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7주_고・탐] 동아시아 전통의 인간관 (2)_『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저자 김영민 교수 특강
동아시아 전통의 인간관 (2)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음 | 옮김 | 사회평론 | 2019년 11월 25일 출간
목차
*매니페스토: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1. 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2.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
3.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에서
4. 성급한 혐오와 애호를 넘어
토론 주제
김영민 선생님은 고전 읽기를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러분은 <김영민의 논어에세이>를 통해서 어떻게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나요?
여러분이 마주한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 혹은 부닥친 "양질의 자극"
또 펼쳐진 "타성의 늪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는 "새로운 사상의 지평"은 어떤 것인가요?
혹은 질문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논어 에세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개진해주기 바랍니다.
고전하면 일단 거부감이 든다. 애써서 읽어야 하는 길고 지루한 텍스트. 그러나 다들 고전 속에는 가르침이 많다고 하니. 지성인이라면 이 정도는 읽어봐야 한다고 하니.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이 수업에 참여한지도 모르겠다. 수업에서 애써서 읽으면 머리 속엔 선현의 지혜와 통찰이 가득 찰테고, 나는 조금이나마 지혜로워질지 모른다고. 수천년을 거슬러온 텍스트니 범인의 머리로는 도출할 수 없는 가슴을 탁 치게하는 가르침이 담겨있으리라고. 그래. <논어에세이> 속의 표현대로 나는 고전을 입에 쓴 만병통치약처럼 느끼고 있었나보다. 애써서 읽으면 보상이 따라오는! 그러나 수업을 통해 고전을 한 두권 읽다보니 느낀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기분이었다. 천년의 지혜라기엔 그저 평범한. 무언가 엄청난 가르침이라기에는 김 빠지는. 이런 나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책에선 고전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죽어있는 서먹한' 글이고, 고전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면 내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 고전은 애써서 읽어서 얻을 보상을 기대하는게 아닌, 그 '애써서 읽는법'을 가르쳐 주는 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수업이 진짜 재밌게 느껴진 순간은 고전을 읽는 것 그 자체보다는 나와 같은 고전을 읽은 학우들이 다양하게 느낀 생각들을 접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고전을 올바로 읽는다는 것, 텍스트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생각을 나누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죽어있는 텍스트를 부여잡고 씨름하며 끙끙대고 왜 나한테 진리를 알려주지 않냐고 소리쳐왔던 것이 지금까지 나의 공부였던 것 같다. 죽은 자는 말이 없듯 텍스트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 그곳에서 생명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몫이다. 그 글을 어느 컨텍스트로 읽느냐, 이에 따라 텍스트는 다르게 읽힌다. 나의 상황과 너의 상황에서 동일한 텍스트는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 글이 쓰였을 당시와 지금의 시간은 다르기에 텍스트도 다르게 읽힌다. 그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임을, 그리고 그 방법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나의 생각을 더 공고히 확립하는 것 같다. 삶과 세계가 텍스트라면, 텍스트를 올바로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과 세계를 올바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그 방법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텍스트가 전하는 다른 목소리를 느끼고, 그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또 다시 텍스트로 남기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내용과 별개로, 책을 읽으며 저자처럼 글을 매력적으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내용은 전혀 아닌데, 글이 참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예쁜 그림이 그려져있고 만지면 보들거리며 손에 부드럽게 달라붙는 책커버 탓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니다. 글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왜 저자를 칼럼계의 아이돌로 표현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글을 이렇게 아름답고 재미있게 해석해서 표현할 수 있다니. 텍스트를 올바로 읽는 법 역시 중요하지만, 저자처럼 텍스트를 아름답게 쓰는 법 역시 배우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적인 시가 등장할 때면, 나는 이따금씩 감탄의 숨을 내뱉곤 했다. '나도 이렇게 글쓰고 싶다..' '멋진 글을 쓰고 싶다..' 하고.
책을 읽으면서, 이번 주에 주어진 <논어> 자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논어 에세이를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공자도, 논어도 내겐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단 하나, 공자가 생각보다 굉장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자도 나쁜 사람을 미워도 하고, 남들이 자길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도 하고, 고기도 좋아했고, 성공하려는 욕망도 있었다. 공자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공자의 '말씀'들이 훨씬 더 와닿기 시작했다.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떨까요?"라는 질문에, '내 상상 속 공자'였다면 당연히 원한의 덧없음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고, 나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본받아야 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실제 대답은 이랬다. "그럼 덕은 무엇으로 갚으려고?" 그리고 그동안 고전을 읽으면서 내가 두었던 패착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는데, 그건 내가 고전의 저자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수천 년 전 사람이라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고, 저런 고전을 쓴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게 지혜로운데다가 워낙 성인군자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나와 아예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여겨왔다. 한마디로 그들의 말은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전을 읽는 건 머리로는 그 가치를 이해할지언정 가슴이 뛰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와 같은 인간이었고, 나름의 고민들도 있었으니 이런 책들을 썼다. 시대와 콘텍스트가 달라져 현대의 인간들이 하는 고민들과는 많이 달라졌더라도, '그들도 우리와 같았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고전이 잘 와닿지 않았던 것은 너무 먼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내가 그 책들을 인간이 아닌 '어떤 신비로운 이미지'가 쓴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든 머리로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느껴야만 비로소 깨달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어 에세이>는 내가 앞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 책이다. 공자에게도 있었던 '인간미', 숨겨진 의도, 본심 등을 텍스트를 통해 파헤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가지고 있는 불변의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라고 책은 서문에서 말한다. 달리 말해 문제가 없어지기 전엔 항상 똑같은 인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얻은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은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고전이란 게 지혜만 남아 둥둥 떠다니는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라는 것.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듯이 말씀들 너머에 인간이 있었다는 것.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표면적인 글귀의 해석에 그치면 안 된다. 모순이 심심치 않은 글의 간극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글귀의 맥락을 모두 포함한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고전의 입체적인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저자의 풍부한 인문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논어 에세이는 삶과 세계는 텍스트라는 말로 시작한다. 고전을 다루고 있는데 고전에서 읽어내는 텍스트가 결코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을 읽는 것이 인생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인미답의 인생에 필연적인 질문의 간극을 채워줄 수 있다.
저자는 논어를 매개로 인생의 다양한 주제를 논한다. 논어 에세이를 읽으며 일반적으로 독자가 기대하는 바는 결국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을 줄 고전의 통찰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화두를 던지지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고 느껴졌다. 분량의 제한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인생의 구체적인 통찰을 제시하기보다는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공자의 삶과 세계가 생생하게 다가오게 함으로써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니?”라는 물음을 간헐적으로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의 삶과 세계는 논어라는 텍스트로 구현되었다. 나의 삶과 세계는 어떤 텍스트로 그려질 것인가.
인터넷에서 연예인들의 과거 발언이 재조명되면, “저 때는 사회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으니 지금의 잣대에 비추어 해석하지 말자”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평소 내가 ‘고전을 읽을 때 가지는 마음가짐’은 이런 댓글에 나타나는 태도와 유사했다. 고전을 읽는 행위의 핵심은 등장하는 문구 하나 하나에 집착하고 현대의 기준에 맞춰 평가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왜 당시 사회에서 그런 명제가 의미가 있었고 아직까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는지에 관해 고민하는 것이 유의미하며, 그리고 어떻게든 그로부터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으며 이러한 기존의 생각의 일부를 바꾸게 되었다. ‘왜 당시 사회에서 그런 명제가 의미 있었는지’, 즉 콘텍스트에 관해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고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기에 굳이 어떻게든 배울 점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소주제들과 관련해서는 크게 세 가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는 ‘양심’에 관해서이다. 나는 평소 사람들의 양심에 기반한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이 이상적인 ‘가성비 좋은 질서 유지’에 대한 바람이 국가의 오랜 꿈이었으며, 오늘날 “한국형 파놉티콘”이 이러한 꿈을 보여준다는 흐름이 재미있었다. 글을 읽으며 양심을 ‘활용한’ 질서 유지와, 양심에 ‘기반한’ 질서 유지는 다르며 설령 그 결과가 같더라도 진정으로 이상적인 상황은 후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마포구 거울의 사례는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다음으로는 ‘유교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요즘 들어 현상에 매몰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논의가 오가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그 예로 낙태죄를 둘러싼 논의를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간의 대립으로 보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면 다른 쪽의 권리는 묵살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몇 주 전 한 강의에서, 왜 낙태를 해야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러한 상황을 방지하는 제도를 세웠다면 논의가 이러한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 권리는 양립 가능한 권리이며, 사회는 현상의 이면을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때 어떤 이유로 유교라는 말을 환기하고 사용하려 드는가에 주목하는” 태도의 중요성이, 이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유교라는 단어(혹은 개념)는 너무나도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가 ‘유교’에 부여한 가치에만 매몰되어 왜 그 개념이 이 맥락에서 등장했는지를 살피지 못하곤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평소 ‘유교 꼰대’라는 말을 자주 쓰곤 했다. 가부장적인 모습, 직급이나 나이를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유교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이러한 생각도 역시 “성급한 혐오”의 태도였음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개념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있었음에 반성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는 ‘효’에 대해 국가에 대한 충성과의 양립 가능성,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 국가관, 그리고 그 국가에서 가족의 역할을 토대로 다루고 있었다. 해당 챕터는 ‘파편화된 가족 내 효 실천을 넘어서는 국가의 조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로 마무리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됐다. 요양원에 가족을 보내는 행위는 파편화된 가족 내 효 실천의 사례인 것으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학대, 고독사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볼 때 가족 내 효 실천이 파편화되고 있는 측면이 분명 있는 것 같긴 한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적인 대책이 있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 하다 … 과거에 존재했던 양질의 자극을 찾아서 오늘도 역사의 바다로 뛰어든다. … 고전이 담고 있는 생각은 현대의 맥락과는 사뭇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기에 서먹하고, 그 서먹함이야말로 우리를 타성의 늪에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 책의 도입부에 쓰여진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깊었다. 이 수업을 듣기 전에 들었던 ‘동서양 명작 읽기’ 수업을 비롯하여, 여러분의 고전을 읽는 경험 속에 나는 ‘이것이 고전으로 남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통해 현대의 내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와 같은, ‘근본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 어쩌면 고전을 그저 지루한 책으로 느끼고 어떠한 정답과 메시지를 얻어내지 못하는 나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지금의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동시대 사람이 남긴 훌륭한 고찰이, 수천년 전의 현인들이 남긴 교훈보다 더 쓸모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읽은 나의 고전읽기는 ‘사이비 건강보조식품’을 향해 가는 여정이었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고, 고전을 통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을 때, ‘왜 침묵하는가’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글을 읽으며 단어도 알고, 문법도 알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데 왜 고전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지, 대체 고전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여 답답했던적은 있지만 ‘왜 이 텍스트는 말하지 않고 있는지’를 생각해본적은 없었기에 이 이야기는 매우 인상깊었다. 사실 고전은 신적 존재가 진리를 담아 쓴 글이 아니라 수천년 전에, ‘많이 똑똑했던 누군가’가 쓴 글이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있겠지만, 그것을 구태여 숨기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파고들어서 찾아야 할 숨겨진 내용, 비밀은 논어보다는 인셉션이나 매트릭스같은 현대의 영화에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근데 나는 그동안 고전을 마치 설정된 복선과 비밀이 가득한 영화를 해석하듯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이 무엇에 침묵하는가를 생각하며 읽을 때, 여기에 담겨있는 무언가를 찾는게 아니라 이것을 읽고 자극받아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제대로 고전을 읽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자극이고 새로운 사상의 지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한 기억을 살펴보면, 텍스트를 읽었다고 느끼기 보다는 그냥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을 해야 하는 일을 하나씩 해치운다는 마음으로 급하게 읽는 경우도 있었고 책의 내용에 집중하지 못 하고 뒤편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싫은 경우도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서 순간순간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이런 방법으로 책을 읽고, 대화를 하다보면,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책에서는 A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A’을 암시하고 있었는데,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A만 이해하고 평생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수업에서나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고서야 ‘아 내가 읽은 내용이 저런 내용 이었구나. 정말 제대로 못 읽었네,’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나 요새는 논어를 통해서 한문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데, 직접 내용을 파악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책에서 읽은 내용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텍스트 자체만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랑, 교수님이 이야기해주시는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면서 텍스트를 바라보는 것하고는 정말 차원이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이렇게 나에게 텍스트를 읽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글자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으로는 간단할 것 같은데,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로 준비가 되어야 내가 텍스트를 제대로 읽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왔던 것도 같다.
실제 책에서는 위대한 고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논어와 책의 주인공 공자를 그렇게 대단한 책과 사람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보통의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논어라는 책이 부풀려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만병통치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주인공인 공자도 그저 시대의 문제들을 마주하고 나름대로 해결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임을 이야기한다. 논어의 내용 하나 하나에 집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 전체를 보고, 책이 쓰인 과정 등 맥락을 파악하며, 다른 책들과의 사이에서의 관계 또한 파악하여 결과적으로 논어를 통해 그 시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텍스트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우리가 텍스트에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강박관념이자 신화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스키너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 말이다(p.48). 그래서 내가 책을 읽고 세상을,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제일 먼저 해보고자 마음먹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의심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명제나, 단어의 사용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왜 그런 지위를 얻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다 보면, 그 역사적인 상황을 함께 생각하며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걱정되는 것은 너무 자잘한 것들에 집중해서, 전체적인 책의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이런 태도를 유지하고 반복하다 보면 요령이 생길까. 이런 노력들을 시작으로 언젠가 나도 한 문헌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책에서 김영민 선생님께서 언급해주신 것처럼 처음 논어를 접했던 이유가 유명한 고전이기 때문에 한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 당시 읽었을 때는 솔직히 큰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마치 오늘날 시중에 나오는 자기계발서처럼 좋은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생각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한자 단어를 차용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도 많았다. 결국 논어를 처음 완독했을 때 돌아왔던 것은 그저 유명한 책을 완독했다는 뿌듯함이 가장 강했던 것 같다.
논어를 처음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공자가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읽기 전까지만해도 공자라는 존재는 진리를 전하는, 모든 것을 깨우친 존재일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예상과 달리 인간적인 모습들이 드러나 있었다. 어떤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논어에세이를 읽으면서도 공자에 대해 그린 부분들에 더 집중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점들이 논어에세이에도 녹아있어서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공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인상깊었던 부분들에 언급해보면 고기가 이르지 않아 떠나버린 부분, 원수에게는 합당한 갚음을 해주어야한다는 생각, 폭력을 배제하지 않은 모습, 공자는 생각보다 무능하고 예상보다 모순적인 인물이며 보통인간에 불과했다는 해석, 중도의 길을 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과잉을 찬양할 정도로 끝까지 욕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었다. 이중에서도 고기가 이르지 않아 떠났다는 부분에 대해 섬세하게 선택한 사려깊은 행위라고 해석한 부분이 제일 와닿았다. 예전에는 이 부분을 읽었을 때는 속 좁은 인물로 생각을 했었는데, 조국을 사랑하되 조국을 비판해야하는 딜레마에서 고민 끝에 신중하게 선택한 행위였다는 해석을 보고는 콘텍스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논어를 읽을 때는 짤막하게 글들만 이어지다보니 당대 사회상이나 여러가지 맥락들을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이처럼 맥락에 대해 고려하고보니 다르게 더 깊은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얻은 부분이었다.
다음으로 인상깊었던 것은 공자가 제자들을 대한 부분이었다. 공자는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는 대신 질문하기를 선택한다고 한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 메타 시선을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으며 추가적으로 상대가 분발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구절을 보고 이전에 읽었던 국가에서의 소크라테스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역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계속된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는 명확하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진리에 대해 단언하기보다는 역으로 질문자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하나씩 논리를 전개해나간다. 어떻게 보면 소크라테스는 혼자의 생각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통해 메타 시선을 쌓아가는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었나싶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공자의 모습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다만 공자가 제자들을 대하는 과정에서는 알고 있음에도 침묵으로 일삼았는데, 그는 침묵보다는 질문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는 측면에서 상충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하기를 제자들이 질문을 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밖에도 내가 읽었을 때와는 달리 각 주제에 대해 더 깊고 넓은 논의를 이어나간 점들이 인상깊었다. 소문이 퍼져감에 따라 내용이 변하는 것처럼, 맥락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이와 더불어 앞으로 내가 노력할 부분에 대해서 되짚어보게 되었다. 글의 해석에 있어서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다름만이 존재할 뿐이 아닐까싶다. 앞서 이 책을 읽으며 넓고 깊게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정답이라기보다는 나의 생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앞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누군가의 생각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더불어 맥락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텍스트를 읽을 때 텍스트 너머의 맥락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역시도 하나의 맥락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맥락에서 읽은 논어의 해석과 이 책의 해석이 다른 것처럼 각자 모두가 자기만의 맥락이 존재하며, 그 맥락에서 나오는 생각들 역시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 또한 정말 중요한 부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니페스토를 읽을 때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던,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라는 구절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으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바보라서 아니면 악인이라서? 학교나 회사, 온라인에서 이해가 되지 않던 사람의 행동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을 가기를 택해왔다. 지금도 무시하는 편이 편한 건 여전하지만, 조금의 시간이라도 들여 저 행동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보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아직은 많은 시도가 시도로 끝났고, 고전 텍스트와는 달리 해석을 물어볼 선생님도 없다. 하지만 굳이 이러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논어 에세이>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큰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계속 텍스트 읽기 훈련을 할 것이다.
훌륭한 독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통해 얻고자 하는 또다른 목표도 생겼다.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나이든 공자가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예에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예법을 지켜오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읽기를 연습함으로써 결국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읽을지를 일일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더라도 내 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토론 질문과는 별개로, <논어 에세이>를 읽고나서 더욱 <논어>가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자의 사상을 공부하고 싶기 때문은 아니다. 에세이의 말미에 나오듯 과거 수많은 유학자들이 <논어>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왔다. 이 책도 <논어>나 공자보다는 김영민 선생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원전을 읽으며 에세이에 소개되었던 구절을 만나 반가워하기도 하고, 하필이면 왜 길고긴 <논어>에서 그 구절을 선택했는지 선생님의 의중을 읽어보고 싶다.
1. 철학이란 무엇인가
특히 깔끔하게 번역되지 않은 해외 고전들이 특히 싫다. 문장은 난삽하고, 번역투가 지나치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영어로 읽겠다고 원문을 찾아나설 생각은 없다. 사람이 참 이중적인 것이, 그러면서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짤막한 고전 탐구서(?)를 혐오한다. 여타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중의 핵심은 딱 사기당하기 좋기 때문이다. 원문을 모르고, 전체적인 맥락을 모르면, 독자는 가이드에 얼마나 맹목적이게 되는가. 보이고 싶은 것만 보여도 대부분은 실제 본문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텐데 쓰는 사람은 적절히 자기 주장에 맞는 이야기만 내보내기 딱 좋지 않던가. 철학을 어깨너머로 '들으면서' 깨달은 바는 어떠한 철학도 아름다운 체계란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랬고, 칸트가 그랬고, 프로이트도 그러했다. 사람이기에 사고는 그 강조와 곁가지들을 달리하며 왕왕 스스로를 수정하고 또 부정한다. 이 지점에서 학업 자체에 대한 의문 내지 회의를 품었던 것 같다. 도대체가 사고의 끝이라고 불리는 철학조차 자기부정을 노정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공부와 나를 둘러싼 이 공동체 역시 어떤 명확한 답이 있을리 없지 않은가. 희망하건대 사람이기에 그런 것들을 찾아내지 못한다 믿고 싶지만, 적어도 수년간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지속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과 이견들, 그리고 자기부정 아니었나.
2. 고전이란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신입생 시절에는 고전을 어떤 정수로 파악했다면, 지금은 그런 환상에서 조금 벗어난 듯 하다. 그게 <논어>가 됐든 <정초>가 됐든 어차피 다 사람 사는 이야기이고, 다만 고민거리를, 특히 다양한 차원에서 공유될 수 있는 고민들을 담고 또 던져준다는 데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런 글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또 세대의 간격을 메우는 원동력으로 사용되지 않던가. 되려 이런 맥락에서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이 배양되지 않나 싶다. 시대를 거쳐 평소에 쓰지 않는 언어와 문법으로 구성된 글을 읽으면서 그 진의를 고민하고 사유하게 하고, 나아가 그 철학의 자기부정을 보여주며 종국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나와 세상의 질문들을 작게나마 그리게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지점에서 끝내 회의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독한 반복에도 내놓는 것들이 항상 틀렸다는 것을 이들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기에, 그나마 얕은 고민으로 가득찬 우리들이 지겨움을 이기고 계속 고민할 반면교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이 책이 그저 논어에 대한 진부한 해석을 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전달하는 내용은 다른 일반적인 고전 논평들과는 사뭇 달랐다. 우선 앞서 읽은 ‘공부란 무엇인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김영민 교수님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와 비판, 그리고 재치들이 텍스트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재미있는 에세이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책을 읽어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재치있는 표현들이 논어의 내용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지루하지 않게 논어와 공자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나에게 ‘논어’라는 고전서는 고등학생 때의 독서 소모임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그 모임은 교장선생님과 함께 논어에 있는 구절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그 구절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관련된 경험 등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매우 졸리고 지루한 자리였다. 아침에 진행되어 비몽사몽 했던 탓도 있지만, 논어에 쓰여 있는 공자의 가르침이 잘 와닿지 않았고, 그냥 도덕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졸지 않기 위해 논어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시점에서 그때의 독서 모임을 생각해보니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어의 텍스트를 읽으려면 콘텍스트를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시의 나는 단지 책에 쓰여 있는 검은색 글자들의 군집으로써 논어를 읽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금의 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자세로 고전을 읽고 있고, 그래서 나에게 고전은 손이 쉬이 가지 않는 어려운 책이다.
올바른 고전 읽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 책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공자라는 사람이 새롭게 느껴졌고, 논어도 전과는 다르게 여겨졌다. 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고전에 대한 클리셰가 있었던 것 같다. 고전은 무언가 엄청난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는 것이어서 논어의 그 짧은 구절 속에 숨어있는 완벽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왔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고 있듯, 공자는 ‘지성인’일 뿐이지 신은 아니기 때문에 공자가 하는 모든 말이 진리인 것은 아니고, 그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 맥락에서 책을 읽으니 이전에는 보지 못한 공자의 인간적인 면이 보였고, 오히려 이 때문에 공자의 가르침과 사상들이 오늘날까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졌다. 대단한 성인으로 여겨지는 그 역시 나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한 차원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자기자신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경받는 존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매주 새로운 고전을 접하지만 그 책들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책 속에 있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버리지 말고 그 텍스트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며 ‘능동적으로’ 나의 생각과 연결지어보는 것이다. 고전은 답을 주는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모의고사 문제를 풀 듯 눈에 불을 켜고 정해진 답을 찾아내려는 태도로 고전을 바라보면 안 된다. 오히려 고전은 나로 하여금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로써 새로운 사상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이제야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와닿는 기분이다.
고전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은 시간을 관통하는 질문, 문제, 생각이었다. 사실 머릿속 한구석에는 시간에 무관히 제기되는 질문이나 문제들이 있다면 고전이 그것에 대한 답 또한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논어에세이’를 읽으면서 얻은 새로운 생각은 고전이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답을 찾으려 고전을 읽기 보다는 시간에 무관한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하는 문제이자, 인간이라면 안고가야 하며 관리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위해 고전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라는 해석이 인상적 이였다. 이전 책 중 하나인 ‘공부란 무엇인가’에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과 답은 없다. 그 답을 독자 각자가 스스로 책을 읽으며 고민하는 것이 글쓴이의 의도라는 생각을 해봤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플라톤의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국가’를 읽으며 인물들 간의 대화 중에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가정들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지며 지나가는 듯 했다. 논의가 필요한 부분 같은데도 별 이야기 없이 거침없이 논리가 뻗어나간다는 느낌도 받았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논의 없이 지나간 가정들이 글쓴이가 독자에게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바라던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안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산은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요즘 내안에 있는 나의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말인가 같다. 나에게 있는 생각대로 행동하려는 나의 모습과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려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사이에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할지, 그를 위해 어느 정도로 어떻게 노력해야할지가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 것 같다. 글안에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데서 사람에게 있어 어느 정도의 모순은 필연적인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플라톤의 ‘국가, 정체’, ‘일리아스’, ‘법구경’,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서 이런 텍스트가 쓰인 시기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했다. 일리아스나 법구경, 바가바드 기타는 그 고전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가 존재했기에 특히 더 그랬다.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이 ‘context’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전을 읽으며 그 고전이 쓰였던 시기의 콘텍스트가 궁금해지는 만큼 지금의 내가 있는 사회의 콘텍스트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미래의 내가 보는 지금의 콘텍스트는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콘텍스트는 어떤 것일까?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이다.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렸는데, 내용은 다른 종류의 직관을 담는다. 대신 고전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하는 사항에 대한 것이자,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이 어떤 것인지 대해 말한다. 고전은 결국 문학이자 재현인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글, 그리고 심지어 사진에서도 사물을 재현한 모습은 원래의 모습과 다를 때가 있다. 그래서 지엽적인 내용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통찰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느껴온 바에 따르면 인간을 재현한 모습이야말로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를 다루기 위해 원래의 모습에 대해서부터 말해보고자 한다. 원래란 무엇인가? 그 사람의 어떤 순간의 모습을 담아야 원래의 모습이 되는가? 자는 모습이라도 찍어야 하는가? 일하는 모습, 여가를 즐기는 모습인가? 그 어떤 행위를 담더라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생물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어”, “음” 등과 더불어 밑도 끝도 없는 비유와 예시, 농담, 감정표현이 오고 간다. 연설 밖에서, 공자가 어떤 말을 했다는 일화는 결국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를 잡아낸 것이다. 수많은 더미데이터를 쳐내지 않으면 읽을 수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고 그 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재현이야말로 그 원래의 모습을 담는 시도이며, 그보다 정확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졸업사진에는 화장과 포토샵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재현의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마저도 원래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예쁜 사람으로 기억받고 싶은 사람”이라는 본질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남은 것이 그런 사진이라면, 그런 사진으로 오만가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고전에 있어서도, 전달자의 창작이 들어갔을지언정, 그것이 창작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방법이 없으며 내용은 자료로 사용한다. 재현마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고전을 순수하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김영민 선생님의 <논어 에세이>를 통해서 나는 고전을 바로 읽는 법,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책을 내리 쭉 읽으면서 공자와 공자가 살아가던 춘추시대의 학문, 정치적 상황에 전무했던 나의 부족한 지식으론 기존의 논어를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어갈 뿐이라는 생각을 크게 하였다. 고전은 현대의 맥락과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기에 서먹하고 그 서먹함이 나를 타성의 늪에서 일으킨다는 선생님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결심을 하였음에도 모순됨을 만나면서 집중의 한계를 자주 맞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와 같이 전혀 질문에 대해 답을 내놓지 않은 김영민 선생님의 “논어 에세이”를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내가 마주하고 있는 타성의 늪을 마주하길 바라며 책을 읽어나갔다. 읽히기 서먹했던 부분은 추후 깊은 사고를 위하여 기록하였고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부분을 코멘트에 남긴다.
근본이든 아니든 인간에게 문제는 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근본 문제이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1. 침묵도 일종의 발화이다. (단순한 침묵과 생략이 가지는 전복적인 성격)
평소 말하기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말하느냐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을 말하지 않냐는 것이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임에 나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발화가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성격에 대해서 인지했던 경험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세상에 널린 끔찍한 짓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죄악이라면/그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이 세상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시선을 두지 못하게 하며 자극적이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정치시도, 쉽고 빠른 여론 형성에 대한 비판, 나아가 숨겨진 침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주장이 느껴졌던 것 같다.
2. 도가 행해지지 않음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인식과 예를 추구하는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
공자를 동양 철학의 영웅으로 과도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나)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 남들이 보란 듯 예를 어기는 행동을 통해 예를 지키지 않은 곳을 떠난 공자의 모습에 대한 기록
살면서 맞이할 다양한 국면에서 침묵이 늘 배려의 소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대의 행동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 영향력을 판단하는 시간을 갖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의 가치에 자기가 모순된 위치에 처해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첫 장의 지혜로 언급된 침묵의 발화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예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4. 공자는 우물에 빠진 소년 앞에서 다시금 한번 멈춘다. 인으로 행하는 것이 인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도덕문제로 언급되는 유명한 물에 빠진 소년의 상황에 대해서도 공자는 선택을 보류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공자는 중요한 상황을 맞이하면 중용이란 이름으로 선택을 보류하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중용을 통해 동정과 사랑을 명확히 구분짓고 감정에 앞세워 인을 그르치는 행위에 대한 경계를 공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마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를 꺼내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반드시 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중용이 아직 나에겐 멀고 험한 길인 것 같다.
5. 공자의 유명세
공자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들은 춘추시대의 기득권에 대항한 운동권의 서적이었다. 공자 역시 정치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공자의 책은 시대의 요구를 만나 고시 수험서가 되고 기득권의 텍스트가 되었다. 동시에 과거 시험에서 낙방한 이들 역시 운동권 서적이라는 책의 본질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실패로부터 만족감을 얻는다. 전혀 다른 두 분류의 사람들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과 위로를 받은 것이다. 공자의 책이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정치적 태동을 만나 불멸의 필독서가 됨을 이해하고 나니 공자를 몽상가, 천재라고 흐릿하게 바라보았던 나의 시선이 조금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공자는 세상에서 충돌하는 모순된 사건을 기존에 존재하는 개념(‘인’,’예’,’충’)으로 세세하게 정리하여(발화의 형태로) 후세의 사람들이 숙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고대 서양 사람, 문화를 정리한 대서사시 일리아드, 플라톤의 국가 등의 고전 명서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논어 에세이를 통해 내가 마주한 보다 나은 통찰은 침묵의 발화이다. 유튜브, 온라인 뉴스를 통해 너무나 다른 문화권의 지식, 스피치, 관습이 충돌한다. 넘쳐흐르는 데이터 안에서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는 사실, 그 사실을 알기 위해 선행 되어야할 세상에 대한 공부 등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덮으니 다시 타성에 젖어가는 생각마저 든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간신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고전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고 예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던 나는, 오히려 작가가 말한 ‘간신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전으로부터의 깨달음이 아닌,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꽤 놀랐다. 아니, 그렇다면 고전을 읽으며 논의해온 지금까지의 우리 수업은 무엇이며, 내가 좋아하던, 그리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던 고전은 어떻게 된거지? 하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옛 고전을 통해서 삶을, 세계를 텍스트로 읽을 줄 아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세계를 텍스트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세계’는 다음과 같다. ‘혹자는 왜 공자가 자신이 떠나는 이유를 명명백백히 천명하지 않고 침묵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구성원들을 이어주는 유대가 약하면 약할수록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동원되는 언성은 높아지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폭력과 과장에 의존하게 된다. (p.61)’ 옛 고전인 논어를 통해 현대 세계를 보자면, 내가 최근 들어 우리 사회, (나아가서는 세계)를 보면서 가장 심각하다고 느낀 부분을 이 책에서 텍스트로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서로의 소통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회적 문제가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에서는 침묵에 대해 언급하고 절을 마무리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더 나은, 더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다면 상호간의 오해 없이 이에 대한 입장 조율 및 조정이 수월해지지 않을까? (논외이지만, 상대방과의 소통이야말로 AI보다 인간이 고차원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자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지도 많이 궁금하다. 여기에 대해서도 침묵할까?
평소에 나는 텍스트와 친하지 않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들리는 말이나 눈을 뜨고 있으면 보이는 영상과 달리 텍스트를 읽는 다는 건 내가 직접 단어와 문장을 파악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능동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써가면서 활동을 했는데 얻는 것이 없다면? 나에게 텍스트를 읽는 것은 바로 그런 피곤한 일이었다. 특히 고전을 읽거나 공부한다고 하면 내가 평소에는 떠올릴 수 없었던 명쾌한 통찰이나, 미쳐 상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깨달음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고전은 나의 가슴을 울리는 특별한 자극을 주지는 못하였다. 이런 식으로 나는 텍스트로부터 분명한 답을 얻어 가길 바랬고, 답을 주지 않는 텍스트와 멀어졌다. 그런데 이 책에선 우리가 고전으로부터 바래야 할 것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고전을 통해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고전이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 자체이지 그 생각에 대한 답까지 고전이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얻어가는 것이 없다고 느낀 것도 텍스트로부터 질문에 대한 답만을 찾았지 텍스트를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논어에 대해 공부해본 적도 없고 접한 것도 이 책을 통해서가 처음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공자도 결국 사람이란 것이다. 단지 나보다 앞선 세상을 살면서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살다간 이의 삶을 텍스트로 접하게 된 것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인간의 삶에서 어떠한 답을 내놓으란 것은 어려울 것이다. 대신 이 텍스트를 통해 내가 살면서 놓쳤던 질문들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하게 될 고민들을 미리 하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지 않을까. 아직은 텍스트를 읽어가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지만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김영민 선생님의 논어 에세이를 읽고 우선 고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 읽기를 통해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삶이라는 텍스트를 시대라는 콘텍스트 안에서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어쩌면 고전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옛사람의 지혜라든지 심오한 지식, 탈모 치료법 따위를 얻는 것보다는 컨텍스트속에서 텍스트를 읽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고전이란 당시의 컨텍스트 속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저작이니, 읽는 김에 그 속에 들어 있는 양질의 자극과 통찰도 알뜰하게 모으는 것이 현명하겠다. 고전을 읽는 게 마냥 달콤한 경험은 아니니 말이다.
한편으로 논어와 공자, 유교에 대한 배경 지식들을 접하며 유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유교라는 말이 문제가 되는 현상에 대한 복잡한 실제 배경은 묻어둔 채 간편하게 모든 문제를 환원시키는 데 쓰이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평소 무의미한 구습에 얽메여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유교 탈레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는데, 이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앞으로는 정확하게 좋아하고, 정확하게 싫어하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정확한 표현으로 모욕해야겠다.
요즈음 텍스트를 읽으며 같은 일도 사람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부쩍 느끼고 있다. 특히 언론사의 텍스트에서는 어떤 관점의 규칙성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이제 나는 언론사, 제목, 포털 사이트만으로 내용, 논조, 댓글 반응까지 예측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또는 우리나라의 언론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요즈음에 인터넷의 텍스트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를 읽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상대의 시각은 벌레의 시각이 되어버린다. 역지사지보다는 나랑 다른 생각을 하면 벌레라는, 역지사충의 정신이 돋보인다. 그러한 글들을 접하면 급격한 피로가 몰려오며 인간의 말을 내려놓고 화끈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욕망이 몰려온다. 왈왈! 으르렁! 컹컹! 아니, 벌레가 되어버렸으니 사각사각, 찌르르 찌르르 하고 대답해 버리고 싶다.
그러다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니, 대신 넘치는 재료를 사용해 자성을 해 보아야겠다. 물론 자성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운 건 엽기떡볶이나 불닭볶음면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매운맛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무해한 마조히즘'1이라고 한다. 자성은 고통이지만, 우리는 고통스러운 불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다. 그러니 삶에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매콤한 자성을 곁들여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Rozin, P., Schiller, D. The nature and acquisition of a preference for chili pepper by humans. Motiv Emot 4, 77–101 (1980). https://doi.org/10.1007/BF00995932
첫 수업때 자기소개를 하며 고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고전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과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에 담긴 가르침이 현대에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던 것을 보면, 고전이 갖는 가치란 결국 고전이 담고 있는 메세지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교수님이 책의 서두에서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들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콘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 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깊게 남는다. 고전을 진득하게 읽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쉬워서 수업을 신청했지만, 정작 수업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담마빠다를 읽을 때는 수많은 구절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애썼고, 일리아스를 읽으면서는 내용을 즐기기보단 전개를 간신히 따라가며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만 했었다. 그나마 코멘트를 남기기 위해 텍스트 전체를 다시 훑으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개인적으로 강성용 교수님의 강연을 재밌게 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도 철학과 종교에 대한 역사 즉 텍스트가 쓰인 배경 , 컨텍스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른 텍스트들도 강연을 듣고 난 뒤인 지금 다시 읽어본다면 분명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새로운 인사이트들을 더 발견할 수 있으리라.
개인적으로 이번 책은 정말 특이한 책이라고 느꼈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한 편의 낭만적인 수필, 혹은 단편소설집 같았는데 바로 옆에는 "논어" 에세이라 적혀있고, 진지한 내용인 것 같으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문장들을 읽다보면 내가 정말 논어를 다루는 책을 읽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이 책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것도 결국 기존에 익숙하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텍스트를 재해석했기 때문인 것 같다. 침묵에 담긴 의미를 찾는 것,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리며 텍스트와 연관 지어 숨겨져있던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아직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읽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앞으로 읽게 될 텍스트들도 이를 의식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고전 탐구 세미나 수업 초반에 교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셨고 그 때 나는 별 고민 없이, 고전이란 그 시대의 가치와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동시에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고전을 많이 읽어봤다고 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고 있는 경험에서는 최선의 답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사회 맥락과 사상들 안에서 해당 텍스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혹은 가졌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일단 중요하고, 그 가르침이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것이 이를 고전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을 읽고 난 뒤 위의 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그렇게 고전을 읽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 또한 고전을 읽을 때에 콘텍스트 즉 텍스트가 쓰여질 당시의 맥락 그 안에서 내용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나의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내가 동서양의 고전을 읽으면서 머릿속 한 켠에 항상 갖고 있던 생각은 ‘이 텍스트에서 현대의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였던 것 같다. 이는 마치 논술 시험에서 답을 찾듯, 교과서 학습활동을 하듯 의무감에서 생긴 사고였다. 심지어 내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책을 읽어갔던 것 또한 어쩌면 자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생각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여서 부끄러웠다. 고전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러나 제목의 뜻은 고전을 읽으며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또 한 번, 내가 고전에게 바라는 그리고 고전을 읽는 나에게 바라는 요상한 목표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짧은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니 교수님께서 당신의 경험을 곁들여 논어를 재치있게 풀어 쓰신 덕분에 고전을 고전이 아닌 것 같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전 속 ‘모순’들을 굳이 풀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 텍스트가 완전한 일관성을 가지기란 힘들고 또 어떤 텍스트들은 그것이 모순을 당당하게 써놓은 점 때문에 당대에 지어진 증거가 된다는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렇듯 고전은 흔히 생각하는 완벽한 텍스트가 아닌 것이다. 앞으로 고전을 읽으면서 가장 목표해야 할 것은 그 안의 진리를 얻어가는 것이 아닌 맥락 속에서 텍스트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 그 자체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