오지만, 신이라는 존재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함을 동경하며 만들어낸 창조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일리아스에서 명분은 그럴듯하게 내세우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전쟁을 부추기며 욕심을 부리고 악랄한 신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과연 ‘신’인지 ‘인간’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책을 읽으며 내가 내린 신과 인간의 차이점에 대한 결론은 단 하나, 불멸성이나 조종하는 등 신이 가진 여러 초능력 과 이로 인한 상하관계 뿐이었다. 이 외에는 인간과 정말로 다를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일리아스의 신을 논외로 한다면, 우리가 흔히 ‘신’이라고 이야기하면 종교를 무관하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성스러움, 너그러움, 하나님 혹은 부처, 예수 등등, 뭔가 인간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해탈적이고 초월적인, 포용력 있는 고차원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일리아스에서의 신들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술수를 써가면서 서로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화에서 신의 요소는 왜 개입된 것일까? 신이 여기서 무슨 의미를 가질까? 앞서 언급한,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창조한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점에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완전한 존재의 상징이자 인간이 동경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조차도 막상 신들의 사회에서는 인간과 별반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심, 전쟁, 시기,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인 속성을 신에게도 부여함으로써 완전한 신마저도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바쁘다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또한 앞서 언급한 인간의 필사의 속성에 관해 잠깐 언급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이 점은 인간이라면 공평한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 혹은 세상은 인간과 다르다. 신은 죽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불멸이 정해진 신과는 달리 언젠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인간으로써는, 이러한 사실이 허무감을 주면서도 오히려 더욱 필사적으로 신과 대항하거나 세상에 대항하게 되는 것 아닐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결코 바꿀 수 없는 필사의 속성이, 오히려 인간에게는 탐욕이나 욕심을 넘어선,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좀더 유의미하고 가치있는 것들에 집중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 점이 불멸하는 신들과 다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리아스 속 불멸하는 신들은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한 나날들 아닐까? 죽음이라는 운명으로 인해 주어진 시간과 자원이 한정된 인간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선택과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히려 불멸하는 신보다 언젠가 죽게 될 인간의 삶이 훨씬 더 의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인상깊었던 점은 신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은 인간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원전 속의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인간적이어서 놀랐다. 나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신이라기보다는 어벤저스에 나오는 히어로들 정도로 보였다.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창에 손을 찔려 아파하며 도망가기도 하고, 다른 신들은 제우스에게 던져질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처럼 일리야스에서는 신과 인간이 거의 동일한 욕망과 공포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리야스에서 인간과 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일리야스에서 인간과 신의 군본적인 차이점은 인간들의 경우 신들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그렇게 신들은 비참한 인간들의 운명을 정해놓으셨소. 괴로워하며 살아가도록. 하나 그분들 자신은 슬픔을 모르지요. 제우스의 궁전 마룻바닥에는 두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하나는 나쁜 선물이, 하나는 좋은 선물이 가득 들었지요. 천둥을 좋아하시는 제우스께서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주시는 자는 때로는 궂은 일을, 때로는 좋은 일을 만나지요. (24권 525-530)
이처럼 인간은 필사의 비참한 운명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또한 신들에 의해 좋은 일과 궃은 일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왜 필사의 운명을 알면서도 신과 세상에 도전하는 것일까? 헥토르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해칠까 두려워 자신조차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킬레우스와 싸우러 간다. 또 아킬레우스와 싸우다 죽게 되었을 때도 '후세 사람들도 들어서 알게 될 큰일'을 하고 죽으려고 한다. (22권 90-130, 300-305) 이처럼 일리야스의 영웅들은 필사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위해 살아가며, 신과 세상과 겨룬다. 일리야스 속 세계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만이 가지는 가치이자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일리야스 속에서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자는 죽는 것이 더 나을, 무의미한 삶을 사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 중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은 아주 적다. 전쟁에서의 용맹과 같은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인류를 위한 희생, 애국과 같은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로 여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필사의 인간이 허무하지 않고 도전할 이유는 무엇일까?우리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즉 현대인은, 우리는 왜 사는가?
신들이 인간과 유사한 욕망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 부분에서 인간의 '운명'을 이끌어내신 형준님의 해석이 흥미로웠습니다.
필사의 운명을 지닌 인간이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필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미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고 어느순간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면, 주어진 시간동안이라도 감사하며 더 치열하게 살아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당장 오늘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면 적어도 후회없는 하루를 보내자며 다짐하곤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되려, 인간의 죽음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생 시절 무협지 만화를 좋아하던 나는 신, 초인적인 능력, 그들과 공존하는 인간, 전투, 고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에 무척 빠져있었다. 현실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나의 모습을 떠올릴 땐 더 깊숙이 만화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고 이 대서사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그 때의 신을 동경하고 설레어했던 마음이 다시 피어남과 동시에 치열한 인간의 본성(색욕, 식욕, 승리욕, 권력욕)이 서로 충돌하고 나아가 신에게까지 도전하고, 신을 자신의 본성에 맞게 이용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들은 인간과 달리 필멸의 존재, 절대 권위의 존재이지만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존재임을 바라보면서 신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를 대비하며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지금까지 신은 언제나 자의적이며 스스로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신이 영향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탐하는 제우스의 모습과 이로 인해 제우스의 판단력과 집중력이 흐려지는 모습, 이러한 제우스(신)의 실수를 틈타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헤라 등의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신의 모습과 매우 대비되어 굉장히 놀라웠다. 특히 기존에 내가 생각하던 ‘신’-‘인간’의 관계와 매우 대비되는 장면이 있었다. 동판 배띠를 두른 아레스의 아랫배로 데오메데가 창을 찔러 넣어 아레스의 살갗을 찢고, 아레스가 이에 크게 아파하며 울부짖는 모습은 신의 절대적인 위엄이 인간에게 의해 도전 받아 추락하게 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일리아스>를 보며 혼란스러운 고대 문명의 인간 사회(승리욕과 색욕 등의 인간 욕망이 지독히 얽혀 끊임없이 전투하고, 배신하고, 또 사랑하고 결국엔 죽는 혼란스러운 고대 문명 사회)에서 발생하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인간의 불완전함만으로 설명하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켜보면 문명사회에 종교는 필수적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기술 진화와 인지혁명을 맞이하면서 종교와 신 (즉 사람들을 한 곳에 결속하고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이념) 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였지만 보다 더 발전되고 과거엔 상상치도 못했던 신과 같은 능력을 현재의 인간은 손에 쥐었음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이 존재하는 한 신과 종교를 믿으며 완전함을 추구하고 동경하는 본성은 절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 자신들이 마주하게 되는 인간적이면서 비이성적인 현상(특히 감정에 크게 휘둘려 역사적인 결과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더 깊이, 대중적으로 더 다양한 신을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절대적인 신을 섬기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일리아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인간적이고 때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신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신을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복종자이면서 동시에 그들도 자신들과 어느 부분 동일한 불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개체로 규정하려 했던 것 같다. 변화하는 현실에 무력한 자신들의 모습을 신의 계획, 의지, 농간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신은 언제든 자신들의 능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에 떨어져 있는 높은 존재로 삼고 싶었던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분은 전에 튼튼한 성벽의 일리오스를 함락한 뒤 귀향하게 해주겠다고 나에게 약속하고 머리까지 끄덕여 다짐하시더니 이제 와서 사악한 속임수를 생각해내시어 나더러 수많은 백성들을 잃은 채 아무런 명예도 없이 아르고스로 돌아가라 명령하십니다.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막강하신 제우스의 즐거움인가 봅니다.” <P. 256>
위 구절은 그 때 당시 인간이 가장 위대한 신으로 숭배하는 제우스의 실망스러운 모습에 탄식하고 분노한 아가멤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롭고 흠 없는 ‘신’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지 않은 가?
나는 인간의 삶 바로 옆에서 끊임없이 간섭하고, 변덕부리고, 그들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그리스 로마의 신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대 트로이, 그리스인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즉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하면서 자신들이 처한 혼란스러운 사회와 이에 따라 격변하는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자신들과 큰 차이가 없는 존재들의 개입으로 일정부분 그 피로감, 스트레스, 불안함을 덜어내려 했다. 그리고 이 대서사를 따라 전쟁, 사랑 등에 임하는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헥토르 등 여러 인간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감정’, ‘판단’ 등의 요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행동한다. 아마 자신들이 지배받는 자신들의 복잡다양하고 설명불가능한 ‘감정’을 여러 신에 대입하여 설명하러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들 중 가장 영향력이 가장 존재인 제우스가 다른 신들에 비해 더 특징적으로 부각되는 모습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가치관과 판단능력, 대립되는 현상을 앞두고 고민하고 주저하는 면모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며 인간의 행동을 좌지우지는 ‘감정’의 특성이 더욱 부각한다고 생각하였다.
저에게도 신 아레스가 창에 찔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일리아스 속의 세계에서 신은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해졌는데 초인적인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 인간의 무력함을 설명해줄 수 있는 존재이자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는 표현을 읽고 오늘날에 남아있는 종교의 신 중에서 이런 특성을 가진 신과 종교가 남아 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일리아스 속 신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매우 닮아있다. 아니, 인간이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감정에 휩싸여 일을 벌이고, 인간의 삶에 개입해 권력을 휘두르는 듯한 신의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하면 떠올리는 완전무결한 모습과는 다소 다르다.
나는 종교, 신 등을 믿지 않는데, 종교나 신 역시 인간이 필요에 의해 창조해 낸 대상이자 문화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등장하는 신의 모습이 감정적이고 불완전한 이유는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여러 전쟁과 같은 부정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신이 인간사에 개입해 발생하게 되는 ‘트로이 전쟁’처럼. 만일 신이 완전한 존재였다면, 인간사에 개입해도 그런 부정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지금 펼치고 있는 전쟁은 신들의 농간에 의해 발생하고 있는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신들이 감정과 고통에 움직이는 존재로 설정된 것이 되려 인간사의 부정적 면모들을 뒷받침 해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 역시 인간처럼 감정과 고통을 갖는 존재라면, 신과 인간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역시 문제에서와 같이 ‘죽음’의 여부이다. 신은 불멸하지만, 인간은 필멸한다. 즉, 그 ‘죽음’에서 기인한 감정의 차이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존경스러운 어머니께서 제우스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그대에게 전해주셨다면, 속히 나라도 내보내고 다른 뮈르미도네스족의 부대가 나를 따르게 해주시오. 혹시 내가 다나오스 백성들에게 빛이 될는지. 그리고 그대의 무구들을 내 어깨에 걸치게 해주시오. 혹시 트로이아인들이 내가 그대인 줄 알고 싸움터에서 물러갈는지. 그럴 수 있다면 지칠 대로 지친 아카이오이족의 용맹스러운 아들들이 잠시나마 전쟁에서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오.” - <일리아스>, 16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中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전장으로 나서게 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이미 자신이 아킬레우스만큼 잘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파트로클로스 뿐 아니라, 전장에 나서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죽음을 전제하고 나선다. 비록 자신이 죽을지라도, 명예와 가치를 위해 이를 선택함에 주저하지 않기에 인간의 선택은 더 빛난다고 생각한다. 신은 죽지 않지만,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하기에. 그걸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죽음으로 뛰어드는 인간의 행동이 더 명예로워 보이는 것 아닐까.
“위대한 프리아모스는 그들 몰래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 무시무시한 두 손에 입 맞추었다.”- <일리아스>, 24권 몸값을 주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다 中
프리아모스가 자신의 아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시신만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이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 자존심조차 버리고 적에게 애원하는 모습과, 이에 감동받아 결국 분노를 거두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결말부에 제시되며, 인간이란 결국 이런 감정들에 가장 크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자식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끼고, 그와 같은 보편감정에 비록 적일지라도 동화되어 결국 눈물을 쏟게 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의견 잘 읽었습니다:)
1학기 AI와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서도, 이번 신과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서도 감정이라는 대답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넓은 개념이기에, 그 중에 어떤 것이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수현씨의 의견을 들으니, 보편감정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동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현님의 코멘트에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도 신들이 정해진 때에만 개입하고, 신의 개입여부가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그들이 인간사의 부정적인 면모를 뒷받침해준다는 해석으로 정확하게 정리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파트로클로스는 역사적으로 명예로웠을지는 모르겠으나, 밖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아킬레우스의 고집 때문에 헛죽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덧없게 빛나는 것은 필멸자에게 나타나는 양면성이 아닐까요.
만화로 보던 그리스 로마신화 이후로 대학교에 입학한지 얼마안되서 여름 계절학기에 그리스 로마신화 수업을 들었었다. 만화에서는 차마 나올 수 없었던 잔인하거나 성적인 부분들과, 비유와 상징으로 도배되어 교수님의 해석없이는 잘 읽을 수 없었던 고전들을 보고 놀랐었던게 생각이 난다.
조니뎁이 주연으로 한 영화 트랜센던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조니뎁은 인간의 뉴런을 본따 실제 사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과학자로 나온다. 오프닝신은 인공지능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신인데 당신은 신을 만들었나요? 라는 기자의 물음에 인간은 옛날부터 신을 만들어오지않았나요? 라고 조니뎁이 답한다. 이후 조니뎁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면서 연인을 위해 본인의 뇌를 업로드 하게 된다. 조니뎁의 대사처럼 인간은 과학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보다는, 한 세계를 만드는 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스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 하지만 어딘가 인간같은 신들의 모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영웅들을 통해 그런 것을 말한 것을 아니었을까. 인간의 본질을 신격화한것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올림푸스에 올라가서 신들이 되어 살거나 영원히 죽지않는 불멸을 얻어 신처럼 될 수 있는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죽음을 필연적으로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신이라고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전지전능,완전 무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실수를 하는 헤라를 꾸짖는 제우스, 창에 찔려서 다친 아레스와 헥토르의 시신을 말로끌고 다니는 아킬레우스를 12일 뒤에 회의를 열어 비난하여 인간사에 개입하는 신들 등 , 절대적인 신 개념과는 좀 거리가 느껴졌다.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야하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운명적으로 얘기하는 구절이 인상깊었다. “이것 보게 친구, 만일 우리 둘이 진정 이 전쟁을 피하여 영원무궁토록 늙지도 않고 또 죽지도 않을 수만 있다면, 내 자신이 맨 앞에 서서 싸우지는 않을 것일세. 남자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싸움터로 자넬 보내지도 않을 것일세. 하지만 지금 죽음의 운명들이 떡 하니 버티고 우뚝 서 있네, 수도 없이. 그것들을 인간들은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니 나가 세! 누군가에게 명성을 주던, 누군가가 우리에게 줄 것인즉!”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면, 그 순간부터 신은 되지 못해도 신적인 힘이 나오는 것일까. 전쟁에 나가 가족들을 다시 보기 어려울 수 없지만 이것이 운명의 신이 실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 내가 죽더라도 신의 은총이 있을 것이다. 이런 구절에서 종교적인 개념으로의 신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은 신이 나에게 주어진 시험이고 뜻밖의 행운은 신이 나에게 내린 선물이다. 결국 이번 생 이렇지만 다음 생은 신의 은총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졌지만 신의 축복을 받았다 등의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하는 도피처와 보상심리를 통해 변화된 현재와 나아진 미래를 기대하는 인간의 염원이 육화되어 지금까지 신으로 자리잡고 있는게 아닐가 생각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갖춘 ai가 등장하게 되면서 인간의 전유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GAN을 통해 학습된 인간의 이미지는 눈에 띄는 결함외에는 실제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며 gpt3이 작성한 답변은 인간의 그것과 구분하기 힘들다.
그래도 기계는 정신이 없잖아, 비인간적이지라고 말하던 옛날의 사고방식대로 정신과 영혼을 가진 것이라면 모두 인간이라면 기술발전이 될때마다 우리는 기존의 정신을 가졌지만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 분류했던 것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진다. 정신을 가진 로봇은 그러면 불량품으로 취급되어 폐기되어야 되는 것인가, 무심코 버려지는 종이컵에 누군가의 정신이 이식된다면 우리는 무심코 버릴수는 없을 것 같고 연민과 동정의 느낌이 된다. 이런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논의보다 더 빨리 기술이 발전해서 우리 앞에 놓이거나 씌워지게 되면 우리가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비인간적으로 인간적인 것을 대하지 않을까 고민이 되는 밤이다.
종이컵에 누군가의 정신이 이식된다면 무심코 버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 인상깊었습니다. 마치 SF 장르 미디어에서 나올 법한 소재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자니 이제는 마냥 옛날처럼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1학기때 수업을 들으면서 그래도 한 가지 결론을 내린 것이 있다면 기술에 발전에 맞춰 우리도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요즈음들어 더 체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수진님처럼,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래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끊임없이 이어져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카프카는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일리아스에서 나타나는 인간관이 중요한 전제는 인간이 죽음을 필연성을 인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한없이 유한한 존재이면서 자신의 의미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역설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죽음의 목전에서 느끼는 복잡한 심정은 헥토르가 아킬레우스를 기다리는 장면에 생생하게 기술되어있다. 인간의 세계에서 걸출한 영웅인 헥토르 역시 죽음을 마주하고는 나약한 인간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삶에 무거운 가치가 생성될 수 있다. 인간이 신처럼 불사의 존재라면 모험과 도전이 가지는 의미는 극적으로 퇴색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행하는 선택들이 인간의 삶을 더욱 고귀하게 만든다.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삶밖에 살 수 없다. 다양한 자아를 살아가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 태생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은 가장 자신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단 한 번의 삶을 사는데 후회하지 않고 만들어나간 정체성이 인간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