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 소주제 1] 포스트 팬데민 @한국사회의 가치관
강준만,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의 심리적 기제," 사회과학연구 55.2 (2016): 319-55. Web.
김미영,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 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론," Kyŏngje Wa Sahoe 84 (2009): 256-77. Web.
- 내용: 위 두 논문 중 하나 혹은 전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
- 분량: 300~5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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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
1. 이 논문에서 지적한 능력주의의 문제는 시작부터 다른 출발선상에 존재한다는 점과 차별적 교육기회로 인해 사회적 이동성을 감소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만일 ‘정확히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재화가 분배되고, 개인의 능력과 부모는 완전 독립적인 세상을 가정해보자.’ 이러한 사회에 대해도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제시한 해결책은 ‘능력주의 문제점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꾸준히 주장했듯이, 이러한 해결책이 ‘공공성의 부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지 능력주의의 의한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어느 정도 억제할 뿐이다. 그렇다면 ‘공공성의 부재’를 근본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3. 논문에 따르면, 능력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경제인’이며, 공동체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원으로,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지는 윤리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공동체의 이익과 책무를 선택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실제 현실 속의 인간을 잘 설명하는 모델은 ‘능력주의형 인간’과 ‘공동체주의형 인간’ 중 ‘공동체주의형 인간’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할까?
4. ‘많은 것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과 소유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가정해보자. 공과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분배원칙이 확립된다면, 공공의 의지에 의해 소유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다수의 의지에 따라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의 몫을, 그 몫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관계없이 가능한 많이 뺏어오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5. ‘소유권’ 개념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개인의 능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다면, 개인의 능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개인의 소유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소유에 대해서 공공성을 적용시켜야 할까? 마찬가지로 공과 개념에서 ‘개인의 소유’를 바라본다면, 공공의 의지가 바뀜에 따라 얼마든지 ‘개인의 소유’도 가변적인 것일까?
1. 저는 그런 사회도 여전히 불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출발선상이 다른 것, 어떤 운에 의해 각자의 환경이 다르게 나타난 것은, 부모뿐만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살아가게 된 지역과, 그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조 등도 배제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두 번째로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 과연 평등한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라는 것이 노력의 크기와는 또다른 것이라, 누군가는 노력을 기울이고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은데(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경우 비장애인인 학생과의 신체적 경쟁에서 불리한 지점이 생길 수 있는 것처럼요) 이들을 내버려두고 모두 능력에 따라 재화가 분배되면 평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번 주제 안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지만 개인의 능력 발현에 개입하게 되는 우연, 운이라는 요소를 어느 정도로 고려해야 할지가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3. 공동체주의형 인간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 공동체를 위해 하고 있는 행위들은 결국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는데,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같은 것을 떠올리면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자신의 손익을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더 능력주의형 인간이 가지는 특성이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4,5 공공의 의지와 개인의 소유에 대한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한 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이 온전히 개인의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모두에게 동일하게, 타자에 의해 변동되는 것이 적절한지는 또다른 지점인 것 같아서요.
좋은 질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 강혜진님처럼 저 또한 해당 사회도 사회 정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의 분배 자체에 운적 요소가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2. '공공성'은 공동체에 대한 인식 위에서 성립하리라 생각합니다. 파편화된 사회라 개인의 시야를 넓히기는 쉽지 않지만 특강에서 접한, '시민적 연대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개인의 차원에서는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물론 익명의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를 제도화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저로서 당장 떠오르는 건 교육 과정에서의 협력 강화 정도일 것 같네요.
3. 이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능력주의형 인간'조차 어느 정도의 사회적 책무는 수행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얼만큼 희생할 수 있는지는 단언하기 힘들지만 '능력주의형 인간'이 만일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면 사회는 이미 붕괴하지 않았을까요.
4. 이 질문은 5의 뒤에 와야 할 것 같습니다. 능력 개념이 특정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과 개념도 일부 영역에서만 기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소유권과 동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재산권의 경우에는 실제로도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타 권리와 다르게 헌법 대신 법률에 의해 내용과 한계를 정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소급입법 등은 허락되지 않으니 이미 축적한 재산에 대해서는 멋대로 압박을 넣을 수는 없을 텐데,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식과도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공과 개념에서 바라보더라도 이미 '소유'한 '소유물'에 대해서는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읽기 자료에 대한 저의 이해 자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으니 제 의견을 말하기 전에 간단하게 읽기 자료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능력을 공과로 대체하자, 능력이 단일 기준/가치를 추구하고 교환 가치를 가지며 그 이득이 개인에게 종속되는 것에 비해 공과는 다양한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비시장적이며 공동선에 대한 기여를 바탕으로 함. 현대의 능력주의에서는 '능력'을 실행의 결과가 아닌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에 비해 '공과'는 이미 실행된 일이 실제로 공동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관심으로 둠, 능력과 달리 공과에서는 정도가 낮은 사람도 여전히 사람이기에 가치가 묵살당하지는 않음, 능력을 아예 무시하고 공과만을 세우는 게 아니라 능력-공과-필요의 체계를 적절히 세워야 함
-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이란 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능력주의를 내재화하고 정당화하게 되었는지를 심리학적 기제로 살펴보는 것, 5가지 기본 기제 인정투쟁/사회정체성이론/시장신호이론/노력정당화효과/내성착각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방어하게 됨, 결국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자신보다 아래의 사람들을 멸시하고 위쪽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학습된 무력감을 가지게 됨
두 글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나 능력주의에 대해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지는 상이하지만 '능력주의의 폐해 (특히 한국사회에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는 점은 비슷하였습니다. 폐해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강준만님의 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반응이었는데 실제로 제가 군생활을 했던 곳은 소방관(정규직)들과 청소 및 행정 계약직(비정규직)들이 함께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막 합류하였을 때는 두 집단 간 미묘한 긴장이 보였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굉장히 화목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회식이나 모임 등도 따로 하게 되었고 서로 불편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부분이나 학력을 바탕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굉장히 혐오스러운 행위이고 이미 지나온 일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는 건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들은 과연 '능력주의'의 폐해일지 궁금합니다. 위의 폐해들은 사실 더 심각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과거부터 존재했고 선사시대부터 중세시대, 귀족사회부터 지금의 평등사회에 이르기까지 존재합니다. 조금의 차이를 가지고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자신을 가르려 하고 이를 통해 최대한 많은 혜택을 얻어내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능력주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 기저에 흐르는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샌델이 말한 능력을 통한 1차 선발 후 추첨을 통한 선발 제도에도 큰 효과가 없다고 느낀 이유는 그렇게 패러다임이 바뀐다 하더라도 결국 사람들은 그런 패러다임 내에서 다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자신의 '우월욕망'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지금 당장도 능력과 별개로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순전히 운의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것처럼 저러한 패러다임 하에서는 운도 다시 한번 차별과 멸시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물론 현재 능력주의가 마치 문턱 넘기처럼 하나의 업적에만 집중하고 지나온 일들에 집착하는 등 문제가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소수자 우대가 반능력주의처럼 여겨지는 것도 고쳐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이 고쳐지더라도 국소적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능력주의를 철폐할지-말지가 아니라 우선 그 기저에 깔린 차별에 대한 우리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적해주신대로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어 보이도록 노력했고 그 구별의 형태는 재산이든, 신체능력이든, 고위관직이든, 외모든, 옷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예를들면, 과거 조선시대에서는 과거를 통해 고위관직으로 진출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어했고, 무력 고대 유럽에서 정복 전쟁이 성행하던 시기에는 높은 신체적 능력을 통해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어했음) 다만 현대시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주로 학벌과 경제적능력 이 그 기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학우님께서 지적해주신대로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든 더 나은 형태로 변화해도, 능력주의의 기반이 인간 본성에 기반한 것이라면 인간 본성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드러난 문제의 정도를 어느정도 약화시켜줄 뿐이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능력주의에 동조하게 되는 기제의 하나로 강준만이 제시한 노력 정당화 효과를, 개인의 자연스러운 본성 정도로 일별해서는 안 된다. 우리 교육이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고도로 사회적인 산물로 보아야 한다. 교육은 좋은 미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어른이 되었을 때 “나의 성공 시대 시작”†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는다. 이 환상은 매우 현실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다. “교육의 꿈은 언제나 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학습자를 끊임없이 미래의 꿈에 매달리고 현재의 삶을 유예하도록 만든다”‡. 벌랜트(Berlant, L.)의 용어대로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10여 년간 전방위로 에너지를 탈진한 끝에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개인은, 그동안 소모한 비용만큼 주관적 효용을 얻어야만 한다. 그래서 노력 정당화 효과가 발동해, 좋은 학벌을 합당하고 영예로운 보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 지점에서, 교육을 지탱하는 잔혹한 낙관주의를 능력주의적 공정성 담론이 은폐한다. 능력 따라 왔으니 자격 있다는 것이다. 입시의 승자를 오만에 빠뜨려 눈을 가려야 한다. 입시의 패자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했다며 입을 막아야 한다. 교육은 교육 스스로가 약속한 미래, 그 공수표를 이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서울사이버대학교 CM송.
‡ 박지원, 「잔혹한 낙관에서 깨어나기」, 『인문잡지 한편 3』, 민음사, 2020, 119쪽.
글쓴이께서 지적해주신대로,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교육계에서의 능력주의는 '잔혹한 낙관주의'로 작용한다는 점에 공감했습니다. 또한, 저자가 심리적 기제로 제시한 노력 정당화 효과를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결과라고도 보아야 한다고 써주셨는데, 저 역시도 이처럼 사회적 병폐가 나타나게 된 데에는 각 개인의 내면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 전반에 적용되고 고착화되는 것도 문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마지막 문단에서 "입시의 승자를 오만에 빠뜨려 눈을 가려야 한다. 입시의 패자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했다며 입을 막아야 한다."라고 써주신 부분은 저자의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p.346)"라는 진술을 잘 표현해주신 것 같아서, 덕분에 이번 읽기자료를 한층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능력의 폭정을 멈출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토론이 오갈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되네요! 코멘트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러한 한국식 능력주의가 타 국가, 특히 미국에 비해 다른 점은 '집단 능력주의의 심화'라고 생각한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의 '연'은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허울을 쓰고 있다. 강준만에 따르면 그것은 공고화된 사회정체성이며, 집단의 정체성이 나의 것이라는 내성착각이다. 또한 김미영이 능력의 대안으로 제시한 '공과' 개념 역시 집단 능력주의의 발현이다. 이는 롤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롤스는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되,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을 공동체 전체와 나눠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미영과 롤스가 공과 개념을 제시한 맥락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개인 능력주의의 폭정을 막고자 집단 능력주의를 심화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공동체가 이루어낸 보상을 배분할 때, '공동체'의 범위를 과연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 김미영은 '공과로 적극적 가치가 부여되며 대안경제를 떠받치는 가치체계가 든든해진다' 라고 설명했지만, 적극적 가치라는 것은 '대안경제'가 아닌 '최선의 경제'를 '표면적'으로 수행해낸 '소수의 공동체' 에게만 부여될 공산이 크다.
학우분들과 나눠보고 싶은 논의는 다음이다. 샌델의 저작과 두 논문은 능력주의를 대체로 교육적 관점, 즉 '학력주의'로 기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능력주의가 갖는 특수성은, 앞서 언급한 집단 능력주의 중 특히 '혈연'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위치가 공고하다는 것이다. 한국형 기업 형태인 재벌을 외국 언론에서 ‘Jaebul’이라고 표기해 고유명사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삼성家, LG家 등의 재벌은 혈연을 매개로 한다. 혈연이 학력에 비해 개인의 노력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물론 한 가문이 이루어낸 기업적 성과들이 인정받아야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것에 얽힌 각종 사회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창업자라고 해서, 그 아들 딸이 다시 기업의 오너가 되는 것은 합당한가?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이 오너로서의 그들의 능력을 대변하는가? 더 근본적으로, 한 기업은 창업자 개인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업을 일구어낸 모든 근로자의 자식들이 해당 기업에 입사하는 것도 올바른 일이 되는가? 마지막 의문은 우리 사회가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듯 하다. 행정자치부가 2017년부터 도입한 '개인정보 수집 최소화 가이드라인'에 따라 부모의 직업을 이력서에 기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말단 직원의 입사에도 '혈연'을 매개로 한 가산점이 금지되어있는데, 기업의 총수에 작용하는 '혈연'을 우리 사회는 당연시하고 있다. 이 또한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를 외치던 승마선수 정모씨의 말에 고개 숙여야할 명제일까. 한국사회에서 특히 혈연에 적용되어있는 능력주의에 대한 학우분들의 고견이 궁금하다.
이런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부유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이고 그 사람의 능력으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능력주의 신화 속에서의 착각이지만) 어떤 사람이 엄청난 노력으로 인해 '필연적 성공'을 거두었다면, 부모가 된 그가 그의 자녀에게 많은 것을 남겨줄 권리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을 인식해 본다면 자녀가 혈연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것이 능력주의에 위배되지만, 성공한 부모가 능력주의 체제 속에서 그의 노력과 업적을 인정받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많은 것을 물려줄 권리가 정당화되고, 이에 따라 혈연의 실천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지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건규님의 댓글을 읽고 구체적으로 문제를 이해하는 것, 혹은 그 이해가 유의미한지 자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강준만의 논문을 생각해 보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변화를 막거나 '의도적 눈감기'를 하게 만드는 기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를 한층 더 깊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능력주의에 동의하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들을 파헤치고 이해한 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준만은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를 통해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의 심리적 기제를 분석한다. 논문에 따르면 능력주의 정당화 심리는 인정투쟁-사회정체성-시장신호-노력정당화-내성착각의 수직적 위계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능력주의의 폐해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와 능력의 우연성을 인식하고 능력주의 이념 하에서 주어지는 특혜를 줄여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을 줄이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것이 김미영의 논문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이다. 이 논문에서는 능력주의에서 강조하는 능력과 공동체주의적 공과 개념을 대비한다. 공과는 분배원칙이지만 능력주의와 달리 능력을 개인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상호 주관적 관계 하에서 판단한다. 또한 공동체를 인정하고 가치 논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과의 영역을 능력의 영역과 공존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두에게 필요한 사회재는 필요원칙에 따라 정치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이 능력주의를 해체한다.
(개인적 감상)
개인적으로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분배 방식이 효율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점에서 바로 폐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능력과 공과의 개념을 공존시킨다는 김미영의 해결책이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능력주의 이념 하에서는 승리한 자들이 부는 물론이고 안전과 건강까지 가져가서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있다. 능력과 공과를 공존하게 하고, 능력이 공과를 보장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러한 현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과를 도입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증가함으로써 능력의 산물이 상호 주관적 관계에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강준만의 논문에서 언급된 능력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논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남은 문제는 어디까지가 공과 혹은 필요원칙이 적용될 영역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답변이 달라지는 문제이고 내가 개인적으로 평소 현실세계 및 현실사회와 그다지 관련이 없는 생각을 하고 전공을 하기 때문에 함부로 논의하기 어려운 주제라고 느껴진다. 만약 여기에 대해 자신의 뚜렷한 입장이 있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학우라면 나에게 의견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또한 나는 공과 개념의 도입이 현실적이고 능력주의의 문제점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는 불충분할 수도 있다. 논문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저자가 생각하는 사회상에서는 능력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자유교환의 영역으로 귀속되어 잔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과/필요/능력의 복합평등이 능력주의를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부분도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다.(바라는 것이 참 많네요...^^)
사실 처음 읽을 때에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주의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 반면, 능력주의가 낳은 잘못된 결과들을 비판하고 '건전한 능력주의'를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으로 읽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까지 읽은 결과, 저자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저자가 능력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5가지의 심리적 기제(인정투쟁/사회정체성/시장신호/노력정당화/내성착각)가 있어서, '불건전한 능력주의'에 동의하게 되고, 이러한 능력주의를 통한 특권에 맹목적이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능력주의라는 것이 어떠한 특권이나 특혜를 생산해내고 분배한다면, 이렇듯 내면화된 심리적 기제 때문에 문제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주의 문화를 벗어나야 한다고 보는데, 현실적으로 능력주의를 완전히 타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건전한 능력주의'에서 '건전한 능력주의'로 나아가자는 주장을 결론부에서 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자는 주장이다.
능력주의에 대해 글을 읽고, 나름대로 사고를 전개하면서도 “왜 그럴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찾지 못했었는데, 이 논문에서 제시한 심리적 기제가 원인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실 따지자면, 이 논문은 능력주의에 대해 찬반 주장을 강력하게 하기보다는 능력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도 능력주의의 심리적 기제에 관한 위 논문을 읽으면서 민영 님과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문제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할 때에는 대체로 그 원인과 실태를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되는데, 말씀하신 대로 이 논문이 그런 과정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논문을 읽으며 능력주의 시스템에 대해 "왜 그럴까?"에 대한 답을 배움과 동시에, 능력주의 관련 문제 해소가 어려운 이유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익숙한 상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성 착각, 인정욕구와 집단적 정체성 추구,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화와 보상에 대한 욕구 등 논문에서 제시된 기제들은 인간 심리의 보편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측면이 어느 정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심리적 기제가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부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심리적 메커니즘을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한국의 현실이 이런 양상으로 존재하기까지 긴 역사가 있다.
한국이 자본주의를 따르게 된 것도, 교육제도가 지금과 같은 것도 사실 지금 이 시대에서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전에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공정성을 단 몇십년만의 몇 가지 것들로 논하자면? 나는 너무 단편적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교육열이니, 우월의식이니 이전에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소외계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경제적 능력도, 부모의 영향도 아닌, 타고난 것들에 의한, 정체성에 의한 것들이다.
최근에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인 혐오 테러들, 변희수 하사의 죽음 등을 보자.
같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시청각장애가 있는 학우들을 보자.
그들 앞에서 감히 노력이 어떻고 뭐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또한 우리 모두 언제든지 장애를 가질 수 있으며,
젠더라는 것은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모두가 잠재적 젠더퀴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시아인으로 태어난 것은 모두가 반박할 수 없는 바일 것이다.
게다가 여성, xx 유전자로 태어난 것, 또는 남성, xy유전자로 태어난 것에 대한 한계도 있다.
강준만의 논문을 읽으며 ‘인정투쟁’과 ‘노력정당화 효과’ 등은 아주 익숙한 사회현상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사회적 심리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의 재능과, 관심분야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한 지식들,
그로 인해 파생적으로 발생한 보수나 사회적 인정과,
단순한 어떤 자리나 집단 등에 속해 있음으로써 받고자 하는 인정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특히 노력과 관련하여 조금 흥미로운 점은 모두가 ‘본인은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개개인마다 다른 환경, 다른 인지세계에서 본인은 분명 열심히 노력을 했을 것이다.
최근 읽던 책에서 ‘움벨트’라는 개념을 보았다.
이는 객관적 현실이 아닌, 한 생명개체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세계 또는 지각환경을 일컫는다. 사람과 다른 동식물 종은 물론이며, 같은 인간이더라도 너무나 다른 시청각, 후각, 촉각에 대한 인지범위를 가진다.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좀 더 현실에 밀접하게 말하자면, 가족, 또는 가장 가까운 친구나 애인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들 그들이 인지하는 경험과 세계가 동일, 최소 비슷이나 할까?
여기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수자를 위한 정책에 대해 공정성을 논하기 이전에, 내가 그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하고 그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색맹이었다면, 공지사항 하나 읽기 어려웠을 것이고, 휠체어나 다른 의족, 의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매번 어떤 동작을 하는데에 추가적인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과도한 감정적 이입도 아닐뿐더러 객관적인 현상에 대한 예측정도일 뿐이다. 이만 하더라도
감히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이 공정성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 그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심리’는 꺼내지도 않았다.
역사적으로 행해온 차별에 대한 묵은 시선들과 고착된 사회제도들, 사소한 차별적 일상언어들까지 고려한다면 나는 왜 이런 공정성의 논의를,
흔히 ‘정상인들’끼리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간다.
만약 우리가 좀더 본질적인 시선으로 인간사회를 바라본다면,
예를 들어 모두가 같은 생명체이고, 세포의 집단에 불과한 것인데,
지구를, 우주를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다 못해 점차 어떤 폐쇄적인 집단주의로
흘러가는 양상을 보면 솔직히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기본 생명존중에 대한 의식의 부재로 모든 현상을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평소에 이성애자 남성의 "정상인" 범주의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고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보니 이런 논의에서도 자연스레 생각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두가 젠더의 스펙트럼 안에 속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공감하며, 저도 어딘가 위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마저도 (정체성은 모르겠으나 지향성은) 충분히 유동적이라고 생각하죠. 공정성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한 게 고작 '다중지능 이론'이라니 뻔뻔해보이기도 하는군요. 공정성 판독기들이 한심해 보일 것 같습니다.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토론이 각자가 가진 다양한 (그리고 소외당하고 있는) 성질로 논의가 확장되면 '그들의 이야기'로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차별과 계급나누기의 기제로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들이 고스란히 소수자 차별 혐오에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야기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럴 때면 토마스 나이젤이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 외에 다른 개체의 주관적 관점을 절대 알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을 통감합니다. 저마저도 타인을 공감하고자 할 때 제가 가졌던 인간으로서 경험의 틀 안에서 짐작할 뿐이지요. 친형이 성소수자인데도 인식의 확장을 잘 못합니다. 읽으면서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셔서 좋았습니다. 서울시장 후보들이 뱉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떠도는 와중에 덕분에 좀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이런 글을 읽을때면 '비장애인', '남성'인 저의 정체성이 왠지 뜨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세계는 늘 놓치고 있는 것 같고,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도 같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많은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나 조건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질 때, "나는 이런 입장이고 너는 이런 입장이니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나는 이런 입장이지만 참고 있으니, 네 입장이 무엇이든 간에 참아라."라고 말하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많은 것 같은 느낌?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중 노력정당화 효과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노력정당화 효과는 승자가 느끼는 자부심을 광적인 집착으로 변질시키며, 동시에 패자가 받게 될 모욕을 응분의 결과로서 합리화한다. 즉, 혹독하고 치열한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학벌, 지위 등 그에 걸맞은 차별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외의 사람들이 이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노력이 부족했던 각 개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당연시되는 것이다. 논문에서 언급된 부동산 투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노력정당화 효과는 능력이라는 개념의 범주 자체를 확장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의 수준을 판단할 때 맹목적인 능력주의적 기준이 개입됨으로써, 과도한 보상의 제공을 합리화하고 오만과 집착을 불러오는 경우가 빈번하다. 위 논문 340쪽에서 저자는 "문제는 노력에 대한 대가의 규모나 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정의로운가 하는 것일텐데, 이런 문제는 아직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고 언급한다. 노력에 대한 이와 같은 물음은 능력주의를 향한 문제의식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만큼, 그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절실하다.
다음으로, 김미영의 논문에서는 능력과 대비하여 공과라는 개념이 제시되며, 이는 월저의 복합평등론에 기반한 분배원칙상의 대안과도 연결된다. 현재 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른바 잠재력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오류의 가능성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며, 측정이라기보다는 분류를 위한 도구에 가까운 모습을 띤다. 반면 공과라는 개념은 단일한 기준이 아닌 다양한 가치에 기반하며, 그로써 비시장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인간의 상호주관적, 공동체적 관계를 충분히 고려한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관점의 접근은 승자독식의 정당화와 비시장적 가치의 잠식 등 능력주의의 폐해를 향한 유의미한 경종이자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작업이 실질적으로 행해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강준만의 논문에서 제시된 내성 착각이다. ‘특권의 바다’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특혜를 당연시하는 맹목적 착각,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제도적 해법이 무엇일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덧붙여, 김미영의 논문 272쪽에 의하면, 공과원칙은 재화와 사람의 특수한 가치를 고려하며, 따라서 “일종의 정실주의는 허용되거나 도덕적으로 요구되기도 한다.” 뒤이어 저자는, 글로벌 시장의 거대자본에서 엿볼 수 있듯 강자는 보편성을 추구하며, 약자의 철학인 공동체주의는 이와 대비된다고 설명한다. 해당 부분의 논리적 구조는 이해가 되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의문이 든다. 정실주의나 연고주의가 능력주의와는 대조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정실주의가 능력주의의 폐해로 꼽히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제약 및 특권 세습를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더 익숙하다. 논문에서 제시된, 일종의 정실주의가 도덕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 현실적 맥락에서 어떤 경우에 해당할지 생각해보며 이 부분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고 싶다.
또한 김미영의 논의는 전반적으로 샌델의 저서에서는 불충분하게 서술되었던 공동체주의의 입장을 보다 뚜렷하게 따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사회 속 무수히 많은, 작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지적은 합리적입니다. 동시에 고속 성장 이전의 한국 사회가 어렴풋하게 머릿속에서 스쳐갈 만큼 우리에게 공동체주의는 친숙합니다. 과거 한국 사회가 가졌던 문제점 등을 검토해보는 작업이 병행된다면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성적에 대한 인정투쟁. 공교육을 받고 자란 대부분의 학생들은 경험했을 부분이다. 수능이나 내신 평가 시스템에 한 번이라도 불만을 품어봤다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리라 믿는다. 대안교육 중학교를 다녔던 본인의 동생도 다시 일반고등학교에 가서 "인정을 받아야 할 상황"을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기도 하남의 산자락 아래 커다란 농지가 있던 학교였다. 동물을 잘 기르거나, 농사를 잘 짓거나, 요리를 잘하거나 하는 등 각자 다양한 활동 속 다양한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었고, 실제로도 학생들이 각자 다른 인정을 받고 진로를 택했다. 삼육재단의 후원을 받는 학교에서는 신학적 독실함도 재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대안교육의 품을 벗어나면 "적응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상존했던 탓에 졸업한 뒤 무시받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다. 이제 동생은 일반고에 진학해 고3이 되었고, 본인마저도 차별과 멸시가 정당화된 사회에서 좌절하고 상처받지 말길 바라는 마음에서 맹목적인 공부를 부추긴다. 그렇지 않으면, 알든 모르든, 분명 누군가는 논문에서 나열한 구구절절한 기제들에 의해 "정당한 차별"이라며 거리낌없이 화살을 쏴댈 터였다. 물론 매번 죄책감에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아는데,"로 운을 띄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화의 목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인 점은 이런 능력의 신화가 왜곡돼 있다는 주제로 대화를 자주 나누고는 했다.
운동권에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친형에게도 적용된다. 이미 진보 엘리트 계층이 학력을 내세워 논의의 목소리를 독점한지는 꽤 오래된 이야기다. 386대학 운동권이 정치주류를 이룬 지금의 정치권에는 형이 내는 목소리가 담겨있지 않다. 주로 신문기사에서 "이런저런 시위가 있었고, 그 앞에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의 짤막한 글과 사진의 형태로 접하게 됐는데, 네이버 기사에 보면 할 일이 없어서 저런다는 둥의 인생의 패배자 취급하는 댓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형은 서강대학교를 자퇴하고 운동권에 들어섰는데, 합격이나마 한 학력을 유용하게 써먹거나 대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망설여야 될 때가 되면 그 유용한 차별을 느낀다. 부모님은 여전히 낡은 목소리로 다시 학부로 재입학해 졸업하라고 애원하고 있다.
위의 한 문장은 가족의 인정과 위신으로 직결된다. 엄마는 큰아들이 서강대에 들어갔다가 자퇴를 하였노라고 4년제 졸업장이 없노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다. 대신 그 책임의 바통을 본인이 이어 받은 꼴이 되고 말았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부모의 불안을 보기 좋게 지워주었다. 부모님은 그리 공공연히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할아버지는 생전에 손자가 서울대에 간 것을 동네방네 자랑하곤 하셨다. 본인이 서울대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면 어김없이 가족들의 위신을 드높였다. 친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내가 어느새 두둑한 용돈을 받았고, 명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유독 많이 나오곤 했다. 당시에는 마냥 받던 대우가 즐거웠지만 지금은 좀 시들해진 환대는 다시금 되돌아 볼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본인은 미대 입시를 치루고 들어왔다. 비교적 개성이 주목 받을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꽤 획일적인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미대입시에는 성적뿐만 아니라 "잘 그린 그림"이라는 기준이 존재한다. 그림 그리는 재료, 지면의 크기, 제한시간, 주어진 문제가 모두 동일하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묘사하는 방식도 대부분 유사하다. 미술관에서는 사진을 이어붙이고, 미디어아트가 상영되는데 학생들은 획일적인 수채화를 그린다. 물론 이 세계에서도 성적이 낮으면 높은 대학은 지원조차 할 수 없다. 입시미술학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데, 제한시간 4시간 동안 빠르게 완성한 그림들을 넓은 바닥에 주르륵 깔아놓고 선생들은 긴 막대기로 잘 된 그림들을 툭툭 짚는다. 순식간에 A급, B급, C급, 미완성작으로 그림의 그룹이 나뉜다. 개개인의 창의성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등수가 매겨지는 이상한 순간이다. 그리고 실제 시험장에서 교수들이 시험작들을 고르는 과정도 깔려진 그림의 수만 더 많을 뿐, 똑같다. 분야 특성상 졸업 후 학력보다는 개인이 제출한 포트폴리오의 퀄리티와 양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대 입시가 그저 일반적인 대학입시의 학벌주의를 고스란히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서술한 바, 다양한 층위에서 내 삶도 글이 분석한 것처럼 능력주의 신화와 밀접하게 얽혀있다. 풀 수 없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우리는 사적 입장과 공적 입장을 달리 한다. 공적으로는 이처럼 비판적이더라도 각자도생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본인은 문제인식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육의 탈중앙화가 이루어지면 급격한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학생들을 학교에 모은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교육권력의 능력주의 줄세우기였다. 사람들이 학교라는 공간, 회사라는 공간을 벗어난 경험을 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곧 권력 과시와 차별로부터의 거리두기라는 순기능도 의도치 않게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가 그동안 정당화하고 내면화했던 차별을 다시 고민하고 연대를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대안학교를 다닌 동생을 두어, 학벌주의를 거부하고 뛰쳐나간 형을 두어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평가의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고, 그야말로 ‘무용함의 유령’이 우리의 정신세계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더 다양한 계층에 확산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적 입장과 사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변화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와중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p.s. 네이글의 박쥐 논문은 어떻게 접하신 건가요? 심리철학을 좋아하시나요? 철학도로서 좋아하는 논문이라서 반가웠습니다. ㅎㅎ...
학생들이 대학의 유형에 맞추어 입시전략을 짜듯이 미대입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은 그 동안 축적된 데이터(합격작, 수상작)를 바탕으로 그림을 답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이를 테면 지난해에 합격한 그림들을 가져다 놓고 "이유가 있어서 합격한 그림"이라며 학생들이 이를 모방하도록 몰아갑니다. 입시 이전에 4-5월 즈음 각종 대학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고 여는 실기대회가 있는데 평가자가 대학교수들이라 여기에서 입상한 작품들도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 연도에 선발되는 작품들도 다시 같은 방식으로 이전 작품을 베끼는 것이죠. 그래서 시험을 본 학생들은 바로 당일 학원에 와서 시험장에서 그린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게 중요하게 됐죠.. (저는 디자인이고 순수예술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복잡하죠..?) 구도나 공간감, 배치, 묘사된 정도 등이 평가 척도이긴 한데.. 저조차도 애초에 획일적 평가가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좋아 보이는 구도를 학원에서 미리 짜주고 무슨 주제가 나오든 그 구도대로 우겨 넣으라는 곳도 많습니다. 예고에서 강의를 하는 형님 말로는 잘 그린 그림은 보인다던데.. 알 수 없군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변화를 불러오리라 생각한 부분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임으로서 형성되는 위계질서"가 해체된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였습니다. 학생은 학교에 모여 선생님을 바라보고, 신도들은 사원에 모여 사제를 바라보듯, 공간이 사람에게 구속을 가질 때 말에 대한 권위가 부여되고 기존 능력주의 질서를 유지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짚지는 못하겠으나 공간을 벗어나 말랑말랑한 뇌로 문제점을 의식하기를 바랄 뿐이지요. 한편으로는 온갖 미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떠들어대는 용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공론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논의되지 못하고 일방향으로 주입되면, 더욱 더 치밀한 형태로 능력주의를 내면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단지 형태만 바꾸어서 말이죠.. 어렵네요..
저도 미약하나마 철학 좋아해서 이것저것 보다가 비교적 짧은 글과 멋진 제목(특히나 멋진 제목이죠) 덕에 유심히 봤었어요. 불가지론자라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죠. 박쥐라는 멋진 비유에서 여유로움도 느껴지던 걸요 :)
다른 학우님들께서는 "부자의 비율은 어느정도 정해질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목해야할 점은 '부자의 비율'보다는 '부자가 형성한 부의 정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부자들이 형성한 부가 정당하다면(여기서 정당하다는 의미는 혁신이나 위험부담을 통해 성취한 부), 부자들이 소유한 부가 정당하고 그 소유권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소수가 한 국가의 부를 대부분 소유한 극단적인 사회에서도 만일 그 부가 정당하다는 가정하에(물론 현실적으로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소수 부자가 소유한 부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잘 사는 사람들은 적당히 잘 끌어내릴까'에 관해서는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정책은 잘 사는 사람들이 소유한 재산이 정당한 재산인지, 부정당한 재산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자칫 정당한 재산에 대해서 소유권을 과도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자들이 형성한 부가 정당하지 못하다면, 어느 정도의 교정작업을 통해 부정한 부에 대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유층이 더 좋은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며 사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고 막아서도 안 됩니다. 다만 소득 격차에도 불구하고 다른 계층과의 연대를 허용하는, 함께 누리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대기업 임원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야구를 관람하러 온다고 하면, 임원은 더 비싼 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오겠지요. 그럼에도 경기장 객석에 나란히 앉아 팀의 홈런에 환호를 지르며 부둥켜안고, 맥주를 시키기 위해 똑같이 줄을 서고, 갑자기 내리는 비에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이 젖는(샌델이 What Money Can't Buy에서 든 예를 변형했습니다), 그런 공통의 생활 기반이 무너진 때, 부유층과 빈곤층은 어떠한 이해(理解든 利害든)도 공유하지 못합니다. 토론과 합의가 불가능합니다. 삶의 공간과 양식이 빈부에 따라 과도하게 분리되어 버리면요.
하라리의 Homo Deus를 읽고서는, 야구장에서 돈 많은 사람은 보송보송하고 가난한 사람은 홀딱 젖는 정도가 아니라, 더 암울한 미래가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세 귀족은 그들의 몸에는 우월한 파란 피가 흐른다고 주장했지만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진짜 생물학적인 갭이 부유층과 나머지 계층 사이에 벌어집니다. 이들은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고도의 과학 기술을 손에 쥐고, 업그레이드된 슈퍼휴먼(upgraded superhuman)이 됩니다†. 그래도 '같은 인간'이었던 기존의 불평등 수준을 넘어, '다른 종족'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배경과 관련없이 누구나 동등한 인간으로서 한 표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의미를 잃습니다. 따라서 부자가 정당하게 부를 획득한 것과는 별개로, 그 부로써 무엇이든 향유하면서 나머지 계층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 Y. N. Harari, Homo Deus, London: Vintage, 2016, pp. 405-406.
두 논문 모두 샌델의 글과 달리 한국적인 맥락에서의 능력주의를 서술하고, 능력주의의 형성 원인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조금 더 와 닿는다. 하지만 매우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논하지는 않기에, 댓글에서 많은 학우님들이 언급하셨듯이,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데?’라는 의문을 여전히 품게 되는 것 같다. 또한 능력주의가 이렇게나 만연한 사회에서 어떻게 능력주의를 없애는 게 가능할지, 애초에 그런 사회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지 약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주의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서 능력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사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며, 변화를 향한 희망을 품을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변화가 힘들어도, 그로 인한 막막함이 지금 상태를 지속해도 된다는 변명 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떠올린 예시는 덴마크 사회다. 오연호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에서는 덴마크 시민들을 인터뷰하고, 그를 통해 찾아낸 행복사회의 요건들을 서술한 책으로, 책 속에 드러난 덴마크 사회에는 능력, 직업의 귀천 등을 가지고 차별하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예시가 매우 많지만, 첫 번째로 인터뷰한 인물은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57세 남자였는데 그는 “특별한 걱정이 없고 오늘에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이야기했고 자기 아들이 “올해 22살인데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능력의 차이를 경제적, 윤리적 판단으로 처벌하지 않는 이런 행복 사회의 비밀은, 역시 공동체에 대한 신뢰였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 공동체 의식의 가치 등을 어릴 때부터 몸소 깨닫고 실천하게 하는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무엇보다 공동체란 비단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작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학교 같은 국가보다 작은 단위의 공동체라는 점이 중요했다. 즉, 개인 간의 존중, 협동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집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더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능력주의 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논의할 때 실례를 참고하고 싶다면 이 책을 들춰봐도 좋을 것 같다.
처음 논문을 읽었을 때는 공과란 공동체적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가까웠는데 이 글을 읽고 저 역시 능력주의에서 벗어나 공동체주의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직업에 따른 차별이 전혀 없고 각자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저로서는 약간 상상이 가지 않는데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이 글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라고 적어 주셨는데 뭔가 사람들이 잃어버린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되찾으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부분이 가능하다면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공동체주의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긍정적인 대답이 될 것 같네요!
요즘 읽기자료에 치여살고 있어서 읽을 시간이 날까 싶긴 하지만, 안 되면 방학 때라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은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이클 샌델도 강조했듯,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능력의 가치를 곧 사람의 가치로 연결시키고, 사장의 성공에 윤리적 보상까지 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공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권위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 논문 저자의 글 중, 공과는 ‘단일 피라미드가 아닌 여러 개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이 크게 와닿았다. 우리는 특수한 가치 각각에 주목하여, 능력주의가 만들어놓은 단일한 사다리를 잘게 쪼개야 한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그 단어가 나타내는 좋은 뜻의 허울만 남을 뿐, 사람들 개개인의 진정한 ‘능력’을 시간을 내서 봐주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 내부의 사정만 보아도, 학생들은 잠재력 평가라는 명분으로 수능 점수 하나만을 가지고 서열화되어 평가되고 있고, 공직뿐 아니라 많은 직업에 다다르기 위한 시험들이 너무나 표준화되어 있다.
우리는 또한 시장 가치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작업을 그쳐야 한다. 글에 등장한 왈저의 복합평등론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왈쩌의 복합평등론과 다원적 공동체주의>(오현철, 2004)를 참고했다. 왈저는 복합평등이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분배가 사회적 가치들이 고유한 기준에 의해 분배될 때만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 안전과 복지, 부와 상품, 직장과 직위, 천하고 힘든 노동, 자유시간, 교육, 친족관계와 사랑, 신의 은총, 인정, 정치적 권력의 총 11가지 분배영역을 설정하였다. 원래의 논문에서도 드러나듯, 왈저는 각각의 영역에서의 자원 독점은 용인하지만 한 영역의 가치가 다른 영역의 가치를 잠식하는 지배는 승인하지 않는다. 특히 경제력의 많고 적음은 의료 혜택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 등의 교육 문제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미쳐서는 안된다.
능력주의를 탈신비화하고, 공과주의로 들어선다면 우리 사회 또한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발굴할 수 있고, 이는 나아가 사회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일이다.
그러나 나중에 언급한 논문에 의하면, 왈저의 공동체주의를 한국의 상황에 끼어맞추려고 해선 안된다. 왈저가 본 미국의 경우에는 근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서 많은 억압이 저질러졌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왈저가 말하는 사회정의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도 정실주의, 건강한 자발적 결사체보다 많은 수를 차지하는 동문회 등의 1차집단이라는 과거의 인습에 다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공동체주의론이 오히려 과거의 인습을 미화하고 재생산함으로써 한국의 사회정의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다른 학우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다.
참고문헌
김미영,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론>, 경제와사회, 비판사회학회, 2009
오현철, <왈쩌의 복합평등론과 다원적 공동체주의>, 시민과세계 (6),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2004
특히, 김미영의 논문은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공동체주의와 복합평등론을 받아들여 해체하고, 능력에 대한 재정의, 공과와의 공존성 등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개인주의의 문제점을 증폭시키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며, 복지, 분배 등에 대한 논의가 갖는 사회적 의의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필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유사하지만 비교되도록, 강준만의 논문은 능력주의가 만연한 원인에 대해 고찰하고, 이에 대한 집단적 이해를 바탕으로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의 규모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준만은 346쪽에서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두 논문의 저자가 바라보는 능력주의의 문제점 해결 방안은 다르지만, 능력주의가 현실의 불평등, 빈부격차 등을 해소하는 데에 심리적 장애물 역할을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듯하다. 나 역시 이러한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현실에 팽배하다는 점을 인식하지만,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능력주의의 장점을 확대시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을 되찾아낼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더 넓은 범위의 합의와 토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의 경제정책들의 개선을 통해 김미영이 제시한 공과의 개념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의 세 가지 정책 개선을 통해서이다. 첫 번째는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이다. 현재 복지는 <공정하다는 착각>의 마이클 샌델이 말했듯이 자유주의 진영에서 주장하는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만약 기본소득 정도의 강한 복지제도는 아니더라도 현재보다 보편화된 복지 및 국가의 정책 확대가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라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사회 발전 및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 논의를 통한 공과와 유사한 도덕적 가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알래스카는 천연자원을 판매한 수입을 모든 주민들에게 배당의 개념으로 나누어주고 있다. 이는 한국이 나아가야 할 보편적 복지제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만, 전체 주민들이 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는 정부의 좋은 정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노동시장의 형태를 개선하는 것이다. 단순히 비정규직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워딩 자체에서 주는 불평등, 격차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우선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을 탄력적 노동자/비탄력적 노동자 혹은 장기적 노동자/단기적 노동자 정도로 바꾸어서 누군가는 정규 직원이고 누구는 그 정규 직원에 뽑히지 못해서 '비'정규직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어 사회 구성원들을 이분화 시키고 능력에 따라 구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화된 학문적 논의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세제도의 개혁 역시 공과와 공동체적인 사회 건설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현재 소득세만 보아도 최상위 10%가 약 80%의 세원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득세는 제도가 개정될 때마다 누진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이에 경제적 상위 계층들은 자신들이 이만큼의 돈을 내는데 특혜 또는 특권을 누려도 된다는 당연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하위 40%는 거의 세금을 부담하지 않고 있거나 오히려 역의 세금으로 지원금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제도를 개선하여 모두가 조금씩의 세금을 내어 국가에 소속되어 있고, 자신이 내는 세금이 사회를 위해 사용된다는 공동체적 가치관을 형성한다면 보다 공과 형성을 위한 논의에 한발짝 가까워질 수 있지 않나 기대한다. 뿐만 아니라, 소득세 개편을 통한 세수 확충은 첫 번째 언급한 보편적 복지를 위한 첫걸음이 되기도 할 것이다.
글을 읽으면서 능력주의 문제는 능력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한된 영역 내에서만 사용되던 능력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능력에 의한 경쟁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끼리 벌이는 경쟁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된 경쟁을 하는 느낌이다. 저번에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은 능력을 대체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였는데, 지금은 능력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을 어떻게 줄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단순히 운이 능력을 대체하여 인간을 운으로 평가하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으며, 능력주의의 바깥에 있는 사회적 가치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능력은 어떤 영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회 내에서 (능력주의의) 능력에 의한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한 영역은 어디가 있을지 궁금하다.
- 근대화를 겪으며 신분제 사회를 탈피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의 성장과 함께 4단계의 능력주의 흐름을 거쳤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예외 없이 이런 흐름을 거친 것이라면 능력주의는 그 의도는 달랐음에도 결국 귀족주의와 같이 타고난 배경의 차이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빈부의 격차를 정당화하게 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능력주의는 애초에 승자독식이 고착화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해보고 싶다.
"외부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는 오십보백보예요. 누구나 다 있을 만큼은 있으니까요. 게다가 유치하게 명품 가방 수나 자랑할 수는 없잖아요.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었네, 주식이 터졌네 하고 떠들어도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조금씩은 허풍이 섞인 거겠죠. 그런데 도저히 속일 수 없는 한 가지가 아이의 성적이에요."
이와 같이, 주거 지역, 소득, 사회경제적 지위가 이미 능력주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때, 서로 간 우월성의 격차를 벌이는 수단이 성적과 대학인 현 상황에서, 대학은 학문을 익히는 고등교육기관이라는 단일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학업을 하는 곳이라 해도 외부에서 혹은 내부에서조차 '내가 어떤 노력으로 이 자리에 왔고, 그렇기에 나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인정하는 순간, 다수가 공교육을 등지는 한이 있어도 상위의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교육을 긍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상당 수의 학교에서 정규 교육과정에서 지정한 교과서가 고등학교 3학년 혹은 그 이전 학년에 이미 짜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국가가 교육 시스템 자체를 온전히 통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수능특강, 외부 고난이도 문제집, 교사가 제작한 프린트 등으로 수능 성적을 높이고, 수행평가 요소 대신 대입 면접과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기 위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학이 시그널을 판매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사회문화적으로 기대된다면, 사회 전체를 바꾸기에 앞서 대학에서 입시 혹은 취업 매개 기관이 아닌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를 다양한 주체 간 논의를 통해 합의한 바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주의의 비판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두 편의 읽기 자료에서 드러난 아이러니한 점은 현대 사회의 인간은 집단 혹은 공동체로의 소속을 욕구하면서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김미영이 주장한 바처럼, ‘공동체’, ‘공과’, ‘공동선’이 능력주의의 유의미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공적 집합체의 성원이 되어 공동체의 목표와 성과를 공유하기를 진정 원하는지, 현대 사회가 과연 ‘공동체’가 중시될 수 있는 맥락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강준만은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심리적 기제 중 하나로 사회 정체성 이론을 제시한다. 특정 집단에의 소속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은 개인이 그만큼 집단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월한 조직에 속하기를 바라고, 그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능력주의를 떠받치는 기제 중 하나이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소속되게 된 집단에 대해 집착을 갖게 된다는 노력 정당화 효과 또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하나의 기제가 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사람들이 소속된 집단에 상당한 애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타인과 동일한 집단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은 그와 동시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차이라도 가진 ‘개인’이기를 바란다. 우월한 집단에 속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코 그 집단과 집단의 성원들에 대해 애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집단을 통해 만든 자신, 개인의 정체성으로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자신의 인정을 위해 이용한다.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개인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이상적인 공동체는 잊힌 지 오래이다.
공동체가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는 능력주의를 매개로 더욱 강화되었다. 김미영이 주장하듯, 능력주의는 사회를 개인들의 생사 투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잠재력’과 ‘유연성’을 갖도록 강요된 개인에게 조직이자 공동체는 그저 일시적으로 속했다가 해체되는 잠시의 거처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공동체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공과 개념을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든다. 물론, 개인으로 흩어져 각자도생하게 되어 능력주의의 폐해가 드러난 시점에서, 공동체를 재차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인정해주는 수단이 되어버린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음으로써 능력주의의 폐해가 차차 극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실효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강준만이 주장한 바와 같이, 능력주의 특혜의 수준을 줄여나가고, 현실성있는 공동체주의를 적극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현실에 맞는 대안으로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공동체주의를 현실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학우들과 이야기해보고 싶다.
혜송님이 말씀하신 현실성 있는 공동체주의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까요. 저는 우선 공동체주의라는 목표로 나아가기에 앞서 김미영 저자가 언급한 '공과'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과정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라는 단어를 여러 특수한 가치가 포함된 '공과'의 개념으로 바꾸고, 하나의 단일한 피라미드가 아닌 여러 개의 작은 피라미드로 쪼개고 나면 하나의 기준에 의해 공동체들이 서열화되는 관습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지 않을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치의 부재 상황을 절실히 공감하더라도, 여전히 무엇이 올바른 가치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의 재화와 position은 한정적이고, 그렇다면 승자와 패자는 언어적 논리상으로도 이분법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패자에게 근거없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기 위한 시도는 필요하다. 어떤 사회적 이상도 개인에게 인격적 모독을 감내하라고 요구하는 정당성을 부여받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논문의 시도에서 보았듯,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당장의 현실적 해결책을 자구할 순 없어도 공동체적 문제로 이끌어내는 끊임없는 시도인 것 같다. 생산과 성장의 논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향하는 가치에 대해 물론 '모호하다'고 느낄 순 있지만, 우리가 사회적 안전 장치 등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한, 추상적인 가치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공과원칙에서 저자는 일종의 '정'을 챙기는 행위를 사회를 결합시켰던 행동 원칙이라고 말한다. 강자가 아닌 약자 집단에서 연대는 필수적이며 개인으로 해체하는 능력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막지만, 공과는 사회적 연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약자의 철학으로만 작용할 수 있는가. 약자와 강자를 구별짓고, 약자의 철학이라며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부분은 모순이 있다. 공과를 추구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공동선이 얻어진다고 했으니 강자이든, 약자이든 모두가 연대하여 공공선을 추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 속에서 정실주의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요구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회를 결합했던 행동 원칙을 사랑이자 '정'으로 파악한 맥락에서 등장한 표현인 것 같은데, 다수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의 충돌이 발생하여 집단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 공과가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떠한 이유로 정실주의가 허용되거나 도덕적으로 요구되기도 한다고 작성되었는지, 자세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직 공과가 제대로 이식되지 못하여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근본적인 의문은 능력주의 사조 속에서 공과를 어떻게 사람들의 의식에 이식할 것인가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이나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와 마찬가지로 의식적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했을 뿐이고, 저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공과에 대해 설명하지만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또한 글을 읽으며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었다.
259쪽에서 '능력의 영역을 제한함으로써 능력주의를 깨뜨리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는 인맥, 운, 상황, 환경 등 너무 많은 것을 능력으로 치환해왔다. 강준만 저자의 논문에서도 능력주의를 단계별로 구분했는데, 4단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능력이란 무엇인지 규명하여 능력의 영역은 지금보다 제한될 필요가 있다.
먼저, 보편화된 복지 및 국가의 정책 확대가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나라라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고 사회 발전 및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 논의를 통한 공과와 유사한 도덕적 가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워딩 자체에서 주는 불평등, 격차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는 점을 개선하여 능력에 따라 구별되는 노동시장이 아니라 각자의 강점, 각자의 선호를 대변할 수 있는 복합평등적 시장을 구축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너무 누진적인 조세제도를 조금이나마 개혁한다면 상,하위 계층의 화합과 공과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기대합니다.
혹시 이런 경제정책들의 개선이 저와 지수님께서 가지고 있었던 다수가 인지하는 문제이지만 해결하기 어려워보이는 능력주의의 부작용과 공과 의식의 이식을 가져다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귀족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의, 즉 계층구분을 없애고 모두에게 사다리에 오를 기회를 제공해 주는 (샌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능력주의
2. 교육과 시험평가를 통해 사람들의 능력을 '정량적 수치'로 나누어 자원을 분배하는 능력주의
3. 부모의 계급수준에 자녀의 교육이 큰 영향을 받아 생겨나게된, '두번째 능력주의'의 폐해로 인한 능력주의
4. 승자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계층 구분을 승자와 패자 중심으로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그는 1,2단계의 능력주의를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추구하나, '사적인' 영역에서는 3,4단계의 능력주의도 용인(사실상 체념)한다고 보았다. 또한, 본 논문에서 쓰는 능력주의 개념 역시도 3,4단계의 것이라고 본문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입장에서는 1,2단계의 능력주의는 샌델이 강조한 공동선을 추구할 하나의 수단이 될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면모를 지닌 것으로 3,4 단계는 1,2 단계의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폐단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문제로 대두된 것이지 않나 싶다. 샌델의 경우 강준만과 달리 1,2 단계의 평등을 추구하는 능력주의가 결과적으로는 계급세습을 가져오고,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좌절을 불러오기에 단계에 관계없이 모든 능력주의는 부정적이라는 의견을 펼쳤다면, 강준만은 능력주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태도를 지닌 듯하다.
개인적으로 지난주 샌델의 글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의문점이 그가 지적하는 능력주의의 폐단이 과연 능력주의 자체에서 나온 것이 맞을까?였기에 강준만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는 것 같다. 많은 학우님들이 언급해주셨듯 과연 모두가 능력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대우받을 ( 사실 어떤 사회가 이러한 서술에 걸맞을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되지는 않지만)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의 공급이 한정적이고 수요는 넘쳐난다면 경쟁은 불가피하고, 경쟁 속에서 이길 수 있는 일종의 스킬을 지닌 자가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면, '운 있는 자', 나 '힘있는 자' 등의 특정 기준이 생기기 마련일텐데, 그 기준이 결국 제 2의 능력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 예를 들어, 운 있는 자가 경쟁에서 이기도록 사회를 구성한다면, '행운'주의의 문제점..이라며 또 누군가가 비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준만의 글은 경쟁 기반의 ㅇㅇ주의를 우리 사회에서 타파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1-2단계의 능력주의는 그리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기에, 폐단이라도 줄여보자. 그럼 그 폐단을 사람들이 용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심리적 원인을 찾아낸다면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를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가 분석한 능력주의의 폐단을 정당화하는 다섯가지 심리적 기제의 공통점은 배타적, 집단 우월주의이다. 아마 이는 한국형 능력주의의 폐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일 것 같기도 하다. 학연, 지연등의 문제들이 결국 해당 집단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한 능력주의는 공동체를 분열시킬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사람들이 집단 우월의식을 지니지 못하도록 환경을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어떻게 특권과 특혜를 줄여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학연, 지연에서 온 특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능력있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특권 역시도 약화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그들이 쟁취한 것을 왜 빼앗아가려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성공을 '쟁취'한 것이 아닌 운 좋게 '수혜'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인식적 교육과 더불어 집단 사이의 실질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동반된다면 능력주의의 폐단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저 유토피아에 불과해보이는, 샌델이 말한 공동선을 추구할 공동체 의식 함양을 목표로 한 인식 변화가 가능해지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위에서 예시로 언급한 행운주의를 비롯한 무수한 ㅇㅇ주의들이 능력주의와 비슷하게 특정 집단을 우대하여 폐단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생각해보면 어쩌면 행운주의의 경우 샌델처럼 평등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할수도 있을 것 같다. 이에 대한 학우분들의 의견도 궁금하다.
지난 번에 이어 개인적 감상을 늘어놓다보니 비슷한 말이 반복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결론을 짓자면, 샌델의 글보다는 더 공감이 되는 글이었던 것 같아요:)
서원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 행운주의, 즉 '운이 작용하는 사람 뽑기'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한 번 말해보고 싶어서 의견 남깁니다. 원래는 샌델의 책을 읽을 때 이 제안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었던 이유가 운에 의한 패배라고 능력에 의한 패배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사람들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강준만의 논문을 읽고는 그러한 생각이 바뀌지 않은 동시에, 사람들이 사회심리적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이상 행운주의는 오히려 자본에 잠식당하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비관적 생각마저 떠오르네요. 만약 행운이 미친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한다고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몇 번이고 시도한다면.. 운이 나빠 떨어진 자들 중 다시 시도에 투입할 시간적 여유같은 비용을 들일 수 없는 자들은(운에 의한 불투명성 때문에 뽑히기 위해 필요한 어느 정도의 노력마저 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노력하면 된다는 환상 속에선 그래도 시도할 용기가 나는데 그러한 환상이 불투명해지면..) 기회조차 빼앗기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게임에서 '가챠', '확률형 아이템' 등의 시스템이 단순히 많은 자본을 투입하여 많이 시도한, 그래서 당연하게도 상대적으로 결과를 보장받을 수밖에 없는 일명 '과금러'에 의해 굴러가는 것처럼요. 물론 가상 현실 상황이며, 게임 회사에 의한 자본 논리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동일하진 않아도, 사회에서도 조금은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렇다면 또 드는 생각이, ‘과연 서로 다른 공동체들간의 화합이 꼭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이 논문에서도 ‘강자는 보편성을 추구하고 공동체주의는 약자의 철학이다’라고 언급하며 사회가 하나의 큰 피라미드화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다. 종교를 예로 들면, 성경 구절의 해석 등이나 교리가 다른 수많은 분파들이 있지만,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서로의 판단이나 교리에 대한 분쟁 없이 다름을 인정하며 잘 운영되어가고 있다.(최소한 양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사회도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들만 공유한 채 공동체간의 불평등이나 가치 다름은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사람들이 전체적인 사회 불평등보다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서 더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논문은 작은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 크게 보면 탈세계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공동체가 세계화와 능력주의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벽이 될지, 아니면 그저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될지는 고민해볼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저는 '공과라는 개념이 하나의 공동체에 적용되었을 때'의 한 가지 경우만 생각했었는데, 용수님의 글을 읽고 공동체들 간에는 공과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 간에도 공과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과는 단일한 기준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 내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가 다르더라도 분명 교집합을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할 것입니다.
또한 용수님이 제시하신 '공동체들 간의 화합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은 '화합'의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공동체를 잘 운영해나가는 것도 화합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름을 인정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와 배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합은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과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째는 능력주의를 네 단계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1단계는 귀족주의의 반대개념으로서의 능력주의이고, 2단계는 교육과 시험 평가에 의한 능력주의, 3단계는 ‘교육세습’의 영향을 받는 능력주의, 4단계는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이다. 샌델 또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역사를 다룬 바있지만, 샌델은 변질된 3, 4단계의 능력주의뿐만 아니라, 어떤 단계이든 간에 ‘능력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글에서는 (샌델처럼 ‘능력주의’ 자체가 공정할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현대사회의 3, 4단계의 능력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그 기반이 되는 심리적 기제를 분석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어떻게 하면 능력을 보다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는 현대사회에 “애초에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야”라는 대범하고 다소 파격적일 수 있는 답을 던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메시지에 동의하지만, 가치관에 따라서는 샌델의 주장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불편함을 느꼈던 독자들 중 일부는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를 읽은 후에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저자의 생각 자체는 샌델과 비슷할지 몰라도) 글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적 기제를 분석하고 있기에 1, 2단계의 능력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능력주의를 여러 단계로 세분화하여 개념화함으로써 능력주의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적으론 어떤 자세를 취하건, 사적으론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344)라는 지적이다. 이 부분을 읽고 많은 학우분들이 ‘뼈를 맞은’ 기분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더 나은 학벌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며 앞으로도 능력주의 경쟁 속에서 기득권에 속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를 우리와 같은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능력주의가 공고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의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폭정’을 의식하고, 어느 정도 견제하려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 특히 우리가 능력주의 사회에서 혜택을 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고등학생 때는 입시 제도의 부당함, 학벌주의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많이 고민했지만,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로는 그러한 고민들에서부터 상대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누구라도 구조에서 높은 자리를 선점한 뒤에는 구조의 부당함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저 ‘변화는 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적인 변화, 논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능력주의에 따른 특권과 특혜의 규모와 수준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필수적일 것이다.
저도 교육현장 속에서 능력주의적 인식이 뿌리깊게 박힌다는 것에 공감하며,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점은 교육의 문제가 교육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육 현장 속의 미시적인 노력이 모여서 능력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능력주의 사회가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인지하고 공적으로는 고쳐 나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사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학벌만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벌을 보지 않고 블라인드로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지만, 진짜로 블라인드로 진행되는지, 블라인드로 진행되어도 이게 과연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1,2 단계가 이상적인 능력주의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1,2단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논문에서는 특히 학력, 학벌주의로 왜곡된 능력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수능 점수처럼 말이다. 그리고 능력의 유연성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력의 유연성을 어떻게 갖춰야할지 의문이다. 우선 수능의 기반한 교육제도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학생의 성취를 수치화 하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특징 살려 다방면으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환경을 만들려면 추상적인 말만 내밷는 것이 아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정부, 대학, 기업 등 다양한 기관이 파격적인 제도적 변화를 가져 와야 사라들의 인식도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문단의 '능력의 유연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또한 가장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말 바뀌기 힘든 부분인것 같습니다. 수능 기반 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능의 새로운 버전인 논술, 수시(학교 시험 성적 위주)가 그 자리를 매꿀 뿐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전 이 교육제도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논문의 저자 또한 '교육과 시험 평가에 의한 능력주의'는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능력의 유연성을 갖추는 과정에서 '교육'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닌 '교육세습'을 막는 방법을 논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능력주의를 그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합리성’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지금보다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원하며, 이것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경제력’이다. 물론 돈과 행복이 100%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는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업의 입장을 보면 기본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조직이며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의 원칙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을 때 더 많은 결과물을 내는 직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만나서 자연스럽게 능력주의가 발생하게 된다고 본다. 기업은 더 뛰어난 사람을 원하고 개인은 더 풍족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일자리는 한정되어있고 자연스레 ‘능력’에 대한 경쟁이 발생한다. 지난 수업 시간에 강사님께서 얘기하신 바와 같이 능력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대학 입학 추첨제’의 도입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기업의 입장에서 대학이라는 것이 개인의 능력을 입증하는 역할을 잃게 된다면 입사 시험이든 다른 어떤 방식을 도입하여 결과적으로 경쟁을 동일하게 발생할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대학이냐 다른 것이냐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이윤창출’ ‘한정된 재화’ ‘개인의 욕망’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결국 능력주의를 필요로 하게 된다.
기업의 목표가 이윤창출임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는데, 최근의 흐름을 보자면 단순 정량적 지표들뿐 아니라 정성적인 요인들도 고려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뜻하는 ESG와 관련하여 납품업체등 글로벌 가치 사슬에 엮여있는 여러 기업들이 서로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상황을 예시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지속적일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겠으나, 단순히 과거의 ‘최소 비용, 최대 효과’에 얽매여 모든 판단을 내린다면 다변화하는 국제사회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행위들에 진심이 담긴 것인지, 단순 이윤창출을 위한 요구의 순응인지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지만 말이죠.
그간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불쾌감이 느껴지던 사회현상들의(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갈등이나, 대학 서열화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기저에 능력주의가 있음을 깨닫고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무엇보다도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되겠다. 능력주의가 계층 간 이동을 돕고 불평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철 지난 주장일 따름이다. 비단 한국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라에서 능력주의가 불평등 해소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표들이 쏟아져 나온다. 문제의 요는 능력주의를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기에는, 이미 출발선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더 고도화되고 효율화됨에 따라 문제 해결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점점 좁아지는 취업의 문을 넘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간 생각해 본 것들을 써 보고자 한다.
그 전에 우선 평등한 사회를 선호하는 입장임을 밝힌다.
진정으로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 능력주의 사회 하에서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지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문제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패자가 된 개인의 에너지가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해결 방향으로 우선 첫째, 사회적 혼합이 더 활발히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내집단 의식이 강한 채 원자화된 사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특정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진다. 고립된 개인이 모일 때 반사회적인 공동체가 된다. 둘째, 복지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들이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해결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셋째, 마지막으로 다양한 선택이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업 성적’이라는 단일 기준에 따라 평가받고 차별적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강준만이 논문에서 지적했듯, 개인에겐 제각기 다른 특성이 있다. 특히 학교 현장에서 성적에 따라 학생을 평가하는 것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인식이 무의식 중에 학습되고, 어른이 되었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게 되는 것 같다.
형식적인 평등을 넘어서, 각자의 삶이 존중되고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사회 성원들의 삶이 '동등하게' 인정받는 사회가 올 수 있을지, 또 그런 사회를 공동체 성원들이 원할 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강준만의 글에서 읽었듯,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차이라도 있기를 바라며, 그러한 차이를 인정받고자 하는 심리적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도 구성원들이 사소한 차이가 있기를 바라는 성향이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당장 저조차도 그렇고요.
하지만 그게 '우열적 차이'라거나, '서열적 차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개성'이라고 존중받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차이 정도입니다.
철수가 A를 선택했고, 영희가 B를 선택했을 때, A가 더 많은 학업적 성취를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철수가 영희를 무시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은 철수 스스로도 자신의 세계를 굉장히 좁혀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랑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문화적 배경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많이 가지길 바랍니다!
단순히 타인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본인 스스로도 얻는 게 많은 일입니다. (경험상)
같이 고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있죠.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뿐 아니라 인생의 성패까지 좌우한다고 믿고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나 사회 풍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능력주의 못지않게 외모지상주의도 만연해있는 것 같습니다. 외모가 연애, 결혼, 취업, 승진 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다들 암암리에 인지하고 있고, 그렇기에 다이어트 열풍, 성형 열풍이 뒤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외모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우열을 가리는 것도 분명히 문제이거니와, ‘예쁜 사람’, ‘잘생긴 사람’을 예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못생긴 사람’, ‘뚱뚱한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 차별하는 것 또한 능력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중 매체에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의 기준에 획일화되게 우리를 맞춰 끼워넣고 줄 세우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앞서 언급했던 논문에서 나오는 구절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적으론 능력주의를 비판하지만, 사적으론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어쩌면 외모지상주의에도 상당 부분 적용된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남들을 외모로 감히 평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남들은 나를 평가할 것이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에요.
논문을 읽으면서 외모지상주의도 어쩌면 학력학벌주의, 능력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이모저모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 탓인가 싶다가도, 근데 그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이 현 능력주의의 폐해를 보완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다른 학우님들의 생각도 궁금하네요.
* 외모지상주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처음의 능력주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능력주의 사회는 사람이 우연적으로 타고난 배경과 집안, 사회적 지위 등이 향후 자신의 능력을 크게 결정한다는 점에서 외모 역시 능력주의 사회의 중요 변수 중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모를 바탕으로 우열을 나누는 문제에서도 똑같이 정말 자신의 힘으로 쟁취했다고 보기 어려운 '외모'라는 요인을 가지고 자만해도 되는가, 타인을 무시해도 되는가 이런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연적으로 타고난 요인 역시도 결국 자신의 스펙과 능력에 해당한다고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외모지상주의든 학벌주의든 이런 담론들이 실제 세상에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필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능력은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수능' 등 학업성취도평가에 의해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학벌주의에 대한 오만이 이와 같은 인지를 통해 일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은 없다. 각자의 특장점은 '학업성취도'라는 단일기준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어떤 사람은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어떤 사람은 타인을 끌어들이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고, 이는 학업과는 무관하면서 매우 소중한, 가치있는 능력들이다. 모든 사람들은 학업성취가 어쨌든 간에, 객관적으로 측정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능력주의의 병폐는 일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김미영의 논문에서는 3,4단계의 능력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의식과, 공존성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롤스가 주장했던 '운'을 공동적인 성격을 갖는 '공과'로 치환하여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현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필자는 이해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소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얼마만큼의 범위에 대해서 사람들은 '나의 공동체'라고 인지할 수 있으며, 나의 '공과'로 창출해낸 부가가치를 기꺼이 나눌 수 있겠는가? 한국의 능력주의는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일종의 공동체가 대물림되며 만들어지고 있다. "공동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반박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능력주의의 틀 안에서 나가길 거부하는 것은, 위계질서 상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것 아닌가?
공동체라는 존재가 정말 3,4단계의 왜곡된 능력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단체인지에 대해서 학우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다.
제가 글에서 공동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현상을 지적한 것을 읽어보신 것 같아 댓글 남깁니다. 학우님은 공동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오히려 능력주의가 강화된다는 지적을 하셨다고 저는 이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월한 집단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 성원이 되어 집단의 목표와 성과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 즉 공동체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조직의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공동체 자체가 목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월한 집단에 속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자신이 우월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동체주의적' 성향이 아닌,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현실의 공동체들의 여러 단면들을 보며,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능력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되는 지에 대해 이번 읽기자료를 읽으며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강조되고 있어 오히려 능력주의가 만들어지고 강화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학연, 지연 등으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물림하기 위해 소속집단을 이용하는 것은 논의되고 있는 '공동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문은 '공동체란 무엇인가?(범위의 문제라고 봅니다)', '공동체에 이 문제의 해결책을 기대했을 때에 정말 우리가 바라고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주의'가 형성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익의 대물림을 위해 소속집단을 이용하는 것은 위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공동체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학우분의 지적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에 논문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치는 ‘공과’이다. ‘공과’를 의식함으로써 자기 행위의 공동성을 알고 공통의 목표와 가치에 의거해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주의와 공과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일까. 전 계층을 아우르는 공동성을 인식하는 ‘공과’가 아닌 결국은 개인이 인식 가능한 범위 내의 ‘공과’를 인식하는 데 그칠 것 같다는 의문이 든다. 또한, 타인의 존재성과 공동성을 인정하는 ‘공과’가 피라미드를 공고히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수단과 전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공동성을 지향하는 듯한 모습의 이면에는 오히려 사회의 안정화로 인해 유지될 수 있는 계층성에 대한 바램이 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결국 ‘공과’는 성공을 달성한 사람들만을 고려한 일방향적인 가치라는 데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실패했다는 시선을 받는 사람들이 공동체주의에 기여하는 데에 필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또한 논문에선 능력주의의 심리적 기제로 ‘인정투쟁’, ‘사회정체성이론’, ‘시장선호이론’, ‘노력정당화효과’, ‘내성착각’을 집중적으로 논하였습니다. 각 기제에서 예시로 든 것들 중에선 공감할만한 예시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땐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 과잠 관련 예시, 서울대 대나무숲 예시 등 상위권 대학의 예시들은 적지 않게 왜곡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 주제와는 별개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익명에 힘입은 사이버 이목 욕구가 빈번하게 조회수를 목적으로 한 자극적 내용 허구 제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시장선호이론’과 ‘내성착각’이 심각하다고 단순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시가 사실이 아닐지라도 많은 학생들은 이 예시의 소위 말하는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상위권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으며, 상위권 대학의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은 실제 데이터가 말해주듯 상당히 높습니다**. 과연 데이터가 심리적 기제에서 나온 것인지 아님 진짜 ‘교육과 시험 평가’에 의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적으로 심리적 기제가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수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육부와 통계청이 공동으로 실시한 ‘2019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2018년도보다 2019년 학생 수는 13만 1000명이 줄었지만 사교육비는 총합 19.5조에서 21조로 상승하였다. 이는 학생 1인당 지불하는 사교육비가 증가한 것임을 보여준다.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특권 대물림 교육실태 연속보도>, https://noworry.kr/policyarchive/?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3853795&t=board&category=1338IU073W
: 여기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의 상당 부분은 SKY 출신임을 볼 수 있다. 국회와 정부가 ‘학벌주의’를 없애는 제도 마련을 촉구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현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