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12주_고・탐] 근대 중국 문학의 인간관_서울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전형준 교수 특강
근대 중국 문학의 인간관
『아Q정전』
: 루쉰 소설선
루쉰 지음 |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16일 출간
토론 자료
아Q정전: 루쉰 소설선 중 <광인일기> 및 <아Q정전>
토론 주제
자유롭게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은 소감과 비평, 그리고 제기하고픈 질문을 A4 1쪽 분량 정도로 적어주기 바랍니다.
[2020-2: 12주_고・탐] 근대 중국 문학의 인간관_서울대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전형준 교수 특강
근대 중국 문학의 인간관
『아Q정전』
: 루쉰 소설선
루쉰 지음 |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16일 출간
토론 자료
아Q정전: 루쉰 소설선 중 <광인일기> 및 <아Q정전>
토론 주제
자유롭게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은 소감과 비평, 그리고 제기하고픈 질문을 A4 1쪽 분량 정도로 적어주기 바랍니다.
<광인일기>와 <아Q정전> 모두 중국의 근대화 초입에서 (특히 농촌 사회)의 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충돌과 고독, 그리고 인간의 광적인 기질과 야비한 속성을 드러낸다. 개화의 상항에서 한계 내지 변화에 직면할 때 <광인일기>의 광인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다는 피해의식에 쌓여 광적인 기질을 보이며, 다른 한편 <아Q정전> 속 주인공은 소위 정신승리를 통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의 비열함을 내보인다. 물론 이러한 비열함이 때로 인간적 성숙함에 의해 완화되지만 그 결말에서 보이듯 때로 보이는 성숙함은 비열과 정신승리를 한껏 강조하고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겠다.
이중에서 <광인일기>가 그리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근대화 초입에 농촌 사회에서 지식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가 피해망상으로 비화될 정도의 갈등과 오해를 내포하고 있음은 상당한 안타까움이다. 해설이 서술하듯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인 지식인에게 봉건적인 농촌 사회의 대다수에게는 그저 미친인간일 뿐이었고, 그 반대로 인육을 먹는 등의 오랜 습속에 쩌든 다중을 보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그들은 식인종으로 비화되기 쉬웠을 것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아이러니는 해당 작품 전반을 끌고 나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 내지 지식의 도래에서 지식인과 습속의 관성을 지닌 다수가 갖는 갈등을 예정한다. 이 지점에서 이는 단순히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근대화되는 중국의 그 시공간적 맥락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향후의 발전과 사회적 갈등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들은, 지난주 토론에서 이뤄졌던 것을 바탕으로 이하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21세기를 넘어 포스트휴먼 시대에 앞서 <광인일기>처럼 지식인과 다중 간의 갈등 내지 심각한 오해가 발생할 것인가. 현대와 해당 시기의 차이는 어떠하며, 특히 어떤 차이점이 갈등을 완화 내지 증폭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
다른 하나는, <광인일기>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당대의 갈등이 제대로 봉합되지 않고 피해망상과, 정신병자로의 취급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마무리 됐는지, 이를 완화할 방법은 어떠했는지 묻고 싶다.
근대 소설 특유의 문체를 재밌어 하지 않는 편이라서,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을 때에도 재미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소설 모두 생각보다 세련되고 재미있었다. 특히 광인일기를 읽으면서는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떠올랐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화자 역시 범인(凡人)은 아니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정신적 상태에 변화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 년 전, 그의 첫 소설 작품에서 마치 현대소설과도 같은 독특한 구성을 취한 루쉰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루쉰은 상황을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에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인일기”에는 정신 질환을 앓는 ‘광인’의 내면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변인들의 시선을 광인이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추론에 어떠한 비약이 존재하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정상인(소설에서의 외부 사람)’의 시선에서 볼 때, ‘광인’의 추론에서 비약을 찾을 수 있는 것이긴 하다. 철저히 ‘광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자신의 추론에는 문제가 없다.) “아Q정전”에는 혼란한 사회의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모습이 뜨끔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아마 당대 중국인들은 자기 자신이 아Q정전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적어도 한 명(집단)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저자에 대한 설명에서, 루쉰이 당대 사회상을 그의 소설에 반영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광인일기” 역시 표면적으로는 광인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겨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소설에 완벽히 몰입하지는 못 한 것 같아 아쉬웠지만, 글에 숨은 의미에 대한 나름의 추측을 해볼 수 있었다.
추측은 “광인일기”라는 제목이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어쩌면 이 제목으로부터 저자가, 너무나도 “광인”처럼 보이는 모씨 형제 중 동생이, 사실은 “광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인의 생각이 미친 소리가 아니라면?’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해설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해볼 수 있었다. 식인 행위는 중국이 고집하고 있는 전통을 나타내는 것이며, 광인의 지적을 미친 소리 취급하는 외부 사람들은 근대화와 진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근대’와 ‘봉건’에 대한 언급 없이, 당시 사회를 소설에 투영시킨 루쉰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일기의 저자인 모씨 형제 중 동생이, 병이 다 나았다는 언급이 되어있었는데, 이 부분을 동생도 결국 외부 사람들과 같은 류의 사람으로 전락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사소한 질문이지만, ‘글의 제목은 본인이 낫고 나서 붙인 것이니’라는 언급이 되어있었는데, 일기마다 제목이 붙어있지는 않아서 “광인일기”라는 제목을 광인 본인이 붙였다는 의미인지 궁금했다.)
원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누명을 쓴 채 총살당하는 아Q의 모습은, 그가 소설 내내 무지하고 끊임없이 ‘정신 승리’를 시도하는 답답한 인물로 그려졌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을 자아냈다. 그래서 “아Q정전”에서는 아Q의 죽음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기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충격적이었고 인상 깊었다. 이 장면은 아Q의 일을 ‘남일’처럼 생각하는 주변인들 역시, 사실 아Q처럼 –혹은 아Q보다 더- 비합리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Q정전의 배경이 신해혁명이라고 하여, 혁명의 구체적 내용이 궁금해졌다.
저도 <광인일기>를 읽으며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아Q라는 인물에 대한 예슬님의 평가가 인상깊었습니다. 답답하고 무지한 인물인 아Q에게 동정심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슬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해설을 보면서 식인, 광인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가졌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결했던 기억이 납니다. 보면서 정말 어렵게 쓰긴 했는데, 알고 다시 보니 정말 그 표현력에 감탄했습니다.
*슬님의 궁금증을 읽다보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병이 다 나앗다는것은 동생은 전통에 굴복했다는 것인데 그리고 나서 보면 굴복하기 전 개혁을 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정말로 광인 같아 보였을까요? 아니면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표현해야 했을 만큼 괴로웠던 걸까요? 토론시간에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광인일기>의 경우 피해망상증을 지닌 인물의 생각과 행동들을 일기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인물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마저 자신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망상적인 증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학작품을 읽는 재미중 하나는 글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내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누군가가 되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경우에는 평소에 쉽게 접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닌 인물과 간접적으로나마 하나가 되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이번 학기 이상심리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다보니 이 글의 주인공의 모습이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글을 읽으면서 분명히 머리로는 주인공의 생각이 내 평소 모습과 많이 다른 인물이고 내 기준에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마음은 마냥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최근에 이상심리학을 공부하며 느끼고 있는 내 감정 및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이상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정신관련 장애에도 정말로 많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종류가 많다보니 어떤 장애의 설명을 볼 때에는 나 역시도 그것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애라는 것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정말 미세한 차이로, 혹은 우연한 계기로라도 어느 한 순간 누구나 정신 장애에 빠질 수 있으며, 어쩌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진단이라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판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단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같은 요소도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의 주인공의 상황도 마냥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의 연장선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심리학에서 심리장애에 대해 설명하는 인지적인 입장에 따르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이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이라면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꼭 장애의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입장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과 <아Q정전>의 아Q는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처럼 느껴진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이러한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보니 주변의 사소한 일 모두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을 했다. 같은 행동이라도 주인공에게는 본인의 신념과 일치하는 맥락으로 보인 것이다. 아Q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의 곳곳에서 사실과 다르게 정신 승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처럼 실제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모습들, 독특한 해석들 등이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감정과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기본적으로 아Q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뿐만 아니라 세상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갈망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혁명처럼 좋아 보이는 것 등은 모두 따라하려 했고 다른 인물들이 자신보다 더 나아보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 혹은 생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처럼 두 인물 모두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과 해석이 있었으며 그것들의 내용은 사회에 적응적인 내용은 아니었고 최후가 좋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을 통해 개인이 사회에 가지는 시각 못지않게 세상과의 소통과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는 것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정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가 0과 1로 불연속적으로 분리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균님의 글에서 비슷한 생각이 보여서 공감이 됐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는것이 중요한 과정이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기준선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은 신념을 환경에 맞추어 바꾸기도 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Q정전속 주인공에게서는 그런 신념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몰입도가 덜했던것 같습니다. 광인일기속 주인공은 후에 예비 관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인물에 대한 몰입도가 덜한것은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광인일기속 주인공의 신념과 해석은 어떻게 최후를 맞이한 것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부하시는 심리학, 그중에서도 장애와 연결지어 써주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마지막에 써주신 '세상과의 소통과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핵심인 것 같은데 더 이야기를 나눠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광인과 아Q의 사례를 보면 동의가 되면서도, 또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든 말 같기도 합니다. 또 저는 <광인일기>와 <아Q정전> 모두 낙인에 관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지고 있는 신념이 부정적이고 역기능적일 때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입장의 관점에서, 그 원인이 그 신념 자체인지 아니면 그러한 신념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핍박)라고 보는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답답함, 침울함이었다. 아마도 두 작품이 밝은 분위기가 아닐뿐더러 결말도 우울함이 해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다. 저번 주의 옌푸가 마주했던 상황, 외부와의 접촉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 시도를 하지만 정책이 개혁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개혁이 실행되더라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바로 이 두 책의 내용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인일기>는 狂人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광인은 주변 사람이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주변인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더 나아가 식인의 풍습을 하지 말자는 제안까지 하는 존재이다. 이 비유가 가득 담긴 글은 전통-식인의 풍습-을 지속해온 사람 사이에서 전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더 나은 풍습으로 나아가야함을 제안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왜 하필 광인이냐에 대한 궁금증으로 뒤의 해설을 보니, “봉건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에 계몽자는 광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239면)”는 말에서 바로 깨닫게 되었다. 식인을 하는 풍습이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광인인 것이다. 이렇게 <광인일기>에서는 개혁이 처음으로 들어온 전통사회에서의 반발을 잘 보여준다.
<아Q정전>의 아Q는 어떤 인물인가. 강자에게는 아무 말 못하고, 약자에게는 폭력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필요에 따라서 전통을 버리고 개혁을 선택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 또한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에 이 글의 제목을 ‘정전’으로 해도 되는 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런 인물에 대한 정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아Q는 강약약강의 인물이면서 계속해서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하지고 자신의 필요에 맞게 개혁을 이용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가장 시대의 변화를 빠르게 확인하고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에 맞게 변화하려고 했는데, 개인의 판단도 부족했고, 외부의 상황도 호의적이지 않아서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 것 같다.
종합적으로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새로운 것을 보면 경계하는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광인일기>에서는 광인의 입장에 있어서도, 식인의 입장에 있어서도 자신과 다른 외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Q정전>에서도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에 대해서도, 성내에 대해서도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Q에게서도, 개화의 세력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계가 과격해지면 폭력적인 모습도 동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책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AI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경계를 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와 가진 능력의 차이이든 겉모습의 차이이든 상관없이 다르기 때문에 일단 두려워하고, 더 관심을 가지면서도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닐까. AI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는 지금은 함께 잘 살아가는 동물에 대해서도, 잘 이용하는 여러 기계들에 대해서도 같은 경계심을 보여 왔으니까 말이다.
매주 다양한 책을 읽을 때 마다 다른 관점으로 인간이 AI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하나의 인간이 가진 모습이고, 다시 이러한 모습들이 복합적으로 모여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두 텍스트 중에서 비교적 소화하기 수월했던 <광인일기>를 중심으로 소감을 적습니다.
지난 주 텍스트를 읽으며 살펴보았던 근대 중국에서 전통과 신식 문물이 충돌하던 사회를 관찰할 수 있었다. <광인일기>의 화자 입장에서 전통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이 해로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통을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역으로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화자를 배척한다. 화자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 또한 잡아먹을 것이라 두려워한다. 물론, 후일에 이 일기를 ‘피해망상증’을 앓던 때의 기록이라 지칭한 것을 보면 실제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잡아먹으려 한 것은 아니겠지만, 화자는 자신 또한 전통에 순응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 형과의 솔직한 대화를 시도하지만 분위기는 험악해지기만 하였다. 그를 대문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 중에는 나쁜 전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전통을 행한다는 것에 오히려 화를 낸다. 화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방에서 홀로 지내며 골똘히 생각한 끝에 자신 또한 ‘식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잘못된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장하던 그 자신조차 이미 전통 사회의 일원으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광인일기>의 화자는 지난 주에 다루었던 옌푸와도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 또 다른 선택을 한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더 이상 전통을 고수해서는 안됨을 일깨우고, 일기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아이들을 구하라”고, 아직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들을 잘 교육해야 함을 암시하였다는 점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이를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교육한 옌푸와 닮아 있다. 화자가 결국 관직으로 나아간 것은 옌푸가 꾸었던 ‘진사의 꿈’과 맞닿아있지만, 신식 군대의 무력함에 충격을 받은 옌푸가 진사의 꿈이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과 달리 화자는 전통에 순응하기를 선택한 것 같다. 글의 제목 또한 화자 자신이 붙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식인’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통을 거부하던 시기의 자신을 ‘광인’이라 칭한 것으로부터 그의 선택을 확인할 수 있다.
아Q는 일반적인 대중과 같은 인물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저지르지도 않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서류의 내용을 읽지도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적지도 못한다.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도 자신이 승리한 것이라고 되뇌인다. 혁명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혁명당에 투항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행동하는 아Q와 같은 대중 앞에서 <광인일기>의 화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전통에 순응하고 전통 아래에서 최대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 뿐일까?
광인일기의 주인공의 병이 어떻게 치료되는지 그 과정이 소설속에 묘사가 되어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옌푸가 진사의 꿈이 의미없음을 신식군대의 무력함을 통해 알았다면, 소설속 광인은 어떤 과정을 통해 전통에 순응하게 되었을지가 궁금합니다. 또, 상범님의 마지막 질문을 듣고 같은시기에 출판된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사회의 변화에 자신을 바꾸어가며 순응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저항하는 다른 인물의 예시가 궁금해졌습니다.
<광인일기>를 해설 없이 그냥 읽었을 때는 사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주인공의 생각이 어떤 현상을 빗대어 이르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책의 해설을 보고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해설에 의하면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다고 묘사되는 주인공은 사실 계몽인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광인’으로 묘사되는 사람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은 구시대적 인간상을 대표한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계몽인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 그를 경멸하고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계몽인은 끝까지 주변 사람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설득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봉건적 관습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아Q정전>은 아Q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아Q는 소시민을 상징하는 동시에 아주 어리석고, 허세를 부리며, 자기합리화를 잘 하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며, 약자에게는 강해보이고자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부녀자를 희롱하고 짜오 노어른댁의 하녀를 희롱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철저히 소외되어 성내로 떠난다. 성내에서 그는 도둑패의 일을 도우며 돈을 벌다가 결국 물건을 도둑질하여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아주 잠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존중받지만, 그가 성내에서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안 마을사람들은 다시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아Q는 혁명당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우러러볼 것이라 생각하여 혁명당에 항복한 척을 하지만, ‘가짜 양놈’에 의해 거절당했고 최후에는 강도로 몰려 총살을 당하고 만다.
아Q는 한마디로 아주 어리석다. 현실 파악에 능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정신승리법으로 세상과 진실을 왜곡하여 믿는다. 그런 그의 삶은 내내 비참하다.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만 받는 아Q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본인의 어리석음에 기인한 결과이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혼자 떠돌면서 정신승리법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생존’하고자 발버둥 친 것은 아닐까? 아Q와 그를 통해 볼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신해혁명 시기의 중국인들을 대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들의 인간상이 비단 당시의 중국인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현대 버전의 아Q를 만날 수 있고, 아Q를 조롱하고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의 인간상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짧은 이야기 두 편에서 살펴본 루쉰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따뜻한 면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기에 바쁘고 조금이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이는 철저히 소외된다. 당시의 중국 사회가 그만큼 냉정하고 혼란스러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도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우리 사회는 따뜻할까? <광인일기>와 <아Q정전>에 묘사되는 마을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포스트 휴머니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있는 현시점에서 혁명의 시기를 겪었던 중국 사회의 혼란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지난 주 근대 중국, 나아가 근대 동아시아에 미친 옌푸와 서양 사상의 파급력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당시 근대 중국에 대한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Q정전을 읽었다.
책 전반에서 루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미래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가치로 적합한 것이 있을 까 고민하면서 책을 읽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 모씨는 피해 망상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청이 있는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계층에 속하는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는 광인일기의 주인공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데 대표적으로 '정신 승리' 질환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이 증상은 망각, 오판 등의 추가적인 정신 질화과 함께 아Q의 삶을 점점 망상 속으로 이끌게 되는 데 이러한 아Q의 말로는 같은 마을 사람들 (지배계급, 피지배계급 전반)로 인해 촉발된다. 광인일기 역시 주인공이 진짜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과 아이들을 구하라 라는 말의 부정적인 독백을 통해 식인 사회에 대한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며 마무리된다. 중국에서 학당을 통해 양질의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가 의술을 공부한 루쉰은 신해혁명을 거치며 격동하는 근대 중국의 민족에게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았다. 계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봉건 시절의 국민들에게 바뀌어야한다는 말을 루쉰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만약 루쉰을 만난다면 루쉰에게 중국 시민들이 어떻게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지 그 의견을 물어보고 싶다. 서양 문명이 근대 중국으로 흘러들어왔으나 중국은 끝내 민주 혁명의 길을 걷지 않고 공산국가를 국가하며, 이 안에서의 혁명을 통해 중국만의 방식으로 강대국을 이뤄왔다. 만약 내가 20세기 근대 중국에 태어나 혁명을 곁에서 바라본 루쉰과도 같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21세기의 중국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계를 빠른 속도로 장악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에 자랑스러워하는 반면 부패와 탄압, 세계 질서를 마음대로 휘젓는 모습에 반성을 느낄 것 같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했던 사회의 내용에서 나아가, 루쉰이 상상하던 혁명 이후의 중국의 모습은 무엇이었을 지 나눠보고 싶다.
*교님의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책을 읽으면서 루쉰이 생각하는 근대성이란 무엇인지,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루쉰은 봉건적인 당대 중국인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바뀌어야한다는 거야?" 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단순히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만을 강조한 것인지, 아니면 서양을 비롯한 여타 국가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입장인 것인지 등, 그의 생각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루쉰이 중국을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 생각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지금의 중국의 모습도 자기합리화, 정신승리하고있는 모습으로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그런 부분은 극복했다고 느낄까요. 인간이 아큐정전의 이념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고민됩니다.
중학교 때 <광인일기>와 <아큐정전>을 처음 읽고 받았던 충격이, 몇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생생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책인지 좀체 감을 잡을 수 없고 주위에 물어보아도 딱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해 많은 의문만 남긴 책이었던 기억이 난다.
먼저 <광인일기>의 경우 <아큐정전>보다도 충격이 컸는데, 크게 두 가지 설정이 충격적이다. 하나는 사람을 먹는다는 설정이며, 두번째는 ‘나’라는 인물이 피해망상증이라는 설정이다. 다른 사람들이 사람을 먹는다는 피해망상증을 가진 사람의 시점에서 기술된 글은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꽤나 충격적이며, 이 고장의 식인 풍습 설정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감이 오질 않아 수업을 통해 배우고 싶다. 단순히 피해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루쉰이 이러한 책을 저술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식인 문화가 정말로 루쉰이 책을 저술할 때 실제 중국에서 식인 문화가 실제로 있었던 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루쉰이 비판하고자 하는, 또다른 사회적으로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싶은데, 무엇을 비판하고자 이 글을 쓴 건지 알고 싶다. 또한 피해망상증이라는 특이한 소설 속 장치를 만들어둔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궁금했다. 피해망상증이라는 주인공의 특징 때문에 정말로 소설 속에서 식인 문화가 있었던 건지, 뭔가 루쉰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 소설 속에서 누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쉰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또 궁금한 것은, 소설 속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식인 문화를 알게 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반 (정상) 시민이 아닌 피해망상증 (정상이 아닌)에 걸린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정상인 사람이 정상인건지, 정상이 아닌 사람이 정상인건지가 가장 헷갈렸던 것 같다. 이 책은 다른 어느 책들보다도 가장 주제의식을 종잡기 힘든,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루쉰이라는 위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나에게는 감당키 어려웠던 책이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 글의 줄거리만 보았을 때 이 책의 해석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석하기 어려운 작품인 것 같다.
<아큐정전>의 경우, 내가 아는 나의 배경지식으로는 일종의 ‘정신승리‘로 살아가는 아큐라는 주인공이 신해혁명을 지점으로 한 우매한 중국과 중국인들을 상징하며, 혁명당을 이끄는 인물들이 미국 등 다른 서구 열강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다시 책을 읽어보며 아큐의 정신승리와 혁명의 기회만을 엿보는 아큐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두 글은 우리가 현대와 AI가 도래할 시점의 과도기에 놓였을 때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광인일기>처럼 어느 소수가 무언가 사회적으로 일깨우고 계몽하고자 했을 때, 변화를 싫어하는, 한편으로는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사회의 다수가 깨어있는 그 소수를 ‘광인’으로 몰아가게 될지, 아니면 그 소수의 목소리를 캐치하고 사회를 바뀔 수 있도록 할지는 앞으로의 우리 손에 달린 듯하다. 또한 <아큐정전>처럼 변화 앞에서 단순한 정신승리와 편협한 사고를 가진 이들은 결국 참담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루쉰의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특히 광인일기를 읽고 난 후 과연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민님이 읽고나서 정상이 무엇일까에 대해 헷갈렸던 것처럼 광인이라는 사람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으며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역시도 누군가에게 광인과 같을 수 있으며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광인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민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정상인 사람이 정상인건지, 정상이 아닌 사람이 정상인건지가 헷갈렸다는 *민님의 의견에 매우 공감합니다. 전통의 고쳐나가야 할 점을 식인풍습이라고 비유해서 저는 생각했는데, 식인의 풍습을 고수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기도 어렵고, 광인처럼 앞장서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도 힘든 것이 당시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것에 경계부터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고 코멘트에 썼는데, *민님의 이 책을 통해서 루쉰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견을 보니, 이런 경고를 알아채고 같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광인일기는 읽고 나서 재미있는 단편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인은 근대화를 꿈꾸는 사람, 나머지 사람들은 봉건 사회에 머무르고자 하는 사람으로 대응시켜 생각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런 비유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줄거리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하여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결말에서 광인이 아이들을 걱정하며 끝나는데 소설을 재미있게 읽다 보니 더 강렬한 결말은 없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 속 상황이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의 중국을 비유한 것이라는 가장 눈에 띄는 힌트가 아이를 걱정하며 끝나는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광인일기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광인이 두려워하는 것이 왜 하필 식인인지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식인이 그저 야만적인 문화, 계몽되지 못한 문화를 비유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니 근대화 이전의 중국에는 실제로 꽤 오랜 기간 동안 식인 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이 쓰인 시기의 중국인의 식인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또, 소설이 출판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광인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비유를 생각했을지 아니면 소설 ‘광인일기’를 말 그대로 광인의 소설로 받아들였을지 알고 싶다.
아Q정전은 읽으면서 상대적으로 광인일기 보다는 몰입이 덜했다. 소설 속에 인물이 여러 명 등장하는데 한 인물에 대한 하나의 큰 줄거리가 있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섞인듯한 아Q라는 인물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이 혼란스럽게 쏟아지는 것으로 느껴졌다. 혁명당 행세를 하려는 모습 등 소설 속 아Q는 어리석음, 비열함의 집합체인 것 같다. 아Q에는 누구나 보고 비웃거나 비난할만한 요소가 잔뜩 담겨있다. 그런 모습의 극단을 보다 보니 한 사람으로 보이기 보다는 여러 사람의 부분들의 결합체로 보였다.
광인일기와 아Q정전 모두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둘 다 극단적인 상황과 인물을 설정하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두 인물의 모습 모두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 기반에 있는 사람의 모습에 더 흥미가 갔다. 내 안에 있거나 내가 주변에서 관찰되는 광인의 요소, 아Q의 요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 중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고 루쉰은 당대 사회의 모습을 소설에 반영하려 했다고 한다. 각각의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그 시대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들과 대응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또, 그 시대에 쓰인 다른 저자의 책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사회의 모습을 녹여낸 소설을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 비해 루쉰의 소설이 갖는 특징은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중국의 식인 전통 - https://yonseisinology.org/archives/1112
*현님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왜 '식인'으로 비유가 되었을지 궁금증을 가졌었는데 실제로 식인 문화가 있었나보군요....! 공유해주신 자료를 참고하니 루쉰이 '식인'의 비유를 든 이유와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 더욱 궁금해집니다. 식인 문화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광인일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내용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아Q라는 인물을 보며 여러 사람의 부분들의 결합체로 보였다는 부분이 매우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식인문화에 대한 정보를 첨부해주셔서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물에 대해 해석해주셔서 각 소설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 사건 하나하나가 루쉰이 목격한 사건이거나 동시대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면 굉장히 재밌는 동기일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광인일기>를 읽은 후의 감상은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질환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제목에서 유추할 수는 있었지만 그 망상의 내용이 ‘식인’이라는 점이 매우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루쉰은 이 짧고 단순한 플롯의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동시에, 그로써 그들이 고민하게 하고 광인의 망상에 내포된 진리를 깨닫게 한다.
해설을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의 ‘광인’이 근대화를 겪은 계몽인을 뜻하며 그를 광인 취급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전근대적 인물들이라는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인의 일기를 통해 망상이 심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점차 ‘어쩌면 광인이 완전히 미친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나머지 사람들이 진짜 이상한 것 같기도 한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의 망상이 구체화될수록, 그리고 그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가 더욱 드러날수록 식인 행위가 광인의 망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행해졌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광인의 입장에 이입하여 상황을 해석하게 되고, 그의 두려움과 답답함에 공감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감상은 해설을 읽고 난 후 더욱 명확해졌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광인 모씨의 형에 따르면 그가 다 나아서 모지의 후보로 갔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이다. 계몽되지 않은 대중에 의해 결국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로 돌아간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건다는 말로 일기가 끝난 것을 보아 이를 이루기 위해 ‘병이 나은 척’ 모지로 떠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들어보고 싶다.
<아Q정전>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해 ‘아Q’라고 부르는 것부터 생각해볼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이는 개성을 부여할만한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당대를 살았던 그와 같은 어리석은 인물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아Q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름 우스꽝스러운 서술에서 해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Q는 따뜻한 시각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겁하고 멍청하지만 단순한 바보가 아닌 타인의 우위에 서서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를 파국으로 이끄는 주변인들과 환경을 좋게 볼 수만도 없다. 아Q도 어쩌면 당시 중국 사회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AI의 시대와 새로운 혁명의 파도 가운데, 아Q와 같은 인물이 탄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개인과 사회의 양 측면에서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 초반부에서 제목을 <아Q정전>이라 지은 이유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지만 크게 중요할까 싶어 휙휙 넘겼었던지라, ‘아Q’란 결국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당대를 살았던 다수의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재님의 해석이 더 인상깊고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빠르게 변하고 있는 요즈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아Q처럼 되지 않기 위해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의 의미를 깔끔하게 잘 정리해 주신 것 같습니다. 아Q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아Q로만 남아있다는 점은 그저 아Q를 향한 또 하나의 조롱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의재 님의 말씀대로 그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당대에 (아마도 흔했을) 인물 유형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신 것이 재미있었고 또 타당해 보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뒷부분의 해설을 보면서 저자는 그 당시 중국의 사회적 배경과 함께 나타나는 흔한 사회 모습과 인간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광인일기>를 읽으면서 앞부분에선 식인을 한다는 것이 그저 광인의 상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식인 문화는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어디까지나 광인의 입장에서 전개된 글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사람을 잡아먹어 온 이들이 광인인지, 그들에게 잘못이라고 외치는 이가 광인인지 헷갈리게 된다. 해설을 보고 당시 봉건사회에 매몰된 이들의 눈에는 광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계몽인을 말하고자 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광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현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Q정전> 은 아Q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아Q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물이다.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스스로를 속여가며 ‘정신 승리’를 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짠함이 느껴졌다. 혁명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소신보다는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는 쪽으로 행동한 아Q지만 이득을 보는 것은 고위층일 뿐, 아Q는 오히려 누명을 쓰고 끝내 총살당하게 된다. 이러한 아Q의 삶에서 아Q는 어리석은 악인이라기 보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결국 피해를 받는 하층민일 뿐이었단 사실에 짠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같은 하층민들 사이에서도 아Q는 배척 받고 그의 죽음도 조롱거리가 된다. 어리석은 아Q도 그를 조롱하는 대중들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게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며, 정말 이걸로 만족하냐고 꾸짖는 것 같다고 느꼈다. 배경지식이 부족해 놓치고 지난 부분이 많을 것 같아 루쉰이 글 속에 담아내고자 한 당시 중국 사회의 분위기가 어떠 했을 지가 궁금하다.
두 글을 읽으면서 변화 속에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품은 자는 쉽게 배척당하고 광인으로 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 학기에 계속 다루고 있는 AI와 포스트휴면의 시대가 다가오는 현시점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어리석은 아Q가 되지 않기 위해선 변화에 대해 어떠한 태도로 대응해야 될 지 고민할 필요는 것 같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두 글의 주인공들이 어리석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안타깝고 짠하게 느껴졌습니다. 적어주신 것중에 현대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광인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말이 인상깊었고 공감되었습니다. 이처럼 두 인물 모두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기 보다 사회 속의 상대적인 측면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에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겐 광인 혹은 아큐로 비춰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저들을 어리석게만 보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진님의 코멘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서로 대립되는 가치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광인으로 비춰지는 것"이라는 문구가 인상깊었습니다. 특히 요즘 인터넷 문화의 발달로 인해서인지 양 극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굉장히 크게 느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광인'으로 모는 모습을 더욱 많이 접하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AI 외에도 너무나 많은 변화를 빠르게 겪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서로를 '광인'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인일기>라는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글을 읽는 내내 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상인과는 다른 사고세계를 가진 인물의 ‘일기’ 형식을 빌어 당대 사회를 비유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이다. 맨 처음 작품을 읽을 때에는 글의 형식의 유사성 측면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짧은 호흡의 일기글과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제되지 않은 채 날것으로 다가온다. 심리학을 전공하며 특히 사람의 나약한 마음과 비정상적인 마음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을 타자화하며 ‘왜 저들은 저리도 우울하고 나약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하고 고민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내가 될 수도 있고 우리 누구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러한 나약한 마음에 골몰히 빠져들게 되면 나 역시 광인일기 속 광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광인일기 속 인물이 점차 망상의 세계로 빠져가는 과정이 더욱 흡입력 있게 느껴졌다. 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기고 전쟁이 쉼없이 발생하는 대혼란의 상황에서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비정상이면 정상인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사실 작가는 ‘비정상’ 적인 인물의 시선을 빌어 ‘비정상’적인 세상을 탓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비정상적인 세상 속의 한 인물은 비정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핍박받는다. 그러나, 그 광인이 보고있는 세상은 의외로 정확할 지도 모른다. 주변인물이 식인을 한다는 것을 광인의 망상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광인의 문제가 아닌 독자가 깨닫고 있지 못하는 비정상의 세계에 던지는 하나의 메타포일수도. 비정상적인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광인의 모습을 빌어 호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인일기>와 <아큐정전>은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고 문제적인 인물을 내세워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작품 속 주인공 아큐는 20세기 초반 근대화 되어가는 중국이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대유적 인물이다. 국가가 처한 위기는 애써 부정하며, 전통이니 유교니 떠들어대며 이른바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 자국에 대한 환멸이 아큐라는 인물로 표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큐는 단순히 중국에 대한 표상이 아니다. 이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표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집과 이기심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이 역시 인간의 나약한 마음 중 하나이다.
이처럼 <광인일기>나 <아큐정전>은 한 개인의 비정상적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나약함과 그곳에서 오는 절망 등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사회의 부조리함을 인물에 표상하여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20세기에 쓰인 두 작품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광인’과 ‘아큐’ 모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어서가 아닐까.
<광인일기>는 두 가지 차원에서 공포스러운 작품이다. 우선 광인의 광기 그 자체에서 오는 공포다. 지나가는 사람들, 심지어 개를 보면서까지 저들이 모두 자신을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광인을 보며 독자는 기본적인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다가 광인에게 나를 대입하면서 또다른 공포가 발생한다. 모두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여 가두고 고치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미치지 않았다고 그들을 설득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이미 나를 광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논리를 갖추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미친 거라면?’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절대 낙인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에서 오는 공포다. 그러다 ‘이 광인이 미친 게 아니라면?’이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새로운 공포가 닥친다. 이 마을이 식인을 하는 마을이며, 자기마저 잡아먹으려고 하는 거라는 광인의 말은 처음엔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그런데 작품 후반부로 가면서 어쩌면 광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느껴지는 공포는 광인 개인에게 느끼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껏 미친 것은 광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그를 제외한 모두가 미쳐 있었던 것이라면? 이때의 공포는 이 광기를 바로잡을 길이 없다는 것, 그들이 영영 미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공포다.
마을과 광인이 각각 20세기 초 전환점에서 유교와 가족제도의 악습, 그리고 그에 맞서려던 계몽자라는 것이 <광인일기>의 주된 해석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그러한 상황을 완벽하게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미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좋던 것을 해치는 사람 취급하는 것부터, ‘옛날부터 그랬던 거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까지. 공포스러운 점은 역사상 모든 전환점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것이고, 더 이상 일일이 잡아서 박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광인의 수가 많아졌을 때에야 박해가 멈추었을 것이며, 그런 결과를 현재의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Q정전>의 아Q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광인이지만, <아Q정전>은 공포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Q는 멍청하기 짝이 없고,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경멸당한 것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모습은 하도 ‘찌질’해서 화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그의 어설픈 행동들은 독자에게 힘겨울 정도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정신승리를 하며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고, 남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인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독자는 아Q의 안타까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아Q가 노름판에서 싸움에 휘말려 은전을 모조리 털렸을 때, 가짜 변발에게 이마를 맞으며 “저 아이한테 한 말인데!”라고 변명할 때, 처형장으로 실려가며 “사람 살려......” 소리도 내지 못할 때 독자가 느끼는 비참함은 끔찍하다. <광인일기>의 광인이 변화에 맞서려다 기존의 악습에 희생당한 자라면, 아Q는 기존의 악습과 갑자기 닥쳐온 변화 어느 쪽에도 대응하지 못하고 양쪽에 휩쓸린 희생자다.
두 소설은 작품 내적으로도 굉장히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다. 특히 <아Q정전>의 비참함은 읽기가 버거울 정도였고,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원천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읽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중요한 두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고 말했는데, 읽고 나니 두 작품이 각각 연민과 공포에 대응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두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과는 다르지만, 우리 내면의 본능적이고 강한 감정들을 건드리며 당시의 ‘비극’ 같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루쉰의 이런 작품들은 전환기에 닥쳐온 혼돈과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며, 현대의 독자들도 그 감정에 강하게 반응하는 것 역시 변화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님의 글을 읽고 나니 제가 이번 소설들을 읽을 때 주인공에 이입해서 읽기보다는 제3자의 입장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아Q를 ‘사실은 누구보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고, 남들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인물’이라고 설명하신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아Q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왜그런지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어려웠는데, *우님의 글을 읽으면서 정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마지막에 소설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원천에 대해 다루신 부분도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과서에 실려있던 문학소설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광인일기>의 경우 광인의 시점으로 작성된 글을 엿본다(가족의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는 소재가 특이해서 흥미롭게 시작했는데, 그렇게 전개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평소 즐겨보던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기대한 탓에 짧은 분량과 해결 과정의 부재에 다소 맥이 빠졌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읽다보니 모든 것을 소설에서 설명하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해설을 읽고나서야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글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피해망상증을 앓는 동생을 보며 신기해하고 두려워한다. 동생은 혼자 사고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소통할 수가 없다. 그나마 소통이 되는 경우는 동생이 한 수 접고 그들에게 맞추어 대화를 시도할 때 뿐이다. 아직 해설을 보기 전, <광인일기>를 갓 마쳤을 때에는 정말 동생이 피해망상증 환자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석을 읽고나니 정말 미친 사람들은 동생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동생이 무사히 쾌차했다고 말하는데, 동생은 정말 피해망상증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멀쩡한 척하고 있는 것일까? 원래는 책을 읽고 난 후 해설을 토대로 소설에서 벗어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해설에서 다시 소설 내용으로 역행한 것 같아 다소 당황스럽기는 하다.
<아Q정전>의 경우에는 몸소 강약약강을 실천하는 주인공의 행적이 한심하고 황당하게 다가오는 한 편 은근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또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아 약간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특이하고 매력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렇게 방탕하고 글러먹은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전달하고싶은 것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는 등 그렇게 몰입하지 못했었는데, 어느 순간 아Q가 하는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특히 어떤 일을 겪어도 정신승리하는 모습은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 <아Q정전>을 읽으며 가장 안타깝고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던 장면이었다. 자신에 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한건지 모르는 채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모습에 나까지 무력감이 느껴졌다. 아Q는 결국 당대 중국인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비록 아Q가 맞이한 비극의 원인이 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루쉰이 아Q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각성하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살아가라는 류의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는 빠른 기술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사상과 의견이 생겨나고 부딪히고있는 요즈음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격변하는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신을 차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정님의 코멘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Q의 모습이 당대 중국인을 나타내는 것 뿐아니라 현대인의 모습 역시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의 소신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짚어주신 점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님 코멘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서사가 짧고 단순한 점이 아쉽기도 했고, 광인이 진짜 '치료'된 것이 아닌 치료된 척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어서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 또한 작가가 아Q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세지에 대한 생각에도 적극 동의합니다!
루쉰이 유명한 소설가라는 것 외에는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서,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소설 모두 등장인물의 감정 묘사나 스토리의 굴곡과 카타르시스가 전혀 없어 소위 말하는 소설적인 완성도를 느끼지 못하였다. <광인일기>의 광인이나 <아Q정전>의 아Q 모두 특이한 인물들이고, 그 배경도 현실적이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어가는 이야기는 개연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흥미가 떨어졌다. 두 소설 모두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으며 결말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뒷이야기가 없다.
소설적 재미 대신 루쉰이 추구한 것은 그 상황 자체의 강렬함,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라 생각한다. 이 메시지는 사실 내용과 전달방식 모두 정치적인 색깔이 심하다고 느꼈다. 당시에 이 소설들을 읽고 내용을 이해한 사람들은 이미 루쉰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한 것인지 그 내용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어가 모호하고 문외한은 전혀 맥락을 짚을 수 없는 소설은 지지층의 지지만을 더 굳힐 뿐, 일반 대중에게 닿지 않는다 생각한다. 각주와 해설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이것이 분명 현실의 특정 사람들이 무지하고 병들었다는 내용을 비유한 프로파간다 같기는 한데, 글은 별 내용 없이 끝나버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정치적 풍자를 떠나서도 이야기가 성립하도록 최소한의 소설적 구색을 갖추었으면 한다.
해설을 읽고 <광인일기>에서는 광인이라는 존재와 식인에 대한 깨달음, <아Q정전>에서는 아Q의 멍청함과 그의 세계관이 주요 논점이라 생각하였다. 광인과 아Q 모두 주위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광인일기>는 이를 주인공 관점에서, <아Q정전>은 외부 관점에서 바라본다. 분명 광인은 계몽가이자 선각자이고, 아Q는 시대에 뒤쳐지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인데, 겉을 보아서나 속을 보아서나 둘이 굉장히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루쉰이 정말 계몽을 하고자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허무주의를 그리고자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루쉰의 생애 행보를 고려하면 전자가 맞을 것이다. <광인일기>는 허무함 속에서도 나름의 희망을 찾고자 한 이야기가 아닐까.
현대에서는 개인 간의 간섭과 사회활동이 줄어들어 2020년의 광인이 나오든 2020년의 아Q가 나오든 그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며 잘 먹고 잘 살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를 바꾸는 것은 계몽이 아니라 집결과 행동인 것 같다.
제기하고 싶은 질문으로, 루쉰 외에 어떤 계몽 소설가가 있는지 궁금하다.
*범님의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소설'로써의 <광인일기>와 <아Q정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아주 인상적이었던 동시에, 이 작품을 읽는 당시 사람들이 과연 루쉰이 전달하고자 한 메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광인과 아Q는 당시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던 비주류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광인은 '계몽'을, 아Q는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점에서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승범님께서는 광인일기의 주인공과 아Q가 굉장히 유사한 인물로 느껴진다고 해주셔서 흥미로웠고 이 부분에 대해 수업시간에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광인일기를 쓴 사람은 분명 광인이다. 하지만 광인의 말을 단순히 미친 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찔리는 구석이 많다. 광인의 망상은 식인이라는 당시 사회에 분명 존재했던 야만성을 소재로 삼고 있기에 무시할 수 없다. 아마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더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식인이라는 소재는 근대의 계몽과 대비되는 전근대적 야만성을 대표하는 소재였을 것이다. 루쉰은 근대적 가치관에서 전근대적인 중국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식인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사형수의 시체를 먹는 행위에 큰 윤리적 문제 의식을 느끼지는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의 찝찝함은 느끼고 있었을 것이고, 광인의 망상을 읽으며 지금까지의 가치관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인본주의 가치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또다른 가치관으로 넘어가는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근대적 가치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는 지금 식인에 해당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AI시대의 광인일기 속 광인은 "저 사람들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컴퓨터를 포맷하곤 한다! 더 나아가 내 뇌 역시 포맷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고 불안에 떨지 않을까?
아큐정전은 아Q를 통해 근대로의 전환기를 맞는 중국의 모습을 은유하고, 정신승리법이 나오는 유명한 소설 정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Q정전을 읽어 보니 중국이라는 나라 전체의 모습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환기의 평범한 민중계층의 모습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 개화기 내지 한국전쟁 즈음의 우리 나라의 민중들도 아Q와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을까? 아Q는 분명 훌륭한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한심한 인간에 가깝다. 분명 현실에서 아Q와 같은 인간을 만났을 때 드는 주된 감정은 경멸일 것이다. 하지만 아Q정전을 읽으면 아Q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아Q는 한심한 사람이지만 악인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응원하고 싶지는 않지만 처형당하는 것은 안타깝다. 아마 우리 역사 속에서도 아Q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Q와 아Q와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저번 옌푸의 충격에 이어서 루쉰의 고전 두 권을 읽고 정말 소름이 돋았다. 특히 짧았지만 어느 현대 스릴러 웹툰보다 흡입력있고 책에서 등장하는 계급 등의 명칭만 바꾸고 제목없이 책을 읽었다면 현 시대의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사회인 것일까? 나에게 광인일기의 식인현상은 이렇게 읽어졌다. 식인현상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져서 무의식적으로 비유적으로 읽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남을 잡아먹는 현상을 현재의 분열된 사회상, 그 속에서의 마녀사냥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주변사람들이 나를 밟고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미친듯이 불안하고 또한 모두가 옳다고 하면 옳지않은 것을 옳지않다고 말하면 잡아먹히거나 정신병자취급을 받는 사회말이다. 하지만 결말에서 광인은 끔찍한 세상속에서 자신또한 끔찍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그날에서야 자각한다. 자각을 한다는 것은 데미안에서 나오듯 벽을 깰 수 있는 각성의 시작점이다. 광인은 괴물이었던 자기 자신을 잡아먹었을까.. 결말을 상상하게 되었다. 아큐정전 또한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보여주기식의 윤리를 지향하고 환경탓, 남탓으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근거없는 자신감만을 내뿜고 남을 무시하고 혐오발언을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비쳐졌다. 나에게도 자존감만 내세우고 결국 변화하지 않는 모습이 있음, 혹은 선을 지향하나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모습 등을 반성하게 된 것 같다.
관심을 가지고 싶어 혁명당 행세를 했지만, 총살을 당한 아큐 , 그 결말은 굉장히 불쌍하지만 소설에서는 전혀 불쌍하게 그려지지 않고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이것또한 옌푸가 의도한 바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여부랑 상관없이 그저 범인을 잡고싶었던 기득권 층,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민중들, 또 배우지 못해 조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 이름을 쓰지 못하는 아Q. 자신의 이름(정체성)조차 표기못하는 아큐는 이미 총살당하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진실에 대해 탐구하고 배우는 자세를 통해 옌푸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