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11주_고・탐] 『옌푸 :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 사상』 &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장 양일모 교수 특강
근대 인간관과 중국 사상
『옌푸 :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 사상』
양일모 지음 | 태학사 | 2008년 09월 30일 출간
토론 주제
동아시아의 근대성은 서양에 의해서 가해진 충격과 번역,
또 그에 수반한 동양의 전통에 대한 재고와 변모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말 중국의 지식인인 옌푸(嚴復)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그러한 작업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양일모 선생님께서는 옌푸의 삶과 번역과 생각에 대한 해제를 여러분이 읽은 발췌본을 통해서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옌푸를 (또 다음 주에 루신을) 통해서 보기에,
동아시아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어떻게 서구의 충격에 대해서 대응하고,
어떻게 서구의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이해하고, 또 그로 인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변모시켰는가?
그리고 19세기말 20세기초 동아시아들이 겪은 충격과 변화는 오늘날
A.I.와 포스트휴먼을 앞둔 우리 근대인들에게 어떠한 시사점이 있을까?
청일전쟁 이전 중국은 양무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서양의 문명에서 필요한 것만을 추출하고 그 본질은 중국의 것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패배를 기점으로 중국에서는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중국 사회 전반의 변화는 옌푸의 개인적 변화와도 비슷해 보인다. 옌푸는 기존 질서 속에서 ‘진사의 꿈’을 꾸던 사람이었다. 유럽에서의 유학 후, 해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과거 시험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구시대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옌푸 역시 청일전쟁 등 지속되는 자국의 위기 속에서 기존 질서의 모순을 느끼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듯 하다. 이는 당대 청나라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문제의식이었겠지만, 그 해결책에 대한 관점에서 옌푸는 그 누구와도 달랐다. 부국강병한 서양의 기술과 제도만을 탐내던 여타 지식인과 달리, 서양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원리에 집중한 것이었다. 옌푸가 매료된 그 근본적 원리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었다.
옌푸가 서양의 원리를 중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택한 가장 대표적 방법은 번역이었다. 최근에 사용되는 ‘초월 번역’이라는 말이 있다. 원문을 넘어서 번역본이 독자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칠만큼 좋을 때 쓰이는 말이다. <천연론>을 비롯한 옌푸의 번역서들이 당대 중국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의도적으로 사대부들이 읽을 고난도의 언어를 쓰고 단순한 직역을 넘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중국 사회에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스펜서의 사상을 통해 중국 사회와 정부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고자 했던 옌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 때 가장 주목할 점은, 서양의 부흥을 가져다준 학문에 탐닉한 이유가 중국의 부흥을 가져오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AI와 포스트 휴먼을 공부하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난 학기와 이번 학기 수업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던 주제는 인간의 ‘위기’였다. 인간의 영역을 점점 더 침범해오는 AI에게 위협을 느끼고, 따라서 이에 대응해 더욱 AI와 인간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옌푸의 모습을 적용해볼 수 있었다. 우리가 AI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AI 그 자체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해 더 큰 이해를 지닐 수 있다. 단순히 AI와 인간을 구분 짓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별되는 지점을 탐구함으로써 ‘나’라는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 어떠한 강점을 지니고 있는지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사상을 공부하고 중국과의 차이점을 연구함으로써 중국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새로운 포인트를 집어낸 옌푸처럼.
책을 읽으며 궁금한 지점이 있었다. 누구보다 혁신적이고 새로운 목소리를 중국에 전달하고자 했던 옌푸는 결국 나중에는 보수의 핵심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사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던 사람도 시대가 지날수록 보수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옌푸는 어째서 보수주의자가 되었을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들었다. 옌푸가 중국에 들여왔던 ‘새로운 이야기’들처럼, 지금 우리 사회는 AI, 포스트휴먼 등을 매우 혁신적이고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옌푸의 생각은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AI나 포스트휴먼 등도 결국 먼 미래에는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 되지 않을까? 옌푸가 동아시아에 가지고 왔던 혁신적인 서구 근대 사상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고민거리가 아닌 당연한 전제조건이 되어버린 것처럼, 현재 뜨거운 감자와 같은 AI가 미래에는 분명 당연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 미래에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기술의 도래를 목전에 두고 지금 AI 앞에서 외치고 있는 비슷한 목소리를 낼 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현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옌푸가 급진적 관점에서 보수주의자로 변한 점이 저도 의문이었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기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도 수현님의 글 덕분에 그 이유가 궁금해졌고, 또 옌푸가 그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면 중국 사회와 아시아에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었을지 아쉽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명나라 태감 정화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쪽 해안 말린디까지 대양을 누비며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거둬들였다. 그가 죽은 후 이 거대한 탐험은 중단되고 말았다. 명나라 조정은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땅과 자원과 인구가 있다고 보았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일 빌미를 만들기보다는 자국의 풍요에 안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문명국가를 자부하던 중국의 위세는 400여년 후 유럽에 역전되고 말았다. 옌푸가 나고 자랐던 당시, 중국은 1, 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며 유럽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청일전쟁에서도 패하여 국운이 급속히 쇠락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정통파 관료들은 여전히 중국만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구의 기술만 따라잡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옌푸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서구의 사회 체제를 문명으로 인정했다는 데 있었다. 관료들이 서구로부터 받은 충격을 회피나 무시 전략으로 대응했다면, 옌푸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현실을 냉정하게 수용하고, 그들의 사상을 연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는 것이 힘’이라는 서양 근대 철학의 기조를 그가 내면화 한 데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옌푸가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이해했던 과정은 신기술에 대한 학습과 서양 고전의 번역으로 대별된다. 수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 습득과 서양 근대 철학서의 번역 과정에서 옌푸는 서구 세계의 약진을 이끈 근본 원리를 발견했고, 그 요체를 ‘자유’와 ‘평등’으로 집약했다. 이 과정에서 옌푸는 전통 윤리와 미덕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유학의 관계 윤리를 대표하는 ‘충서’, ‘혈구지도’에 서양의 자유와 유사한 맥락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자유’가 건전한 경쟁과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평등’이 전제되어야 함을 논증했다. 옌푸의 탁월함은 전통 윤리를 서양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되, 그것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발전적인 논증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옌푸의 태도는 사회 격변기에 지식인은 어떻게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변화의 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한 개인이나 사회는 제자리걸음에 머물거나 뒤처지고 만다. 답보와 지체의 저변에는 무지와 오만이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관료들은 과거의 영화에 사로잡혀 새로운 사상을 거부하고 있었다. 옌푸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한 것은 그만큼 공고했던 당대의 보수적인 사회 체제를 방증한다. 궈숭타오 공사가 유럽에서 돌아와 서양이 정치적으로 안정된 문명국가임을 황제에게 보고했으나 무시되고 결국 2년 만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던 것 또한 관료들의 오만함과 사고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기계가 협력하는 미래가 예측되는 오늘날의 상황 또한 청나라 말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제껏 유지되어 오던 기득권은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며, 삶의 가치와 사회적 이상 또한 달라지게 될 것이다. 단지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제도와 가치관의 변화가 동시에 나타날 것이다. 책에 제시된 19세기 말 중국의 거대한 변화, 그리고 옌푸의 사상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100여 년 전 옌푸가 던졌던 물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변화의 근본 원리는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슬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전공시간에 청일전쟁과 관련한 내용을 배우기 전까지는 중국이 참 답답하게 시대의 흐름을 잘 읽지 못해서 결국에는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중국도 중국 나름대로의 서구와의 전쟁에 맞서 변화를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옌푸와 같이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이전까지 문명의 중심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던 그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큰 변화를 결심했던 것이 아닐까요. 단지, 그 당시 관료들의 오만함과 사고의 경직성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제자리에 있거나 뒤쳐진다는 *슬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제도, 가치관의 변화가 함께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중국의 역사를 보고 같은 결과를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옌푸에게 있어 근대화는 무조건적 서양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의 학문을 기초로하여 중국의 근대를 창안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서양의 것은 정답이 아니라, 중국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통해 중국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도구였다. “서양의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면 할수록 중국의 구학문이 더 밝아질 수 있다”와 같은 말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처음 옌푸라는 인물을 접했을 때는 서양의 선진학문을 중국에 전파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서양을 공부함으로써, 서양의 학문과 과학이 중국의 전통과 함께 나아가는 것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중국은 양무운동을 시작으로 서구의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하였으나 이후 사회의 혼란과 함께 정치적 보수화의 시기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옌푸가 그러했듯, 혹은 옌푸보다 더 소극적으로, 중국 사회는 서양의 학문을 바탕으로한 근대화가 이루어진 듯 하다.
중국 근대화의 시점이 동양과 서양이 혼재되기 시작한 시점이라면 지금은 AI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며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우리도 옌푸가 그러했듯 새로운 기술 속에서 그것이 가진 문제점을 생각하고 기존의 전통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는 가운데, 새로운 기술을 근간으로 한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로의 이행에 집중해야 할지, 혹은 급진적 서구주의자들처럼 빠르게 기술을 도입하고 이것을 통한 사회의 진화 내지 발전에 집중해야 할지, 무엇이 정답일지 확신이 서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아야 할 것은 중국에서 급진적 서구주의자가 등장하던 그 시기에 서양에서는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듯, 새로운 기술과 발전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AI의 도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논의가 지난 학기에 보았던 <미래는 규제할 수 없다>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기술을 마주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가져올 문제에 얼만큼 대비해야 할 것이고, 기존의 전통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었다.
중국의 생각을 변화시킨 것은 ‘생각’과 ‘언어’였다. 글에서 나타나있듯이 서양의 사상을 중국으로 전파하는데 큰 일조를 한 인물이 옌푸이다. 그는 영국에서의 유학 경험을 살려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수월하게 서양의 서적들을 번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번역’이란 정확성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옌푸는 서양의 사상을 의역하는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서양의 다른 문화와 사상을 중국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름의 해석을 하여 표현한 것이다. 일례로 천연론이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번역한 과정에서 각 편이 끝나는 곳에 붙인 자신의 해설에서 본 저자 헉슬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스펜서의 관점을 원용해 비판하기도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66p)
이 사례 이외에도 ‘언어’에 관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중국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타 문명을 수용했다. 위진 시대, 명나라 말기의 번역은 다른 문명권의 문화에서 대한 부분적인 수용이었다. 인도나 유렵을 대상화하고 중국 혹은 중국인을 주체화하는 과정을 수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말 이후의 서양 서적에 대한 번역은 단지 서양 학문 혹은 서양 종교의 일부분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유럽 혹은 서방세계로 불리는 대상의 실체에 대한 모색과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와 중국인의 의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가는 과정이었다. (58~59p)’
'미국의 중국학자 레벤슨에 따르면 근대 이후에 진행된 중국과 서양의 만남은 중국어 어휘의 증가뿐만 아니라 중국의 언어를 변화시켰으며 중국의 유교적 관료 사회 그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60p)'
위 사례들을 살펴보면 중국이 새로운 문화수용에 있어서 주로 사용하고 집중했던 방식은 번역이었으며, 이로 인해 파생된 지식을 단순히 정보전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본인 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모색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새로운 정보, 지식의 전달은 번역을 통한 언어의 전달로 이루어졌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의 자신들의 ‘생각’을 덧입힌 것이다.
생각에 관한 구체적인 예시를 더 살펴보면 옌푸의 자유에 관한 생각을 말할 수 있다.
‘서양사회가 자유라는 가치를 토대로 서양의 문화를 구축했지만 중국의 성인은 자유의 가치를 선양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양에서 자유를 발견한 옌푸는 중국 사회에 자유를 소개하고 한편으로 자유의 시선으로 중국 사회를 바라보았다.(127p)’
이와 같은 중국의 방식은 오늘날 포스트휴먼, 인공지능 시대를 앞둔 현대인들에게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중국의 입장에서 서양의 것들이 새로운 사상과 가치였고,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던 것처럼 현재 우리에게 있어 포스트휴먼, 인공지능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단순히 정리하고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기술에 대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사회에 공존할 수 있는 우리만의 생각과 해석이 있어야함을 시사해준다.
옌푸를 통해서 본 당시 서구의 충격에 대응의 맥락 중 큰 하나의 방법은 일단 관찰인 것 같다. 물론,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은 적대시하고, 싸움을 하며, 우리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조취를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대응책을 계속하다 보면, 상대해야 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 맞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알아야하고, 그의 바탕에는 상대에 대한 관찰, 연구, 직접 경험 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옌푸도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서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도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조선술, 해양술 등-을 배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과거를 통해서 관리를 등용하는 것과 같은 전통 사상이 여전히 깊숙이 박혀있는 현실에서 기술만을 배워와 적용한다는 것, 즉 중체서용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방법을 바꾼다. 바로 그 기술을 가진 사회의 근본이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이다.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다른 점만을 같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옌푸의 당시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점은 옌푸가 서구의 자유, 사회진화론 등과 같은 개념들을 중국에 주입하려고 하지 않았던 점이라고 생각한다. 옌푸는 서구 서적들을 중국으로 가지고 올 때, 번역이 아닌 의역을 했고, 중국식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전통적 사고를 서구식으로 대체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각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시대가 흐르고 상황이 변화하면서 대응하는 방법의 변화는 불가피함이 확실하다. 옌푸는 이 대응 방법의 변화를 완전 서양식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 개념들을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AI, 포스트휴먼과의 조우로 겪게 된 충격에 대응하는 방법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옌푸가 그랬던 것처럼 초기에는 AI, 포스트휴먼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AI, 포스트휴먼에 대해서 배우고 알게 되고, 오히려 그들을 통해서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과거와 비슷하게 겪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옌푸가 서구를 접하면서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도 AI, 포스트휴먼이라는 외부와 접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전통(우리 자신, 인간)을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수업에서 하고 있는 생각들, 토론들이 이런 과정의 일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전, 인간만 존재했을 때는 차마 보지 못했던 것은 없었는가, 다르게 볼 수 있었던 부분은 없었는가 등 외부의 존재가 생기면서 새로운 시각을 시도하는 것이기 말이다.
다만 우리는 옌푸가 그러했던 것처럼, 과도기를 조감하고, 시대의 조류에 적응했지만, 이미 시대는 바뀌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노력 또한 외부의 충격에 대한 대응과 함께 새롭게 모색해야 할 하나의 대상일 것이다.
마지막 문단이 의미심장하게 읽혔습니다. 정보와 기술의 격차는 아무래도 비전문가가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라 생각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지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런 한편, 이미 어느정도 납득이 진행되신 것 같아,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이라 상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관점과 시각에 대해 고민하게 될 수 있는 코멘트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옌푸: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 사상>을 읽으며 근대로 나아가는 전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중국사회의 혼란이 느껴졌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사회상은 옌푸의 삶과 그의 학문적 활동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옌푸가 살았던 시대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서양의 제국주의가 강해지면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았던 때이다. 한편, 같은 동아시아 국가였던 일본은 이러한 근대로의 변화에 재빠르게 편승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까지 제패하며 위세를 떨쳤다. 근대화는 그것을 이룬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간극을 넓히며 동아시아 국가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본래 중국에는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외 국가들은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이 뿌리내려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서양의 강력한 군사력에 충격을 받은 중국은 ‘중체서용’의 기치를 내걸고 양무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기본 체제는 유지하되 서양의 기술적 지식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옌푸는 이러한 방식의 변화는 본질적인 방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결과가 이를 입증했다. 대신에 그는 서양 사회를 구성하고 운용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양한 서양 철학에서 그 원리를 찾고자 했다. 옌푸는 ‘천연’이라는 용어를 통해 서양의 ‘사회진화론’을 중국에 소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약자에 속하는 중국이 제국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였고, 사회의 여러 측면에서 다각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진화론을 수용한 옌푸는 중국에서 신성시되는 존재인 ‘성인’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당시 중국에서 성인은 완벽히 도덕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간주되었으나, 옌푸는 성인은 그저 총명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또한 사회진화론의 관점에 근거하여 사회는 진보를 거듭해야 하는데, 성인에 대한 숭배와 그들의 가르침은 이를 저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당대 중국인들의 가치관을 흔들었다. 더 나아가 서양의 ‘자유’ 개념에 주목한 옌푸는 동서양의 자유에 대한 인식 차이가 국가 발전수준의 차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들에게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자유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기주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리하자면, 옌푸는 사회진화론을 기반으로 유교에서의 ‘성인’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서양의 ‘자유’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자유경쟁을 통해 능력을 갖춘 사람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 중국인과 중국사회의 발전을 강조한다. 옌푸는 유럽 유학 경험을 통해 서구 사회와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더 나아가 서양과 중국의 모습을 비교해보며 중국 사회에 보다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즉, 서구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중국에 적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방식으로 이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근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글의 초반에 소개되어 있듯이 옌푸는 해군의 꿈과 진사의 꿈 사이에서 갈등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꿈을 이루었다. 그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당대의 시대적 변화와 흐름을 잘 읽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중국 내, 외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학습하여 중국 사회에 적용가능한 방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중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참고하여 우리도 포스트 휴머니즘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즉, 사회적 변화를 마냥 거부하기보다는 적절한 방식으로 변화를 수용하고 기존 사회와의 공존 혹은 융합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 문단에서 옌푸의 입장으로 해석하신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옌푸가 성인에도 회의감을 가졌지만 자유라는 개념에도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이 그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것을 수용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게 발전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옌푸, 나아가 미리 읽은 루쉰의 소설 속 인물들을 보건대 개항과 함께 동아시아에 들어온 서양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개화된 소수와 앙시앙 레짐에 갇힌 다중으로 인민을 나눴으며 그들과 별개로 기득권의 세력은 계속 공고해졌다. 특히 기독교의 사상은 평등사상, 차별의 금지 등을 내세우며 인간과 인간을 나누는 그간의 기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으며, 나아가 동심원적인 조공-책봉 관계라는 세계관에도 나름의 여진을 촉발시켰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에게는 전통주의자와 근대주의,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외상이 후대의 평가에까지 계속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글에서도 지적하듯 이는 마치 한국전쟁 상황에서 이념의 문제가 실존과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온갖 변형과 회색지대를 만들었던 것처럼, 개화기의 지식인들의 행태, 깨달음, 심지어 좌절까지도 차마 인정하기 어려운 우월한 지적 체계에 마주치며 고유의 사상을 쉽사리 전적으로 포기하지 못한 이들의 회색지대였다.
이러한 회색지대의 양상이 19세기말 20세기초의 동아시아가 겪은 사상적인 충격과 변화였을 것이다. 엔푸가 그의 초기의 글들에서 천부적인 자유와 권리를 소개했지만, 전근대 중국의 맥락에서 그것은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부분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일반 다중에게는 전통과 관습을 끊어내는 매국노이자 이상한 인간이라는 오명을, 자기인식에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불편한 타협을 보이는 지식인으로, 그러면서도 국가와 공동체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한 희망 등으로 뒤섞여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회색지대의 양상은 특히 그것이 상당부분 지식인과 대중의 대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AI의 도입에서 어떤 시사점을 남기는 것일까. 짧게 쓰자면 두 가지의 함의를 제시할 수 있을 듯 하다. 하나는 지식인과 대중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전자의 발전적, 내지 타협적 이해가 보다 기민하게 뻣어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대중의 보다 성숙한 여론과 민감성 아닐까.
지식인과 대중의 대립이라는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지식인과 대중이 대립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또 과거와 현대의 대립이 같은 이유로 일어날지도 의문입니다. 둘이 같은 이유로 일어날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대립의 이유를 알아야 현대 사회에서 생겨날 대립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질지 짐작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중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관성, 대중의 직업과 생계유지 기반, 지식인의 이상에 대한 욕구 등이 대립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은 대립의 이유에 어떤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추가로, 일반 대중이 성숙한 여론을 갖지 못하는 경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지식인이 지식인과 대중의 대립이 해소되지 못하는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중국이 처음 서구의 존재를 알게 됐을 때는 그들이 문명사회를 구축하지 못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며 둘 사이의 무력충돌을 통해 서구의 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힘의 차이에서 중국인들은 자신의 민족과 국가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중국의 관료들은 양무운동 등을 통해 자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중체서용이란 단어에서 드러나듯이, 양무파 관료들은 서양을 중국문명을 위한 보조도구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옌푸가 그중 한 사람이다. 옌푸는 서양의 강함이 단순히 기술과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에 기반을 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옌푸는 서구의 사상과 기존 동아시아의 사상을 비교하고 그중 유사한 것을 찾아보려 했으며 그들과 중국의 차이를 이해하려 했다. 또, 이를 번역을 통해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옌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통해 신사상을 수입했고 그 번역의 대상은 주로 중국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것이었다. 옌푸 이후로 쏟아지는 번역서에 대해 번역의 질이 낮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와 무관하게 이런 다수의 번역과 연구를 통해서 중국에 서구의 사상과 가치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했다.
과거에 새로운 사상과 가치가 충격의 과정을 통해 수입되었던 상황과 현대에 A.I.와 포스트휴먼의 논의가 시작되는 이 시대를 비교해보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았다.
먼저 충격의 정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AI와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와도 새로운 사상과 가치로 인한 충격이 과거와 같이 크지는 않을 것 같다. 현대에는 미디어가 발달하여, 더 많은 수의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생각과 가치가 새롭게 나타나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특히 민주사회는 큰 다양성을 품고 있기에 외부의 새로운 것들이 주는 충격이 과거보다 더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생각할 거리는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와 사상을 갖게 하는가이다. 과거에는 무력이 세계질서를 지배하는 힘이었고 물리적 힘의 차이로 서구가 더 나음을 확인했다. 이런 무력의 차이가 국가와 민족의 지속 여부를 위협했고 이는 서양의 기반이 된 사상과 가치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이것이 과거에 사상과 가치를 변화하게 만드는 힘이었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이었다. 현대에 와서는 그 힘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가 궁금하다. 현대사회에서는 무엇이 사람들의 사상과 가치를 바뀌게 하는지, 또 그 사상과 가치를 바꾸는 힘이 과거만큼 강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A.I.와 포스트휴먼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사상이 충격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려면, 서구의 무력 우위에 대응되는 A.I.기술이나 그 기술을 사용하는 집단에 어떤 종류의 우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 충격이 사람들의 가치와 사상을 바꾸려면, 민족과 국가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과거의 두려움에 대응되는 압력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환경이 달라진 만큼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사상과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고 그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과정을 하나씩 대응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 무관하게 사람들이 사상과 가치가 왜 달라지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도 아니다. 과도기를 거쳐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바뀔 텐데 그 과정을 짐작하는 것에 이런 고민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국 관료들은 서구 문명의 맞닥뜨리게 되어 이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된 정통파 관료들이었고,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반쪽짜리 개혁은 당연히도 실패하였다. 옌푸가 살아가던 격동의 시대는 바로 이런 개혁 실패의 순간이었다.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옌푸의 번역서 발췌본과 그에 대한 해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구조는 당시 서구의 발달한 문명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이 당면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옌푸의 방법이다.
1. 중국인의 시각으로 서양 사회를 바라본다. 이를 통해 서양 사회의 원리를 나름대로 밝힌다.
2. 1에서 밝힌 서양 사회의 원리에 입각하여 당시 중국 사회를 반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여 얻은 그의 솔루션을 중국 사회에 전하기 위해 그는 서양 사상서의 번역을 택했다. 여기에서의 번역이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직역이 아닌 의역이 되면서 옌푸 자신의 의견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목은 이전의 중국 지식인들이 <논어>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는 점과도 겹쳐 보였다. 다만 <논어>에 단 주석은 기존에 그 텍스트가 가진 지위에 의존했지만, 옌푸의 번역은 중국 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텍스트의 지위를 오히려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으로, 텍스트의 번역을 위해서는 단어를 옮길 필요가 있었는데, 번역하고자 하는 영단어와 정확히 의미가 일치하는 중국어 단어가 없기 때문에 고심하여 단어를 선택하거나 신조어를 사용하여야 했다. ‘자유’와 같이, 단어가 없다는 것은 중국 문화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파격적인 개념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AI와 포스트휴먼 문제는 19~20세기 동아시아인들이 겪었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AI와 포스트휴먼 기술을 도입해서 부강해진 국가를 어떻게 하면 따라갈 수 있을까?” 보다는 "인간답게 살기"의 복잡한 문제를 인류에게 던질 것이다. 그리고 19~20세기 동아시아인들의 문제 해결 방법론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AI와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도 인간답게 살아가는 저 공동체처럼 살 수 있을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벤치마킹할 수 있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공동체가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참고할 모범 사례가 없는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문제 해결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범님의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옌푸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핵심적으로 정리해주신 것 같아 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AI와 포스트휴먼 문제에 대한 상범님의 시각이 신선했습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옌푸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어떻게든 옌푸의 활동에서 배울 점을 찾으려고만 생각했는데, 상범님의 글을 읽으니 질문 자체에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범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
AI, 포스트휴먼 문제는 19-20세기 동아시아인들이 겪었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범님의 생각에 놀랐습니다. 19-20세기의 문제는 상대와 대결해서 살아남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이고 벤치마킹할 사례가 있는 문제지만, AI, 포스트휴먼에 마주한 우리의 문제는 그들과 어느 정도 공존해야 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문제이고 벤치마킹할 사례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범님의 의견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 새로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옌푸의 대응책은 지금 우리가 마주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 하는 것일까요? 상범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범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두줄이 저는 미처 해보지 못한 생각이라 인상깊었습니다. 두 학기에 걸쳐서 던져온 질문인 인간답다는게 무엇인가?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범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AI와 포스트휴먼 문제가 19~20세기 동아시아인들이 겪었던 문제와 비슷한 종류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범님의 글을 읽어보니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문제라는 생각 역시 설득력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범사례가 없기에 시행착오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니 걱정이 들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고 발전하는 점도 많으리라 바라봅니다.
내 장래희망 중에는 번역가가 있다. 단순히 번역이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서 가졌던 꿈인데, 이 글을 읽으며 그것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번역가에게 저런 사명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생각해보았기 때문이다. 옌푸가 한 번역은 단지 통역이 아니라 창조였다. 그의 번역은 당시 중국 사회에 없던 것을 말 그대로 새로 만들어냈다. 현대의 번역은 얼마나 정확하게 옮겼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글에서도 말하듯이, 옌푸의 번역이 원전을 얼마나 똑바로 전달했는가는 사실상 여기서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서양의 이론들을 뒤지고, 그것을 중국(자신의 가치관)에 맞게 바꾸어 번역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더 필요했던 것은 영어의 정확한 직역이 아니라 옌푸가 중국 상황을 고려하여 한 번안이었을 것이다.
20세기 같은 전환점에서 번역이 중요했던 이유는 세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가 간에 생각이 공유되지 않았고, 또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지금만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옌푸 같은 몇 안 되는 번역가가 들여오는 책들이, 민중이 접할 수 있는 서양의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르다. 2, 3개국어는 기본적으로 할 줄 아는데다 번역기도 상당히 잘 되어 있다. 그러니 번역의 중요성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행위 자체보다는 '소통'의 상징이라는 점에 있다. 옌푸의 번역들이 의미를 지녔던 이유는 그가 드물게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번역이라는 소통 수단 없이는 접할 수 없었을 사상들을 중국 안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앞둔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간의 소통도 당연하지만, 옌푸가 서양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의 글들을 번역했듯이, AI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AI와의 소통이 필요하다. 자의식도 있고 인간 언어를 할 줄 아는 높은 수준의 AI와 대화를 나눠보자는 의미라기보다는, 신문물과 사상을 피하려 했던 20세기 중국 보수주의자들이 그랬듯이 AI가 위험해 보인다고 억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겠다는 의미이다. AI가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인간 사회에 유리하게 사용하기 위한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도 중국도 서양문물에 대한 반발이 거셌지만 결국은 지금처럼 자리를 잡은 것처럼, AI는 결국엔 우리 사회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 위험성들까지 함께 끌어안고 말이다.
나는 사실 AI 규제 완화에 회의적인 입장에 가깝다. 완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위험성이 더 크다고 보았고, 인간 사회에서도 그 문제들이 해결이 안 된 마당에 AI에는 더더욱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을 읽으면서는 지난 토론들에서 학우분들이 규제 완화에 관하여 하셨던 말씀이 이해가 갔다. 아직 규제 완화에 완전히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옌푸가 지식인으로서 변화를 마주했던 태도는 존경할 만하며 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듣는 말처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한 개인이 사상의 흐름을 바꾸기는커녕 그런 사명을 가지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변화를 마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적합한 이론을 찾아 나서기까지 한 옌푸의 태도는 놀라울 수밖에 없다. 소통, 그리고 직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다.
*우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당시 중국에 필요했던 것은 영어의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중국 실정에 맞는 번안이었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옌푸가 서양의 학문을 번역한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에 필요한 것들을 들여와 발전시키기 위함이었기에 이는 매우 합리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번역을 '소통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부분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번역에 초점을 두고 텍스트를 읽었던지라 지우님의 토론글이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옌푸가 한 번역은 단지 통역이 아니라 창조였다.’, 그리고 앞서 의재님도 언급해주신 것 처럼 ‘번역의 중요성이 소통의 상징’이라고 하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복잡한 이론들, 손톱 크기의 부품들, 그리고 기계어를 접목하여 핸드폰과 같은 여러 전자기기등의 형태로 일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개발자들을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구요. 여전히 AI와 관련해 여러 논의들이 오가고는 있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문제이니만큼 우리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보다 깊은 이해와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 적극 공감합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ai 시대에서도 번역과 수용의 자세가 중요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인공지능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여러 선진국의 신진 기업의 기술,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술번역'이 점차 기술의 대중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우님의 글을 읽으며 번역을 통한 지식의 유입, 가치의 변환이 가지는 파급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한민국의 경제규모, 한강의 기적 등 우리나라의 성장을 배우고 논할 때에 항상 마무리로 등장하는 질문은 ‘그래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였다. 객관적인 지표로 볼 때에 한국은 선진국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같은 질문의 기저에는 분명 우리의 인식, 사고는 선진국 국민의 것이라고 할 만한지에 대한 회의가 깔려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선진국은 국민들의 시민의식, 윤리성과 같이 ‘생각’ 즉 내면의 요소로 평가받는다. 모두가 어느 정도 갖춘 자원의 확보와 기술의 발전을 넘어 진정 중요한 것은 한 나라를 이끄는 ‘생각’이다.
옌푸는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양의 물질적·기술적 풍요가 아니라 그들의 중심에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어떤 원리가 성공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서양과 중국의 피상적인 비교와 꽁무니 쫓아가기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의 탐구를 통해 중국의 발전을 꾀한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질서를 형성해 가는 기본 원칙’에서 문제를 찾고 서양의 학문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한 것은 눈앞의 승리를 목표하지 않고 중국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여기서 옌푸의 애국심과 시대를 앞서는 리더로서의 면모가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옌푸의 이러한 학습-전파의 과정은 단순히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한 번역은 문자 그대로를 옮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업적이 되겠지만, 그는 서양의 학문에 대한 나름의 비판과 자신의 생각을 얹어 번역하였고 따라서 그가 한 행위는 어찌 보면 ‘번안’이라고도 말 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의 초기 근대 소설은 대부분 일본의 것으로부터 우리 풍속과 의식에 맞춰 다시 쓴 번안소설이었고 그 이전의 고전 소설들 또한 중국의 소설을 번안한 것들이 많았다. 옌푸의 번역서들 또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에 필요한 것을 중국의 실정에 맞추어 전달하고자 했고, 이는 궁극적인 목표인 조국의 개혁과 발전을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었다. 그는 서양화가 곧 근대화라고 보지 않고 서양의 것에서 핵심을 찾아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은 바꾸고, 필요한 것은 취하는 모범적인 벤치마킹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그랬던 옌푸가 초기의 급진적 관점에서 보수적인 관점으로 변한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으로 다가왔다. 세계 전쟁을 보며 서양의 원리와 학문에 실망했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회의를 느꼈을 수 있다. 또 서양의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중국 본래의 전통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옌푸가 서양에서는 무엇이 결함이었는지, 어떻게 하면 이를 보수하여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더욱 적극적으로 골몰했다면 중국에, 또 우리를 포함한 아시아와 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한다.
서양과의 접촉으로 중국과 동아시아가 겪은 충격과 변화는 지금까지 그들이 살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별천지와 같이 보고 어떤 것들은 무시하기도 했다. 이는 현재 AI와 포스트 휴먼을 앞둔 우리가 현재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가질 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지금껏 믿었던 것을 회의해야 할 정도의 신세계, 새로운 차원의 발견을 적절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고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옌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인간이 누군지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가 가진 문제와 필요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내면의 고민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일전쟁의 패배를 보며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고자 한 옌푸의 꿈이 망가져 버렸다(p.27)’고 한다. 주제와 연관이 적기는 하지만 이 대목을 보며 든 생각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중국은 항상 ‘부강한 나라’를 꿈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강하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항상 ‘우리나라는 반드시 부강해야만 한다’라는, 다소 편협해 보이는 사고방식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서도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도 우리나라 전통 의상인 한복이나 동남아시아 몇몇 국가의 전통의상을 중국의 전통 의상이라고 마구 우기는 등 자꾸만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정말 진정한 ‘부강한 나라’인지는 의문인 것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다면 오히려 진정한 ‘부강함’과는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러한 꿈이 좌절된 옌푸는 번역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옌푸는 서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많은 동양의 나라가 그러했지만 중국도 마찬가지로, 근대로 나아가며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며 큰 혼동이 오게 되는데, 신해혁명을 겪으며 옌푸는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과 문물을 기반으로 중국의 근대를 꿈꾼다. 중국의 근대화가 ‘서양화’가 아니라 새롭게 중국의 근대를 창안하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옌푸는 중국에 돌아와서 서양의 원리를 기반으로 중국 사회를 비판하며 중국의 가치를 찾아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어진 글에서는 옌푸의 글들을 한글로 번역한 부분이 나타나있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옌푸는 서양과 중국의 차이가 자유와 부자유의 차이라고 말하며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지금껏 유교 사상과 겸양, 부자유와 같은 가치만을 보던 옌푸는 서양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싶다.
우리가 포스트휴먼, AI와 같은 시대적 변화를 앞둔 상황에서,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미래에 어떤 입장이 될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듯하다. 중국 등 동양권 국가처럼, 그저 서양의 신문물을 숨이 벅차게 받아들이게 될지, 아니면 서양권 국가처럼 주도적으로 발전에 앞장서게 될지, 그것도 아니면 미래에는 과거와는 달리 국가 간 경계가 모호해지며 과학적 발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게 될지. 사실 과거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19,20세기에 동아시아인들과 중국인들이 겪은 충격은 엄청났을 테지만, 현재는 그렇지가 않다. 당장 인터넷을 통해 외국의 날씨부터 전날의 뉴스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각 분야의 발전이 마치 현재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백신 연구처럼 각국이 경쟁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협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과거처럼 그저 물밀듯이 쏟아져오는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형태와는 다르게 미래에는 변화를 빠른 속도로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자본이라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 혹은 기술 발전의 혜택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시 한번 양극화의 심각성을 보여주게 될지 같은 시나리오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옌푸의 삶을 읽으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비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부강함'에 대한 수민님의 통찰이 인상깊었습니다. 옌푸 역시 서양의 새로운 원리를 중국에 소개하여 중국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 이후 중국의 '부강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결국은 보수주의자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부강함'은 무엇일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또한,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통신 기술의 발달을 통해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짚어주셔서 좋았습니다. 이와 같은 인터넷, 온라인 세계의 존재는 19세기-20세기 동아시아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를 잘 인식하고 이용하는 것이 과거의 가르침에서 더 나아가 AI 시대에 더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이 발췌본이 가장 효과를 발휘한 독자의 부류를 뽑자면 거기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역사, 문화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의 역사를 이해할 때 유럽과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사상과 문화를 가장 빨리 떠올리며 내가 동양인이기에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력을 문화, 교육을 통해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하면 중화사상과 민족주의, 문화대혁명 정도가 생각이 나는 데 이러한 나에게 이 발췌본은 근대 시기의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중국이 연달아 새로운 문명, 전쟁을 겪으며 그 변화를 어떻게 겪어 왔는 지 알게 하였다.
아편전쟁, 청일전쟁, 농민혁명을 겪으며 중국은 양무운동, 이후엔 중체서용의 구호가 앞장서던 시기가 다가오기도 했으며 다시 공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교회가 부흥하기도 했다.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결국 근대를 거쳐 현대의 중국 문화는 제시된 여러 모델중 가장 시대 흐름에 살아남기 적합한 것을 제시한 자의 것이었다. 사회진화론의 모델이 잘 적용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19세기 20세기에 중국이 처한 시대 흐름이 현대사회에 테슬라가 제시하는 모델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기계공학 학부생으로서 자동차 산업의 미래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현재 전세계의 모빌리티 산업이 집중하고 있는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모빌리티 산업들의 눈이 모이는 곳은 결국 인공지능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확장에 있다. AI와 자율주행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영역을 제시한다. 소비자, 기업, 국가는 이 변화에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반응한다.
자동차 산업의 거대 기업들로 하여금 인공 지능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시장 개척, 가치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이에 기업들은 그 결과로 인간 삶의 변화라는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촉발시켰다. 소비자들은 이에 반응하여 이제 '자동차 안에서 어떻게 놀까? 어떻게 쉴까?' 하는, 이 전엔 할 수조차 없었던 새로운 소비 양식,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새로이 도입된 기술에 대한 반응으로 국가와 사회는 자율주행 기술, 인공지능의 판단,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과 법과 규제에 관한 실용적인 질문을 동시에 제기한다. 때문에 산업은 규제받기도 하고 적절한 시대 흐름의 지원을 뒷받침 받지 못하면 '타다'와 같이 소멸의 길을 걷기도 한다. 테슬라는 현재 전기차, 자율주행 시장에서 가장 앞선 기업이며 또 신생기업이다. 테슬라 다음으로 선도하는 기업은 어디일까? 중국의 '니오'라는 기업이며 2014년의 텐센트 등의 공룡 기업의 자금과 기술력을 후원받아 탄생한 회사이다.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시장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며 기존의 시장, 사회, 소비자들은 이에 대해 수동적 반응을 수행한다. 이 모습이 19세기 중국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옌푸, 루신, 위안스카이, 뤼위안흥 등은 기존에 존재한 고정된 이념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지적 경험을 하거나 (서양 국가로의 유학), 나이가 젊어 혈기가 왕성하고 자신이 처한 사회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발췌본 초반에 옌푸는 아들에 남기는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데 이 말은 현대인인 우리에게 적용하더라도 낡고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날 중국이 이렇게 된 까닭은 평소의 학문과 사대부들의 의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지금의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면,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사회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21세기 한국에 제갈량, 장영실이 나타나더라도 풍속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면, 결국 이러한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가장 적합한 반응을 하는 새로운 세대의 몫일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거대 기업인 도요타는 십수년 전부터 하이브리드차를 바탕으로 자동차 컨셉의 변화를 노력해왔다. 하지만 결국 현재 자동차의 패러다임을 바꾸어가는 기업은 테슬라다. BMW, 폭스바겐 등의 전통의 기업들은 테슬라보다 역사도 오래되고 더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부 테슬라에게 역전당했다. 2020년 자동차 시장의 시가 총액 1위 기업은 어디일까? 도요타도, 폭스바겐도 전부 제친 테슬라이다. 그 뒤를 구글과 중국, 또 한국의 현차, 여러 독일 회사들이 바삐 쫓아오고 있다.
옌푸는 흔들리는 중국 사회에 본인만이 가진 '문화 번역' 능력을 통해 새로운 언어, 개념을 중국 사회에 불러들어왔고 이는 훗날 마오쩌둥에게 강렬하게 읽히게 될 정도로 큰 파급력을 가져왔다. 옌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준이 흔들렸다는 점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서양 사상의 도입에 가장 앞장섰던 옌푸는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비판하며 더 이상 다음 세대의 존경과 지식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시간이 흘러 공자와 유교 문화의 회귀에 앞장서자는 주장을 하였다.
현대 시대를 미래로 이끄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지식인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신생 기업, 새로운 집단이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기존의 세대는 젊은 세대가 제시하는 모델들을 폭 넓게 수용하며 이들이 기존 규범과 틀에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이들이 제시하는 모델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보여야 할 것이며, 다음 세대는 고정된 사고, 문화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끊임없이 위로 치고 올라오려 노력할 것이다. 20년 뒤 30년 뒤 우리가 어느 국가의 어느 기업의 로고가 박혀있는 플라잉 카 (Flying Car)을 타고 세계를 옮겨다닐 지, 초융합 사회에 알맞은 문화 규범, 법률 제도는 어떻게 변화할 지 고민해본다면 시험기간이 마무리 된 지금의 무료한 하루를 꽤 즐겁게 보내게 하는 잡념에 빠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님의 글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과거 중국이 처했었던 상황을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자동차 산업과 비교하여 설명해주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또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가장 적합하게 대응을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몫일 거라 짚어주신 점에도 공감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은 결코 막을 수 없는 문제이고, 이에 대책없이 휘둘리는 대신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말씀해주신대로 기존세대와 젊은 세대의 소통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여담이긴 하지만 자동차 산업에는 원체 지식이 없다보니 테슬라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기업도 도태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며 바삐 쫓아가고 있다니 다행이네요ㅎㅎ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옌푸는 근대로 나아가는 흐름속에서 단순히 서양의 기술과 지식만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도, 중국 전통을 지켜야 된다는 것도 아닌 새로운 중국만의 근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서양의 사고와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중국의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중국의 가치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번역을 통해 서양의 문명을 중국의 시선에서 전파하고자 하였다.
전통의 토양에서 배양된 중국의 지식인이 서양 문명의 토대 이룬 서양 사상을 번역하는 작업은 문명과 문명의 대화일 수도 있으며, 문화의 교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는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상상 속의 서양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중국의 근대를 만들어가고자 한 것이다. (p.61)
그의 번역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번역이 아닌, 문화와 문화를 연결하는 번역이었다. 서양의 단어들을 중국의개념으로 재해석하고, 본인의 관점에서 해설하거나 비판을 덧붙여가며 단순한 지식의 전달보단 그것을 중국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결국 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기존의 것을 무조건 유지하자는 것도 답이 아니다. 변화는 이루어 질 것이고 그 안에서 새롭게 기존의 것을 바라보고 해석해내는 노력을 통해 새롭게 발전하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거 같다.
사회진화론의 배경인 다윈의 진화론에서 진화의 원동력은 다양성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속에서 다양성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할 확률을 높여준다. 이처럼 인간의 사회에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기존의 것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다양한 고민들과 나름의 다양한 길을 찾아내는 것이 AI와 포스트휴먼의 시대로 변화하는 현 시대 속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새로움'과 '오래됨'과 같이 정적인 대상이 아닌, 새로움과 오래됨이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변화'라는 역동적 대상이 발전의 핵심 요인임을 짚어내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또한, 그 변화 속에서 진화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다양성'을 제시해 주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다양성을 인식하고 그러한 가치를 변화하는 세상에 잘 적용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을 AI와 포스트휴먼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 *진님의 의견 들어보고 싶습니다 :)
이번 텍스트에서는 서양에 의해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중국과 그 당시를 살아가던 옌푸의 삶, 옌푸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전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해 다룬다. 옌푸에게 서양은 중국 근대화의 모델이었지만, 그는 그가 마주했던 서양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시 중국의 상황과 사상을 고려하여 중국만의 근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했던 번역에서 잘 드러난다. ‘옌푸가 <천연론>을 통해 만들어 낸 신조어들, 즉 천연, 물경, 천택과 같은 용어는 중국에 사회진화론을 알리는 기본 개념이었다. … 중국 사회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 이처럼 천연이라는 번역은 중국인 독자들의 가슴을 자극했다.’ (56-57p) 비록 오역에 가깝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번역된 글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니고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즉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이처럼 번역은 정확성의 척도에서만 재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이 이루어지는 지적 사회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77p).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역경을 딛고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옌푸의 삶도 흥미로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수단이었던 ‘번역’에 대한 내용이 특히 인상깊었던 것 같다. 주로 접하는 번역이 텍스트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는 정도에 불과하다 보니, 번역이 가지는 잠재적인 힘에 대해 크게 체감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허마이오니가 우리나라에선 헤르미온느로 더 익숙한 것,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급이 떨어지는 인터넷 소설로 치부되지만 일명 초월번역의 과정을 거쳐 외국에서는 대히트를 치는 것, 같은 원서임에도 단어, 문장, 뉘앙스가 달라 여러 출판사를 두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것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찾아볼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번역’에 초점을 두고 텍스트를 읽다보니, 그리고 미디어 컨텐츠 쪽에 관심이 있다보니 자연스레 개발자들이 하는 일이 번역가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즈음 기술은 정말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렇게 빠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점차 사람과 기계 사이에 충돌이 생기기 시작하고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너무나도 다른 두 ‘사회’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바로 이 분야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같다. 중국과 서양 그 사이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었던 옌푸처럼, 단순히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연구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하는 일-개발-의 의미와 그것이 지니게 될 파급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외국 텍스트의 한글 번역본에서 언어유희, 관용표현 등을 있는 그대로 직역해놓은 텍스트를 읽으며 '이게 뭐야?'라고 생각한 적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글 텍스트의 경우에도 (혜정님께서는 반대의 예시를 들어주셨지만!) 대부분의 한국 문학의 다양한 표현들이 번역 과정을 거치면서 가치가 훼손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동양과 서양 학문의 다리 역할을 수행한 옌푸의 작업이 더욱 가치있게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적어주신 것처럼 번역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이에 대해 추가적으로 개발자들이 하는 일이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신 부분이 인상깊었고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정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번역가와 개발자의 비슷한 점에 대해서, 너무나 다른 두 사회를 연결해주는 다리라는 키워드로 집약해서 설명해주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잘못된 소통이 낳을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를 고려할 때, 그 파급력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를 읽고 옌푸와 근대 중국에 대해 배경지식을 제공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옌푸의 번역 자체를 다루지 않아 큰 아쉬움을 느꼈다. 원문과 번역문을 옆에 두고 문장을 대조하여 어떤 식의 의역을 하였는지 설명을 해주었으면 그의 의도와 사상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가 되었을 것 같다.
이 번역서들이 중국에서 그렇게 인기를 끌었나 보다. 새로운 사상에 굶주린 사람들, 서양이 궁금한 사람들.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성공하였을 것이라 상상된다. 서구의 충격과 연관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싫은 공부는 안 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옌푸의 번역서는 서양에 대한 대응의 개념보다는 대중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실제 대응은 좀 더 물리적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과 무역을 통해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와서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사상적인 교류가 진행되었다. 서구의 기술도 들어왔지만, 옌푸는 사회적인 차이에 흥미를 가지고 서구와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를 공부하였고, 서적을 번역하며 다른 중국인에게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런 서구의 사상에 둘러싸여서도 중국의 전통이 더욱더 가치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 중국이 아직도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면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나라이다.
A.I.와 포스트휴먼에 대해서는 질문에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이 충격인지부터 정의가 필요하다.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충격인가? 시간을 어디에 쓸 지도 모른다니 인생 참 재미 없게 사는 것 같다.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가 걱정되는가? 지금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늘이 내려주는가? 기술을 앞둔 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가 충격인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되는 분쟁과 사회구조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서구를 맞이한 근대 중국과 같이, 미디어를 통해 학술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전통 가치를 재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A.I.와 포스트휴먼에 의해 충격을 받는 사람의 삶은 중국 사례와 마찬가지로 전혀 변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중국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로운것에 대한 두려움과 급격하게 유입되는 새로운 생각들을 충격이라 표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범님의 글을 읽고 나니 책에서 볼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집니다. 관료들이 여러가지 교육을 위한 기구들을 설치하고 정책을 세웠다는것은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중국의 일반적인 민중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정치인 학술인이 아닌,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면 그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짐작해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금의 사회에도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 가치를 찾기 어렵다는 말로 이해했는데 승범님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가 알고싶습니다. 또 말도안되는 분쟁과 사회구조에는 어떤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범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사례에 적용하기 이전에 무엇이 충격일지 정의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견이 인상깊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공지능의 시대의 충격은 새로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과 사회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사례와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격'이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문단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도 마찬가지의 관심을 가져야 하고, 포스트휴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별 변화가 없을 거라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질문의 '충격'이 꼭 혼란과 두려움을 의미하신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흥분 자체를 충격이라고 보통 부른다고 봅니다. 오히려 아무런 거리낌도, 낯섦도 없이 변화가 자리잡는다면 더 이상한 사회이지 않을까요? 당혹스러운 충격으로부터 새로운 계기를 얻고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는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안정된 세계의 해체를 가속화했던 근대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자신들의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확신했던 서구 사회에 있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던 다른 생물들과 인간이 공통 조상을 가지며 종으로써의 특성을 공유한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온 파장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동양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동양은 서구의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이해하는 과정에 있어 지식인의 주도에 의한 번역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엄복의 『천연론』은 서구의 충격에 대응하는 동양의 반응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동양의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서양의 사상을 중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진화론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의 번역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진화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당대의 중국에서 불변의 진리로 여겨지던 “하늘이 변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리 또한 변하지 않는다.”는 신화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시도이다. 그는 폐단이라고 생각되는 중국의 사상을 과감하게 반박하면서 중국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단순히 서양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자의 생존을 찬양하는 사회진화론에 대해 자기억제의 규범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양의 사상을 수용한 것도 고무적이다.
근대의 동양이 겪은 세계관의 혼란은 포스트휴먼의 시대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기존의 세계관에 매몰되지 않고 유연하게 변화에 대응하는 자세이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혼란에 빠져 몰락하기 쉽다. 주체적인 사상을 중심에 두더라도 새로운 생각을 접하면서 유연하게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던 엄복의 번역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현재의 중국의 위치와 연관지으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현재 중국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그 뿌리에 대해서 조금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서양에서 밀려들어오는 사상들과 기술들은 그때 동양 사람들에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충격이었다. 서양의 규범은 모두 중국의 도리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옌푸는 지식을 번역하고 남에게 소개하면서, 이 지식을 활용하여 혁명을 실천하였고, 실망하였고 다시 전통에 대해 이해를 재고했다. 이런 방식으로 개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었다.
중국내부에서도 많은 움직임이 있었고 전쟁과 여러 힘들이 모두 모이고 충돌하고 하면서 현재의 중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옌푸는 이렇게 말하였다. "평소의 학문과 사대부들의 의식이 잘못되었다. 지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텍스트를 읽으면서 의식의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제목과 목차를 보고 어렵게 느껴졌지만(사실 중국과 철학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읽어보니까 어느 텍스트보다도 잘 읽혀지고 내 삶의 자세에 대해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라고 느꼈고, 중국에 대한 반감도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이 텍스트에 대해 느꼈던 것처럼, 사회가 기존의 사고방식과 의식을 바꾸지 않고 ai라는 충격에 맞닿는 다면, 옌푸가 우려한대로 본질없이 역사가 반복되듯이 아무리 기술이 발전이 되더라도 문화적 어휘와 의식 또한 발전되지 않는다면 . 옌푸가 말한대로 ai에 대한 실체에 대한 모색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