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 소주제 1] 『공정하다는 착각』 & 서울대 사회학과 임동균 교수 특강
서강민2021-03-16 14:19
책 내용 요약
능력주의는 귀족 정치와 비교하면 덜 불평등하고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계층이동을 저해하고, 불평등을 강화,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문제점을 양산하며, 각 개인을 나눠놓음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해칩니다. 출발 지점에서의 계급 간 격차로 인해 능력주의에 기반한 경쟁은 시작부터 공정하지 못합니다. 기회의 평등은 계층 간 이동성을 확보하는 부정의를 교정하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좋은 사회를 직접 만들기에는 부족한 이상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 강화’에 초점을 맞춰, 공동선을 길러야 합니다.
의문점
1. 이 책에서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 뿐 아니라 ‘행운이나 불운 같은 우연적 요소’가 사회적 성공에 개입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성공은 공적인 개념으로 바라봐야 하며 사회적 성공으로 인한 이익을 공공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나 실패뿐 아니라 모든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은 무작위적인 요소가 항상 개입하는데, 그 무작위적인 요소는 순전히 우연히, 무작위적으로 일어납니다. 즉, 어떤 사람한테는 행운만 오고, 어떤 사람한테는 불행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행운과 불행이 번갈아 온다는 뜻입니다. 마치 주사위를 굴렸을 때, 어떤 사람은 1만 나오고 어떤 사람은 6만 나오는 경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행운만’을 강조하여 그들이 얻은 정당한 이익을 가져가려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행만’을 강조하여 그들을 보조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 듭니다.
2. 설사 한 개인의 성공이 상당 부분 우연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해도, 그것이 어떤 근거로 개인의 성공과 행운을 공공과 일정 부분 나눠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우연적 요소가 상당 부분 관여한다.’와 ‘따라서 한 개인의 성공을 공공과 일정 부분 나눠야 한다.’ 사이의 논리적 연결 관계가 궁금합니다.
3. 이 책에서는 고소득층의 자녀가 명문대에 많이 들어간다는 통계적 결과를 이용해, 현 교육 제대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통계 자료만으로는 교육제도의 불평등을 입증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소득과 입시 결과 그래프에 나타난 통계자료는 너무나 제한적인 정보만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 통계자료는 부모의 소득과 입시 결과에 대한 상관관계만을 보여줄 뿐, 반드시 인과관계를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부모의 소득이 단순히 높아서 자녀가 명문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소득과 관련된 여러 함수(예를 들면, 자녀의 성실성, 목표, 일평균공부시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든다면)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보다 일평균 공부시간이 더 많다면, 당연히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보다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불평등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즉, 이 책에 드러난 통계자료만으로는 교육의 불평등을 입증하기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보완하려면 대학 진학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요인들에 대해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이 책의 결론은 ‘능력주의 사회의 적절한 교정,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통한 공동선의 실현’입니다. 하지만 책에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해법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책의 저자가 지적했듯이 능력주의 사회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능력주의는 귀족 정치와 비교하면 덜 불평등하고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계층이동을 저해하고, 불평등을 강화,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문제점을 양산하며, 각 개인을 나눠놓음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해칩니다. 출발 지점에서의 계급 간 격차로 인해 능력주의에 기반한 경쟁은 시작부터 공정하지 못합니다. 기회의 평등은 계층 간 이동성을 확보하는 부정의를 교정하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좋은 사회를 직접 만들기에는 부족한 이상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 강화’에 초점을 맞춰, 공동선을 길러야 합니다.
의문점
1. 이 책에서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 뿐 아니라 ‘행운이나 불운 같은 우연적 요소’가 사회적 성공에 개입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성공은 공적인 개념으로 바라봐야 하며 사회적 성공으로 인한 이익을 공공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나 실패뿐 아니라 모든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은 무작위적인 요소가 항상 개입하는데, 그 무작위적인 요소는 순전히 우연히, 무작위적으로 일어납니다. 즉, 어떤 사람한테는 행운만 오고, 어떤 사람한테는 불행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행운과 불행이 번갈아 온다는 뜻입니다. 마치 주사위를 굴렸을 때, 어떤 사람은 1만 나오고 어떤 사람은 6만 나오는 경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행운만’을 강조하여 그들이 얻은 정당한 이익을 가져가려 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불행만’을 강조하여 그들을 보조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 듭니다.
2. 설사 한 개인의 성공이 상당 부분 우연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해도, 그것이 어떤 근거로 개인의 성공과 행운을 공공과 일정 부분 나눠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우연적 요소가 상당 부분 관여한다.’와 ‘따라서 한 개인의 성공을 공공과 일정 부분 나눠야 한다.’ 사이의 논리적 연결 관계가 궁금합니다.
3. 이 책에서는 고소득층의 자녀가 명문대에 많이 들어간다는 통계적 결과를 이용해, 현 교육 제대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통계 자료만으로는 교육제도의 불평등을 입증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소득과 입시 결과 그래프에 나타난 통계자료는 너무나 제한적인 정보만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 통계자료는 부모의 소득과 입시 결과에 대한 상관관계만을 보여줄 뿐, 반드시 인과관계를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부모의 소득이 단순히 높아서 자녀가 명문대에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소득과 관련된 여러 함수(예를 들면, 자녀의 성실성, 목표, 일평균공부시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든다면)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보다 일평균 공부시간이 더 많다면, 당연히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보다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불평등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즉, 이 책에 드러난 통계자료만으로는 교육의 불평등을 입증하기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보완하려면 대학 진학과 관련된 여러 중요한 요인들에 대해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이 책의 결론은 ‘능력주의 사회의 적절한 교정, 그리고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통한 공동선의 실현’입니다. 하지만 책에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해법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책의 저자가 지적했듯이 능력주의 사회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윤재빈2021-03-16 22:51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의문점 3>에 대해 먼저 써보겠습니다.
인간 발달 이론을 보면 환경과 교육이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의 70%가 고소득층의 자녀라고 하는데, 저는 이러한 결과가 저소득층의 자녀가 유전적으로 열등해서가 아니라, 고소득과 저소득의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진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고소득층의 자녀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저소득층의 자녀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던가, 알바를 해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교육 인프라 차이도 큽니다. 저소득층의 대다수는 고액 학원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모든 부대 상황을 제하고, 결과만을 평가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고소득층의 자녀가 명문대에 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자녀가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쪽은 맨 몸으로 달리고, 다른 한 쪽은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리는데, 짐의 유무는 그들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운'입니다.
이어서 <의문점1>에 대해 쓰겠습니다. 운이 꼭 같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인생 전체로 보면 '큰 수의 법칙'이란 것도 있으니 운의 작용이 동등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수저론' 같은 것이 생기듯이 운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기에(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입시를 하는 청소년기)에 크리티컬하게 작용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한국같이 대학 네임밸류에 큰 의미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 경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학 졸업장을 기반으로 더 많은 부를 누리기 쉽습니다. 설사 '운'이라는 게 인생 후반기에 좋게 주어진다고 해도, 인생 초반에 많은 자본(가령 대학 졸업장)을 쌓아 놓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운을 같다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적으로도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이 더 큽니다.
한편,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능력주의가 단순히 유행처럼 퍼진 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필수불가결한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토론하고 머리를 맞대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그 폐해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의문점 3>에 대해 먼저 써보겠습니다.
인간 발달 이론을 보면 환경과 교육이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의 70%가 고소득층의 자녀라고 하는데, 저는 이러한 결과가 저소득층의 자녀가 유전적으로 열등해서가 아니라, 고소득과 저소득의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진공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고소득층의 자녀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저소득층의 자녀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던가, 알바를 해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교육 인프라 차이도 큽니다. 저소득층의 대다수는 고액 학원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모든 부대 상황을 제하고, 결과만을 평가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고소득층의 자녀가 명문대에 가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자녀가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쪽은 맨 몸으로 달리고, 다른 한 쪽은 무거운 짐을 들고 달리는데, 짐의 유무는 그들이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운'입니다.
이어서 <의문점1>에 대해 쓰겠습니다. 운이 꼭 같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인생 전체로 보면 '큰 수의 법칙'이란 것도 있으니 운의 작용이 동등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수저론' 같은 것이 생기듯이 운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떤 시기에(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입시를 하는 청소년기)에 크리티컬하게 작용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한국같이 대학 네임밸류에 큰 의미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 경향이 더 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학 졸업장을 기반으로 더 많은 부를 누리기 쉽습니다. 설사 '운'이라는 게 인생 후반기에 좋게 주어진다고 해도, 인생 초반에 많은 자본(가령 대학 졸업장)을 쌓아 놓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운을 같다고 봐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적으로도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이 더 큽니다.
한편,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능력주의가 단순히 유행처럼 퍼진 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필수불가결한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토론하고 머리를 맞대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그 폐해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건규2021-03-16 23:05
제시해주신 의문점 1.에 대하여
233-239쪽에 소개된 행운 평등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해주셨습니다. 다만 샌델 본인도 행운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기에 ‘이 책의 주장’이라는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운’이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를 파악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샌델은 주로 행운을 노력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도, 생득적으로 결정되는 것에 관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쪽에서 행운은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 혹은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내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태어나는 것’ 등으로 제시되는데, 이런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번 주사위를 던질 수가 없습니다. (233쪽에서 샌델은 아니지만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보상해야 한다고 말한 불운도 마찬가지로 생득적인 것입니다.)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만 사람은 두 번 태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져 같은 크기의 불행이 나왔을 때, 가난한 사람에게와 부유한 사람에게 그 불행이 같은 효과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수천만 원을 날리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겠으나 애초에 날릴 수천만 원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이 불행이 더욱 큰 타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샌델과는 다른 의미로 (생득적이지는 않은) 행운과 불운을 논하더라도, 주사위에서 1도 나오고 6도 나온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1과 6이 아님을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안해 봅니다.
233-239쪽에 소개된 행운 평등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해주셨습니다. 다만 샌델 본인도 행운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기에 ‘이 책의 주장’이라는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행운’이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를 파악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샌델은 주로 행운을 노력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도, 생득적으로 결정되는 것에 관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쪽에서 행운은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 혹은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내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태어나는 것’ 등으로 제시되는데, 이런 사항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번 주사위를 던질 수가 없습니다. (233쪽에서 샌델은 아니지만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보상해야 한다고 말한 불운도 마찬가지로 생득적인 것입니다.)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만 사람은 두 번 태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져 같은 크기의 불행이 나왔을 때, 가난한 사람에게와 부유한 사람에게 그 불행이 같은 효과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수천만 원을 날리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겠으나 애초에 날릴 수천만 원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이 불행이 더욱 큰 타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샌델과는 다른 의미로 (생득적이지는 않은) 행운과 불운을 논하더라도, 주사위에서 1도 나오고 6도 나온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1과 6이 아님을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제안해 봅니다.
박건규2021-03-16 23:24
@윤재빈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서강민님은 부모의 소득과 명문대 진학과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셨다기보다 부모의 소득에 영향을 받는 여러 함수가 있으므로 단순히 소득으로 파악하기보다 다각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자고 제안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부모의 소득이 작용하긴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거시적인 논의가 아니라면 부모의 소득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성적이나 명문대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함수(혹은 변수)들을 짚고 넘어가도 전반적 논의에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윤재빈2021-03-17 00:15
@박건규
명문대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은 무수히 많겠습니다만(어떤 것을 짚어내야 할 지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그 변수들이 각각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소득의 종속변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가설입니다. 가령 서강민님께서 말씀하신 성실성이나 목표설정은 소득에 따른 문화적 차이에 영향을 받고, 일평균공부시간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현실적인 여건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양한 변수를 생각해본다면 논의를 명확히 하는데 좋을것 같습니다!
물론 다양한 변수를 생각해본다면 논의를 명확히 하는데 좋을것 같습니다!
서강민2021-03-17 00:42
@박건규
윤재빈 학우분에게)
좋은 대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의문점3에 대해 지적해준 것에 대해서, 저 역시 직관적으로 아무래도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에 비해서 입시 경쟁에서 적든 크든 어느 정도의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책에서 드러난 통계자료만으로는 현 교육제도의 불평등을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시결과는 부모의 소득의 대한 함수일 뿐 아니라 다양한 요인을 포함하고 있는 다변수함수입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입시결과를 함수 f(x, y, z, w,........)라고 한다면, ‘부모의 소득’은 함수 f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변수(x, y, z, w, etc...)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중 x를 ‘부모의 소득’이라고 정의해봅시다. 입시의 불평등을 엄밀히 입증하려면, x를 제외한 나머지 변수들 (y, z, w, etc...)를 일정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사실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닌 사회에 대한 연구에서는 다변수가 개입하는 경우에 다변수를 모두 정확히 통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최소한의 시도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윤재빈 학우님께서 주장했듯이, ‘저소득층의 자녀가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정도로 공감하지만, 좀 더 엄밀한 다각적인 사회과학연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의문점1에 대해 지적해준 것에 대해서, 윤재빈 학우님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운이 작용하는 시기, 운의 크기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너무나 큰 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견 감사합니다. 또한, ‘경제학적으로도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이 더 크다’라고 지적해준 부분에서 아무리 저소득층의 학생이 의무교육을 열심히 받아,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해도, 이미 형성된 자본 앞에서는 한 명의 작은 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개인’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인데 반면, ‘자본’이라는 것은 한 ‘개인’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인 개념이라, ‘큰 자본수익률’이 ‘개인-개인 간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메커니즘, 이유에 대해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박건규 학우분에게)
우선, 제가 놓친 부분을 많이 잡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당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이클 샌델 역시 행운 평등주의에 대해 중립적 내지는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아 적절한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이어서 지적해주셨듯이, 인간은 여러 번 주사위를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행운을 ‘태어날 때 즉시 정해지는 것’으로 한정해서 논의한다면, 낮은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은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에 비해 훨씬 불리한 입장에 처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이미 강자로 태어난 개인은 불행이 닥쳐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반면, 이미 약자로 태어난 개인은 불행에 훨씬 민감하다는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이어서 아래 댓글 달아주신 의견과 제 생각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대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대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우선 의문점3에 대해 지적해준 것에 대해서, 저 역시 직관적으로 아무래도 고소득층의 자녀가 저소득층의 자녀에 비해서 입시 경쟁에서 적든 크든 어느 정도의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책에서 드러난 통계자료만으로는 현 교육제도의 불평등을 주장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시결과는 부모의 소득의 대한 함수일 뿐 아니라 다양한 요인을 포함하고 있는 다변수함수입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입시결과를 함수 f(x, y, z, w,........)라고 한다면, ‘부모의 소득’은 함수 f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변수(x, y, z, w, etc...)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중 x를 ‘부모의 소득’이라고 정의해봅시다. 입시의 불평등을 엄밀히 입증하려면, x를 제외한 나머지 변수들 (y, z, w, etc...)를 일정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사실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닌 사회에 대한 연구에서는 다변수가 개입하는 경우에 다변수를 모두 정확히 통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최소한의 시도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윤재빈 학우님께서 주장했듯이, ‘저소득층의 자녀가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정도로 공감하지만, 좀 더 엄밀한 다각적인 사회과학연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의문점1에 대해 지적해준 것에 대해서, 윤재빈 학우님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운이 작용하는 시기, 운의 크기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너무나 큰 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견 감사합니다. 또한, ‘경제학적으로도 자본수익률이 노동수익률이 더 크다’라고 지적해준 부분에서 아무리 저소득층의 학생이 의무교육을 열심히 받아,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해도, 이미 형성된 자본 앞에서는 한 명의 작은 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개인’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인데 반면, ‘자본’이라는 것은 한 ‘개인’에 귀속된 것이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인 개념이라, ‘큰 자본수익률’이 ‘개인-개인 간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메커니즘, 이유에 대해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박건규 학우분에게)
우선, 제가 놓친 부분을 많이 잡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당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 마이클 샌델 역시 행운 평등주의에 대해 중립적 내지는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아 적절한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한 이어서 지적해주셨듯이, 인간은 여러 번 주사위를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행운을 ‘태어날 때 즉시 정해지는 것’으로 한정해서 논의한다면, 낮은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은 높은 능력치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에 비해 훨씬 불리한 입장에 처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이미 강자로 태어난 개인은 불행이 닥쳐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반면, 이미 약자로 태어난 개인은 불행에 훨씬 민감하다는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이어서 아래 댓글 달아주신 의견과 제 생각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대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8 09:47
제가 생각하는 지점과 비슷합니다.
사실 저는 주위에서 가정 환경 때문에 학업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거나, 저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음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에서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한 인식들이 쌓여 이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이 꼭 저 같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샌델이 책에서 지적하였듯이 사람마다 각자의 경험, 인식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태도가 다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꼭 교육 불평등 이슈가 아니더라도 갖은 차별 이슈에 당사자가 훨씬 더 많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요?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태도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능력주의는 우리에게서 여유를 빼앗아감으로써 그것을 어렵게 한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주위에서 가정 환경 때문에 학업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거나, 저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음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에서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한 인식들이 쌓여 이런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이 꼭 저 같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샌델이 책에서 지적하였듯이 사람마다 각자의 경험, 인식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태도가 다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꼭 교육 불평등 이슈가 아니더라도 갖은 차별 이슈에 당사자가 훨씬 더 많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요?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태도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능력주의는 우리에게서 여유를 빼앗아감으로써 그것을 어렵게 한다고 봅니다.
조현호2021-03-18 10:31
글 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제 생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의문점 3에서도 말하셨듯 저 또한 고소득층 자녀가 명문대에 많이 들어간다는 통계 하나만으로 교육제도가 불평등하다고 말하기에는 약간의 비약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조금 더 유리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 노력 등의 부모의 재력보다 더 중요한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을 뿐, 그것 때문에 불평등을 만든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문점 1같은 경우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샌델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운과 불운의 요소가 작용하는 것 때문에 개인의 노력의 성과물로 성공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작위적 요소는 일생 전체를 보고 모든 행운과 불운이 오는 확률을 본다면 거의 동일한 확률로 각 사람에게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저도 이 생각에 덧붙여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사실 행운과 불운의 요소가 온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 자체를 바꾸거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재력있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조금 가난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인데, 이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행운 혹은 약간의 불운이겠지만 그 상황에서 '난 불행하니까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거야'라고 단정짓는 것이 가장 멍청한 짓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게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성공의 확률을 가장 높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문점 3에서도 말하셨듯 저 또한 고소득층 자녀가 명문대에 많이 들어간다는 통계 하나만으로 교육제도가 불평등하다고 말하기에는 약간의 비약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조금 더 유리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맞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 노력 등의 부모의 재력보다 더 중요한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을 뿐, 그것 때문에 불평등을 만든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문점 1같은 경우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샌델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운과 불운의 요소가 작용하는 것 때문에 개인의 노력의 성과물로 성공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작위적 요소는 일생 전체를 보고 모든 행운과 불운이 오는 확률을 본다면 거의 동일한 확률로 각 사람에게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저도 이 생각에 덧붙여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사실 행운과 불운의 요소가 온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것 자체를 바꾸거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재력있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조금 가난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인데, 이것은 그 사람이 타고난 행운 혹은 약간의 불운이겠지만 그 상황에서 '난 불행하니까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거야'라고 단정짓는 것이 가장 멍청한 짓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행운이든 불운이든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게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성공의 확률을 가장 높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강민2021-03-18 12:43
박혜송 학우님께
좋은 지적 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박혜송 학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특히, ''엄밀한 입증'을 해내야만 교육 불평등이 있음을 용인한다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 양상들을 밝혀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구절에서 불평등을 단순히 '수학적 수치'로만 설명하기에는 모델링의 한계로 인해 수학적 수치가 담지 못하는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질적 연구' 역시 통계적 자료를 보완하기 위한 좋은 연구 수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으로 아래에 사회속에 존재하는 여러 변수들(ex. 부모의 연소득)과 다른 변수들은 엄밀히 말해 완전 독립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종속 관계가 있음을 지적해주신 부분 역시 동의합니다.
제 의견을 조금 더 보충하자면, 각 사회는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농어촌, 다문화 전형, 지역균형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혜송 학우님께서 지적해주신, '저소득층의 생활 환경, 생활고로 인한 공부시간의 부족'은 반대로 교육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외에도 교육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요소, 약화하는 요소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요.(하지만, 강화하는 요소가 더 dominant하기 떄문에 인위적인 조정을 통해 불평등을 약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육의 불평등을 약화하는 요인과 강화하는 요인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1류 대학의 고소득층 자녀의 비율'만을 통해 '해당 시점의 교육의 불평등'을 온전히 논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의문점3을 적었습니다. 왜나하면 통계에 반영된 '1류 대학에 진입한 고소득층 자녀는 어찌됐건 '부모의 소득으로 인한 수혜'와 '교육의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한 제도로 인한 불이익'을 둘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즉, 1류 대학 중 고소득층 자녀가 일정 비율 있다는 상황 속에서도 '교육의 불평등이 없거나 그리 크지 않은 사회'는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에(교육의 불평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없거나 적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족한 통계 자료를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박혜송 학우님께서 말해주신 질적 연구로 어느정도의 보완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부모의 연소득'과 다른 사회 변수가 완전 독립이 아님, 즉 어느정도의 종속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의견 자체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종속성이 양의 방향으로 작용할지, 음의 방향으로 작용할지,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즉, 부모의 연소득과 연관있는 다양한 변수들이 박혜송 학우님께서 예를 들어 주셨듯이,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도 있고, 오히려 '교육의 불평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 그중 어느 방향이 dominant한가? 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잣집에 태어난 자녀는 풍족한 생활에 오히려 열심히 공부할 의욕을 잃어 좋은 대학 진학하기를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다른 변수가 '부모의 연소득'에 '완전 종속'혹은 강력한 상관관계에 있는 변수가 아닌이상, 대학진학에 중요한 변수라면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덕분에 많은 내용을 생각할 기회를 얻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좋은 지적 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박혜송 학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특히, ''엄밀한 입증'을 해내야만 교육 불평등이 있음을 용인한다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 양상들을 밝혀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구절에서 불평등을 단순히 '수학적 수치'로만 설명하기에는 모델링의 한계로 인해 수학적 수치가 담지 못하는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질적 연구' 역시 통계적 자료를 보완하기 위한 좋은 연구 수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으로 아래에 사회속에 존재하는 여러 변수들(ex. 부모의 연소득)과 다른 변수들은 엄밀히 말해 완전 독립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종속 관계가 있음을 지적해주신 부분 역시 동의합니다.
제 의견을 조금 더 보충하자면, 각 사회는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농어촌, 다문화 전형, 지역균형 등등) 이러한 요소들은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박혜송 학우님께서 지적해주신, '저소득층의 생활 환경, 생활고로 인한 공부시간의 부족'은 반대로 교육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외에도 교육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요소, 약화하는 요소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요.(하지만, 강화하는 요소가 더 dominant하기 떄문에 인위적인 조정을 통해 불평등을 약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육의 불평등을 약화하는 요인과 강화하는 요인 모두 존재하는 상황에서 '1류 대학의 고소득층 자녀의 비율'만을 통해 '해당 시점의 교육의 불평등'을 온전히 논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의문점3을 적었습니다. 왜나하면 통계에 반영된 '1류 대학에 진입한 고소득층 자녀는 어찌됐건 '부모의 소득으로 인한 수혜'와 '교육의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한 제도로 인한 불이익'을 둘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즉, 1류 대학 중 고소득층 자녀가 일정 비율 있다는 상황 속에서도 '교육의 불평등이 없거나 그리 크지 않은 사회'는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에(교육의 불평등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없거나 적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족한 통계 자료를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박혜송 학우님께서 말해주신 질적 연구로 어느정도의 보완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부모의 연소득'과 다른 사회 변수가 완전 독립이 아님, 즉 어느정도의 종속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의견 자체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종속성이 양의 방향으로 작용할지, 음의 방향으로 작용할지,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즉, 부모의 연소득과 연관있는 다양한 변수들이 박혜송 학우님께서 예를 들어 주셨듯이,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도 있고, 오히려 '교육의 불평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 그중 어느 방향이 dominant한가? 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잣집에 태어난 자녀는 풍족한 생활에 오히려 열심히 공부할 의욕을 잃어 좋은 대학 진학하기를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다른 변수가 '부모의 연소득'에 '완전 종속'혹은 강력한 상관관계에 있는 변수가 아닌이상, 대학진학에 중요한 변수라면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덕분에 많은 내용을 생각할 기회를 얻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김혜민2021-03-18 13:45
책에 등장한 대학 입결 통계자료가 교육제도의 불평등을 입증하기에 부족하다는 의견에는 적극 동의합니다. 하지만, 통계자료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소득이 많은 가정은 자녀에게 금전적 원조는 물론이고, 자녀가 학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투자하는 등 자녀의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나, 학원 등 교육기관이 지역에 편중되는 경향성을 고려하면, 교육특구와 가까운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가정의 자녀가 그렇지 않은 가정의 자녀보다 학업적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은 건 합리적인 결론일 것입니다. 개인의 학습능력은 자가인지능력이 형성된 청소년기의 학습으로서만 발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어린 유년기, 즉 부모의 역할이 큰 시기에 발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 교육에 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고소득층과 그렇지 않은 저소득층의 자녀는 자녀의 개인의 노력에 무관하게 학습능력에서 차이를 가지게 될 확률도 높습니다. 이러한 타당한 근거로 좋은 학교 진학에 있어 저소득층 자녀가 고소득층 자녀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네번째 질문에서 제시해주신 의문점에도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 또한 도서에서 드러난 샌덜의 견해는 다소 이상적인 단계에만 멈춰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 중 토론을 통해서 해결책을 함께 강구해보면 좋을 듯합니다~^ㅁ^
네번째 질문에서 제시해주신 의문점에도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 또한 도서에서 드러난 샌덜의 견해는 다소 이상적인 단계에만 멈춰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 중 토론을 통해서 해결책을 함께 강구해보면 좋을 듯합니다~^ㅁ^
조용수2021-03-16 23:17
고등학교 때쯤, 공부는 유전이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글의 요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똑같은 시간(노력)을 들여서 공부해도 유전적인 요인에 따라 성적이 갈린다는 것과 장시간 의자에 앉아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재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때가 제가 처음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접하게 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이클 샌델은 단순히 이러한 점만을 짚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온 논점들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작가가 능력주의와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나온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가장 주요하게 쓰인 논리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책에서 나와 있듯이, 이는 때때로 경제적 인센티브보다 우선하기도 합니다. 샌델은 이러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모욕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천부적 탁월성’으로 재능을 이해하는 것이 곧 오만과 굴욕을 내포할 수 있다는 구절이 저는 생각지도 못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는 공동선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와 모든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지 않는 겸손한 태도가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책을 끝맺습니다.
저는 작가의 주장에 대해 거의 비판을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사실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러한 부분들에 합의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한다면, 두 가지 다루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공적 합의가 잘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공공선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문제를 해결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임은 동의하나,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절된 사회로 빠져들고 있는 듯합니다. 관심사의 분리와 개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들의 증가로 공통된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의견을 모으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논의를 진행해야 할지, 또 이러한 단절된 사회를 하나로 모으는 좋은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작가는 능력주의가 완벽하게 실행된다고 해도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능력주의를 비판하였지만, 그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가 기억하기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든 구체적인 예시로 금융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이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책에 나오는 ‘경제 시스템이 보상하는 욕구는 대체로 그 시스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구절의 가장 적절한 예시가 금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빅쇼트’의 도입부에 나오듯이, 금융업은 원래 그렇게 돈이 되는 업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택저당채권을 대량으로 묶어 나눠 파는 방식으로 금융업은 고정된 자산을 유동화시키는 기적을 창출해냈고, 이는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모두가 알 듯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했습니다. 금융위기 사태 말고도,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라임 펀드 사태, 옵티머스 펀드 사태를 보면 금융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한다는 인식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금융업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최상위 금융기업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이 정도의 보상이 적절한지, 또 금융업이 그 업종에 걸맞는 도덕성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이클 샌델은 단순히 이러한 점만을 짚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온 논점들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작가가 능력주의와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나온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가장 주요하게 쓰인 논리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책에서 나와 있듯이, 이는 때때로 경제적 인센티브보다 우선하기도 합니다. 샌델은 이러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모욕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천부적 탁월성’으로 재능을 이해하는 것이 곧 오만과 굴욕을 내포할 수 있다는 구절이 저는 생각지도 못했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는 공동선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와 모든 것을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지 않는 겸손한 태도가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책을 끝맺습니다.
저는 작가의 주장에 대해 거의 비판을 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사실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러한 부분들에 합의를 이루어내는데 성공한다면, 두 가지 다루어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공적 합의가 잘 작동할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공공선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문제를 해결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임은 동의하나,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절된 사회로 빠져들고 있는 듯합니다. 관심사의 분리와 개인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들의 증가로 공통된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의견을 모으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논의를 진행해야 할지, 또 이러한 단절된 사회를 하나로 모으는 좋은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작가는 능력주의가 완벽하게 실행된다고 해도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능력주의를 비판하였지만, 그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가 기억하기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든 구체적인 예시로 금융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이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책에 나오는 ‘경제 시스템이 보상하는 욕구는 대체로 그 시스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구절의 가장 적절한 예시가 금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빅쇼트’의 도입부에 나오듯이, 금융업은 원래 그렇게 돈이 되는 업종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주택저당채권을 대량으로 묶어 나눠 파는 방식으로 금융업은 고정된 자산을 유동화시키는 기적을 창출해냈고, 이는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모두가 알 듯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했습니다. 금융위기 사태 말고도,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라임 펀드 사태, 옵티머스 펀드 사태를 보면 금융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한다는 인식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금융업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최상위 금융기업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이 정도의 보상이 적절한지, 또 금융업이 그 업종에 걸맞는 도덕성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강민2021-03-17 00:12
저도 조용수 학우님께서 지적하신 '공적 합의의 작동 가능성' 에 대해 크게 공감합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과 사회적 연대 강화를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했듯이 공적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방법론적으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큰 과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적합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루는 각 '개인'은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공공'이라는 것은 정의하기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법을 거쳐 '공적합의'라는 것을 도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제 공공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는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다음 지적해주신 불평등을 해소하는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이번에 조교님꼐서 참고문헌으로 나눠주신 <왜 부모를 잘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에서는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는 것'라고 답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ex, 연봉, 대학교육)을 적게 얻거나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 나누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봅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과 사회적 연대 강화를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이 주장했듯이 공적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방법론적으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가 큰 과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적합의'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회를 이루는 각 '개인'은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공공'이라는 것은 정의하기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법을 거쳐 '공적합의'라는 것을 도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제 공공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했는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다음 지적해주신 불평등을 해소하는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이번에 조교님꼐서 참고문헌으로 나눠주신 <왜 부모를 잘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에서는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는 것'라고 답을 했는데, '흔히 우리가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ex, 연봉, 대학교육)을 적게 얻거나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 나누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봅니다.
이재용2021-03-17 23:32
글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두번째에서 언급하신 금융 예시에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맞습니다. 조용수님의 말처럼 금융계는 과거 자체적으로 만든 경제 시스템을 완벽하게 실행시키는듯 했지만, 모든 분야의 모든 이들에게 공정히 적용되지 않았고 부를 쌓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위기 때마다 더욱 영향을 받아 결국 대 금융 위기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금융업에 있어 이러한 악순환은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제 코로나 시대를 포함하여 포스트 코로나, 포스트 팬데믹에 있어 국가적 경제 시스템과 금융업의 도덕성은 필수적으로 논해져야 할 주제입니다. 추후 포스트 팬데믹-경제 파트에서 이 부분과 연관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조용수님의 말처럼 금융계는 과거 자체적으로 만든 경제 시스템을 완벽하게 실행시키는듯 했지만, 모든 분야의 모든 이들에게 공정히 적용되지 않았고 부를 쌓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위기 때마다 더욱 영향을 받아 결국 대 금융 위기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금융업에 있어 이러한 악순환은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제 코로나 시대를 포함하여 포스트 코로나, 포스트 팬데믹에 있어 국가적 경제 시스템과 금융업의 도덕성은 필수적으로 논해져야 할 주제입니다. 추후 포스트 팬데믹-경제 파트에서 이 부분과 연관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하연2021-03-18 01:30
용수님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공적 합의의 타결 가능성에 대해 동감합니다. 각 개인마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 정치적 입장 등이 전혀 다른 입장에서 공공선이 추구되려면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상태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사익 추구가 공공선보다 앞설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지의 베일 상태가 실현될 수 없다면 현 상황에서 어떻게 가장 최선의 공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소외되는 이 없이 공공선이 충족될 수 있을지 저도 같이 궁금하네요. 토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고민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공적 합의의 타결 가능성에 대해 동감합니다. 각 개인마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 정치적 입장 등이 전혀 다른 입장에서 공공선이 추구되려면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상태가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사익 추구가 공공선보다 앞설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지의 베일 상태가 실현될 수 없다면 현 상황에서 어떻게 가장 최선의 공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소외되는 이 없이 공공선이 충족될 수 있을지 저도 같이 궁금하네요. 토론의 장에서 함께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고민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채미2021-03-17 00:48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대학 입학 후 고민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여느 사람들과 같이 능력주의가 그다지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오히려 능력주의의 추구로 인해 과거의 계급 사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그것이 진정 공정한 것인가 의심해보게 되었다. 능력주의의 기본 전제를 인정하고 능력은 때때로 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함을 인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유한 가정일수록 부모가 자녀의 교육에 자본을 많이 투자하여 명문대 진학률이 가난한 가정에 비해 높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최대한 부에 의해서 능력이 결정되지 않도록, 모두에게 공정하게 대학 입시제도를 손볼 수 있다. 그에 대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일정 수준을 넘은 학생들 중 랜덤으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대학입시 과정을 돌아보면 합격자와 불합격자 사이에 매우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이 취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대중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제안인지는 의문스럽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전제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이 정당화되고 있는 상황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신분이 세습되었다면 이제는 능력을 가진 자가 새로운 신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정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는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제시한 두 가지 관점 중 어떤 것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같이 토론해보고 싶다. 저자는 능력주의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전자의 경우 롤스의 시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책에서 우리의 성공을 노력만으로 단정하기 어렵고 거기에는 운의 영향도 있다는 언급이 있다. 상세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모두 다른데 사회에서 어떤 재능을 높게 쳐주고 어떤 재능을 쓸모 없게 여기는지는 모두 운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내가 이룬 성취가 모두 나 때문이라고 볼 수 없고 시대와 환경을 잘 타고난 행운아여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좀 겸손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자신의 힘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방지하는 입장에서 종교에 귀의하여 신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뤄낸 성과가 아니라 운의 영역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인정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과연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이 현실성 있는 일일까 싶다. 하지만 이는 이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고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자면 능력주의의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에는 더 이롭다. 재능을 가진 자가 적절한 곳에 배치된다면 효율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따라서 자신이 얻은 부를 불운하게 태어나서 자신만큼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기꺼이 나눠줘야 한다. 책을 읽은 전체적인 소감은 다음과 같다. 일단은 나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책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 저자는 여러 문제들을 지적했지만 해결책의 측면에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각각의 문제를 지적하는 과정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했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이와 같은 의문을 해결하고 싶다.
장연주2021-03-17 11:17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글의 중간에 "저자는 능력주의 자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제 생각을 말해보자면, 샌델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으로,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폭정'입니다. 저도 한글판 제목인 '공정하다는 착각'을 처음 봤을 때,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건가?"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책을 다 읽어보니, 샌델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의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으니까 더 공정한 능력주의를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 연대를 깨뜨리므로 타파해야 한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를 한번에 타파하는 것은 어려우니, 일단은 능력주의를 대체할 시스템을 구축하기보단, '운'의 요소를 더하거나 일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등, 능력주의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샌델의 말처럼 공동선을 추구하고 사회적 유대감을 기르기 위한 담론을 활성화하여 치열하게 논의하고 고민한다면, 언젠가는 능력주의를 대신할 만한 사회 패러다임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지수2021-03-17 12:35
@장연주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채미님께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그 재능을 높게 쳐주는 사회에서 태어나는지의 여부가 운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재능, 상황을 타고나는 것도 운이지만, 부에 의해 재능이 창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부'를 타고난 운에 집중하여 책을 읽었습니다. 따라서 전세계적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요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저도 채미님처럼 처음에는 능력주의의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시적인 부분을 단편적으로 평가하여 재능의 정도를 측정하면 되기에 재능을 평가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복잡한 논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책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같은 결함이 분명한 능력주의를 가지고 가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채미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기꺼이 자신의 부를 나누려 하는 것 역시 책에서 제시된 공공선과 공통된 사회적 연대 감수성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샌델이 제시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상 혹은 기준을 만드는게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어떻게 실현해 나갈것인지를 고민하는게 독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주영2021-03-17 17:2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학생을 선별할 때 합격자를 랜덤으로 선택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받아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서울대병원은 간호사 선발 과정에서 대학을 보지 않는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학벌이 아니라 성적과 면접, 그리고 시험을 통해 채용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른 유명한 대형 병원들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제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공정하다 라고 평가하겠지만 사실 서울대학교 학생의 입장에서 이는 역차별로 적용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서울대학교 출신 삼성병원 간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삼성병원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으로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다"를 뽑았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들어온 소위 지방 대학교 학생들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정수준을 넘는( 입사시험을 통과한) 이들이지만 그 능력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더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여 회사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목표일텐데 이를 제도적으로 막아놓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사례를 들은 상황에서 샌델의 주장을 들으니, 현실적으로 내놓은 그 대안 마저도 명확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저 역시 임채미 학우분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해결책에 대해 책을 더 잘 이해한 다른 학우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학생을 선별할 때 합격자를 랜덤으로 선택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받아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서울대병원은 간호사 선발 과정에서 대학을 보지 않는 이른바 '블라인드 채용'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학벌이 아니라 성적과 면접, 그리고 시험을 통해 채용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른 유명한 대형 병원들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제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공정하다 라고 평가하겠지만 사실 서울대학교 학생의 입장에서 이는 역차별로 적용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서울대학교 출신 삼성병원 간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삼성병원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으로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다"를 뽑았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들어온 소위 지방 대학교 학생들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정수준을 넘는( 입사시험을 통과한) 이들이지만 그 능력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더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여 회사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목표일텐데 이를 제도적으로 막아놓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사례를 들은 상황에서 샌델의 주장을 들으니, 현실적으로 내놓은 그 대안 마저도 명확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저 역시 임채미 학우분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해결책에 대해 책을 더 잘 이해한 다른 학우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양승훈2021-03-18 02:43
과거에는 신분이 세습되었지만 이제는 능력을 가진 자가 새로운 신분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정확하게 이 책에서 샌델이 말하는 바를 짚으신 것 같습니다. 샌델은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요소인 '운'을 집어넣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첫째, 이게 대중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지가 현실성의 첫 번째 장애요소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운'이라는 요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저 '아 이건 나와는 관계없는 그저 감사할 일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가정이 너무 순진해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 사회에서는 크게 각광받지 못했던 능력이 새로운 절대적 기준이 되었던 모습에서와 같이 운이라는 요소가 결정적인 부분이 된다면 (정말 어처구니 없겠지만) 운이 또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 높으신 신분의 양반들이 현재의 우리가 계급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콧대를 높이고 다니는 걸 보면 웃길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는 미래의 사람들이 운이 좋다는 이유로 어깨가 높아지는 걸 상상하기 어렵지만 미래에는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은 어떻게든 위와 아래를 나누려는 경향이 있고 그저 그 큰 본능 속에서 구분선이 되는 패러다임만 바뀌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엘리엇2021-03-17 02:59
TV 프로그램 유퀴즈를 보면, MC인 유재석과 조세호가 역경을 이겨내고 실력을 갈고 닦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게스트들을 높여주고 찬양하다시피 하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은 그렇지 못한 척 자기비하 개그를 하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줍니다. 서울대생도 이 프로그램의 단골 게스트입니다. MC들의 그러한 말과 행동을 보며 묘한 불편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게스트에 대한 경의를 표하려 한 행동임을 알지만, 사회적으로 만연한 여러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느낌에 거북하였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인정’은 대개 예쁜 말 속에 담겨있어서, 그것이 반대로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특히 필자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좋은 능력을 인정받은 경험이 많을 테니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샌델은 책에서 여러 사례를 보이며 숨어있는 능력주의를 풀어내고, 그것이 가진 문제를 역설합니다. 평소 관심이 있어 번역본도 찾아보았던 롤스의 정의론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정의론에 따르면 성별, 인종, 장애여부, 성적지향, 지능 등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선천적 요인들을 배제한 채 최소수혜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합리적을 넘어 당연한 아이디어로 보입니다. 후천적이라고 여기기 쉬운 노력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더 노력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지 않냐”며 반박하던 당돌함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롤스의 사상도, 시작점을 동일하게 만드는 점이 오히려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무겁게 하도록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패자의 굴욕적 감정까지 수반한다는 사실에서, 능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샌델은 ‘기회의 평등’의 대안으로서 ‘공동선’을 제시합니다. 좋은 삶과 공공의 문제들에 대한 숙의를 바탕으로, 도덕적 참여의 정치가 각 개인이 삶에 대한 존엄감을 잃지 않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그림이지만, 그의 다른 저서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공동체주의적 해결책에 대한 막막함은 여전합니다. 특히나 결과적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당장의 생계가 급한 사람들에게 공동선과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정된 생활과 바른 마음을 지닐 여유의 관계를 설명한 맹자의 항산항심(恒産恒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샌델의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현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할 줄 아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의 마땅한 대안책을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지 않는 이상, 능력주의와 우리의 삶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능력주의가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백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성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뻔한 답이라기엔,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적절한 해결책도 못 가져온다는 핑계로 논의를 회피하며, 자신의 능력을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샌델은 책에서 여러 사례를 보이며 숨어있는 능력주의를 풀어내고, 그것이 가진 문제를 역설합니다. 평소 관심이 있어 번역본도 찾아보았던 롤스의 정의론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게 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정의론에 따르면 성별, 인종, 장애여부, 성적지향, 지능 등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선천적 요인들을 배제한 채 최소수혜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합리적을 넘어 당연한 아이디어로 보입니다. 후천적이라고 여기기 쉬운 노력에 대해서도, “조금이라도 더 노력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지 않냐”며 반박하던 당돌함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롤스의 사상도, 시작점을 동일하게 만드는 점이 오히려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무겁게 하도록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패자의 굴욕적 감정까지 수반한다는 사실에서, 능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샌델은 ‘기회의 평등’의 대안으로서 ‘공동선’을 제시합니다. 좋은 삶과 공공의 문제들에 대한 숙의를 바탕으로, 도덕적 참여의 정치가 각 개인이 삶에 대한 존엄감을 잃지 않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그림이지만, 그의 다른 저서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공동체주의적 해결책에 대한 막막함은 여전합니다. 특히나 결과적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당장의 생계가 급한 사람들에게 공동선과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정된 생활과 바른 마음을 지닐 여유의 관계를 설명한 맹자의 항산항심(恒産恒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샌델의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현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할 줄 아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의 마땅한 대안책을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결과의 평등을 강제하지 않는 이상, 능력주의와 우리의 삶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능력주의가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백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성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뻔한 답이라기엔,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적절한 해결책도 못 가져온다는 핑계로 논의를 회피하며, 자신의 능력을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장연주2021-03-17 10:55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유퀴즈 애청자 중 한 명으로서 불편함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는데요. 엘리엇님이 지적해주신 서울대 편 뿐만 아니라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소위 '성공'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인터뷰 역시 은연 중에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장치 중 하나로 작동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특강과 관련해서 첨부된 논문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 공유합니다. "물론 교육을 통해 사회구조에서 상승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극소수다. 그들은 기본적인 변화를 시사하는 것도 아니고 계급관계 구조의 내재적 신축성을 시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르디외가 보기엔 극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교육적 성취를 통한 사회적 이동성은 그 홍보 효과로 사회적 안정에 기여할 뿐이다." 즉, 극소수의 성공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능력주의가 작동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거봐, 저 사람도 저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노력하니까 됐잖아. 결국 다 의지의 문제라니까"라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취약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능력주의를 완화/타파할 만한 현실적인 대안이 무엇일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능력주의에 대한 해결책은 다 비현실적이야"라고 단정짓는 것은 능력주의 시스템의 덕을 본 사람들의 무책임한 외침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렵더라도 고민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공적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서강민2021-03-17 17:11
전체적으로 공감하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결과적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당장의 생계가 급한 사람들에게 공동선과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 구절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공동선이나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의견까지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모두가 만족할만한 적당한 해결책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것같습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그저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반성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실제 능력주의로 인한 최소수혜자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합리적 대안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결과적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당장의 생계가 급한 사람들에게 공동선과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 구절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공동선이나 공적 가치에 대한 토론'이 허울 좋은 소리에 불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의견까지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모두가 만족할만한 적당한 해결책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것같습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그저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반성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실제 능력주의로 인한 최소수혜자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합리적 대안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조현호2021-03-18 10:49
글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며 결국 센댈이 말하는 공동체주의적 해결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센댈이 기회의 평등의 대한으로 제시한 공동선과 언제 실현 가능할지 모르는 공동체주의의 이상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샌델도 능력주의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능력주의가 우리 삶과 매우 밀접함을 뜻한다는 부분이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정말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금 현재 가장 효율적인 장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샌델의 충분히 날카로운 지적은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문제점을 상쇄시키거나 감수할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정말 많은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지금 현재 가장 효율적인 장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샌델의 충분히 날카로운 지적은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문제점을 상쇄시키거나 감수할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리라2021-03-17 09:52
한국의 많은 사람은 ‘같은 조건’에서 치르는 ‘수능’은 공정하며, ‘자사고’는 뛰어난 학생들을 위해 필요한 교육 기관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를 저자의 주장에 대입해보면 위 제도는 인재 선별기로써 통과자들이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 과정을 거쳐 정당하게 성취한 결과라고 믿게 만드는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더 큰 문제는 공적 담론이 형성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림막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교육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학습자들이 어울리며 서로에게 배우는 과정 역시 포함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능력’에 따라 구분하고 공부를 잘한다고 여겨지는 학교에 가지 못한 학생들은 패자의 모욕감에 휩싸이게 만든다면 교육의 의미는 퇴색되는 것 아닐까요? 능력의 지표로 여겨지는 성적-이것이 진정한 능력인지에 대해서도 따져보아야겠지만-에 따라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어울리게 해야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과정이 있어야 서로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동정적·시혜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협력의 자세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저자가 언급한 ‘불운의 선별 작업’에 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능력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에 공적 부조를 하기 전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불운’ 때문인지, 혹은 이들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인지 분류한 후 ‘불운’에 의한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불운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작업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I, Daniel Blake”와 같은 사례를 보면 어디까지가 불운인지, 어디까지가 개인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영역인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하며 자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세력이 불운 선별을 담당하고 책임지는지에 따라 도움을 받는 것 자체 역시 ‘운’에 따라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통제 불가능한 조건에 대해서도 등급을 매겨 차등적 지원을 하던 ‘장애 등급제’는 ‘불운의 선별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을 다시금 불운의 ‘크기’ 선별 과정을 겪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불운을 증명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에게 모욕감과 수치심을 안기기도 하며, 아무리 불운이라고 해도 선별 기관에서 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습니다. 즉, 불운의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의한 실패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여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자가 지적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점 대부분 동의하지만, 제시된 해결책이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공적 담론을 통해 공동선을 회복하여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과정은 지극히 이론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회적 연대가 실현 가능한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저는 연대가 지금까지 기득권을 형성한 ‘엘리트’들에게 단순히 무언가를 ‘베푼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같은 위치에서 손을 맞잡는다는 개념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인정 가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인보다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요소를 스스로 내려놓고 모두와 공유할 수 있을지, 정치의 영역에서 ‘도움을 준다’, ‘베푼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면서 논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가 상대적으로 약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저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가 자본주의의 발달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적 사고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 혹은 이념이 지배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공동체에서는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또한, 저는 저자가 언급한 ‘불운의 선별 작업’에 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능력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에 공적 부조를 하기 전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불운’ 때문인지, 혹은 이들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인지 분류한 후 ‘불운’에 의한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불운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작업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I, Daniel Blake”와 같은 사례를 보면 어디까지가 불운인지, 어디까지가 개인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영역인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하며 자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세력이 불운 선별을 담당하고 책임지는지에 따라 도움을 받는 것 자체 역시 ‘운’에 따라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통제 불가능한 조건에 대해서도 등급을 매겨 차등적 지원을 하던 ‘장애 등급제’는 ‘불운의 선별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을 다시금 불운의 ‘크기’ 선별 과정을 겪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불운을 증명하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에게 모욕감과 수치심을 안기기도 하며, 아무리 불운이라고 해도 선별 기관에서 믿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쉽습니다. 즉, 불운의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의한 실패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마련하여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자가 지적하는 능력주의의 문제점 대부분 동의하지만, 제시된 해결책이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공적 담론을 통해 공동선을 회복하여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과정은 지극히 이론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회적 연대가 실현 가능한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저는 연대가 지금까지 기득권을 형성한 ‘엘리트’들에게 단순히 무언가를 ‘베푼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같은 위치에서 손을 맞잡는다는 개념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인정 가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인보다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요소를 스스로 내려놓고 모두와 공유할 수 있을지, 정치의 영역에서 ‘도움을 준다’, ‘베푼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면서 논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가 상대적으로 약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는 능력주의가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저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가 자본주의의 발달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적 사고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달리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 혹은 이념이 지배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공동체에서는 본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엘리엇2021-03-17 10:45
박리라 학우님의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을 읽으며 태국의 민주화 시위가 떠올랐습니다. 태국은 국민의 95%가 불교 신자이고, 국왕도 불교 수행을 거쳐야 즉위를 할 만큼 불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나라입니다. 19번의 군사 쿠데타와 왕실의 부패와 횡포,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도 대다수 기성세대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윤회사상이 저항의식을 무력화시켰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정보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저항세력이 형성되어 반정부 시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세대간 갈등까지 심각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사례를 본다면 공동체의 가치관에 종교가 꽤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서구화로서의 세계화가 가속되었던 역사를 고려할 때,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관련된 능력주의의 양상이 각 지역의 이념을 막론하고 널리 퍼졌다는 사실에는 공감합니다.
마지막에 던지신 질문을 읽으며 태국의 민주화 시위가 떠올랐습니다. 태국은 국민의 95%가 불교 신자이고, 국왕도 불교 수행을 거쳐야 즉위를 할 만큼 불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나라입니다. 19번의 군사 쿠데타와 왕실의 부패와 횡포,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도 대다수 기성세대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윤회사상이 저항의식을 무력화시켰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정보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저항세력이 형성되어 반정부 시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세대간 갈등까지 심각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사례를 본다면 공동체의 가치관에 종교가 꽤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서구화로서의 세계화가 가속되었던 역사를 고려할 때,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관련된 능력주의의 양상이 각 지역의 이념을 막론하고 널리 퍼졌다는 사실에는 공감합니다.
문지수2021-03-17 13:14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처음에 제시하신 논의에서 '교육'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능력주의는 교육의 의미 역시 퇴색시킨다는 점을 짚어주셨고, 여기에 공감합니다. 사회적 연대의 개념 정의 역시 생각할 거리를 제시해주신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리라님께서 제시하신 논의에서 살짝 벗어난 것 같지만, 저는 프랑스의 교육을 하나의 사례로 들고 싶습니다. 프랑스 교육 체계가 엘리트주의, 즉 능력주의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고등교육이 이원화 되어있어 일반적인 university와 엘리트들을 위한 그랑제콜이 존재합니다. 그랑제콜은 소수 정예 교육기관으로, 우리가 프랑스 지식인을 떠올렸을 때 거론되는 인물들 대부분, 예를 들면 프랑스 대통령들은 거의 그랑제콜 출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한국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문제처럼, 집안이 유복하고 부모의 학력수준이 높은 아이들이 그랑제콜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적 권력의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중에 그랑제콜 학생의 비율은 4%정도이지만, 그랑제콜을 위해 사용되는 예산은 고등교육에 사용되는 예산 중 30%정도라고 합니다. 사회가 나서서 엘리트를 챙기려는 듯한 이 체계는 제게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뿐만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능력주의가 팽배한 교육체계가 계속되는 이상, 학생들은 이를 학습하며 자라 어른이 될 것이고, 이미 실현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사회적 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성되기 어려워보입니다.
장연주2021-03-17 16:25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리라님은 사회적 연대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리라님은 사회적 연대와 같은 자발적 방안보다는 법/제도 등을 통한 강제적 방안이 능력주의 문제의 해결에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연대'라는 것이 꼭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끼리만 형성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서울대 학생들이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분들과 연대하여 그분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두 집단이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빚진 존재이며, 상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공유된 의식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의식이 확산된다면 '연대'라는 개념이 기득권층의 일방적인 '베풂'과 그로 인한 특권의식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사회에 확산시키는 장치가 바로 공적 담론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공적 담론을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권력에 대해선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연대는 비록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일지라도 포기해버려선 안 될 요소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7 17:16
서바이벌 방식은 가장 비교육적이라는 말이 있죠. 우리 사회는 교육을 위해서 교육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인재를 선별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김하연2021-03-18 01:03
@윤재빈
재빈님 댓글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인격이 갖춰지는 청소년기에 인성, 진로 및 사회를 살아나가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 등 교육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데, 현재는 입시와 서열화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대부분인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 협동, 협력보다는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게 놓이는 것이 학력주의, 능력주의가 낳은 개인주의의 결과물인 것 같아서 씁쓸하네요... 좋은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장연주2021-03-17 10:26
셰이머스 라만 칸은 그의 저작 <특권>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곳(세인트폴) 학생들은 계속해서 최고 중의 최고라는 말을 듣는데, 왜 그 최고 중의 대다수는 부유층 출신인가?”
사람을 타고난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오직 능력으로만 평가하겠다는 능력주의의 첫발은 꽤 이상적이고 정의로워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능력과 부의 수준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해소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해져만 갔다. 가령 지난 50년간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생들은 인종적으로는 다양해졌지만, 경제적으로는 획일화되었다. 능력주의는 능력을 압도하는 ‘비능력적’ 요인들–차별적 교육기회,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편견에 의한 차별, 부의 세습, 좋은 부모 노릇 등–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유리천장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리바닥을 만들어줌으로써 불평등을 유지·심화시키고 있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사회 연대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사람을 ‘승리자(능력자)’와 ‘패배자(무능력자)’로 나눈 후, ‘승리자’에게는 경제적 보상과 더불어 사회적 명망을, ‘패배자’에게는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 도덕적 비난을 안긴다. ‘승리자’가 승리한 이유는 능력 있기 때문이고, ‘패배자’가 패배한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서사와 맥락은 사라진 채,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조차 어려운 ‘능력’이라는 개념만 덩그러니 남은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인생의 모든 선택과 결과를 개인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로 짐 지우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책하며 높은 우울감과 불안함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유대감과 공동선에 대한 숙의 모두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선별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도덕적 비난을 정당화하고 사회 연대를 약화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능력주의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능력주의의 폐해 속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방식으로 멸시는 합리화·되풀이된다. 그리고 이는 사회 연대를 더 약화하는 악순환의 결과를 낳게 된다.
샌델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능력주의 깨뜨리기’이고, 하나는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이다. ‘능력주의 깨뜨리기’는 선발 과정에서 ‘운’의 요소를 더하는 것으로, 샌델은 대학입시 과정에서 1차는 서류로, 2차는 제비뽑기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대입의 결과가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라는 부담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의 내용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조세 정책의 개선이었다. 한 나라의 법과 정책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하는 가시적 장치 중 하나다. 미국의 경우 급여소득 세율이 금융소득 세율보다 높은데, 샌델은 이것이 미국의 일의 존엄성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 본다. 즉, 미국은 ‘근로’보다 ‘금융사업’을 더 가치 있게 본다는 것이다. 금융으로 인해 증가한 자본의 15%만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통계자료를 근거로, 샌델은 경제에 이바지하지 않는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은 높이고,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은 없애거나 아주 많이 낮춤으로써 일의 존엄성 회복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대안 모두 현실에 적용하기 전 선결돼야 할 문제들이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안이 구체적일수록 담론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능력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문제를 초래하고 있는지, 비능력적 요인들로 인한 특권의 규모를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린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논의함으로써 능력주의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사람을 타고난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오직 능력으로만 평가하겠다는 능력주의의 첫발은 꽤 이상적이고 정의로워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능력과 부의 수준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능력주의가 불평등의 해소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해져만 갔다. 가령 지난 50년간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생들은 인종적으로는 다양해졌지만, 경제적으로는 획일화되었다. 능력주의는 능력을 압도하는 ‘비능력적’ 요인들–차별적 교육기회,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편견에 의한 차별, 부의 세습, 좋은 부모 노릇 등–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유리천장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리바닥을 만들어줌으로써 불평등을 유지·심화시키고 있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사회 연대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사람을 ‘승리자(능력자)’와 ‘패배자(무능력자)’로 나눈 후, ‘승리자’에게는 경제적 보상과 더불어 사회적 명망을, ‘패배자’에게는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 도덕적 비난을 안긴다. ‘승리자’가 승리한 이유는 능력 있기 때문이고, ‘패배자’가 패배한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서사와 맥락은 사라진 채,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조차 어려운 ‘능력’이라는 개념만 덩그러니 남은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인생의 모든 선택과 결과를 개인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로 짐 지우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책하며 높은 우울감과 불안함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유대감과 공동선에 대한 숙의 모두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선별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도덕적 비난을 정당화하고 사회 연대를 약화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능력주의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능력주의의 폐해 속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방식으로 멸시는 합리화·되풀이된다. 그리고 이는 사회 연대를 더 약화하는 악순환의 결과를 낳게 된다.
샌델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능력주의 깨뜨리기’이고, 하나는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이다. ‘능력주의 깨뜨리기’는 선발 과정에서 ‘운’의 요소를 더하는 것으로, 샌델은 대학입시 과정에서 1차는 서류로, 2차는 제비뽑기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대입의 결과가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라는 부담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의 내용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조세 정책의 개선이었다. 한 나라의 법과 정책은 그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하는 가시적 장치 중 하나다. 미국의 경우 급여소득 세율이 금융소득 세율보다 높은데, 샌델은 이것이 미국의 일의 존엄성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 본다. 즉, 미국은 ‘근로’보다 ‘금융사업’을 더 가치 있게 본다는 것이다. 금융으로 인해 증가한 자본의 15%만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통계자료를 근거로, 샌델은 경제에 이바지하지 않는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은 높이고,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은 없애거나 아주 많이 낮춤으로써 일의 존엄성 회복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대안 모두 현실에 적용하기 전 선결돼야 할 문제들이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현실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안이 구체적일수록 담론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능력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문제를 초래하고 있는지, 비능력적 요인들로 인한 특권의 규모를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린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논의함으로써 능력주의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윤서영2021-03-17 14:29
연주 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첫머리에 인용하신 문장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주의가 각종 비능력적 요인의 영향과 결부되어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을 고착화한다는 점에 경종을 울리며 눈길을 끄는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능력주의의 폭정에 대응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쓰신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책 내용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책에서 능력주의의 대표적 병폐로서의 완벽주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불안과 강박을 제시한 부분이 떠올랐는데요.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해보면 능력주의는 교육, 고용, 정치, 경제 분야에 침투해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결국 우리의 사고방식 및 일상생활과 직결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급해주신 것처럼 각자 자기 자신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모습과 지향점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능력주의의 현 문제점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힌트를 얻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첫머리에 인용하신 문장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주의가 각종 비능력적 요인의 영향과 결부되어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을 고착화한다는 점에 경종을 울리며 눈길을 끄는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능력주의의 폭정에 대응할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쓰신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책 내용에 대한 생각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책에서 능력주의의 대표적 병폐로서의 완벽주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불안과 강박을 제시한 부분이 떠올랐는데요. 이런 점을 두루 고려해보면 능력주의는 교육, 고용, 정치, 경제 분야에 침투해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결국 우리의 사고방식 및 일상생활과 직결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급해주신 것처럼 각자 자기 자신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모습과 지향점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능력주의의 현 문제점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힌트를 얻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7 14:38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능력주의 하에서 개인의 삶이 사라진다는 부분에 동감합니다.
대부분의 논의는 능력주의 사회의 교육 제도가 공정한가 아닌가와 같이 내부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한 차원 넘어서, 능력주의 자체가 정당한가, 가령 한 인간의 삶을 특정한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한 발짝 떨어져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능력주의라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차별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준을 정해놓고 서열화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사회 다양성은 줄어들고, 유대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능력주의 하에서 개인의 삶이 사라진다는 부분에 동감합니다.
대부분의 논의는 능력주의 사회의 교육 제도가 공정한가 아닌가와 같이 내부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한 차원 넘어서, 능력주의 자체가 정당한가, 가령 한 인간의 삶을 특정한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한 발짝 떨어져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능력주의라는 것이 개개인의 고유한 차별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준을 정해놓고 서열화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사회 다양성은 줄어들고, 유대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주영2021-03-17 17:43
글 잘 읽었습니다.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하고 싶은데, 이러한 불평등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고 현대의 신분제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학교 사회 시간에는 계층이동이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현실에서는 아주 힘든 일이라는 점과 그런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없다는 점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초기 교육 환경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이런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의 존재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고 해결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 부분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공유하자면,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이 금융사업에 대한 세율보다 높다는 점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을 높이고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을 낮추는 것이 과연 정당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금융사업이 행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이 높아짐에 따라 줄어드는 유동자본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축소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은 결국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쪽에 대한 제제가 다른 시장에 미칠 여파에 대해 미리 대안을 만들어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하였습니다.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표하고 싶은데, 이러한 불평등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고 현대의 신분제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학교 사회 시간에는 계층이동이 충분히 가능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현실에서는 아주 힘든 일이라는 점과 그런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없다는 점이 아쉬운 것 같습니다. 초기 교육 환경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이런 유리천장과 유리바닥의 존재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고 해결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의 존엄성 회복하기 부분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공유하자면,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이 금융사업에 대한 세율보다 높다는 점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을 높이고 근로소득에 대한 세율을 낮추는 것이 과연 정당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금융사업이 행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금융소득에 대한 세율이 높아짐에 따라 줄어드는 유동자본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축소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금융시장과 노동시장은 결국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쪽에 대한 제제가 다른 시장에 미칠 여파에 대해 미리 대안을 만들어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하였습니다.
박건규2021-03-18 00:01
글 내용 중에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 사회적 연대가 깨진다는 점을 지적해 주셨는데, (장연주님의 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 전에 코로나 시대의 교육에 관한 책을 읽다가 관련지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아 올려봅니다. 중등교사 조영선은 공교육의 가장 큰 존재 이유로 ‘평가’를 꼽으며 코로나 시대 속에서의 등교 개학을 비판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이렇듯 현재의 공교육은 ‘평가’로 대다수의 학생들이 패자가 되는 시스템이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 간의 우정, 학교생활의 추억 등을 쌓을 수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등교에서는 솔직히 학생들이 추억을 쌓고 우정을 곱씹을 수 있는 활동은 대부분 ‘금지’되었다. ...(중략)... 즉 친구들과 이야기하러 학교에 가는데 바로 그 행동이 금지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개학인가?’라는 항의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코로나19 이전의 학교를 생각하며 막연히 학교를 그리워했지만, 막상 돌아온 학교는 이전의 학교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 아닐까? 원래 평가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에게 친구들과의 관계라도 남기던 학교는 이제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한국에서도 능력주의로 인해 평가가 특히 대두되었을 텐데, 이 체제는 수많은 ‘패배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적어도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학생들은 친구관계를 통해 서로 연대할 수 있었겠지만, 코로나 이후 학생들은 다들 흩어진 채로 경쟁에만 참여하면서 연대할 길을 잃어버린 셈이 된 것이겠죠. 제가 인용한 글의 필자가 어떤 관계(혹은 연대)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의 연대는 물론, 승리자 간/패배자 간의 연대마저도 붕괴된 것이 바로 코로나 사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이미 쉽게 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같은 계층끼리도 연대하지 못하는, 더 큰 사회적 단절과 각자도생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고
[1]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36-38쪽.
“이렇듯 현재의 공교육은 ‘평가’로 대다수의 학생들이 패자가 되는 시스템이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 간의 우정, 학교생활의 추억 등을 쌓을 수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등교에서는 솔직히 학생들이 추억을 쌓고 우정을 곱씹을 수 있는 활동은 대부분 ‘금지’되었다. ...(중략)... 즉 친구들과 이야기하러 학교에 가는데 바로 그 행동이 금지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개학인가?’라는 항의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코로나19 이전의 학교를 생각하며 막연히 학교를 그리워했지만, 막상 돌아온 학교는 이전의 학교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 아닐까? 원래 평가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에게 친구들과의 관계라도 남기던 학교는 이제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 이전에도 한국에서도 능력주의로 인해 평가가 특히 대두되었을 텐데, 이 체제는 수많은 ‘패배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적어도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학생들은 친구관계를 통해 서로 연대할 수 있었겠지만, 코로나 이후 학생들은 다들 흩어진 채로 경쟁에만 참여하면서 연대할 길을 잃어버린 셈이 된 것이겠죠. 제가 인용한 글의 필자가 어떤 관계(혹은 연대)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승리자와 패배자 사이의 연대는 물론, 승리자 간/패배자 간의 연대마저도 붕괴된 것이 바로 코로나 사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이미 쉽게 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같은 계층끼리도 연대하지 못하는, 더 큰 사회적 단절과 각자도생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참고
[1]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36-38쪽.
박지유2021-03-18 13:0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능력주의가 가져다주는 패배감과 굴욕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본인이 당한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며 악순환을 되풀이한다는 통찰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한편으론 엘리트를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스스로가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상당히 모순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은 문제제기 차원에서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와 관련하여 샌델은 금융소득과 근로소득 간의 격차를 이야기하며 세율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경제학적인 쟁점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인정’, 사회적 기여도의 관점에서 풀어내 매우 설득력 있게 자가왔습니다. ‘유능력자 제비뽑기’와 같은 해결책 역시 구체적인 정책적 보완은 필요하겠지만 그 방향성에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은 문제제기 차원에서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와 관련하여 샌델은 금융소득과 근로소득 간의 격차를 이야기하며 세율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경제학적인 쟁점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인정’, 사회적 기여도의 관점에서 풀어내 매우 설득력 있게 자가왔습니다. ‘유능력자 제비뽑기’와 같은 해결책 역시 구체적인 정책적 보완은 필요하겠지만 그 방향성에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채수형2021-03-17 11:32
현재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이며, 그 ‘능력’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첫 관문은 ‘대학’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명문 대학교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며, 이러한 상황을 증명해주듯이 최근에는 대학교 입시를 주제로 한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어떠한 사람들은 부의 대물림, 계급의 대물림이 지속되었던 과거와 달리 개인의 능력을 토대로 사회적 이동이 유연해진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에 찬성을 하는 반면, 일각에서는 능력주의가 옳지만은 않다면서 부정적 입장을 표하기도 한다. 본 책에서는 이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라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면서 능력주의를 극복하는 사회를 기대한다. 자유시장 자유주의에서는 내가 가진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도덕적 문제도 아닌 행운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복지국가 자유주의에서는 재능의 차이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며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다. 이러한 두 입장은 능력만이 척도라고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대안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능력주의만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넘어서 조건의 평등을 추구해야 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불평등을 극복해 나가는 건강한 방법임을 제시한다.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생각해본 내용은 책 자체의 주제인, ‘능력주의가 옳기만 한 것일까?’였다. 일단 결론을 말하자면 능력주의 자체가 완전히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교만이 능력주의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다. 능력주의를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생기는데,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가 측정하는 능력지표의 기준이 ‘돈’. ‘연봉’에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돈에 있기 때문에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능력주의라는 대안에서도 돈을 얼마 버느냐가 능력에 직결된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책에서 여러 문제점으로 직결된다. 첫 째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능력주의가 되물림 된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부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능력주의라는 대안이 대두되기 전과 다를 것 없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 될 것이고 이는 세대를 거칠수록 심화될 것이다. 또한 급여에 따라 직업 자체의 가치가 매겨진다. 책의 사례를 가져와 보자면, 마약판매범이 받는 급여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받는 급여보다 훨씬 많지만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가치에 대한 딜레마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책에서 제시된 것처럼 일에 대한 존엄성 및 사회적인 연대를 확보해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가장 첫 번째로는 능력주의의 지표가 ‘돈’, ‘연봉’이 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환과 시민의식의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함께 토의해볼 필요가 있다.
글을 읽으면서 동시에 생각해본 내용은 책 자체의 주제인, ‘능력주의가 옳기만 한 것일까?’였다. 일단 결론을 말하자면 능력주의 자체가 완전히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학교만이 능력주의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다. 능력주의를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생기는데,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가 측정하는 능력지표의 기준이 ‘돈’. ‘연봉’에만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돈에 있기 때문에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능력주의라는 대안에서도 돈을 얼마 버느냐가 능력에 직결된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책에서 여러 문제점으로 직결된다. 첫 째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능력주의가 되물림 된다는 것이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가 부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능력주의라는 대안이 대두되기 전과 다를 것 없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 될 것이고 이는 세대를 거칠수록 심화될 것이다. 또한 급여에 따라 직업 자체의 가치가 매겨진다. 책의 사례를 가져와 보자면, 마약판매범이 받는 급여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받는 급여보다 훨씬 많지만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가치에 대한 딜레마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책에서 제시된 것처럼 일에 대한 존엄성 및 사회적인 연대를 확보해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가장 첫 번째로는 능력주의의 지표가 ‘돈’, ‘연봉’이 된다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환과 시민의식의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함께 토의해볼 필요가 있다.
최민정2021-03-17 18:17
수형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샌델이 미국인과 유럽인이 사회에서 지배적 사회 이동성 경향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한 점을 지적하며, "개인의 노력이 갖는 힘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심을 불평등을 참아내기 힘들게 했으며, 그와 함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도록 했다."(133쪽)고 말한 지점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국은 여전히 불평등한 면모가 많습니다. 그러나, 16년 촛불 시위에서 혹은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할 수 있듯이, 능력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공동체가 사회를 공정하게 갈고 닦고자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기 시작하는 등의 시민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코로나19로 인해 어느 가정은 교육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가정은 온라인 수업에 참여할 기기와 공간 등의 여건이 부족한 상황 등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불공정성에 대해 앞으로 함께 논의해가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고맙습니다!
샌델이 미국인과 유럽인이 사회에서 지배적 사회 이동성 경향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한 점을 지적하며, "개인의 노력이 갖는 힘에 대한 유럽인들의 의심을 불평등을 참아내기 힘들게 했으며, 그와 함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도록 했다."(133쪽)고 말한 지점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국은 여전히 불평등한 면모가 많습니다. 그러나, 16년 촛불 시위에서 혹은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할 수 있듯이, 능력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공동체가 사회를 공정하게 갈고 닦고자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기 시작하는 등의 시민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코로나19로 인해 어느 가정은 교육에 있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가정은 온라인 수업에 참여할 기기와 공간 등의 여건이 부족한 상황 등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불공정성에 대해 앞으로 함께 논의해가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고맙습니다!
김하연2021-03-18 01:20
수형 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에서 다루어주신 대로, 능력주의의 지표는 '돈'과 '연봉', 학력주의의 지표는 '성적'과 '대학 타이틀', 이렇게 단순 수치만으로 가치가 평가되는 것이 씁쓸하네요. 현재 의치대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어쩌면 전문직이 갖는 고소득과 사회적 인정의 메리트도 한 몫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에서 다루어주신 대로, 능력주의의 지표는 '돈'과 '연봉', 학력주의의 지표는 '성적'과 '대학 타이틀', 이렇게 단순 수치만으로 가치가 평가되는 것이 씁쓸하네요. 현재 의치대 쏠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어쩌면 전문직이 갖는 고소득과 사회적 인정의 메리트도 한 몫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서림2021-03-18 10:23
안녕하세요, 수형 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논의하고 싶었던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생각해본 방향성과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글이어서 인상 깊었습니다. 학력이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는 중이라 여기고, 또한 그것이 옳은 것이리라 믿는 쪽인데요 학력 그 자체보다는 대학교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지가 결정되는 양상이라고 생각해요. 직업, 연봉이 개인의 삶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지표로 여겨지는 것이 우선적 문제라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금융감독원의 채용 비리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었기에 나를 평가해도 괜찮다고 합의했던 시스템이 실은 조작된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에 오는 배신감일텐데요. 실은 굵직한 채용 비리 사건들에 깔려 있는 것이 하나 같이 대물림의 문제와 결국 사회에서 직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와 관련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회는 오히려 직업, 연봉보다 오직 돈 하나만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든 것보다는 편한 것이 좋고 현대사회에서 편한 생활이란 돈이 보장되는 삶을 의미하니깐요. 이에 관해서는, 직업과 인정의 논의에서 샌델은 노동의 진실한 가치를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현실성 있는 이론인가의 문제를 배제하면 그러한 논의의 뼈대를 이루는, 결국 잣대가 무엇이든 성패를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오만과 굴욕감이 파생하며 갈등이 팽배해지는 것이 분명하므로,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하기 싫고 놀고 먹고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중에도 일이 끝난 후에도 계속 평가받는 것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내가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오히려 살아있는 순간 다양성을 추구하며 살 것 같다는 생각 들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은 소득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비롯한 문제에 대해 현재는 '어떤 노동이든 돈만 많이 벌면 되지' 또는 '아무것도 안하고 돈 버는 게 최고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점인 것 같구요
제가 논의하고 싶었던 문제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생각해본 방향성과 유사하다고 느껴지는 글이어서 인상 깊었습니다. 학력이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는 중이라 여기고, 또한 그것이 옳은 것이리라 믿는 쪽인데요 학력 그 자체보다는 대학교에서 보여준 능력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지가 결정되는 양상이라고 생각해요. 직업, 연봉이 개인의 삶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지표로 여겨지는 것이 우선적 문제라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금융감독원의 채용 비리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믿었기에 나를 평가해도 괜찮다고 합의했던 시스템이 실은 조작된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에 오는 배신감일텐데요. 실은 굵직한 채용 비리 사건들에 깔려 있는 것이 하나 같이 대물림의 문제와 결국 사회에서 직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와 관련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회는 오히려 직업, 연봉보다 오직 돈 하나만 맹목적으로 좇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든 것보다는 편한 것이 좋고 현대사회에서 편한 생활이란 돈이 보장되는 삶을 의미하니깐요. 이에 관해서는, 직업과 인정의 논의에서 샌델은 노동의 진실한 가치를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것이 현실성 있는 이론인가의 문제를 배제하면 그러한 논의의 뼈대를 이루는, 결국 잣대가 무엇이든 성패를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오만과 굴욕감이 파생하며 갈등이 팽배해지는 것이 분명하므로, 유효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하기 싫고 놀고 먹고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중에도 일이 끝난 후에도 계속 평가받는 것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내가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오히려 살아있는 순간 다양성을 추구하며 살 것 같다는 생각 들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은 소득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편적인 관점에서 비롯한 문제에 대해 현재는 '어떤 노동이든 돈만 많이 벌면 되지' 또는 '아무것도 안하고 돈 버는 게 최고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점인 것 같구요
윤서영2021-03-17 13:57
이번 읽기 자료를 통해 기존에 제가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생각을 재고해볼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능력주의 자체의 공정함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사회적 계층 이동성의 붕괴, 세습적 구조의 고착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같은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겼을 뿐, 그 기저에 놓인 ‘능력주의’라는 신념 자체가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던져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샌델의 위 책이 능력주의의 면면을 세밀히 파헤치며 우리 사회가 함께 숙고해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의식을 전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육이 불평등 해소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불평등의 현실을 방치하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위험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비단 대학 입시와 같은 교육 분야의 문제뿐 아니라, 세계화, 포퓰리즘, 정치의 기술관료화를 비롯해 사회의 정치경제적 이슈 전반에 능력주의의 영향이 포착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샌델 교수가 이전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과 같은 저서에서 다루었던 시장지상주의 및 인센티브제화 또한 능력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능력주의에 긍정적인 기능 또한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읽기 자료에 제시된 각종 폐해에 비해 그 정도는 미약하겠으나, 적절한 수준의 능력주의적 이념은 개인의 성취 동기 유발, 건전한 경쟁 촉진, 사회적 인재 양성 등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 또한 현 사회에 팽배한 능력주의의 신화를 저 자신이 이미 내면화해버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듭니다. 어찌 됐든,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그 폐해와 폭정을 완화하기 위한 제동장치를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노력, 재능, 환경, 행운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성공과 실패에 미치는 복합적인 영향을 인지하면서, 위와 같은 긍정적 기능 유지와 폐해의 최소화, 그리고 사회적 연대 도모 간의 균형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유능력자 제비뽑기’라는 제목으로 짧게 언급된 대입제도 개선안 제안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 제안 배경에는 전반적으로 공감이 되었으나, 제도 시행 시 과도기적 단계에서 불합격자들이 겪을 수 있는 실질적 불이익 등을 고려할 때, 사회적 수용과 관련한 현실성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공동선의 정치와 시민의식의 확대라는 저자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궁금증이 여전히 남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 아직 떠오르는 바는 없지만, 일단 능력의 우연성 인식 제고를 통한 자발적 행동 변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부연하자면, 능력주의로부터 각종 특권을 누린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 본인의 능력과 특권의 일부를 사회적 기여와 같은 방식으로 활용하는 자발적인 문화를 형성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이는 맹목적인 개인 책임론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배려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나, 실현 가능성과 영향력 면에서 좀 더 실질적인 방법에 무엇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능력주의 이념이 만연한 현 상황에서, 변화를 향한 사회적 합의의 기반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육이 불평등 해소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불평등의 현실을 방치하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위험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비단 대학 입시와 같은 교육 분야의 문제뿐 아니라, 세계화, 포퓰리즘, 정치의 기술관료화를 비롯해 사회의 정치경제적 이슈 전반에 능력주의의 영향이 포착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샌델 교수가 이전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과 같은 저서에서 다루었던 시장지상주의 및 인센티브제화 또한 능력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능력주의에 긍정적인 기능 또한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읽기 자료에 제시된 각종 폐해에 비해 그 정도는 미약하겠으나, 적절한 수준의 능력주의적 이념은 개인의 성취 동기 유발, 건전한 경쟁 촉진, 사회적 인재 양성 등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펴는 것 또한 현 사회에 팽배한 능력주의의 신화를 저 자신이 이미 내면화해버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듭니다. 어찌 됐든,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그 폐해와 폭정을 완화하기 위한 제동장치를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노력, 재능, 환경, 행운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성공과 실패에 미치는 복합적인 영향을 인지하면서, 위와 같은 긍정적 기능 유지와 폐해의 최소화, 그리고 사회적 연대 도모 간의 균형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유능력자 제비뽑기’라는 제목으로 짧게 언급된 대입제도 개선안 제안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 제안 배경에는 전반적으로 공감이 되었으나, 제도 시행 시 과도기적 단계에서 불합격자들이 겪을 수 있는 실질적 불이익 등을 고려할 때, 사회적 수용과 관련한 현실성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공동선의 정치와 시민의식의 확대라는 저자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궁금증이 여전히 남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 아직 떠오르는 바는 없지만, 일단 능력의 우연성 인식 제고를 통한 자발적 행동 변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부연하자면, 능력주의로부터 각종 특권을 누린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 본인의 능력과 특권의 일부를 사회적 기여와 같은 방식으로 활용하는 자발적인 문화를 형성해나가자는 것입니다. 이는 맹목적인 개인 책임론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배려와 사회적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나, 실현 가능성과 영향력 면에서 좀 더 실질적인 방법에 무엇이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능력주의 이념이 만연한 현 상황에서, 변화를 향한 사회적 합의의 기반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리라2021-03-17 15:21
윤서영 학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저자가 제시한 '유능력자 제비뽑기'라 칭해지는 제도가 실제로 시행된다고 했을 경우 과도기적 단계에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에 대해 지적해주신 부분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기득권층이 자신의 능력이나 특권을 자발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를 정립해야 한다는 서영님의 의견에는 공감하면서도 또 다른 의문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과연 ‘자발적’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득권층이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자신의 의지를 통해 내려놓은 적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특권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민 혁명을 통해, 봉기를 통해, 전쟁이나 외부 세력의 유입과 같은 급작스러운 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을 뿐 기득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썼지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서영님이 말씀해주신 대안을 적용해보기 위해 오늘날에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이 우연에 의한 것이며 노력에 의한 대가라고만 칭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표면적으로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여줄지라도, 대다수가 볼 수 없는 가려진 영역에서는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이들에게 자발적인 협력을 바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인식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특권입니다. 자발적으로 남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인정과 존경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약, 특권을 가진 계층이 ‘자발적으로’ 사회에 환원한다거나, 공동체를 위해 움직인다는 측면에 집중하게 된다면 “나는 자발적으로 특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에 있다.”라는 인식 혹은 “이들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좋은 사람들이구나.”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이 또 다른 기득권을 만들어내는데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차라리, 법적인 제도와 같은 강제적 수단을 통해 이것이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당연한 일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기득권층이 자신의 능력이나 특권을 자발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를 정립해야 한다는 서영님의 의견에는 공감하면서도 또 다른 의문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과연 ‘자발적’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기득권층이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자신의 의지를 통해 내려놓은 적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특권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기 위해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민 혁명을 통해, 봉기를 통해, 전쟁이나 외부 세력의 유입과 같은 급작스러운 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을 뿐 기득권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썼지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려 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서영님이 말씀해주신 대안을 적용해보기 위해 오늘날에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이 우연에 의한 것이며 노력에 의한 대가라고만 칭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된다면 표면적으로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특권을 활용하는 움직임을 보여줄지라도, 대다수가 볼 수 없는 가려진 영역에서는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이들에게 자발적인 협력을 바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인식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또 다른 특권입니다. 자발적으로 남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인정과 존경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약, 특권을 가진 계층이 ‘자발적으로’ 사회에 환원한다거나, 공동체를 위해 움직인다는 측면에 집중하게 된다면 “나는 자발적으로 특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에 있다.”라는 인식 혹은 “이들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좋은 사람들이구나.”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이 또 다른 기득권을 만들어내는데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차라리, 법적인 제도와 같은 강제적 수단을 통해 이것이 우리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당연한 일이며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조용수2021-03-17 23:2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먼저 능력주의에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작가도 책의 초반부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말씀해 주신 동기적 측면으로 보나 경쟁을 통한 효율성 향상 측면으로 보나 적절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이 이러한 능력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해주신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글을 읽고 들었습니다.
제 기억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작가는 돈이 무가치하다고 말하거나 돈의 가치를 무조건 더 줄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는 오늘날 돈으로 점점 많은 것들을 살 수 있게 되면서 돈이 기존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도덕적 가치들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런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경계해야 된다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봉하고 그 힘이 커지며 능력주의가 손대면 안되는 영역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의 존엄성의 약화와 패배자에게 주어지는 굴욕적인 측면이 책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시인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런 '능력주의의 폭정'을 가장 문제삼고, 점점 커지는 능력주의의 영향력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책을 다시 훑어보며 들었습니다.(제 주관적인 생각이긴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학우님의 고민도 크게 공감합니다. 저 역시 특권에 대한 감사가 논의의 출발점이란 것에 동의하고 꼭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이러한 도덕적 관념이 정말로 엘리트 집단의 행동을 개선시키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꾸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능력주의에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작가도 책의 초반부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말씀해 주신 동기적 측면으로 보나 경쟁을 통한 효율성 향상 측면으로 보나 적절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이 이러한 능력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해주신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글을 읽고 들었습니다.
제 기억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작가는 돈이 무가치하다고 말하거나 돈의 가치를 무조건 더 줄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는 오늘날 돈으로 점점 많은 것들을 살 수 있게 되면서 돈이 기존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도덕적 가치들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런 것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경계해야 된다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신봉하고 그 힘이 커지며 능력주의가 손대면 안되는 영역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일의 존엄성의 약화와 패배자에게 주어지는 굴욕적인 측면이 책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시인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런 '능력주의의 폭정'을 가장 문제삼고, 점점 커지는 능력주의의 영향력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책을 다시 훑어보며 들었습니다.(제 주관적인 생각이긴 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학우님의 고민도 크게 공감합니다. 저 역시 특권에 대한 감사가 논의의 출발점이란 것에 동의하고 꼭 필요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이러한 도덕적 관념이 정말로 엘리트 집단의 행동을 개선시키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꾸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양승훈2021-03-18 02:34
저 또한 유능력자 제비뽑기가 현실적인지, 혹은 현실에 적용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 효능을 발휘할지 의문이 듭니다. 현재 의무경찰 선발 시험의 경우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인적성검사와 (꽤나 많은 사람이 떨어지는) 체력검사를 통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추첨을 통해 선발을 하게 됩니다. 제가 시험을 보았을 때 경쟁률이 14:1이었고 마침 검사 전 소집 장소였던 대강당이 14석 1열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저는 굉장히 불쾌한 감정이었던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체력이 안 좋았던 저는 체력검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였는데 그렇게 의경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인 방에서 공개추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 이 한 줄에 앉은 사람 중 무작위로 한 사람만 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노력한 시간에 대해 힘이 빠졌습니다. 만약 이러한 방식이 여러 곳에 적용된다면 노력에 대한 허무주의가 만연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결과 뽑히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운에 의해 선발된 것이므로 오만해서는 안돼'가 아니라 오히려 '실력뿐 아니라 운마저 따라준' 인재라는 선민의식이 강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기존 능력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존 능력주의에 이 운이라는 게 하나의 요소로 결합해 새로운 능력주의를 만들어낼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사회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혹은 감사함을 가진다고 여겨지도록 행동할 수 있게 교육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또한 이 결과 뽑히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운에 의해 선발된 것이므로 오만해서는 안돼'가 아니라 오히려 '실력뿐 아니라 운마저 따라준' 인재라는 선민의식이 강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기존 능력주의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기존 능력주의에 이 운이라는 게 하나의 요소로 결합해 새로운 능력주의를 만들어낼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사회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혹은 감사함을 가진다고 여겨지도록 행동할 수 있게 교육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박건규2021-03-17 14:02
1.
우선 샌델의 책을 읽고 이것이 미국에만 적용되는 현실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최근 교육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을 때도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이 샌델의 근거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샌델의 주장과 근거에 공감할 수 있었는데, 역시 능력주의는 계층 분화 및 고착화의 문제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또 일반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능력주의에 의해 경제 계층은 점차 분화되고 있었지만, 능력주의가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가 정당했으므로, 승자는 더욱 오만해지고 패자는 더 큰 굴욕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샌델의 말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결과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나는 여기서 작년 자유전공학부 전공 수업의 읽기자료였던 한 신문기사가 떠올랐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여성의 지위 상승이나 성역할 관념 변화 등으로 결혼에서의 평등 추구가 확산되면서 점차 이성 간의 결혼에서 남녀의 경제 수준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결혼이 선호되었고, 이런 결혼의 확산으로 인해 계층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1] 샌델은 교육과 능력주의 측면에서 계층 분화 문제를 제시하지만, 이 기사의 내용을 참고해 결혼에서의 평등 의식 측면에서도 계층 분화를 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배우자를 만나려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은 아닐 텐데, 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능력주의처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2.
샌델의 책이 2020년에 출간되긴 했지만, 코로나19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긴 힘들다. 물론 코로나19 사태는 (능력주의 체제 속에서의 ‘무능’과 달리) 개인에게 불운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가 아니므로 능력주의를 논하는 책에서 많이 다룰 내용은 아니다. 다만 샌델이 제시한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현재의 재난 상황을 엮어서 생각하면 더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와 교육에 관한 많은 담론을 접하면서 나는 ‘코로나 세대’라는 용어를 몇 차례 마주칠 일이 있었다. 전 한국교육행정학회장 박남기는 IMF 당시 취업난에 시달렸던 부모들이 또 다시 경제적 타격을 입어 현재 학생인 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 격차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 밀레니얼 세대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 학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코로나 세대의 등장을 논한다. [2] 교육학자 강대중은 ‘코로나 세대’라는 표현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데, 그는 비대면 시기 수업의 질적 저하로 인해 대면 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교육 격차가 생길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제기했다. [3] 샌델이 책에서 다룬 행운은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것’,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자신의 재능이 대접받는 사회에 태어나는 것’ 등 전부 천부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에 반대되는 불운도 마찬가지이다.)이지만, 코로나 세대가 겪고 또 겪게 될 문제는 샌델이 제시한 행운/불운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불운임을 알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서 가난한 이들이 겪을 고통은 다층적인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불운이 자신의 무능에서 어느 정도 기인한다는 굴욕감을 느낄 것인데,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코로나 세대’가 되어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전세계적인 재난의 피해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약자 계층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자신의 무능함과 외부 상황 모두가 자신의 불운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이중으로 절망에 빠질 것인가? 혹은, 자신의 무능과는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만일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또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샌델의 분석이 옳다면, 개인의 불운을 개인에게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해도, 능력주의와 달리 코로나는 사회적인 움직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참고
[1] https://www.nytimes.com/2016/02/23/upshot/rise-in-marriages-of-equals-and-in-division-by-class.html
[2] 『포스트 코로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314-315쪽.
[3] 『코로나19, 한국 교육의 잠을 깨우다』, 74쪽.
우선 샌델의 책을 읽고 이것이 미국에만 적용되는 현실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최근 교육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을 때도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었고 그것이 샌델의 근거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샌델의 주장과 근거에 공감할 수 있었는데, 역시 능력주의는 계층 분화 및 고착화의 문제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또 일반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능력주의에 의해 경제 계층은 점차 분화되고 있었지만, 능력주의가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가 정당했으므로, 승자는 더욱 오만해지고 패자는 더 큰 굴욕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샌델의 말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결과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나는 여기서 작년 자유전공학부 전공 수업의 읽기자료였던 한 신문기사가 떠올랐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여성의 지위 상승이나 성역할 관념 변화 등으로 결혼에서의 평등 추구가 확산되면서 점차 이성 간의 결혼에서 남녀의 경제 수준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결혼이 선호되었고, 이런 결혼의 확산으로 인해 계층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1] 샌델은 교육과 능력주의 측면에서 계층 분화 문제를 제시하지만, 이 기사의 내용을 참고해 결혼에서의 평등 의식 측면에서도 계층 분화를 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배우자를 만나려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은 아닐 텐데, 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능력주의처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2.
샌델의 책이 2020년에 출간되긴 했지만, 코로나19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긴 힘들다. 물론 코로나19 사태는 (능력주의 체제 속에서의 ‘무능’과 달리) 개인에게 불운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가 아니므로 능력주의를 논하는 책에서 많이 다룰 내용은 아니다. 다만 샌델이 제시한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현재의 재난 상황을 엮어서 생각하면 더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와 교육에 관한 많은 담론을 접하면서 나는 ‘코로나 세대’라는 용어를 몇 차례 마주칠 일이 있었다. 전 한국교육행정학회장 박남기는 IMF 당시 취업난에 시달렸던 부모들이 또 다시 경제적 타격을 입어 현재 학생인 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 격차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 밀레니얼 세대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 학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코로나 세대의 등장을 논한다. [2] 교육학자 강대중은 ‘코로나 세대’라는 표현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데, 그는 비대면 시기 수업의 질적 저하로 인해 대면 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교육 격차가 생길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제기했다. [3] 샌델이 책에서 다룬 행운은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것’,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자신의 재능이 대접받는 사회에 태어나는 것’ 등 전부 천부적이고 생득적인 것(이에 반대되는 불운도 마찬가지이다.)이지만, 코로나 세대가 겪고 또 겪게 될 문제는 샌델이 제시한 행운/불운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불운임을 알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서 가난한 이들이 겪을 고통은 다층적인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불운이 자신의 무능에서 어느 정도 기인한다는 굴욕감을 느낄 것인데,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코로나 세대’가 되어 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전세계적인 재난의 피해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약자 계층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자신의 무능함과 외부 상황 모두가 자신의 불운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이중으로 절망에 빠질 것인가? 혹은, 자신의 무능과는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만일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또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샌델의 분석이 옳다면, 개인의 불운을 개인에게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해도, 능력주의와 달리 코로나는 사회적인 움직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참고
[1] https://www.nytimes.com/2016/02/23/upshot/rise-in-marriages-of-equals-and-in-division-by-class.html
[2] 『포스트 코로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314-315쪽.
[3] 『코로나19, 한국 교육의 잠을 깨우다』, 74쪽.
윤서영2021-03-17 14:51
건규님 글 잘 읽었습니다!
샌델의 위 책과 연관지어 코로나 사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던져주셔서 읽으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우선 코로나와 교육, 특히 코로나 세대에 관한 제 생각을 적어보자면, 비대면 수업을 받게 된 연령대 및 시기의 학생들을 '코로나 세대'로 통칭할 경우 말씀하신 대로 샌델이 제시한 운의 문제와는 약간 다른 차원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세대에 해당하는 학생들 내에서 가정환경 등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의 질이나 접근성 격차가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코로나와 교육이라는 주제는 샌델의 문제의식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주제에 대한 실증적인 통계 및 연구 자료가 나오게 된다면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더욱 확실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경제적 약자 계층과 관련해서, 저는 이들이 대체로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온다는 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능력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는데요. 최근 코로나 사태 속에서 취약계층이 당면한 상황과 고충은 상당히 심각하고 현실적인 측면의 문제인 반면, 이들에게 능력주의라는 주제는 상대적으로 일상과 거리가 있게 느껴질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가 실제 삶과 밀접한 주제임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식해나갈 수 있도록 사회적 담론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연결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샌델의 위 책과 연관지어 코로나 사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던져주셔서 읽으면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우선 코로나와 교육, 특히 코로나 세대에 관한 제 생각을 적어보자면, 비대면 수업을 받게 된 연령대 및 시기의 학생들을 '코로나 세대'로 통칭할 경우 말씀하신 대로 샌델이 제시한 운의 문제와는 약간 다른 차원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세대에 해당하는 학생들 내에서 가정환경 등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교육 서비스의 질이나 접근성 격차가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코로나와 교육이라는 주제는 샌델의 문제의식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후에 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주제에 대한 실증적인 통계 및 연구 자료가 나오게 된다면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더욱 확실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경제적 약자 계층과 관련해서, 저는 이들이 대체로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온다는 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능력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는데요. 최근 코로나 사태 속에서 취약계층이 당면한 상황과 고충은 상당히 심각하고 현실적인 측면의 문제인 반면, 이들에게 능력주의라는 주제는 상대적으로 일상과 거리가 있게 느껴질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가 실제 삶과 밀접한 주제임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식해나갈 수 있도록 사회적 담론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결론으로 연결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리라2021-03-17 15:24
박건규 학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과 관련하여 코로나 세대의 등장과 능력주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주신 부분에 관심이 가서 이에 대해 의견을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마이클 샌델이 직접 코로나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아도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 자체가 코로나 팬데믹이 능력주의의 독재를 멈추고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난이 사회의 약한 고리를 가장 먼저 공격한다는 말처럼 세계가 동시에 마주해야만 했던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눈이 가려진 채 무엇을 무시해왔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언급해주신 것처럼 교육의 영역에서는 집에 컴퓨터나 노트북 같은 전자 기기가 있는지, 집에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수업을 원활하게 들을 수 있는지, ZOOM 화면을 켰을 때 자신의 배경을 부끄러움 없이 보여줄 수 있는지와 같이 학생들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환경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같은 부가적인 학습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의 기초학력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점이 제시되었습니다. 특히, 중위권이 없어졌고 하위권과 상위권의 격차가 지금껏 본 적 없이 커졌다는 교사들의 말은 우연히 얻게 된 좋은 가정환경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 개인의 성취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코로나 세대’라고 명명되는 이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지금까지 통용된 능력주의적 체제가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처럼 우리에게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우리는 능력이 개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각종 요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코로나 이후의 사회는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무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저는 마이클 샌델이 직접 코로나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아도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 자체가 코로나 팬데믹이 능력주의의 독재를 멈추고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난이 사회의 약한 고리를 가장 먼저 공격한다는 말처럼 세계가 동시에 마주해야만 했던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지금까지 능력주의에 눈이 가려진 채 무엇을 무시해왔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언급해주신 것처럼 교육의 영역에서는 집에 컴퓨터나 노트북 같은 전자 기기가 있는지, 집에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수업을 원활하게 들을 수 있는지, ZOOM 화면을 켰을 때 자신의 배경을 부끄러움 없이 보여줄 수 있는지와 같이 학생들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환경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같은 부가적인 학습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의 기초학력 수준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점이 제시되었습니다. 특히, 중위권이 없어졌고 하위권과 상위권의 격차가 지금껏 본 적 없이 커졌다는 교사들의 말은 우연히 얻게 된 좋은 가정환경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 개인의 성취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저는 ‘코로나 세대’라고 명명되는 이들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지금까지 통용된 능력주의적 체제가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처럼 우리에게 막대한 힘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우리는 능력이 개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각종 요인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코로나 이후의 사회는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무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임채미2021-03-17 23:13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코로나 19 상황과 능력주의를 엮어서 생각하신 부분이 참으로 시의적절하여 인상 깊었습니다. 건규님께서는 경제적 약자 계층이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는 과정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셨는데요, 저는 건규님이 제시하신 두가지 종류의 가정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첫째로 자신의 무능함과 외부 상황 모두가 자신에게 불운을 가져다 준다는 상황에서 이중으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면, 코로나 시대의 학습 과정 속에서 꼭 필요한 디지털 기기의 미비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대면하여 교육을 받는 것이 어렵다 보니, 비대면 방식을 활용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 기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가정의 학생들은 절망감에 빠질 듯 합니다. 또한,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에 큰 타격을 받지 않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절망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로 자신의 무능과는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자연재해에 대한 인류 전체의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기업들의 매출이 급감하는 것을 보면서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코로나 19 상황과 능력주의를 엮어서 생각하신 부분이 참으로 시의적절하여 인상 깊었습니다. 건규님께서는 경제적 약자 계층이 코로나 사태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는 과정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셨는데요, 저는 건규님이 제시하신 두가지 종류의 가정이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첫째로 자신의 무능함과 외부 상황 모두가 자신에게 불운을 가져다 준다는 상황에서 이중으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면, 코로나 시대의 학습 과정 속에서 꼭 필요한 디지털 기기의 미비를 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대면하여 교육을 받는 것이 어렵다 보니, 비대면 방식을 활용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디지털 기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가정의 학생들은 절망감에 빠질 듯 합니다. 또한, 쾌적한 주거환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에 큰 타격을 받지 않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절망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로 자신의 무능과는 무관하게 불운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자연재해에 대한 인류 전체의 무력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기업들의 매출이 급감하는 것을 보면서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7 14:48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제목부터 우리의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그 이유를 능력주의라고 말합니다. 관련해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능력주의가 어떻게 분열을 만들어내는지, 어떠한 도덕적 문제를 가지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로, 능력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회적 이동 가능성, 그리고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났던 스펙 개조, 입시 비리 사건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의 기준으로서 작용하는 학력은 부, 지위, 지역 등 다양한 요소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기술관료주의와 함께 공공성에 대한 도덕적 문제들을 덮어버리게 되고, 경제적 효율성, 전문적인 논쟁들만이 의미 있게 만들어버립니다. 즉 일반 시민, 공공선, 도덕이 낄 자리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능력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즉 기회의 평등이 완전한 능력주의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앞에서 언급했듯 평등이 아닌 사회적 이동 가능성입니다. 누구에게나 능력과 노력을 통해 길은 열려있다는 이유로, 능력주의는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정당한 자격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롤스의 철학에서는 우리가 어떤 재능을 가졌다는 것조차 일종의 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재능이 인정받는 것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그 시대와 사회가 인정하는 것뿐인, 일종의 우연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한 채 능력주의는 쟁취한 사람들에게는 자부심과 오만함을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능력주의의 성향은 그 기준인 학력에 따른 편견, 일의 존엄성 하락,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등 우리를 분열시키고 연대감을 없애는 많은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결론으로, 어떠한 사회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샌델은 능력주의와 기술 관료적 정치가 아닌 삶의 우연성을 믿고 어떠한 이유로는 차별받지 않으며, 조건이 없는 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통하여 성숙하고 겸손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코로나 19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 하며, 사람들을 점점 더 지치고, 분산화, 개인화되게 하고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앞으로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어떠한 흔적으로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샌델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한 일종의 이정표를 제시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
1)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강력한 기반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유대를 통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우 어렵겠지만 학력주의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교육의 방향성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2) 책을 읽으며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그 때문에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좌절감을 준다는 부분에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성공 그리고 실패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같은 부, 직위,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공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사회적 평균치, 인식에 문제일까요?
3) 샌델이 결론으로 제시한 성숙하고 겸손한 민주주의 그리고 공동선을 향한 시민의 합의를 통한 정치는 매우 중요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이상적인 문제이고, 이미 능력주의를 그 어느 것보다 당연시하는 사회와 이를 체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 우리 한국 사회에 어떤 부분부터 개선해 나가야 할까요? 그 시작점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샌델은 능력주의의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로, 능력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회적 이동 가능성, 그리고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일어났던 스펙 개조, 입시 비리 사건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의 기준으로서 작용하는 학력은 부, 지위, 지역 등 다양한 요소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기술관료주의와 함께 공공성에 대한 도덕적 문제들을 덮어버리게 되고, 경제적 효율성, 전문적인 논쟁들만이 의미 있게 만들어버립니다. 즉 일반 시민, 공공선, 도덕이 낄 자리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능력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즉 기회의 평등이 완전한 능력주의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앞에서 언급했듯 평등이 아닌 사회적 이동 가능성입니다. 누구에게나 능력과 노력을 통해 길은 열려있다는 이유로, 능력주의는 그에 따른 모든 결과를 정당한 자격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롤스의 철학에서는 우리가 어떤 재능을 가졌다는 것조차 일종의 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재능이 인정받는 것은 어떤 모종의 이유로 그 시대와 사회가 인정하는 것뿐인, 일종의 우연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한 채 능력주의는 쟁취한 사람들에게는 자부심과 오만함을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능력주의의 성향은 그 기준인 학력에 따른 편견, 일의 존엄성 하락,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등 우리를 분열시키고 연대감을 없애는 많은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결론으로, 어떠한 사회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샌델은 능력주의와 기술 관료적 정치가 아닌 삶의 우연성을 믿고 어떠한 이유로는 차별받지 않으며, 조건이 없는 평등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를 통하여 성숙하고 겸손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현재의 코로나 19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 하며, 사람들을 점점 더 지치고, 분산화, 개인화되게 하고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앞으로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어떠한 흔적으로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샌델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지에 대한 일종의 이정표를 제시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힘들겠지만,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점
1)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강력한 기반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결론적으로 말하는 유대를 통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우 어렵겠지만 학력주의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교육의 방향성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2) 책을 읽으며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그 때문에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좌절감을 준다는 부분에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성공 그리고 실패의 기준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같은 부, 직위,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공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사회적 평균치, 인식에 문제일까요?
3) 샌델이 결론으로 제시한 성숙하고 겸손한 민주주의 그리고 공동선을 향한 시민의 합의를 통한 정치는 매우 중요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이상적인 문제이고, 이미 능력주의를 그 어느 것보다 당연시하는 사회와 이를 체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 우리 한국 사회에 어떤 부분부터 개선해 나가야 할까요? 그 시작점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김재민2021-03-17 18:33
재우 학우 안녕하세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두 번째 의문점에 있어 저 역시 생각을 같이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사실 "성공"의 척도는 과거에 비해 많이 다원화되는 경향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을 추구하는 이들에겐, 계속되는 야근으로 얻어가는 초과수당이 더이상 성공의 삶이 아님을 이젠 모두가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관념을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제일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적절한 공교육을 통해 시민사회가 함양해야 할 도덕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 말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는 최근 복지국가담론으로 등장하는 기본소득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사고할 여유와 자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능력에 따라 철저히 분배받는 자유주의적 가치분배만을 따르기엔 능력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 말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는 최근 복지국가담론으로 등장하는 기본소득이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사고할 여유와 자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능력에 따라 철저히 분배받는 자유주의적 가치분배만을 따르기엔 능력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다솔2021-03-17 23:31
재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재우님께서 제시해주신 1번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보고 싶습니다. 학력주의에 관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교육의 방향성은 교육=학력, 그래서 교육수준=학력수준 이라는 동일시를 하지 않음으로써 시작되지 않을까요? 말씀하신대로 유대를 통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등에 관한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교육이 대학 혹은 나아가 명문대학에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샌델이 지적하고 있듯이, 오히려 최근 대학은 어떤 한 분야에서만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시민적 덕성을 기르기 위한 역사, 정치철학의 교과목은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 사람들 그리고 대학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 모두 배타적으로 학력의 바탕이 되는 대학 교육만을 교육이라 치지 않고, 대안적인 교육 역시 가치 있는 교육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학력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교육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대안적인 교육이란 우리나라의 경우 대안학교(학교에 다녀도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아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치뤄하는), 혹은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미국 노동조합(영국이었나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ㅜㅜ)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 혹은 서울대 평생교육원이 제공하는 세계시민교양, 전문가교육 같은 교육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안적인 교육이란 우리나라의 경우 대안학교(학교에 다녀도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아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치뤄하는), 혹은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미국 노동조합(영국이었나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ㅜㅜ)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 혹은 서울대 평생교육원이 제공하는 세계시민교양, 전문가교육 같은 교육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단2021-03-18 00:02
이재우 학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의 핵심을 간략하게 정리해주신 점이 매우 인상 깊었고 저 역시 동의합니다.
이재우 학우님의 궁금증에 대한 저의 간단한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정말 어렵고 우리가 앞으로 계속 고민해나가봐야할 지점인 거 같습니다.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인데 과연 평가 없이 교육 활동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의 고등학생 시절만 돌아봐도 성적에 포함 안 되는 과목들은 열심히 하지 않은 기억들이 다들 있으실겁니다. 평가 없어도 학생들이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할 거 같습니다.
2. 우리 사회가 만약 능력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면 "성공"의 개념 역시 다시 정립해야할 거 같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지금까지 많은 보상이 주어졌던 체계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분배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합니다.
3. 안타깝지만, 우리부터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를 당연시하며 사회 지도층이 되고 싶어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좁게는 명문대생, 넓게는 기득권층부터 사고방식을 수정해야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이재우 학우님의 궁금증에 대한 저의 간단한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정말 어렵고 우리가 앞으로 계속 고민해나가봐야할 지점인 거 같습니다.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인데 과연 평가 없이 교육 활동이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의 고등학생 시절만 돌아봐도 성적에 포함 안 되는 과목들은 열심히 하지 않은 기억들이 다들 있으실겁니다. 평가 없어도 학생들이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할 거 같습니다.
2. 우리 사회가 만약 능력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면 "성공"의 개념 역시 다시 정립해야할 거 같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지금까지 많은 보상이 주어졌던 체계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분배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합니다.
3. 안타깝지만, 우리부터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를 당연시하며 사회 지도층이 되고 싶어하는 그리고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좁게는 명문대생, 넓게는 기득권층부터 사고방식을 수정해야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이재용2021-03-18 00:07
이재우 학우님 깔끔한 요약과 질문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답변 남깁니다!
마지막 질문이 제가 생각했을때도 가장 논의가 필요한 논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샌델의 주장과 해결책은 대부분 이상과 가까운데, 이상과 현실은 매우 다르며 아무리 이상이 완벽하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그 차이에서 오는 사회 구조적 괴리감이 더 클 것입니다. 현실적 사회 개선이 필요한 분야를 먼저 나누고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정치, 교육, 기업 등등으로 분야를 만들고 각 분야의 선행 개선 방안 예시를 찾아본 다음 토론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이 제가 생각했을때도 가장 논의가 필요한 논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샌델의 주장과 해결책은 대부분 이상과 가까운데, 이상과 현실은 매우 다르며 아무리 이상이 완벽하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그 차이에서 오는 사회 구조적 괴리감이 더 클 것입니다. 현실적 사회 개선이 필요한 분야를 먼저 나누고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정치, 교육, 기업 등등으로 분야를 만들고 각 분야의 선행 개선 방안 예시를 찾아본 다음 토론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8 00:49
@김재민
재민님 답변감사드려요 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성공과 실패에 있어 각자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상적이라고 하셨지만,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지 않을까 믿고 있습니다...ㅎㅎ
또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타인, 그리고 우리까지 생각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상적이라고 하셨지만,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지 않을까 믿고 있습니다...ㅎㅎ
또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타인, 그리고 우리까지 생각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8 01:00
@강다솔
다솔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ㅎㅎ
교육수준 = 학력수준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신 부분이 되게 공감이 가네요. 저도 입시를 겪었지만 오로지 높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요. 교육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종의 전문가라는 생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삶과 꿈을 그리는 방향으로 갈 필요가 느껴지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어떠한 과목을 가르쳐야할지, 어떤 가치관이 기본이 되어야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논의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육수준 = 학력수준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신 부분이 되게 공감이 가네요. 저도 입시를 겪었지만 오로지 높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학생들이 많은 것 같아요. 교육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종의 전문가라는 생산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삶과 꿈을 그리는 방향으로 갈 필요가 느껴지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어떠한 과목을 가르쳐야할지, 어떤 가치관이 기본이 되어야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논의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8 01:06
@조단
조단님 답변감사드립니다! 우리부터 바뀌어야한다는 말 굉장히 공감합니다. 굉장히 작은 변화일지 몰라도, 나비효과처럼 언젠가 큰 사회의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가 가장 기본적인 교육부터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 녹아들어있지만, 그 근간에는 시민들의 인식, 가치관이 가장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앞으로 수업 시간 동안 세밀하고 섬세하게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8 01:10
@이재용
재용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상을 고려하여야하지만 현실을 고려하여서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만드는 작업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
마지막으로 언급해주신 각 분야에 따른 개선 방안과 제도 예시들은 발제에서 구체화하여 다루어 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주신 각 분야에 따른 개선 방안과 제도 예시들은 발제에서 구체화하여 다루어 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일 수업에서 뵙겠습니다!
조단2021-03-17 15:38
아버지께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나에게 해주시던 말씀이 하나 있다. ‘자만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물론 아버지께서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항상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이 말을 사회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힘겹게 공부하고 생활하는 친구를 보며 내가 이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부모님의 부족함 없는 지원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론 나한테는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세상은 너무 야박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불평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진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일찍이 철 들고 겸손한 모습은 서울대학교라는 타이틀이 내 손에 쥐어지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서울대 친구들과 유대감을 쌓고 서울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어 갔다. 내가 밤새가면서 공부했고 공정하게 시험을 잘 봐서 한국 최고의 대학교에 왔는데 사회에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장해주기는커녕 기득권이라고 욕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고등학교 토론 시간에 학벌 블라인드 제도 찬성을 강력히 주장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에타에서 지방 할당제를 늘리려는 정부를 신명 나게 비난하는 글을 보고 끄덕이는 전형적인 서울대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거의 대부분의 서울대생은 정치 성향과는 상관 없이 서울대라는 타이틀을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하게 이룬 성과라고 생각하며 이에 맞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 명의 학생들은 서울대 핍박이 못 배운 사람들의 질투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섭게 변해버린 내가 너무 낯설고 실망스러웠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너무 나이브하게 감성적인 생각만 하면서 살아오다가 이제야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되었나’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마치 나의 어렸을 때부터의 생각이 이성적으로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특히 챕터 4의 학력주의 관련 내용은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나는 이번 주제가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미국 사례를 한국 사례에 적용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 쓰이는 학력이라는 단어를 학벌로 치환만 하면 미국과 한국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를 가면 신분 상승이 될 수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명문대생은 성공한 사람, 지방대 간 학생은 실패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벌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스스로도 노력이 부족했다고 책망하며 좌절감에 빠진다. 명문대에 간 사람들은 엘리트주의가 팽배하게 박혀있어 이 사회는 현명한 우리가 이끌어 가야 하고 우리가 사회지도층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점이 능력에 대한 대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제 이 책을 기점으로라도 이러한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문대생인 우리부터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학우분들과 얘기해보고 싶은 주제가 두 가지 떠올랐습니다.
1. 모든 사람이 세상이 공정하기를 바라는 건 사실입니다만 공정이라는 단어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사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공정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구성원 모두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인 반면 한국의 청년들에게 공정은 ‘노력한 대로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국공 사태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쓰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게 과연 옳은 ‘공정’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2. “모두가 용이 될 순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고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논란이 된 적이 최근에 있었는데, 이 책의 관점에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도 이 말을 듣고 전혀 거북하지 않았는데 혹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ps. 서술 과정에서 서울대생의 일부를 일반화한 것이 불편했다고 느껴지셨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일찍이 철 들고 겸손한 모습은 서울대학교라는 타이틀이 내 손에 쥐어지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서울대 친구들과 유대감을 쌓고 서울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어 갔다. 내가 밤새가면서 공부했고 공정하게 시험을 잘 봐서 한국 최고의 대학교에 왔는데 사회에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장해주기는커녕 기득권이라고 욕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고등학교 토론 시간에 학벌 블라인드 제도 찬성을 강력히 주장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에타에서 지방 할당제를 늘리려는 정부를 신명 나게 비난하는 글을 보고 끄덕이는 전형적인 서울대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거의 대부분의 서울대생은 정치 성향과는 상관 없이 서울대라는 타이틀을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떳떳하게 이룬 성과라고 생각하며 이에 맞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 명의 학생들은 서울대 핍박이 못 배운 사람들의 질투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섭게 변해버린 내가 너무 낯설고 실망스러웠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너무 나이브하게 감성적인 생각만 하면서 살아오다가 이제야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되었나’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마치 나의 어렸을 때부터의 생각이 이성적으로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 같았다. 특히 챕터 4의 학력주의 관련 내용은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나는 이번 주제가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미국 사례를 한국 사례에 적용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 쓰이는 학력이라는 단어를 학벌로 치환만 하면 미국과 한국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를 가면 신분 상승이 될 수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명문대생은 성공한 사람, 지방대 간 학생은 실패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벌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스스로도 노력이 부족했다고 책망하며 좌절감에 빠진다. 명문대에 간 사람들은 엘리트주의가 팽배하게 박혀있어 이 사회는 현명한 우리가 이끌어 가야 하고 우리가 사회지도층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점이 능력에 대한 대가로 공정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제 이 책을 기점으로라도 이러한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문대생인 우리부터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학우분들과 얘기해보고 싶은 주제가 두 가지 떠올랐습니다.
1. 모든 사람이 세상이 공정하기를 바라는 건 사실입니다만 공정이라는 단어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사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공정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구성원 모두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인 반면 한국의 청년들에게 공정은 ‘노력한 대로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국공 사태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정’이라는 키워드를 쓰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게 과연 옳은 ‘공정’이었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2. “모두가 용이 될 순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고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논란이 된 적이 최근에 있었는데, 이 책의 관점에 본다면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도 이 말을 듣고 전혀 거북하지 않았는데 혹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ps. 서술 과정에서 서울대생의 일부를 일반화한 것이 불편했다고 느껴지셨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최서원2021-03-17 17:33
2번 주제에 대해서 짧게나마 의견을 나누어보고 싶어 답글을 답니다 :) 저 역시도 해당 표현을 듣고 거북하지 않았으나 불편함을 느꼈을 사람들 입장에서 몇마디 서술해보자면,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현실에 안주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용이 되어 날아오른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나누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세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모두가 귀족이 될 수는 없으니 닿을 수 없는 귀족이라는 계층에 괜히 손 뻗지 말고 본인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주변인들과 행복을 누려라~~라고 귀족이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조금은 왜곡된 표현일 수 있으나, 제 입장에서는 다른 동물로 사람들의 처지를 일반화하여 적은 것이 계층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긴 해서 바꾸어 달아봅니다.)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성공에 목매지 말고 행복을 찾자~로 해석될 수 있지만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박건규2021-03-17 21:35
1.
공정의 의미야 늘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 같은데,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의 개념도 떠올려보면 좋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정확한 출발선과 결승선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 평등이라면, 다리에 장애가 있어 잘 달릴 수 없는 이의 출발선을 약간 앞에 두어 주는 것이 상대적 평등이겠죠. 공정의 두 가지 의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제시해주신 인천국제공항의 문제는 오늘에서야 접하게 되었지만, 찾아보니 상당히 비슷한 사례가 떠오르더군요. 대학교 강사로 근무하던 사회학자 오찬호는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를 수업 시간에 다루게 되었는데, 학생들은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갔으면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하면 안 된다” 등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1] 오찬호는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등 대학원생들과 해당 비정규직 직원들 사이에 동병상련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십대에게 ‘자기계발’이 강요되고 절대시되는 것을 원인 중 하나로 분석했습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 성공을 이뤄낸 사례를 강조하고, 성공/실패에 있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강조하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샌델의 글으로 돌아와 능력주의의 횡포가 작용하는 또 하나의 양식, 자기계발서를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공정’은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구체적인 용어로 분리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동선이 전제되지 않는 공정에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
저 또한 해당 아포리즘이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이 무척이나 관련 있어 보여서 인용하겠습니다.
“더욱 문제는 패자와 약자가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 양극화가 고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저축하면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개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붕어나 가재로만 살라면 행복할 수 없다. 언론 보도를 통해서 국민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미 용이 된 기득권층들이 편법과 특혜와 반칙을 저지르는 것을 보며 분노한다. 더욱이 대를 이어 가며 더욱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는 모습에 국민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2]
-참고
[1]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15-18쪽.
[2]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세계』, 110쪽.
공정의 의미야 늘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 같은데,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의 개념도 떠올려보면 좋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정확한 출발선과 결승선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 평등이라면, 다리에 장애가 있어 잘 달릴 수 없는 이의 출발선을 약간 앞에 두어 주는 것이 상대적 평등이겠죠. 공정의 두 가지 의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제시해주신 인천국제공항의 문제는 오늘에서야 접하게 되었지만, 찾아보니 상당히 비슷한 사례가 떠오르더군요. 대학교 강사로 근무하던 사회학자 오찬호는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를 수업 시간에 다루게 되었는데, 학생들은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갔으면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하면 안 된다” 등의 의견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1] 오찬호는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등 대학원생들과 해당 비정규직 직원들 사이에 동병상련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십대에게 ‘자기계발’이 강요되고 절대시되는 것을 원인 중 하나로 분석했습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 성공을 이뤄낸 사례를 강조하고, 성공/실패에 있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강조하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샌델의 글으로 돌아와 능력주의의 횡포가 작용하는 또 하나의 양식, 자기계발서를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공정’은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구체적인 용어로 분리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동선이 전제되지 않는 공정에 어떤 큰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2.
저 또한 해당 아포리즘이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대목이 무척이나 관련 있어 보여서 인용하겠습니다.
“더욱 문제는 패자와 약자가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 양극화가 고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저축하면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개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붕어나 가재로만 살라면 행복할 수 없다. 언론 보도를 통해서 국민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미 용이 된 기득권층들이 편법과 특혜와 반칙을 저지르는 것을 보며 분노한다. 더욱이 대를 이어 가며 더욱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는 모습에 국민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2]
-참고
[1]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15-18쪽.
[2]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세계』, 110쪽.
임채미2021-03-17 23:25
조단 학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학우님의 글 도입부를 읽으면서 마치 제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시하신 공정의 정의에 대한 의문은 굉장히 날카롭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했는데 이 점을 깔끔하게 짚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자유 경쟁 사회라는 현실적 의미에서 공정을 바라보자면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인정되어야지만이 사회의 효율성이 증가하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공정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가치관 하에서 살아온 한국 청년들에게 후자의 공정을 강요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것은 수능과 사시 등을 비롯한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입장입니다. 기회균형 전형이 능력의 부족이라고 신랄하게 비판받고 시험 점수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인국공 사태는 오히려 노력한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는 사례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 이상적인 입장에서는 인국공 사태에서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일종의 공정이라고 생각하나, 그 당시 입사를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행위로 비쳐질 수 있었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학우님의 글 도입부를 읽으면서 마치 제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시하신 공정의 정의에 대한 의문은 굉장히 날카롭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했는데 이 점을 깔끔하게 짚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자유 경쟁 사회라는 현실적 의미에서 공정을 바라보자면 당연히 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인정되어야지만이 사회의 효율성이 증가하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공정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가치관 하에서 살아온 한국 청년들에게 후자의 공정을 강요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능력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것은 수능과 사시 등을 비롯한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입장입니다. 기회균형 전형이 능력의 부족이라고 신랄하게 비판받고 시험 점수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인국공 사태는 오히려 노력한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는 사례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 이상적인 입장에서는 인국공 사태에서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일종의 공정이라고 생각하나, 그 당시 입사를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행위로 비쳐질 수 있었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빈2021-03-17 16:30
1. 능력주의는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간과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이전에 인상깊게 보았던 한 웹툰이 떠올랐다.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단편 웹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누군가는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어느 날 속절 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죽는 날까지 선택의 여지는 없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각자의 인생은 장기판의 말들일 뿐이고 각 말들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겨우 제한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졸'로 태어났다면 인생의 선택지는 겨우 한 칸만 내딛을 수 있을 뿐 '포'나 '차'처럼 이 쪽 저 쪽 종횡무진 뛰어다닐 수는 없다.” 능력주의 신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대학 입시, 취직 등과 같은 인생에서의 크고 작은 이벤트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도태되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위의 인용 구절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의 사회는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과 성공을 위한 결정적 요소들을 자유롭게 쟁취할 수 있는 환경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배경에서 성장한 ‘졸’들은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포’, ‘차’들과 똑같은 성취를 얻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만 하며 여러 제약을 마주하게 된다. 포, 차처럼 뒷문, 옆문을 뚫고 기회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길조차 험난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능력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좋은 기회를 타고난 이들에겐 관대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지나치게 가혹하다.
2.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능력에 따른 사회적 이동성이 담보되었던 것과 달리 요즘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저자의 주장까지 동의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대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능력주의 전체를 부정할 것인지, 혹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일부 고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를 대체할 개념이 존재하는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형태는 보통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나타나며, 피고용인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정량적/정성적 수단으로 고용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능력 이외의 부분에서 개인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매기기도 어려울뿐더러 경제적 교환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능력 있는 피고용인에 대한 수요가 더 높은 것을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필요함을 인정하되 운명의 우연성에서 기인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단지 사회적 계층 상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임스 애덤스의 표현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결국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교육은 학력주의에 빠져 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기보다는 입시를 위한 서열화와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으로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의 종류가 점점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학교에서 그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의 격차가 교육 질에서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애덤스가 미국 의회도서관이야말로 신분에 관계없이 공공 학습이 활발히 일어나는 장소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학습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를 계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간과 시스템이 늘어나길 바란다. 민간에서 이런 목표를 잘 구현한 예시로는 후불제 교육 서비스를 운영하는 ‘학생독립만세’라는 소셜벤처가 있을 것 같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이전에 인상깊게 보았던 한 웹툰이 떠올랐다.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단편 웹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누군가는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어느 날 속절 없이 주어지는 것이고,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죽는 날까지 선택의 여지는 없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각자의 인생은 장기판의 말들일 뿐이고 각 말들은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겨우 제한적인 선택을 할 뿐이다. '졸'로 태어났다면 인생의 선택지는 겨우 한 칸만 내딛을 수 있을 뿐 '포'나 '차'처럼 이 쪽 저 쪽 종횡무진 뛰어다닐 수는 없다.” 능력주의 신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대학 입시, 취직 등과 같은 인생에서의 크고 작은 이벤트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도태되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위의 인용 구절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의 사회는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과 성공을 위한 결정적 요소들을 자유롭게 쟁취할 수 있는 환경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배경에서 성장한 ‘졸’들은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포’, ‘차’들과 똑같은 성취를 얻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만 하며 여러 제약을 마주하게 된다. 포, 차처럼 뒷문, 옆문을 뚫고 기회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길조차 험난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능력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좋은 기회를 타고난 이들에겐 관대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지나치게 가혹하다.
2.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능력에 따른 사회적 이동성이 담보되었던 것과 달리 요즘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저자의 주장까지 동의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대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능력주의 전체를 부정할 것인지, 혹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일부 고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를 대체할 개념이 존재하는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형태는 보통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나타나며, 피고용인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정량적/정성적 수단으로 고용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능력 이외의 부분에서 개인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매기기도 어려울뿐더러 경제적 교환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능력 있는 피고용인에 대한 수요가 더 높은 것을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필요함을 인정하되 운명의 우연성에서 기인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단지 사회적 계층 상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임스 애덤스의 표현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결국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교육은 학력주의에 빠져 개인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돕기보다는 입시를 위한 서열화와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으로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의 종류가 점점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학교에서 그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의 격차가 교육 질에서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애덤스가 미국 의회도서관이야말로 신분에 관계없이 공공 학습이 활발히 일어나는 장소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학습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를 계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간과 시스템이 늘어나길 바란다. 민간에서 이런 목표를 잘 구현한 예시로는 후불제 교육 서비스를 운영하는 ‘학생독립만세’라는 소셜벤처가 있을 것 같다.
조성민2021-03-17 16:38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세계에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 열풍이 불고 있다. 그 프로그램들은 누구나 열심히 자신을 갈고 닦으면 우승과 함께 상금, 자동차, 음악 앨범 등 엄청난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문구로 참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극한 경쟁을 여과없이 송출하였다. 현대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렸던 이런 프로그램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능력주의가 이미 전 세계에 팽배해 있다는 상황을 보여준다.
저자는 현대 사회 곳곳에 깊게 스며든 능력주의 허상의 실제를 밝히고 각종 문제점을 짚었다. 능력주의는 사회적 양극화를 부유층과 극빈층 모두가 정당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고, 사회적 지위와 부를 세습하는 도구가 되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능력주의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으려 자유와 평등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미국은 능력주의의 병폐를 깊게 지니고 있으며 능력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포퓰리즘이 정치권력을 잡았다. 저자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상승 이념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능력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며 그에 대한 비판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우선 도덕적 관점에서 능력주의는 허상에 불과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재능과 배경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임을 보였다. 또한 저자는 능력주의 병폐의 해결방안으로 사회적 유대감의 회복과 공동선 추구라는 사회 인식의 개선과 함께 대학입시 개편과 조세개혁이라는 실제적인 방안도 내놓았다.
저자가 많은 사례와 사회현상을 통해 능력주의를 소개하고 도덕적 관점에서 그 허상을 밝히며 복잡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도 마련했다는 점에서 논리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다보니 능력주의를 보다 제대로 정의내릴 수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공동체 내에서 지도층이 생기고 권력이 발생할 때,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지위와 계층,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을 만들었다. 계층이 분화되고 사회복잡도가 늘어남에 따라 기득권 세력들은 이념 또한 정교하고 은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기득권 이외의 계층이 이념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의 부당함을 느끼면 사회가 전복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이념의 형태는 내세 사상, 종교, 신분사회 등으로 나타났다. 능력주의 또한 현재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이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능력주의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세습하게 만들고, 실제로 불평등을 유지하는데도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믿고 빈익빈 부익부를 능력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 곳곳에 깊게 스며든 능력주의 허상의 실제를 밝히고 각종 문제점을 짚었다. 능력주의는 사회적 양극화를 부유층과 극빈층 모두가 정당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고, 사회적 지위와 부를 세습하는 도구가 되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능력주의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으려 자유와 평등을 국민들에게 약속한 미국은 능력주의의 병폐를 깊게 지니고 있으며 능력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포퓰리즘이 정치권력을 잡았다. 저자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상승 이념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능력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며 그에 대한 비판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는 우선 도덕적 관점에서 능력주의는 허상에 불과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재능과 배경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임을 보였다. 또한 저자는 능력주의 병폐의 해결방안으로 사회적 유대감의 회복과 공동선 추구라는 사회 인식의 개선과 함께 대학입시 개편과 조세개혁이라는 실제적인 방안도 내놓았다.
저자가 많은 사례와 사회현상을 통해 능력주의를 소개하고 도덕적 관점에서 그 허상을 밝히며 복잡한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도 마련했다는 점에서 논리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다보니 능력주의를 보다 제대로 정의내릴 수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공동체 내에서 지도층이 생기고 권력이 발생할 때,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의 지위와 계층,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을 만들었다. 계층이 분화되고 사회복잡도가 늘어남에 따라 기득권 세력들은 이념 또한 정교하고 은밀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기득권 이외의 계층이 이념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의 부당함을 느끼면 사회가 전복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이념의 형태는 내세 사상, 종교, 신분사회 등으로 나타났다. 능력주의 또한 현재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이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능력주의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세습하게 만들고, 실제로 불평등을 유지하는데도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믿고 빈익빈 부익부를 능력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채수형2021-03-17 23:38
성민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에 대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댓글을 작성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예시로 드시면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는 점을 언급해주신 점입니다. 저는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를 사례로 들고 싶은데, 단순히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 일화를 담았던 과거의 드라마들과 달리(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등), 이제는 입시제도 자체를 주제로 까지 하며 능력주의의 병폐와 그 어두운 면을 보여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능력주의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능력주의가 팽배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가 된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다른 측면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드라마나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 여러 매체들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능력주의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주입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 책 자체가 두고 있는 배경이 미국이기에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다보니 능력주의를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저 역시 본 책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본 글에서는 미국 사회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정의를 여러 사례들로 나타내고 증명해낸 것일 뿐, 능력주의가 공유되는 여러 사회마다 그 정의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능력' 혹은 '성공'의 기준이 '사회에 공헌하는 정도, 혹은 남은 돕는 일' 이라고 정의 내린 사회에서는 돈 많이 버는 직업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더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가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능력주의의 거의 절대적인 기준을 돈과 사회적 지위로 두다 보니 능력주의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예시로 드시면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는 점을 언급해주신 점입니다. 저는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를 사례로 들고 싶은데, 단순히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 일화를 담았던 과거의 드라마들과 달리(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등), 이제는 입시제도 자체를 주제로 까지 하며 능력주의의 병폐와 그 어두운 면을 보여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능력주의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능력주의가 팽배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가 된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다른 측면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드라마나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 여러 매체들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능력주의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주입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 책 자체가 두고 있는 배경이 미국이기에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다보니 능력주의를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저 역시 본 책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본 글에서는 미국 사회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능력주의의 정의를 여러 사례들로 나타내고 증명해낸 것일 뿐, 능력주의가 공유되는 여러 사회마다 그 정의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능력' 혹은 '성공'의 기준이 '사회에 공헌하는 정도, 혹은 남은 돕는 일' 이라고 정의 내린 사회에서는 돈 많이 버는 직업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더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가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능력주의의 거의 절대적인 기준을 돈과 사회적 지위로 두다 보니 능력주의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지운2021-03-17 16:39
본 저에서 저자는 능력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를 지적하면서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능력주의가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한국에 대입해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능력주의(Meritocracy)를 당연한 진리인 양 받아들인다. 각각의 개인들은 교육을 받고 자신의 ‘스택’을 쌓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사회는 그러한 노력과 실력을 인정해주는 동시에 높은 보상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응당 개인의 당연한 권리이자 정당한 경쟁 수단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 해왔던 능력주의의 공고한 도덕적 지위에 의문을 던진다. 더불어 형성된 무능력자에 대한 편견과 그들 스스로 자기혐오와 패배주의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주목하였다. 저자가 신선하며 진보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 사회가 함양해야 할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가지게 한 것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 또한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적 합의가 공고해지고 능력주의의 혜택을 보는 계층이 계층대물림을 위해 노력하면서 양극화와 불평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신흥 귀족 계층 또한 그들이 만들어낸 트랩 속에서 결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디스토피아를 향해 가는 인간 사회에 제동을 걸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번 저서가 정제되지 못한 화두를 사회에 급하게 던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의 반골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장 먼저 두드러진 부분은 능력주의의 종교적 기원에 대해 논하는 지점이다. 성서에는 ‘욥기’에서처럼 능력주의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 또한 구교가 신도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했던 헌신에 따른 차등적인 구원 신앙을 악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였던 신교마저 능력주의로 다시 되돌아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신교의 직업윤리를 비롯하여 예정설이 가지는 오만한 사고방식과 함께 현시대의 기독교의 모순,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을 덧붙여 능력주의가 그들의 자기합리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음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자로 하여금 몰지각해보이는 사례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채로 능력주의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무교인 탓에 보수적인 미국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반감도 어느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또한 경쟁적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에 대해 매기는 시장가치와 도덕적 자격, 도덕적 가치라는 용어를 지속적으로 혼용하는 것도 매우 의문스러웠다. 책에는 맨큐가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각자가 자기 노동의 한계생산물에 따라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라는 주장을 했다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어디를 검색해보아도 이런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시장이 노동에 대해 도덕으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로 보상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상식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는것은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시장의 보상에 대해 수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장이 부여하는 자격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도덕적 자격을 부여받은 이들이 시장으로부터 시장 가치를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에 대한 세율이 근로 세율보다 낮은 것은 여러가지 시장 논리가 작용한 것이지 노동의 가치를 폄훼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제적으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고 각 국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대에서 금융분야의 세율을 높이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가 많은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자본을 운용하는 것 또한 노동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도가 가치있는 이유는 샌델만이 내세울 수 있는 대안을 시사했다는 것에 있다. 기존의 능력주의에 대한 많은 논의에서 다루었던 대안은 교육의 확대와 같은 다소 간접적이고 보수적인 형식의 해결법이었다. 그러나 제비뽑기나 근로소득세 인하와 같은 파격적인 대안들을 제시함으로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접근을 모색해보게 되었다. 시행되지 않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느껴질 지 몰라도 막상 진지하게 고려해보았을 때 물꼬를 튼다는 관점에서 용인될 수 있기도 하다(부작용이 있겠지만).
그러나 이번 저서가 정제되지 못한 화두를 사회에 급하게 던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의 반골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장 먼저 두드러진 부분은 능력주의의 종교적 기원에 대해 논하는 지점이다. 성서에는 ‘욥기’에서처럼 능력주의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이 존재한다. 또한 구교가 신도들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했던 헌신에 따른 차등적인 구원 신앙을 악으로 드러내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였던 신교마저 능력주의로 다시 되돌아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신교의 직업윤리를 비롯하여 예정설이 가지는 오만한 사고방식과 함께 현시대의 기독교의 모순,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을 덧붙여 능력주의가 그들의 자기합리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음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자로 하여금 몰지각해보이는 사례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채로 능력주의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가 무교인 탓에 보수적인 미국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반감도 어느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또한 경쟁적 시장경제 하에서 노동에 대해 매기는 시장가치와 도덕적 자격, 도덕적 가치라는 용어를 지속적으로 혼용하는 것도 매우 의문스러웠다. 책에는 맨큐가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각자가 자기 노동의 한계생산물에 따라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라는 주장을 했다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어디를 검색해보아도 이런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에게 있어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시장이 노동에 대해 도덕으로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치로 보상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상식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도덕적 자격을 얻는다는것은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시장의 보상에 대해 수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시장이 부여하는 자격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로부터 도덕적 자격을 부여받은 이들이 시장으로부터 시장 가치를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에 대한 세율이 근로 세율보다 낮은 것은 여러가지 시장 논리가 작용한 것이지 노동의 가치를 폄훼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국제적으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고 각 국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대에서 금융분야의 세율을 높이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가 많은 일이기도 하다. 또한 자본을 운용하는 것 또한 노동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도가 가치있는 이유는 샌델만이 내세울 수 있는 대안을 시사했다는 것에 있다. 기존의 능력주의에 대한 많은 논의에서 다루었던 대안은 교육의 확대와 같은 다소 간접적이고 보수적인 형식의 해결법이었다. 그러나 제비뽑기나 근로소득세 인하와 같은 파격적인 대안들을 제시함으로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의 접근을 모색해보게 되었다. 시행되지 않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느껴질 지 몰라도 막상 진지하게 고려해보았을 때 물꼬를 튼다는 관점에서 용인될 수 있기도 하다(부작용이 있겠지만).
경제웅2021-03-17 21:27
지운님 안녕하세요!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주신 덕분에, 대부분의 내용에 비교적 공감하며 읽은 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 말씀하신 내용 일부에 의견을 드립니다.
1. 시장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혼용한 것은 샌델이 아니라 맨큐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맨큐는 샌델이 언급했다고 인용해주신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맨큐는 경쟁시장의 균형에서 생산요소(노동)는 그의 한계생산가치만큼 지불받으며, 이것은 그가 "가질 자격이 있는(what they deserve)", "도덕적으로 그의 것인(rightfully his)", "응분의 몫(desert, 이는 도덕적 뉘앙스를 강하게 띱니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맨큐의 글 "Spreading the Wealth Around" 295쪽 참조). 오히려 샌델은 지운님처럼 시장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분리를 주장하며(이는 What Money Can't Buy에서 두드러집니다) 시장이 노동에 대해 도덕으로 보상하는 것을 거부하지요. 시장이 도덕적 자격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맨큐 및 그 부류의 '정당한 자격' 이론가들이 펼친 주장입니다.
2. 금융과 근로 문제에 대해, 저는 "시장 논리가 작용한 것"과 "노동의 가치를 폄훼한 것"이 배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샌델의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금융 세율은 금융에 명예를 부여하기 위해 낮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말씀하신 대로 시장논리에 의한 결정이겠지요), 낮게 정해진 금융 세율은 금융에 명예를 부여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근로의 명예를 낮추게 되고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소득 무의미론이 회자되고, 정직하게 일로만 돈 벌려는 사람이 바보가 되고, 점점 더 많은 '개미'들이 주식으로 대표되는 금융상품에 뛰어드는 것(사진 참조)을 그 증상으로 볼 수 있겠고요. 물론 정보 접근성 향상, 모바일 계좌 상용화 등 다른 변수도 있겠지만요.
금융 세율을 높이는 것은 국가 경쟁력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자본을 운용하는 것도 엄연히 노동이라는(경영학전공으로서..ㅠㅠ) 점에는 백번 동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1. 시장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혼용한 것은 샌델이 아니라 맨큐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맨큐는 샌델이 언급했다고 인용해주신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맨큐는 경쟁시장의 균형에서 생산요소(노동)는 그의 한계생산가치만큼 지불받으며, 이것은 그가 "가질 자격이 있는(what they deserve)", "도덕적으로 그의 것인(rightfully his)", "응분의 몫(desert, 이는 도덕적 뉘앙스를 강하게 띱니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맨큐의 글 "Spreading the Wealth Around" 295쪽 참조). 오히려 샌델은 지운님처럼 시장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분리를 주장하며(이는 What Money Can't Buy에서 두드러집니다) 시장이 노동에 대해 도덕으로 보상하는 것을 거부하지요. 시장이 도덕적 자격을 부여한다는 주장은 맨큐 및 그 부류의 '정당한 자격' 이론가들이 펼친 주장입니다.
2. 금융과 근로 문제에 대해, 저는 "시장 논리가 작용한 것"과 "노동의 가치를 폄훼한 것"이 배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샌델의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금융 세율은 금융에 명예를 부여하기 위해 낮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말씀하신 대로 시장논리에 의한 결정이겠지요), 낮게 정해진 금융 세율은 금융에 명예를 부여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근로의 명예를 낮추게 되고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근로소득 무의미론이 회자되고, 정직하게 일로만 돈 벌려는 사람이 바보가 되고, 점점 더 많은 '개미'들이 주식으로 대표되는 금융상품에 뛰어드는 것(사진 참조)을 그 증상으로 볼 수 있겠고요. 물론 정보 접근성 향상, 모바일 계좌 상용화 등 다른 변수도 있겠지만요.
금융 세율을 높이는 것은 국가 경쟁력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자본을 운용하는 것도 엄연히 노동이라는(경영학전공으로서..ㅠㅠ) 점에는 백번 동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문보설2021-03-17 16:52
1. 능력주의 개념 소개 및 비판
: 제가 책을 읽고 이해한 방식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면 꼭 알려주세요.
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 및 재능에 비례하게 사회/경제적 성공을 배분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또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변수에 의해 보상 및 처벌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일견 사회적 발전에 있어 효율적인 방식이므로 대부분의 사회에 수용되었고,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생각이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일의 정당성을 따지고 윤리적 판단을 할 때에도 능력-보상의 관계가 지켜졌는가를 따진다. 일반적으로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우리의 습관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때의 ‘공정하다’의 의미는 정당한 행위의 기준을 제공하는 규범 혹은 윤리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윤리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와 통계자료가 등장하면서, 능력주의의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러한 지위를 세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 불평등에 탓을 돌리는 것이다. 즉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로 인해 실질적 평등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불평등이 완화된다 하더라도 능력주의의 공정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능력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능력-보상의 관계를 통해 어떤 유의미한 규범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어김과 어기지 않음이 모두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어기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사는 복잡하기 때문에 누구나 운이나 사회적 상황과 같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로 인해 능력과 비례하는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능도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종류의 재능이어야 걸맞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재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도 운이 따라야 한다. 게다가 재능이라는 것 자체가 순전히 운으로 부여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능력주의는 스스로 자신의 원칙을 어기는 방식으로밖에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정당성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이러한 이념에 따르는 사회의 개인은 성공 및 실패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된다.
2. 생각해 볼 문제 1 : 팬데믹 상황은 능력주의를 강화하는가?
그럼에도 능력주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점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에서 샌델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중국 대학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센델은 그 대학생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때로 환경적 요인은 능력주의 직관을 더욱 강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관계가 팬데믹 상황이라는 환경적 요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인지를 논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의 관점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코로나 이후 능력주의적 직관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과잉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진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교육을 예로 들자면, 기존 집단에서 경제적으로 높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의 자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상황에서 기술을 활용한 학습에 접근성이 더 높다. 오히려 전보다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을 더 유연하게 관리함으로써 학습에서의 이득을 볼 수 있다. 반면 저소득 집단의 자녀들은 그러한 기술에 접근성이 낮은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을 받는 산업 분야(숙박업, 요식업, 대면 서비스업)의 실직이 증가하는 상황으로, 이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가계 경제 문제에도 자신의 시간을 쏟아야 할 수 있다.
두 번째, 개인의 책임 증가와 노력정당화 효과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돌림으로써 부모, 선생, 사회의 도움과 운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지운다. 이러한 사고방식 하에서 개인이 느끼는 책임이 커진다면, 사회적 혜택과 운적 요소를 더욱 무시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책임이 증가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과중된 책임을 이겨낸 결과로서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노력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는 ‘실제로 그러한 성공이 전보다 더 희소해졌고, 따라서 더 획득하기 어려워졌는가?’ 에 대한 답변과는 무관하다. 노력정당화 효과는 인간의 심리적 습관이므로 개인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그 효력이 발생하는 반면,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객관적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덜 노력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성공을 가져가는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현재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낯설고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운영할 책임을 느끼게 한다. 또한 공공시설이 폐쇄되고, 그것을 개인의 가정 혹은 사설 시설로 대체하게 되면서 그러한 책임은 더욱 개인의 것이 되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개인의 책임과 능력주의 사고방식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능력주의 사고방식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3. 생각해 볼 문제 2: 유능력자 제비뽑기
샌델은 책 뒷부분에서 공동선, 조건의 평등 등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능력주의가 해체한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최상위 입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삶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 부분은 능력주의가 사회적 연대를 해체하고 그러한 해체를 기반으로 능력경쟁이 더 치열해짐으로써 악순환을 겪는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공동선, 조건의 평등이 그런 악순환의 연결을 끊어버릴 좋은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싶다. 그렇다면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어떨까?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짧지만 아주 자극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능력주의를 해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운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공고한 능력주의를 해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다양성 확보를 위해 계층별로 약간 다른 추첨방식을 도입하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흔히 대학에서 지균/일반을 나누듯이 사회적 연대를 끊어버리자는 것으로 들린다. 그가 말한 선별과 분투의 악순환을 끊는 데에는 분명 효과적이겠지만, 우리는 더 큰 악순환-사회적 연대 해체와 능력주의 폭정-을 고려해야 한다. 샌델이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넣었는지 그 맥락을 알 수 없다.
: 제가 책을 읽고 이해한 방식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면 꼭 알려주세요.
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 및 재능에 비례하게 사회/경제적 성공을 배분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또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변수에 의해 보상 및 처벌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일견 사회적 발전에 있어 효율적인 방식이므로 대부분의 사회에 수용되었고,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생각이다. 심지어 우리는 어떤 일의 정당성을 따지고 윤리적 판단을 할 때에도 능력-보상의 관계가 지켜졌는가를 따진다. 일반적으로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우리의 습관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때의 ‘공정하다’의 의미는 정당한 행위의 기준을 제공하는 규범 혹은 윤리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윤리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와 통계자료가 등장하면서, 능력주의의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러한 지위를 세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 불평등에 탓을 돌리는 것이다. 즉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로 인해 실질적 평등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불평등이 완화된다 하더라도 능력주의의 공정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능력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가 능력-보상의 관계를 통해 어떤 유의미한 규범적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어김과 어기지 않음이 모두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어기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사는 복잡하기 때문에 누구나 운이나 사회적 상황과 같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로 인해 능력과 비례하는 보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능도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종류의 재능이어야 걸맞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재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도 운이 따라야 한다. 게다가 재능이라는 것 자체가 순전히 운으로 부여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능력주의는 스스로 자신의 원칙을 어기는 방식으로밖에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능력주의는 정당성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이러한 이념에 따르는 사회의 개인은 성공 및 실패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된다.
2. 생각해 볼 문제 1 : 팬데믹 상황은 능력주의를 강화하는가?
그럼에도 능력주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점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에서 샌델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매몰된 중국 대학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센델은 그 대학생이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때로 환경적 요인은 능력주의 직관을 더욱 강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관계가 팬데믹 상황이라는 환경적 요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인지를 논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의 관점은, 동일하게 적용되어서 코로나 이후 능력주의적 직관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과잉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진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교육을 예로 들자면, 기존 집단에서 경제적으로 높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의 자녀들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상황에서 기술을 활용한 학습에 접근성이 더 높다. 오히려 전보다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을 더 유연하게 관리함으로써 학습에서의 이득을 볼 수 있다. 반면 저소득 집단의 자녀들은 그러한 기술에 접근성이 낮은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을 받는 산업 분야(숙박업, 요식업, 대면 서비스업)의 실직이 증가하는 상황으로, 이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가계 경제 문제에도 자신의 시간을 쏟아야 할 수 있다.
두 번째, 개인의 책임 증가와 노력정당화 효과가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돌림으로써 부모, 선생, 사회의 도움과 운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지운다. 이러한 사고방식 하에서 개인이 느끼는 책임이 커진다면, 사회적 혜택과 운적 요소를 더욱 무시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책임이 증가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과중된 책임을 이겨낸 결과로서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노력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는 ‘실제로 그러한 성공이 전보다 더 희소해졌고, 따라서 더 획득하기 어려워졌는가?’ 에 대한 답변과는 무관하다. 노력정당화 효과는 인간의 심리적 습관이므로 개인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그 효력이 발생하는 반면,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객관적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덜 노력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성공을 가져가는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현재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낯설고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상황에 올바르게 대처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운영할 책임을 느끼게 한다. 또한 공공시설이 폐쇄되고, 그것을 개인의 가정 혹은 사설 시설로 대체하게 되면서 그러한 책임은 더욱 개인의 것이 되고 있다. 이는 앞서 설명한 개인의 책임과 능력주의 사고방식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능력주의 사고방식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3. 생각해 볼 문제 2: 유능력자 제비뽑기
샌델은 책 뒷부분에서 공동선, 조건의 평등 등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능력주의가 해체한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최상위 입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의 삶 또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 부분은 능력주의가 사회적 연대를 해체하고 그러한 해체를 기반으로 능력경쟁이 더 치열해짐으로써 악순환을 겪는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나도 공동선, 조건의 평등이 그런 악순환의 연결을 끊어버릴 좋은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싶다. 그렇다면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어떨까?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짧지만 아주 자극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능력주의를 해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운을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공고한 능력주의를 해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다양성 확보를 위해 계층별로 약간 다른 추첨방식을 도입하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흔히 대학에서 지균/일반을 나누듯이 사회적 연대를 끊어버리자는 것으로 들린다. 그가 말한 선별과 분투의 악순환을 끊는 데에는 분명 효과적이겠지만, 우리는 더 큰 악순환-사회적 연대 해체와 능력주의 폭정-을 고려해야 한다. 샌델이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넣었는지 그 맥락을 알 수 없다.
정지운2021-03-17 17:57
저 역시 유능력자 제비뽑기가 허무맹랑한 소리로 느껴집니다. 자극적인 소재를 가져와서 대중들에게 관심을 불러오고 쟁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팬데믹 이후 능력주의가 확대될 것이라는 시각은 매우 예리하신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가정에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없는 환경에 더하여 교육기관도 운영하지 않는 현 시점은 저소득층 가정에게 있어서 아주 치명적일 수 밖에 없겠네요.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우리 사회가 윤리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식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환경적 요인을 극복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점차 더 후해지고 있어서.. 바로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기울어진 경쟁을 올바르게 맞춰줄만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전윤창2021-03-17 18:2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비뽑기에 관해 첨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글을 씁니다. 제 경우 엘리트의 정치 독점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국회의원 추첨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는데,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추첨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기준을 두자고 이야기합니다. 피선거권, 선거권도 기준이 있듯이요. 양원제로 개편해 상원을 선거로 선별에 보완하거나, 보좌진을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별한다든지의 보완책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성별, 계층, 능력 다양한 편중화를 줄일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스웨덴처럼 다양한 계층과 직업군이 국회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요. 국민참여 재판제도도 2~3년 정도 시행하면 대수의 법칙에 의해 대부분의 비율이 균등하게 맞춰진다더군요.
박건규2021-03-17 20:15
저 또한 팬데믹 상황이 어느 정도 능력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약간 다른 차원의 논의이긴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의 갈등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능력주의가 간접적으로 지지되는 상황을 예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적 근거를 제시해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내집단 선호와 외집단 폄훼를 본능화하였는데, 집단 간 경쟁 상황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1]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빈층을 무시하는 엘리트들이나 분노를 표출하며 극단적인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경제적 약자 계층들의 모습, 즉 샌델이 말한 승리자와 패배자의 대립에서 이런 경향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은 감염병이 닥친 상황에서 (진화 과정에서 감염이 위험하며 최대한 피해야 함을 체득했기에) 행동 면역 체계가 작동하여 혐오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는 외부인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2]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팬데믹 시기의 특수성은 (외국인 혐오 등이 증가했듯) 두 계층 간의 불신과 혐오를 더욱 강화할 것이며, 이것이 직접적으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않더라도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적 기제를 통해서 볼 때, 팬데믹은 사회 내의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고,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092111015&code=990100
[2]https://www.bbc.com/korean/news-52219441
여기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적 근거를 제시해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내집단 선호와 외집단 폄훼를 본능화하였는데, 집단 간 경쟁 상황에서 이런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1]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빈층을 무시하는 엘리트들이나 분노를 표출하며 극단적인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경제적 약자 계층들의 모습, 즉 샌델이 말한 승리자와 패배자의 대립에서 이런 경향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간은 감염병이 닥친 상황에서 (진화 과정에서 감염이 위험하며 최대한 피해야 함을 체득했기에) 행동 면역 체계가 작동하여 혐오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는 외부인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2]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팬데믹 시기의 특수성은 (외국인 혐오 등이 증가했듯) 두 계층 간의 불신과 혐오를 더욱 강화할 것이며, 이것이 직접적으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않더라도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적 기제를 통해서 볼 때, 팬데믹은 사회 내의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고, 능력주의 체제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092111015&code=990100
[2]https://www.bbc.com/korean/news-52219441
서강민2021-03-17 21:28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먼저, 현재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상황이 능력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저는 이와 생각이 약간 다릅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팬데믹 상황이 능력주의를 약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근거는 크게 2가지 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펜데믹 상황은 곧 '불확실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안정된 사회, 예상가능한 사회에 비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어느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반면, 오히려 불확실성이 큰 사회일수록 '행운'이나 '불운'같은 무작위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성공으로 이끈다는 신념이 더욱 약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개인간 출발 지점의 불균등을 유발하며, 이러한 불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 역시 감소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문보설 학우님의 생각과 제 생각을 비교해보면, 펜데믹으로 인해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는 감소하고, '능력주의로 인한 폐해, 불평등의 정도'는 오히려 증가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현재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상황이 능력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저는 이와 생각이 약간 다릅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팬데믹 상황이 능력주의를 약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근거는 크게 2가지 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펜데믹 상황은 곧 '불확실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안정된 사회, 예상가능한 사회에 비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어느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반면, 오히려 불확실성이 큰 사회일수록 '행운'이나 '불운'같은 무작위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이 성공으로 이끈다는 신념이 더욱 약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개인간 출발 지점의 불균등을 유발하며, 이러한 불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 역시 감소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문보설 학우님의 생각과 제 생각을 비교해보면, 펜데믹으로 인해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는 감소하고, '능력주의로 인한 폐해, 불평등의 정도'는 오히려 증가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보설2021-03-17 22:32
@정지운
답글 감사합니다.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저도 흥미롭다고 생각하지만 능력주의의 해결책으로 작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제 논점을 정확히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 변화로 인한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제시하신 부분은, 저로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예시를 제공함으로써 능력주의 신화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적 합의와 계층별 공동체적 인정이 이루어진다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 변화로 인한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제시하신 부분은, 저로서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의 예시를 제공함으로써 능력주의 신화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적 합의와 계층별 공동체적 인정이 이루어진다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문보설2021-03-17 22:37
@전윤창
전윤창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저는 샌델이 제시한 '대학 선별 기준으로서의 제비뽑기', 그리고 '다양성 강화를 위한 제비뽑기 방식 차등화'에만 착안하여 이 부분이 샌델의 앞선 주장과 약간 비일관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분야에 확장한 사례도 있었군요.... 제가 책이 제시하는 논리에 안주하여 관점이 좁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경우처럼 최소한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제비뽑기라는 방식 자체만으로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제비뽑기에 동의합니다. 새롭고 확장된 관점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보설2021-03-17 22:41
@박건규
박건규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내집단 의식 강화는 저도 뉴스에서 외국인 혐오 문제 관련해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여기에 적용할 생각을 못했네요.(박한선 교수님께서 제가 본 뉴스를 인터뷰하셨어서 기억이 납니다 ㅎㅎ) 말씀하시는 부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능력주의 문제가 심화되는 원인은 집단 간 갈등으로 인한 공동체 연대의 해체와 그로 인한 능력주의 강화라는 악순환에 있기에, 이 부분을 정확히 짚은 의견이라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관점 감사합니다.
문보설2021-03-17 23:05
@서강민
서강민님, 답글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두가지 근거가 제가 반대되는 입장을 펼칠 때에 사용한 근거들과 출발점이 비슷한 부분들이 있어 아주 흥미롭습니다. 첫 번째 근거로 드신 '불확실성'에 관한 주장부터 답변드리겠습니다. 행운이나 불운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한다면 능력주의 신념이 약화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말 사회 구성원들이 그러한 운의 요소를 인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는 회의적인 편입니다. 능력주의 하에서의 문제점 중 하나가 성공한 자들이 운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운이 작용했는데도 말입니다. 즉, 능력주의 신념 약화는 실제로 불확실성이 커졌는가 하는 객관적 사실과 별개로 그러한 사실을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할 수 있느냐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입지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운적 요소가 크게 인식될 수 있고, 따라서 포퓰리즘이 준동하는 등 능력주의 신념이 약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엘리트 계층에게 그러한 운적 요소들이 크게 인식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심리적으로 자신의 성과를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낸 것으로 정당화하고 싶어합니다.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불확실성이라는 요소는 계층 간 갈등을 더 심화할 뿐, 우리 사회 전체의 능력주의 신념 약화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낮은 입지를 차지한 사람들이 운적 요소를 인식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의심의 싹을 틔운다면 그것도 의미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계층 간 갈등이 커진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가 사회 전반의 능력주의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번째 근거로 드신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부분도 잘 읽었습니다. 제가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생각한 이유는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회적으로 낮은 입지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입지를 차지한 사람에 대한 선망이 커지고,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한 위치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능력주의에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는 겉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으니까요. 말씀하신 맥락은 사람들이 그러한 출발점의 불평등을 문제시했을 경우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도가 감소하는게 아니라, '능력주의가 잘 적용되고 있지 않다'라는 문제의식이 강해지지 않을까요? 이는 능력주의 자체 대한 신앙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째 근거로 드신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부분도 잘 읽었습니다. 제가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생각한 이유는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회적으로 낮은 입지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입지를 차지한 사람에 대한 선망이 커지고,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그러한 위치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능력주의에 찬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는 겉으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으니까요. 말씀하신 맥락은 사람들이 그러한 출발점의 불평등을 문제시했을 경우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도가 감소하는게 아니라, '능력주의가 잘 적용되고 있지 않다'라는 문제의식이 강해지지 않을까요? 이는 능력주의 자체 대한 신앙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용수2021-03-18 00:56
날카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샌델은 깊게 다루지 않은 코로나 19라는 주제를 연결시킨 것이 지금 사회에 맞는 보다 현실적인 논의를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댓글 중에 말씀해 주신 성공한 자들이 보통 자신의 성공에 대해 운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고, 현실적인 분석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을 엘리트들에게 얼마나 잘 납득시킬 수 있느냐가 능력주의의 폭정을 막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늘어나는 경제적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도 대부분 동의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능력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고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일 때만 참인 것 같습니다. 늘어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만들어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끝없이 불어나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안감, 패자가 느끼는 굴욕감이 결국 사람들이 포퓰리즘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점이 커지고 커져 더 이상 능력주의에 대한 의존성만으로 담아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 주소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점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팬데믹 상황은 능력주의를 강화시키고 이러한 상황이 능력주의의 강화 자체적인 측면으로 보나 포퓰리즘 같은 다소 극단적인 주의의 성행 측면으로 보나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학우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늘어나는 경제적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도 대부분 동의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능력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고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일 때만 참인 것 같습니다. 늘어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만들어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나, 이 과정에서 끝없이 불어나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안감, 패자가 느끼는 굴욕감이 결국 사람들이 포퓰리즘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점이 커지고 커져 더 이상 능력주의에 대한 의존성만으로 담아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 주소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점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팬데믹 상황은 능력주의를 강화시키고 이러한 상황이 능력주의의 강화 자체적인 측면으로 보나 포퓰리즘 같은 다소 극단적인 주의의 성행 측면으로 보나 좋은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학우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문보설2021-03-18 12:58
@조용수
조용수 님, 코멘트 감사합니다. 제가 성공한 자들이 성공에 대해 운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승자의 오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결국 운적인 요소들을 엘리트들에게 인식시키고 그러한 오만을 줄여 나가는 것이 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을 완화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불평등에 관해서 많은 댓글들을 남겨주셨는데, 저는 과거에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심화한 양상만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능력주의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논쟁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불평등은 또 다른 양상으로, 오히려 문제의식을 자극하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네요.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제 감상문의 가장 큰 문제가 팬데믹에서의 능력주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서만 쓰고, 그것을 해결할 방안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을 정확히 찌르셨네요 ㅎㅎ...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 팬데믹이라는 시대상황에 국한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독자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할 능력이 되지는 않지만 샌델의 해결책을 검토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에 대해 저는 (원 댓글에서 말했듯이) 이론적으로 동의하는 편인데요, 따져 보자면 공동선 부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능력주의가 너무 공고하고, 사회적 통념에 해당하니까 공동선을 합의하려고 하면 또다시 능력주의 직관에 사로잡힐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약간 능력주의의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현상을 큰 변화로 여기지 않는듯한 경향이 있는 것도 같은데요 그 이유에 이미 능력주의가 사회의 강력한 통념으로 자리잡아서, 사실 저희는 여기서 이런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능력주의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을 것 같다는 제 생각의 영향도 있을 것 같습니다.(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 무슨 논리가 있지가 않아서 저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냥 경험주의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현 상황에 대한 사회적인 불만도, '왜 능력을 기준으로 보상하는가'가 아니라 '시작점이 불평등한데, 이 불평등을 완화하고 "엄밀하게" 능력에 따라 보상해야 한다(즉 능력주의를 올바르게 적용해야 한다)'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좀 지난 이야기지만 수저론이라든지요... 계급이 세습되는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력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출발점의 불평등을 문제삼는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 직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활성화되고 있고, 그런 직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능력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아직 공동선에 대한 합의라는 해결책을 내놓기에는 조금 시기상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세요. 결국 문제는 인식의 변화인 것 같기도 하네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또 비판만 하다가 끝난 것 같아서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더 필요하네요 ㅎㅎ...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불평등에 관해서 많은 댓글들을 남겨주셨는데, 저는 과거에 불평등이 능력주의를 심화한 양상만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능력주의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논쟁이 이루어지는 시기의 불평등은 또 다른 양상으로, 오히려 문제의식을 자극하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네요.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제 감상문의 가장 큰 문제가 팬데믹에서의 능력주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대해서만 쓰고, 그것을 해결할 방안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을 정확히 찌르셨네요 ㅎㅎ...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 팬데믹이라는 시대상황에 국한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독자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할 능력이 되지는 않지만 샌델의 해결책을 검토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에 대해 저는 (원 댓글에서 말했듯이) 이론적으로 동의하는 편인데요, 따져 보자면 공동선 부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능력주의가 너무 공고하고, 사회적 통념에 해당하니까 공동선을 합의하려고 하면 또다시 능력주의 직관에 사로잡힐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약간 능력주의의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현상을 큰 변화로 여기지 않는듯한 경향이 있는 것도 같은데요 그 이유에 이미 능력주의가 사회의 강력한 통념으로 자리잡아서, 사실 저희는 여기서 이런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능력주의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을 것 같다는 제 생각의 영향도 있을 것 같습니다.(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 무슨 논리가 있지가 않아서 저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냥 경험주의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현 상황에 대한 사회적인 불만도, '왜 능력을 기준으로 보상하는가'가 아니라 '시작점이 불평등한데, 이 불평등을 완화하고 "엄밀하게" 능력에 따라 보상해야 한다(즉 능력주의를 올바르게 적용해야 한다)'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좀 지난 이야기지만 수저론이라든지요... 계급이 세습되는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력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출발점의 불평등을 문제삼는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 직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이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활성화되고 있고, 그런 직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거나 능력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아직 공동선에 대한 합의라는 해결책을 내놓기에는 조금 시기상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세요. 결국 문제는 인식의 변화인 것 같기도 하네요.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또 비판만 하다가 끝난 것 같아서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더 필요하네요 ㅎㅎ...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주영2021-03-17 17:07
해당 책을 읽으면서 2019년 방영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떠올랐다. 해당 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능력주의 사회와 그 능력의 대물림 현상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와 권력을 쥔 부모가 자식의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또다른 여 주인공 해나가 등장하게 되는데, 예서는 해나와 성적 경쟁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감사나 해나의 불운한 환경에 대한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은 무시하고 그저 결과만을 가지고 해나를 평가하였다.
드라마에서 다루었듯, 샌델이 비판하고 있는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능력주의 자체의 시작은 개인의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해 대우받고 평가받는 것이었으며, 이는 사회 계층이동의 발판을 열어준 좋은 정치 철학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항상 동떨어져 있다. 개인이 가지게 되는 능력이라는 것은, 신분과 마찬가지로 대물림이 가능하다. 이전과는 다르게 부와 명예, 그리고 능력까지 물려받은 이들은 자신의 노력이 들어간 능력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렇게 능력주의는 사회 상위계층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줄 좋은 핑계거리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대물림의 정도는 점점 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능력을 자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면, 재화가 되어버린 능력에 대한 수요에 맞춰 공급 역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들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부’와 ‘성공’ 사이에는 분명 큰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두 가지가 동일하게, 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 속에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반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을 외면하기는 어렵고 그리해서도 안된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어찌되었건 ‘능력있는’ 이들에게 있고 이들을 무작정 비판하며 특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의 특권을 누리는 특정한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러한 이들에게 제제를 가해 사회를 바꿔 나가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샌델은 비판적 의견을 내놓았던 부분이나, 좋은 환경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이해와 그 환경적 제약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 역시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되어 조심스럽지만 본래 자연세계에서도 힘의 불균등은 존재한다. 운이 적용되어 강하게 태어난 개체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사라진다. 해당 자연현상들을 보고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세계도 똑같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인간은 동물 그 이상이기 때문에, 또 그 자체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지’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사회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자연세계와 사회는 엄연히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Natural selection을 부정하고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이데아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자연세계의 일부인 이상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피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신봉은 비판하되, 개인의 노력에 대한 완전한 부정보다는 이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운이 나빠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지가 필요해 보인다. “우연히 선택을 받은 것은 축복이다. 그러한 그대들을 무작정 비판할 생각은 없으니 능력주의에 빠지지 말고 그대들이 선택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데아 실현을 위해 그대들의 그 능력을 사용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드라마에서 다루었듯, 샌델이 비판하고 있는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능력주의 자체의 시작은 개인의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해 대우받고 평가받는 것이었으며, 이는 사회 계층이동의 발판을 열어준 좋은 정치 철학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항상 동떨어져 있다. 개인이 가지게 되는 능력이라는 것은, 신분과 마찬가지로 대물림이 가능하다. 이전과는 다르게 부와 명예, 그리고 능력까지 물려받은 이들은 자신의 노력이 들어간 능력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렇게 능력주의는 사회 상위계층에게 자신의 지위를 물려줄 좋은 핑계거리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의 대물림의 정도는 점점 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능력을 자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면, 재화가 되어버린 능력에 대한 수요에 맞춰 공급 역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들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부’와 ‘성공’ 사이에는 분명 큰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두 가지가 동일하게, 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 속에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반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을 외면하기는 어렵고 그리해서도 안된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어찌되었건 ‘능력있는’ 이들에게 있고 이들을 무작정 비판하며 특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의 특권을 누리는 특정한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러한 이들에게 제제를 가해 사회를 바꿔 나가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샌델은 비판적 의견을 내놓았던 부분이나, 좋은 환경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이해와 그 환경적 제약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 역시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되어 조심스럽지만 본래 자연세계에서도 힘의 불균등은 존재한다. 운이 적용되어 강하게 태어난 개체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사라진다. 해당 자연현상들을 보고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세계도 똑같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인간은 동물 그 이상이기 때문에, 또 그 자체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지’라는 것을 만들어냈고 사회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자연세계와 사회는 엄연히 다른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Natural selection을 부정하고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이데아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자연세계의 일부인 이상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피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신봉은 비판하되, 개인의 노력에 대한 완전한 부정보다는 이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운이 나빠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지가 필요해 보인다. “우연히 선택을 받은 것은 축복이다. 그러한 그대들을 무작정 비판할 생각은 없으니 능력주의에 빠지지 말고 그대들이 선택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데아 실현을 위해 그대들의 그 능력을 사용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싶다.
최서원2021-03-17 17:45
주영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주영님이 쓰신 내용이 제가 늘상 능력주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내용과 비슷하여 읽으며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샌델이 복지제도 자유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언급한 부분에서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복지의 대상이 게으른 사람이 아닌, 노력은 했으나 불운하게도 실패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당하다고 생각하므로 복지제도의 시행에서는 일정부분의 선별과정이 선행될 수밖에 없어 결국 구휼제와 비슷하다는 점이 문제라는 내용 ) 누군가에게 제도적 지지를 하기 위해 선행되는 '선별 과정' 자체를 행하는 이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엘리트 층에게는 선민의식을, 저소득층에게는 패배감과 선별에서 제외되어 모든 것이 본인의 책임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래서 글에서 언급하신 '환경적 제약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등의 제도적 지지에서 패배자들의 좌절감이나 책임이 강화되는 문제점이나 실제로 노력은 했으나 순간의 실수로 인해 혜택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계층을 줄이는 방안에 대해 저 나름대로 고민을 해보았으나 딱히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주영님의 의견이 궁금해 댓글을 남겨봅니다. 감사합니다!
최민정2021-03-17 18:32
주영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힘의 불균형에 대해 주영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순수한 완전함의 현실화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운이 나빠 기회를 받기 위해 제도적 지원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원 이전에 샌델이 결론 끝자락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불균형 상태에서 덜 성공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탓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능력이나 재능이 있는 존재들이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353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은 개인의 선천적 조건과 후천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보다 더 우월하기에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다'고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을 밝혀내고 그 부분에서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대학뿐 아니라 다양한 기관, 공동체, 주체가 모여 민주적으로 시민성과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힘의 불균형에 대해 주영 님의 글을 읽고 조금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순수한 완전함의 현실화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운이 나빠 기회를 받기 위해 제도적 지원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원 이전에 샌델이 결론 끝자락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불균형 상태에서 덜 성공한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을 탓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능력이나 재능이 있는 존재들이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353쪽)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은 개인의 선천적 조건과 후천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보다 더 우월하기에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다'고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을 밝혀내고 그 부분에서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대학뿐 아니라 다양한 기관, 공동체, 주체가 모여 민주적으로 시민성과 공정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류성원2021-03-18 10:10
주영님 글 잘 읽었습니다! 능력주의의 폭정을 견제해야하지만, 그 방식이 개인의 노력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순전한 운이 아니라 가시화되지 않고,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개인의 노력’이 추가된다는 점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착각’이 생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계급을 결정하는 것이 순전히 사회의 덕/탓인 한편,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운, 개인의 노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서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요인의 결합으로 나타난 결과를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근거를 들어 정당화합니다.
글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기에 어느 정도의 ‘힘의 불균등’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해주셨는데,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능력(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충분히 인정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영님께서는 ‘자연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애초에 어떤 것이 능력인지에 대한 잣대도 사회의 주관성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잠깐 배제한다면) 자연선택된 능력도 다른 조건에 따라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A, B라는 아이가 동일하게 수학적 능력을 100만큼 가지고 태어나 동일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면 둘은 똑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의 경제적 환경, 주어지는 기회, 외모, 사회생활 능력, 살게 되는 지역, 만나게 되는 사람들 등등 수많은 외부적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노력은 물론, 능력 그 자체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만약 능력주의의 결과가 자연선택에 의한 힘의 불균등 때문이라면, 거기서의 ‘힘’은 단지 한 개인이 가지고 태어나는 자질을 넘어 수많은 외부적 요인도 포함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한편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주의가 현대사회의 기둥과도 같은 단단한 체제라 이것이 불공정하다고 해서 당장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에 사회가 변화하려면 능력주의의 수혜자들이 자신이 입고 있는 수혜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할 텐데, 그런 인식은 자신이 ‘선택 받았다’는 것이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수많은 요인(물론 그 안에 자신의 노력이 아주 작은 비율 들어가겠지만)이 운 좋게 결합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순전한 운이 아니라 가시화되지 않고,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개인의 노력’이 추가된다는 점이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착각’이 생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계급을 결정하는 것이 순전히 사회의 덕/탓인 한편,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운, 개인의 노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서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요인의 결합으로 나타난 결과를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는 근거를 들어 정당화합니다.
글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기에 어느 정도의 ‘힘의 불균등’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해주셨는데,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능력(자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충분히 인정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영님께서는 ‘자연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애초에 어떤 것이 능력인지에 대한 잣대도 사회의 주관성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잠깐 배제한다면) 자연선택된 능력도 다른 조건에 따라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A, B라는 아이가 동일하게 수학적 능력을 100만큼 가지고 태어나 동일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면 둘은 똑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의 경제적 환경, 주어지는 기회, 외모, 사회생활 능력, 살게 되는 지역, 만나게 되는 사람들 등등 수많은 외부적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노력은 물론, 능력 그 자체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만약 능력주의의 결과가 자연선택에 의한 힘의 불균등 때문이라면, 거기서의 ‘힘’은 단지 한 개인이 가지고 태어나는 자질을 넘어 수많은 외부적 요인도 포함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한편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주의가 현대사회의 기둥과도 같은 단단한 체제라 이것이 불공정하다고 해서 당장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에 사회가 변화하려면 능력주의의 수혜자들이 자신이 입고 있는 수혜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할 텐데, 그런 인식은 자신이 ‘선택 받았다’는 것이 뛰어난 능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수많은 요인(물론 그 안에 자신의 노력이 아주 작은 비율 들어가겠지만)이 운 좋게 결합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서원2021-03-17 17:23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사람들이 능력주의적 사고에 빠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학력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 전반에 물든 고학력자에 대한 우대와 저학력자에 대한 배제는 우리 사회를 과거 계급제 사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게 만든다. 엘리트들은 기회와 자격이 ‘평등’한 환경에서는 누가 됐더라도 성공할 자격이 있으며 그 결실은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공과 개인의 능력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자들에게는 본인의 성공이 행운과 주어진 환경이나 재능에 큰 영향을 받아 가능했음을 망각하게 만들어 결국 승자의 오만에 빠지게 만들고 불우한 자들에게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 결국 자신에게 있다는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만든다. 샌델은 이러한 능력 신봉적 태도가 과거 사회적 이동성이 높았던 시기에는 동기부여와 동시에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으나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사다리는 맞지만, 그 사다리의 간격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현 사회에서는 결국 사회 분열을 유발하는, 부정의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제언한다.
자유시장 자유주의&복지국가 자유주의의 한계점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하이에크의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롤스의 복지국가 자유주의 둘 모두가 능력주의의 강화로 귀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새롭게 다가왔다. 자유시장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적어도 본인의 실패를 자신의 능력 탓으로 돌리지는 않을테니 개인의 좌절감을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또, 복지국가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혹시나 하는 불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부가 재분배되므로 불평등이나 사회적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롤스는 하이에크의 사회에서는 가치=능력으로 해석되어 능력주의와 마찬가지로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좌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롤스의 사회에서는 자격이 부의 소유와는 무관하니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는 복지제도 자체가 승자들에게는 ‘동정심’에 기인한 행동으로 구휼행위나 다름없으니 또 다시 오만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한다.
샌델이 제시한 해결 방안의 한계
이 책에서 가장 아쉽다고 느꼈던 점은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들의 한계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샌델 역시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부분이었다. 능력주의가 극심해지는 때가 대입 시기이므로 (샌델의 의견으로는) 대입 시에 1차로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내고, 최종 합격자는 그들 중 제비뽑기를 통해 뽑아 완전한 운에 맡기자는 것이 그가 제시한 거의 유일한 해결책인듯하다. 그는 제비뽑기를 이용하게 된다면 떨어지더라도 ‘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자신을 위안할 수 있고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입시의 과열도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가 예측하는 것처럼 일부를 운에 맡기는 것이 능력주의를 완화시킬 수 있을까? 대학의 학력수준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1차적 선별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고 결국 그 선별의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입시 경쟁에 시달릴 것이다. 또, 합격의 당락이 운에 맡겨지는 것은 꽤나 한국의 ‘정시’ 제도와 비슷해보이는데, 아무리 자신이 시험을 잘 보더라도 (수석은 아니더라도) 그 해의 다른 사람들이 어느 과에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냐에 따라 본인의 합격이 정해지니 결국 자신의 능력보다는 운을 통해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시제도를 확대시키는 것이 입시 경쟁의 과열을 완화시킨다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는 듯하다. 결국 운이 좋지 않아 떨어진 패배자들은 좌절감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운마저도 자신의 능력으로 보고 오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능력을 기준으로, 혹은 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지 않아야한다는 법이라도 생겨 능력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좌절감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득이 높거나 사회적 명성이 높은 특정 직업군에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에 분명 학력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라도 사람들을 ‘선별’해야 한다. 능력이 아닌 다른 기준을 샌델이 원하는 것처럼 제비뽑기로 둔다면 사실상 진정 열심히 했지만 운이 나빠서 실패한 제도상 희생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들이 지금의 패자의 좌절감을 동일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능력주의가 문제라는 것에만 집중해 능력주의를 완화하자는 샌델의 주장과는 달리, 패자의 좌절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도움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공동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샌델은 복지제도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문제점이 결국 엘리트 층이 선별하게 되는 구조와 선민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부의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 부의 분배 과정부터 조금 더 평등해지는 건 어떨까?
사실 가장 완전한 해결 방안은 모든 직업군(반인륜적 행위를 일삼는 직업군이나 범법적 행위를 하는 마약상과 같은 직업군은 제외하고)에 대한 존중과 동등한 대우가 주어지는 것일테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루 아침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청소노동자를 일명 ‘사’자 붙은 직업들에 비해 선호하거나 동등하게 선호하게 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어느정도는 사회적 명성을 대변하므로 노동자 집단과 엘리트 집단에게 비슷한 임금을 지닐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이 그 실현책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를 우리는 일정 부분 실현하고 있지만 최저임금만을 높인다면 그에 따라 물가가 상승하고 엘리트들의 임금 역시도 비례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폭으로 상승될 수 있기에 최저임금을 높임과 동시에 최‘고’임금의 상한선을 두는 것이 어느정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경력직에 대하여 직업군이 어디인지에 관련없이 임금을 상승하도록 권고한다거나 등의 노력이 있다면 점차 선호직업에 대한 쏠림현상도 완화될 것이라고 예상해보았다. 그러나 이 방안 역시도 자본의 분배를 ‘공산주의화’시키는 것과 유사하고 자유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며 실현된다하더라도 또다른 불평등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론은, 완전한 해결방안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환경의 덕을 본 사람들이 이러한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인식 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또, 내 입장에서는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직업군을 암묵적 계급을 통해 구분하여 바라보는 것이 사람들의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좌절감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학우분들과 근본적인 문제가 능력주의에 있는지, 혹은 사람들의 인식에 있는지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사람들이 능력주의적 사고에 빠지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학력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사회 전반에 물든 고학력자에 대한 우대와 저학력자에 대한 배제는 우리 사회를 과거 계급제 사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게 만든다. 엘리트들은 기회와 자격이 ‘평등’한 환경에서는 누가 됐더라도 성공할 자격이 있으며 그 결실은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공과 개인의 능력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자들에게는 본인의 성공이 행운과 주어진 환경이나 재능에 큰 영향을 받아 가능했음을 망각하게 만들어 결국 승자의 오만에 빠지게 만들고 불우한 자들에게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 결국 자신에게 있다는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만든다. 샌델은 이러한 능력 신봉적 태도가 과거 사회적 이동성이 높았던 시기에는 동기부여와 동시에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으나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사다리는 맞지만, 그 사다리의 간격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현 사회에서는 결국 사회 분열을 유발하는, 부정의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제언한다.
자유시장 자유주의&복지국가 자유주의의 한계점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하이에크의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롤스의 복지국가 자유주의 둘 모두가 능력주의의 강화로 귀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새롭게 다가왔다. 자유시장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적어도 본인의 실패를 자신의 능력 탓으로 돌리지는 않을테니 개인의 좌절감을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또, 복지국가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혹시나 하는 불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부가 재분배되므로 불평등이나 사회적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롤스는 하이에크의 사회에서는 가치=능력으로 해석되어 능력주의와 마찬가지로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좌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롤스의 사회에서는 자격이 부의 소유와는 무관하니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는 복지제도 자체가 승자들에게는 ‘동정심’에 기인한 행동으로 구휼행위나 다름없으니 또 다시 오만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한다.
샌델이 제시한 해결 방안의 한계
이 책에서 가장 아쉽다고 느꼈던 점은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들의 한계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샌델 역시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부분이었다. 능력주의가 극심해지는 때가 대입 시기이므로 (샌델의 의견으로는) 대입 시에 1차로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내고, 최종 합격자는 그들 중 제비뽑기를 통해 뽑아 완전한 운에 맡기자는 것이 그가 제시한 거의 유일한 해결책인듯하다. 그는 제비뽑기를 이용하게 된다면 떨어지더라도 ‘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자신을 위안할 수 있고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입시의 과열도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그가 예측하는 것처럼 일부를 운에 맡기는 것이 능력주의를 완화시킬 수 있을까? 대학의 학력수준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1차적 선별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고 결국 그 선별의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끊임없이 입시 경쟁에 시달릴 것이다. 또, 합격의 당락이 운에 맡겨지는 것은 꽤나 한국의 ‘정시’ 제도와 비슷해보이는데, 아무리 자신이 시험을 잘 보더라도 (수석은 아니더라도) 그 해의 다른 사람들이 어느 과에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냐에 따라 본인의 합격이 정해지니 결국 자신의 능력보다는 운을 통해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시제도를 확대시키는 것이 입시 경쟁의 과열을 완화시킨다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는 듯하다. 결국 운이 좋지 않아 떨어진 패배자들은 좌절감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운마저도 자신의 능력으로 보고 오만에 빠지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능력을 기준으로, 혹은 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지 않아야한다는 법이라도 생겨 능력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좌절감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득이 높거나 사회적 명성이 높은 특정 직업군에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에 분명 학력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라도 사람들을 ‘선별’해야 한다. 능력이 아닌 다른 기준을 샌델이 원하는 것처럼 제비뽑기로 둔다면 사실상 진정 열심히 했지만 운이 나빠서 실패한 제도상 희생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들이 지금의 패자의 좌절감을 동일하게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능력주의가 문제라는 것에만 집중해 능력주의를 완화하자는 샌델의 주장과는 달리, 패자의 좌절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도움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공동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샌델은 복지제도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문제점이 결국 엘리트 층이 선별하게 되는 구조와 선민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부의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 부의 분배 과정부터 조금 더 평등해지는 건 어떨까?
사실 가장 완전한 해결 방안은 모든 직업군(반인륜적 행위를 일삼는 직업군이나 범법적 행위를 하는 마약상과 같은 직업군은 제외하고)에 대한 존중과 동등한 대우가 주어지는 것일테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하루 아침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청소노동자를 일명 ‘사’자 붙은 직업들에 비해 선호하거나 동등하게 선호하게 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어느정도는 사회적 명성을 대변하므로 노동자 집단과 엘리트 집단에게 비슷한 임금을 지닐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이 그 실현책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를 우리는 일정 부분 실현하고 있지만 최저임금만을 높인다면 그에 따라 물가가 상승하고 엘리트들의 임금 역시도 비례하거나 오히려 더 많은 폭으로 상승될 수 있기에 최저임금을 높임과 동시에 최‘고’임금의 상한선을 두는 것이 어느정도는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경력직에 대하여 직업군이 어디인지에 관련없이 임금을 상승하도록 권고한다거나 등의 노력이 있다면 점차 선호직업에 대한 쏠림현상도 완화될 것이라고 예상해보았다. 그러나 이 방안 역시도 자본의 분배를 ‘공산주의화’시키는 것과 유사하고 자유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며 실현된다하더라도 또다른 불평등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론은, 완전한 해결방안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환경의 덕을 본 사람들이 이러한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인식 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또, 내 입장에서는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직업군을 암묵적 계급을 통해 구분하여 바라보는 것이 사람들의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좌절감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학우분들과 근본적인 문제가 능력주의에 있는지, 혹은 사람들의 인식에 있는지도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채수형2021-03-18 00:06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서원님의 글을 읽던 도중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도 본 책에서 샌델이 능력주의의 한계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에 대해서는 부실했다는 점이 정말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조심스럽게나마 입시제도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으나, 이는 애초에 본 책이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사례 및 시각을 두고 있기에 우리 나라에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 내용에서도 그냥 바닥에 펼쳐놓고 제비뽑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비뽑기가 왜 타당한 지를 설명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지 못한 운동선수들을 사례로 들며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코치와 감독들의 미숙한 장래 예측가능성을 근거로 드는데, 이러한 설명은 너무 특수한 반례 몇가지만으로 제비뽑기라는 대안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어린시절부터 코치와 감독들의 '장래 예측가능성 레이더' 안에 들어가서 뛰어난 커리어를 만든 운동선수들이 충분히 많을텐데 이들은 배제하고 설명하듯이 말이죠. 물론 능력주의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인(?) 대안점으로 제시한 것이기는 하나, 제비뽑기가 아닌 보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에 대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또한 서원님이 지적하신 부분 중에, "설령 우리가 능력을 기준으로, 혹은 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지 않아야한다는 법이라도 생겨 능력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좌절감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부분에 대해 공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월감과 좌절감이라는 감정의 원천은 정말 고대사회부터 계속되어온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원시부족들 사이에서도 힘이라는 능력을 토대로 불평등이 발생했고, 시간이 지나 계층사회에서도 불평등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능력주의 속에는 우월감과 좌절감이라는 감정적 배경이 애초에 내재되어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능력주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단순히 법을 하나 바꾼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갈등과 연대의 붕괴는 국가적인 제도나 법의 통제가 아니라, 시민의식의 성장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유일한 해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방안에 대해서는 토론의 장에서 충분히 많은 얘기가 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본 책에서 샌델이 능력주의의 한계점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에 대해서는 부실했다는 점이 정말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조심스럽게나마 입시제도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으나, 이는 애초에 본 책이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사례 및 시각을 두고 있기에 우리 나라에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 내용에서도 그냥 바닥에 펼쳐놓고 제비뽑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비뽑기가 왜 타당한 지를 설명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지 못한 운동선수들을 사례로 들며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 코치와 감독들의 미숙한 장래 예측가능성을 근거로 드는데, 이러한 설명은 너무 특수한 반례 몇가지만으로 제비뽑기라는 대안을 설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어린시절부터 코치와 감독들의 '장래 예측가능성 레이더' 안에 들어가서 뛰어난 커리어를 만든 운동선수들이 충분히 많을텐데 이들은 배제하고 설명하듯이 말이죠. 물론 능력주의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인(?) 대안점으로 제시한 것이기는 하나, 제비뽑기가 아닌 보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에 대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또한 서원님이 지적하신 부분 중에, "설령 우리가 능력을 기준으로, 혹은 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지 않아야한다는 법이라도 생겨 능력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좌절감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부분에 대해 공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월감과 좌절감이라는 감정의 원천은 정말 고대사회부터 계속되어온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원시부족들 사이에서도 힘이라는 능력을 토대로 불평등이 발생했고, 시간이 지나 계층사회에서도 불평등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능력주의 속에는 우월감과 좌절감이라는 감정적 배경이 애초에 내재되어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능력주의는 지금 우리 사회가 단순히 법을 하나 바꾼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능력주의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갈등과 연대의 붕괴는 국가적인 제도나 법의 통제가 아니라, 시민의식의 성장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유일한 해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방안에 대해서는 토론의 장에서 충분히 많은 얘기가 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오서림2021-03-18 10:55
서원 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제 글에는 맥락이 맞지 않아서 쓰지 않았지만 '유능력자 제비뽑기' 부분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떠올랐던 정시에 대한 내용을 말씀해주셔서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정시 제도가 합격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 운의 작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운의 작용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결론은 말씀해주신 대로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운이 작용하는 것에 큰 불안을 느끼거나 불만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정시 제도는 수험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 중에 수능 성적이라는 공통 지표가 있기 때문에 공정한 (편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사실 재능이나 부모, 교육환경부터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기 때문이 수능이라는 평가에 앞서 평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전반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나, 우선 바뀌지 않는 점수는 받아놨으니 지원에 앞서 합격이 가능할지 예측하고, 지원자 수를 파악하는 눈치 싸움을 하고, 정시 컨설팅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습니다. 운이 작용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운도 실력'인 것처럼 최대한 제어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운으로 떨어진 학생들이 있으나 오로지 실력으로 실패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제비뽑기로 뽑히지 않은 이들이 운이 나빴다는 것에 위안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에도 동감하며 뽑힌 이들이 또한 과연 운 덕분이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일지 의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에서 언급하신 논의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사람들의 인식의 문제라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결국 그 근본은 능력주의가 광고하는 환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을 갖고자하는 본능적 욕망을 충족하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에는 맥락이 맞지 않아서 쓰지 않았지만 '유능력자 제비뽑기' 부분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떠올랐던 정시에 대한 내용을 말씀해주셔서 인상 깊었습니다.
저도 정시 제도가 합격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에 있어 운의 작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운의 작용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결론은 말씀해주신 대로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운이 작용하는 것에 큰 불안을 느끼거나 불만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정시 제도는 수험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 중에 수능 성적이라는 공통 지표가 있기 때문에 공정한 (편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사실 재능이나 부모, 교육환경부터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기 때문이 수능이라는 평가에 앞서 평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전반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나, 우선 바뀌지 않는 점수는 받아놨으니 지원에 앞서 합격이 가능할지 예측하고, 지원자 수를 파악하는 눈치 싸움을 하고, 정시 컨설팅에 많은 돈을 지불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습니다. 운이 작용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운도 실력'인 것처럼 최대한 제어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운으로 떨어진 학생들이 있으나 오로지 실력으로 실패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제비뽑기로 뽑히지 않은 이들이 운이 나빴다는 것에 위안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에도 동감하며 뽑힌 이들이 또한 과연 운 덕분이었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일지 의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에서 언급하신 논의에 대해서는, 저 역시도 사람들의 인식의 문제라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결국 그 근본은 능력주의가 광고하는 환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상을 갖고자하는 본능적 욕망을 충족하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지유2021-03-18 13:3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대로 노동시장에는 희소성이 높은, 따라서 시장가치가 높게 책정되는 직업군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이미 너무나 고착화되어, 시장가치는 개인의 사회적 기여도/능력/덕성에 대한 지표로 곧잘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에 앞서, 우선 인식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크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서원님께서는 노동자층이 적절한 사회적 인정을 받도록 임금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시해주셨는데, 저는 경제 영역 못지않게 시민들의 정치참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당 대회든, 공청회든, 타운홀 미팅이든 참여해 공적 합리성을 발휘한다면, 소득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공동체의 모든 성원이 공적 논의에 기여할 능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원님께서는 노동자층이 적절한 사회적 인정을 받도록 임금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시해주셨는데, 저는 경제 영역 못지않게 시민들의 정치참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당 대회든, 공청회든, 타운홀 미팅이든 참여해 공적 합리성을 발휘한다면, 소득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공동체의 모든 성원이 공적 논의에 기여할 능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서원2021-03-18 13:54
서원님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샌델이 능력주의가 왜 공평하지 않은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잘 풀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질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은 부분에서 아쉬웠습니다. 1차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선별하고 2차적으로는 운으로 대학 합격자를 가려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면 저 역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해결 될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서원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행운에 맡기기 보다는 모든 직업군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방향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운으로 성공한 사람과 운이 없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게 되면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읽으면서 샌델이 능력주의가 왜 공평하지 않은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잘 풀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질적인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은 부분에서 아쉬웠습니다. 1차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선별하고 2차적으로는 운으로 대학 합격자를 가려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면 저 역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해결 될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서원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행운에 맡기기 보다는 모든 직업군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방향이 더 좋을 것이라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운으로 성공한 사람과 운이 없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게 되면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전윤창2021-03-17 18:00
글을 쓰기에 앞서 이릅니다. 댓글이라 근거자료를 일일히 서칭해서 주석을 달지 못했습니다.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에 대해서도 앞서 댓글을 단 분들이 제기한 의구심에 동의함을 밝힙니다. 반증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알려주세요. 그리고 끝에 개인적인 경험을 좀 더 첨부해 봤습니다. 이야기의 풍성함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샌델은 능력주의,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그 동안의 현실에 대해서 돌아보고 능력주의 판타지를 해체합니다. 이처럼 지구 반대편 이 땅의 능력주의 '정점'에 서 있는 이 학교에서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를 포함해 여러분은 합격과 동시에 주변으로부터 부러움 섞인 칭찬과 따뜻한 축하라는 달콤한 보상을 얻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인정'이란 보상은 지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구요. 인서울과 아이비리그. 우리 모두에게는 강력한 신분상승, 혹은 유지의 기회처럼 여겨집니다. 샌델이 책의 초반에서 지적한 대학입시와 소득의 상관관계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고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국가장학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상위 7개 대학 국장 지원율이 평균 약 22%, 전체 대학 평균은 약 54% 정도 됩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마다 나고 자라고 교육받는 환경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이 능력의 발현에도 현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결국 실체가 모호한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모멸감만 부추긴다고요.
<엘리트 세습(영제: The Meritocracy Trap)>이라는 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것까지 읽어볼 시간이 없어서 대신 조승연 씨의 해석을 인용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저자는 1950년대 두터웠던 미국의 중산층을 예로 들며 세습주의와 능력주의를 비교합니다. 세습주의 1950년대 당시 게을렀던 엘리트 계층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이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능력만큼 다수의 보조자(중산층)를 필요로 했습니다. 덕분에 중산층에게 일자리가 많아졌고 계층이 두터워질 수 있었죠. 소득의 분배가 일어났고, 이 때의 미국 사회는 지금 풍요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물론 전후에 맞게 된 경제 호황, 미국을 중심으로 개편된 세계질서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고려하면 이처럼 단순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후 설명을 들어보면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능력주의가 질주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는 상위 대학교육에 진입하는 인구들이 전과는 달리 근면성실하고 뛰어난 엘리트들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엘리트들이 단순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리적인 자산으로 부를 향유했다면, 이 때부터는 굉장히 높은 지능, 경영 능력을 가진 엘리트가 산업 전반에 나타나죠. 결국 엘리트의 부족한 능력을 채워주던 중산층은 강력한 노동가치를 무기로 가진 엘리트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고학력 엘리트의 노동 생산성이 산업 전반을 독점합니다. 10명을 대체한 1명의 엘리트의 임금도 과거에 비해 더욱더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과거의 자본 vs 임금의 구도도 여전히 유효할 테지만, 현대의 능력주의는 임금 vs 임금의 구도로 빈부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학력 엘리트가 설립한 자수성가형 기업들이(네x버, 쿠x, NC, 넥x, 카x오 등등) 점점 커다란 부를 손에 쥐고 있고, 숙련된 IT 개발자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요즘의 한국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어 보입니다.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엘리트주의는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까요? 과두정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엘리트로 가득 채워진 정치인들의 판단은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능력의 계급화와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과거 아테네에서도 금권을 가진 사람이 의석을 점령하는 것을 경계해 제비뽑기로 대표자를 뽑았습니다. 일각에서 이를 모티브로 국회의원 추첨제가 논의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나 법은 전문가나 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중론이라 믿습니다만, 실제 2008년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제도(무작위로 배심원을 선출하는 제도)에 대한 조사를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간 조사한 1368건의 재판에서 법관의 판결과 배심원들의 평결이 일치하는 경우가 93%나 됩니다. 전문적인 법 지식이 없는 일반인과 법관의 판단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겠지요. 설문에 따르면 배심원들도 처음에는 법 지식도 없는 사람이 무슨 법 집행이냐는 부정적 의견이 많았지만 재판참여를 경험한 이후에는 자부심을 느끼고 다시 참여하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테크노크라트, 즉 전문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상식의 여부가 노동 가치보다 더 중요한 덕목임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판단은 바로 이런 것들에 기반한 것이니까요.
끝으로 제 개인적 경험이지만 잠깐 언급할까 합니다. 제가 한창 여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1년 전 인도의 한 사원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점심을 먹다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일러준 자신들의 월급은 고작 14만원 남짓이었니다. 제가 그 때 차고 있던 시계의 가격을 물어보더군요. 딱 그들 월급에 해당하는 가격이었지만 갑자기 돈 많은 외국인이 된 것 같아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2달 뒤 넘어 간 스리랑카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한 호스텔에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숙식을 공짜로 제공받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같이 일하는 현지 동료들이 생겼죠. 친구들은 하루에 4500원 가량을 받았습니다. 한 달에 휴일은 3일. 30일을 가득 채워 일해도 14만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제공받던 숙식의 가치가 2배나 됐습니다. 한국에 가 일하고 싶다던 친구들이 한국의 최저임금을 듣고 눈의 휘둥그레진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이들이 한국에 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1년에 단 1000명만이 한국에 취업비자를 받고 들어올 수 있고 한국어 시험 통과는 물론, 젊은 나이, 문신이 없어야 하고, 손톱 등 용모가 단정해야 지원할 수 있습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거리를 걸으면 한국어, 일본어 학원이 넘쳐납니다. 한국 입시에서 SKY란 이들에게는 한국의 취업비자와 같습니다.
국가간 소득 불평등과 능력주의 덫이 무슨 관계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아,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제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받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어(알바만 해도 시급이 20배나 되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들과 저를 분리시켜놓고 생각한 오만함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우연하게도 특정 재능을 후하게 보상해주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죠. 두번째로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닫혀있던 마을 기반의 사회로부터의 개방으로 인해 도시로, 또는 해외로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이 능력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어디서든 배우고 싶다면 배울 수 있다. 구글과 유투브를 접속할 스마트폰만 있다면 얼마든지 논문을 쓰고 인텔리 계층이 될 수 있다고요. 우리가 이들의 미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스트 코로나부터 가속화될 소수 엘리트 계층과 자신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능력주의 프레임에 갇힌 채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샌델은 능력주의,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그 동안의 현실에 대해서 돌아보고 능력주의 판타지를 해체합니다. 이처럼 지구 반대편 이 땅의 능력주의 '정점'에 서 있는 이 학교에서 같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를 포함해 여러분은 합격과 동시에 주변으로부터 부러움 섞인 칭찬과 따뜻한 축하라는 달콤한 보상을 얻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인정'이란 보상은 지금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구요. 인서울과 아이비리그. 우리 모두에게는 강력한 신분상승, 혹은 유지의 기회처럼 여겨집니다. 샌델이 책의 초반에서 지적한 대학입시와 소득의 상관관계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고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국가장학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상위 7개 대학 국장 지원율이 평균 약 22%, 전체 대학 평균은 약 54% 정도 됩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마다 나고 자라고 교육받는 환경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이 능력의 발현에도 현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는 것은 결국 실체가 모호한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모멸감만 부추긴다고요.
<엘리트 세습(영제: The Meritocracy Trap)>이라는 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것까지 읽어볼 시간이 없어서 대신 조승연 씨의 해석을 인용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저자는 1950년대 두터웠던 미국의 중산층을 예로 들며 세습주의와 능력주의를 비교합니다. 세습주의 1950년대 당시 게을렀던 엘리트 계층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이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능력만큼 다수의 보조자(중산층)를 필요로 했습니다. 덕분에 중산층에게 일자리가 많아졌고 계층이 두터워질 수 있었죠. 소득의 분배가 일어났고, 이 때의 미국 사회는 지금 풍요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물론 전후에 맞게 된 경제 호황, 미국을 중심으로 개편된 세계질서 등 복합적인 요인들을 고려하면 이처럼 단순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후 설명을 들어보면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능력주의가 질주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는 상위 대학교육에 진입하는 인구들이 전과는 달리 근면성실하고 뛰어난 엘리트들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엘리트들이 단순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리적인 자산으로 부를 향유했다면, 이 때부터는 굉장히 높은 지능, 경영 능력을 가진 엘리트가 산업 전반에 나타나죠. 결국 엘리트의 부족한 능력을 채워주던 중산층은 강력한 노동가치를 무기로 가진 엘리트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게 되고 고학력 엘리트의 노동 생산성이 산업 전반을 독점합니다. 10명을 대체한 1명의 엘리트의 임금도 과거에 비해 더욱더 현격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과거의 자본 vs 임금의 구도도 여전히 유효할 테지만, 현대의 능력주의는 임금 vs 임금의 구도로 빈부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학력 엘리트가 설립한 자수성가형 기업들이(네x버, 쿠x, NC, 넥x, 카x오 등등) 점점 커다란 부를 손에 쥐고 있고, 숙련된 IT 개발자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요즘의 한국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있어 보입니다.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엘리트주의는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까요? 과두정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엘리트로 가득 채워진 정치인들의 판단은 일반인들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능력의 계급화와는 조금 다른 얘기지만, 과거 아테네에서도 금권을 가진 사람이 의석을 점령하는 것을 경계해 제비뽑기로 대표자를 뽑았습니다. 일각에서 이를 모티브로 국회의원 추첨제가 논의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나 법은 전문가나 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중론이라 믿습니다만, 실제 2008년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제도(무작위로 배심원을 선출하는 제도)에 대한 조사를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7년간 조사한 1368건의 재판에서 법관의 판결과 배심원들의 평결이 일치하는 경우가 93%나 됩니다. 전문적인 법 지식이 없는 일반인과 법관의 판단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겠지요. 설문에 따르면 배심원들도 처음에는 법 지식도 없는 사람이 무슨 법 집행이냐는 부정적 의견이 많았지만 재판참여를 경험한 이후에는 자부심을 느끼고 다시 참여하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테크노크라트, 즉 전문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상식의 여부가 노동 가치보다 더 중요한 덕목임을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판단은 바로 이런 것들에 기반한 것이니까요.
끝으로 제 개인적 경험이지만 잠깐 언급할까 합니다. 제가 한창 여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1년 전 인도의 한 사원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점심을 먹다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일러준 자신들의 월급은 고작 14만원 남짓이었니다. 제가 그 때 차고 있던 시계의 가격을 물어보더군요. 딱 그들 월급에 해당하는 가격이었지만 갑자기 돈 많은 외국인이 된 것 같아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2달 뒤 넘어 간 스리랑카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한 호스텔에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숙식을 공짜로 제공받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같이 일하는 현지 동료들이 생겼죠. 친구들은 하루에 4500원 가량을 받았습니다. 한 달에 휴일은 3일. 30일을 가득 채워 일해도 14만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제공받던 숙식의 가치가 2배나 됐습니다. 한국에 가 일하고 싶다던 친구들이 한국의 최저임금을 듣고 눈의 휘둥그레진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이들이 한국에 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1년에 단 1000명만이 한국에 취업비자를 받고 들어올 수 있고 한국어 시험 통과는 물론, 젊은 나이, 문신이 없어야 하고, 손톱 등 용모가 단정해야 지원할 수 있습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거리를 걸으면 한국어, 일본어 학원이 넘쳐납니다. 한국 입시에서 SKY란 이들에게는 한국의 취업비자와 같습니다.
국가간 소득 불평등과 능력주의 덫이 무슨 관계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아, 말하기 부끄럽습니다만 제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받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어(알바만 해도 시급이 20배나 되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들과 저를 분리시켜놓고 생각한 오만함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는 우연하게도 특정 재능을 후하게 보상해주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죠. 두번째로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닫혀있던 마을 기반의 사회로부터의 개방으로 인해 도시로, 또는 해외로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이 능력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어디서든 배우고 싶다면 배울 수 있다. 구글과 유투브를 접속할 스마트폰만 있다면 얼마든지 논문을 쓰고 인텔리 계층이 될 수 있다고요. 우리가 이들의 미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스트 코로나부터 가속화될 소수 엘리트 계층과 자신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능력주의 프레임에 갇힌 채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윤재빈2021-03-17 22:30
정치적으로도 엘리트주의가 당연시되고 있다는 말씀이 공감이 됩니다. 민주적인 정치란 결국 다양한 삶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정치는 잘난 사람이 해야지'하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도 테크노크라트는 분명 필요하지만, 그들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더 전문적이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최민정2021-03-17 18:05
작년에 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을 인터뷰했다. 친구들끼리도 이야기 나누기 어렵던 주제였지만, 그 친구에게 “생리가 뭔지 알아?” 라고 물었다. 이에 그 학생은 “period? 아 아니다, menstruation이요!”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날, 처음으로 부모의 교육 수준과 가구 소득, 거주 지역, 주변 환경의 힘을 눈과 귀로 목격했다. 그 친구가 말해준 ‘menstruation’을 처음 안 건 작년의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그 전에는 알 리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그 친구의 집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서울 한복판을 걸으며,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친구와 어린 시절의 내가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은 흔히 ‘현재를 탈출할 티켓’(<교육이 미래라고 믿는 당신에게, PRIZE>, 84쪽)으로 불린다. 또래에 비해 유난히 한글을 늦게 배웠지만, ‘하면 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를 굳게 믿었다. 고등학교에 가니, 중학교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교에서 누가 몇 등을 했는지 순서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선배들이 대학을 가면, 어느 대학을 갔고, 그 선배는 공부를 얼마나 잘했고, 학교활동도 얼마나 완벽했는지까지가 공유되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믿음을 다지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에게도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대학에 와서, 여러 학생과 학부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menstruation을 아는 초등학생, 누구나 알아주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 어른들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판단한 중학생, 학교를 그만 둔 청소년 등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무엇을 위해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 하나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티켓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학생일 때와 많이 바뀐 교육 체계를 경험하는 그들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지난 날의 나와 지금의 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문, 옆문, 뒷문, 어느 문으로든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직장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생각날 때마다, 입시와 정책을 매만지는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입시 제도가 더 공정한지, 어느 정책이 우리 사회를 달래줄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를 보면 학부모와 교사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학생은 그야말로 희귀하다. 그건 공정의 저울에 올라가는 학생과 그 저울에 학생을 올리는 부류와, 저울을 만드는 부류를 더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나오는 결론은 누구를 위한 바인가.
샌델은 말했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공정하다는 착각>, 298쪽) 대학에서 그 임무를 맡을 수는 있다. 이미 지금의 결정권자로 역할하는 어른들이 현 사회를 착각 없이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대학이 아닌 다른 교육 기관도 필요하다.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공정성과 시민성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선별적으로 가는 대학이 아닌 누구나 가는 의무교육기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육은 흔히 ‘현재를 탈출할 티켓’(<교육이 미래라고 믿는 당신에게, PRIZE>, 84쪽)으로 불린다. 또래에 비해 유난히 한글을 늦게 배웠지만, ‘하면 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를 굳게 믿었다. 고등학교에 가니, 중학교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교에서 누가 몇 등을 했는지 순서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선배들이 대학을 가면, 어느 대학을 갔고, 그 선배는 공부를 얼마나 잘했고, 학교활동도 얼마나 완벽했는지까지가 공유되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믿음을 다지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에게도 이미 스며들어 있었다.
대학에 와서, 여러 학생과 학부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menstruation을 아는 초등학생, 누구나 알아주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 어른들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판단한 중학생, 학교를 그만 둔 청소년 등 각자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무엇을 위해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 하나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티켓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학생일 때와 많이 바뀐 교육 체계를 경험하는 그들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지난 날의 나와 지금의 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문, 옆문, 뒷문, 어느 문으로든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직장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부모님들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이 생각날 때마다, 입시와 정책을 매만지는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입시 제도가 더 공정한지, 어느 정책이 우리 사회를 달래줄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를 보면 학부모와 교사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학생은 그야말로 희귀하다. 그건 공정의 저울에 올라가는 학생과 그 저울에 학생을 올리는 부류와, 저울을 만드는 부류를 더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나오는 결론은 누구를 위한 바인가.
샌델은 말했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공정하다는 착각>, 298쪽) 대학에서 그 임무를 맡을 수는 있다. 이미 지금의 결정권자로 역할하는 어른들이 현 사회를 착각 없이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대학이 아닌 다른 교육 기관도 필요하다.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공정성과 시민성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선별적으로 가는 대학이 아닌 누구나 가는 의무교육기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장원2021-03-17 22:40
민정님 안녕하세요!
글의 첫머리부터 너무 공감되는 경험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이렇게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저도 민정님께서 써주신 글과 유사하게 능력주의의 부작용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의 개선과 혁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교육에 큰 전문성이 없어서 아주 단순한 정도에서 고민해보고 있기는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저와 비슷한 개선방향을 생각해보신 분이 계셔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최근 입시제도는 점점 사교육에 치중되어 가고, 결과의 평등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교육제도의 개편은 오히려 입시를 복잡하게 만들고, 정보력에 의해 '옆문'을 이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잘못 개선되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제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면서 가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수능 점수나 내신 점수에 상관없이 컨설팅을 받고, 복잡한 입시 제도에 대한 정보를 얻고 '내 점수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원서를 쓴 것이 저만의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다른 수업을 수강하면서 '인생은 날 때부터 운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과제를 제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운이 작용한다고 생각했고, 국가별 총생산 수준에 따라 교육에 투자하는 금액의 격차를 연구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 수준에 따라 교육 투자 금액의 격차가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교육의 격차가 국내에도 존재하지만, 단순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교육 제도의 개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가장 공동선에 근접할 수 있는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지만,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같이하는 분을 만나 반가웠고 기회가 된다면 함께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의 첫머리부터 너무 공감되는 경험에 대해 말씀해주셔서 이렇게 댓글 달게 되었습니다.
저도 민정님께서 써주신 글과 유사하게 능력주의의 부작용이면서 역설적이게도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의 개선과 혁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교육에 큰 전문성이 없어서 아주 단순한 정도에서 고민해보고 있기는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저와 비슷한 개선방향을 생각해보신 분이 계셔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최근 입시제도는 점점 사교육에 치중되어 가고, 결과의 평등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교육제도의 개편은 오히려 입시를 복잡하게 만들고, 정보력에 의해 '옆문'을 이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잘못 개선되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제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면서 가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수능 점수나 내신 점수에 상관없이 컨설팅을 받고, 복잡한 입시 제도에 대한 정보를 얻고 '내 점수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원서를 쓴 것이 저만의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다른 수업을 수강하면서 '인생은 날 때부터 운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과제를 제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운이 작용한다고 생각했고, 국가별 총생산 수준에 따라 교육에 투자하는 금액의 격차를 연구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 수준에 따라 교육 투자 금액의 격차가 상대적이고 절대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교육의 격차가 국내에도 존재하지만, 단순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님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교육 제도의 개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가장 공동선에 근접할 수 있는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지만,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 뜻을 같이하는 분을 만나 반가웠고 기회가 된다면 함께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보설2021-03-17 23:35
댓글 잘 읽었습니다 최민정님! 저 또한 유사한 경험이 있어 공감이 갑니다. 교육봉사로 갔던 초등학교에서는 전교생이 10명 남짓에 영어로 코끼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을 만났지만, 봉사를 다녀온 뒤 아르바이트로 갔던 사설 캠프에서 만난 것은 중등수학을 푸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해당 캠프의 참가비가 100만원 가까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값 비싼 캠프에서,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옆자리 아이보다 더 많은 문제를 풀려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이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말씀해 주신 의무교육기관에 관한 제안은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새롭습니다. 능력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은 했으나, 의무교육기관에서 공동체의식 및 시민의식을 교육하는 쪽이 더 직접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초,중,고는 대학을 위한 관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그러한 능력주의 온상에서 시민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 욕심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능력주의의 약화를 위한 다른 제도적, 사회적 변화들과 함께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해 주신 의무교육기관에 관한 제안은 제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새롭습니다. 능력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야 한다는 생각은 했으나, 의무교육기관에서 공동체의식 및 시민의식을 교육하는 쪽이 더 직접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초,중,고는 대학을 위한 관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 그러한 능력주의 온상에서 시민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 욕심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능력주의의 약화를 위한 다른 제도적, 사회적 변화들과 함께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류성원2021-03-18 10:19
민정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말씀해주신 예시는 어렸을 때부터 벌어지는 지식의 차이도 보여주지만, ‘생리’가 뭔지를 물었을 때, 이를 생활의 단어로 받아들이지 않고 외워야 하는 지식의 단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네요.
그런 맥락이 민정님께서 끝에서 언급하신 시민교육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의무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생리’, 혹은 ‘menstruation'이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각 단어가 쓰이는 맥락이나 사회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논의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도 단어를 물었을 때 영단어를 외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정성과 시민성은 암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깊은 공감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인 만큼,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층위의 교육기관에서도 꾸준히 샌델이 제기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허상에 대한 담론이 논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맥락이 민정님께서 끝에서 언급하신 시민교육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의무교육에서 강조하는 것은 ‘생리’, 혹은 ‘menstruation'이라는 단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각 단어가 쓰이는 맥락이나 사회에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논의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도 단어를 물었을 때 영단어를 외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정성과 시민성은 암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깊은 공감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인 만큼,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층위의 교육기관에서도 꾸준히 샌델이 제기하고 있는 능력주의의 허상에 대한 담론이 논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서원2021-03-18 14:10
민정님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 대학에 들어와 과외를 하면서 다양한 친구들, 학부모님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같은 나이대라고 해도 다른 언어능력, 수학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능력으로 개인을 평가한다고 해도 각각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출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등학생이 중고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났는데 부모님은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많은 것을 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민정님이 제안한 의무교육기관은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력으로 성공한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 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 대학에 들어와 과외를 하면서 다양한 친구들, 학부모님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같은 나이대라고 해도 다른 언어능력, 수학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능력으로 개인을 평가한다고 해도 각각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출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등학생이 중고등학생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났는데 부모님은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많은 것을 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민정님이 제안한 의무교육기관은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력으로 성공한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경계가 흐릿해 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삭제된 댓글입니다.
윤재빈2021-03-18 10:33
혜송님 글 잘 읽었습니다!
능력주의 자체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모두가 좋은 것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그런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는 능력주의에 쉽게 빠져드는가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멜로가 체질> 보셨나요? 극에서 진주라는 인물이 위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하루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겠다며 가만히 있습니다. 다소 엉뚱한 이런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문제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봅니다.
또 첫번째 문단의 마지막 줄에도 공감합니다. 능력에 따른 선발과, 능력주의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는 부정직하죠. 그리고 그 부정직함에 역설적으로 강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능력주의 자체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모두가 좋은 것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그런 시대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는 능력주의에 쉽게 빠져드는가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멜로가 체질> 보셨나요? 극에서 진주라는 인물이 위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하루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겠다며 가만히 있습니다. 다소 엉뚱한 이런 자세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문제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봅니다.
또 첫번째 문단의 마지막 줄에도 공감합니다. 능력에 따른 선발과, 능력주의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는 부정직하죠. 그리고 그 부정직함에 역설적으로 강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김재민2021-03-17 18:28
요즘 사회가 참 혼란스럽습니다. 지역을 넘어 계층, 세대, 성(性)을 둘러싼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갈등 기저에는 “공정함”이 무엇인가가 대하여 국민 사이에서 이견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샌델은 결과가 능력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는 것이며, 결과가 즉 옮음이며 좋음이라는 사회의 통념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미국사회 전반에 걸쳐 정당하고 공정한 기회 속에서 “능력”을 함양하여 끌어낸 “결과”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프레임 안에서,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한 이들의 “무능력”에 대한 도덕적 힐난 역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가치있는 성공이 과연 개인의 순수한 능력때문인지, 혹은 그 능력의 생산적-사회적 가치를 높게 쳐주는 사회 구조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없이 개인에게 모든 것을 귀인하는 사회적 현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논의에 따라, 샌델은 능력주의 사회가 공정하지 못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사회를 주름잡을 새로운 가치를 고민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의 논의는 특히 포스트팬데믹 이후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작금의 세태에 유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시 소위 SKY 대학 내에 9분위, 10분위가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교육의 양극화는 “노력과 능력”의 성취로 얻어지는 성적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이런 성취들이 또다시 다양한 사회적 재화와 기회에의 접근성으로 이어지는만큼 계층의 고착화를 심화할 가능성이 있기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샌델의 책을 읽으며 사실 저는 한국사회라는 기저 맥락 아래에서 그의 논의가 유호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으며, 그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샌델의 논의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지나치게 경시합니다. 허나 아직 우리 사회의 성원은 여전히 공정과 노력을 중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프레임 속에서 배태된 결과이며, 따라서 착각에 불과하다는 샌델의 결론과 궤를 달리합니다. 즉, 우리나라 성원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는 “능동적”인 사회적 공론과 특유의 역사적 맥락을 거치며 구체적으로 모색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지어지는 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민주화를 이룩한 우리사회의 능력과 노력우선주의는 그나마 최선의 공정성과 사회적 이동성을 담보하는 길인만큼, 이를 배척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노력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대중문화에서도 잘 반영됩니다. 제작년부터 다년 간 무명생활을 이어가던 “염따”나, 최근 역주행 열풍을 일으키는 “브레이브걸스”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년간 노력하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당당히 증명하였고, 우리사회 성원은 이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에 크게 반응하며 또다른 노력 신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성공은 대형 기획사라던가 하는 외부적 요소가 결여된 채 묵묵히 노력한 것의 결과로서 더더욱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데, 이들의 사회적 성취는 응당한 노력의 결과로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2) 샌델은 가치있는 재능이 마치 사회의 여건에 ᄄᆞ라 “선택”된 것으로 여깁니다. 즉, 샌델의 논의는 사회적 가치가 이미 상정되어있고, 개인이 출생과 함께 우연히 얻은 기회가 그것에 부합하는 상황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가진 재능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고자하는 혁신가의 노력을 경시합니다. 때때로 개인은 사회적 가치를 새로이 창출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며 새로운 재능에도 가치를 발견하곤 합니다. 인터넷 방송을 예로 들어봅시다. 혹자는 광역대네트워크와 스마트폰 보급이 1인미디어 발전에 가장 핵심 기여를 했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오래전부터 해당 분야에서 종사하는 것이 사회적 명망을 얻기엔 힘들었더라도, 그들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하며 소비자 저변을 확대하고자 십여년 간 노력하였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시기, 돈도 사회적 지위도 턱없이 낮은 시기부터 그들은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촉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다양한 기회와 가치 속에서도 “인터넷 방송과 1인 미디어”가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때로는 지금의 사회가 우리의 재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노력과 재능으로하여금 사회가 새로운 가치에 주목할 수 있게 만드는 노력에 샌델은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샌델의 논의는 우리 사회에 풍부한 고민거리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통해 팬데믹 상황 속 한국사회의 가치를 탐색함에 있어, 우리 고유의 사회적 맥락을 심도있게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샌델은 결과가 능력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는 것이며, 결과가 즉 옮음이며 좋음이라는 사회의 통념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미국사회 전반에 걸쳐 정당하고 공정한 기회 속에서 “능력”을 함양하여 끌어낸 “결과”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프레임 안에서,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한 이들의 “무능력”에 대한 도덕적 힐난 역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가치있는 성공이 과연 개인의 순수한 능력때문인지, 혹은 그 능력의 생산적-사회적 가치를 높게 쳐주는 사회 구조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없이 개인에게 모든 것을 귀인하는 사회적 현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논의에 따라, 샌델은 능력주의 사회가 공정하지 못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사회를 주름잡을 새로운 가치를 고민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의 논의는 특히 포스트팬데믹 이후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작금의 세태에 유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시 소위 SKY 대학 내에 9분위, 10분위가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교육의 양극화는 “노력과 능력”의 성취로 얻어지는 성적의 계층화를 초래하고, 이런 성취들이 또다시 다양한 사회적 재화와 기회에의 접근성으로 이어지는만큼 계층의 고착화를 심화할 가능성이 있기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샌델의 책을 읽으며 사실 저는 한국사회라는 기저 맥락 아래에서 그의 논의가 유호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으며, 그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1) 샌델의 논의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지나치게 경시합니다. 허나 아직 우리 사회의 성원은 여전히 공정과 노력을 중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프레임 속에서 배태된 결과이며, 따라서 착각에 불과하다는 샌델의 결론과 궤를 달리합니다. 즉, 우리나라 성원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는 “능동적”인 사회적 공론과 특유의 역사적 맥락을 거치며 구체적으로 모색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지어지는 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민주화를 이룩한 우리사회의 능력과 노력우선주의는 그나마 최선의 공정성과 사회적 이동성을 담보하는 길인만큼, 이를 배척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노력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대중문화에서도 잘 반영됩니다. 제작년부터 다년 간 무명생활을 이어가던 “염따”나, 최근 역주행 열풍을 일으키는 “브레이브걸스”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년간 노력하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당당히 증명하였고, 우리사회 성원은 이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에 크게 반응하며 또다른 노력 신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성공은 대형 기획사라던가 하는 외부적 요소가 결여된 채 묵묵히 노력한 것의 결과로서 더더욱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데, 이들의 사회적 성취는 응당한 노력의 결과로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2) 샌델은 가치있는 재능이 마치 사회의 여건에 ᄄᆞ라 “선택”된 것으로 여깁니다. 즉, 샌델의 논의는 사회적 가치가 이미 상정되어있고, 개인이 출생과 함께 우연히 얻은 기회가 그것에 부합하는 상황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가진 재능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고자하는 혁신가의 노력을 경시합니다. 때때로 개인은 사회적 가치를 새로이 창출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어 모으며 새로운 재능에도 가치를 발견하곤 합니다. 인터넷 방송을 예로 들어봅시다. 혹자는 광역대네트워크와 스마트폰 보급이 1인미디어 발전에 가장 핵심 기여를 했다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오래전부터 해당 분야에서 종사하는 것이 사회적 명망을 얻기엔 힘들었더라도, 그들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하며 소비자 저변을 확대하고자 십여년 간 노력하였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시기, 돈도 사회적 지위도 턱없이 낮은 시기부터 그들은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촉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함께 다양한 기회와 가치 속에서도 “인터넷 방송과 1인 미디어”가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때로는 지금의 사회가 우리의 재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노력과 재능으로하여금 사회가 새로운 가치에 주목할 수 있게 만드는 노력에 샌델은 적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샌델의 논의는 우리 사회에 풍부한 고민거리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통해 팬데믹 상황 속 한국사회의 가치를 탐색함에 있어, 우리 고유의 사회적 맥락을 심도있게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지운2021-03-17 19:10
재민님이 지적해주신 대중문화, 미디어 부문에서의 시장선택 경향은 능력주의의 밝은 부분을 강조할 수 있을만 한 좋은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SKY로 대표되는 학벌주의, 신분세습 문제점은 사회적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이를 타파하기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이들의 가치를 단순히 간판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퍼포먼스, 실력을 바탕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는 과거 엘리트들이 형성한 세습적 장치들이 경험적인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서 서서히 타파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샌델이 강조한 능력주의의 그림자는 다소 과장된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능력주의의 폐단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요인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자동화 기술의 발달로 저학력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고급 인력으로 부가 집중되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능력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산업혁명기부터 기계나 기술의 발전은 지속적으로 노동을 대체해왔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경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주의의 명암에 대해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치규범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논의의 장이 형성되고 복지나 노동, 임금의 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 만으로도 이미 샌델의 목표는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요.. ㅋㅋ
탈퇴한 회원2021-03-17 21:23
안녕하세요 재민 학우님 글 쓰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ㅎㅎ
우선 재민 학우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은 제가 이해한게 맞다면 총 3가지 정도의 논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 한국 사회에 능력주의가 그렇게 팽배해있는가.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서는 저도 책을 읽으며 의문을 가진 경험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그렇게 능력주의가 팽배해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스펙 개조 및 입시 비리 사건을 보아도 사람들은 그 과정 자체가 공정하지 못했음에 분노하는 것이지 능력주의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주어진 제도 하에서 개인의 노력과 재능을 통해서만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 분노의 기제는 능력주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논점에서 샌델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과 공동선에 대한 방향 제시는 그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둘째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능력과 노력우선주의는 최선의 결과였으며 마땅한 대안이 없고 긍정적인 방향을 나아갈 수 있다. 확실히 샌델의 논의는 그 결론이 매우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 적용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지적해주신 것과 같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 긍정적인 예시들을 무엇이 있고 어떻게 발전시킬지는 앞으로의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예시로 지적해주신 부분에서 미디어는 조금 더 젊은 세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긍정적인 예시들이 세대, 연령, 지역, 문화 등에 따라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다르다면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지 등 다차원적 요소들을 같이 고려해서 파악해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셋째, 환경에 의한 변화가 아닌 개인이(혁신가)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이 부분 되게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혁신가와 그에 따른 사회 변화가능성에 대해 잘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혁신가가 많이, 더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그 기저의 사회 인프라를 잘 만들어나가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ㅎㅎ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우선 재민 학우님이 지적해주신 부분은 제가 이해한게 맞다면 총 3가지 정도의 논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우리 한국 사회에 능력주의가 그렇게 팽배해있는가.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서는 저도 책을 읽으며 의문을 가진 경험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그렇게 능력주의가 팽배해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의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스펙 개조 및 입시 비리 사건을 보아도 사람들은 그 과정 자체가 공정하지 못했음에 분노하는 것이지 능력주의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주어진 제도 하에서 개인의 노력과 재능을 통해서만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다는 이 분노의 기제는 능력주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논점에서 샌델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과 공동선에 대한 방향 제시는 그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둘째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능력과 노력우선주의는 최선의 결과였으며 마땅한 대안이 없고 긍정적인 방향을 나아갈 수 있다. 확실히 샌델의 논의는 그 결론이 매우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 적용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지적해주신 것과 같이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 긍정적인 예시들을 무엇이 있고 어떻게 발전시킬지는 앞으로의 고민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예시로 지적해주신 부분에서 미디어는 조금 더 젊은 세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런 긍정적인 예시들이 세대, 연령, 지역, 문화 등에 따라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다르다면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루어가야 할지 등 다차원적 요소들을 같이 고려해서 파악해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셋째, 환경에 의한 변화가 아닌 개인이(혁신가) 환경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이 부분 되게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혁신가와 그에 따른 사회 변화가능성에 대해 잘 지적해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혁신가가 많이, 더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그 기저의 사회 인프라를 잘 만들어나가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ㅎㅎ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은비2021-03-17 23:25
안녕하세요. 재민님! 재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이클 샌델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지나치게 경시한다는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아무리 운이 작용하더라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는 존중받아야 하고, 현재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노력을 했는데도 그것이 충분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는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최근, 장애인이나 저소득층이 노력하여 성공하는 모습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면서, 대중들은 무의식적으로 본인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도 충분한 노력을 하면 그들이 처한 환경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정 수준 이하로 사는 이유는 사회가 아닌 그들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즉, 충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당한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사람들의 편견이 고착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듭니다. 능력과 노력은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 요소 중 하나이지만, 이것이 성과주의로 연결되어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에 관한 논의는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재민님의 글 너무 흥미로워서 코멘트 달아보고 싶었습니다ㅎㅎ
재민님의 글 너무 흥미로워서 코멘트 달아보고 싶었습니다ㅎㅎ
박건규2021-03-17 23:50
우리 사회에서 노력이 중시된다는 말은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샌델이 말하는 능력이란 천부적인 재능+일정 수준의 노력으로 보이는데, '재능충'이나 '노력충' 등의 말에서 단순히 능력 vs 무능의 갈등 구도를 넘어 천부적인 재능 vs 후천적인 능력(노력)의 갈등 구도 또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능력주의 담론은 노력에 기대기도 할 텐데, 샌델이 240쪽에 제시하듯 천부적인 재능 또한 상당한 찬양을 받는다는 것 또한 능력주의 체제에서 구조상 문제가 발생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력으로 인한 재능과 천부적 재능 사이의 갈등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역시 흥미롭게 추가로 논의해볼 수 있겠죠.
손지우2021-03-18 03:38
재민님 좋은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지적하고 계시는 부분들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들었던 생각과 비슷해 공감이 갑니다. 특히 두번째 제시해주신 논의점에 대해 저는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여러가지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등장하지 않았나 정도의 사고에서 그쳤던 반면, 재민님께서는 과거부터 해당 분야에서 노력해왔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의 주목을 끌어와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라 바라보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한 점은 첫번째 제시해주신 논의점에 관한 것 입니다만, 예시로 들어주신 '염따'나 '브레이브걸스'와 같은 경우 등은 특히 그들의 성공에 있어 재능이라는 요소 또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샌델은 이 '재능'이라는 요소조차도 우연에 의한 산물이기에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룬 성취가 온전히 우리 스스로의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한데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또한 이들의 사회적 성취는 스스로만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김재민2021-03-18 11:00
@정지운
@정지운
샌델이 결론부에 명시하였듯, 능력주의가 결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측면엔 저도 동의합니다 ㅎㅎ
하지만 능력주의가 사회적 이동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부분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 제 비판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지운님이 댓글에 달아주신 서평 내용과, 제 비판지점이 유사하다고 여깁니다.
사회적 양극화에는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요인이 있는데, 샌델이 그 부분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샌델이 결론부에 명시하였듯, 능력주의가 결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측면엔 저도 동의합니다 ㅎㅎ
하지만 능력주의가 사회적 이동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부분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점이 제 비판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지운님이 댓글에 달아주신 서평 내용과, 제 비판지점이 유사하다고 여깁니다.
사회적 양극화에는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요인이 있는데, 샌델이 그 부분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재민2021-03-18 11:03
@탈퇴한 회원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제가 언급한 두 가지의 미디어 예시는 모두 말씀하신대로 젊은 계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현상이며, 또 한편으론 능력주의 신화를 부풀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적절한 예시인지 저도 헷갈리기는 했어요 ㅎㅎ
제가 주목하는 지점은, 청년세대는 더이상 "능력 차이에 대한 결과적 불평등"에 분노하기보단 이를 긍정하고, 오히려 "기회의 공정성"이 사회적 정의의 한계치를 분명히 넘어선 지점에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회의 절차적-기회적 공정성을 제고하는 것이 현대 사회 우리 청년이 당면한 사회적 과제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른 사회역사적 맥락이 있어서, 교육의 세습적 지위(동문 우대정책)가 심화되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포퓰리즘이 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ㅎㅎ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지점은, 청년세대는 더이상 "능력 차이에 대한 결과적 불평등"에 분노하기보단 이를 긍정하고, 오히려 "기회의 공정성"이 사회적 정의의 한계치를 분명히 넘어선 지점에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회의 절차적-기회적 공정성을 제고하는 것이 현대 사회 우리 청년이 당면한 사회적 과제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른 사회역사적 맥락이 있어서, 교육의 세습적 지위(동문 우대정책)가 심화되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포퓰리즘이 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ㅎㅎ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8 11:12
재민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의견 남겨 주셨네요 ㅎㅎ 저도 덧붙여봅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도 노력과 능력을 경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의 지적은 유효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의 지적에 관해서는 능력주의와 능력에 따른 선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능력주의'란 것이 고유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나,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능력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입니다. 능력주의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이를테면 모두가 공부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모두가 좋은 것을 누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가령 대학 입시를 할 때, 우리의 능력은 대학 정원이 인정하는 만큼만 인정을 받습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능력주의가 부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걸스의 사례를 지적해주셨는데, 만약 정말 모두가 노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었다면 과연 그것이 큰 주목을 받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2)에서 말씀하신 사례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재능이 사회의 여건에 따라 '선택'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그들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지 의문입니다. 초기의 스트리머들이 1인 미디어의 등장 전에는 실패자, 패배자로 인생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사회의 인식도 그러했고요. 성공한 스트리머들은 그들의 노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들은 많은 '패배자'들 중 소수가 아닐까요? 저도 혁신가의 노력과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례가, 가장 우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많은 창업가들은 '노력하라'라고 하기 보다는, '기회를 찾아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적극 반박(?) 하기는 했으나, 능력주의의 문제가 딱 잘라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만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의견 남겨 주셨네요 ㅎㅎ 저도 덧붙여봅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도 노력과 능력을 경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델의 지적은 유효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의 지적에 관해서는 능력주의와 능력에 따른 선발을 구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능력주의'란 것이 고유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나,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능력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입니다. 능력주의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이를테면 모두가 공부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모두가 좋은 것을 누린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지금도 불가능합니다. 가령 대학 입시를 할 때, 우리의 능력은 대학 정원이 인정하는 만큼만 인정을 받습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능력주의가 부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걸스의 사례를 지적해주셨는데, 만약 정말 모두가 노력에 따라 성공할 수 있었다면 과연 그것이 큰 주목을 받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에서도 당연한 일이니까요.
2)에서 말씀하신 사례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재능이 사회의 여건에 따라 '선택'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그들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지 의문입니다. 초기의 스트리머들이 1인 미디어의 등장 전에는 실패자, 패배자로 인생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사회의 인식도 그러했고요. 성공한 스트리머들은 그들의 노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들은 많은 '패배자'들 중 소수가 아닐까요? 저도 혁신가의 노력과 창의력에 경의를 표하고,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례가, 가장 우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많은 창업가들은 '노력하라'라고 하기 보다는, '기회를 찾아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적극 반박(?) 하기는 했으나, 능력주의의 문제가 딱 잘라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만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재민2021-03-18 13:48
@윤재빈
재빈님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저 역시 샌델의 지적에서 크게 공감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온전히 서술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ㅎㅎ
특히 저는 현출되는 결과가 순수히 개인의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지적에 공감이 갔습니다. 가령 우리가 고등학교때 소논문이나 R&E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을때, 저작물을 만들어낸 우리는 우리의 순수한 능력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좋은 고등학교, 어쩌면 다소 넉넉한 가정환경 속에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외적 요소가 그 결과의 산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그것의 결과를 도덕적 맹신으로까지 확장시켜선 안된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에서 무비판적 수용이 아닌, 진정한 '능력주의'가 가동할 수 있는 교육적 환경 여건을 조성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걸스 사례에 대한 비판은 상당ㅎ ㅣ타당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이은비 님이 말씀해주셨듯, 노력을 해도 결과가 뒤따라오지 않았을 때의 불평등을 어떻게 manage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제 비판논조 역시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ㅎㅎ그렇다면 어떤 능력주의와 여건 속에서 "노력해도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가능할지, 한 번 논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현출되는 결과가 순수히 개인의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지적에 공감이 갔습니다. 가령 우리가 고등학교때 소논문이나 R&E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을때, 저작물을 만들어낸 우리는 우리의 순수한 능력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좋은 고등학교, 어쩌면 다소 넉넉한 가정환경 속에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외적 요소가 그 결과의 산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그것의 결과를 도덕적 맹신으로까지 확장시켜선 안된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에서 무비판적 수용이 아닌, 진정한 '능력주의'가 가동할 수 있는 교육적 환경 여건을 조성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브레이브걸스 사례에 대한 비판은 상당ㅎ ㅣ타당한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이은비 님이 말씀해주셨듯, 노력을 해도 결과가 뒤따라오지 않았을 때의 불평등을 어떻게 manage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제 비판논조 역시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ㅎㅎ그렇다면 어떤 능력주의와 여건 속에서 "노력해도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가능할지, 한 번 논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서장원2021-03-17 18:36
책에 대한 비평
마이클 샌델의 역작 「정의란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흥미롭게 읽었던 독자로서 이번 책도 기대를 품고 맞이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최근 은연중에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운’적 요인과 능력주의, 계층의 고착화를 정면으로 맞닥뜨려 서술해냈다. 저자의 서술 중에서도 미국의 학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마치 한국의 입시 제도와 그로 인해 과열된 사교육 열풍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하이에크와 롤스의 철학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이 가진 재능과 가치에 걸맞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지와 ‘운’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재능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논의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능력주의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열심히 하면 돈을 잘 벌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합쳐 만들어 낸 헤게모니가 현실의 기저가 된 상황에서 오히려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은 다수가 인지하지만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못했던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해줬음이 틀림없다.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논의점
1. 코로나-19 사태와 4차 산업혁명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코로나로 인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함에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노동시장의 불완전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술 진보 속도가 빨라지고 혁신적인 정보량과 속도가 제공됨에 따라 개인들은 타인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기술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21세기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두 사건은 모두 능력주의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포스트 팬데믹의 주제로 논의를 이어가는 우리는 어떻게 현 상황에서 능력주의를 해체하고 공동선을 재정립할 수 있을까? 만약 해체할 필요가 없다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어떤 방식으로 보완하여 사회의 가치관에 혁신을 도모할 수 있을까?
2.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들이 ‘큰 정부’로서의 역할을 자처하여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개입에는 관성이 분명 존재해왔고, 재난소득에 연장 선상에서 여러 대권 주자들이 기본소득 등의 ‘더 큰 정부’ 색채의 아이디어를 발표하였다. 과연 정부의 개입을 통해 능력주의를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 제도적·정책적 방향성으로 나아가야 할까? 만약 정부의 개입이 능력주의 해결에 오히려 해가 된다면 누가 부작용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까?
3.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책을 서술하였다. 물론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언급한 영(Young)도 이 단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 사회는 능력에 따라 재능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활해왔다. 신분제도를 타파한 근대 이전에 ‘신분’이란 자연스럽게 생성된 구분이었고, 현대보다 더 심각한 계층 간 격차와 귀족들의 오만함, 평민들의 불만, 우울감이 내재하여 있었다. 매슬로의 욕구이론을 살펴봐도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누군가와 비교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과연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이데올로기가 맞으며, 능력주의의 해체가 가능할까? 능력주의가 천성적으로 존재하는 가치관이라면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영속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마이클 샌델의 역작 「정의란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흥미롭게 읽었던 독자로서 이번 책도 기대를 품고 맞이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최근 은연중에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운’적 요인과 능력주의, 계층의 고착화를 정면으로 맞닥뜨려 서술해냈다. 저자의 서술 중에서도 미국의 학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마치 한국의 입시 제도와 그로 인해 과열된 사교육 열풍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하이에크와 롤스의 철학을 통해 사회에서 개인이 가진 재능과 가치에 걸맞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지와 ‘운’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재능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논의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능력주의가 팽배한 현실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열심히 하면 돈을 잘 벌고 성공할 수 있다.’라는 능력주의와 자본주의가 합쳐 만들어 낸 헤게모니가 현실의 기저가 된 상황에서 오히려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은 다수가 인지하지만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못했던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해줬음이 틀림없다.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논의점
1. 코로나-19 사태와 4차 산업혁명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코로나로 인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함에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노동시장의 불완전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술 진보 속도가 빨라지고 혁신적인 정보량과 속도가 제공됨에 따라 개인들은 타인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기술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21세기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두 사건은 모두 능력주의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포스트 팬데믹의 주제로 논의를 이어가는 우리는 어떻게 현 상황에서 능력주의를 해체하고 공동선을 재정립할 수 있을까? 만약 해체할 필요가 없다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어떤 방식으로 보완하여 사회의 가치관에 혁신을 도모할 수 있을까?
2.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들이 ‘큰 정부’로서의 역할을 자처하여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개입에는 관성이 분명 존재해왔고, 재난소득에 연장 선상에서 여러 대권 주자들이 기본소득 등의 ‘더 큰 정부’ 색채의 아이디어를 발표하였다. 과연 정부의 개입을 통해 능력주의를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 제도적·정책적 방향성으로 나아가야 할까? 만약 정부의 개입이 능력주의 해결에 오히려 해가 된다면 누가 부작용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까?
3.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어 책을 서술하였다. 물론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언급한 영(Young)도 이 단어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 사회는 능력에 따라 재능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활해왔다. 신분제도를 타파한 근대 이전에 ‘신분’이란 자연스럽게 생성된 구분이었고, 현대보다 더 심각한 계층 간 격차와 귀족들의 오만함, 평민들의 불만, 우울감이 내재하여 있었다. 매슬로의 욕구이론을 살펴봐도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누군가와 비교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과연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이데올로기가 맞으며, 능력주의의 해체가 가능할까? 능력주의가 천성적으로 존재하는 가치관이라면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영속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김재민2021-03-17 18:50
장원님 안녕하세요! 세 번째 논의점이 흥미로워 댓글 달아봅니다. 저 역시 능력주의는 오랜 세월과 역사적 과정에 거쳐 시민들이 "선택"한 하나의 사회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가 지니는 부작용이라던지 사회적 불평등이 다른 사회의 대안적 기준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고, 그 자체로서 능력주의가 부당하다는 것 역시 도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능력주의의 해체는 아직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샌델이 결론부에 제시한 대안의 설득력을 그다지 긍정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 부정성을 어느정도 시정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에는 부분 공감하였습니다.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계층화가 굳어지는 현대사회에서, 마치 가진자만 능력있고 능력있는 자만 가진자가 되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낮은 사회계층에 놓인 사람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제고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정책적 방향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적, 혹은 선별복지적 생각을 넘어,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제도적 대안으로서 이를 극복하면 어떨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또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도덕관념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요즘에는 “인성”도 실력의 부분이라고 평가되곤 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사회적 능력(EQ)의 부분인만큼, 이부분이 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능력주의가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단, 능력주의가 일종의 “기만적 행태”로 작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시민사회의 감시와 상호견제가 필요하지 않나도 조심스레 제안해봅니다.
다만, 이 부정성을 어느정도 시정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함에는 부분 공감하였습니다.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계층화가 굳어지는 현대사회에서, 마치 가진자만 능력있고 능력있는 자만 가진자가 되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낮은 사회계층에 놓인 사람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제고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정책적 방향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적, 혹은 선별복지적 생각을 넘어,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제도적 대안으로서 이를 극복하면 어떨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또한, 능력주의가 사회의 도덕관념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요즘에는 “인성”도 실력의 부분이라고 평가되곤 합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사회적 능력(EQ)의 부분인만큼, 이부분이 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능력주의가 긍정적으로 우리 사회에 정착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단, 능력주의가 일종의 “기만적 행태”로 작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시민사회의 감시와 상호견제가 필요하지 않나도 조심스레 제안해봅니다.
탈퇴한 회원2021-03-17 22:06
안녕하세요 장원님ㅎㅎ 긴 글 쓰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논의들이 흥미로워서 글을 남겨봅니다,
우선 코로나 사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잘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 비대면, 디지털, 개인화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코로나의 상황에서 연대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모순된 상황에서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합의점을 찾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상황이 끝나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코로나는 우리 삶에 흔적을 남기고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고논문인 강준만(2016)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의 전면 폐기나 평등지상주의가 대안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능력주의를 정확히 인지하고 제도적으로도 그의 폐해를 줄여나가는 것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언급해주신 각 정부 제도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야갈지에 대한 의문도 깊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 삶에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섣부른 제도적 개입은 더 큰 정부의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능력주의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정확히 구분하고, 이에 따라 긍정적 효과는 키우고, 부정적 효과는 줄이는 정책의 효과에 대한 분명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코로나 사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잘 설명해주신 것 같습니다. 비대면, 디지털, 개인화 등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코로나의 상황에서 연대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모순된 상황에서 공동선이라는 사회적 합의점을 찾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상황이 끝나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코로나는 우리 삶에 흔적을 남기고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고논문인 강준만(2016)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주의의 전면 폐기나 평등지상주의가 대안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능력주의를 정확히 인지하고 제도적으로도 그의 폐해를 줄여나가는 것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언급해주신 각 정부 제도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야갈지에 대한 의문도 깊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 삶에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섣부른 제도적 개입은 더 큰 정부의 실패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능력주의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정확히 구분하고, 이에 따라 긍정적 효과는 키우고, 부정적 효과는 줄이는 정책의 효과에 대한 분명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제웅2021-03-17 19:12
사회에서 분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재화, 하나는 인정이다. 통상 분배론은 재화의 분배에만 치중하는데, 인정 또한 경합성을 띠는, 분배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다. 후쿠야마의 표현을 빌어 인간에게 대등 욕망(isothymia)과 함께 우월 욕망(megalothymia)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를 남보다 가치 있게 평가해 주는 시선은 때로 먹고살기보다 절실하다.
샌델의 강점은 인정의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고 중요한 화두로 적출하는 데에 있다. 샌델이 보기에 능력주의의 결함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 즉 재화의 문제 이상이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미덕을 부여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에 차등 인정을 강력히 결부시킨다. 실패한 자는 능력이 없어 실패했으니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 성공한 자가 물질적으로 도와줄 까닭도, 심정적으로 공감해 줄 까닭도 없다. 제7장에서 지적되듯 저학력 노동 계급에서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 늘고 있는 이유다. 그들의 일이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풍요뿐 아니라 존엄을 결한다.
능력주의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성과의 자기 책임론이 활개 칠 것을 예정한다. 패자는 ‘사회 탓’ 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기 탓’만 하게 된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한층 착잡한 상황에 부딪히는 것이다. 승자는 그의 전리품을 ‘자기 덕’으로 여기는데, 이런 심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처 입은 승자라는 샌델의 운위에 공감한다. 나를 비롯해 서울대 합격의 관문을 통과한 학생들을 승자로 본다면, 탈락에 대한 강박적 공포와 생산성에 대한 전방위적 집착이 입시의 상흔으로 남는 경우를 적잖이 접해 왔다.
학벌 경쟁의 중심인 대입은, 미처 성인에 이르기도 전의 아이들에게 잠재하는 능력을 선별하고 학위라는 물적 형태로 공인함으로써 삶의 초입부터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기제이자, 그렇게 강화된 능력주의가 발현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계속되는 과열에 제동을 걸고자 한다면 대입 제도를 우선 손보아야 한다. 이에 샌델도 제6장을 할애해 대입 제도를 다루면서, 능력주의적 선별과 분투의 악순환을 깨기 위한 스케치의 하나로 추첨제를 제안한다. 가령 하버드대에 지원한 4만 명 가운데, 각별히 받기 힘들 것 같은 일부를 제하고 남은 2-3만 명을 놓고 제비를 뽑아 최종 합격자 2,000명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제안에는 거부감이 든다. 내가 이미 획득한 ‘명문대’ 합격증의 위신이 낮아짐에 따르는, 본능에 가까운 반작용을 무시하지 못할 테지만, 여기서는 배제한다. 성패의 갈림길 위 운의 영향력을 분명히 인정하는 자세는 능력의 폭정을 경계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추첨제처럼 운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샌델 본인이 비호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적 사회로의 이행을 저해할 수 있다. 적어도 두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운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구도가 해체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운아의 오만과 불운아의 굴욕으로 심화된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선별이 불가피하게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것과, 운이 선별의 공식적, 확정적 기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 승자는 능력에만 의존해 뽑힘이 원칙인데, 운이 작용했으므로 이에 감사하고 겸손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운의 간택을 받아 뽑혔음이, 정당한 절차를 밟은 부끄럽지 않은 사실이므로 감사할 필요가 사라진다. 목표물을 쟁취하는 수단으로서 운을 공인한 사회에서 개인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고, ‘운도 실력이야!’라며 으스대도 문제없다.
둘째, 운은 그 자체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 능력에 준거해 개인을 선별하는 제도하에서는 이의를 표하는 일이 가능하다. 시험같이 능력이 수치화될 때에는 물론이고, 설사 수치화할 수 없을지라도 개인은 ‘내가 쟤보다 잘하는데’처럼 불만을 품을 여지가 있다. 불만이 지속적, 집합적으로 축적되면 능력 평가 기준을 재고하고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하지만 운에 준거한 선별은 그 과정에 대한 반론이 생길 수 없게 만든다. 운의 결정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침묵만이 존재한다. 더 나은 분배를 지향하며 토론을 벌일 여지는 없다. 이는 샌델이 공동선에 불가결한 요소로 여기는 공공의 숙려와 대화를 제거한다.
따라서 능력의 전제를 막기 위해 운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구상은 매우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것은 샌델이 그리는, 또 나 역시 동의하는 민주 공동체의 이상향, 개개인이 자신의 성공에 감사하고 겸손하며 빚졌음을 인식하고, 정의로운 분배를 두고 끊임없이 토론, 고민하는 공동체의 청사진에 상처를 낼 우려가 있다.
샌델의 강점은 인정의 문제를 등한시하지 않고 중요한 화두로 적출하는 데에 있다. 샌델이 보기에 능력주의의 결함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 즉 재화의 문제 이상이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미덕을 부여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에 차등 인정을 강력히 결부시킨다. 실패한 자는 능력이 없어 실패했으니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 성공한 자가 물질적으로 도와줄 까닭도, 심정적으로 공감해 줄 까닭도 없다. 제7장에서 지적되듯 저학력 노동 계급에서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 늘고 있는 이유다. 그들의 일이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존중받지 못하는 삶은, 풍요뿐 아니라 존엄을 결한다.
능력주의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성과의 자기 책임론이 활개 칠 것을 예정한다. 패자는 ‘사회 탓’ 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기 탓’만 하게 된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한층 착잡한 상황에 부딪히는 것이다. 승자는 그의 전리품을 ‘자기 덕’으로 여기는데, 이런 심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처 입은 승자라는 샌델의 운위에 공감한다. 나를 비롯해 서울대 합격의 관문을 통과한 학생들을 승자로 본다면, 탈락에 대한 강박적 공포와 생산성에 대한 전방위적 집착이 입시의 상흔으로 남는 경우를 적잖이 접해 왔다.
학벌 경쟁의 중심인 대입은, 미처 성인에 이르기도 전의 아이들에게 잠재하는 능력을 선별하고 학위라는 물적 형태로 공인함으로써 삶의 초입부터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기제이자, 그렇게 강화된 능력주의가 발현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능력주의의 계속되는 과열에 제동을 걸고자 한다면 대입 제도를 우선 손보아야 한다. 이에 샌델도 제6장을 할애해 대입 제도를 다루면서, 능력주의적 선별과 분투의 악순환을 깨기 위한 스케치의 하나로 추첨제를 제안한다. 가령 하버드대에 지원한 4만 명 가운데, 각별히 받기 힘들 것 같은 일부를 제하고 남은 2-3만 명을 놓고 제비를 뽑아 최종 합격자 2,000명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제안에는 거부감이 든다. 내가 이미 획득한 ‘명문대’ 합격증의 위신이 낮아짐에 따르는, 본능에 가까운 반작용을 무시하지 못할 테지만, 여기서는 배제한다. 성패의 갈림길 위 운의 영향력을 분명히 인정하는 자세는 능력의 폭정을 경계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추첨제처럼 운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샌델 본인이 비호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적 사회로의 이행을 저해할 수 있다. 적어도 두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운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구도가 해체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행운아의 오만과 불운아의 굴욕으로 심화된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선별이 불가피하게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것과, 운이 선별의 공식적, 확정적 기준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 승자는 능력에만 의존해 뽑힘이 원칙인데, 운이 작용했으므로 이에 감사하고 겸손할 수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 운의 간택을 받아 뽑혔음이, 정당한 절차를 밟은 부끄럽지 않은 사실이므로 감사할 필요가 사라진다. 목표물을 쟁취하는 수단으로서 운을 공인한 사회에서 개인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고, ‘운도 실력이야!’라며 으스대도 문제없다.
둘째, 운은 그 자체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 능력에 준거해 개인을 선별하는 제도하에서는 이의를 표하는 일이 가능하다. 시험같이 능력이 수치화될 때에는 물론이고, 설사 수치화할 수 없을지라도 개인은 ‘내가 쟤보다 잘하는데’처럼 불만을 품을 여지가 있다. 불만이 지속적, 집합적으로 축적되면 능력 평가 기준을 재고하고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하지만 운에 준거한 선별은 그 과정에 대한 반론이 생길 수 없게 만든다. 운의 결정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침묵만이 존재한다. 더 나은 분배를 지향하며 토론을 벌일 여지는 없다. 이는 샌델이 공동선에 불가결한 요소로 여기는 공공의 숙려와 대화를 제거한다.
따라서 능력의 전제를 막기 위해 운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구상은 매우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것은 샌델이 그리는, 또 나 역시 동의하는 민주 공동체의 이상향, 개개인이 자신의 성공에 감사하고 겸손하며 빚졌음을 인식하고, 정의로운 분배를 두고 끊임없이 토론, 고민하는 공동체의 청사진에 상처를 낼 우려가 있다.
최동익2021-03-17 23:28
제웅님, 안녕하세요. 능력주의가 승자에게도 상흔을 남긴다는 점과 사회 구성 원리로서 운의 활용에 대해 보다 얘기해보고 싶어 댓글 남깁니다.
먼저 능력주의가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언급해주신 탈락에 대한 공포는 분명, 일시적으로는 기쁨에 취하게 되는 승자의 마음 어딘가 한편에 불안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주요한 경쟁에서 나름의 성취를 거두더라도 경쟁과 인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성과를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변 친구들을 협력 대상이 아닌 잠재적 경쟁 대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다는 면에서도 구성원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샌델이 제시한 운의 도입이 더 큰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보다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첫째 근거로 제시해주신 운의 공식화에 따른 귀결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능력은 이미 공식화되어 주요 기준으로 사용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감사의 대상이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에 이를 수 있냐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대상이 만일 스스로의 운이 된다면, 샌델은 우선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완벽 강박에서 벗어남으로써 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리라는 희망적인 가정, 또 대학 구성원에서 동문 입학자나 기부 입학자들이 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곧 보다 시민의 성품에 있어서, 또 대학 공동체 구성에 있어서 오만을 줄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리라는 생각 아래에서 제비뽑기의 도입을 주장했다고 이해했습니다.
물론 제웅님이 말씀해주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시행되고 있는 제비뽑기, 로또를 생각해볼 때에 로또 당첨자가 자신의 행운으로 인해 오만해질 가능성은 적어보입니다. 로또와 대학 입학은 다른 만큼 완벽한 비유는 아니겠으나, 고려해볼 만한 비유라고 생각해서 언급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능력주의가 모두에게 상처가 된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언급해주신 탈락에 대한 공포는 분명, 일시적으로는 기쁨에 취하게 되는 승자의 마음 어딘가 한편에 불안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주요한 경쟁에서 나름의 성취를 거두더라도 경쟁과 인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성과를 추구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변 친구들을 협력 대상이 아닌 잠재적 경쟁 대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다는 면에서도 구성원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샌델이 제시한 운의 도입이 더 큰 악영향을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보다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첫째 근거로 제시해주신 운의 공식화에 따른 귀결은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능력은 이미 공식화되어 주요 기준으로 사용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에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감사의 대상이 타인, 더 나아가 공동체에 이를 수 있냐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의 대상이 만일 스스로의 운이 된다면, 샌델은 우선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완벽 강박에서 벗어남으로써 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리라는 희망적인 가정, 또 대학 구성원에서 동문 입학자나 기부 입학자들이 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곧 보다 시민의 성품에 있어서, 또 대학 공동체 구성에 있어서 오만을 줄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리라는 생각 아래에서 제비뽑기의 도입을 주장했다고 이해했습니다.
물론 제웅님이 말씀해주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시행되고 있는 제비뽑기, 로또를 생각해볼 때에 로또 당첨자가 자신의 행운으로 인해 오만해질 가능성은 적어보입니다. 로또와 대학 입학은 다른 만큼 완벽한 비유는 아니겠으나, 고려해볼 만한 비유라고 생각해서 언급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유진2021-03-18 05:21
안녕하세요 제웅님! 글 잘 읽었습니다:)
능력주의가 패자는 물론이고 승자에게도 완전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함을 글에서 잘 도출해주신 것 같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제가 능력주의에 관한 다른 책을 읽고 느꼈던 바를 첨언해 보고자 합니다. 동화책은 심 봉사가 눈을 떴다거나 흥부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되었다는 등 성취의 절정에 다다른 순간에 결말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동화가 아니기에, 성취(또는 승리, 성공)의 순간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승자 또한 능력주의의 새로운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자녀의 교육일 것입니다. 능력주의의 승자들에게, 자녀가 그들만큼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녀가 자신들과 맞먹는, 혹은 더 뛰어난 학벌과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에,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성취를 이뤄내며 자신을 착취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진정한 승자는 없는 악순환이지요. 능력주의의 이러한 굴레가 굉장히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책을 읽어보니, 마이클 샌델 또한 뾰족한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한 듯합니다. 학우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의 대안에는 너무나 많은 허점이 보이니까요.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능력주의가 패자는 물론이고 승자에게도 완전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아이러니함을 글에서 잘 도출해주신 것 같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제가 능력주의에 관한 다른 책을 읽고 느꼈던 바를 첨언해 보고자 합니다. 동화책은 심 봉사가 눈을 떴다거나 흥부가 박을 타서 부자가 되었다는 등 성취의 절정에 다다른 순간에 결말을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동화가 아니기에, 성취(또는 승리, 성공)의 순간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승자 또한 능력주의의 새로운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자녀의 교육일 것입니다. 능력주의의 승자들에게, 자녀가 그들만큼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녀가 자신들과 맞먹는, 혹은 더 뛰어난 학벌과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기에,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성취를 이뤄내며 자신을 착취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진정한 승자는 없는 악순환이지요. 능력주의의 이러한 굴레가 굉장히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책을 읽어보니, 마이클 샌델 또한 뾰족한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한 듯합니다. 학우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의 대안에는 너무나 많은 허점이 보이니까요.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문지수2021-03-17 19:17
재능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사회. 돈으로 능력을 만들 수 있는 사회, 상황과 운과 모든 외적인 요소들을 개인의 능력이라 치부해버리는 사회. 샌델이 말한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능, 상황을 타고나는 것도 운이지만, 부에 의해 재능이 창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부'를 타고난 운에 집중하여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요즘, 능력주의에 상처받고 사회적 상승 담론에 신물이 난 이들이 늘었고, 이것이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지난 학기에 자리가 남는 수업을 찾다가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끊임없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자유경쟁 시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프롤레타리아는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착취하는 구조라고 말했습니다. 개개인의 인간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각 계급의 위치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떠오른 이유는 자유롭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은 이 사회는 공정하지 않으며, 사회적 상승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운과 상황이 좋았을 뿐이고, 사회적 상승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주의의 폭정의 피해자라는 규정이 생산수단을 운으로 보았을때, 전자는 부르주아, 후자는 프롤레타리아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지워지고 계급만 남았던 마르크스의 구분처럼, 샌델의 구분 역시 개인을 지우고 사회 구조에 집중합니다. 샌델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공감하지만, 개인의 노력을 너무 경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샌델에 따르면 개인의 노력 역시 운 덕분에 빛을 보는 것이겠지만, 모든 것을 운으로 치환해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철폐하고 시장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해결책으로 내놓았지만, 이는 실현이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능력주의의 횡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능력주의를 완전히 없애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입니다. 책에서도 밝혔듯 능력주의는 성별, 인종 등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만들고 효율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함이 명백하기에 샌델은 펜을 들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과 책의 사례를 연결 지어 결론을 도출한 것 처럼 보이지만, 두 이야기를 연결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도출하고 관찰했더니 두 사례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함께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많은 분께서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고, 저 역시 샌델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던지지 못했음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특히나 대입에 관한 해결책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은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제기되었던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하지만,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후에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계속해서 능력주의가 '당신이 어느 위치에서 시작했든, 성공을 쟁취하지 못한 것은 당신 탓이야.'라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운명은 개인의 책임이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어 사회적 연대가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복적으로 독자들에게 능력주의의 횡포를 설득하고, 해결책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책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를 '설득'이라 이야기합니다. 즉 사람들을 설득하고, 의식을 바꾸어 사회적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현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실제로 설득의 효과는 엄청납니다. 사회가 계속해서 공익 광고를 만들고, 학교에서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환경에 관한 담론, 인권에 대한 담론이 분명 몇 년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듯 사람들의 의식 변화만큼 확실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공선과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공통적인 감수성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합니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에 아직 제 견문이 좁지만, 관련된 토론을 진행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여담이지만, 글 번역이 굉장히 잘 된 것 같습니다. 제목이 원제보다 직관적으로 책의 주제를 제시해주지는 못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은 독자의 상상력을 훨씬 더 자극하고, 원래 한글로 쓰인 책이라고 봐도 될만큼 번역이 매끄러워서 읽는데 굉장히 편했습니다. 함규진님 최고
지난 학기에 자리가 남는 수업을 찾다가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자본주의를 끊임없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자유경쟁 시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프롤레타리아는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착취하는 구조라고 말했습니다. 개개인의 인간성과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각 계급의 위치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르크스가 떠오른 이유는 자유롭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은 이 사회는 공정하지 않으며, 사회적 상승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운과 상황이 좋았을 뿐이고, 사회적 상승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주의의 폭정의 피해자라는 규정이 생산수단을 운으로 보았을때, 전자는 부르주아, 후자는 프롤레타리아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은 지워지고 계급만 남았던 마르크스의 구분처럼, 샌델의 구분 역시 개인을 지우고 사회 구조에 집중합니다. 샌델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공감하지만, 개인의 노력을 너무 경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샌델에 따르면 개인의 노력 역시 운 덕분에 빛을 보는 것이겠지만, 모든 것을 운으로 치환해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철폐하고 시장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해결책으로 내놓았지만, 이는 실현이 어려운 사회라는 것이 경험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능력주의의 횡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능력주의를 완전히 없애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입니다. 책에서도 밝혔듯 능력주의는 성별, 인종 등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만들고 효율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함이 명백하기에 샌델은 펜을 들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과 책의 사례를 연결 지어 결론을 도출한 것 처럼 보이지만, 두 이야기를 연결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도출하고 관찰했더니 두 사례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함께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많은 분께서 샌델이 제시한 해결책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고, 저 역시 샌델이 실질적인 해결책을 던지지 못했음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특히나 대입에 관한 해결책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은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제기되었던 문제의 해결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하지만,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후에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책은 계속해서 능력주의가 '당신이 어느 위치에서 시작했든, 성공을 쟁취하지 못한 것은 당신 탓이야.'라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운명은 개인의 책임이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어 사회적 연대가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복적으로 독자들에게 능력주의의 횡포를 설득하고, 해결책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책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를 '설득'이라 이야기합니다. 즉 사람들을 설득하고, 의식을 바꾸어 사회적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현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실제로 설득의 효과는 엄청납니다. 사회가 계속해서 공익 광고를 만들고, 학교에서 캠페인을 진행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환경에 관한 담론, 인권에 대한 담론이 분명 몇 년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듯 사람들의 의식 변화만큼 확실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공선과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공통적인 감수성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합니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에 아직 제 견문이 좁지만, 관련된 토론을 진행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여담이지만, 글 번역이 굉장히 잘 된 것 같습니다. 제목이 원제보다 직관적으로 책의 주제를 제시해주지는 못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은 독자의 상상력을 훨씬 더 자극하고, 원래 한글로 쓰인 책이라고 봐도 될만큼 번역이 매끄러워서 읽는데 굉장히 편했습니다. 함규진님 최고
조민영2021-03-17 19:24
기본적으로 <공정하다는 착각>은 도덕 내지는 윤리와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삶 나아가 좋은 사회와 관련된 것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샌델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당위에 대해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가 이를 받아들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어보았다.
우선 샌델은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 '폭정'에 대해 비판한다. (1) 능력주의가 이상적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을 뿐더러, (2) 이상적으로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능력주의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1)과 같은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수 있어도,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2)와 같은 문제일 것이다. 능력주의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능력주의를 뽑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능력주의'라는 말은 원래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탄생한 용어이지만 현재는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버렸다며, 현 세태를 비판하고 능력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샌델의 주장을 읽다 보면 몇 가지 생각이 든다.
첫째는, 샌델은 인간의 다양한 속성 중에서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에도 문제가 있는 까닭은, 샌델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주고 패자에게 굴욕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에 뒤따르는 결과는 잘 되면 보상, 잘 되지 않으면 벌로 여겨진다. 또한, 능력주의적 생활방식은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면서, 이렇듯 어떠한 결과가 나의 능력에 따른 성공과 실패의 가치판단을 담고 있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물론 여기서의 명예는 남들이 봤을 때 겉에서 비춰지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는 자랑스러움이나 좌절감, 열등감 등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지는 것은, 샌델이 능력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근거로 오만과 굴욕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적절한 근거인지 의문이 들었다.
둘째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에 관한 것다. 능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인가? 개인이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는 정말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고, 유전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무엇에 의해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평등은 어떤 기준에 맞추어져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첫번째 답은 결과적 평등인데, 결과적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가 아니라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기회의 평등인데, 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것은 능력주의와 긴밀하게 맞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해 샌델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의 평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한가? 샌델은 조건의 평등이라고 답한다. 이는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을 의미하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대안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한 대안인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듯, '공동선'에 대한 생각을 하나로 모으기는 어려울 텐데, 여기서 샌델이 생각하고 있는 '공동선'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샌델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팬데믹과 관련하여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이 공동선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우선 샌델은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 '폭정'에 대해 비판한다. (1) 능력주의가 이상적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을 뿐더러, (2) 이상적으로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능력주의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1)과 같은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을 수 있어도,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2)와 같은 문제일 것이다. 능력주의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능력주의를 뽑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능력주의'라는 말은 원래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탄생한 용어이지만 현재는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버렸다며, 현 세태를 비판하고 능력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샌델의 주장을 읽다 보면 몇 가지 생각이 든다.
첫째는, 샌델은 인간의 다양한 속성 중에서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에도 문제가 있는 까닭은, 샌델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주고 패자에게 굴욕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에 뒤따르는 결과는 잘 되면 보상, 잘 되지 않으면 벌로 여겨진다. 또한, 능력주의적 생활방식은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면서, 이렇듯 어떠한 결과가 나의 능력에 따른 성공과 실패의 가치판단을 담고 있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다. 물론 여기서의 명예는 남들이 봤을 때 겉에서 비춰지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는 자랑스러움이나 좌절감, 열등감 등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지는 것은, 샌델이 능력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근거로 오만과 굴욕을 제시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적절한 근거인지 의문이 들었다.
둘째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에 관한 것다. 능력은 어떻게 계발되는가? 오로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인가? 개인이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는 정말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고, 유전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닌가? 무엇에 의해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평등은 어떤 기준에 맞추어져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첫번째 답은 결과적 평등인데, 결과적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가 아니라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기회의 평등인데, 이 기회의 평등이라는 것은 능력주의와 긴밀하게 맞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해 샌델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의 평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한가? 샌델은 조건의 평등이라고 답한다. 이는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을 의미하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대안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한 대안인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듯, '공동선'에 대한 생각을 하나로 모으기는 어려울 텐데, 여기서 샌델이 생각하고 있는 '공동선'은 무엇인지 혹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샌델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팬데믹과 관련하여 샌델이 말하고자 하는 이 공동선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최동익2021-03-17 23:46
민영님, 안녕하세요. 샌델의 입장에 대해서 보다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댓글 남깁니다.
샌델의 철학적 사고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받아들이는 가치 질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갔습니다. 다만 말씀해주신 것처럼 샌델이 인간의 '명예를 최우선시하고 있다면, 그가 제시할 공동선 또한 꽤나 명예와 관련되어야 논리적으로는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샌델이 개인의 명예와 공동선을 잇는 시도를 적어도 이 책에서는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아마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서 샌델이 명예를 든 까닭은 능력주의가 이론적 차원에서는 약점이 적다고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포퓰리즘 정치를 낳았고 이러한 결과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요소가 굴욕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명예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에 그에 대해 논했지, 샌델 자신의 가치관에서 명예가 가장 높이 있다는 입장까지는 나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샌델의 철학적 사고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받아들이는 가치 질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갔습니다. 다만 말씀해주신 것처럼 샌델이 인간의 '명예를 최우선시하고 있다면, 그가 제시할 공동선 또한 꽤나 명예와 관련되어야 논리적으로는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샌델이 개인의 명예와 공동선을 잇는 시도를 적어도 이 책에서는 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아마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서 샌델이 명예를 든 까닭은 능력주의가 이론적 차원에서는 약점이 적다고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포퓰리즘 정치를 낳았고 이러한 결과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요소가 굴욕이라는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능력주의가 명예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에 그에 대해 논했지, 샌델 자신의 가치관에서 명예가 가장 높이 있다는 입장까지는 나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보설2021-03-17 23:48
조민영님 댓글 잘 읽었습니다! 첫번째와 관련해서 제 생각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만과 굴욕이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 감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이가 오만하게 굴고, 굴욕감을 안기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듯한 분위기라면,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위협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능력이라는 기준이 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등 공정한 기준도 아닌데 능력 부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굴욕감을 안기는 일이 정당화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성공한 자와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심화되면 샌델이 예로 든 중국 10대가 장기를 판 사건과 같이, 성공한 사람에게 자부심을 넘어서 생명 연장 권리까지 주는 분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 역시 존엄성이 훼손됩니다. 만약 명예라는 가치 혹은 명예로운 감정을 중요시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샌델이 오만과 굴욕을 근거로 든 것은 그렇게 표면적인 문제 제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의견에서 조건의 평등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한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조건적 평등이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에 대한 반박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뜻하시는지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후자로 이해하자면 저도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 간 커뮤니케이션과 유대감 형성이 어려워지고, 공공 시설의 역할이 줄어들어서 현실에 대입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건의 평등이 마련될 수 있을지 논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둘째 의견에서 조건의 평등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한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조건적 평등이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에 대한 반박을 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뜻하시는지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후자로 이해하자면 저도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 간 커뮤니케이션과 유대감 형성이 어려워지고, 공공 시설의 역할이 줄어들어서 현실에 대입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건의 평등이 마련될 수 있을지 논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문보설2021-03-17 23:54
@최동익
최동익님! 제가 원 댓글의 작성자는 아니지만 우연히 대댓글을 단 시기가 겹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샌델이 명예를 강조하는 까닭을 오히려 명예가 능력주의의 이론적 한계 중 하나이고, 명예가 능력주의 하에서는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행태로 발전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포퓰리즘 정치의 원인으로 엮어 주셨네요. 실제로 샌델이 포퓰리즘 정치가 준동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러한 굴욕감에 대한 설명을 했기 때문에, 동익님의 해석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관점이라 흥미롭네요. 좋은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최동익2021-03-18 10:51
@문보설
@문보설 보설님 안녕하세요.
저 또한 능력주의가 무결의 이론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게 능력주의 또한 명예 - 존엄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훼손할 수 있고, 포퓰리즘 정치의 등장에서 그 가능성이 실현되어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샌델이 지적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명예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가령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지 아니면 수단으로서만 가치 있는지, 곧 명예와 존엄성 사이 연관 정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저 또한 능력주의가 무결의 이론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게 능력주의 또한 명예 - 존엄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훼손할 수 있고, 포퓰리즘 정치의 등장에서 그 가능성이 실현되어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샌델이 지적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명예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가령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지 아니면 수단으로서만 가치 있는지, 곧 명예와 존엄성 사이 연관 정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조현호2021-03-17 20:48
자신의 노력을 기울여 성과를 얻고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능력주의’ 샌델은 현대 사회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은 이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능력주의는 사회적 이동성이 본래 의도와 달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 평등한 기회가 전제되는 능력주의가 사실은 평등하지 않은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샌델은 대학 입시와 관련하여 부유한 부모의 자식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외부 요소의 작용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샌델은 공동선을 강조하며 각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샌델의 접근은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 역시 능력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필자 역시 능력주의가 분명한 문제점을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샌델의 논리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자식이 있다면 뛰어난 선생에게 배우고자 할 것이며, 뛰어난 의사에게 진료 받고자 할 것이고, 뛰어난 변호사에게 그의 안전을 맡기고자 할 것이다. 즉 우리 스스로 능력주의의 산물을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키운 자식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좋은 직업을 갖길 원할 것이다. 즉 결국 사람들은 능력주의의 산물을 원하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능력주의의 경쟁 과정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능력주의의 과정 속에 부모의 재력 등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불합리한 구조 등의 문제점에 대해선 샌델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듯 어떠한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사실 출발선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의 성장배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게 맞출 수도 없다. 즉 부모, 환경 등의 출발선을 탓할 시간에 각자 다른 출발선을 인정하고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프랑스와 일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응답한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앞에서 인정했듯이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 것 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노력하고 그 상황을 바꾸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많은 학우분들 또한 입시과정에서 주변의 환경이 좋든 나쁘든 자신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사회는 우연에 의해 결정된 서로 다른 출발선을 고려하여 여러 장치를 고안해두었다. 서울대 입시만 보더라도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를 고려하여 지방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입시 제도가 존재한다. 즉 개인이 노력하면 충분히 능력주의의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런 경쟁 과정에서, 성공한 개인과 실패한 개인들의 대우받는 정도의 격차와 모든 짐을 개인에게 짊어지우는 개인책임론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레이건이 연두 교서에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만 도와준다는 것을 가혹함의 근거로 들었다. 물론 이상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개개인의 실수까지 모두 공동체가 책임진다는 것은 결국 개인을 위해 전체가 희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으로 보면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전체가 희생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면 얼마나 무서운 뜻인지 알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상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샌델의 접근은 이제껏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샌델 역시 능력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필자 역시 능력주의가 분명한 문제점을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샌델의 논리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자식이 있다면 뛰어난 선생에게 배우고자 할 것이며, 뛰어난 의사에게 진료 받고자 할 것이고, 뛰어난 변호사에게 그의 안전을 맡기고자 할 것이다. 즉 우리 스스로 능력주의의 산물을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키운 자식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좋은 직업을 갖길 원할 것이다. 즉 결국 사람들은 능력주의의 산물을 원하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능력주의의 경쟁 과정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능력주의의 과정 속에 부모의 재력 등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불합리한 구조 등의 문제점에 대해선 샌델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듯 어떠한 대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사실 출발선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으며 사람의 성장배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게 맞출 수도 없다. 즉 부모, 환경 등의 출발선을 탓할 시간에 각자 다른 출발선을 인정하고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통계 자료를 보면 프랑스와 일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응답한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앞에서 인정했듯이 출발선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 것 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노력하고 그 상황을 바꾸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많은 학우분들 또한 입시과정에서 주변의 환경이 좋든 나쁘든 자신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사회는 우연에 의해 결정된 서로 다른 출발선을 고려하여 여러 장치를 고안해두었다. 서울대 입시만 보더라도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를 고려하여 지방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입시 제도가 존재한다. 즉 개인이 노력하면 충분히 능력주의의 문제점으로 제기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샌델은 이런 경쟁 과정에서, 성공한 개인과 실패한 개인들의 대우받는 정도의 격차와 모든 짐을 개인에게 짊어지우는 개인책임론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레이건이 연두 교서에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만 도와준다는 것을 가혹함의 근거로 들었다. 물론 이상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개개인의 실수까지 모두 공동체가 책임진다는 것은 결국 개인을 위해 전체가 희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으로 보면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전체가 희생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면 얼마나 무서운 뜻인지 알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상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을 이루기 위해선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원재희2021-03-17 20:51
무엇보다도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은 독자의 눈길을 끌 만하다. 독자에게, 당신들은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경계적 어투로 경각심을 심어줌으로써 책을 읽기 전부터 독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본인 또한 그런 독자들 중 한 명이다. 가장 먼저 드는 호기심은, “왜 ‘능력주의의 폭정’을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번역했을까?”였다. 다음으로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공정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나를 두드렸다. 이 책에 대해 더 깊숙이 파고들어가면서, 천천히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하지만, 그 메시지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는 여러 사례와 관점을 투입시켰다. 본질로 닿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책의 내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학력주의’, ‘시장경제’, ‘자격’, 그리고 ‘분배적 정의’가 그것이다.
· 학력주의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핵심 기둥을 이루고 있다. 교육을 통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구호 아래 조장되는 학력주의는 무엇보다 승리자의 오만과 패배자의 좌절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한다. 사람들은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를 입으로는 비판하면서도 결국 자신도 현실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학력주의 공고화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 과연 이것을 근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쨌든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 개인들이고, 각 개인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인데, 누가 먼저 학력주의 분위기의 희석을 위해 자신의 미래 이익을 희생하려 할까?
· 시장경제
전공이 경제학인지라 시장경제가 능력주의에 주는 지대한 영향력에 많은 관심을 두고 책을 읽었다. 도덕적 가치와 시장적 가치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연습은 꽤 신선했던 것 같다. 나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시장에서의 좋은 결과는 곧 그 사람의 사회적 기여도를 나타낸다고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하이에크나 롤스는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일치를 통해 내가 어떠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과 시장 균형점의 우연한 일치의 정도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 책으로 겨울방학 때 독서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해주셨다. “요즘에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군을 준비하는 학과의 요구점에 맞추어서 공부하고 준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만들어져가는 능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장의 요구와 나의 (결과적인) 능력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게 된다.” 이에 대해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나는 그 요구점에 맞추어서 능력을 만들고 키워나갈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여전히 운에 따르기 때문에 롤스나 하이에크의 주장이 현재에도 상당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 자격
‘You deserve it’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나의 피나는 노력을 인정하고 내가 받은 결과물을 정당화해주는 말이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결실은, 같은 말이나 상황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려는 태도를 얻은 것이다. 내가 좋지 않은 결과물을 받았을 때 ‘그럴 만하다’라는 말은 나의 개인적 책임을 확대하면서 좌절감을 증폭시킨다. 급기야는 나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한 의심까지도 들게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벼운 궁금증이 생긴다. 순전히 운에 따른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결과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맞는 결과를 얻은 사람에게 마이클 샌델은 어떻게 칭찬해야 한다고 말할까? 칭찬을 해도 되긴 할까? 어떻게 말해주어야 사람들의 노동 욕구를 해치지 않으면서 승리자의 오만이 옅어지게 만들 수 있을까?
· 분배적 정의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일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었다. 능력주의가 조장한 끝없는 경쟁은 우리를 이기심과 개인주의로 똘똘 뭉친 존재들로 탈바꿈시켜놓았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이유는 각 개인이 경쟁을 통해 얻는 시장에서의 보상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빛나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먼저, 더 열심히 하여 그것을 쟁취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롤스가 말했듯이, 앞서 달린 자에게 마음껏 보상을 해주되, 그의 몫을 공동체의 구성원과 나누도록 하는 분배적 정의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듯 공동선에 대한 진정성있고 확실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제 서론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능력주의는 그 시스템 속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자에게는 현재의 체계와 결과가 모두 공정한 과정의 결과라는 착각을, 그리고 후자에게는 기회의 평등이 완전히 보장된 완벽한 능력주의의 이상이 공정할 것이라는 착각을. 능력주의의 폭정은 누군가가 나서서 그 위력을 폭로하지 않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침투하여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중반까지는 능력주의가 왜 그렇게 잘못이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읽었다. 번역자는 우리에게 ‘정신 차리고 똑바로 보아라’라고 말하기 위해 지금의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하지만, 그 메시지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는 여러 사례와 관점을 투입시켰다. 본질로 닿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책의 내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학력주의’, ‘시장경제’, ‘자격’, 그리고 ‘분배적 정의’가 그것이다.
· 학력주의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핵심 기둥을 이루고 있다. 교육을 통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구호 아래 조장되는 학력주의는 무엇보다 승리자의 오만과 패배자의 좌절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한다. 사람들은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를 입으로는 비판하면서도 결국 자신도 현실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학력주의 공고화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 과연 이것을 근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쨌든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 개인들이고, 각 개인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인데, 누가 먼저 학력주의 분위기의 희석을 위해 자신의 미래 이익을 희생하려 할까?
· 시장경제
전공이 경제학인지라 시장경제가 능력주의에 주는 지대한 영향력에 많은 관심을 두고 책을 읽었다. 도덕적 가치와 시장적 가치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연습은 꽤 신선했던 것 같다. 나도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시장에서의 좋은 결과는 곧 그 사람의 사회적 기여도를 나타낸다고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하이에크나 롤스는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일치를 통해 내가 어떠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가진 능력과 시장 균형점의 우연한 일치의 정도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 책으로 겨울방학 때 독서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해주셨다. “요즘에는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군을 준비하는 학과의 요구점에 맞추어서 공부하고 준비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만들어져가는 능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장의 요구와 나의 (결과적인) 능력의 일치가 우연이 아니게 된다.” 이에 대해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나는 그 요구점에 맞추어서 능력을 만들고 키워나갈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은 여전히 운에 따르기 때문에 롤스나 하이에크의 주장이 현재에도 상당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 자격
‘You deserve it’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나의 피나는 노력을 인정하고 내가 받은 결과물을 정당화해주는 말이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결실은, 같은 말이나 상황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려는 태도를 얻은 것이다. 내가 좋지 않은 결과물을 받았을 때 ‘그럴 만하다’라는 말은 나의 개인적 책임을 확대하면서 좌절감을 증폭시킨다. 급기야는 나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한 의심까지도 들게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벼운 궁금증이 생긴다. 순전히 운에 따른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결과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맞는 결과를 얻은 사람에게 마이클 샌델은 어떻게 칭찬해야 한다고 말할까? 칭찬을 해도 되긴 할까? 어떻게 말해주어야 사람들의 노동 욕구를 해치지 않으면서 승리자의 오만이 옅어지게 만들 수 있을까?
· 분배적 정의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일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는 부분이었다. 능력주의가 조장한 끝없는 경쟁은 우리를 이기심과 개인주의로 똘똘 뭉친 존재들로 탈바꿈시켜놓았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이유는 각 개인이 경쟁을 통해 얻는 시장에서의 보상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빛나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먼저, 더 열심히 하여 그것을 쟁취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롤스가 말했듯이, 앞서 달린 자에게 마음껏 보상을 해주되, 그의 몫을 공동체의 구성원과 나누도록 하는 분배적 정의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클 샌델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듯 공동선에 대한 진정성있고 확실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제 서론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능력주의는 그 시스템 속 승리자와 패배자 모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자에게는 현재의 체계와 결과가 모두 공정한 과정의 결과라는 착각을, 그리고 후자에게는 기회의 평등이 완전히 보장된 완벽한 능력주의의 이상이 공정할 것이라는 착각을. 능력주의의 폭정은 누군가가 나서서 그 위력을 폭로하지 않으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침투하여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나 또한 책을 읽으면서 중반까지는 능력주의가 왜 그렇게 잘못이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읽었다. 번역자는 우리에게 ‘정신 차리고 똑바로 보아라’라고 말하기 위해 지금의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손지우2021-03-18 04:26
재희님 좋은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특히 학력주의에서 '현 시류에 편승한 사회의 구성원들 중 누가 먼저 그 분위기의 희석을 위해 자신의 미래 이익을 희생하려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셨던 점과 자격에 대한 부분에서 '노동 욕구를 해치치 않으며 승리자의 오만이 옅어지게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해주신 부분에 깊게 공감했습니다. 저 또한 학력주의가 옳지는 않지만 현 사회에서 그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져왔고 그에 노력해서 쟁취했다고 생각해왔기에 본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던 듯 합니다. 더불어 앞서 달린 자가 오만하지 않도록 하면서도 노동 욕구를 해치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 몫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나누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에 대한 의문에도 또한 동의합니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병폐를 해결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그를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한 학력주의의 풍토 등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본 책을 접하기 이전까지 스스로가 대학 입학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고 그래서 쟁취해냈다고 느껴왔던,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적 사고에 젖어있던 사람이라 그러한지 던지신 질문에 대해 기꺼이 '그 미래 이익을 희생하는 1인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라고 말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평소 소위 '마패질'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을 보면 눈쌀을 찌푸리곤 하지만 그럼에도 '학력만 보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학력도 내가 이룬 일부인데 자부심은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사람의 한계인가 싶고, 돌아보면 사회에서 말해오던 소위 명문대에 가면 가지게 될 미래를 그리고 주변인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신이 나 최선을 다했던 기억에 스스로가 안타까워서 때문인 듯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샌델이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보니 저는 스스로의 사고방식 자체를 뜯어고치는 것 외에는 사회가 아주 붕괴된 후 재건립되어야 하지 않나하는 비현실적이고 우스운 방법들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재희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깊은 공감이 가 혹여 재희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선에 대한 진정성있고 확실한 합의'는 어떠한 것인지 또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쭙고자 댓글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병폐를 해결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그를 위해서는 사회에 만연한 학력주의의 풍토 등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본 책을 접하기 이전까지 스스로가 대학 입학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고 그래서 쟁취해냈다고 느껴왔던,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적 사고에 젖어있던 사람이라 그러한지 던지신 질문에 대해 기꺼이 '그 미래 이익을 희생하는 1인이 될 수 있을 듯 합니다'라고 말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평소 소위 '마패질'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을 보면 눈쌀을 찌푸리곤 하지만 그럼에도 '학력만 보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학력도 내가 이룬 일부인데 자부심은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사람의 한계인가 싶고, 돌아보면 사회에서 말해오던 소위 명문대에 가면 가지게 될 미래를 그리고 주변인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신이 나 최선을 다했던 기억에 스스로가 안타까워서 때문인 듯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샌델이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보니 저는 스스로의 사고방식 자체를 뜯어고치는 것 외에는 사회가 아주 붕괴된 후 재건립되어야 하지 않나하는 비현실적이고 우스운 방법들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재희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깊은 공감이 가 혹여 재희님께서 생각하시는 '공동선에 대한 진정성있고 확실한 합의'는 어떠한 것인지 또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쭙고자 댓글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원재희2021-03-18 09:48
@손지우
지우님, 부족한 글 재미 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우님이 하신 생각들, 저도 사실 똑같이 하고 있고 저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불타는 고리들을 열심히 넘어온 내 자신에게 이 정도 자부심은 작은 보상으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고, 적어도 취업 걱정은 면하겠다는 옹졸한 안심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특히 우리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능력이 너무 좁게, 수직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공동선이라는 목표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 중 단 하나의 사다리에만 목매며 서로 먼저, 더 빠르게 올라가려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 하나의 사다리를 올려가려 애썼던, 그리고 지금도 애쓰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 중 하나이고요.
이를 어떻게 해결하여 능력주의를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까요. 저도 난감하고 막막합니다.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나마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는 정치체의 구성원들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도 책에서 여러 번 각 나라의 정치인들의 학력 경쟁을 지적했었죠. 제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주 비현실적이고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학생의 이상한 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ㅎㅎ 법은 사회적 합의가 실제화된 것인데, 정치체 구성원들의 일정 비율을 특정한 자격으로 입법을 통해 정해두는 방법은.. 어떨까요...?
지우님이 하신 생각들, 저도 사실 똑같이 하고 있고 저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불타는 고리들을 열심히 넘어온 내 자신에게 이 정도 자부심은 작은 보상으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고, 적어도 취업 걱정은 면하겠다는 옹졸한 안심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특히 우리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능력이 너무 좁게, 수직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공동선이라는 목표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우리 모든 사람들은 그 중 단 하나의 사다리에만 목매며 서로 먼저, 더 빠르게 올라가려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그 하나의 사다리를 올려가려 애썼던, 그리고 지금도 애쓰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 중 하나이고요.
이를 어떻게 해결하여 능력주의를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까요. 저도 난감하고 막막합니다.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나마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는 정치체의 구성원들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도 책에서 여러 번 각 나라의 정치인들의 학력 경쟁을 지적했었죠. 제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주 비현실적이고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학생의 이상한 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 같지만,,ㅎㅎ 법은 사회적 합의가 실제화된 것인데, 정치체 구성원들의 일정 비율을 특정한 자격으로 입법을 통해 정해두는 방법은.. 어떨까요...?
최유리2021-03-17 21:09
마이클 샌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대 능력주의 신화를 해체하고 시민사회가 공공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첫째, 능력주의는 재능과 노력이 온전히 나의 것일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이상이고 둘째, 설사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져 능력주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더라도 이는 현재의 불평등에 기여한 세계화 및 엘리트 계층의 책임 회피 수단이 되며 불평등을 개선하지 못하고, 개인의 성공 및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연대와 저항을 분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 것을 막는다. 그는 현재의 포퓰리즘 광풍이 노동자계층에서 횡행하는 것 또한 엘리트들이 자신의 오만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노동의 존엄과 적절한 보수를 잃어버린 노동자계층을 외면하고, 기술관료적 개념으로 공공의 담론을 이끌어감으로서 그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첫째, 인재선별체계로서의 대학의 역할을 개선할 것 둘째, 노동의 존엄을 되살릴 것 셋째, 경제적 성공의 의미를 사회 기여 및 자격의 의미와 분리시키고 그것이 행운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킬 것을 제안한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이 책의 핵심 중 하나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저자의 문제의식 및 분석에 동의하는 편이며 한국 사회 또한 저자가 묘사한 미국의 모습에 못지않게 능력주의 신화를 맹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위해서는 세계화 어젠다에서부터 출발하는 물리적 현실의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능력주의 신화를 믿어야 한다. 곧 내가 노력하면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가기 위한 자기 규율을 철저히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노력해도 운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의 유복한 가정환경을 상상한다는 것은 현재 일종의 죄악이며 “찌질한 짓”으로 여겨진다. 우리들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에 대한 추측의 근거를 자기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며 찾아야 하는 세대이다. 이런 물리적인 경쟁의 현실이 해결되지 않고, 또는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받쳐줄 사회적 안전망의 존재가 보장되지 않고서 젊은 세대에게 능력주의 신화를 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인지부조화처럼 여겨진다. 사회는 그러지 않으면 가난과 실패를 주겠다는 말과 함께 엄청난 노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능력주의식 희망)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노력을 해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았던 자도 성공했을 수 있다는 믿음을 믿으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면 된다, R=VD“는 이제 단순히 강요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우리들의 복음이며 신앙이고 뼈대이다.
이 외에 몇 가지 함께 논의해볼만한 지점들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더욱 심화된 현상이지만 갈수록 많은 일자리들이 ‘영구적으로’ 대체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미 많은 일자리들이 상당한 저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 방법은 무엇이고, 노동의 존엄을 되돌릴 수 있는 담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기본 소득은 또다른 소비자적 측면에서의 보상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또한 노동의 존엄을 되살리는 일은 시장이 부여하는 임금체계의 적절한 수정과 동떨어져서 진행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저자가 말한 방식으로 ‘공공선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호명하고 존엄을 일으킬 때 그 궁극적인 배경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시장의 가치와 관계없이 당신이 하는 일은 굉장히 소중한 일이고 당신은 기여를 해왔다는 말은 사실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사실은 능력주의 아래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 소수의 직업들로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약간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의 존엄을 되살리는 것에 단순한 담론의 보급이 아닌, 노동조합의 구성과 같은 연대의 측면에서 구체적 노력과 지속적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이 책의 핵심 중 하나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저자의 문제의식 및 분석에 동의하는 편이며 한국 사회 또한 저자가 묘사한 미국의 모습에 못지않게 능력주의 신화를 맹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위해서는 세계화 어젠다에서부터 출발하는 물리적 현실의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능력주의 신화를 믿어야 한다. 곧 내가 노력하면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가기 위한 자기 규율을 철저히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노력해도 운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의 유복한 가정환경을 상상한다는 것은 현재 일종의 죄악이며 “찌질한 짓”으로 여겨진다. 우리들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에 대한 추측의 근거를 자기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며 찾아야 하는 세대이다. 이런 물리적인 경쟁의 현실이 해결되지 않고, 또는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를 받쳐줄 사회적 안전망의 존재가 보장되지 않고서 젊은 세대에게 능력주의 신화를 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인지부조화처럼 여겨진다. 사회는 그러지 않으면 가난과 실패를 주겠다는 말과 함께 엄청난 노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능력주의식 희망)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노력을 해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았던 자도 성공했을 수 있다는 믿음을 믿으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면 된다, R=VD“는 이제 단순히 강요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우리들의 복음이며 신앙이고 뼈대이다.
이 외에 몇 가지 함께 논의해볼만한 지점들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더욱 심화된 현상이지만 갈수록 많은 일자리들이 ‘영구적으로’ 대체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미 많은 일자리들이 상당한 저임금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 방법은 무엇이고, 노동의 존엄을 되돌릴 수 있는 담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기본 소득은 또다른 소비자적 측면에서의 보상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또한 노동의 존엄을 되살리는 일은 시장이 부여하는 임금체계의 적절한 수정과 동떨어져서 진행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저자가 말한 방식으로 ‘공공선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호명하고 존엄을 일으킬 때 그 궁극적인 배경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시장의 가치와 관계없이 당신이 하는 일은 굉장히 소중한 일이고 당신은 기여를 해왔다는 말은 사실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상황에서, 사실은 능력주의 아래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 소수의 직업들로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약간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의 존엄을 되살리는 것에 단순한 담론의 보급이 아닌, 노동조합의 구성과 같은 연대의 측면에서 구체적 노력과 지속적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윤재빈2021-03-17 22:15
글 잘 읽었습니다!
유복한 가정환경을 상상하는 것이 '찌질한 짓'으로 여겨진다는 데 씁쓸한 웃음이 드네요. 모두가 예민하고 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복한 가정환경을 상상하는 것이 '찌질한 짓'으로 여겨진다는 데 씁쓸한 웃음이 드네요. 모두가 예민하고 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웅2021-03-17 23:30
유리님 안녕하세요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1. 저희 세대라면 중학생 때쯤 유행한 "R=VD"라는 주문은, 강요된 이데올로기를 넘어 이제 우리가 스스로 수용한 복음이자 신앙이 되었다는 말이 매우 와닿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술가이자 철학자인 한병철 교수의 성과사회론을 연상했습니다. 성과사회는 "해야 한다"라는 억압이 아닌 "하면 된다"라는 가능성의 형식으로 명령하는 사회로, 개개인은 스스로를 가없이 착취하다가 끝내 소진하게 됩니다. 한병철은 이것이 신자유주의를 지탱한다고 보았는데, 샌델 책 그리고 유리님 글의 맥락에서는 능력주의 테제를 압축하는, 희망을 표방하는 절망의 정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뒤에서 두 번째 문단에서, 노동의 존엄을 되살릴 담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물으시며 기본소득은 소비자적 측면의 보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샌델적 맥락에서는, '돈을 더 주는 것' 자체는 또 다시 시장가치와 미덕의 결부로 이어져 능력주의를 근본적으로 탈피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기본소득을 통해 수중에 돈이 더 생기는 것은, 불안정노동자(Prekariat)들이 영위하는 삶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담론을 일으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Mario Candeias가 기본소득이 프레카리아트의 정치적 형성과 성공을 앞당길 필수적 자산이라고 주장했듯이요. 이들은 생업이 조금 안정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시간과 여유를 부여받고 노동의 존엄을 되찾을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겠습니다.
1. 저희 세대라면 중학생 때쯤 유행한 "R=VD"라는 주문은, 강요된 이데올로기를 넘어 이제 우리가 스스로 수용한 복음이자 신앙이 되었다는 말이 매우 와닿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술가이자 철학자인 한병철 교수의 성과사회론을 연상했습니다. 성과사회는 "해야 한다"라는 억압이 아닌 "하면 된다"라는 가능성의 형식으로 명령하는 사회로, 개개인은 스스로를 가없이 착취하다가 끝내 소진하게 됩니다. 한병철은 이것이 신자유주의를 지탱한다고 보았는데, 샌델 책 그리고 유리님 글의 맥락에서는 능력주의 테제를 압축하는, 희망을 표방하는 절망의 정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뒤에서 두 번째 문단에서, 노동의 존엄을 되살릴 담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물으시며 기본소득은 소비자적 측면의 보상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도 샌델적 맥락에서는, '돈을 더 주는 것' 자체는 또 다시 시장가치와 미덕의 결부로 이어져 능력주의를 근본적으로 탈피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기본소득을 통해 수중에 돈이 더 생기는 것은, 불안정노동자(Prekariat)들이 영위하는 삶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담론을 일으키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Mario Candeias가 기본소득이 프레카리아트의 정치적 형성과 성공을 앞당길 필수적 자산이라고 주장했듯이요. 이들은 생업이 조금 안정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시간과 여유를 부여받고 노동의 존엄을 되찾을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겠습니다.
최유리2021-03-18 10:25
@윤재빈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들이 이러한 공론장에서 이러한 담론을 이야기하고 현실의 변화가능성을 꿈꾸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일상의 생존 및 경쟁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능력주의 신화를 철저히 믿어야만 '그나마'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좁은 성공의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해보았습니다.
최유리2021-03-18 10:30
@경제웅
앗 예리하시네요!! 저도 한병철 교수님의 생각을 어느정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맞습니다 . 또 제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절망이 희망을 표방하고 있기에 자기 규율은 현대의 개인들에게 있어서 쉽게 버릴 수 없는 행동 양식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7 21:58
능력주의 사회에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숨만 쉬고 있어도 종종 이런 말들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지방대 나오면 뭐해. 인생 망한 거지.”
“뭐? 실패했다고? 어쩌라고. 너는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했어. 네가 노력을 안 했겠지, 네가 잘못했겠지. 너만 힘들어? 그걸 왜 성공한 사람들에게 얘기해? 재수 없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처리되지 않은 채 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이러한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한때는 나도 모든 일의 성패가 개인의 책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대입이 끝난 시기쯤이었다. 치열하게 달렸음에도 어딘가 느껴지는 공허감, 고통이 컸기 때문에 내가 처한 상황, 조건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 경험을 다시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주변에 있던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 계속할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결과물을 내기까지 수많은 우연적 요소와 운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절반은 내가 해낸 것이었고, 절반은 내가 해낸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이야기했다. 즉,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인간의 문화나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동시에 자본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해결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경제 체제를 넘어서 최적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체계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이다. 개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파이(생산량)을 키운다는 명목하에서다. 그런데 능력주의의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 방향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고도화될수록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는데, 독점화와 효율화다.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은 점점 효율적이게 되며(적은 자원;노동력으로 더 많은 생산 가능), 또 하나의 거대 기업이 사회 생산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진 오늘날의 현실과, 삼성, 애플과 같은 초국적 거대 기업의 발견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좁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능력주의의 폐해는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자기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혐오 문제 등. 잠깐 한 눈 팔면 자신을 대체할 노동력이 수없이 넘쳐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 앞의 과제에 몰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이나 생각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샌델은 책에서 유능력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자는 주장을 편다. 현실성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능력주의는 정부의 힘만으로도, 시민단체의 힘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샌델이 지적하였듯이, 오늘날 정부는 세계화의 흐름에 단지 기술관료적 정부가 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 문제의 가장 큰 키는 ‘기업’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 왔던 기업의 생산 활동을 재인식하고,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의 대부로 알려진 ‘마이클 포터’ 교수 역시 TED강연에서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낙수효과’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기업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할 때,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지방대 나오면 뭐해. 인생 망한 거지.”
“뭐? 실패했다고? 어쩌라고. 너는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했어. 네가 노력을 안 했겠지, 네가 잘못했겠지. 너만 힘들어? 그걸 왜 성공한 사람들에게 얘기해? 재수 없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처리되지 않은 채 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던 이러한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
한때는 나도 모든 일의 성패가 개인의 책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대입이 끝난 시기쯤이었다. 치열하게 달렸음에도 어딘가 느껴지는 공허감, 고통이 컸기 때문에 내가 처한 상황, 조건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 경험을 다시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주변에 있던 조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 계속할 수 있었던 힘, 그리고 결과물을 내기까지 수많은 우연적 요소와 운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절반은 내가 해낸 것이었고, 절반은 내가 해낸 것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이야기했다. 즉,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인간의 문화나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동시에 자본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해결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경제 체제를 넘어서 최적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체계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이다. 개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파이(생산량)을 키운다는 명목하에서다. 그런데 능력주의의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 방향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고도화될수록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는데, 독점화와 효율화다.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은 점점 효율적이게 되며(적은 자원;노동력으로 더 많은 생산 가능), 또 하나의 거대 기업이 사회 생산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진 오늘날의 현실과, 삼성, 애플과 같은 초국적 거대 기업의 발견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좁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능력주의의 폐해는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자기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혐오 문제 등. 잠깐 한 눈 팔면 자신을 대체할 노동력이 수없이 넘쳐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 앞의 과제에 몰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이나 생각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샌델은 책에서 유능력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자는 주장을 편다. 현실성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능력주의는 정부의 힘만으로도, 시민단체의 힘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샌델이 지적하였듯이, 오늘날 정부는 세계화의 흐름에 단지 기술관료적 정부가 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 문제의 가장 큰 키는 ‘기업’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 왔던 기업의 생산 활동을 재인식하고,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영학의 대부로 알려진 ‘마이클 포터’ 교수 역시 TED강연에서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낙수효과’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기업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할 때,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윤재빈2021-03-17 22:00
글을 쓰면서 영감을 받은 자료들입니다.
<강연자 : 마이클 포터: 어떻게 기업이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가 | TED Talk>
https://www.ted.com/talks/michael_porter_the_case_for_letting_business_solve_social_problems?language=ko#t-156539
<임팩트 스타트업(가치 사슬 전반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스타트업) 관련 내용>
https://www.youtube.com/watch?v=JbiBZ1lHPyY
<강연자 : 마이클 포터: 어떻게 기업이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가 | TED Talk>
https://www.ted.com/talks/michael_porter_the_case_for_letting_business_solve_social_problems?language=ko#t-156539
<임팩트 스타트업(가치 사슬 전반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스타트업) 관련 내용>
https://www.youtube.com/watch?v=JbiBZ1lHPyY
원재희2021-03-18 09:23
능력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을 자본주의로 보시고, 그것의 해결을 위하여 역시 자본주의의 중심을 이루는 생산자인 기업의 행동을 예시로 드신 점이, 논리적인 전개에 있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재빈님께서 참고로 올려주신 두 개의 영상을 글과 함께 보았는데, 저 역시 그들의 아이디어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이클 샌델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한 '일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에도 기업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활동을 통해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 스타트업을 구상하는 (미래) 노동자들이 자부심과 공동선에의 기여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과 영상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로, 마이클 포터가 말한 사회적 기여와 경제적 가치를 통합하는 과정은 사실 근본적으로 그 의도와 유도 과정을 살펴봤을 때, 기업을 시장 안에서 '인센티브화'하여(책에 나온 표현이었죠!) 나온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마이클 샌델이 말한 공동체에 대한 기여의 의지가 본질이 되기보다는, 더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더 생각이 많은 소비자들까지도 이끌기 위해 그런 활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달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기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압니다. 제가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마이클샌델이 말한 '공동체 정신'을 진정으로 마이클 포터가 언급한 방식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 적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요즘 소셜 벤처 기업이 유행하고 있는데, 결국 그 기업들도 제대로 된 이윤 추구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오래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높게 쳐주는 가치와 부합하지 않지만 여전히 '옳은'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더욱 성장하고 장기간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 또는 누구의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다른 분들의 의견도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글과 영상을 보며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로, 마이클 포터가 말한 사회적 기여와 경제적 가치를 통합하는 과정은 사실 근본적으로 그 의도와 유도 과정을 살펴봤을 때, 기업을 시장 안에서 '인센티브화'하여(책에 나온 표현이었죠!) 나온 결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마이클 샌델이 말한 공동체에 대한 기여의 의지가 본질이 되기보다는, 더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더 생각이 많은 소비자들까지도 이끌기 위해 그런 활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달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기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압니다. 제가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마이클샌델이 말한 '공동체 정신'을 진정으로 마이클 포터가 언급한 방식으로 실현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 적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요즘 소셜 벤처 기업이 유행하고 있는데, 결국 그 기업들도 제대로 된 이윤 추구가 실행되지 않는다면 오래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높게 쳐주는 가치와 부합하지 않지만 여전히 '옳은'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더욱 성장하고 장기간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 또는 누구의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다른 분들의 의견도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재빈2021-03-18 10:11
@원재희
감사합니다!
첫번째 생각은 비슷하게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인데 어떻게 이윤추구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제1의 가치로 둘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샌델이 말한 '제비뽑기' 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도 자기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인다는 것이 제가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명목적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기업들이(patagonia, northface, 현대자동차 등등) '사회적 가치'를 자신들의 미션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핵심은 이처럼 기업의 생산활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는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왔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 하나하나를 생각해 보았을 때(떠오르는 사례들이 몇 개 있으나 각자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운다는 오래된 구호와, 기업 생산활동의 자유를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오진 않았나 생각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변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항상 능력에 매달리고 사회적 연대를 도외시하는 것은 기업이 제공해 주는 일자리를 얻고 생존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왜 그 방식을 택해야만 하는지 한번은 거리를 두고 봐야 합니다. 사회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첫번째 생각은 비슷하게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인데 어떻게 이윤추구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제1의 가치로 둘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샌델이 말한 '제비뽑기' 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도 자기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새로운 움직임들이 보인다는 것이 제가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명목적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기업들이(patagonia, northface, 현대자동차 등등) '사회적 가치'를 자신들의 미션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핵심은 이처럼 기업의 생산활동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기업의 이윤추구 활동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는가? 이 질문은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져왔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 하나하나를 생각해 보았을 때(떠오르는 사례들이 몇 개 있으나 각자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운다는 오래된 구호와, 기업 생산활동의 자유를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오진 않았나 생각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변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항상 능력에 매달리고 사회적 연대를 도외시하는 것은 기업이 제공해 주는 일자리를 얻고 생존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왜 그 방식을 택해야만 하는지 한번은 거리를 두고 봐야 합니다. 사회가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강다솔2021-03-17 22:06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한국이 생각보다 괜찮은 나라였잖아? 우리가 여태껏 선진국이라고 신봉해온 미국이나 유럽보다 한국이 선진국에 더 걸맞은 것 같은데?’와 같은 우리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변화라고 생각한다. 미국이나 유럽이 우리에 비해 선진국이 아니라는 근거로 트럼프 같은 포퓰리즘적 불만을 등에 업은 지도자의 등장을 드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지도자의 등장은 지도자를 선출한 국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그 의식이란 샌델이 제시했듯이 성적, 인종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문화사회 혹은 급격히 변화하는 기술사회에 대한 반발로 이해되었다. 이 반발은 미국과 유럽의 덜 성숙한 시민의식을 의미했고, 반면 우리나라는 몇 년 전의 촛불시위가 증명했듯이 평화 지향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주장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의 포퓰리즘적 분노에 대한 진단은 이러한 생각이 오만이며, 착각임을 일깨워준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선출,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과 같은 포퓰리즘적 분노는 능력주의 폐해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능력주의는 ‘너는 너의 노력으로 가꿔낸 능력이 있으니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며 찬사와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쾌감을 제공하지만 이는 승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반대로 패자에게는 ‘너는 능력이 없으니 그런 처지에 있는 게 마땅하고 다 네 탓이야’라며 극심한 무력감과 굴욕감을 준다. 그리고 사실 능력주의는 노력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있다는 매우 공정하고도 희망차 보이는 비전을 제시하지만 몇 십년 동안의 행보를 통해 그 비전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가치가 없다고 무시당하게 되고, 그것을 바꿀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현재 지배층,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킬 수 밖에 없다.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우리는 학력주의보다 더 중증인 학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듯이 우리 역시 저자가 주로 다루고 있는 미국사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하게 능력주의에 경도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저자가 능력주의의 신봉자의 대표적 예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들었는데 그는 취임초기인 2009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제도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한때 한국 교육제도의 우월성과 모범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샌델의 글을 읽고 다시 음미해보면 오바마의 발언은 한국의 교육이 능력주의의 극치임을 반증한다. 이는 우리나라 역시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이 언제 어디서 터져나와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하고 정치적 혼란을 겪을지 모르며 생각보다 그런 상황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시민의식, ‘K-방역’ 등을 찬양하며 이대로라면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을 버리고 우리사회에 깊이 자리 잡은 능력주의를 어떻게 해체해나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끝으로 학우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능력주의의 폐해와 붕괴에 관한 이야기가 포스트 팬데믹, 포스트 코로나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논의되어야 할지, 또 다르게는 코로나가 능력주의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지 이다. 앞선 질문에 대해 나의 의견을 간단히 나눠보자면 코로나 19와 같은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능력주의적 논리로 피해 당사자들의 책임을 추궁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저자가 2장에서 미국의 허리케인, 9.11테러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이런 일을 겪은 것은 죄를 지었으니 그만큼 벌을 받은 거야”라고 주장한 목사의 사례를 언급했듯이, 코로나 19로 인해 큰 피해를 받은 사람들도 “특히 더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을 겪은 거겠지”라는 식의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특히 우려되는 이유는 코로나 19로 인해 특별히 더 고통받은 사람들이 현재 능력주의 사회에서 비교적으로 소외된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아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인식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비해 현장에서 발로 뛰며 일하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생활을 꾸려가기 더욱 힘들었다. 이들에게 “코로나로 인해 미래에 진정으로 필요한 산업과 기술만 남게 된 거야. 당신들이 해온 노동의 가치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능력주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취약계층이 노동기회를 빼앗기고 다른 재난에 더욱 취약해진 이 시기에 능력주의에 따른 스마트한 문제 해결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운명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 즉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태도, 공동체를 함께 돌보아야겠다는 책임 의식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연합뉴스, 「'한국교육 예찬' 오바마 "한국교사 의사만큼 봉급"」, 2015.04.17., https://www.yna.co.kr/view/MYH20150417003300038, 2021.03.17
하지만 마이클 샌델의 포퓰리즘적 분노에 대한 진단은 이러한 생각이 오만이며, 착각임을 일깨워준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선출,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과 같은 포퓰리즘적 분노는 능력주의 폐해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능력주의는 ‘너는 너의 노력으로 가꿔낸 능력이 있으니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며 찬사와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쾌감을 제공하지만 이는 승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반대로 패자에게는 ‘너는 능력이 없으니 그런 처지에 있는 게 마땅하고 다 네 탓이야’라며 극심한 무력감과 굴욕감을 준다. 그리고 사실 능력주의는 노력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있다는 매우 공정하고도 희망차 보이는 비전을 제시하지만 몇 십년 동안의 행보를 통해 그 비전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가치가 없다고 무시당하게 되고, 그것을 바꿀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현재 지배층,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킬 수 밖에 없다.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우리는 학력주의보다 더 중증인 학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듯이 우리 역시 저자가 주로 다루고 있는 미국사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하게 능력주의에 경도되어 있을 수도 있다. 저자가 능력주의의 신봉자의 대표적 예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들었는데 그는 취임초기인 2009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제도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한때 한국 교육제도의 우월성과 모범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샌델의 글을 읽고 다시 음미해보면 오바마의 발언은 한국의 교육이 능력주의의 극치임을 반증한다. 이는 우리나라 역시 능력주의에 대한 불만이 언제 어디서 터져나와 포퓰리즘 세력이 득세하고 정치적 혼란을 겪을지 모르며 생각보다 그런 상황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시민의식, ‘K-방역’ 등을 찬양하며 이대로라면 한국이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을 버리고 우리사회에 깊이 자리 잡은 능력주의를 어떻게 해체해나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끝으로 학우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능력주의의 폐해와 붕괴에 관한 이야기가 포스트 팬데믹, 포스트 코로나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논의되어야 할지, 또 다르게는 코로나가 능력주의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지 이다. 앞선 질문에 대해 나의 의견을 간단히 나눠보자면 코로나 19와 같은 팬데믹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능력주의적 논리로 피해 당사자들의 책임을 추궁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저자가 2장에서 미국의 허리케인, 9.11테러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이런 일을 겪은 것은 죄를 지었으니 그만큼 벌을 받은 거야”라고 주장한 목사의 사례를 언급했듯이, 코로나 19로 인해 큰 피해를 받은 사람들도 “특히 더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을 겪은 거겠지”라는 식의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특히 우려되는 이유는 코로나 19로 인해 특별히 더 고통받은 사람들이 현재 능력주의 사회에서 비교적으로 소외된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아 소위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인식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 비해 현장에서 발로 뛰며 일하는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생활을 꾸려가기 더욱 힘들었다. 이들에게 “코로나로 인해 미래에 진정으로 필요한 산업과 기술만 남게 된 거야. 당신들이 해온 노동의 가치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능력주의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취약계층이 노동기회를 빼앗기고 다른 재난에 더욱 취약해진 이 시기에 능력주의에 따른 스마트한 문제 해결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운명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것, 즉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태도, 공동체를 함께 돌보아야겠다는 책임 의식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연합뉴스, 「'한국교육 예찬' 오바마 "한국교사 의사만큼 봉급"」, 2015.04.17., https://www.yna.co.kr/view/MYH20150417003300038, 2021.03.17
서장원2021-03-17 22:28
다솔님
글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댓글 남겨봅니다!!
우선 한국의 교육열이 과도하다는 말씀에는 너무 큰 공감을 표합니다. 한창 유행을 끌었던 SKY캐슬 드라마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나듯, 한국의 사교육열은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경쟁을 통해 입시에 성공한 아이들이 진정 이 교육 제도의 승리자인지,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 자신의 아이를 명문대에 진학시켰다는 아이들의 부모님이 승리자인지, 혹은 그 둘이 모두 능력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한 패배자인지 고민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급해주신 것과 같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제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 한국의 교육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에는 저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또,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서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더욱 위기에 처했고, 코로나가 진정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에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tvN의 월간 커넥트에 출현한 마이클 샌델이 미국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원래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직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고 하며, 배달부, 대형마트 점원 등 감염병 사태가 심각함에도 자신의 자리를 꿋꿋히 지켜낸 비전문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경우 K-방역의 성공을 위해 힘써주신 여러 의료진들에 대한 감사의 인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언택트 시대가 만연해짐에 따라 바빠지신 배달부, 대형마트 점원 등 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도 존경을 표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보았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글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댓글 남겨봅니다!!
우선 한국의 교육열이 과도하다는 말씀에는 너무 큰 공감을 표합니다. 한창 유행을 끌었던 SKY캐슬 드라마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나듯, 한국의 사교육열은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경쟁을 통해 입시에 성공한 아이들이 진정 이 교육 제도의 승리자인지, 과열된 입시 경쟁에서 자신의 아이를 명문대에 진학시켰다는 아이들의 부모님이 승리자인지, 혹은 그 둘이 모두 능력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한 패배자인지 고민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급해주신 것과 같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제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 한국의 교육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에는 저도 마찬가지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또,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서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더욱 위기에 처했고, 코로나가 진정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안정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에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tvN의 월간 커넥트에 출현한 마이클 샌델이 미국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원래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던 직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고 하며, 배달부, 대형마트 점원 등 감염병 사태가 심각함에도 자신의 자리를 꿋꿋히 지켜낸 비전문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경우 K-방역의 성공을 위해 힘써주신 여러 의료진들에 대한 감사의 인식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언택트 시대가 만연해짐에 따라 바빠지신 배달부, 대형마트 점원 등 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도 존경을 표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보았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강다솔2021-03-18 00:13
@서장원
와! 정성스러운 답글 감사합니다. 의료진 뿐 아니라 배달부, 대형마트 점원 등 코로나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비전문 노동자들에 대한 감사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코로나19의 순기능을 짚어주신 게 인상 깊어요:) 코로나 19가 능력주의의 심화가 아니라 능력주의 완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지 그 가능성을 좀 더 확인하게 된 것 같아서요!! 악영향만 생각해보았지, 이렇게 순기능을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박규리2021-03-18 14:00
안녕하세요, 강다솔 님! 우선 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특히 한국과 다른 국가 간에 차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 부분에서 크게 공감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능력주의의 가속화와 관련해서도 좋은 글 읽으며 많이 공감했습니다. 간단하게 제 의견을 남겨보자면, 전문 지식이 없고서는 쉽게 이해하거나 대처하기 힘든 전염병을 대처하는 데에 있어 개인이 스스로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능력 부족에 따른 무지에 의해서 초래되었다는 생각이 사회에 만연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이 사회 아래의 사람들까지 닿지 못한다는 것보다도 코로나19 같은 재난, 위험이 사회의 아래 사람들부터 삶을 위협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선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하는 심각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동익2021-03-17 22:48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에 자리하게 된 과정 및 그 영향을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고대 기독교의 ‘구원’ 개념이 ‘소명’, '섭리론'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나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변과 현실의 능력주의 사이의 접점 등과 같은 학술적 논의는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현상에 대한 기술 또한 몹시 꼼꼼해서 작게는 서구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크게는 여러 사회경제적 지표들이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간략한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는 구체적 해결책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겠지만, 설령 그런 의문을 품더라도 능력주의가 현대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저자의 핵심 지적만큼은 누구나 받아들일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보다 묵직합니다. 동아시아 국가로서 한국이 걸어온 길은 미국과 분명 맞닿아 있지만, 또 떨어져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같고 어디까지가 다른지를 더듬어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국 사회의 오늘과 미래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우선 학력, 대학 학위로 환원되는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입니다. 가령 최상위권 엘리트, 곧 미국의 아이비리그가 우리 사회의 스카이에 일대일 대응되는지부터가 의문입니다. 대다수의 한국 엘리트들은 학부는 스카이를 나오더라도 이후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의 대학원으로 향합니다. 기부 입학제도 또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카이 중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대는 국립대학입니다. 대를 이은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명문 사립학교는 서구식 고등교육이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역사가 짧은데, 여기에 더해 그나마 존재했던, 소위 비평준화 명문고들은 모두 이름만 남고 그 역할을 특목고 등에 넘겼습니다. 곧 한국에서 학력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위의 사안들을 고려하여 학위 대물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혹은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대학 입학 정책에서 교정이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 검토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고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고민입니다. 앞서 첫 단락에서 짧게 언급했듯, 능력주의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서구로부터 받고 있는 영향은 차치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전통은 단절되어 현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겠으나 그렇다면 그 단절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또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저자 또한 각주에서 짤막하게 ‘유교적 능력주의 정치’에 대한 연구를 제시하는데, 문제는 보다 복잡합니다. 대한민국과 가장 시대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조선의 경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나 그 이전, 고려나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보다 핵심 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연 이러한 전통과 서구의 영향 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짚어낼 때에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이루는 이면의 논리는 무엇인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업의 주제인 ‘포스트 팬데믹’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 사이 간극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에서 두 사회의 모습은 양극단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저자가 강조했던 능력주의의 폐해, 곧 책임의 개인화가 우리 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덜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구보다 우리가 보다 집단적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지,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만일 다르다면, 저자의 이상이 우리 사회에는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보다 묵직합니다. 동아시아 국가로서 한국이 걸어온 길은 미국과 분명 맞닿아 있지만, 또 떨어져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같고 어디까지가 다른지를 더듬어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국 사회의 오늘과 미래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우선 학력, 대학 학위로 환원되는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입니다. 가령 최상위권 엘리트, 곧 미국의 아이비리그가 우리 사회의 스카이에 일대일 대응되는지부터가 의문입니다. 대다수의 한국 엘리트들은 학부는 스카이를 나오더라도 이후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의 대학원으로 향합니다. 기부 입학제도 또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카이 중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대는 국립대학입니다. 대를 이은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하는 명문 사립학교는 서구식 고등교육이 실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에서는 역사가 짧은데, 여기에 더해 그나마 존재했던, 소위 비평준화 명문고들은 모두 이름만 남고 그 역할을 특목고 등에 넘겼습니다. 곧 한국에서 학력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위의 사안들을 고려하여 학위 대물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혹은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대학 입학 정책에서 교정이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을지 검토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고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고민입니다. 앞서 첫 단락에서 짧게 언급했듯, 능력주의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서구로부터 받고 있는 영향은 차치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전통은 단절되어 현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겠으나 그렇다면 그 단절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또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저자 또한 각주에서 짤막하게 ‘유교적 능력주의 정치’에 대한 연구를 제시하는데, 문제는 보다 복잡합니다. 대한민국과 가장 시대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조선의 경우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나 그 이전, 고려나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보다 핵심 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연 이러한 전통과 서구의 영향 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짚어낼 때에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을 이루는 이면의 논리는 무엇인지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업의 주제인 ‘포스트 팬데믹’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 사이 간극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에서 두 사회의 모습은 양극단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저자가 강조했던 능력주의의 폐해, 곧 책임의 개인화가 우리 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덜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서구보다 우리가 보다 집단적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지, 구성원들이 이루고 있는 집단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만일 다르다면, 저자의 이상이 우리 사회에는 어떻게 적용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강다솔2021-03-18 00:09
동익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 뿐 아니라 고대 기독교에서부터 능력주의의 기원을 찾아 다루는 부분, 롤스나 하이데거의 철학적 논의가 경제와 연결되는 부분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시해주신 질문이 모두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이해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꼭 사유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대다수의 한국 엘리트들이 SKY를 나오더라도 이후에 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수가 우리나라에서의 엘리트인 정치 지배층이나 기득권의 수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미국같은 나라와 비교해서 특히 자국민 엘리트층의 외국 이주가 두드러지는 것인지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기부 입학제도에 관련해서는 기부 입학제도가 능력주의적 신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샌델이 기부 입학제도를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이동성을 내세우며 희망찬 미래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이동성을 위한 제도로 대학을 들고 있는데, 높은 기부 입학 비율은 이런 사회적 이동성을 제한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부 입학제도가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제도가 아니라 능력주의 신화의 구멍을 보여주는 예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오히려 완전한 능력주의를 가정한다면, 애초에 기부 입학제도가 없는 것이 가장 공정한 능력주의 기반 제도가 아닐까요?
또한 두 번째 질문에서 '유교적 능력주의'를 무려 각주에서 찾아서 언급해주셔서 정성에 감탄하고 갑니다.....아직 저도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자료를 찾지는 못했으나 간단하게 찾아본 바에 의하면 말씀하신대로 조선 시대에 '과거제도'라는 확고한 제도로서 우리나라에 자리 잡으면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딛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는 양반의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였고, 전 세계에서 능력만으로 사람을 고위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는 중국과 한국이라는 대표적인 유교문화권 국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론, 서양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능력주의의 심화버전인 학력주의는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해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재 대학교육제도가 직접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이긴 하지만 대체로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서 수입해온 제도이며 대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서양을 많이 참고했고 그러면서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력주의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김창훈,<불평등을 포장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프레시안>>, 2019.04.22,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37694#0DKW, 2021.03.18
저 역시도 현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 뿐 아니라 고대 기독교에서부터 능력주의의 기원을 찾아 다루는 부분, 롤스나 하이데거의 철학적 논의가 경제와 연결되는 부분 등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시해주신 질문이 모두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이해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꼭 사유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대다수의 한국 엘리트들이 SKY를 나오더라도 이후에 외국의 대학원으로 진학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수가 우리나라에서의 엘리트인 정치 지배층이나 기득권의 수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미국같은 나라와 비교해서 특히 자국민 엘리트층의 외국 이주가 두드러지는 것인지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기부 입학제도에 관련해서는 기부 입학제도가 능력주의적 신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궁금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샌델이 기부 입학제도를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능력주의가 사회적 이동성을 내세우며 희망찬 미래가 보장된다고 주장하며, 사회적 이동성을 위한 제도로 대학을 들고 있는데, 높은 기부 입학 비율은 이런 사회적 이동성을 제한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부 입학제도가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제도가 아니라 능력주의 신화의 구멍을 보여주는 예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오히려 완전한 능력주의를 가정한다면, 애초에 기부 입학제도가 없는 것이 가장 공정한 능력주의 기반 제도가 아닐까요?
또한 두 번째 질문에서 '유교적 능력주의'를 무려 각주에서 찾아서 언급해주셔서 정성에 감탄하고 갑니다.....아직 저도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자료를 찾지는 못했으나 간단하게 찾아본 바에 의하면 말씀하신대로 조선 시대에 '과거제도'라는 확고한 제도로서 우리나라에 자리 잡으면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딛기 시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는 양반의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였고, 전 세계에서 능력만으로 사람을 고위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는 중국과 한국이라는 대표적인 유교문화권 국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론, 서양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능력주의의 심화버전인 학력주의는 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예상해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재 대학교육제도가 직접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이긴 하지만 대체로 미국을 포함한 서양에서 수입해온 제도이며 대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서양을 많이 참고했고 그러면서 대학 서열화, 그리고 학력주의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자료: 김창훈,<불평등을 포장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프레시안>>, 2019.04.22,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37694#0DKW, 2021.03.18
전윤창2021-03-18 01:21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다르게 보시는 부분에 대해 저도 동의하기에 흥미로워 글을 남깁니다. 전후에 빠른 속도로 재건된 한국은 오히려 능력주의가 더 치밀한 형태로 발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발전은 능력에 대한 욕망이 견인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높은 대학진학율은 고등교육에 대한 높은 열망을 나타냅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비교는 어렵겠으나 수능 같은 입시제도는 "기회를 공평하게 줄테니 능력을 가려보겠다"라는 능력주의 시험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내신과 같이 수치화된 "공평한 시험"들이 각 학교에서 치뤄지고 있죠. 샌델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습니다. 높은 학벌 출신이 현재 정재계의 전반을 독점하고 있습니다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다르게 보시는 부분에 대해 저도 동의하기에 흥미로워 글을 남깁니다. 전후에 빠른 속도로 재건된 한국은 오히려 능력주의가 더 치밀한 형태로 발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의 발전은 능력에 대한 강력한 욕망이 견인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높은 대학진학율은 고등교육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나타냅니다. 출세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 초기에는 나 이뢰봬도 대학나온 사람이야 라는 말이 일반적이었고, 곧 인서울, 명문대 간 자랑스런 자녀들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죠. 수능 같은 입시제도는 "기회를 공평하게 줄테니 능력을 가려보겠다"라는 능력주의 시험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내신과 같이 수치화된 "공평한 시험"들이 각 학교에서 치뤄지고 있죠. 샌델이 책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습니다. 높은 학벌 출신이 현재 정재계의 전반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전후 처음으로 나타난 거대재벌들은 학벌이 없었으나 재벌 2세대부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IT산업의 태동으로 등장한 새로운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크래프톤 등등 창업자 대부분은 카이스트 서울대 출신이죠.
즉, 교육받은 엘리트가 정재계를 독점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능력으로 여긴다. 라는 점에서는 당연하겠지만, 미국과 한국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왜 다른가? 바로 예의와 사회의 서로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한국사회 특성 때문입니다. 관계를 해칠까 두려워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의한 패배감이 은밀한 형태로 숨겨두고 있는 것이죠. 패배감이 실체가 있기는 한가?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라는 책에서는 20대들이 학력위계주의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에 차있다고 설명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미루어 두겠습니다. 그렇다면 표출되는 형태는 어떤가. 대표적으로 일베의 예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베가 우리 사회의 악마 같은 존재들이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디씨나 오유 등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 이뤄지던 논의들을 더 극적인 형태로 모아놓은 것일 뿐이죠. 일베에서는 익명을 이용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를 자유롭게 표출하며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곧 혼자가 아니라 '우리', '일게이'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동료애를 다지죠. 이 깊은 기저에는 각자의 실패가 잠들어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사회적인 규칙의 압박이 강하고, 공권력의 감시가 더욱 삼엄합니다.(감시국가라는 점에 동의하실 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형이 운동권인데, 박근혜 정권까지 민간 사찰로 인해 여러번 잡혀간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패배감이 외면화되는 혐오가 구속에 의해 덜 극단적인 모양으로 새어나가고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즉, 교육받은 엘리트가 정재계를 독점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능력으로 여긴다. 라는 점에서는 당연하겠지만, 미국과 한국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왜 다른가? 바로 예의와 사회의 서로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한국사회 특성 때문입니다. 관계를 해칠까 두려워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의한 패배감이 은밀한 형태로 숨겨두고 있는 것이죠. 패배감이 실체가 있기는 한가?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라는 책에서는 20대들이 학력위계주의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에 차있다고 설명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책에 미루어 두겠습니다. 그렇다면 표출되는 형태는 어떤가. 대표적으로 일베의 예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베가 우리 사회의 악마 같은 존재들이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디씨나 오유 등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 이뤄지던 논의들을 더 극적인 형태로 모아놓은 것일 뿐이죠. 일베에서는 익명을 이용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를 자유롭게 표출하며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곧 혼자가 아니라 '우리', '일게이'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동료애를 다지죠. 이 깊은 기저에는 각자의 실패가 잠들어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사회적인 규칙의 압박이 강하고, 공권력의 감시가 더욱 삼엄합니다.(감시국가라는 점에 동의하실 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형이 운동권인데, 박근혜 정권까지 민간 사찰로 인해 여러번 잡혀간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패배감이 외면화되는 혐오가 구속에 의해 덜 극단적인 모양으로 새어나가고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최동익2021-03-18 11:20
@강다솔
@김다솔 안녕하세요,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라는 단어를 보다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계층과 부를 축적한 계층 사이에도 나름의 간극이 있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샌델이 예시로 들었던 미국의 국회의원과 상위 1%를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해보더라도 미국 국회의원은 535명인 반면 상위 1%는300만 명에 이릅니다.
엘리트의 해외 이주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해보지 않았는데, 이 또한 책에 나오듯 오늘날 엘리트들은 세계화를 긍정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대개 엘리트들은 영어, 혹은 이외의 영향력 있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고 앞으로 그러한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일하더라도 그 출국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영구적일지 또한 보다 고려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부 입학제도에 대해서는 저도 다솔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미국과 한국의 학력 취득 경로 사이 상이성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과거제도에 대해 저도 그러한 인상을 갖게 되기는 합니다. 다만 조선의 정부는 몹시 작았다는 점, 또 지방에서 명성을 쌓은 선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다 논의가 필요하리라는 점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글에 담지 못했던 점을 보다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스스로도 생각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라는 단어를 보다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계층과 부를 축적한 계층 사이에도 나름의 간극이 있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샌델이 예시로 들었던 미국의 국회의원과 상위 1%를 단순히 숫자로만 계산해보더라도 미국 국회의원은 535명인 반면 상위 1%는300만 명에 이릅니다.
엘리트의 해외 이주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해보지 않았는데, 이 또한 책에 나오듯 오늘날 엘리트들은 세계화를 긍정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대개 엘리트들은 영어, 혹은 이외의 영향력 있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고 앞으로 그러한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일하더라도 그 출국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영구적일지 또한 보다 고려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부 입학제도에 대해서는 저도 다솔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미국과 한국의 학력 취득 경로 사이 상이성을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과거제도에 대해 저도 그러한 인상을 갖게 되기는 합니다. 다만 조선의 정부는 몹시 작았다는 점, 또 지방에서 명성을 쌓은 선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다 논의가 필요하리라는 점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글에 담지 못했던 점을 보다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스스로도 생각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최동익2021-03-18 11:35
@전윤창
@전윤창 안녕하세요. 한국 사회에 대해 평소 생각해오셨던 바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의견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증명이 쉽지는 않겠지만 샌델이 책에서 인용한 정치인들의 말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이 저런 말을 했다면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해 해당 발언에 대해 어떤 반응이 나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탐구해볼 만한 가설인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그러한 한국인의 경향을 '체면'이라는 말로 바꿔서 이해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가 미국에 비해 감시가 삼엄한가, 그렇다면 그 감시는 왜 수용되는가에 대해서는 군대 경험도 이유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감시를 내면화하고 그로 인해 보다 강력한 공권력의 작용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예의'와 관련 지을 수도 있을 텐데, 한국에서 경찰을 통한 공권력의 물리력 행사는 상대적으로 미국에 비해 덜하다고 느껴집니다. 반면 법률 체계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존재한다는 점 등은 표면적으로는 물리력을 자제하나 실제 사회 작동 원리는 보다 엄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의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의견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증명이 쉽지는 않겠지만 샌델이 책에서 인용한 정치인들의 말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이 저런 말을 했다면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해 해당 발언에 대해 어떤 반응이 나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탐구해볼 만한 가설인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그러한 한국인의 경향을 '체면'이라는 말로 바꿔서 이해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가 미국에 비해 감시가 삼엄한가, 그렇다면 그 감시는 왜 수용되는가에 대해서는 군대 경험도 이유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감시를 내면화하고 그로 인해 보다 강력한 공권력의 작용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예의'와 관련 지을 수도 있을 텐데, 한국에서 경찰을 통한 공권력의 물리력 행사는 상대적으로 미국에 비해 덜하다고 느껴집니다. 반면 법률 체계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존재한다는 점 등은 표면적으로는 물리력을 자제하나 실제 사회 작동 원리는 보다 엄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보다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재용2021-03-17 23:11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일그러진 능력주의 현대 사회의 모습을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비판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참으로 수많은 질문과 공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책이였는데요, 그도 그럴것이 현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은 삶의 수준과 직결되고, 능력을 얻는 과정 및 능력이 삶의 수준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있어 누구보다 ‘노력’보다는 ‘운’이 함께했다고 믿기에 샌델의 비판적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과연 샌델의 주장이 현실적인 부분에 적용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습니다. 여기선 몇 가지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 샌델은 과연 어느 계층을 이 책의 독자로 두고 이러한 주장과 비판을 한 것일까? 이미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된 승자? 과연 이미 혜택을 본 기득권 중 이 책을 읽고 적극적으로 사회 구조를 바꾸자 주장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샌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이미 이 환경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포퓰리즘을 따라 사회 구조를 바꾸는 ‘척’은 어느 정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델이 원하는, 진정성있는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된 패자는 이 책을 읽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이 사회에서 능력적으로 ‘패자’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이 무엇을 주장한들 쉽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샌델은 아직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지 않은,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기 전 교육 환경에 몸담고 있는 학생 즉 우리가 이 문제를 논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우리가 능력주의의 혜택을 받았든 받지 못했던간에 지금과 같이 마련된 토론의 자리에서 이 논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미래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더욱 양극화되는 것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 샌델은 대학을 ‘인재 랜덤 선별기’로서의 개학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대학은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는 장소이자 경험과 기회의 땅으로 대학 존재 자체의 문제는 없다. 다만 이 대학의 이름만을 가지고 능력을 평가하고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구조적 문제를 찾아야 한다. 부모들이 과연 아이들을 더 뛰어난 교육을 받고 지식을 쌓게 하기 위해 부정 행위를 써서 ‘옆문’ 입학을 시킬까? 아니다. 모든 부모라 단정지을 순 없지만, 이름값만으로도 그 대학을 다님으로서 앞으로 얻게 될 지위와 기회, 부를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입학시키는 것이다. 이를 알기에 현재 우리나라는 교육 자체를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 아닌 여러 공, 사기업 취직 과정에서 대학 이름을 가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아직까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조금씩 마련하여 개선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여 사회에서 여겨지는 대학 역할을 바꾼다면, 과연 사람들이 대학을 ‘능력주의 산물 양성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질문: 당장 가까운 미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샌델이 말하는 양극화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점차 해결될 것인가 아님 악화될 것인가? 만약 해결될 것이라면 과연 이는 정부에 의한 해결일 것인지, 사회적 신념의 변화로 인한 해결일 것인지 둘 다 아니라면 과연 어느 방법으로 해결될 것일까. 그리고 어느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가장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일까. 샌델은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룰’ 주체에 있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누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걸까. 아니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직접’ 다루는 것보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이 더욱 시급하지 않을까?
+) ’운’, ‘능력’, ’기회’, ‘불공정’ 등을 정확한 수치로 매길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환경에서 노력만으로 평가받기 위해선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숫자’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통계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이는 흥미로운 주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숫자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무엇이 있을지, 각 변수에 적용되는 가중치는 어떻게 부여하면 좋을지, 정해진 수치는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와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고 싶다. 솔직히 만족스러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주제지만, 좋은 토론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샌델은 과연 어느 계층을 이 책의 독자로 두고 이러한 주장과 비판을 한 것일까? 이미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된 승자? 과연 이미 혜택을 본 기득권 중 이 책을 읽고 적극적으로 사회 구조를 바꾸자 주장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샌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이미 이 환경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도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포퓰리즘을 따라 사회 구조를 바꾸는 ‘척’은 어느 정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델이 원하는, 진정성있는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적으로 정의된 패자는 이 책을 읽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이 사회에서 능력적으로 ‘패자’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이 무엇을 주장한들 쉽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마 샌델은 아직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지 않은,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기 전 교육 환경에 몸담고 있는 학생 즉 우리가 이 문제를 논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우리가 능력주의의 혜택을 받았든 받지 못했던간에 지금과 같이 마련된 토론의 자리에서 이 논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미래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더욱 양극화되는 것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 샌델은 대학을 ‘인재 랜덤 선별기’로서의 개학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대학은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는 장소이자 경험과 기회의 땅으로 대학 존재 자체의 문제는 없다. 다만 이 대학의 이름만을 가지고 능력을 평가하고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구조적 문제를 찾아야 한다. 부모들이 과연 아이들을 더 뛰어난 교육을 받고 지식을 쌓게 하기 위해 부정 행위를 써서 ‘옆문’ 입학을 시킬까? 아니다. 모든 부모라 단정지을 순 없지만, 이름값만으로도 그 대학을 다님으로서 앞으로 얻게 될 지위와 기회, 부를 생각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입학시키는 것이다. 이를 알기에 현재 우리나라는 교육 자체를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 아닌 여러 공, 사기업 취직 과정에서 대학 이름을 가리는 등 여러 방법으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아직까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조금씩 마련하여 개선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하여 사회에서 여겨지는 대학 역할을 바꾼다면, 과연 사람들이 대학을 ‘능력주의 산물 양성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질문: 당장 가까운 미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샌델이 말하는 양극화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점차 해결될 것인가 아님 악화될 것인가? 만약 해결될 것이라면 과연 이는 정부에 의한 해결일 것인지, 사회적 신념의 변화로 인한 해결일 것인지 둘 다 아니라면 과연 어느 방법으로 해결될 것일까. 그리고 어느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가장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법일까. 샌델은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룰’ 주체에 있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누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걸까. 아니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직접’ 다루는 것보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이 더욱 시급하지 않을까?
+) ’운’, ‘능력’, ’기회’, ‘불공정’ 등을 정확한 수치로 매길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환경에서 노력만으로 평가받기 위해선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숫자’만큼 좋은 것이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통계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이는 흥미로운 주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숫자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무엇이 있을지, 각 변수에 적용되는 가중치는 어떻게 부여하면 좋을지, 정해진 수치는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의 동의와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고 싶다. 솔직히 만족스러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주제지만, 좋은 토론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강민2021-03-17 23:49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그냥 흥미가 가는 부분은 저도 수리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맨 마지막 문단인데, 누구나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완벽하게 '운, 능력, 기회, 불공정'을 수학적 파라미터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그 수치를 대변할 수 있는 파라미터 고안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통계학에 기반한 수학적 언어로 설명하면 그만큼 그 주장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불평등을 수치화한 여러 파라미터가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다만, 그 수치가 실제 '운, 능력, 기회, 불공정'을 올바르게 반영할 수 있는 파라미터인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운'은 난수로,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노동 중 가장 높은 가치(생산성)으로 수치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흥미가 가는 부분은 저도 수리과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맨 마지막 문단인데, 누구나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완벽하게 '운, 능력, 기회, 불공정'을 수학적 파라미터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그 수치를 대변할 수 있는 파라미터 고안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통계학에 기반한 수학적 언어로 설명하면 그만큼 그 주장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불평등을 수치화한 여러 파라미터가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다만, 그 수치가 실제 '운, 능력, 기회, 불공정'을 올바르게 반영할 수 있는 파라미터인지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운'은 난수로,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노동 중 가장 높은 가치(생산성)으로 수치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단2021-03-18 00:19
이재용 학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학우님의 질문에 대한 간단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안타깝지만 양극화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점점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굴을 맞대며 서로에게 그나마의 관심이 남아있는 상황에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존경은 사라지고 이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아 성공한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제 예측이 틀리면 좋겠지만 대학의 붕괴와는 별개로 능력주의의 강화는 계속 심화될 것 같습니다. 사회적 신념의 변화로 인한 능력주의의 해체가 이 책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느껴지지만 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급진적이라고 느껴질만한 정부가 등장하며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놀만큼 개혁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안타깝지만 양극화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이 점점 악화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굴을 맞대며 서로에게 그나마의 관심이 남아있는 상황에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존경은 사라지고 이 힘든 상황에서 살아남아 성공한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제 예측이 틀리면 좋겠지만 대학의 붕괴와는 별개로 능력주의의 강화는 계속 심화될 것 같습니다. 사회적 신념의 변화로 인한 능력주의의 해체가 이 책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느껴지지만 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급진적이라고 느껴질만한 정부가 등장하며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놀만큼 개혁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조용수2021-03-18 01:44
이재용 학우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선 저 역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고 그로 인한 마음의 거리도 따라서 멀어지는 것도 주요한 요인이지만, 각종 매체들(소셜 미디어, 너튜브 등)이 더욱 그 개인의 특정한 관심사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양극화를 부추기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소셜 딜레마' 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관련 매체들의 심화되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로 인한 공동 담론의 소멸과 주장의 양극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관련 내용도 수업시간에 다루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이제 마지막 문단에서 운, 능력, 기회, 불공정 등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변수들을 수치로 매길 수 있을지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해 주셨는데, 수치로 매긴다는게 가능해지면 어떤 것이 가능해질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일에 대한 재능은 높지만 노력은 조금 덜한 사람과 일에 대한 재능은 매우 낮지만 노력은 조금 더 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선택할지,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사람이 자신이 순전히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책에서 경고하는 굴욕감에 빠지지는 않을지가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습니다!
우선 저 역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고 그로 인한 마음의 거리도 따라서 멀어지는 것도 주요한 요인이지만, 각종 매체들(소셜 미디어, 너튜브 등)이 더욱 그 개인의 특정한 관심사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양극화를 부추기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소셜 딜레마' 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관련 매체들의 심화되는 개인 맞춤형 서비스로 인한 공동 담론의 소멸과 주장의 양극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관련 내용도 수업시간에 다루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이제 마지막 문단에서 운, 능력, 기회, 불공정 등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변수들을 수치로 매길 수 있을지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해 주셨는데, 수치로 매긴다는게 가능해지면 어떤 것이 가능해질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일에 대한 재능은 높지만 노력은 조금 덜한 사람과 일에 대한 재능은 매우 낮지만 노력은 조금 더 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선택할지,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사람이 자신이 순전히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책에서 경고하는 굴욕감에 빠지지는 않을지가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습니다!
정유진2021-03-17 23:25
시간과 능력의 한계로 책의 모든 내용을 숙독하고 오래 생각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하고 간결하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는 기회주의로 예쁘게 포장한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의 면면을 낱낱이 분석하며 그 이면에 깔린 불공정함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경쟁 속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분배 자체가 공정한가의 물음에 센델은 그렇지 않다고 당당히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유전자를 타고나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나지 않으며 그런 일은 가능할수 조차 없기에 진정으로 공정한 기회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성공으로 가기 위해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고 여겨지는 공부에서조차 공정한 경쟁을 위한 밑바탕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유명한 일타강사의 코앞에서 수업을 듣고 다른 누군가는 화면속에서 그 내용을 습득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공부를 시작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이 지금 세계는, 특히 우리나라는 학력에 기반한 우월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진 상태입니다. 시작부터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부를 축적하고 세습해온 이들로부터 세상을 둘러싼 능력주의는 점점 더 공허한 약속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경쟁 자체를 나쁜 대상으로 보는 것과 이 책의 주장은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경쟁 그 자체가 아닌 경쟁의 결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승자의 타고난 운과 환경이 아닌 승리의 결과만이 승자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이는 오만으로, 패자의 몫은 좌절로 남아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된 감정의 골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잊을만하면 매스컴에 대서특필되는 각종 갑질 관련 이슈에 사람들이 그토록 분개하는 이유가 단지 한 사람의 인격을 모욕해서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갑과 을로 사람을 분류시키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의 오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어 문제 제기를 할 생각조차 못했던 능력주의로 인한 명예와 인정의 문제들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스템이 경쟁을 요구하고 있는 현재, 능력주의 전체를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며, 공정한 경쟁을 위해 기회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여하는 것 또한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후천적인 기회의 평등은 몰라도, 선천적인 것들은 제어할 수 없으며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라 한들 그 끝에 생겨날 개인의 책임이 더 커질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센델은 그 대안으로 공적 담화와 공동선을 제시합니다.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정말 이상적이겠다고 생각되는 만큼 실현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으나 노력을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연대의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개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프랑스의 연대의식, 동지애이자 불안한 세상을 온전하게 지탱해주는 소중한 가치인 솔리다리테(soludarité)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때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어느때보다 책임져야할 것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개인에게 부여되는 수많은 오만과 좌절이 무겁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능력주의의 본질을 들여다본 시도 만으로도 센델의 주장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책의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참여와 연대를 통해 능력주의로 인해 발생한 가치관의 문제를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깊이 꿰뚫어보며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처한 환경에 적절한 이해를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나 경쟁 자체를 나쁜 대상으로 보는 것과 이 책의 주장은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경쟁 그 자체가 아닌 경쟁의 결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승자의 타고난 운과 환경이 아닌 승리의 결과만이 승자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이는 오만으로, 패자의 몫은 좌절로 남아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된 감정의 골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잊을만하면 매스컴에 대서특필되는 각종 갑질 관련 이슈에 사람들이 그토록 분개하는 이유가 단지 한 사람의 인격을 모욕해서 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갑과 을로 사람을 분류시키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의 오만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인식되어 문제 제기를 할 생각조차 못했던 능력주의로 인한 명예와 인정의 문제들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스템이 경쟁을 요구하고 있는 현재, 능력주의 전체를 뿌리 뽑는 것은 불가능하며, 공정한 경쟁을 위해 기회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여하는 것 또한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후천적인 기회의 평등은 몰라도, 선천적인 것들은 제어할 수 없으며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라 한들 그 끝에 생겨날 개인의 책임이 더 커질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센델은 그 대안으로 공적 담화와 공동선을 제시합니다.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정말 이상적이겠다고 생각되는 만큼 실현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으나 노력을 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연대의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개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프랑스의 연대의식, 동지애이자 불안한 세상을 온전하게 지탱해주는 소중한 가치인 솔리다리테(soludarité)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때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어느때보다 책임져야할 것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자유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개인에게 부여되는 수많은 오만과 좌절이 무겁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세부적인 내용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능력주의의 본질을 들여다본 시도 만으로도 센델의 주장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책의 서문에 언급된 것처럼, 참여와 연대를 통해 능력주의로 인해 발생한 가치관의 문제를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깊이 꿰뚫어보며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처한 환경에 적절한 이해를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조민영2021-03-18 01:04
안녕하세요 유진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샌델의 입장을 charitable하게 해석하려는 유진님의 코멘트를 읽으며, 책을 마냥 비판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제 태도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샌델이 제시한 대안인 공적 담화와 공동선이 실현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대안을 제시할 때에는 실현가능성을 최선의 가치로 판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도 느꼈습니다. 덕분에 샌델의 글을 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샌델의 입장을 charitable하게 해석하려는 유진님의 코멘트를 읽으며, 책을 마냥 비판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제 태도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샌델이 제시한 대안인 공적 담화와 공동선이 실현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으며, 우리가 대안을 제시할 때에는 실현가능성을 최선의 가치로 판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도 느꼈습니다. 덕분에 샌델의 글을 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손지우2021-03-17 23:27
과거 신입생이던 때에 ‘서울대 폐지’가 한 차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이 논란에 대해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서울대에만 가면 된다기에 내가 이렇게 약 10여 년 간을 죽어라 공부해서 해냈더니, 이제는 그게 잘못됐으니 없애버리겠다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라는 황당함과 약간의 분노였다. 해당 주제로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가기도 했는데, 이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동기의 한 마디, “우리는 진보이고 싶은 보수지” 라는 문장이 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다녔다.
흔히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우리는 조별과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능력주의라, 그 친구는 착하지만 어떤 점을 잘 못해서 싫어.’ 라는 이야기 등이 있을 것이다. 평소 이런 이야기에 대해 ‘나도 누군가에게는 또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존재일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꼈기에, 스스로는 능력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본 도서를 읽으며 느끼는 불편감과 샌델이 말하는 소위 능력주의자적 사고방식에 동의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내심 능력주의자적 사고에 젖어있었던가 하는 반성을 해야 했다.
샌델은 본 도서에서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를 통해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위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이야기하며 능력주의 기반의 가혹한 성공윤리를 벗어나 겸손함을 갖추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적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옳은 말이다. 나는 여전히 능력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의 주장이 스스로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거북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가 추구하는 이상 그 자체는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그 이상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의문점과 함께 머리를 스친 생각은 과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과 그 결과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그 이론 자체로는 굉장히 뛰어나고 훌륭하며 이상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평 받았다. 하지만 오늘 날 대다수의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단순하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인간의 이기심을 무시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노력 없이 얻어지는 성과물은 인간을 게으르게 하고 더 나아가 발전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다. 본 도서에서 샌델이 주장하는 바는 내게 있어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상적이나 현실적이지는 않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데아(idea)로 느껴졌을 따름인 것이다. 그는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시장 자유주의를 언급하며, 특히 개중 복지시장 자유주의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이룬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대부분의 사회가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각자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에 스스로 움직이고 필연적으로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구조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특히 샌델이 그의 주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샌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1]. 또한 만약 그의 주장이 당연한 사회가 된다면 그것이 – 그의 주장에 따르면 – 정의로운 사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생산성을 보유할 수 있을까[2].
그의 궁극적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본 문제에 대해 돌아보자면 현대 여러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다양한 복지정책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경쟁 사회 속, 샌델이 말하는 ‘밑바닥에 묶인’ 사람들 및 사회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여러 복지정책과 구제책은 물론 그 한계성이 여전하나 점차 개선되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들이 소위 선진국의 발전 과정을 따라 점차적으로 변화하고자 노력 중에 있음 또한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샌델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와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몹시 느리게 보이더라도 점진적으로 이러한 방향성으로 노력을 해 나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들었던 샌델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가 유발 가능할지도 모를 문제점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능력주의를 벗어던진, 겸손함을 갖춘 공동선의 추구라는 사고과정의 변화에 대해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래 복지라는 것이 점차 나아가 당연한 사회가 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본의 재분배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 따라 사회의 생산성 등을 저하시키지 않으면서도 구성원들의 사고관의 변화 또한 점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샌델의 주장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이상론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주장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이 그의 주장과 같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뒤집는 것은 대개 그들의 삶 전반에 대한 부정과 같다고 느낄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사고를 반추해 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의 과정 중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유발할 가능성을 심어둔다. 언젠간 그 가능성의 씨앗들이 발아해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cf. 논의점(발제) : [1] & [2]
흔히 ‘능력주의’라는 단어를 우리는 조별과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능력주의라, 그 친구는 착하지만 어떤 점을 잘 못해서 싫어.’ 라는 이야기 등이 있을 것이다. 평소 이런 이야기에 대해 ‘나도 누군가에게는 또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존재일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꼈기에, 스스로는 능력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본 도서를 읽으며 느끼는 불편감과 샌델이 말하는 소위 능력주의자적 사고방식에 동의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내심 능력주의자적 사고에 젖어있었던가 하는 반성을 해야 했다.
샌델은 본 도서에서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를 통해 성공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위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이야기하며 능력주의 기반의 가혹한 성공윤리를 벗어나 겸손함을 갖추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적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옳은 말이다. 나는 여전히 능력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의 주장이 스스로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 거북하게 느껴지면서도, 그가 추구하는 이상 그 자체는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그 이상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의문점과 함께 머리를 스친 생각은 과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과 그 결과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그 이론 자체로는 굉장히 뛰어나고 훌륭하며 이상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평 받았다. 하지만 오늘 날 대다수의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단순하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인간의 이기심을 무시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노력 없이 얻어지는 성과물은 인간을 게으르게 하고 더 나아가 발전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다. 본 도서에서 샌델이 주장하는 바는 내게 있어 사회주의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이상적이나 현실적이지는 않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데아(idea)로 느껴졌을 따름인 것이다. 그는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시장 자유주의를 언급하며, 특히 개중 복지시장 자유주의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이룬 모든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 대부분의 사회가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각자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에 스스로 움직이고 필연적으로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구조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특히 샌델이 그의 주장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샌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1]. 또한 만약 그의 주장이 당연한 사회가 된다면 그것이 – 그의 주장에 따르면 – 정의로운 사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생산성을 보유할 수 있을까[2].
그의 궁극적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는 점에서,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본 문제에 대해 돌아보자면 현대 여러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다양한 복지정책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경쟁 사회 속, 샌델이 말하는 ‘밑바닥에 묶인’ 사람들 및 사회 전 구성원을 대상으로 한 여러 복지정책과 구제책은 물론 그 한계성이 여전하나 점차 개선되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들이 소위 선진국의 발전 과정을 따라 점차적으로 변화하고자 노력 중에 있음 또한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샌델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와 비교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몹시 느리게 보이더라도 점진적으로 이러한 방향성으로 노력을 해 나가는 것이 개인적으로 들었던 샌델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가 유발 가능할지도 모를 문제점을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능력주의를 벗어던진, 겸손함을 갖춘 공동선의 추구라는 사고과정의 변화에 대해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래 복지라는 것이 점차 나아가 당연한 사회가 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본의 재분배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 따라 사회의 생산성 등을 저하시키지 않으면서도 구성원들의 사고관의 변화 또한 점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샌델의 주장은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이상론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주장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사회 구성원들이 그의 주장과 같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뒤집는 것은 대개 그들의 삶 전반에 대한 부정과 같다고 느낄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사고를 반추해 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의 과정 중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유발할 가능성을 심어둔다. 언젠간 그 가능성의 씨앗들이 발아해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cf. 논의점(발제) : [1] & [2]
박규리2021-03-18 13:53
안녕하세요, 손지우 님! 동기 분의 말씀이 저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샌델의 주장이 이상론에 가깝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을 이야기하신 점에서 깊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아가 '가능성의 씨앗'으로서 책의 논의에 대한 의의를 찾아주신 점도 인상 깊습니다. 이런 점들을 굉장히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신 것 같아 댓글 남겨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이은비2021-03-17 23:28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를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정의하며 능력주의가 가진 허점을 지적한다. 우선, 그가 지적한 첫 번째 문제점은 능력주의는 승자(엘리트)에게는 오만함을, 실패한 자에게는 열등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승자는 어느 정도의 우연과 운이 자신을 뒷받침해주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본인이 성공한 이유를 오로지 본인에게서만 찾는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한국에서 이러한 현상은 치열한 입시 전쟁으로 인해 더욱 고착화된다. 학생들은 명문대에 가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공부와 각종 동아리, 대회 등에 참가하며 화려한 성적과 생기부를 준비해놓는다. 고등학교 3년의 노력으로 부족하다면 재수, 삼수, n수를 하면서까지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명문대에 입학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들인 노력만큼 보상받기를 바라고, 이를 뒷받침한 나머지 요소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만다.
또한 능력주의는 특정 직업군, 특정 학벌 이하의 사람들에 대해 비하하는 시선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직업의 귀천을 따지게 되고,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보통 사람들의 편견과 일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역시 공부 안하면 저렇게 돼”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이는 신분제 사회가 아님에도 우리 사회의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는 차별 현상을 심화한다.
이 가운데 마이클 샌델이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한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다소 흥미로웠다. 기부 입학이나 입시 비리와 같은 현 세태의 불공정함을 제거하면서 능력주의를 최소화하기 위해, 명문대 신입생을 뽑을 때, 사회성을 갖춘 지원자 중 일부를 랜덤으로 선발한다는 대안이었다. 이 방안은 그럴듯해 보이나, 비현실적인 방안에 가깝고, 더욱이 다른 문제점을 또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에도 약간의 운으로 당락이 결정된 이들에게 운도 실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랜덤뽑기는 운 또한 능력에 포함시켜 또다른 능력주의를 양산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마이클 샌델이 추구하는 공동선도 굉장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은 무엇이며,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주의를 배제해야 하는가?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며 능력주의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고, 아니라고 부정은 해왔지만 본인 역시 능력주의의 굴레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고려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능력주의는 특정 직업군, 특정 학벌 이하의 사람들에 대해 비하하는 시선을 정당화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직업의 귀천을 따지게 되고,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이 보통 사람들의 편견과 일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역시 공부 안하면 저렇게 돼”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이는 신분제 사회가 아님에도 우리 사회의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는 차별 현상을 심화한다.
이 가운데 마이클 샌델이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한 “유능력자 제비뽑기”는 다소 흥미로웠다. 기부 입학이나 입시 비리와 같은 현 세태의 불공정함을 제거하면서 능력주의를 최소화하기 위해, 명문대 신입생을 뽑을 때, 사회성을 갖춘 지원자 중 일부를 랜덤으로 선발한다는 대안이었다. 이 방안은 그럴듯해 보이나, 비현실적인 방안에 가깝고, 더욱이 다른 문제점을 또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에도 약간의 운으로 당락이 결정된 이들에게 운도 실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랜덤뽑기는 운 또한 능력에 포함시켜 또다른 능력주의를 양산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마이클 샌델이 추구하는 공동선도 굉장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공동선은 무엇이며,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주의를 배제해야 하는가?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며 능력주의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고, 아니라고 부정은 해왔지만 본인 역시 능력주의의 굴레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고려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원재희2021-03-18 09:35
은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 글 중 제비뽑기 또한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공중을 압도하면서 결국엔 다른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파묻히고 말 것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동시에, 왜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만연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고민해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겸손한 승자들이 얻은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치켜세워주기 위해, 그리고 일명 '불타는 고리'들을 열심히 뛰어넘은 승자 자신들은 운으로 자신이 생각하기에 능력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생겨난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은비님의 말씀도 맞지만,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제비뽑기를 통해서는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그다지 멕을 추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빼박' 오직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온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현재 약 80~90% 승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해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제비 뽑기를 통해서는 마치 롤스의 '무지의 베일 속 선택'과 같이 아무에게도 어떤 것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운빨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신분제 사회 속 상위 계층에 태어난 자식이 능력주의 사회 속 상위 계층의 자식보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덜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은비님의 말씀도 맞지만,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제비뽑기를 통해서는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그다지 멕을 추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속된 말로 '빼박' 오직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나온 '운도 실력'이라는 말은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현재 약 80~90% 승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해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제비 뽑기를 통해서는 마치 롤스의 '무지의 베일 속 선택'과 같이 아무에게도 어떤 것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운빨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신분제 사회 속 상위 계층에 태어난 자식이 능력주의 사회 속 상위 계층의 자식보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덜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서원2021-03-17 23:34
공정하다는 착각
샌들은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계급사회 떄와는 달리 지금은 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더 좋은 위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따라서 능력을 기반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이 사회적 배경,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정의로워 보인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제외하고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본질적으로 능력주의도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사회 구조상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없어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공은 노력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재능도 필요다. 유전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숨겨져 있는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능력 기반 평가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생각해보니 여기에도 배제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어 불평등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꺠닫게 되었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성공은 전적으로 내 노력과 재능으로 이룬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은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에 심취해 오만해지면서 자신들이 얻은 행운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반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굴욕감을 느끼며 자존감이 더 낮아지게 된다. 이로서 성공은 개인의 책임에 달렸다고 보고, 다른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어 더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게 되어 사람 간 연대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출발선은 어디였는지 되돌아보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에 능력으로 판을 가르기 보다는 자신의 위치에 감사해하며 다른 이와 자신이 얻은 보상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대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이 서열화 되어있는 한국에서는 출신 대학만으로 판이 갈리는 경향이 있다. 인서울, 지방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을 그룹 짓으면서 단계를 나누고 있는데 이런 구조가 대학이 사회를 더 양극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까? 샌들은 적정 인원을 1차적으로 뽑은 다음 무작위로 합격자를 가려내 합격하는데 능력뿐만 아니라 운도 작용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파격적이어서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없애기에는 좋은 방법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능력으로 가려낸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운에 맡기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노력을 간과하고 운에만 치중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학을 운영해야 할지, 대학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교육 시스템을 설계해야 할지 이 부분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책의 제목, ‘공정하다는 착각’을 먼저 보고 어떤 내용일지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지적해주어서 새로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사회적 이슈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쉬움 점은 능력주의가 왜 공정하지 않은지 비판적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 점은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샌들은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계급사회 떄와는 달리 지금은 능력만 가지고 있으면 더 좋은 위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따라서 능력을 기반으로 개인을 평가하는 것이 사회적 배경,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정의로워 보인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제외하고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본질적으로 능력주의도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사회 구조상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없어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공은 노력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재능도 필요다. 유전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숨겨져 있는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능력 기반 평가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생각해보니 여기에도 배제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어 불평등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꺠닫게 되었다.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성공은 전적으로 내 노력과 재능으로 이룬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은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에 심취해 오만해지면서 자신들이 얻은 행운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반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굴욕감을 느끼며 자존감이 더 낮아지게 된다. 이로서 성공은 개인의 책임에 달렸다고 보고, 다른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어 더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게 되어 사람 간 연대가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출발선은 어디였는지 되돌아보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에 능력으로 판을 가르기 보다는 자신의 위치에 감사해하며 다른 이와 자신이 얻은 보상을 나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대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이 서열화 되어있는 한국에서는 출신 대학만으로 판이 갈리는 경향이 있다. 인서울, 지방대,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학을 그룹 짓으면서 단계를 나누고 있는데 이런 구조가 대학이 사회를 더 양극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까? 샌들은 적정 인원을 1차적으로 뽑은 다음 무작위로 합격자를 가려내 합격하는데 능력뿐만 아니라 운도 작용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파격적이어서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없애기에는 좋은 방법일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차적으로는 능력으로 가려낸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운에 맡기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노력을 간과하고 운에만 치중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우려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학을 운영해야 할지, 대학이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교육 시스템을 설계해야 할지 이 부분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다.
책의 제목, ‘공정하다는 착각’을 먼저 보고 어떤 내용일지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지적해주어서 새로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사회적 이슈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쉬움 점은 능력주의가 왜 공정하지 않은지 비판적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 점은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박규리2021-03-17 23:35
생각해 볼 문제1: 능력주의로부터의 탈피가 회의주의로 빠질 위험은 없는가?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착각과 오만에 대한 비판을 저술했지만, 능력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공동체주의를 강력한 동기로 삼을 수 있을까? 물론 나도 능력주의가 착취하는 도덕에 대해서 공감했으나, 능력주의가 아닌 삶은 회의로 점철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인간은 으레 존재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고 샌델의 공동체주의 역시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2017년 서울대 구술면접으로 나왔던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서는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만약 나의 삶이 그대로 의미 있는 삶이라면, 나아가는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면, 그런 삶에 더 높은 가격을 붙이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나아가지 않는 삶에 낮은 가격을 부치기 위함이기보단, 그저 나아가는 삶에 대한 높은 가격을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위와 아래,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러한 위계, 구별과 능력주의로부터의 탈피는 함께할 수 있는가?
생각해볼 문제 2: 교육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
미국 대학의 입시 비리에 관한 이슈로 서문을 여는 책을 읽으며, 비슷한 듯 다른 대한민국과 미국의 교육열에 대해 고민하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교육에서의 불평등과 사회에서의 불평등은 마치 닭과 달걀 같은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사회의 불평등은 교육이라는 사회 제도 내에서 답습되고, 답습된 교육은 다시 사회의 불평등을 낳고... 그렇다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의 불평등이 우선일까, 사회의 불평등이 우선일까? 물론 우선을 따지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래도 우선을 따질 수 있다면 어느 쪽일까? 나는 사회의 불평등이 해결되는 것이 보다 궁극적인 목표이기 떄문에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교육 행정은 그저 교육의 불평등만 해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이런 노력들이 결과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의 해소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개인적인 감상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진 요즘, 타인의 안위라는 것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피로하다고 느껴지기 십상이었다. 나의 것을 챙기면서 또 남의 것을 우습게 알기 바빴던 내게 <공정하다는 착각>은 끼얹어진 찬물 같은 것이었다. 불교에는 ‘인다라망’이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것이 촘촘하게 그물로 연결되어, 모든 존재가 전체가 존재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마이클 샌델이 가진 공동체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그것이 다시 떠올랐다. 조금 감정적인 깨달음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 온전한 나의 것이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성공하는 데에 정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의 선을 향한 마이클 샌델의 학문적 진보는 매우 올곧아서 매번 나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돌아보게 되는, 개인적으로는 아주 철학적인 경험의 순간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착각과 오만에 대한 비판을 저술했지만, 능력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공동체주의를 강력한 동기로 삼을 수 있을까? 물론 나도 능력주의가 착취하는 도덕에 대해서 공감했으나, 능력주의가 아닌 삶은 회의로 점철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인간은 으레 존재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고 샌델의 공동체주의 역시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2017년 서울대 구술면접으로 나왔던 오스카 와일드의 글에서는 “인생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만약 나의 삶이 그대로 의미 있는 삶이라면, 나아가는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면, 그런 삶에 더 높은 가격을 붙이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나아가지 않는 삶에 낮은 가격을 부치기 위함이기보단, 그저 나아가는 삶에 대한 높은 가격을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위와 아래,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러한 위계, 구별과 능력주의로부터의 탈피는 함께할 수 있는가?
생각해볼 문제 2: 교육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
미국 대학의 입시 비리에 관한 이슈로 서문을 여는 책을 읽으며, 비슷한 듯 다른 대한민국과 미국의 교육열에 대해 고민하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교육에서의 불평등과 사회에서의 불평등은 마치 닭과 달걀 같은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이다. 사회의 불평등은 교육이라는 사회 제도 내에서 답습되고, 답습된 교육은 다시 사회의 불평등을 낳고... 그렇다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의 불평등이 우선일까, 사회의 불평등이 우선일까? 물론 우선을 따지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래도 우선을 따질 수 있다면 어느 쪽일까? 나는 사회의 불평등이 해결되는 것이 보다 궁극적인 목표이기 떄문에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때로 교육 행정은 그저 교육의 불평등만 해소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이런 노력들이 결과적으로는 사회 불평등의 해소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개인적인 감상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진 요즘, 타인의 안위라는 것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피로하다고 느껴지기 십상이었다. 나의 것을 챙기면서 또 남의 것을 우습게 알기 바빴던 내게 <공정하다는 착각>은 끼얹어진 찬물 같은 것이었다. 불교에는 ‘인다라망’이라는 개념이 있다. 모든 것이 촘촘하게 그물로 연결되어, 모든 존재가 전체가 존재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마이클 샌델이 가진 공동체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비유이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그것이 다시 떠올랐다. 조금 감정적인 깨달음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 온전한 나의 것이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성공하는 데에 정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동의 선을 향한 마이클 샌델의 학문적 진보는 매우 올곧아서 매번 나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돌아보게 되는, 개인적으로는 아주 철학적인 경험의 순간이었다.
조민영2021-03-18 01:17
안녕하세요 규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규리님이 지적해주신 첫 번째 생각해볼 문제와 관련하여 제 생각을 짧게나마 남기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샌델이 경계하고자 했던 생각이 바로 규리님이 지적해주신 문제와 같은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는 너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의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하여 성과를 내는 것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이러한 성과들이 우리에게는 '보상'처럼 다가오고, 이렇듯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해나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샌델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들을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샌델이 말하듯 능력주의로부터의 탈피가 능력의 계발과 발휘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회의주의로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짧지 않은 책이었는데 읽고 코멘트까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을 던져주셔서 저도 더 나아가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규리님이 지적해주신 첫 번째 생각해볼 문제와 관련하여 제 생각을 짧게나마 남기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샌델이 경계하고자 했던 생각이 바로 규리님이 지적해주신 문제와 같은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사회에 능력주의는 너무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의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하여 성과를 내는 것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이러한 성과들이 우리에게는 '보상'처럼 다가오고, 이렇듯 능력을 계발하고 발휘해나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샌델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들을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샌델이 말하듯 능력주의로부터의 탈피가 능력의 계발과 발휘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의 회의주의로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짧지 않은 책이었는데 읽고 코멘트까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들을 던져주셔서 저도 더 나아가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성원2021-03-17 23:44
이 책은 불평등 또는 계층이동의 어려움보다, 그 바탕의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데서 의의를 갖는다. 샌델이 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리 자체는 혁명적인 새로운 발견보다는 누구나 현대를 살아가면서 머릿속에 흐릿하게 느꼈을 단편적인 생각들의 설득력 있는 체계화로 느껴졌다. 나는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공정하다는 착각>이 (특별히 능력주의와 불평등의 관계에서) 개인의 차원에서는 읽어내기 어려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평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적 가치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입체적인 의미체계를 단순화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미움’이라는 의미 상의 대립쌍과, ‘평화/전쟁’이라는 대립쌍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사랑-평화’, ‘미움-전쟁’을 연결해 동일시해버린다. 실제로는 이 두 쌍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 ‘능력주의’가 공정한 것,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면서,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평등이라는 또 다른 긍정적인 가치에 연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더 평등한 사회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정렬의 기준이 달라질 뿐이라는 점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이 통찰은 대학 입시 제도, 채용 시험 등의 실제적인 사회적 이슈를 논할 때 주로 혼재되어 논의되는 ‘어떤 기준이 공정하냐의 문제(기회의 평등)’와,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불평등의 문제(결과의 평등)’를 구분해준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두번째로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논할 때, 오만과 굴욕이라는 감정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 중에서 ‘능력 자체가 온전한 노력의 산물이 아닌, 행운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롤스도 제기한 바 있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부모가 머리가 좋아서(자녀의 입장에서는 행운의 요인이다) 자녀도 머리가 좋다’라는 식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능력에 우선하는 불평등, 즉 능력 자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발생하는 불평등이 아니라 능력주의로 인해 ‘이후에’ 생기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야말로 더 실효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능력주의는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만든다는 점이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논의는 ‘과잉긍정’에 대한 비판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샌델의 주장처럼 능력주의는 소수의 승자와 패자에게 각각 오만과 굴욕을 준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다수에게는 과잉긍정과 자기착취를 선물하지 않을까? 능력주의가 단지 굴욕을 느끼는 소수의 패자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승자도 패자도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인 이유다.
샌델은 결론부에서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종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측에서 펴는 주장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면 결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정당화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능력주의의 관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앳킨슨은 기회의 평등은 사전적인 개념이지만, 대부분의 재분배 활동은 사후적 결과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능력주의에 따라 경쟁이 벌어질 때, 설사 공정한 출발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무조건 불공정한 차등적 분배일 수밖에 없다. 보상은 능력에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3등보다 1초 늦게 도착한 4등은 메달을 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의 제도가 존재하는 한 결과에 대한 조정이 없다면 그 결과는 그 다음 세대에게는 사전적인 조건이 되므로, 기회의 평등이 이어질 수 없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회에서든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온전히 분리될 수 없지 않을까?
첫번째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평등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적 가치에 대해 논의할 때 우리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입체적인 의미체계를 단순화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미움’이라는 의미 상의 대립쌍과, ‘평화/전쟁’이라는 대립쌍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사랑-평화’, ‘미움-전쟁’을 연결해 동일시해버린다. 실제로는 이 두 쌍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 ‘능력주의’가 공정한 것,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면서,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평등이라는 또 다른 긍정적인 가치에 연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더 평등한 사회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정렬의 기준이 달라질 뿐이라는 점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이 통찰은 대학 입시 제도, 채용 시험 등의 실제적인 사회적 이슈를 논할 때 주로 혼재되어 논의되는 ‘어떤 기준이 공정하냐의 문제(기회의 평등)’와,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불평등의 문제(결과의 평등)’를 구분해준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두번째로는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논할 때, 오만과 굴욕이라는 감정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 중에서 ‘능력 자체가 온전한 노력의 산물이 아닌, 행운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롤스도 제기한 바 있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는 ‘부모가 머리가 좋아서(자녀의 입장에서는 행운의 요인이다) 자녀도 머리가 좋다’라는 식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능력에 우선하는 불평등, 즉 능력 자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발생하는 불평등이 아니라 능력주의로 인해 ‘이후에’ 생기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야말로 더 실효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능력주의는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만든다는 점이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논의는 ‘과잉긍정’에 대한 비판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샌델의 주장처럼 능력주의는 소수의 승자와 패자에게 각각 오만과 굴욕을 준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다수에게는 과잉긍정과 자기착취를 선물하지 않을까? 능력주의가 단지 굴욕을 느끼는 소수의 패자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승자도 패자도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인 이유다.
샌델은 결론부에서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종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측에서 펴는 주장 중 하나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면 결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정당화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능력주의의 관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앳킨슨은 기회의 평등은 사전적인 개념이지만, 대부분의 재분배 활동은 사후적 결과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능력주의에 따라 경쟁이 벌어질 때, 설사 공정한 출발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무조건 불공정한 차등적 분배일 수밖에 없다. 보상은 능력에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3등보다 1초 늦게 도착한 4등은 메달을 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의 제도가 존재하는 한 결과에 대한 조정이 없다면 그 결과는 그 다음 세대에게는 사전적인 조건이 되므로, 기회의 평등이 이어질 수 없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회에서든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온전히 분리될 수 없지 않을까?
조유진2021-03-17 23:51
얼마 전에 [엘리트 세습](대니엘 마코비츠)이라는 책을 읽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능력은 대물림되며, 그것이 과거의 귀족 제도처럼 일종의 ‘신분’을 고착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 책의 요지였다. 즉,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소위 ‘엘리트’들이 자신의 직업이나 학력과 같은 엘리트적 신분 요소를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그 결과 비 엘리트 부모를 둔 이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좋은 학벌이나 직업을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엘리트 집단 또한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자녀들의 성공적인 입시를 위한 사교육비와 비교과 활동(어학연수, 유학 등) 비용을 마련하느라, 자기착취적으로 일해야한다. 이는 중산층이나 빈곤층의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며, 악순환을 초래한다.
위 책이 능력주의 속에서의 각 신분이 어떻게 착취되고 있는지 다루었자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대 능력주의 맹점과 그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지만 두 책 모두 현대사회는 공정성의 탈을 쓴 불공정 사회이며, 이것이 장기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일임을 역설한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능력주의는 책에서 제시된 것처럼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풍조가 국가의 발전과 국가경쟁력 향상에 주는 여러 이점을 간과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마이클 센델이 이 책에서 제시한 제비뽑기를 비롯한 대안 또한 과연 현실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대안을 생각해보자면, ‘you can make it if you try’라는, 능력주의의 구호가 더 이상 허상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즉, 합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 개편과 정책 마련을 통해 사회의 공정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 또한 이상적인 대안일 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고등학생 때의 경험을 통해,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농어촌으로 분류되는 지역이었고,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근면하셨지만 책에서 말하는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지고 계셨다. 나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있었다.다행히도, 우리 학교에는 대학 입학 관련 정보에 능통하고, 학생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제공해주고 싶어하시는 여러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선생님들은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안되는 학생들을 위해 밤늦도록 남아 공부를 도와주셨고, 각종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해주셨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많은 사교육적 투자를 해야 입학할 수 있다고 알려진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비싼 학비가 부담이 되어 진학을 망설였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곧 소득분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이 면제되며, 교내 근로와 각종 장학금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아마 원하는 직업을 갖고, 어린 시절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경제적 계급 이동의 사다리는 걷어차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적절한 제도적 보장책을 마련한다면, 진정으로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위 책이 능력주의 속에서의 각 신분이 어떻게 착취되고 있는지 다루었자면,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현대 능력주의 맹점과 그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지만 두 책 모두 현대사회는 공정성의 탈을 쓴 불공정 사회이며, 이것이 장기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일임을 역설한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능력주의는 책에서 제시된 것처럼 수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풍조가 국가의 발전과 국가경쟁력 향상에 주는 여러 이점을 간과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마이클 센델이 이 책에서 제시한 제비뽑기를 비롯한 대안 또한 과연 현실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대안을 생각해보자면, ‘you can make it if you try’라는, 능력주의의 구호가 더 이상 허상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즉, 합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 개편과 정책 마련을 통해 사회의 공정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 또한 이상적인 대안일 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고등학생 때의 경험을 통해,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농어촌으로 분류되는 지역이었고, 학생들의 부모님들은 근면하셨지만 책에서 말하는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지고 계셨다. 나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있었다.다행히도, 우리 학교에는 대학 입학 관련 정보에 능통하고, 학생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제공해주고 싶어하시는 여러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다. 선생님들은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안되는 학생들을 위해 밤늦도록 남아 공부를 도와주셨고, 각종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해주셨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많은 사교육적 투자를 해야 입학할 수 있다고 알려진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도, 비싼 학비가 부담이 되어 진학을 망설였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곧 소득분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이 면제되며, 교내 근로와 각종 장학금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아마 원하는 직업을 갖고, 어린 시절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경제적 계급 이동의 사다리는 걷어차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도록 적절한 제도적 보장책을 마련한다면, 진정으로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김하연2021-03-17 23:52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허점과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출생과 동시에 계층이 분리되고 불평등했던 것에서 현재 ‘능력’을 중심으로 계층 이동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 다를 뿐, 계층이 존재하고 불평등 및 양극화 구조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능력이라는 기준 또한 부모의 재산, 소득, 가정환경, 타고난 재능 등 선천적인 운, 그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합의된 기준의 능력이어야 한다는 시대적 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에는 다양한 외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절대적 역량을 오롯이 순수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데에 첫 번째 오류가 있다. 능력주의라는 보기 좋은 허울 하에 결국에는 계속해서 권력, 부의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양극화를 더욱 극심하게 한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지닌 두 번째 오류는 사회를 승자와 패자 프레임으로 나누어 각 개인이 자만 혹은 굴욕을 느끼게끔 하는 심리적인 측면에 있다. ‘능력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어.’의 말은 달콤하지만 때로는 쓰다. -성공의 기준을 무엇이라 딱 정의하기 어렵지만-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여기며 쾌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력을 덜 했다고 자책하게 되며 패배감과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결과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점으로 이어지는데, 국가적으로 복지 정책의 책임을 덜 지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나만 열심히 잘 하면 된다’는 개인주의 분위기를 양산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첫 번째에서 다루었던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불공정한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출발점을 같게 만들어 완벽한 능력주의로 다다랐을 때,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더욱 커짐에 있다는 것이었다. 능력주의 자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능력주의는 기술관료주의와 시장중심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고, 이는 도덕과 공동선을 경시할 수 있다는 결점이 있다. 능력주의의 기저에는 학력주의가 있다. 정치인들 중 대다수가 고학력자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 그룹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지게 되며 민주 정치가 약화된다. 이러한 기술관료주의는 정책을 결정할 때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미치는 도덕적 영향보다는 경제적인 효과와 손익에 집중하게 만든다. 도덕적 미덕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집권 엘리트층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계층 간 생각이 크게 대립하고 분열된다. 책에서 든 사례로는 영국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있다.
사실 이 책은 나에게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암묵적으로 능력주의의 신봉자였다. 과외 학생들을 가르칠 때 ‘운도 실력이야.’, ‘하면 된다.’와 같은 말을 종종 했었는데, 이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곰곰이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진정한 ‘공정’을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현재 능력주의가 겉보기에 정당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구조적인 모순과 문제점을 지닌다는 체제적 반성과 함께, 이 사회적 시스템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지만 점차적으로 변화해나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능력’, ‘학력’, ‘기회의 평등’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만 같다.
내가 함께 논의해보고 싶은 부분은
1. 능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존재할 지
2. 능력주의를 제치고서라도 불평등은 계속해서 안고 가는 우리 사회의 과제인데, 상위 계층의 오만과 하위 계층의 패배감의 심리적인 측면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개개인이 본인의 능력과 성공에는 운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겸손의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라는 기준 또한 부모의 재산, 소득, 가정환경, 타고난 재능 등 선천적인 운, 그 당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합의된 기준의 능력이어야 한다는 시대적 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에는 다양한 외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절대적 역량을 오롯이 순수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데에 첫 번째 오류가 있다. 능력주의라는 보기 좋은 허울 하에 결국에는 계속해서 권력, 부의 대물림이 이루어지고 양극화를 더욱 극심하게 한다는 점이다. 능력주의가 지닌 두 번째 오류는 사회를 승자와 패자 프레임으로 나누어 각 개인이 자만 혹은 굴욕을 느끼게끔 하는 심리적인 측면에 있다. ‘능력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어.’의 말은 달콤하지만 때로는 쓰다. -성공의 기준을 무엇이라 딱 정의하기 어렵지만-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대가로 여기며 쾌감을 느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력을 덜 했다고 자책하게 되며 패배감과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결과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문제점으로 이어지는데, 국가적으로 복지 정책의 책임을 덜 지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나만 열심히 잘 하면 된다’는 개인주의 분위기를 양산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첫 번째에서 다루었던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불공정한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출발점을 같게 만들어 완벽한 능력주의로 다다랐을 때, 결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더욱 커짐에 있다는 것이었다. 능력주의 자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능력주의는 기술관료주의와 시장중심주의적 사고와 맞닿아 있고, 이는 도덕과 공동선을 경시할 수 있다는 결점이 있다. 능력주의의 기저에는 학력주의가 있다. 정치인들 중 대다수가 고학력자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계층 그룹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지게 되며 민주 정치가 약화된다. 이러한 기술관료주의는 정책을 결정할 때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미치는 도덕적 영향보다는 경제적인 효과와 손익에 집중하게 만든다. 도덕적 미덕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집권 엘리트층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계층 간 생각이 크게 대립하고 분열된다. 책에서 든 사례로는 영국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있다.
사실 이 책은 나에게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암묵적으로 능력주의의 신봉자였다. 과외 학생들을 가르칠 때 ‘운도 실력이야.’, ‘하면 된다.’와 같은 말을 종종 했었는데, 이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곰곰이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고 진정한 ‘공정’을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현재 능력주의가 겉보기에 정당하고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구조적인 모순과 문제점을 지닌다는 체제적 반성과 함께, 이 사회적 시스템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지만 점차적으로 변화해나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능력’, ‘학력’, ‘기회의 평등’이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만 같다.
내가 함께 논의해보고 싶은 부분은
1. 능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존재할 지
2. 능력주의를 제치고서라도 불평등은 계속해서 안고 가는 우리 사회의 과제인데, 상위 계층의 오만과 하위 계층의 패배감의 심리적인 측면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개개인이 본인의 능력과 성공에는 운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겸손의 태도를 갖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이다.
강혜진2021-03-17 23:56
이전에도 누구나 교육을 통해, 개인의 노력을 통해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개인의 운이나, 가정 환경과 같은 요소의 존재에 대해서는 항상 의식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당 도서를 읽으면서는 그 능력주의가 강조되는 와중에, 어떤 실패를 마주한 이들을, 그리고 그들 자신을 비난하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이 노력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었다면, 그 사람이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천성이나 과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당연해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속해있는 위치에서 나아갈 여지, 교육의 중요성, 그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놓치기 쉽습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동의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학을 가는 것,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강조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무언가 결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에도요!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줄수록, 어느 한쪽에서는 가지고 있던 가능성이 편견에 짓눌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 현상이자 씁쓸한 현실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특정 직업에 대한 선호가 강하게 나타나고, 모든 직업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직업이 가치 있다고 인식하더라도 실제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서 그 인식이 온전히 반영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직업을 통해 얻게 되는 명예와 보수는, 그 사람이 그걸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직업이든 자신만의 소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인 입장으로 그 모습을 존경하지만, 그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과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노력을 통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력으로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사회가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없애주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가진 이들도 실질적인 이동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이동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여전히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역할이 수반되어야 능력주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할이라는 것도 이상적인 무언가에 불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능력주의의 이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속해있는 위치에서 나아갈 여지, 교육의 중요성, 그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놓치기 쉽습니다. 아메리칸 드림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동의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학을 가는 것,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강조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무언가 결점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에도요!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줄수록, 어느 한쪽에서는 가지고 있던 가능성이 편견에 짓눌리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 현상이자 씁쓸한 현실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특정 직업에 대한 선호가 강하게 나타나고, 모든 직업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마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직업이 가치 있다고 인식하더라도 실제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서 그 인식이 온전히 반영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직업을 통해 얻게 되는 명예와 보수는, 그 사람이 그걸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직업이든 자신만의 소명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개인적인 입장으로 그 모습을 존경하지만, 그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과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노력을 통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노력으로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사회가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없애주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차이를 가진 이들도 실질적인 이동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이동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여전히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역할이 수반되어야 능력주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할이라는 것도 이상적인 무언가에 불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능력주의의 이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윤빈2021-03-18 02:25
혜진님 안녕하세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특히 능력주의의 이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는 마지막 문장에 저도 크게 공감합니다. 센델의 주장이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능력주의의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직업을 통해 얻게 되는 명예와 보수가 그 사람의 노력과 자격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 잡힌 능력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송혜민2021-03-17 23:56
이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가장 공정하고도 불공정한 제도로 인식되어 왔다. 지속적으로 대입 전형이 바뀌고, 생활기록부에 기재되는 내용이 바뀌는 것도 교육을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노력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시정에도 얼마나 명문대를 잘 보내왔던 지역과 학교 등이 꾸준히 높은 명문대학교 진학률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정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줘왔다. 즉, 특권층은 새로운 변화에도 '잘 적응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는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시간이 물론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 학생들이 개개인의 노력과 시간을 오롯이 공부에 쏟게 할 수 있는 배경이나,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수 있는 정보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전부 '여유가 있는', 즉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계층이 훨씬 유리한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란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그 내부에서 우열을 나누는 것은 학생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죠.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인 '패자', 즉 자기구제를 달성하지 못한 존재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기업 내 인원 감축이나 자영업의 실패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 일부입니다. 이들이 2020년부터 2021년 자가구제를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물론 자신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만, 이들이 경력 단절로 인해 그 이후에도 꾸준히 실업자로 남아있을 경우,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나태'라는 도덕적 낙인이 찍혀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경력이 단절된 사람 중에서도 '선별되지 못한' 경우와 '다시 선별된' 경우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실업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온택트 시대에서 능력주의는 시대의 문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 되었고, 재사회화의 기회가 부족했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노인층 세대가 단순한 음식 주문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상적인 행위들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이미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 시선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는 사람을 위한 정책이나 교육은 사회 변화에 비해서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죠. 센델 교수는 능력주의를 학벌, 그리고 학벌로인해 재생산되는 사회 계층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사회계층 대부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대안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사회에 선순환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 내에서 능력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국가 외적으로도 능력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자조(self-help)를 해야하는 이 체계에서 국가의 기술적, 경제적인 발전은 불가피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저자가 '근로보다 금융이 더욱 중시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투자를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일단 경제력이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하드파워를 갖추기 위한 경제적인 유인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사회 내의 불공평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갖추어야 함은 사실이지만, 국가의 자조를 위해서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부가가치가 높거나 미래에 유망할 연구 혹은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요? 즉, 근로를 신성시할 수 있는 시기는 중세에서 끝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인 '패자', 즉 자기구제를 달성하지 못한 존재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기업 내 인원 감축이나 자영업의 실패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그 일부입니다. 이들이 2020년부터 2021년 자가구제를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물론 자신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만, 이들이 경력 단절로 인해 그 이후에도 꾸준히 실업자로 남아있을 경우,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나태'라는 도덕적 낙인이 찍혀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경력이 단절된 사람 중에서도 '선별되지 못한' 경우와 '다시 선별된' 경우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실업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온택트 시대에서 능력주의는 시대의 문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 되었고, 재사회화의 기회가 부족했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노인층 세대가 단순한 음식 주문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상적인 행위들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이미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 시선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는 사람을 위한 정책이나 교육은 사회 변화에 비해서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죠. 센델 교수는 능력주의를 학벌, 그리고 학벌로인해 재생산되는 사회 계층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사회계층 대부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대안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사회에 선순환을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 내에서 능력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국가 외적으로도 능력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자조(self-help)를 해야하는 이 체계에서 국가의 기술적, 경제적인 발전은 불가피한 부분입니다. 책에서 저자가 '근로보다 금융이 더욱 중시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 투자를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일단 경제력이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하드파워를 갖추기 위한 경제적인 유인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사회 내의 불공평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갖추어야 함은 사실이지만, 국가의 자조를 위해서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부가가치가 높거나 미래에 유망할 연구 혹은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요? 즉, 근로를 신성시할 수 있는 시기는 중세에서 끝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유리2021-03-18 10:52
혜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 개인적으로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혜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현실에서 성과는 노력이나 개개인이 좌우할 수 있는 요소 외의 것들로 분배가 되는데 반하여, 일단 그 성과가 주어지면 사람들은 그가 '나태한 사람' 인지 아닌지 선별되었다는 낙인을 찍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도 샌델 교수가 제시한 해결책이 매우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 이유중 하나가 '세계화로 인한 경쟁의 지속, 그로 인해 국가는 국가끼리의 경쟁 상태에서 또다시 자신을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비대한 존재로 키우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같은 국가가 금융을 통해 전세계의 자본을 흡수하고 인공지능을 통해 인건비를 급격하게 삭감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같은 방식으로 투자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근로의 신성과 존엄에 대해서도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 또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에서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적절한 보수(필연적으로 부의 재분배와 거시적 경제의 성장에 대한 논란을 불어일으킬)없이 가능할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성민2021-03-18 12:11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사회 변화를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능력주의의 문제가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이 더딘 계층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점이 전반적인 사회 양극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 아이, 장애인,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능력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뒤쳐지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능력주의 계층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약자 계층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 인식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의 폐해를 특정 국가나 세대에 한정하지 않고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양승훈2021-03-17 23:56
대학교 1학년 때 외부 사교육업체에서 여러 초등학교들과 협약을 통해 진행하는 '서울대 탐방' 체험에서 멘토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번 참석하였는데 대학생 멘토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업체 담당자는 늘 러프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멘토 분들께서 알아서 아는 장소 설명해 주시고 동기부여 해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은 교육 몇 분 전에 전체 대학생 멘토를 모아놓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오늘 오는 아이들은 사립학교 학생들이에요. 똑똑한 친구들이니 더 신경 많이 써주시고 서울대 쪽, 특히 이과 쪽에 관심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해달라는 학부모들 요청이 있었다 합니다'
(스스로는 도시라고 믿지만) 비교적 시골에서 자랐던 저는 사립 초등학교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타고 온 버스를 보고 뭔가 다르구나 싶었고 교복을 입은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워크북 활동을 할 때는 각자 '서울대 의대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를 적는 학생들의 모습에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보통 다른 초등학생들은 유튜버, 가수, 아빠/엄마 를 적습니다) 아래에 이유를 적는 란에 '아빠 때문에' 혹은 '엄마 때문에' 라고 적길래 아빠가 의대 교수 해야 한대? 라고 묻자 그 친구는 '아뇨 아빠가 서울대 의대 나온 의사인데 아빠 따라 의사하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 기억으로) 해당 반 친구들 대부분의 부모님들의 직업이 다들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있던 술자리에서 친구들이랑 웃음거리로 이 이야기를 하며 요즘 세상 무섭더라, 라며 지나갔는데 정당하다는 착각, 을 읽고 나니 다시 떠오릅니다. 위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대학생 1학년 때까지의 저는 세습의 영향에서 우리의 능력주의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려고 하니 무서운 게 저는 능력주의에 대해 굉장히 찬성합니다. 과외를 하거나, 스타트업 학회에서 여러 외부 사람들을 만나보면 노력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노오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기만 하는 그들의 모습은 노력하는 저마저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노력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그러면서 그 노력이 필요한 결과를 바라는) 사람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오력' 프레임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며 노력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을 조롱 내지 깎아내리는 모습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반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가 성공한 사람이든, 큰/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늘 존경하고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샌델이 말한 것처럼 개인의 능력을 노력에 대한 정당한 획득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 노력을 장려할 수 있을가요? 샌델과 같이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위해 고민하는 사상가들을 선망하고 한 때 그렇게 되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 작은 발전들에 더 집착하는 제게는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를 탈피하여 할 수 있는 공동선의 구축'이 잘 머리에 잡히지 않습니다.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사회는 (어디까지나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환영하는 방향으로지만)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노력은 장려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혹여 그것이 한 사람을 노력하면 원하는 부와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속여 쳇바퀴를 굴리게 하는 일이라 할지도요.
따라서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원칙, 그리고 부의 재분배 원칙으로서는 부적절할지라도 사회가 실질적으로(이 실질이 어떤 의미인지는 또 하나의 논의가 되겠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게 승리자의 태도, 혹은 패배자의 태도를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가짐의 차원에서 조정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을 오늘에나 전달받아 급하게 읽는 것에 집중해 주장이 불완전하고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실제 발제와 토론 전까지 책을 좀 더 꼼꼼히 읽어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스스로는 도시라고 믿지만) 비교적 시골에서 자랐던 저는 사립 초등학교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타고 온 버스를 보고 뭔가 다르구나 싶었고 교복을 입은 모습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워크북 활동을 할 때는 각자 '서울대 의대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를 적는 학생들의 모습에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보통 다른 초등학생들은 유튜버, 가수, 아빠/엄마 를 적습니다) 아래에 이유를 적는 란에 '아빠 때문에' 혹은 '엄마 때문에' 라고 적길래 아빠가 의대 교수 해야 한대? 라고 묻자 그 친구는 '아뇨 아빠가 서울대 의대 나온 의사인데 아빠 따라 의사하고 싶어서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 기억으로) 해당 반 친구들 대부분의 부모님들의 직업이 다들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있던 술자리에서 친구들이랑 웃음거리로 이 이야기를 하며 요즘 세상 무섭더라, 라며 지나갔는데 정당하다는 착각, 을 읽고 나니 다시 떠오릅니다. 위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대학생 1학년 때까지의 저는 세습의 영향에서 우리의 능력주의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려고 하니 무서운 게 저는 능력주의에 대해 굉장히 찬성합니다. 과외를 하거나, 스타트업 학회에서 여러 외부 사람들을 만나보면 노력을 하지 않고 결과를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노오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기만 하는 그들의 모습은 노력하는 저마저 좌절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노력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그러면서 그 노력이 필요한 결과를 바라는) 사람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오력' 프레임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며 노력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을 조롱 내지 깎아내리는 모습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반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그가 성공한 사람이든, 큰/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늘 존경하고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샌델이 말한 것처럼 개인의 능력을 노력에 대한 정당한 획득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 노력을 장려할 수 있을가요? 샌델과 같이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위해 고민하는 사상가들을 선망하고 한 때 그렇게 되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 작은 발전들에 더 집착하는 제게는 샌델이 말하는 '능력주의를 탈피하여 할 수 있는 공동선의 구축'이 잘 머리에 잡히지 않습니다.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의 사회는 (어디까지나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환영하는 방향으로지만)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노력은 장려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혹여 그것이 한 사람을 노력하면 원하는 부와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속여 쳇바퀴를 굴리게 하는 일이라 할지도요.
따라서 능력주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원칙, 그리고 부의 재분배 원칙으로서는 부적절할지라도 사회가 실질적으로(이 실질이 어떤 의미인지는 또 하나의 논의가 되겠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게 승리자의 태도, 혹은 패배자의 태도를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마음가짐의 차원에서 조정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을 오늘에나 전달받아 급하게 읽는 것에 집중해 주장이 불완전하고 극단적인 것 같습니다. 실제 발제와 토론 전까지 책을 좀 더 꼼꼼히 읽어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이정빈2021-03-18 03:38
멘토링 이야기 굉장히 놀랍네요,,, 저는 샌델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관점에 점점 녹아들고 있었는데 글쓴이님의 반대 의견 덕분에 조금 균형적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저 역시 지금의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필요성과 효용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노동력에 대한 경제적 대가를 받는 피고용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결국 노력, 혹은 능력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과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노력한 만큼 그것이 반드시 능력 향상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할 거 같습니다. 부와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 따라 노력의 투입량에 따른 능력 함수의 기울기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에 자신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노력하는 이들을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생기는 듯 합니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적어도 노력한 만큼은 능력을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 사회(기울기가 1은 되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조유진2021-03-18 04:22
양승훈 학우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1학년 때 각종 외부 업체의 서울대 탐방 행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학우님과 마찬가지로 사립초 아이들을 인솔한 적이 있어 서론 부분에 더욱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학우님께서는 능력주의는 공평하며 정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노력할 수 있기에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성과를 낸 자에게 보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탐방 멘토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력의 DNA 또한 대물림되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우연히 제가 졸업한 중학교의 학생들을 인솔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멘티 학생들은 대부분 서울대보다는 탐방이 끝나고 가게 될 에버랜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늘 설렁설렁 관정도서관이랑 자하연 쀽뺙이 정도를 보여주고 도서관 앞에 앉아 쉬도록 코스를 짰었는데요. 그렇지만 그날은 중학교 후배들이었기에 애정이 가 좀 더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멘티들에게 나중에 입학하고 싶은 학과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쌤 어차피 저희는 공부해봤자 서울대 못 가잖아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무기력과 노력에 대한 회의는 그들이 자라온 환경과, 그들의 부모가 보여준 삶의 궤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소위 학군지에서 온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능력주의의 근본적인 불평등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냥 이런 의견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제안해봅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학우님께서는 능력주의는 공평하며 정당하다는 취지의 글을 쓰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노력할 수 있기에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성과를 낸 자에게 보상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탐방 멘토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력의 DNA 또한 대물림되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우연히 제가 졸업한 중학교의 학생들을 인솔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멘티 학생들은 대부분 서울대보다는 탐방이 끝나고 가게 될 에버랜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늘 설렁설렁 관정도서관이랑 자하연 쀽뺙이 정도를 보여주고 도서관 앞에 앉아 쉬도록 코스를 짰었는데요. 그렇지만 그날은 중학교 후배들이었기에 애정이 가 좀 더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멘티들에게 나중에 입학하고 싶은 학과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쌤 어차피 저희는 공부해봤자 서울대 못 가잖아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무기력과 노력에 대한 회의는 그들이 자라온 환경과, 그들의 부모가 보여준 삶의 궤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소위 학군지에서 온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능력주의의 근본적인 불평등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냥 이런 의견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제안해봅니다:)
김윤빈2021-03-18 09:06
승훈님 안녕하세요~ 좋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센델이 경계하고자 했던 어떠한 사고방식 이면의 존재들에 대한 배제를 저도 모르게 다시 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승훈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을 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노력을 운으로 치환시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노력의 중요성에 대한 경시도 꼭 논의되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센델은 사회의 보다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와 감정에 대해 논의를 하는 듯해 보여 능력주의의 폭정이 보다 유의미하지만, 승훈 님의 언급해주신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모습 또한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인 것 같습니다~
윤재빈2021-03-18 10:01
안녕하세요 승훈님. 승훈님께서 솔직하게 써 주셔서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능력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승훈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또 해결할 수는 없는 감정입니다. 그저 제 의도와 목적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한편, 능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과 능력주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노력의 중요성', 그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약간은 초점이 다르지 않나 제안드려봅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원리일 뿐이지만, 후자는 '능력'만으로 사람을 선발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수많은 부작용들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우리 사회는 과도하게 능력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령 정치인을 뽑을 때, 정치인은 각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명문대 출신의 사람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점에 능력주의의 문제가 있고 개선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도 능력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승훈님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또 해결할 수는 없는 감정입니다. 그저 제 의도와 목적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한편, 능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과 능력주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노력의 중요성', 그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약간은 초점이 다르지 않나 제안드려봅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원리일 뿐이지만, 후자는 '능력'만으로 사람을 선발하게 됨으로써 생기는 수많은 부작용들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우리 사회는 과도하게 능력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령 정치인을 뽑을 때, 정치인은 각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명문대 출신의 사람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점에 능력주의의 문제가 있고 개선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엘리엇2021-03-18 13:23
양승훈 학우님의 솔직한 글 공감도 하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발전’이라고 언급하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이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서 말씀하신 ‘노력’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반대로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이들이 더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사는게 발전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좌절과 포기를 느끼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게 발전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겠죠. 한정된 자원 안에서 우리의 노력이 때로는 남의 불행을 바라는 일일 때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개인의 노력의 가치는 정말로 숭고하고 아름다우나 이것이 사회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또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다양한 요인들로 만들어진 성과를 얼마나 폭넓은 관점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 더 고민하는 것이 모두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강혜진2021-03-18 13:48
승훈님 안녕하세요! 샌델의 글을 읽는 동안에는 능력주의라는 이상적인 이야기에 가려진 부분들에만 집중했던 것 같은데, 노력하는 행동,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체계가 본래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능력주의라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어떤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결과가 만들 수 있는 정당성과, 다른 어떤 요소보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무언가로 자신의 방향을 결정해 나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이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다만, 능력주의가 강조되는 와중에,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를 마주하게 되었던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랄까요, 정말 노력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 그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력을 했음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 충분한 노력을 할 만큼의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주변의 환경 자체일 수도 있고 그 환경이 빚어낸 무력감과 같은 감정일 수도 있겠죠!) 동일한 기준을 제시해도 괜찮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동의하지만, 같은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들여야 하는 노력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승훈님이 말씀하신 마음가짐 차원의 조정, 노력의 결과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고민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또다른 측면에서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능력주의가 강조되는 와중에,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를 마주하게 되었던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랄까요, 정말 노력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 그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력을 했음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 충분한 노력을 할 만큼의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주변의 환경 자체일 수도 있고 그 환경이 빚어낸 무력감과 같은 감정일 수도 있겠죠!) 동일한 기준을 제시해도 괜찮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동의하지만, 같은 결과를 얻어내기까지 들여야 하는 노력이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승훈님이 말씀하신 마음가짐 차원의 조정, 노력의 결과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고민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또다른 측면에서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송혜민2021-03-18 13:49
양승훈 학우님의 글 잘 읽었고, 공감하는 부분도 많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우님이 지적해주신 ‘노력’에 대한 부분도 충분히 사회적, 경제적인 부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재생산되는 것이죠. 문화는 특권층이 자신의 계층을 재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부르디외의 논점과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을 단정하는 기준도 충분히 ‘여유 있는’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충분한 여건이 되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노력’을 할 시간도, 기회도 상대적으로 더 많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도 학연, 지연, 혈연 등을 통해서 노력을 실천하기 전에 미리 전승되기도 하고요. 대입을 위한 ‘효율적인 노력’은 정보력에 많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보력으로 만들어진 노력은 정말 순수한 의미의 ‘노력’일까요? 저는 순수한 의미의 노력은 플라톤식으로 공동육아를 하지 않는다면... 실현되지 못하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도 불완전하고 극단적인? 사상이지만요.
김혜민2021-03-17 23:59
우리는 성공을 소유하는가? - 마이클 샌덜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2020-17816 경영학과 김혜민
고등학교 시절 시사토론 동아리에서 활동했었다. ‘시사토론’을 주로 삼던 동아리인만큼 사회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를 많이 다뤘었다. ‘누진세 증가’에 관한 토론을 하며, 고소득층이 저소득층과 소득을 나눠야하는 합당한 이유를 논증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고, ‘대학 입학 과정에서의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에 대한 토론을 하며 저소득층 자녀에게 입학과정에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보기도 했다. 당시 내가 하던 고민들과 마이클 샌덜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주로 다루는 논지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대학 입시 과정에서 나와 주위를 돌아보며, 부모님의 도움이 자녀의 성공에 있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직접 실감한 나는, 샌덜이 제시하는 ‘운’의 영향의 크기에 대한 논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샌덜은 책에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을 언급하며, 미국에 팽배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미국 사회의 분열을 가져왔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사례로 책의 내용이 구성되어 있지만, 이 문제가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 태동기 시절부터 우리 사회에 팽배하던 ‘코리안 드림’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가능성을 앞세워 좋지 않은 가정형편이더라도, 개인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아름다운 이상을 심어주었다. ‘코리안 드림’을 믿은 부모세대는 자녀의 교육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 위해 본인의 편안한 삶을 포기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고, 부모님의 헌신 아래 자란 자녀시대는 유능한 인재들로 성장하여 한국의 영화를 일구어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코리안 드림’은 공공선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에 와 ‘코리안 드림’의 실체는 찾아보기 어렵다.
KDI 연구 결과, 한국의 부모세대-자녀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은 과거에 비해 현재에 와 현저히 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계층 세습도는 상승하였다. 우리의 삶은 생득적 요소에 의해 중대한 영향을 받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운을 극복하기는 몹시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게 운이 우리의 성공에 크게 관여하기에 우리는 성공을 완전히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져야하고, 비교적 운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힐난을 멈추고 각 사람들의 사회 기여의 가치를 존중해야한다.
<질문>
1. 운의 영향을 인정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이 자신의 좋은 운에 감사하는 것이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의 처우 개선에 어떤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가?
2. 본인의 운에 감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운에 감사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실제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이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3. 일의 실질적 중요도에는 차이가 크게 없을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ex. 마틴 루터킹 “청소부의 역할의 가치=의사의 역할의 가치/ 이유? 둘다 위생개선에 기여하고 둘 중 어느 쪽의 역할이든 그것이 결여되면 사회의 위생상태가 악화되고 질병이 팽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청소부와 의사의 예시에서) 각 직업을 얻게 되는 데 있어, -풍족한 집안에서의 탄생 등의 운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더라도- 노력의 차이와 직업 진입장벽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현저하지 않은가? 이상적으로는 두 직업 간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옳고, 청소부의 역할의 가치 폄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직업을 다른 층위로 바라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4. 운에 감사하라는 사고는 다소 운명론적/ 종교적 사고이지 않은가? 운은 누가 부여하는가?
5. (총) 책의 논의는 너무나도 이상적이지 않은가?
2020-17816 경영학과 김혜민
고등학교 시절 시사토론 동아리에서 활동했었다. ‘시사토론’을 주로 삼던 동아리인만큼 사회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를 많이 다뤘었다. ‘누진세 증가’에 관한 토론을 하며, 고소득층이 저소득층과 소득을 나눠야하는 합당한 이유를 논증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고, ‘대학 입학 과정에서의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에 대한 토론을 하며 저소득층 자녀에게 입학과정에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보기도 했다. 당시 내가 하던 고민들과 마이클 샌덜의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주로 다루는 논지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고 대학 입시 과정에서 나와 주위를 돌아보며, 부모님의 도움이 자녀의 성공에 있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직접 실감한 나는, 샌덜이 제시하는 ‘운’의 영향의 크기에 대한 논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샌덜은 책에서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을 언급하며, 미국에 팽배한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이 미국 사회의 분열을 가져왔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사례로 책의 내용이 구성되어 있지만, 이 문제가 비단 미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 태동기 시절부터 우리 사회에 팽배하던 ‘코리안 드림’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가능성을 앞세워 좋지 않은 가정형편이더라도, 개인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아름다운 이상을 심어주었다. ‘코리안 드림’을 믿은 부모세대는 자녀의 교육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 위해 본인의 편안한 삶을 포기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고, 부모님의 헌신 아래 자란 자녀시대는 유능한 인재들로 성장하여 한국의 영화를 일구어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코리안 드림’은 공공선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재에 와 ‘코리안 드림’의 실체는 찾아보기 어렵다.
KDI 연구 결과, 한국의 부모세대-자녀세대의 계층 상승 가능성은 과거에 비해 현재에 와 현저히 떨어졌으며, 그와 동시에 계층 세습도는 상승하였다. 우리의 삶은 생득적 요소에 의해 중대한 영향을 받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운을 극복하기는 몹시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게 운이 우리의 성공에 크게 관여하기에 우리는 성공을 완전히 소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져야하고, 비교적 운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힐난을 멈추고 각 사람들의 사회 기여의 가치를 존중해야한다.
<질문>
1. 운의 영향을 인정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이 자신의 좋은 운에 감사하는 것이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의 처우 개선에 어떤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가?
2. 본인의 운에 감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운에 감사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실제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이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3. 일의 실질적 중요도에는 차이가 크게 없을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ex. 마틴 루터킹 “청소부의 역할의 가치=의사의 역할의 가치/ 이유? 둘다 위생개선에 기여하고 둘 중 어느 쪽의 역할이든 그것이 결여되면 사회의 위생상태가 악화되고 질병이 팽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청소부와 의사의 예시에서) 각 직업을 얻게 되는 데 있어, -풍족한 집안에서의 탄생 등의 운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더라도- 노력의 차이와 직업 진입장벽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현저하지 않은가? 이상적으로는 두 직업 간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옳고, 청소부의 역할의 가치 폄하 인식을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직업을 다른 층위로 바라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4. 운에 감사하라는 사고는 다소 운명론적/ 종교적 사고이지 않은가? 운은 누가 부여하는가?
5. (총) 책의 논의는 너무나도 이상적이지 않은가?
이은비2021-03-18 02:13
안녕하세요. 혜민님!
저도 책을 읽으며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가 해결방안으로 제시한 "유능력자 제비뽑기"라든지, 공동선의 추구와 같은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혜민님의 의견에 상당히 동감이 갑니다. 제시하신 1번 질문에 답해보자면, 운이 좋은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 그 지점에서 멈출 수도 있지만 나아가 운 나쁜 사람들이 좋은 운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일 방안을 찾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 운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번은 다소 이상적인 답변이지만, 운에 감사하지 않는 이들에게 역지사지를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어릴 때부터 감사하는 태도에 대한 교육을 한다면 운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운은 또다른 능력주의를 양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능력주의 세태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혜민님이 주신 질문이 흥미로워 답변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질문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책을 읽으며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가 해결방안으로 제시한 "유능력자 제비뽑기"라든지, 공동선의 추구와 같은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혜민님의 의견에 상당히 동감이 갑니다. 제시하신 1번 질문에 답해보자면, 운이 좋은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 그 지점에서 멈출 수도 있지만 나아가 운 나쁜 사람들이 좋은 운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일 방안을 찾는데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 운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확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번은 다소 이상적인 답변이지만, 운에 감사하지 않는 이들에게 역지사지를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어릴 때부터 감사하는 태도에 대한 교육을 한다면 운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운은 또다른 능력주의를 양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능력주의 세태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혜민님이 주신 질문이 흥미로워 답변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흥미로운 질문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빈2021-03-18 02:56
좋은 질문들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중 한 질문에 대해 답을 달고 싶습니다.
2. 본인의 운에 감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운에 감사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실제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이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사실 샌델의 책을 읽거나 평소 불평등의 이면에 놓인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깊게 고찰해보지 않는 한 자신의 성취가 우연적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에 대해 이상적으로는 최대한 많은 시민들이 혜안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사회 문제에 대한 공적 담론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이 주장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결국 이러한 능력주의의 우연성을 인정한 몇몇 사람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듦으로써(정치 시스템이 될 수도, 비즈니스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적 배경에 의한 기회의 불균등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 본인의 운에 감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운에 감사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실제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소 이상적인 사고가 아닌가?
사실 샌델의 책을 읽거나 평소 불평등의 이면에 놓인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깊게 고찰해보지 않는 한 자신의 성취가 우연적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에 대해 이상적으로는 최대한 많은 시민들이 혜안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사회 문제에 대한 공적 담론에 활발히 참여함으로써 이 주장에 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결국 이러한 능력주의의 우연성을 인정한 몇몇 사람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듦으로써(정치 시스템이 될 수도, 비즈니스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적 배경에 의한 기회의 불균등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성민2021-03-18 13:01
안녕하세요, 글 쓰신 것과 질문 잘 읽었습니다. 저는 혜민님이 던지신 질문 중 3번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과 청소부가 되기 위한 과정이 다른 것도 분명하고, 각자 직업에서 일하기 위해 공부해야하는 지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능력주의 학력주의 사회는 오로지 노력과 재능의 정도를 잣대로 계층을 나누고 계층 간에 차별과 멸시를 야기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직업간에 가치 폄하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 간에 임금이나 지위의 격차가 나고, 특정 직업군은 계층을 형성할 정도로 직업에 의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현상을 문제적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태민2021-03-18 13:4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다섯번째 질문, 책의 논의가 이상적이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능력주의라는 화두만 던지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운에 감사하라는 저자의 사고에 대한 혜민님의 질문에는, 운명론적이라기보다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운에 감사하라는 저자의 사고에 대한 혜민님의 질문에는, 운명론적이라기보다는 태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송혜민2021-03-18 13:59
혜민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혜민님의 의문점도 제가 이 책을 읽고나서 든 의문점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많기도 했습니다.
2번 질문과 4번 질문은 연계가 잘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운' 자체를 운명론적/종교적 사고라고 생각하고 결국 그 '운'을 필연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내리는 결론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필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정말 많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평등 혹은 계급재생산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 내의 중요한 미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단순 '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선조때부터의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혈연을 통한 계급재생산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센델의 논의가 이상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지만, 이러한 센델의 논의가 이상적인 이유는 능력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센델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이기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결국 '센델은 자신의 주장을 일부분이라도 실현하기 위한 사회의 움직임을 만들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이런 논지로 이 책을 출판한 것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매우 개인적인 결론이지만 사회의 새패러다임을 위해서 이상적인 논의가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번 질문과 4번 질문은 연계가 잘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운' 자체를 운명론적/종교적 사고라고 생각하고 결국 그 '운'을 필연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내리는 결론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필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정말 많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필연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평등 혹은 계급재생산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 내의 중요한 미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단순 '운'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선조때부터의 '능력'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혈연을 통한 계급재생산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센델의 논의가 이상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지만, 이러한 센델의 논의가 이상적인 이유는 능력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센델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이기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 쉽지만, 결국 '센델은 자신의 주장을 일부분이라도 실현하기 위한 사회의 움직임을 만들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이런 논지로 이 책을 출판한 것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매우 개인적인 결론이지만 사회의 새패러다임을 위해서 이상적인 논의가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혜진2021-03-18 13:59
안녕하세요 혜민님:) 코리안 드림에 대한 이야기들부터 책의 논의가 너무나도 이상적이지 않은가 하는 마지막 질문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운에 감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운에 감사한다는 것이 '우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있음을 인식함'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인식이 가능하다면, 그 인식 자체가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의 처우 개선에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그 인식을 바탕으로,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보호나 지원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책에서의 논의가 이상적인 이야기로 느껴지긴 하지만, 이 논의를 바탕으로 그걸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지유2021-03-17 23:59
<공정하다는 착각>은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에서 출발한다. 샌델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비판하며 포퓰리즘 정치의 도덕적, 정서적 기반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즘의 준동은 단순히 세계화에 따른 소득 격차, 또는 이민자의 유입에 따른 백인의 인종주의적 위기의식만이 아니며,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의 문제, 굴욕감과 패배감의 문제라는 것이다. 샌델은 이어 지금까지 불문율로 여겨왔던 능력주의 원칙이 갖는 도덕적 한계를 설득력 있게 논증해 나간다. 후반부에서는 '능력의 폭정'을 완화하기 위한 몇 가지 스케치가 제시되는데, 샌델의 논의에 더해 다소 고전적이지만 시민의 정치 참여가 갖는 의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제도권 정치의 대표성이 낮아지며 최근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등의 개념이 대두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공론화위원회가 단발적으로나마 시도되었고, 해외의 시민의회 사례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단순히 대표제 민주주의의 반응성을 높이기 위한 보완책이 아니라 개개인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의미를 갖기에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도덕적 호소력은 결국 모든 시민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적 논의에 기여할 자격이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교육, 노동에 이어, 정치 영역에서도 개개인의 사회적 자기효능감을 재고하기 위한 적극적인 고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능력주의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무엇을 시사하는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산업화 시기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성공을 향한 개개인의 '욕망'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더 잘 수 있다는 구호는 높은 사회적 이동성으로 현실화되며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계층에서 용 난다'가 옛말이 되어버린 오늘날, 능력주의적 열망은 기회의 평등을 해치는 '엘리트'에 대한 비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586 세대에 대한 MZ 세대의 비판, 부동산 투기세력에 대한 비난, 고위공직자 자녀의 입시 비리에 대한 분노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엘리트에 대한 능력주의적 비판은 오히려 바로 그 엘리트가 되기 위한 각자도생의 경쟁을 더욱 과열시킨다. 과도한 경쟁에 에너지가 집중되며, 그 이면의 '패배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정책적 대안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능력주의는 더 높은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호소일뿐 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은 아니라는 샌델의 비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단면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코로나19 국면이 장기화되며 손실을 입은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장기간 영업제한으로 폐업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청년층, 그리고 방역에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 등이다. 그런데 작년 한 해 공적 담론을 장악한 것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에 대한 논의보다도, 재난 지원금의 지급 대상에 누가 포함되는지, 거리두기에 따른 영업 제한에서 누구를 면제할 것인지 등의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나만 아니면 돼' 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재난상황에서 비용을 떠안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보상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코로나19는 능력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능력주의 원칙 자체에 근본적인 충격을 가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팬데믹은 능력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상당한 우연성과 불확실성에 노출된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갖는 취약성과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코로나19를 '능력의 폭정'에 맞서 공동체의식을 기를 계기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이후의 한국사회가 서로 연대하며 겸손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회로 거듭날 수 있으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으로는, 능력주의의 문제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무엇을 시사하는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산업화 시기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성공을 향한 개개인의 '욕망'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더 잘 수 있다는 구호는 높은 사회적 이동성으로 현실화되며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계층에서 용 난다'가 옛말이 되어버린 오늘날, 능력주의적 열망은 기회의 평등을 해치는 '엘리트'에 대한 비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586 세대에 대한 MZ 세대의 비판, 부동산 투기세력에 대한 비난, 고위공직자 자녀의 입시 비리에 대한 분노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엘리트에 대한 능력주의적 비판은 오히려 바로 그 엘리트가 되기 위한 각자도생의 경쟁을 더욱 과열시킨다. 과도한 경쟁에 에너지가 집중되며, 그 이면의 '패배자'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정책적 대안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능력주의는 더 높은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호소일뿐 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약속은 아니라는 샌델의 비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단면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코로나19 국면이 장기화되며 손실을 입은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장기간 영업제한으로 폐업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청년층, 그리고 방역에 가장 취약한 저소득층 등이다. 그런데 작년 한 해 공적 담론을 장악한 것은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에 대한 논의보다도, 재난 지원금의 지급 대상에 누가 포함되는지, 거리두기에 따른 영업 제한에서 누구를 면제할 것인지 등의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나만 아니면 돼' 식의 논리에서 벗어나, 재난상황에서 비용을 떠안은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보상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코로나19는 능력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능력주의 원칙 자체에 근본적인 충격을 가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팬데믹은 능력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상당한 우연성과 불확실성에 노출된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갖는 취약성과 상호 의존성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코로나19를 '능력의 폭정'에 맞서 공동체의식을 기를 계기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이후의 한국사회가 서로 연대하며 겸손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회로 거듭날 수 있으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마무리한다.
김윤빈2021-03-18 01:22
이 책은 합리성과 공정성을 근거로 현대 사회에서 당연하게 인정되고 있는 능력주의 이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능력주의로부터 파생되는 배척의 문제와 시민적 연대의 부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시한다. 즉, 사회 흐름의 지지를 운 좋게 얻어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주류가 생겨남과 동시에 이에 대응하는 비주류를 형성하는 사회적 관념들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러한 대척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공동선을 제시한다.
누구나 능력껏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무력감과 굴욕감을 안긴다. 능력주의를 최대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강조되는 교육 또한 마찬가지의 감정과 태도를 유발한다. 이들은 모두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성공한 사람에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있었음을 보증하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부족했음을 각인시킨다. 이로 인해 성공한 자들은 무능력한 자들을 배척하고, 의회에서는 고학력자들이 꾸린 밀실 정치가 이루어지곤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경제 질서인 자본주의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폭정에 힘을 싣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격차가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커지면서 불평등은 심화되고, 일반 시민의 무력감은 쌓여만 간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돈이 정치적 설득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센티브제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 설득의 노력은 들어있지 않다.
이로 인해서 발생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의 분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정책 결정권은 소수 엘리트에게만 돌아가고, 스마트한 정치를 펼친다는 미명 하에 저학력자들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진다.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가지는 직업군은 명확하게 분리되어 가고, 오만과 굴욕과 같은 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데에 충분한 기여를 한다. 이 같은 사회 양극화 (->포퓰리즘)는 상호 소통을 단절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상호 존중과 이해, 시민 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샌델은 분리된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과 기억,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함께 숙의하는 대중 지성을 제시한다. 공동의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삶의 영역을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는 꽤나 흥미롭고 유의미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층을 잘게 나누어서라도 철저하게 차별받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 단면에 비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같이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적절한 예시일지는 모르겠지만, 스포츠를 즐길 때만큼은 승리를 염원한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한다. 이처럼 사회가 함께 좇을 수 있는 공동의 목표와 함께 의식과 사고방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때, 보다 연결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능력껏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무력감과 굴욕감을 안긴다. 능력주의를 최대로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강조되는 교육 또한 마찬가지의 감정과 태도를 유발한다. 이들은 모두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성공한 사람에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있었음을 보증하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부족했음을 각인시킨다. 이로 인해 성공한 자들은 무능력한 자들을 배척하고, 의회에서는 고학력자들이 꾸린 밀실 정치가 이루어지곤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경제 질서인 자본주의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폭정에 힘을 싣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격차가 세대가 거듭될수록 점점 커지면서 불평등은 심화되고, 일반 시민의 무력감은 쌓여만 간다. 더욱 중요한 점은, 돈이 정치적 설득을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센티브제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적 설득의 노력은 들어있지 않다.
이로 인해서 발생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의 분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정책 결정권은 소수 엘리트에게만 돌아가고, 스마트한 정치를 펼친다는 미명 하에 저학력자들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진다.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가 가지는 직업군은 명확하게 분리되어 가고, 오만과 굴욕과 같은 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데에 충분한 기여를 한다. 이 같은 사회 양극화 (->포퓰리즘)는 상호 소통을 단절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상호 존중과 이해, 시민 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샌델은 분리된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과 기억,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함께 숙의하는 대중 지성을 제시한다. 공동의 공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삶의 영역을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는 꽤나 흥미롭고 유의미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층을 잘게 나누어서라도 철저하게 차별받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 단면에 비해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같이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적절한 예시일지는 모르겠지만, 스포츠를 즐길 때만큼은 승리를 염원한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한다. 이처럼 사회가 함께 좇을 수 있는 공동의 목표와 함께 의식과 사고방식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때, 보다 연결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태민2021-03-18 01:50
의문에 앞서 두가지 감상평을 먼저 기재한다.
첫째, 저자가 이러한 글을 저술하는 것 또한 능력주의의 부정적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특정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글을 읽을 때, 중요하게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공감' 여부이다. '이해' 여부가 아니다. 이해와 공감의 차이는 바라보는 것과 함께하는 것의 차이다. 공감적 연구를 위해 중요한 것은 질적 연구의 방법들이다. 하지만 본 저술은 각종 통계 자료에 기반한 양적 연구가 기반을 이루며, 각종 인용마저 능력주의의 상단에 위치한 이들의 것이다 저자의 배경은 어떠한가? 그는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연소로 하버드 대학교에 교수에 임용되었다. 저자 자신의 경력과 배경이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해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가 능력주의로부터 배척된 이들을 공감의 방식 없이 단순히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서울대학교에서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어불성설이다. 이곳의 구성원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각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능력주의의 하단에 위치한 이들-에 대해 어물쩍은 시선을 던지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가 갖는 위치, 마이클 샌델 교수의 능력적 배경이 있기에 '능력주의'에 대한 견해를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나의 오만일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없애려는 변화는 그것을 가진 이들이 그 권리를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의문은 다음이다.
학력주의는 잘못된 관념인가? 본 저술에서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와 동의어로 기재되고 있다. 학력주의는 어떻게, 왜 형성되었는가? 두 가지의 결합이다. 높은 학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하나이고, 이를 위해 높은 학력을 가지려 구성원들이 애쓰는 분위기가 또 다른 하나이다. 두 번째 요소는 사실 첫 번째 요소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왜 높은 학력을 가지려 애쓰는가? 그것은 사회로부터, 각종 기업과 지자체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삼성전자에 입사한 서울대생들이, 같은 곳에 입사한 타대생들에 비해 일을 잘할까? 이것은 속단할 수 없다. 실제로 특정 일을 잘하는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은 별개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구성원들 또한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의사의 예시도 마찬가지다. 의사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치료 능력과 공감 능력이다. 서울대 의대생이라고 해서 타 의대생들에 비해 두 가지 능력을 잘 갖추고 있을까? 이것 또한 확신할 수 없다. 이렇듯 학력이 실제 일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각종 직군에서 높은 학력을 가진 이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검정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를 뽑을 때, 실제 의사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이들의 치료 능력과 공감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다. 다른 직군들도 마찬가지이며, 이에 직관적이고 단순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력'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고학력을 선호하는 분위기는 자명한 일이 되어버렸다.
학력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한 대학들이 구성원을 뽑을 때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일 사회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학은 고등한 학문을 배우고 시험을 통해 그것을 평가하는 곳으로, 그러한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 능력과 시험 수행 능력을 요구할 뿐이다. '학력주의'에 기저한 사회적 니즈를 제거한다면 그것 자체만으론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각종 직군에서 실제 직군에 필요한 능력을 검정할 수 있는 올바른 평가 방식을 수립해야한다. '학력' 이외의 것을 말이다. 본 저술에서는 그러한 논의가 기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철학이 갖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본 저술은 특정 의문을 던졌을 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발등에 불 떨어지기 전에 다루지 않겠다'고 했다. 고학력에 대한 선호, 이로 인한 학력주의의 전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저자가 이러한 글을 저술하는 것 또한 능력주의의 부정적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특정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글을 읽을 때, 중요하게 파악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작가의 '공감' 여부이다. '이해' 여부가 아니다. 이해와 공감의 차이는 바라보는 것과 함께하는 것의 차이다. 공감적 연구를 위해 중요한 것은 질적 연구의 방법들이다. 하지만 본 저술은 각종 통계 자료에 기반한 양적 연구가 기반을 이루며, 각종 인용마저 능력주의의 상단에 위치한 이들의 것이다 저자의 배경은 어떠한가? 그는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연소로 하버드 대학교에 교수에 임용되었다. 저자 자신의 경력과 배경이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해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가 능력주의로부터 배척된 이들을 공감의 방식 없이 단순히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서울대학교에서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어불성설이다. 이곳의 구성원들 역시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각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능력주의의 하단에 위치한 이들-에 대해 어물쩍은 시선을 던지는 것은 그들에 대한 모욕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가 갖는 위치, 마이클 샌델 교수의 능력적 배경이 있기에 '능력주의'에 대한 견해를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나의 오만일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없애려는 변화는 그것을 가진 이들이 그 권리를 자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의문은 다음이다.
학력주의는 잘못된 관념인가? 본 저술에서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와 동의어로 기재되고 있다. 학력주의는 어떻게, 왜 형성되었는가? 두 가지의 결합이다. 높은 학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하나이고, 이를 위해 높은 학력을 가지려 구성원들이 애쓰는 분위기가 또 다른 하나이다. 두 번째 요소는 사실 첫 번째 요소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왜 높은 학력을 가지려 애쓰는가? 그것은 사회로부터, 각종 기업과 지자체로부터 높은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삼성전자에 입사한 서울대생들이, 같은 곳에 입사한 타대생들에 비해 일을 잘할까? 이것은 속단할 수 없다. 실제로 특정 일을 잘하는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은 별개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구성원들 또한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의사의 예시도 마찬가지다. 의사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치료 능력과 공감 능력이다. 서울대 의대생이라고 해서 타 의대생들에 비해 두 가지 능력을 잘 갖추고 있을까? 이것 또한 확신할 수 없다. 이렇듯 학력이 실제 일에 미치는 영향은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각종 직군에서 높은 학력을 가진 이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검정하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를 뽑을 때, 실제 의사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이들의 치료 능력과 공감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다. 다른 직군들도 마찬가지이며, 이에 직관적이고 단순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력'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고학력을 선호하는 분위기는 자명한 일이 되어버렸다.
학력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최상단에 위치한 대학들이 구성원을 뽑을 때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일 사회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학은 고등한 학문을 배우고 시험을 통해 그것을 평가하는 곳으로, 그러한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 능력과 시험 수행 능력을 요구할 뿐이다. '학력주의'에 기저한 사회적 니즈를 제거한다면 그것 자체만으론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각종 직군에서 실제 직군에 필요한 능력을 검정할 수 있는 올바른 평가 방식을 수립해야한다. '학력' 이외의 것을 말이다. 본 저술에서는 그러한 논의가 기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철학이 갖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본 저술은 특정 의문을 던졌을 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발등에 불 떨어지기 전에 다루지 않겠다'고 했다. 고학력에 대한 선호, 이로 인한 학력주의의 전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최유리2021-03-18 10:44
태민님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첫번째 문단에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자가 가진 사상 자체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만약 샌델 교수가 가진 학력과 위치 때문에 사회에서 힘을 얻어 공론화되고, 그 사상이 또한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노동계급에 대하여 공감을 하기 보다(또는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직접 가져오기 보다) 정작 높은 학력을 가진 엘리트들에 대한 자료를 주로 인용함으로써 현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은 또다른 능력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점을 가져보았는데요.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모두 능력과 학력을 얻는 것에 어느 정도 운이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좋은 결과'를 얻고 난 뒤에는 그것에 대한 지나친 오만과 자부심, 노력의 기여분에 대한 과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책을 읽으면서 태민님이 제시하신 '올바른 평가 방식을 수립하는 것'도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이어진다는 비판을 책의 담론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이상적 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출발해 각자의 노력(또는 공정한 능력)의 기준에 따라 성공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불평등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평가 방식이 수립되어 정말 각자가 '학력 외에' 정확히 능력을 계측받아 자신의 위치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능력또한 여전히 운에 좌우된 부분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엘리트 계층의 오만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각자가 여전히 공공선에 기여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하게 되고, 포퓰리즘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어쩌면 더 심각하게 남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이에 대한 태민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혜민2021-03-18 13:52
능력 검정 기준으로서 학력이라는 제한 조건의 설정의 현실적 필요성에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학력만으로 개인의 가치를 평가하는 태도는 지양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 하여 학력적 기준 외의 다른 기준을 강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고학력 자체를 선망하기보다 고학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선망하기에 학력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라는 태민님의 분석 또한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글에서 '실제 직군에 필요한 능력을 검정할 수 있는 올바른 평가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의사 자격증 시험 등 대학 진학 이후 치뤄지는 시험은 그러한 능력을 잘 검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현실적으로 처음 전공을 찾게 되는 대학 진학에 있어 우리는 전공과는 다소 무관한 고등 교과 과정의 내용을 평가할 수 밖에 없r기에 이와 같은 과정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태민님의 자세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오서림2021-03-18 07:41
지난 9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게시된 글이 논란을 일으켰다. 'LH 투기' 의혹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LH 직원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작성자가 남긴 글이다. "이게 우리 회사(LH)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 공부 못해서 못 와놓고 조리돌림 극혐" 샌델이 지적하는 오만한 능력주의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 대부분은 아직 능력주의의 환상에 눈이 가려진 한편, 능력과 노력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공정하다고 믿고 있던 시스템이 역설적이게도 시스템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실상을 목도하며 좌절을 경험한다. 우선, 논의에 앞서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의 폭정에 충분히 상처 입은 바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싶다.
논의해보고 싶은 문제
1. 우리에게 상처, 샌델의 용어로는 ‘굴욕감’이라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인 감정이다. 운처럼 통제 불가능한 요소는 말 그대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연의 개입으로 결과가 달라진 것에 의한 굴욕감이 덜할까? 샌델은 재능은 개인의 온전한 몫이 아닌 행운이며, 재능으로 평가받는 사회에 태어난 것 역시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노력과 수고의 정당성 또한 시스템을 쥐고 있는 이들의 본능적 욕망에 의해 경쟁의 공정성에 의문이 드는 사회 현실에서 도전에 직면한다. 우리는 ‘수저론’처럼 통제 불가능한 요소로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느끼지만,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것으로 얻은 결과에도 통제 불가능한 요소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능력주의의 신화는 그것의 본질적 아이러니에 의해 해체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한 신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즘 많이 쓰이는 '벼락 거지'라는 말이 있다. 부동산과 주식, 암호화폐 등의 자산 가격이 치솟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을 가리켜 생겨난 말이다. 아마도 갑자기 된 부자를 일컫는 ‘벼락 부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포모(FOMO) 증후군: 고립 공포감’이라고 한다. 흐름을 놓치거나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 증상을 의미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재난지원금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지만, 2021년에도 K자형 양극화가 점점 악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회복의 기회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와 고용취약계층이 아닌 고학력•고소득 계층에게 돌아갔다. 최근 상처 투성이의 한국 사회를 둘러싼 문제 상당수가 과열된 자산 시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2.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사회적 조건 중에서 학력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이견을 좁히기 어려운 주제이다. 학력은 직업을 갖는 데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한편, 고등교육이라는 선택지를 둔 입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제6장을 할애하여 능력주의 이상의 토대가 되는 학력주의의 해체를 시도한 샌델의 논의는 주로 고등교육의 문턱에서의 선별에 대한 것이지만,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대해서도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다. 샌델이 언급한 것처럼 학력은 우리의 기대만큼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를 보장하지 못한다. 사회에서 성공이란 잣대는 직업과 벌어들이는 부로 말미암은 것인데, 학위만 가지고는 이를 직접적으로 만족했다고 보기 어렵다. 시간이 흘러도 서울대생은 꾸준히 인정받는 위치에 있지만, 요즘의 취업 시장에서 느끼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학력주의의 해체가 더욱 가혹한데, 그것은 고등교육의 현장 역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쟁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생계 문제에 내몰린 어려운 환경의 학생은 대학 입학 후에도 여전히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고등교육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오히려 입시보다 직관적으로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평가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을 선별하는 문제를 넘어, 고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태를 두고 보았을 때도 고등교육이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함으로써 부를 재분배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어떤 시스템도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일관된 맥락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논의해보고 싶은 문제
1. 우리에게 상처, 샌델의 용어로는 ‘굴욕감’이라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인 감정이다. 운처럼 통제 불가능한 요소는 말 그대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연의 개입으로 결과가 달라진 것에 의한 굴욕감이 덜할까? 샌델은 재능은 개인의 온전한 몫이 아닌 행운이며, 재능으로 평가받는 사회에 태어난 것 역시 우연의 결과라고 말한다. 노력과 수고의 정당성 또한 시스템을 쥐고 있는 이들의 본능적 욕망에 의해 경쟁의 공정성에 의문이 드는 사회 현실에서 도전에 직면한다. 우리는 ‘수저론’처럼 통제 불가능한 요소로 개인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느끼지만,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것으로 얻은 결과에도 통제 불가능한 요소의 개입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능력주의의 신화는 그것의 본질적 아이러니에 의해 해체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한 신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요즘 많이 쓰이는 '벼락 거지'라는 말이 있다. 부동산과 주식, 암호화폐 등의 자산 가격이 치솟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을 가리켜 생겨난 말이다. 아마도 갑자기 된 부자를 일컫는 ‘벼락 부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포모(FOMO) 증후군: 고립 공포감’이라고 한다. 흐름을 놓치거나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 증상을 의미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재난지원금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지만, 2021년에도 K자형 양극화가 점점 악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회복의 기회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와 고용취약계층이 아닌 고학력•고소득 계층에게 돌아갔다. 최근 상처 투성이의 한국 사회를 둘러싼 문제 상당수가 과열된 자산 시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능력주의의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2.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러 사회적 조건 중에서 학력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이견을 좁히기 어려운 주제이다. 학력은 직업을 갖는 데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한편, 고등교육이라는 선택지를 둔 입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제6장을 할애하여 능력주의 이상의 토대가 되는 학력주의의 해체를 시도한 샌델의 논의는 주로 고등교육의 문턱에서의 선별에 대한 것이지만,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대해서도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다. 샌델이 언급한 것처럼 학력은 우리의 기대만큼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를 보장하지 못한다. 사회에서 성공이란 잣대는 직업과 벌어들이는 부로 말미암은 것인데, 학위만 가지고는 이를 직접적으로 만족했다고 보기 어렵다. 시간이 흘러도 서울대생은 꾸준히 인정받는 위치에 있지만, 요즘의 취업 시장에서 느끼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학력주의의 해체가 더욱 가혹한데, 그것은 고등교육의 현장 역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쟁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생계 문제에 내몰린 어려운 환경의 학생은 대학 입학 후에도 여전히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면 고등교육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오히려 입시보다 직관적으로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평가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을 선별하는 문제를 넘어, 고등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태를 두고 보았을 때도 고등교육이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함으로써 부를 재분배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어떤 시스템도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일관된 맥락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포스트팬데믹 @ 한국사회의 가치관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01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64136452&orderClick=LAG&Kc=#N
목차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입시의 윤리 | 능력 지표 따내기
CHAPTER 1.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 능력주의 윤리 | 굴욕의 정치 |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 포퓰리즘의 준동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왜 능력이 중요한가 | 우주적 능력주의 | 구원과 자기 구제 |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 부와 건강 | 자유주의적 섭리론 | 역사의 옳은 편 | 도덕 세계의 궤적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 시장과 능력 | 자기 책임의 담론 |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 포퓰리즘의 반격 |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 보는 것과 믿는 것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 최고의 인재들 |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 학력 간 균열 | 기술관료적 담론 |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 기후변화 논란
CHAPTER 5. 성공의 윤리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 시장과 능력 |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 성공에 대한 태도 | 운수와 선택 | 재능 계산하기 | 능력주의의 등장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 쿠데타 |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 상처 입은 승리자들 |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 오만과 굴욕 | 유능력자 제비뽑기 |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 명망의 위계질서 |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CHAPTER 7. 일의 존엄성
일의 존엄성 하락 | 절망 끝의 죽음 | 분노의 원인 |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 기여적 정의 |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 ‘열린 어젠다’의 오만 |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