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 소주제 2] 『공간이 만든 공간』
- 내용: 지정 도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
- 분량: 300자 -500자 권장 (500자 이상 가능)
- 동료 학생 글 1개에 대해 댓글을 달아주세요.
문보설2021-04-07 14:00
공학의 미래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후반부의 컴퓨터 기술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부분이었다. 난수 생성에 기반한 건축이나, 디자이너의 성향을 인공지능에 이식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지만, 정말 흥미로웠던 부분은 디자인 도구의 변화로 인한 다양성의 소멸이였다. 건축 및 패션 분야에서 서로 유사한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함에 따라 그 경계가 희미해지고,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다. 언어권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 컴퓨터 언어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러한 현상을 해결해야 할 것으로 둔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들었다. 유현준 교수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건축계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중력’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선 중력에 기대를 거는 것은 문제의식을 제기한 그 맥락을 벗어나 있다. 건축의 변하지 않는 제약사항으로 중력을 꼽는 사고방식 그 자체가 건축 소프트웨어, 즉 가상 공간의 시뮬레이션에 몰두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중력과의 투쟁에 기대를 거는 것은 현재 문제의식의 맥락에서 적절한 해결책이 아닐 뿐더러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건축이 중력을 극복하려는 쪽으로 갈수록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패션이나 다른 영역과의 구분은 모호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구를 다양화하는, 기술적 문제에 기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서 ‘이런 현상을 해결해야 할 것으로’가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해결의 필요성도 와닿지 않는다. 건축물을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 건축 디자인에도 유행이 있는 것이고 패션 디자인과 유사한 지점은 그것이 결국 디자인의 유행이라는 큰 시류 속에 포괄되기 때문인 것으로, 별로 이것이 해결의 대상이나 문제의식을 느껴야 하는 부분이라고는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계속해서 오프라인 공간의 필요성과 그 근거로 짝짓기 욕구를 역설한다. 나 또한 인간이 오프라인 만남을 지속할 이유가 본능에 있고, 그 본능의 근원이 번식욕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렇게 보자면 사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의 코딩에 기원하고, 그것은 최대한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쪽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욕구를 번식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원초적 레벨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가 오프라인 만남을 지속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어떤 연결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걸 분석하면 생존욕 및 번식욕 레벨로 내려가겠지만 그렇게까지 우리의 성향을 단순화시켜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이런 분석이 저자가 말한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데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목적은 변하지 않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미래를 예측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생각해 봤을 때 인간을 단지 번식욕으로 행동하는, 1차원적인 모델로 분석한다면 그 미래를 얼마나 입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짝짓기를 위해 코로나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는 다소 유치한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런 결론을 위해서였다면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화두를 던질 필요도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의 번식욕을 짚어 낸 것은, 그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 책을 읽으며 계속 뭔가 저자가 과하게 사실을 평면화시키고 이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이 지점에서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일부 사실인 것을 과하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화끈하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물론 이런 식의 글쓰기가 강연에서 언급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용할 거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저자는 계속해서 오프라인 공간의 필요성과 그 근거로 짝짓기 욕구를 역설한다. 나 또한 인간이 오프라인 만남을 지속할 이유가 본능에 있고, 그 본능의 근원이 번식욕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렇게 보자면 사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의 코딩에 기원하고, 그것은 최대한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쪽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욕구를 번식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원초적 레벨을 언급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가 오프라인 만남을 지속하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어떤 연결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걸 분석하면 생존욕 및 번식욕 레벨로 내려가겠지만 그렇게까지 우리의 성향을 단순화시켜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이런 분석이 저자가 말한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데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목적은 변하지 않는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미래를 예측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생각해 봤을 때 인간을 단지 번식욕으로 행동하는, 1차원적인 모델로 분석한다면 그 미래를 얼마나 입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짝짓기를 위해 코로나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는 다소 유치한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런 결론을 위해서였다면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화두를 던질 필요도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간의 번식욕을 짚어 낸 것은, 그 판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 책을 읽으며 계속 뭔가 저자가 과하게 사실을 평면화시키고 이분화하는 경향이 있는 듯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이 지점에서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나 싶다.(일부 사실인 것을 과하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화끈하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물론 이런 식의 글쓰기가 강연에서 언급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용할 거라고 생각한다. )
채수형2021-04-07 21:48
안녕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 또한 오프라인 공간의 필요성에 관한 부분이 인상 깊어서 댓글 답니다! 저 역시 번식욕으로 인해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오프라인 공간을 향유하고자 하고 원해한다는 점에서는 약간 부정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저는 저번 서평문에서 제시했듯이, 한 2주동안 밖에 나가지 않자 말그대로 단순히 "아 산책하고 싶다.", "아 친구들 만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지 번식욕(?)을 이유로 오프라인 공간을 갈구하지는 않았었던 점으로도 충분히 유현준 교수님의 생각을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공간 자체가 인류에게 정말 필요하기에, 대도시의 해체라는 결과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유현준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화두 자체는 우리 인간들이 오프라인 공간을 정말 필요로 하고 있고,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의 적절한 융합이 필요하다는 점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에, 우리 사회는 그 적절한 융합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점을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씀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저 또한 오프라인 공간의 필요성에 관한 부분이 인상 깊어서 댓글 답니다! 저 역시 번식욕으로 인해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오프라인 공간을 향유하고자 하고 원해한다는 점에서는 약간 부정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저는 저번 서평문에서 제시했듯이, 한 2주동안 밖에 나가지 않자 말그대로 단순히 "아 산책하고 싶다.", "아 친구들 만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지 번식욕(?)을 이유로 오프라인 공간을 갈구하지는 않았었던 점으로도 충분히 유현준 교수님의 생각을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공간 자체가 인류에게 정말 필요하기에, 대도시의 해체라는 결과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유현준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화두 자체는 우리 인간들이 오프라인 공간을 정말 필요로 하고 있고,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의 적절한 융합이 필요하다는 점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에, 우리 사회는 그 적절한 융합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점을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씀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엘리엇2021-04-08 13:14
문보설 학우님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지속적으로 지난 책에서부터 짝짓기 욕구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서술을 저자가 너무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더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건축에 대한 이용자의 다양한 해석과 획일화 되지 않은 건축 디자인을 강조하면서도, 계속 하나의 틀(본능)로 인간을 정형화하여 설명하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변하지 않는 것에 주목한다는 아이디어에는 동의하지만, 오프라인 짝짓기 욕구가 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함에 있어 사랑에 대한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문지수2021-04-07 15:40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동양의 건축 양식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책에서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부분을 읽고, 그제서야 동양의 건축물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책에 나오는 기와집, 소쇄원 등 한국의 건축물들을 자세히 보며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단청을 찍은 사진과, 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단청은 채도가 높은 색들로 알록달록했고, 나의 기준으로 그 색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고 보기 어려웠다. 건축물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의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했다는 이유는 참 아름답다. 자연과의 관계를 고려했던 옛 건축은 그저 나에게 관찰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고 때문에 건축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마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한다.
책에서 말했던 것 처럼 동양의 건축은 기둥이 중심이 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것을, 공동체가 강조되어 나와 우리의 경계가 모호한 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흔히 '홈 파티'라고 부르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것은 흥미롭다. 실내외 관계가 모호하면 오히려 실내에 드나드는 문화가 더 형성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듯 우리는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놀이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드라마를 보면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서양 건축이 실내를 강조했기에 실내를 보여주려 홈파티 문화가 형성된 것일까
요즘 흔히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카페, 공간에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다. 379쪽에서는 '이를 공간을 소유하는 대신 소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가상공간 안에 있는 내 SNS 공간 뿐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디지털 벽돌'이 된다.'라고 말한다. '내집마련'이 어려워지고, 나만의 물리적인 공간을 소유하기 어려워졌기에 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만의 온라인 공간인 SNS에 집중하고, 나의 공간을 가꾸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고령층의 어른분들이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책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기에 더더욱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공원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 쓰인 책이라 코로나19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잘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유례없는 빠른 속도의 변화에 코로나까지, 미래의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책에 나오는 기와집, 소쇄원 등 한국의 건축물들을 자세히 보며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단청을 찍은 사진과, 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단청은 채도가 높은 색들로 알록달록했고, 나의 기준으로 그 색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고 보기 어려웠다. 건축물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의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했다는 이유는 참 아름답다. 자연과의 관계를 고려했던 옛 건축은 그저 나에게 관찰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고 때문에 건축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음미하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마루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한다.
책에서 말했던 것 처럼 동양의 건축은 기둥이 중심이 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것을, 공동체가 강조되어 나와 우리의 경계가 모호한 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흔히 '홈 파티'라고 부르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것은 흥미롭다. 실내외 관계가 모호하면 오히려 실내에 드나드는 문화가 더 형성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다. 지금도 그렇듯 우리는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놀이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 드라마를 보면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것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서양 건축이 실내를 강조했기에 실내를 보여주려 홈파티 문화가 형성된 것일까
요즘 흔히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카페, 공간에 방문하여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이다. 379쪽에서는 '이를 공간을 소유하는 대신 소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가상공간 안에 있는 내 SNS 공간 뿐이다. 내가 찍은 사진은 '디지털 벽돌'이 된다.'라고 말한다. '내집마련'이 어려워지고, 나만의 물리적인 공간을 소유하기 어려워졌기에 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만의 온라인 공간인 SNS에 집중하고, 나의 공간을 가꾸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고령층의 어른분들이 소비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현실은 안타까울 뿐이다. 지난 책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기에 더더욱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공원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 쓰인 책이라 코로나19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잘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유례없는 빠른 속도의 변화에 코로나까지, 미래의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박건규2021-04-07 17:08
글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동양에 홈파티 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것은 애매하게 문화 융합 및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경우 어릴 적에는 아파트 반상회에 사람들이 종종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이웃집과 소소한 것은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점차 사회가 변화하고 개인주의도 예전보다는 확산되면서 (물론 한국사회는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공간을 나누는 풍습이 원래는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점차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양적인 관계와 모임이 소실되면서 결국 서구적인 모임 문화가 반영되었고, 이에 우리가 현대에 만나는 방식도 전통적인 방식의 '잔치'가 아니라 서구적인 '파티'가 된 것이 아닐지 추측해봅니다.
강혜진2021-04-07 18:44
저는 오히려 아파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동양의 건축물에 더 눈이 갔던 것 같은데, 제대로 경험해본 적은 없어 단청을 안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생각해보지 못했기에 저도 그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지만 그런 공간을 경험하는 걸 라이프아카데미 내에서 이벤트로 기획해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공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건규님의 댓글을 읽어보니 홈파티보다는 ‘잔치’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존재했던 것 같은데, 현재 건축물의 구조과 서양과 유사하게 변화하고도 홈파티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족 관계의 차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양쪽의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성인이 된 자녀가 독립을 하는 시기가 늦어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보니 많은 친구들을 부르는 형태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계셔도 상관 없고 오히려 준비를 해주시는 입장이다보니 또래 친구들을 부른 생일파티(?)를 종종 봤던 것 같아서요! 또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조금 더 넓은 공간을 쉐어하여 사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원룸 같은 경우는 홈파티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질 만큼의 공간을 갖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동서양의 특징이나 국내 주거의 특징을 잘 알지 못해 작은 예상일 뿐이지만 문화적인 차이가 꽤나 얽혀 나타난 상황일 것 같습니다. ‘집들이’ 정도면 홈파티와 비슷한 느낌으로 볼 수 있을까요?
공원의 필요와 연결하여 책에서 소개된 상황을 짚어주신 것도 생각해볼 지점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규님의 댓글을 읽어보니 홈파티보다는 ‘잔치’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존재했던 것 같은데, 현재 건축물의 구조과 서양과 유사하게 변화하고도 홈파티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가족 관계의 차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양쪽의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성인이 된 자녀가 독립을 하는 시기가 늦어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보니 많은 친구들을 부르는 형태가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계셔도 상관 없고 오히려 준비를 해주시는 입장이다보니 또래 친구들을 부른 생일파티(?)를 종종 봤던 것 같아서요! 또 한편으로는 외국에서 조금 더 넓은 공간을 쉐어하여 사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원룸 같은 경우는 홈파티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질 만큼의 공간을 갖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동서양의 특징이나 국내 주거의 특징을 잘 알지 못해 작은 예상일 뿐이지만 문화적인 차이가 꽤나 얽혀 나타난 상황일 것 같습니다. ‘집들이’ 정도면 홈파티와 비슷한 느낌으로 볼 수 있을까요?
공원의 필요와 연결하여 책에서 소개된 상황을 짚어주신 것도 생각해볼 지점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리라2021-04-07 19:20
문지수 학우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동양에서의 ‘홈 파티’ 문화에 대해 언급해주셨는데 제가 한 번도 비교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분야라 더 흥미롭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학우님께서는 ‘홈 파티’라 불리는 문화가 동양에서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바라봐주신 것 같아서 저는 반대로 동양의 ‘홈 파티’ 원형적 사례를 한 번 들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과거 동양에서는 정자와 같은 건축 공간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상류층 계급의 사람들이 어울리는 문화가 곧 동양의 ‘홈 파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실내외의 관계가 모호하기에 오히려 사방이 벽으로 막히지 않은 뚫린 공간에서 바깥과의 교류를 자유롭게 하고 천장만을 막아 풍류를 실내외 구분 없이 일종의 ‘홈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요? 서양의 경우에는 벽으로 막힌 궁전이나 저택 안에서 파티를 즐겼다면, 동양은 기둥을 두고 벽을 없앤 공간에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파티 장소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와 같은 형태를 학우님께서 제시한 ‘홈 파티’의 동양적 예시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제시해보고 싶었습니다.
박리라2021-04-07 16:08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글쓴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공간’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활 공간으로 삼았던 시대부터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과 관념이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직접 ‘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존재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온라인 공간까지 하나의 생활 영역으로 활용해 융합을 시도하는 오늘날의 새로운 도시와 건축에 대해 논한다.
글쓴이가 짚어주는 공간 변화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현실과 디지털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시간대의 모습이었다. 책에서는 사람들이 점점 온라인상에서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도시에 ‘비어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저자가 주목한 빈 공간의 탄생은 사실 기술의 발전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비어 버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고민에 앞서 현재 한국은 인구의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빈 공간의 활용부터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지 의문을 던지고 싶다. 즉, 빈 공간이 생기는 원인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현재 시점에서는 대도시의 빈 공간 활용보다는 한국 지방의 인구 감소에 따른 빈 공간의 발생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생겨날 수 있는 빈 공간은 여러 사람이 새롭게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 쉽지만, 지방의 빈 공간은 계속 소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래도 지방에서 계속 살다 보니 상대적으로 도시보다는 기술의 도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지역 인구가 적으니 계속 빈 집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최근 분양되지도 않는 아파트들이 끊임없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살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건물만 만들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즉, 인구의 정체 혹은 감소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어떻게 획일적으로 생겨나고 있는-혹은 과거부터 존재한-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 예시로 제시된 주차장이나 차선은 넓다는 특성을 가진 것과 더불어 외부를 향해 뚫려 있는 공간이기에 상대적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자주 접한 빈 아파트와 같은 공간은 좁고, 기둥이 아니라 벽으로 막혀 있는 공간인 데다가 밀집되어 있으며, 건축 기간도 짧기에 더 이상 살 사람이 없어도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아파트가 낮은 수준으로 분양되어도 시공비 이상의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계속 건축된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3D 프린터를 이용해 새롭게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미 존재하는 지방의 빈 공간부터 적절하게 용도를 변경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규제할 수 있을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글쓴이가 짚어주는 공간 변화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현실과 디지털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시간대의 모습이었다. 책에서는 사람들이 점점 온라인상에서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면서 도시에 ‘비어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저자가 주목한 빈 공간의 탄생은 사실 기술의 발전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비어 버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고민에 앞서 현재 한국은 인구의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빈 공간의 활용부터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지 의문을 던지고 싶다. 즉, 빈 공간이 생기는 원인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현재 시점에서는 대도시의 빈 공간 활용보다는 한국 지방의 인구 감소에 따른 빈 공간의 발생을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생겨날 수 있는 빈 공간은 여러 사람이 새롭게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기 쉽지만, 지방의 빈 공간은 계속 소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래도 지방에서 계속 살다 보니 상대적으로 도시보다는 기술의 도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지역 인구가 적으니 계속 빈 집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최근 분양되지도 않는 아파트들이 끊임없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살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건물만 만들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즉, 인구의 정체 혹은 감소기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어떻게 획일적으로 생겨나고 있는-혹은 과거부터 존재한-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 예시로 제시된 주차장이나 차선은 넓다는 특성을 가진 것과 더불어 외부를 향해 뚫려 있는 공간이기에 상대적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자주 접한 빈 아파트와 같은 공간은 좁고, 기둥이 아니라 벽으로 막혀 있는 공간인 데다가 밀집되어 있으며, 건축 기간도 짧기에 더 이상 살 사람이 없어도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 (아파트가 낮은 수준으로 분양되어도 시공비 이상의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계속 건축된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3D 프린터를 이용해 새롭게 공간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미 존재하는 지방의 빈 공간부터 적절하게 용도를 변경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규제할 수 있을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손지우2021-04-07 16:28
안녕하세요, 박리라님 :)
리라님의 좋은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문단에서 던지신 문제점인 '빈 공간의 발생 원인을 먼저 살피고 지방의 빈 공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저 또한 지방 출신으로 자라면서 지방 인구 감소에 따라 - 예로 드신 아파트 외에도 - 특히 초등학교 등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빈 공간의 발생을 많이 보아왔던 듯 합니다. 리라님의 말씀처럼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그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리라님의 좋은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문단에서 던지신 문제점인 '빈 공간의 발생 원인을 먼저 살피고 지방의 빈 공간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점에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저 또한 지방 출신으로 자라면서 지방 인구 감소에 따라 - 예로 드신 아파트 외에도 - 특히 초등학교 등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빈 공간의 발생을 많이 보아왔던 듯 합니다. 리라님의 말씀처럼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려는 노력과, 그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송혜민2021-04-07 22:57
안녕하세요, 리라 학우분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학우님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단, 작가가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생겨날 빈 공간에 대해서 지방의 빈 공간보다도 더 집중하여 다뤘는지에 대해서 먼저 변호해보자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인구의 증가가 지속적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혹여 인구 증가가 예상되지 않더라도, 도시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외국인 인구라도 끌어와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구는 다양성과 비례하고, 다양성은 결국 도시의 포용력, 그리고 기술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3T이론) 그러나 현재 '비어가는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과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이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공간이기에, 앞으로 빌 공간에 대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우분이 지적하신 '기존에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역시도 한국의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많은 사람들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만드는 것이 지방 도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기존의 많은 편의시설들이 수도권에 50% 이상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온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번 시간 교수님께서 주장하셨 듯이, 지방 도시들이 경쟁력으로 겨뤄야 할 도시는 뉴욕이나 런던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다른 '지방 도시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아파트를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빈 공간의 용도를 아예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슬로시티', '한옥마을'과 같은 슬로건을 가진 전주나 '해피 700'을 내세워서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광을 주도하는 평창 등, 이미 '용도'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국제적으로 홍보할지는 물론 논의해봐야 하겠지만요.
기존에 있던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학우님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일단, 작가가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생겨날 빈 공간에 대해서 지방의 빈 공간보다도 더 집중하여 다뤘는지에 대해서 먼저 변호해보자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인구의 증가가 지속적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혹여 인구 증가가 예상되지 않더라도, 도시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외국인 인구라도 끌어와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구는 다양성과 비례하고, 다양성은 결국 도시의 포용력, 그리고 기술 발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3T이론) 그러나 현재 '비어가는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과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이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공간이기에, 앞으로 빌 공간에 대해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우분이 지적하신 '기존에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역시도 한국의 중요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많은 사람들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만드는 것이 지방 도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기존의 많은 편의시설들이 수도권에 50% 이상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온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번 시간 교수님께서 주장하셨 듯이, 지방 도시들이 경쟁력으로 겨뤄야 할 도시는 뉴욕이나 런던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다른 '지방 도시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아파트를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빈 공간의 용도를 아예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슬로시티', '한옥마을'과 같은 슬로건을 가진 전주나 '해피 700'을 내세워서 자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광을 주도하는 평창 등, 이미 '용도'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국제적으로 홍보할지는 물론 논의해봐야 하겠지만요.
박건규2021-04-07 16:51
나는 어느 정도의 비약을 허용하더라도 여러 요소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해 내는 유추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동서양의 건축적 차이에 대해 4장에서 알파벳, 체스와 바둑, 공간의 어원, 회화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비교하고 이를 벌과 개미의 차이로까지도 설명하는 방식이 꽤나 재밌게 다가왔다. 다른 책에서도 이와 유사한 측면의 사고를 접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은 “서구의 알파벳이 1차원 선 위에 가지런히 놓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동아시아 글자들은 한자든 한글이든 2차원 면적을 한 칸씩 채워 갔다.”라고 말하며 동아시아인들이 도시나 건축을 계획할 때도 2차원 정사각형을 기본 단위로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1]
이런 식으로 구분된 문화 유전자를 가진 두 문명이 결국에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경향의 건축을 만들어내었다는 설명도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알던 사례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여러 가문이나 인물의 문장(紋章)에 관심을 가지며 알게 된 문장 중에 저명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문장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문장은 기본적으로 방패와 기타 부속 상징으로 구성되는데, 그의 경우 태극음양도가 그려진 흰 방패를 중심으로 한 문장을 직접 도안했다고 한다. 서양의 상징 디자인인 문장에 동양의 문양인 태극도, 보어의 물리학과 태극에 관련된 동양 사상 등이 접한 것이 상당히 이색적이었는데, 이 또한 서로 다른 두 문화 유전자 사이의 이종교배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라이트의 낙수장이 동양적 요소를 반영했음에도 서양적 공간에 가까웠던 것처럼, 닐스 보어의 문장도 결국에는 서양적인 디자인에 갇혀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딕 성당에서 물의 교회까지 건축이 변화한 것처럼 개인이나 단체를 상징하는 문양도 문장으로부터 현대적인 로고로 변모했을 텐데, 이런 변화에도 동서양 문화 유전자의 결합이 일어났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유현준 교수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초연결 시대에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34쪽)”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우리가 문화 유전자에도 두 종류만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보편’이라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을 때가 많은데, 더 다양한 문화 집단의 사례를 건축 문화의 융합에 활용한다면 더욱 다채로운 경향성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 중 일부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것이고, 포스트코로나라고 꼭 신세계가 도래한다기보다는 코로나 이전으로 복구되는 풍경도 존재할 것이다. 유현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건축은 가장 마지막에 변화하는 문화인데, 그런 면에서 코로나 시대의 변화가 건축 문화에도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상당히 궁극적인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건축은 과연 코로나 시대의 변화에 덩달아 변화할 수 있을까? 무엇이 변화하고 무엇이 불변할까?
-참고문헌
[1] 김상욱, 유지원, 『뉴턴의 아틀리에』, 206-207쪽.
이런 식으로 구분된 문화 유전자를 가진 두 문명이 결국에 서로 교차하며 새로운 경향의 건축을 만들어내었다는 설명도 인상적이었는데, 내가 알던 사례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여러 가문이나 인물의 문장(紋章)에 관심을 가지며 알게 된 문장 중에 저명한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문장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문장은 기본적으로 방패와 기타 부속 상징으로 구성되는데, 그의 경우 태극음양도가 그려진 흰 방패를 중심으로 한 문장을 직접 도안했다고 한다. 서양의 상징 디자인인 문장에 동양의 문양인 태극도, 보어의 물리학과 태극에 관련된 동양 사상 등이 접한 것이 상당히 이색적이었는데, 이 또한 서로 다른 두 문화 유전자 사이의 이종교배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라이트의 낙수장이 동양적 요소를 반영했음에도 서양적 공간에 가까웠던 것처럼, 닐스 보어의 문장도 결국에는 서양적인 디자인에 갇혀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딕 성당에서 물의 교회까지 건축이 변화한 것처럼 개인이나 단체를 상징하는 문양도 문장으로부터 현대적인 로고로 변모했을 텐데, 이런 변화에도 동서양 문화 유전자의 결합이 일어났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유현준 교수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초연결 시대에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스운 일(34쪽)”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우리가 문화 유전자에도 두 종류만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보편’이라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을 때가 많은데, 더 다양한 문화 집단의 사례를 건축 문화의 융합에 활용한다면 더욱 다채로운 경향성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 중 일부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것이고, 포스트코로나라고 꼭 신세계가 도래한다기보다는 코로나 이전으로 복구되는 풍경도 존재할 것이다. 유현준 교수의 말에 따르면 건축은 가장 마지막에 변화하는 문화인데, 그런 면에서 코로나 시대의 변화가 건축 문화에도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상당히 궁극적인 변화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건축은 과연 코로나 시대의 변화에 덩달아 변화할 수 있을까? 무엇이 변화하고 무엇이 불변할까?
-참고문헌
[1] 김상욱, 유지원, 『뉴턴의 아틀리에』, 206-207쪽.
손지우2021-04-07 16:51
이번 주제심화세미나의 홍보물을 처음 보았던 때의 기억이 난다. 메르스, 코로나 등 우리 사회를 격타한 전염병들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는 부분이었는데, 그 부분을 본 순간 '아, 전염병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고, 그렇다면 전염병 이후의 사회 변화를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저자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의 경험이 너무 강해 이후 고밀도의 대도시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이러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인간은 사회적 욕구와 본능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모이고자 할 것이며, 그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한다. 이 방법이라는 것에는 이전 다른 학우들이 댓글을 통해 많이 논의하고는 했던 '메타버스' 등 또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에도 이후 우리에게 닥쳐 올 다양한 전염병 뿐 아니라 기술의 발달 등 미래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공간 창조의 수레바퀴'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인가에 대한 학우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저자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의 경험이 너무 강해 이후 고밀도의 대도시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 또한 이러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인간은 사회적 욕구와 본능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모이고자 할 것이며, 그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한다. 이 방법이라는 것에는 이전 다른 학우들이 댓글을 통해 많이 논의하고는 했던 '메타버스' 등 또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에도 이후 우리에게 닥쳐 올 다양한 전염병 뿐 아니라 기술의 발달 등 미래 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공간 창조의 수레바퀴'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인가에 대한 학우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양승훈2021-04-07 18:54
안녕하세요 손지우 학우님. 저또한 공간 창조의 수레바퀴가 꾸준히 굴러오던 궤적이 현재에서 읽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탈공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이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기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코로나19가 더 가속화했다는 느낌도 많이 듭니다. 사람들은 계속 모이고자 하겠지만 이것이 현실 공간에서 채워질지 디지털 공간에서 채워질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공간 모두에서 공간 창조는 그곳에 있을 사람들에 대한 고민과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김재민2021-04-07 23:17
지우님 안녕하세요! 메타버스 논의하니깐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이런 것들이 막 떠오르네요. 메타버스 속에서 윤리를 정립하는 일은 또 우리시대가 당면할 새로운 일이 아닐까 싶어요. 가상공간에서의 윤리 기준이 지금과 사뭇 다를지, 그런 논의가 앞으로 계속해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혜진2021-04-07 18:23
문자나 공간 구성에 있어 동서양의 차이를 살펴본 부분이나, 고밀화되는 도시와 같이 이미 주변에 놓여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지각하지는 못했던 부분에 대한 내용들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 특히나 고민으로 이어졌던 부분은, 공통된 언어를 기반으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부분이였다. 긍정적인 면을 살펴본다면 어도비, CAD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언어로, 그 내부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더 다양한 의견을 효과적으로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국가나 장르가 국한되지 않고 기존의 작업물을 적용하거나 특정 관점을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파일 형식, 같은 작업 방식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협업의 가능성을 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다양한 재료를 통해 직접 실물과 유사한 형태를 재현해보면서 감각을 마주하거나,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색다른 구성을 만들어낼 가능성, 그리고 자신 주변의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더해질 수 있는 새로운 발상 등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 더 다양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은데, 특히나 건축, 패션디자인과 같이 어떤 예술적인 감각이 더해지는 분야에서는 앞서 언급한 내용 외에 어떤 장단점이 더 발생할 수 있고, c언어와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유하는 것도 유사한 한계점이 생길 수 있을지 다른 분들과 의견을 나눠보고 싶다.
최서원2021-04-08 00:14
안녕하세요 혜진님! 저도 건축을 예술의 한영역으로 생각하여 다양한 프로그램들 통한 작업물 공유가 예술의 창의성을 한정화 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넘어 미디어 아트와 같은 새로운 예술이 발전한 것처럼, 건축에서도 작업물 공유나 관점 전달이 일의 효율을 높일 부분은 높이며, 그 시간을 투자해 새로운 예술적 건축물을 만들어 낼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양승훈2021-04-07 18:42
이번 책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된 부분은 공간의 변화의 최종 폼이 결국 디지털과의 융합 혹은 디지털화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최근 어떤 식당이 유명해지거나 인기를 얻게 되는 이유의 많은 부분은 맛보다도 공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다. 그것과 함께 맛있어 '보이는'지가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아마도 밀키트, 배달, 온라인 포장 주문 서비스 등이 발달하면서 집 안에서 찾지 못하는 '맛'이 없게 되니 식당은 이제 맛이 아니라 공간과 분위기를 먹으러 가는 것, 이에 더해 자신의 디지털 공간에 올릴 소스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상황이 계속 진행되면 홀이라는 공간을 가진 식당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될 것 같다. 아주 저렴해서 배달이 어려운 일상식 위주의 식당 (ㅇㅇ분식, ㅇㅇ백반 등)이나 공간과 음식이 결합되어 우리가 실제로 음식에 느끼는 편익보다 높은 음식 값을 지불하는 이벤트용 '인스타그래머블'한 식당들로 말이다. 물론 그 중간의 식당들에 대해 여전히 사람들이 홀에서 먹고 싶은 수요가 있겠지만 점점 높아지는 임대료와 발전하는 포장/배달 서비스를 생각해 본다면 중간층의 식당들이 포기할 수 있는 시장이라고 생각된다. 벌써 공유주방, 배달 전문 음식점 등 홀을 포기한 식당들이 나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먹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오프라인에서 가능하다는 것과 먹는다는 행위를 하기 위한 공적인 장소가 여전히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먹는다는 행위가 모두에게 사적인 행위로만 남게 된다면 식이라는 기본 욕구는 충족되더라도 먹는다는 행위가 함께 가져올 수 있던 다양한 긍정적 영향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도 든다. 또한 온라인 기반 배달 서비스가 집중된다면 또하나의 부분을 걱정해야 한다. 바로 많은 요식업체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배달 서비스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맛부분의 만족도가 5점이라도 거리가 멀어 거리의 만족도가 1점인 식당보다 사람들은 맛이 3점이라도 거리가 가까워 거리의 만족도가 4점 이상 된다면 특별한 날이 아닐 경우 가까운 식당을 이용한다. 맛 부분의 점수를 평균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모든 음식점에게 가능한 부분은 아닐 수 있다. 그에 비해 거리의 만족도는 어떤 식당이라도 누군가에게는 5점을 얻을 수 있는 요소이다. 이를 통해 요식업은 (임대료가 너무 높지 않은 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배달 서비스는 철저하게 평점과 주문 수 등을 평가하게 되고 거리의 만족도의 영향은 거의 없어지므로 맛 부분의 만족도만이 거의 유일한 기준으로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맛 부분의 만족도를 4점 이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소수의 식당만 살아남게 된다. 물론 맛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마 어떤 식당에 좋은 추억이 있고 단골이 되는 이유가 오로지 맛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오래된 업력부터, 변하지 않는 모습, 주인의 인심, 학교 바로 앞에 있어 아지트가 될 수 있는 점 등 다양한 요소들이 식당의 가치를 만들어주던 사회를 지나 이제는 오로지 맛 혹은 화제성이 식당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사회로 들어가게 되면서 식당의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고 식당이 줄 수 있는 가치도 한정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특히 이러한 측면을 코로나가 더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가 끝나면 많은 부분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식당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생긴다. 디지털화가 더 진행되었을 때 미래 식당의 모습, 식당이라는 장소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이대로 가면 식당은 마치 호캉스처럼 정말 특별한 날 방문하는 곳이 될 수 있다) 학우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고 싶다.
먹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오프라인에서 가능하다는 것과 먹는다는 행위를 하기 위한 공적인 장소가 여전히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먹는다는 행위가 모두에게 사적인 행위로만 남게 된다면 식이라는 기본 욕구는 충족되더라도 먹는다는 행위가 함께 가져올 수 있던 다양한 긍정적 영향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도 든다. 또한 온라인 기반 배달 서비스가 집중된다면 또하나의 부분을 걱정해야 한다. 바로 많은 요식업체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배달 서비스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맛부분의 만족도가 5점이라도 거리가 멀어 거리의 만족도가 1점인 식당보다 사람들은 맛이 3점이라도 거리가 가까워 거리의 만족도가 4점 이상 된다면 특별한 날이 아닐 경우 가까운 식당을 이용한다. 맛 부분의 점수를 평균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모든 음식점에게 가능한 부분은 아닐 수 있다. 그에 비해 거리의 만족도는 어떤 식당이라도 누군가에게는 5점을 얻을 수 있는 요소이다. 이를 통해 요식업은 (임대료가 너무 높지 않은 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배달 서비스는 철저하게 평점과 주문 수 등을 평가하게 되고 거리의 만족도의 영향은 거의 없어지므로 맛 부분의 만족도만이 거의 유일한 기준으로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맛 부분의 만족도를 4점 이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소수의 식당만 살아남게 된다. 물론 맛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마 어떤 식당에 좋은 추억이 있고 단골이 되는 이유가 오로지 맛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오래된 업력부터, 변하지 않는 모습, 주인의 인심, 학교 바로 앞에 있어 아지트가 될 수 있는 점 등 다양한 요소들이 식당의 가치를 만들어주던 사회를 지나 이제는 오로지 맛 혹은 화제성이 식당의 가치를 만들어주는 사회로 들어가게 되면서 식당의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고 식당이 줄 수 있는 가치도 한정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특히 이러한 측면을 코로나가 더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가 끝나면 많은 부분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식당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생긴다. 디지털화가 더 진행되었을 때 미래 식당의 모습, 식당이라는 장소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이대로 가면 식당은 마치 호캉스처럼 정말 특별한 날 방문하는 곳이 될 수 있다) 학우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고 싶다.
윤재빈2021-04-07 22:24
안녕하세요 승훈님.
승훈님이 지적해주신
"온라인 기반 배달 서비스가 집중된다면 또하나의 부분을 걱정해야 한다. 바로 많은 요식업체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장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서 없이 작성해 보겠습니다.
우선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온라인 서비스의 발달이 지적해주신 흐름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영향이 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온라인 배달 시스템이 발달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배달을 하는 업체가 생긴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배달'이란 것 자체는 원래부터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다양한 배달 어플들은 그것을 온라인 상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오프라인 상에서 거리 순으로 음식점을 이용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서울대 학생들이 뒤풀이를 할 때 더 먼 지역으로 잘 나가지 않고 녹두거리 아니면 샤로수길을 찾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다음으로 지적해주신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한 '독점화'라는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배달 서비스를 통해서 특정 업체만이 살아남게 된다면 더 효율적인 운송을 바탕으로 시장 지배력을 넓혀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는 온라인 배달 시스템이 생긴 것 자체보다는 그 시스템이 정말 오프라인 상의 음식점의 특징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아는 맛집들 중 몇 군데는 온라인으로 홍보가 부족하여 아주 맛있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면, 온라인 상에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맛이 없었던 경험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가게들이 평점이 곧 수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에 '리뷰 이벤트'도 진행하며 일종의 조작(?)(ex. 맛있게 서비스 드시고 별점 5점 꾸욱 눌러주세요!)을 시도하는데,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주관적인 평가들이 객관성이 있는가 종종 의심됩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승훈님이 지적해주신
"온라인 기반 배달 서비스가 집중된다면 또하나의 부분을 걱정해야 한다. 바로 많은 요식업체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장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서 없이 작성해 보겠습니다.
우선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온라인 서비스의 발달이 지적해주신 흐름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영향이 시장의 구조를 바꾸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온라인 배달 시스템이 발달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배달을 하는 업체가 생긴다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배달'이란 것 자체는 원래부터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다양한 배달 어플들은 그것을 온라인 상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오프라인 상에서 거리 순으로 음식점을 이용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서울대 학생들이 뒤풀이를 할 때 더 먼 지역으로 잘 나가지 않고 녹두거리 아니면 샤로수길을 찾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다음으로 지적해주신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한 '독점화'라는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배달 서비스를 통해서 특정 업체만이 살아남게 된다면 더 효율적인 운송을 바탕으로 시장 지배력을 넓혀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제는 온라인 배달 시스템이 생긴 것 자체보다는 그 시스템이 정말 오프라인 상의 음식점의 특징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아는 맛집들 중 몇 군데는 온라인으로 홍보가 부족하여 아주 맛있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는 곳이 있는가 하면, 온라인 상에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맛이 없었던 경험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가게들이 평점이 곧 수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에 '리뷰 이벤트'도 진행하며 일종의 조작(?)(ex. 맛있게 서비스 드시고 별점 5점 꾸욱 눌러주세요!)을 시도하는데,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주관적인 평가들이 객관성이 있는가 종종 의심됩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탈퇴한 회원2021-04-07 22:42
승훈 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배달의 문제를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문제로 잘풀어내주신 것 같습니다.
승훈님이 말씀해주신 부분 대부분 공감하고 특히 요즘 코로나로 인해, 식당이 가지는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있다는 부분은 많이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 경험을 생각해보면, 집 주변 가족들과 함께 먹던 식당이나 새내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밥약을 하기도 했던 식당들은 아직도 따듯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런 가게들이 사라지고 또 코로나가 지속됨에 따라서 그런 의미가 조금은 무뎌질지도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공간의 확산과 그 영향력이 커진다고 해도 오프라인이 그 중심대 역할은 계속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조금 더 가더라도 오프라인 그리고 온라인 둘 다가 일종의 선택지로서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맛도 물론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그 음식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느끼는 즐거움 , 그 음식을 먹는 곳의 분위기, 추억, 사람 냄새 등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 무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사람과 접촉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 상, 이러한 문화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 면모를 계속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배달의 문제를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문제로 잘풀어내주신 것 같습니다.
승훈님이 말씀해주신 부분 대부분 공감하고 특히 요즘 코로나로 인해, 식당이 가지는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있다는 부분은 많이 와닿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 경험을 생각해보면, 집 주변 가족들과 함께 먹던 식당이나 새내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밥약을 하기도 했던 식당들은 아직도 따듯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런 가게들이 사라지고 또 코로나가 지속됨에 따라서 그런 의미가 조금은 무뎌질지도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온라인 공간의 확산과 그 영향력이 커진다고 해도 오프라인이 그 중심대 역할은 계속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조금 더 가더라도 오프라인 그리고 온라인 둘 다가 일종의 선택지로서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맛도 물론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그 음식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느끼는 즐거움 , 그 음식을 먹는 곳의 분위기, 추억, 사람 냄새 등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 무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사람과 접촉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 상, 이러한 문화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 면모를 계속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정빈2021-04-07 18:59
책의 첫 부분에서 회화나 음악과는 달리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였다. 건축은 외형에서 존재감을 내비친 다음, 안에 들어섰을 때엔 공간감을 통해 어떠한 감동을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감은 비어 있는 보이드와 채워져 있는 솔리드가 적절히 배치됨으로써 생겨난다. 이전에 읽은 적이 있는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라는 책에서도 보이드와 솔리드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고밀도일 수밖에 없는 현대도시에서 보이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터이다. 밀집과 적층이라는 현대도시의 현실에서 프로그램의 일부로, 프로그램의 조정자로, 다양한 성격의 ‘보이드’들을 활용한다.” 서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건축물에는 보이드가 중요하게 활용된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인 국립현대미술관을 떠올려 보면 군데 군데 배치되었던 마당들이 특징적이었다. 그런 중정들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건물 내부에서 외부의 자연을 느끼게 해주어 숨통을 틔워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마포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에는 건물 매스 곳곳에 보이드를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탱크를 이루는 매스와 기둥 사이사이로 난 빈 공간들이 뒤의 자연을 배경처럼 투영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거대한 탱크를 관람하면서도 위압감이나 답답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건물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보이드는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이어주면서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간 활동의 복합화와 거대화가 급속히 진행된 현대사회의 모든 복합 건축에서 보이드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문지수2021-04-07 20:18
정빈님 글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정빈님처럼 책에서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도구는 비어있는 공간인 보이드 공간'이라고 말한 부분에 공감이 갔어요.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3차원 입체 공간에서 경험하고 만질 수 있는 건축이라는 예술은 보이드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어서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인용해주신 책의 문장처럼, 특히나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서 지내기 때문에 보이드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민영2021-04-07 22:26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학우님의 글을 읽고 검색해보니 정말 중간중간 정원들이 놓여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을 위에서 본 사진을 보니, 과거 서양 스타일의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 되어있는 것 같아서, 이 건물도 융합이 이루어진 건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지들을 보고 나니, 학우님께서 왜 이 공간을 좋아하시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관정도서관의 7, 8층 가운데에 있는 물이 흐르는 공간이나, 5층에서 이어지는 옥상 정원들도 비슷한 이유로 굉장히 좋아합니다. 속칭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보이드'가 중요하다는 학우님의 주장 역시도 정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책 읽고 코멘트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혜령2021-04-08 00:28
정빈 님 글을 잘 읽어보고 문화비축기지에 눈길이 가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보이드라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회화나 음악에서도 보이드가 꽤나 오래전부터 접목이 되어왔고, (너무 유명한 존케이지 4;33.. 등)
또한 보이드에 대조되는 개념으로써 노이즈(noise) 또한 건축을 비롯한 예술문화에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빈 공간이란 것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지각세계로는 또는 의식으로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파동과 입자들.. 기타 중첩, 회절 등의 현상으로 미처 내게 도달하지 못한 부유하고 있는 정보들.. 등등.. 그래서 저는 가끔 보이드라는 것을 내세워 의도적 배치를 볼 때 지나친 모더니즘과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너무 정제하고 의도를 내비친 보이드가 과연 그 본래의 보이드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지, 오히려 어쩌면 그저 기하학적, 수학적 아름다움을 느끼는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하곤 합니다. 뭔가 현대미술에서 미니멀리즘 사조를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마는...
하튼 보이드가 강조될 수록 그 속에 사는 유기체의 자연발생적, 프랙탈적, 또는 노이즈 적인 현상들이 되려 무시받거나 차별당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에도 이미 너무나 정제되고 깔끔한, 보기 좋은, 취하기 좋은 이미지들이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을 뒤덮고 있고, 이것이 정확히 보이드는 아니지만, 그런 의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적절하다는 생각에 또한 언급해봅니다.
그러나 그만큼 회화나 음악에서도 보이드가 꽤나 오래전부터 접목이 되어왔고, (너무 유명한 존케이지 4;33.. 등)
또한 보이드에 대조되는 개념으로써 노이즈(noise) 또한 건축을 비롯한 예술문화에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빈 공간이란 것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의 지각세계로는 또는 의식으로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파동과 입자들.. 기타 중첩, 회절 등의 현상으로 미처 내게 도달하지 못한 부유하고 있는 정보들.. 등등.. 그래서 저는 가끔 보이드라는 것을 내세워 의도적 배치를 볼 때 지나친 모더니즘과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너무 정제하고 의도를 내비친 보이드가 과연 그 본래의 보이드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지, 오히려 어쩌면 그저 기하학적, 수학적 아름다움을 느끼는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하곤 합니다. 뭔가 현대미술에서 미니멀리즘 사조를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마는...
하튼 보이드가 강조될 수록 그 속에 사는 유기체의 자연발생적, 프랙탈적, 또는 노이즈 적인 현상들이 되려 무시받거나 차별당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현대에도 이미 너무나 정제되고 깔끔한, 보기 좋은, 취하기 좋은 이미지들이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을 뒤덮고 있고, 이것이 정확히 보이드는 아니지만, 그런 의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적절하다는 생각에 또한 언급해봅니다.
서강민2021-04-07 20:19
내용 요약) 저자는 건축을 크게 동양적 건축과 서양적 건축으로 이분화한다. 동양 건축과 서양 건축을 나누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강수량과 기후’이다. 강수량과 기후의 차이는 농사법과 작물의 차이를 유도했고, 또 이러한 차이는 집단의식과 개인의식 중 어느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지에 대한 차이를 유도했다. 요약하자면, 연중 강수량이 비교적 적은 서양은 개인 노동 위주의 밀 농사가 이루어졌고, 개인이 중요한 절대적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반면, 동양은 비교적 많은 강수량으로 인해 집단 노동 위주의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관계가 중요한 상대적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는 건축 양식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서양은 벽 중심이며, 기하학적 요소가 가미된 내외부 경계가 명확한 구획된 공간 위주의 건축이 이루어진다. 반면, 동양은 기둥 중심이며, 내외부(자연)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 위주의 건축이 이루어진다.
저자는 철학(서양철학, 기하학 vs 동양철학, 중용), 문화(농사법), 문자(알파벳 vs 한자), 놀이(체스 vs 바둑), 지리, 종교(그리스트교 vs 불교), 기후(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vs 강수량이 많은 기후), 문화재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동서양을 비교하며, 위에서 언급한 주장을 강화한다.
또한, 근현대 건축은 동양 건축과 서양 건축, 과거의 건축요소, 현대의 건축요소 등 공간적, 시간적 요소가 적절히 조화된 건축임을 드러내면서 여러 건축가의 성공사례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건축이 나아갈 방향으로 IT, 인공지능, 지하 플랫폼 등 현대 신기술과 건축과의 이종 교배(융합)를 제시한다.
생각해 볼 점)
1. 이 책에서는 세계의 건축, 문화, 기후 등 여러 요소를 단순히 동양, 서양으로 단순화시켰다. 하지만 기후만을 고려해보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연 강수량이 불규칙적이고 많은 계절풍 기후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기후가 존재하며, 이 두 기후로 이분화될 수 없다. 건축, 문화,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역에 따라(또한,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구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를 단 2개의 계로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너무나 단순화시켰으며, 환원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2. 저자는 p.376-378에 걸쳐 과거 지상에 드러나 있는 수로나 전기선 등이 지하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갔듯이, 현재 지상에 드러나 있는 유통망 역시 지하로 들어갈 것을 주장한다. 혹시 이러한 아이디어를 유사하게 실현한 실제 사례가 존재하는지, 경제성 평가는 이루어졌는지, 현대 시대의 많은 유통량을 지하 공간만으로 충분히 해소 가능한지 등에 관한 종합적인 평가가 있는지 궁금하다.
3. 저자는 p.367-370에 걸쳐 IT 기업은 최초의 가상공간을 점령했으며, 어떤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고, 국가의 권위를 상회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는 중국 정부가 구글, 유튜브를 통제하고, 미국 정부가 틱톡을 통제하는 것을 보면 아직 IT 기업은 중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의 통제하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IT 기업의 가상공간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적절한 통제를 가하는 것이 옳을까? 옳다면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IT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요소와 저해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저자는 철학(서양철학, 기하학 vs 동양철학, 중용), 문화(농사법), 문자(알파벳 vs 한자), 놀이(체스 vs 바둑), 지리, 종교(그리스트교 vs 불교), 기후(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vs 강수량이 많은 기후), 문화재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동서양을 비교하며, 위에서 언급한 주장을 강화한다.
또한, 근현대 건축은 동양 건축과 서양 건축, 과거의 건축요소, 현대의 건축요소 등 공간적, 시간적 요소가 적절히 조화된 건축임을 드러내면서 여러 건축가의 성공사례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건축이 나아갈 방향으로 IT, 인공지능, 지하 플랫폼 등 현대 신기술과 건축과의 이종 교배(융합)를 제시한다.
생각해 볼 점)
1. 이 책에서는 세계의 건축, 문화, 기후 등 여러 요소를 단순히 동양, 서양으로 단순화시켰다. 하지만 기후만을 고려해보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연 강수량이 불규칙적이고 많은 계절풍 기후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기후가 존재하며, 이 두 기후로 이분화될 수 없다. 건축, 문화,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역에 따라(또한, 지역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구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요소를 단 2개의 계로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너무나 단순화시켰으며, 환원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2. 저자는 p.376-378에 걸쳐 과거 지상에 드러나 있는 수로나 전기선 등이 지하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갔듯이, 현재 지상에 드러나 있는 유통망 역시 지하로 들어갈 것을 주장한다. 혹시 이러한 아이디어를 유사하게 실현한 실제 사례가 존재하는지, 경제성 평가는 이루어졌는지, 현대 시대의 많은 유통량을 지하 공간만으로 충분히 해소 가능한지 등에 관한 종합적인 평가가 있는지 궁금하다.
3. 저자는 p.367-370에 걸쳐 IT 기업은 최초의 가상공간을 점령했으며, 어떤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고, 국가의 권위를 상회한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는 중국 정부가 구글, 유튜브를 통제하고, 미국 정부가 틱톡을 통제하는 것을 보면 아직 IT 기업은 중국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의 통제하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IT 기업의 가상공간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적절한 통제를 가하는 것이 옳을까? 옳다면 어떤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IT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요소와 저해하는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
조용수2021-04-08 11:36
강민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개인적으로는 현재 IT 기업들에 대한 통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기업의 승자독식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추세이고,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사실상 국가의 규제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IT 기업들의 반독점법 규제 이외에도 유럽, 미국 등에서 데이터 보호법에 대한 논의가 계속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통제를 저해하는 요소이자 저희가 고려해봐야 할 요소는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후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대표적으로 구글이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IT 기업들을 통제하는 것이 옳은지,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는 이후 과학기술 파트에서 더 얘기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IT 기업들에 대한 통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기업의 승자독식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추세이고,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사실상 국가의 규제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IT 기업들의 반독점법 규제 이외에도 유럽, 미국 등에서 데이터 보호법에 대한 논의가 계속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통제를 저해하는 요소이자 저희가 고려해봐야 할 요소는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후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대표적으로 구글이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IT 기업들을 통제하는 것이 옳은지,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는 이후 과학기술 파트에서 더 얘기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혜송2021-04-07 20:20
미래 건축의 이종 교배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유현준은 《공간이 만든 공간》의 상당 부분을 건축에서의 동·서양 간의 이종 교배를 서술하는 데 할애하였다. 그는 동서양 문화 차이의 기원을 기후와 농업방식에서 찾고, 서양의 건축가들이 동양의 건축 유전자(내외부 공간의 모호성, 기둥식 건축)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건축을 창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공간이 압축되면서, 건축 또한 멀리 떨어진 문화와 교배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였음을 말하는 듯하다.
건축의 역사가 지리적 이종 교배로 특징지어진다면, 건축의 미래는 무엇으로 특징지어질 것인가? 무엇과 융합하여, 어떤 새로운 유전자를 창조하게 될 것인가? 새로운 생각을 위해서는 ‘제약’과 ‘융합’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 답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그리고 미래에 우리 삶에 가해진 제약 그리고 그를 보완하기 위한 융합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다음의 두 사항이 미래 건축의 이종 교배에서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배제되는 사람들
팬데믹 시대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면 활동의 대다수가 가능한 한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비대면 방식은 전적으로 디지털 공간에 의존한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활발하게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모두에게 열려있을 것 같은 디지털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공간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경우 또한 포착된다. 책에서 나온 사례에서, 을지로의 일부 카페들은 디지털 공간인 SNS를 이용하는 젊은 층만을 받기 위해, 간판을 내걸지 않아, 노인 계층과 SNS를 이용하지 않는 일부 계층이 현실 공간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있다.
디지털 공간이 현실 공간과 융합되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이종 교배를 이루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을 이용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디지털뿐만 아니라 현실의 공간을 누릴 권리마저 빼앗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2) 뜨거워지는 지구
책의 초반부에서 언급된 기원전 10000년 당시의 지구 온난화와 마찬가지로, 21세기 현대 인류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도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감소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지구가 8도 더 뜨거워지게 되면, 세계 도시 3분의 2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이는 물에 잠기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며, 남은 1/3의 도시가 전 세계 인구를 감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지구 온난화로 인류는 사상 최대로 고밀화된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고밀화된 도시에서는, 저자가 반감을 보인, 네모반듯하고 고층 건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 양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곡선으로 건물을 설계하면, 아름다운 건축은 될 수 있지만, 공간이 낭비된다. 수평적 공간이 줄어들면, 수직적으로 공간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건축가들의 몫은 미래에 국제주의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지역적 문화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고층 거주 공간에서 개인의 마당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저자는 다양한 이벤트들이 발생할 수 있는 마당을 강조한 바 있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사는 고층 건물에서 어떻게 마당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또,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건물을 이용할 때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줄일 수 있도록, 건축이 저탄소 기술과도 적극적으로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더해, 사람들의 거주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자연과 생태계의 영역을 보호하는 것도 건축가들이 도시를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윌러스 웰스, 《2050 거주불능 지구》, 김재경 역, 서울: 추수밭, 2020.
유현준은 《공간이 만든 공간》의 상당 부분을 건축에서의 동·서양 간의 이종 교배를 서술하는 데 할애하였다. 그는 동서양 문화 차이의 기원을 기후와 농업방식에서 찾고, 서양의 건축가들이 동양의 건축 유전자(내외부 공간의 모호성, 기둥식 건축)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건축을 창조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공간이 압축되면서, 건축 또한 멀리 떨어진 문화와 교배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였음을 말하는 듯하다.
건축의 역사가 지리적 이종 교배로 특징지어진다면, 건축의 미래는 무엇으로 특징지어질 것인가? 무엇과 융합하여, 어떤 새로운 유전자를 창조하게 될 것인가? 새로운 생각을 위해서는 ‘제약’과 ‘융합’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 답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그리고 미래에 우리 삶에 가해진 제약 그리고 그를 보완하기 위한 융합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다음의 두 사항이 미래 건축의 이종 교배에서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배제되는 사람들
팬데믹 시대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면 활동의 대다수가 가능한 한 비대면으로 전환되었고, 비대면 방식은 전적으로 디지털 공간에 의존한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활발하게 디지털 공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모두에게 열려있을 것 같은 디지털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 공간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경우 또한 포착된다. 책에서 나온 사례에서, 을지로의 일부 카페들은 디지털 공간인 SNS를 이용하는 젊은 층만을 받기 위해, 간판을 내걸지 않아, 노인 계층과 SNS를 이용하지 않는 일부 계층이 현실 공간을 누리지 못하도록 배제하고 있다.
디지털 공간이 현실 공간과 융합되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이종 교배를 이루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을 이용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디지털뿐만 아니라 현실의 공간을 누릴 권리마저 빼앗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2) 뜨거워지는 지구
책의 초반부에서 언급된 기원전 10000년 당시의 지구 온난화와 마찬가지로, 21세기 현대 인류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도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크게 감소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지구가 8도 더 뜨거워지게 되면, 세계 도시 3분의 2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이는 물에 잠기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며, 남은 1/3의 도시가 전 세계 인구를 감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지구 온난화로 인류는 사상 최대로 고밀화된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고밀화된 도시에서는, 저자가 반감을 보인, 네모반듯하고 고층 건물로 대표되는 ‘국제주의 양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곡선으로 건물을 설계하면, 아름다운 건축은 될 수 있지만, 공간이 낭비된다. 수평적 공간이 줄어들면, 수직적으로 공간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건축가들의 몫은 미래에 국제주의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지역적 문화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고층 거주 공간에서 개인의 마당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저자는 다양한 이벤트들이 발생할 수 있는 마당을 강조한 바 있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사는 고층 건물에서 어떻게 마당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또,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건물을 이용할 때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줄일 수 있도록, 건축이 저탄소 기술과도 적극적으로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더해, 사람들의 거주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자연과 생태계의 영역을 보호하는 것도 건축가들이 도시를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윌러스 웰스, 《2050 거주불능 지구》, 김재경 역, 서울: 추수밭, 2020.
서강민2021-04-07 22:52
안녕하세요 혜송학우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뜨거워지는 지구 편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지구 온난화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대도시가 상당부분 물에 잠겨, 남아있는 도시의 초고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부분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해수면에 잠길 위기에 처한 대도시들이 다른 대도시가 아니라 소규모 도시나 저인구밀도 지대로 이주하는 경향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정된 도시에 너무나 많은 인구가 몰리게 되면, 그만큼 도시환경이 악화되고, 도시를 떠나 저인구밀도 지대로 이주하려는 경향성이 발생해 초고밀화된 도시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로 모이려는 경향성과 도시 밖으로 흩어지려는 경향성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인구 적정점이 형성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지구온난화를 고려하여 수몰 대도시의 인구를 수용할만한 적절한 지역이 필요하다는 거과 수직적 공간의 확보, 친환경적, 국제주의 양식의 필요성에 대해서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대도시가 상당부분 물에 잠겨, 남아있는 도시의 초고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부분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해수면에 잠길 위기에 처한 대도시들이 다른 대도시가 아니라 소규모 도시나 저인구밀도 지대로 이주하는 경향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정된 도시에 너무나 많은 인구가 몰리게 되면, 그만큼 도시환경이 악화되고, 도시를 떠나 저인구밀도 지대로 이주하려는 경향성이 발생해 초고밀화된 도시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시로 모이려는 경향성과 도시 밖으로 흩어지려는 경향성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인구 적정점이 형성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지구온난화를 고려하여 수몰 대도시의 인구를 수용할만한 적절한 지역이 필요하다는 거과 수직적 공간의 확보, 친환경적, 국제주의 양식의 필요성에 대해서 크게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박지유2021-04-08 13:49
혜송 학우님 안녕하세요, '배제되는 사람들' 주제에 관해 공감하며 댓글 남깁니다.
을지로 카페의 사례에서 보듯, 온라인 공간에 대한 접근능력, 정보 격차 등이 또다른 구별짓기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라인 공간으로의 전환을 '우성' 문화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혹자는 이와 같은 차이는 불가피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지적하셨듯 온라인 공간에서의 배제가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배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을지로 카페의 사례에서 보듯, 온라인 공간에 대한 접근능력, 정보 격차 등이 또다른 구별짓기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온라인 공간으로의 전환을 '우성' 문화 유전자의 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혹자는 이와 같은 차이는 불가피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지적하셨듯 온라인 공간에서의 배제가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배제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조성민2021-04-07 20:27
유현준 교수의 공간이 있는 공간은 크게 서양과 동양의 건축 방식을 비교하면서 시대적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전개되는 과정과 그 중에 건축이 발달하는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었다. 특히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자주 언급하며 강수량, 위도, 주요 식량과 같은 인류학적 관점으로 동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규명하였고, 그에 따라 서양은 벽 위주의 단절된 개인주의 건축, 동양은 기둥 중심의 주변 환경과 관계를 생각하는 건축으로 변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동서양이 문화적으로 교류하고 그 교류가 쉬워지면서(이를 시간적 압축, 공간적 압축이란 표현을 사용하신 듯 하다) 주로 서양이 동양의 건축 철학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드는 과정에 집중하였다. 시기가 지나면서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꼬르뷔지에, 루이스 칸 등 유명한 건축가들이자 사상가들의 건축물을 이러한 동서양의 문화적 교류라는 구도로 바라보았다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특히 각 건축가들의 주요 건축작품을 동양에 있는 건축물의 구성과 비교하는 그림 및 삽화들 덕분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유현준 교수님이 방대한 시대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건축과 공간의 역사적인 이해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기 위해서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환경적인 차이에 의한 동 서양의 문화적 괴리를 설명하는 방식은 독자들에게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설득시키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환경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의 문명 발생과 발전의 차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각각의 문명 혹은 문화를 살펴보면 환경 이외의 요소, 특히 당시 인간들의 판단과 행동에 의해 적지 않은 영향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인류 문명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농업 혁명만 하더라도 농업이 사회 발전의 필요 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농업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농업이 생계경제의 주요 요소가 아니었음에도 계급사회 및 사회복합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농작물의 종류가 사회 문화적 차이를 유발할 수 있지만, 그 외에 지역적인 차이, 종교에 대한 생각, 주변 세력과의 관계 등 더 많은 요소가 문화적 차이를 일으키는 변인으로 추가될 필요가 있다.
또 한가지 책을 읽으면서 의문스러웠던 점은 동양 건축의 변화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서양 건축이 동양 건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저자는 설명하였는데, 기둥, 관계성,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생각 등이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 건축에서 서양 건축에 영향을 받아 변화한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만약 그런 문화 교류의 특징을 동양 건축에서 찾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유현준 교수님이 방대한 시대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건축과 공간의 역사적인 이해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기 위해서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환경적인 차이에 의한 동 서양의 문화적 괴리를 설명하는 방식은 독자들에게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설득시키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환경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의 문명 발생과 발전의 차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각각의 문명 혹은 문화를 살펴보면 환경 이외의 요소, 특히 당시 인간들의 판단과 행동에 의해 적지 않은 영향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인류 문명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던 농업 혁명만 하더라도 농업이 사회 발전의 필요 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농업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농업이 생계경제의 주요 요소가 아니었음에도 계급사회 및 사회복합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농작물의 종류가 사회 문화적 차이를 유발할 수 있지만, 그 외에 지역적인 차이, 종교에 대한 생각, 주변 세력과의 관계 등 더 많은 요소가 문화적 차이를 일으키는 변인으로 추가될 필요가 있다.
또 한가지 책을 읽으면서 의문스러웠던 점은 동양 건축의 변화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서양 건축이 동양 건축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고 저자는 설명하였는데, 기둥, 관계성,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생각 등이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 건축에서 서양 건축에 영향을 받아 변화한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만약 그런 문화 교류의 특징을 동양 건축에서 찾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김재민2021-04-07 21:14
안녕하세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3조와 4조 발제문을 보고 느낀 점과 함께 정리해봤습니다.
4조 발제문을 보고.
아파트 주민의 개인주의화 현상을 푸는 것은 오랜 사회의 숙원이다. 수평 공간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과 위계의 질서에 놓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비좁고 불쾌한 불연속적 경험의 장으로서 엘리베이터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아파트의 층간폐쇄성은, 생각건대 필연적인 사회 고립의 요인으로 오랜 시간 주목되었다. 허나 종종 온라인커뮤니티 등에서 이런 폐쇄적 엘리베이터가 개방과 소통의 가교가 되는 사례 등이 목격된다고 한다. 개방형 엘리베이터를 만들거나, 가볍게 보드마커 등으로 자유롭게 낙서하는 엘리베이터를 상상해보자. LED TV에서 뉴스나 날씨가 나오는게 아니라 오늘의 기분, 오늘의 재밌는 사건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유의할 점은 엘리베이터 일종의 “신문고”여서는 안될 것 같다. 층간 불평과 고발을 하는 곳이 아니라 긍정의 아고라로 기능해야 한다. 하나 발측한 상상을 또 해보자면, 엘리베이터로 “가사(돌봄)노동의 모내기”를 해보면 어떨까? 처음 대면하는 이들끼리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기보다 들어주기 쉬운 가벼운 요청을 하는 것이라는 사회학적 연구도 있는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가벼운 부탁(favor)을 요청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또 하나 대한민국 아파트 특유의 문제는 “초등학교 건설”이다. 전에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며 초등학교설립과 과장님과 오랜 시간 소통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아파트 동이나 단지에 따라 학교 배정문제로 인해 많은 민원에 시달린다고 한다. 왜 우리는 반드시 가까운 초등학교에 배정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사실 저출산 국면에서 초등학교가 지나치게 많이 설립되는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통학 안전성 문제에 관하여 해외의 경우, 수 km에 걸쳐 스쿨버스가 다니는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다. “아파트 단지”가 하나의 계층이 되어버린 지금, 사실상 단지에 인해 묶여버리는 학교군으로 인해 아이들의 social mix가 어려워지고 있다. 획기적으로 학교를 통폐합하고, 학교 배정에 있어 거주지영역 제한을 완화한다면 좀 더 유연하게 아파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3조 발제문을 보고.
대한민국 사회 광장의 기능과 역사 그리고 미래 발전에 관한 논의가 너무나도 기대되는 발제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그 어디보다 오프라인 광장 문화가 정치적 기능에 많이 초점이 맞추어진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20대의 경험에 비추어보기에, 우리가 배우는 “광장”의 역사성은 대개 정치와 깊이 연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의 시발점도 광장이고, 4.19혁명, 민주화운동 및 민주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를 혁신하기를 희망하는 시민적 요구가 광장에서 집결함으로써 변화가 추동된 것입니다. 특히 발제문에서 제시하신 광화문-서울-청계 광장은 그 집회적 기능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일종의 성역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의 “접근성”이 상당히 제약되어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공공공간”은 청년 간 소통의 매개공간이 되지 않는 것을 더 고려해야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공도서관이 새로운 주민자치 및 소통의 공간이 된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읍면동사무소가 어떤 소통의 기능을 할지 의문입니다. 노년 세대의 경우 공공공간을 일종의 만남의 장으로서 인식하고 향유하지만, 청년 세대의 고립과 단절은 이러한 양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의 미래를 우리는 새로이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 댓글에 언급하였듯 초연결된 hyperplex를 고민해야 하는데, 우선 그 과도기에 있어 온라인 광장의 특성과 오프라인 광장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해보입니다.
4조 발제문을 보고.
아파트 주민의 개인주의화 현상을 푸는 것은 오랜 사회의 숙원이다. 수평 공간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과 위계의 질서에 놓여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비좁고 불쾌한 불연속적 경험의 장으로서 엘리베이터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아파트의 층간폐쇄성은, 생각건대 필연적인 사회 고립의 요인으로 오랜 시간 주목되었다. 허나 종종 온라인커뮤니티 등에서 이런 폐쇄적 엘리베이터가 개방과 소통의 가교가 되는 사례 등이 목격된다고 한다. 개방형 엘리베이터를 만들거나, 가볍게 보드마커 등으로 자유롭게 낙서하는 엘리베이터를 상상해보자. LED TV에서 뉴스나 날씨가 나오는게 아니라 오늘의 기분, 오늘의 재밌는 사건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유의할 점은 엘리베이터 일종의 “신문고”여서는 안될 것 같다. 층간 불평과 고발을 하는 곳이 아니라 긍정의 아고라로 기능해야 한다. 하나 발측한 상상을 또 해보자면, 엘리베이터로 “가사(돌봄)노동의 모내기”를 해보면 어떨까? 처음 대면하는 이들끼리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기보다 들어주기 쉬운 가벼운 요청을 하는 것이라는 사회학적 연구도 있는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가벼운 부탁(favor)을 요청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또 하나 대한민국 아파트 특유의 문제는 “초등학교 건설”이다. 전에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며 초등학교설립과 과장님과 오랜 시간 소통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아파트 동이나 단지에 따라 학교 배정문제로 인해 많은 민원에 시달린다고 한다. 왜 우리는 반드시 가까운 초등학교에 배정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사실 저출산 국면에서 초등학교가 지나치게 많이 설립되는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통학 안전성 문제에 관하여 해외의 경우, 수 km에 걸쳐 스쿨버스가 다니는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다. “아파트 단지”가 하나의 계층이 되어버린 지금, 사실상 단지에 인해 묶여버리는 학교군으로 인해 아이들의 social mix가 어려워지고 있다. 획기적으로 학교를 통폐합하고, 학교 배정에 있어 거주지영역 제한을 완화한다면 좀 더 유연하게 아파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3조 발제문을 보고.
대한민국 사회 광장의 기능과 역사 그리고 미래 발전에 관한 논의가 너무나도 기대되는 발제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그 어디보다 오프라인 광장 문화가 정치적 기능에 많이 초점이 맞추어진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20대의 경험에 비추어보기에, 우리가 배우는 “광장”의 역사성은 대개 정치와 깊이 연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3.1.운동의 시발점도 광장이고, 4.19혁명, 민주화운동 및 민주항쟁 등, 한국 근현대사를 혁신하기를 희망하는 시민적 요구가 광장에서 집결함으로써 변화가 추동된 것입니다. 특히 발제문에서 제시하신 광화문-서울-청계 광장은 그 집회적 기능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일종의 성역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의 “접근성”이 상당히 제약되어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공공공간”은 청년 간 소통의 매개공간이 되지 않는 것을 더 고려해야합니다. 미국의 경우 공공도서관이 새로운 주민자치 및 소통의 공간이 된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읍면동사무소가 어떤 소통의 기능을 할지 의문입니다. 노년 세대의 경우 공공공간을 일종의 만남의 장으로서 인식하고 향유하지만, 청년 세대의 고립과 단절은 이러한 양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의 미래를 우리는 새로이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 댓글에 언급하였듯 초연결된 hyperplex를 고민해야 하는데, 우선 그 과도기에 있어 온라인 광장의 특성과 오프라인 광장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해보입니다.
채수형2021-04-07 21:39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책에서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해 오고 상호작용을 받아왔으며, 최종적으로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첫 째로 여러 파트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은 IT분야(컴퓨터)와 건축이 융합하여 발현되는 부분이었다. 하드웨어라 생각했던 건물이 이제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프로그램으로 디자인될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 IT의 여러 장점들 (상상력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용하여 건축에 사용한다면 무궁무진하게 건축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아가 AI와 3D프린터 역시 건축 계획안 작업에 도움이 될 것이며 이 역시 우리 미래사회의 건축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오프라인 공간의 중요성을 제시한 저자의 말이다. 저번 독서 서평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과 건축이 필요하다 생각했으며 나 역시 온라인 공간 하나만으로 인간이 살 수 없다는 점을 제시했었다. 온라인으로만 산다면 정말 일각에서 말하듯이 대도시의 해체가 발생할 것이지만, 나는 우리 사람들이 온라인만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우리 인류는 IT, AI 와 같은 여러 기술들은 단순히 여러 획일화된 건물을 대량으로 건설하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융합되는 건축을 만드는데 노력하고 현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고안해 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코로나 사태에서도 오프라인 공간의 중요성을 제시한 저자의 말이다. 저번 독서 서평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간과 건축이 필요하다 생각했으며 나 역시 온라인 공간 하나만으로 인간이 살 수 없다는 점을 제시했었다. 온라인으로만 산다면 정말 일각에서 말하듯이 대도시의 해체가 발생할 것이지만, 나는 우리 사람들이 온라인만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우리 인류는 IT, AI 와 같은 여러 기술들은 단순히 여러 획일화된 건물을 대량으로 건설하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융합되는 건축을 만드는데 노력하고 현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고안해 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엘리엇2021-04-07 22:12
우리는 끊임없이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외침을 들어왔습니다. 취업이나 여러 현실적인 면에서 가지는 불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회피하고, 결과적으로 인문학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 큰 가치를 가지며 희소한 능력이 될 것이기에, 필자 또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철학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며, 저자는 관념이 실재를 이끌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며 관련된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를 읽으며 우리의 '인문학 열풍'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서도, 인문학이 현대의 기술에 활용될 여지를 강조하였지 그 자체에 대한 고려를 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문학이 그 자체에 대한 고려보다 다른 실리적 목적에 기반하여 강조되기에 책의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인문학에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학우님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철학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며, 저자는 관념이 실재를 이끌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며 관련된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를 읽으며 우리의 '인문학 열풍'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에서도, 인문학이 현대의 기술에 활용될 여지를 강조하였지 그 자체에 대한 고려를 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문학이 그 자체에 대한 고려보다 다른 실리적 목적에 기반하여 강조되기에 책의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인문학에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학우님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최동익2021-04-07 23:28
안녕하세요 이엘리엇님. 전 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말씀해주신 인문학의 입지가 현실적으로 와 닿아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먼저, 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현대문학 수업만 듣다가 이번 학기 전공필수인 고전문학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흥미로운 부분이 많더라구요. 특히 고구려 건국 설화와 신라 시대 최치원이 기록해놓은 이야기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과도 비슷하고 문제의식도 깊었습니다.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언급하는데, 인간이라는 생물 자체가 환경의 변화와는 다르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인문학을 비롯해 학문 전반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수업 자료라서 읽고 있는데 역자이신 백종현 선생님이 국내 칸트 전공 박사들의 세부 분야를 분류해놓으신 것을 보면 이론철학과 도덕철학이 각각 26편, 37편이더라구요. 반면 외국 대학에 유학 가서 칸트로 박사 논문을 쓴 사람들은 이론철학이 30편, 도덕철학이 10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이론보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이러한 성향이 때로는 학문의 발전을 막는다고도 언급하셨습니다. 또 '과학기술의 일상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한국은 기초과학이 약하다고 말할 때에 그 기초과학이란 말이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생겼다는 주장을 하더라구요. 책에 따른다면, 그 이전에는 애초에 기초과학과 실용과학의 구분이 없었던 셈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므로 조심스럽지만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애초부터 학문은 실용성과 무관하게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다양하지 못해 비단 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을 한다는 것이, 실용성이 입증되어야만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이겠지만 이것저것, 정말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더라도 누군가 깊게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면 주변인으로서는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어떠한 주장을 펼쳐 나가려고 하는지 이따금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그 가능성이 학문의 영역을 넘어, 현실에까지 와 닿아 빛날지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먼저, 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현대문학 수업만 듣다가 이번 학기 전공필수인 고전문학사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흥미로운 부분이 많더라구요. 특히 고구려 건국 설화와 신라 시대 최치원이 기록해놓은 이야기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과도 비슷하고 문제의식도 깊었습니다.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언급하는데, 인간이라는 생물 자체가 환경의 변화와는 다르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인문학을 비롯해 학문 전반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가 수업 자료라서 읽고 있는데 역자이신 백종현 선생님이 국내 칸트 전공 박사들의 세부 분야를 분류해놓으신 것을 보면 이론철학과 도덕철학이 각각 26편, 37편이더라구요. 반면 외국 대학에 유학 가서 칸트로 박사 논문을 쓴 사람들은 이론철학이 30편, 도덕철학이 10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이론보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이러한 성향이 때로는 학문의 발전을 막는다고도 언급하셨습니다. 또 '과학기술의 일상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한국은 기초과학이 약하다고 말할 때에 그 기초과학이란 말이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생겼다는 주장을 하더라구요. 책에 따른다면, 그 이전에는 애초에 기초과학과 실용과학의 구분이 없었던 셈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므로 조심스럽지만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애초부터 학문은 실용성과 무관하게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다양하지 못해 비단 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학문을 한다는 것이, 실용성이 입증되어야만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말이겠지만 이것저것, 정말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더라도 누군가 깊게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면 주변인으로서는 그 자체로 인정해주고 어떠한 주장을 펼쳐 나가려고 하는지 이따금 관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그 가능성이 학문의 영역을 넘어, 현실에까지 와 닿아 빛날지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최민정2021-04-07 23:58
흥미로운 이야기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질문해 주신 인문학에 대한 접근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인문학이 가진 가치와 중요성 측면에서 동의합니다. 특히, 인문학 자체가 아닌 실리적 목적에 기반해서 인문학이 강조되는 분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되는 건 아닌지 살펴보게 됩니다. 한편, 인문학을 통해 양질의 논의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이 인문학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특정한 계층만이 인문학을 독점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높은 장벽으로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낮은 장벽이 피상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않도록, 암묵적 지식을 여러 차원에서 나누기 위한 자유로운 논의의 장이 많은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채미2021-04-07 23:59
저 또한 이엘리엇 학우님처럼 관념이 실재를 이끌어서는 안된다는 서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문학 열풍과 엮어서 제시해주셨기에 그것에 관해 생각해보자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문학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 역시 인문학 그 자체를 고려한다기 보다는 실리적 목적에 의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인문학 그 자체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책의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은 발달하는 과학 기술의 대항마로 여겨지는 만큼 딱 그정도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문학만 탐구하는 것은 실제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조민영2021-04-07 22:14
이 책을 읽기 전 '유발 하라리가 쓴 건축 책' 같다는 평을 보았는데, 첫 챕터를 펼치자마자 이러한 평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건축의 발전 내지는 변화의 역사를 단순히 건축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왜 발전이 있었고 왜 변화가 있었는지 다양한 측면과 연관지어서 설명한다.
특히 '사상' 혹은 '사고'와 연관지은 방식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서양과 동양의 건축이 다른 모양을 띠고 있는 이유는, 서양과 동양의 기저에 놓인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게 된 이유는, 기후에 따라 서양은 밀농사를 지어 개인주의적 문화가 발전하고 동양은 벼농사를 지어 집단 중시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리하자면 자연적 요인에 의해 사상적 차이가 발생하고, 그러한 사상적 차이가 건축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서울의 빌딩들과 뉴욕의 빌딜등이 상당히 유사해보인다. 이처럼 비슷하게 된 것은, 지리적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인데, 지리적 교류를 통해 제품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에 따라, 사상 내지 사고방식은 건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건축의 교류가 있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모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기저에 놓인 사고방식에서부터 모순되어 있다. 동양의 사고방식을 따른다면, 서양의 사고방식을 용인할 수 없다.
저자는 모순이 새로운 생각으로 통합될 때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한다고 설명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통합이 이루어져 현재의 '국제주의 양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에 대해서 《공간이 만든 공간》이 충분한 답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교류가 발생하고, 조금씩 스며들다보니 융합되었다! 정도로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칸트의 '이성의 안티노미' 개념이 생각났다. 이성은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동시에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을 이성의 안티노미라고 설명한다. 서로 모순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융합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굳이 건축을 따지지 않고도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사상' 혹은 '사고'와 연관지은 방식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서양과 동양의 건축이 다른 모양을 띠고 있는 이유는, 서양과 동양의 기저에 놓인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있게 된 이유는, 기후에 따라 서양은 밀농사를 지어 개인주의적 문화가 발전하고 동양은 벼농사를 지어 집단 중시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리하자면 자연적 요인에 의해 사상적 차이가 발생하고, 그러한 사상적 차이가 건축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서울의 빌딩들과 뉴욕의 빌딜등이 상당히 유사해보인다. 이처럼 비슷하게 된 것은, 지리적 교류가 시작되면서부터인데, 지리적 교류를 통해 제품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에 따라, 사상 내지 사고방식은 건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건축의 교류가 있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모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기저에 놓인 사고방식에서부터 모순되어 있다. 동양의 사고방식을 따른다면, 서양의 사고방식을 용인할 수 없다.
저자는 모순이 새로운 생각으로 통합될 때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한다고 설명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통합이 이루어져 현재의 '국제주의 양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에 대해서 《공간이 만든 공간》이 충분한 답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교류가 발생하고, 조금씩 스며들다보니 융합되었다! 정도로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칸트의 '이성의 안티노미' 개념이 생각났다. 이성은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동시에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을 이성의 안티노미라고 설명한다. 서로 모순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융합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굳이 건축을 따지지 않고도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박규리2021-04-08 13:36
책에 대한 지적에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칸트의 개념을 새로이 제시해주신 부분은 저는 잘 몰랐던 부분인데 너무 탁월하게 참고할 만한 내용을 말해주신 것 같아 댓글 남겨봅니다.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중용의 덕도 이런 점에서 함께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재희2021-04-07 22:17
책을 읽는 내내 '나비효과'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나의 요인과 공간이 또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지역에 따라 다른 강수량의 차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다시 문화의 집합체인 건축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단계 단계가 각각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종합적 결과를 보니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또한 동서양의 상이한 문화가 글자와 건축, 게임 등에 녹아들어가 우리에게 넌지시 비추어지고 있었다는 것도 저자의 설명을 보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해볼 점
(1) 동서양의 건축이 서로, 특히 서양의 건축이 점점 동양의 특징을 하나 둘씩 담아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꼭 문화권과 같은 광활한 범위의 지역 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두 지역 또는 생활권의 건축 문화가 상호 융합되는 경우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수도권 도시들이 갖는 특징들이 해안 도시 지역의 건축물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는 없을까? 아니면 도시와 농촌 간의 상호 교류의 결과가 묻어나는 건축물은 없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일하는 곳과 휴식하는 곳의 특징이 골고루 묻어나는 곳은 대표적으로 무엇이 있을까? 학우 분들의 다양한 경험이 담긴 답변을 들어보고 싶다.
(2) 유현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다움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다. 나는 인간다움은 '자유'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사유의 자유, 행동의 자유, 결정의 자유 등등이 모여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다움이 보장되는 건축의 예를 들자면 하나의 공간 안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서로 다른 형태의 공간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나를 비롯한 인간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결정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자유함을 느끼고, 그 공간에 애착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의자와 책상이 있는 스터디 카페가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학교 내의 공간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34동 '공ZONE'이다. 이곳에는 단체석, 4인석, 개인석뿐 아니라 스타디움 모양의 둥글고 긴 좌석까지 다양한 목적을 위한 시설들이 좁지만 아담한 한 공간 내에 모여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보면 내가 똑같이 생긴 자리들 중 하나에 앉아 오랫동안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학교 내 공간은 어디일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근원,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건축물의 형태는 무엇인지도 알고 싶다.
생각해볼 점
(1) 동서양의 건축이 서로, 특히 서양의 건축이 점점 동양의 특징을 하나 둘씩 담아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꼭 문화권과 같은 광활한 범위의 지역 간의 차이뿐만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두 지역 또는 생활권의 건축 문화가 상호 융합되는 경우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수도권 도시들이 갖는 특징들이 해안 도시 지역의 건축물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는 없을까? 아니면 도시와 농촌 간의 상호 교류의 결과가 묻어나는 건축물은 없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일하는 곳과 휴식하는 곳의 특징이 골고루 묻어나는 곳은 대표적으로 무엇이 있을까? 학우 분들의 다양한 경험이 담긴 답변을 들어보고 싶다.
(2) 유현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다움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다. 나는 인간다움은 '자유'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사유의 자유, 행동의 자유, 결정의 자유 등등이 모여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다움이 보장되는 건축의 예를 들자면 하나의 공간 안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서로 다른 형태의 공간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나를 비롯한 인간은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결정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자유함을 느끼고, 그 공간에 애착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의자와 책상이 있는 스터디 카페가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학교 내의 공간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34동 '공ZONE'이다. 이곳에는 단체석, 4인석, 개인석뿐 아니라 스타디움 모양의 둥글고 긴 좌석까지 다양한 목적을 위한 시설들이 좁지만 아담한 한 공간 내에 모여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다보면 내가 똑같이 생긴 자리들 중 하나에 앉아 오랫동안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학교 내 공간은 어디일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근원,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건축물의 형태는 무엇인지도 알고 싶다.
김재민2021-04-07 23:37
재희님 안녕하세요. 두 번째 생각해볼 점에서 34동 공zone 사레를 언급해주신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저도 지난 번에 스쳐가면서 상당히 인상깊었던 곳인데, 그곳의 환경적 특성을 이렇게 풀어 해석해주시는게 참 좋네요!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대개 환경의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틀에박힌 하얀색 톤에 나무 책상보다는, 자연과 변화하는 환경에 있을수록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저도 220동 라운지에서 햇빛도서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사실 햇빛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조로운 형광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시시각각ㄱ 변화하는 빛 속에서 뭔가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유현준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 공간이 계속 머릿 속에서 떠올랐던 것 같아 공유드립니다:)
저도 220동 라운지에서 햇빛도서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사실 햇빛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조로운 형광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시시각각ㄱ 변화하는 빛 속에서 뭔가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유현준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 공간이 계속 머릿 속에서 떠올랐던 것 같아 공유드립니다:)
조단2021-04-07 22:25
사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정치사, 경제사에 집중을 하는 편이지 건축사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이 책이 그래서 더 특별했던 것 같다. 동서양의 다양한 공간들에 대한 설명과 인문학적 해석이 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줬다.
문명의 시작부터 코로나 시대의 공간까지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379쪽의 sns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간을 소유하지 않고 소비한다’라는 문장은 20대들의 삶을 정확하교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월세 30~40만원짜리 반지하 원룸에서 살면서 악착 같이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 친구들과 일박에 40만원짜리 호텔에 가서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호텔 테이블에 샴페인을 올려놓은 다음 꼭 인증샷을 찍고 sns에 업로드한다. 나는 이런 20대들의 문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래의 행복이 너무 멀어져버린 그들이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물론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직 온전히 내 공간도 없으면서 호캉스를 가는 것은 과시욕에 따른 사치라고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문화에 대한 학우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또한 요즘 카페(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 카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싶다. 건물 외벽은 다 뜯어져있고 내부도 마감하지 않은 채 배수관이 다 보이도록 꺼내 놓으면서 이런게 ‘힙’하다고들 한다. 또한 지나치게 낮은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도 이런 카페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공간과는 관련 없지만 터무니 없게 높은 커피와 디저트 가격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한다는 카페의 본질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과연 공간에 본래적인 목적이라는 것을 부여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꼰대 마인드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혹시 인스타 감성 카페를 좋아한다면 왜 이런 카페를 찾게 되는지, 싫어한다면 왜 싫어하는지 학우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문명의 시작부터 코로나 시대의 공간까지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379쪽의 sns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공간을 소유하지 않고 소비한다’라는 문장은 20대들의 삶을 정확하교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월세 30~40만원짜리 반지하 원룸에서 살면서 악착 같이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 친구들과 일박에 40만원짜리 호텔에 가서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호텔 테이블에 샴페인을 올려놓은 다음 꼭 인증샷을 찍고 sns에 업로드한다. 나는 이런 20대들의 문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래의 행복이 너무 멀어져버린 그들이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물론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직 온전히 내 공간도 없으면서 호캉스를 가는 것은 과시욕에 따른 사치라고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문화에 대한 학우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또한 요즘 카페(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 카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싶다. 건물 외벽은 다 뜯어져있고 내부도 마감하지 않은 채 배수관이 다 보이도록 꺼내 놓으면서 이런게 ‘힙’하다고들 한다. 또한 지나치게 낮은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도 이런 카페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공간과는 관련 없지만 터무니 없게 높은 커피와 디저트 가격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한다는 카페의 본질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과연 공간에 본래적인 목적이라는 것을 부여할 수 있을까? 내가 너무 꼰대 마인드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혹시 인스타 감성 카페를 좋아한다면 왜 이런 카페를 찾게 되는지, 싫어한다면 왜 싫어하는지 학우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원재희2021-04-07 22:46
항상 인스타그램을 보고 카페를 찾아가서는 후회만 하고 돌아오는 저로서 이 글이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ㅎㅋㅋ '공간을 소비한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되도 않는' 공간을 카페랍시고 꾸며놓은 것을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 '되도 않는' 공간의 특징부터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대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거나 광활하고 멋있는 자연 속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통로는 잘 찾지 못하도록 해두거나 아주 크고 멋있기도 합니다. 공장처럼 생겼거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하게 생겼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특징은 '일상의 뻔한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경험하지 못하는 분위기와 느낌을 돈을 주고 소비하고 싶어하고, 메뉴의 값이 높을수록 희소성과 가치가 커지기 때문에 그러한 공간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나나랜드'라는 말이 트렌드 2019책에서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사람들은 남들과는 떨어진, 다른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누리길 원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하고 살지는 않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 카페 공간은 적어도 자기와 지인을 포함한 사회망 속에서는 자신만 다녀오고 누렸다는 우월감과 안도감, 독특함을 선물해주는 것 같습니다 .
그렇기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카페, 숨어 있는 카페, 나만 아는 카페 등을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영역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선 그 '되도 않는' 공간의 특징부터 살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대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거나 광활하고 멋있는 자연 속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통로는 잘 찾지 못하도록 해두거나 아주 크고 멋있기도 합니다. 공장처럼 생겼거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하게 생겼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특징은 '일상의 뻔한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경험하지 못하는 분위기와 느낌을 돈을 주고 소비하고 싶어하고, 메뉴의 값이 높을수록 희소성과 가치가 커지기 때문에 그러한 공간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나나랜드'라는 말이 트렌드 2019책에서 등장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사람들은 남들과는 떨어진, 다른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누리길 원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하고 살지는 않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 카페 공간은 적어도 자기와 지인을 포함한 사회망 속에서는 자신만 다녀오고 누렸다는 우월감과 안도감, 독특함을 선물해주는 것 같습니다 .
그렇기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카페, 숨어 있는 카페, 나만 아는 카페 등을 찾아 나서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영역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정빈2021-04-08 13:33
사진을 중심으로 컨텍스트를 전달하는 인스타그램이 주요한 sns로 떠오르면서 우리 일상의 많은 풍경들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sns 상에서의 트렌드가 곧 오프라인 공간의 트렌드에 영향을 주고, 또 이렇게 바뀐 오프라인 공간의 트렌드가 빠르게 sns를 통해 더 널리 확산이 되는 것이 요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용자들은 자신의 피드에 진짜 나에 대한 이야기와 모습을 담기보다는 연극을 하듯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해 그에 걸맞는 사진과 맥락을 선정하고 편집해 올려 페르소나의 피드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조단 님께서 말씀하신 '인스타 감성 카페'는 페르소나의 활동을 위한 연극 무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인스타그래머들을 타겟팅하고 그런 공간을 꾸민 카페의 주인도, 그런 공간을 찾아간 다음 sns에 공유하는 소비자들도 모두 이것이 암묵적인 연극 무대임을 합의하고 철저히 그런 목적으로 공간을 향유하는 것 같습니다.
송혜민2021-04-07 22:38
지난 시간, 서울을 여러 측면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유현준 교수님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라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서울은 단기적으로 보면 50년, 장기적으로 보면 100년이 넘는 기간을 거쳐 완성된 도시이다. 이것을 유현준 교수님의 주장에 따른 도시 형태로 다시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방금 언급한 것처럼 50년이나 걸리진 않겠지만) 분명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 뻔했다. 거리의 모양을 길게 탈바꿈하고, 건물을 다시 지어야하는 등의 과정을 현재 건축에 사용되는 기술을 전제하고 계획하기에는 몇 년의 공사 기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에 서울 거주민들이 발생해야하는 비용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제2의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3D 프린터가 건축에 도입되게 된다면 작은 주택의 경우, 하루 안에도 건축될 수 있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내가 너무 현재에 제한하여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만약 코로나 이후, 사회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게 되었을 때, 이러한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정말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서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최동익2021-04-07 22:40
이 책은 건축을 통해 극동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미국), 두 거대 문명의 차이점을 들여다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합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방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초점은 명확하여 책장을 넘기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속해 있는 동아시아 문화권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도 미치고 있는 유럽/미국 문화권을 다루므로 책 속 예시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익숙한 것들입니다. 물론 책이 설명하지 않은 지역들 또한 나름의 문화를 축적했고 현재도 해당 문화는 향유되며 매력을 뽐내고 있으니 아쉽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이름만 알고 있던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흥미로웠습니다.
건축에 비해 그 비중은 적지만 온라인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몹시 흥미롭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과학 상상화를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저 도시나 우주 도시를 그리곤 했을 텐데 가장 먼저 새롭게 열린 일상의 공간은 가상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영상을 즐기고, 친구와 연락하며, 익명의 사람과 친분을 쌓곤 합니다. 오프라인 공간과는 분명히 달라 그와 똑같은 몰입감을 주지는 못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보면 할 일도 잊고 2시간 정도는 금방 가버리니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제 우리는 온라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대학생으로서, 코로나 19로 인해 통학을 하지 않게 된 요즘에는 더 그러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잘 지적해준 바처럼 온라인 공간과 현실 공간은 차츰차츰 섞여 그 구분은 물론 위계조차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많이 접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텍스트들 또한 애초부터 하나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르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은 아니더라도 개인용 컴퓨터를 가까이 한 세대로서, 온라인 공간이 텍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게 인간의 본능과 가까이 위치하므로 더 중독성이 강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남은 문제는 이미 진행되어 온, 온라인 공간과 현실의 융합을 진단하고 방향성을 재검토하는 일입니다. 온라인 공간에는 어느 정도의 제약이 적합할지, 그 제약은 자율에 맡겨야 할지 법으로까지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일지 등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다시 검토하는 작업인 듯합니다. 만일 우리가 두 공간을 비슷하게 인식한다면 제약 정도 및 방법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딴 얘기지만, 흔히들 말하곤 하는 탈진실의 시대가 정말 찾아왔다면, 어떠한 대응이 적절할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다만 노직이 제시했던 ‘경험 기계’의 비유를 떠올린다면 우리에게는 가상공간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직관 또한 있는 듯합니다. 가상공간의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도시 공간의 변화를 촉구하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생활공간은 아직까지는 현실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창조력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개방성과 화합이 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기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보다 근본적으로 개방성은 화합의 선행 조건이 아닌지 등을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건축에 비해 그 비중은 적지만 온라인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몹시 흥미롭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과학 상상화를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저 도시나 우주 도시를 그리곤 했을 텐데 가장 먼저 새롭게 열린 일상의 공간은 가상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영상을 즐기고, 친구와 연락하며, 익명의 사람과 친분을 쌓곤 합니다. 오프라인 공간과는 분명히 달라 그와 똑같은 몰입감을 주지는 못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다 보면 할 일도 잊고 2시간 정도는 금방 가버리니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제 우리는 온라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대학생으로서, 코로나 19로 인해 통학을 하지 않게 된 요즘에는 더 그러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잘 지적해준 바처럼 온라인 공간과 현실 공간은 차츰차츰 섞여 그 구분은 물론 위계조차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많이 접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텍스트들 또한 애초부터 하나의 공간이었는지도 모르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은 아니더라도 개인용 컴퓨터를 가까이 한 세대로서, 온라인 공간이 텍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게 인간의 본능과 가까이 위치하므로 더 중독성이 강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남은 문제는 이미 진행되어 온, 온라인 공간과 현실의 융합을 진단하고 방향성을 재검토하는 일입니다. 온라인 공간에는 어느 정도의 제약이 적합할지, 그 제약은 자율에 맡겨야 할지 법으로까지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일지 등의 문제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다시 검토하는 작업인 듯합니다. 만일 우리가 두 공간을 비슷하게 인식한다면 제약 정도 및 방법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딴 얘기지만, 흔히들 말하곤 하는 탈진실의 시대가 정말 찾아왔다면, 어떠한 대응이 적절할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다만 노직이 제시했던 ‘경험 기계’의 비유를 떠올린다면 우리에게는 가상공간과 현실을 구분하려는 직관 또한 있는 듯합니다. 가상공간의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도시 공간의 변화를 촉구하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되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생활공간은 아직까지는 현실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창조력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개방성과 화합이 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기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보다 근본적으로 개방성은 화합의 선행 조건이 아닌지 등을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최유리2021-04-07 23:17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이 융합되어 현대의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의 통찰을 제공하는 것에 감탄했다. 그의 책들을 읽다보니 건축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고 기반이 되는 부분인데도 지금까지 그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낀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삶의 방식(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생활 방식과 생각, 행동 등)은 그 나라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기후적 조건에서 아주 큰 영향을 받아왔을 것이며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도 어쩌면 많은 부분을 바꾸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에서의 가상공간,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상현실이 힘을 얻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가상공간에 쏟게 되는 순간이다. 가상공간은 싸고 무한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력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sns와 유튜브에서 가장 큰 마이크를 가진 사람이 곧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타인들이 해당 공간을 이용하는 순간 나도 그 흐름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온라인 공간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오프라인 공간에만 익숙했던 중장년층이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연령의 인구가 적응하면 되는 문제인걸까? 요즘은 온라인 공간을 잘 활용하느냐 아니느냐가 일종의 권력과도 이어지는 것 같다. 과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는 그 때 새로 나타난 흐름들과 공간들에 적응하며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한편으로, 현재 과열되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는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있다. 부동산 시장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오프라인 공간과 권력은 온라인 공간들이 새롭게 탄생하면서 그 중요성이 격하될까, 아니면 도리어 그 희소적인 가치가 증폭될까?
이번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에서의 가상공간,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상현실이 힘을 얻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가상공간에 쏟게 되는 순간이다. 가상공간은 싸고 무한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파급력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sns와 유튜브에서 가장 큰 마이크를 가진 사람이 곧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타인들이 해당 공간을 이용하는 순간 나도 그 흐름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온라인 공간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오프라인 공간에만 익숙했던 중장년층이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과연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연령의 인구가 적응하면 되는 문제인걸까? 요즘은 온라인 공간을 잘 활용하느냐 아니느냐가 일종의 권력과도 이어지는 것 같다. 과연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는 그 때 새로 나타난 흐름들과 공간들에 적응하며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한편으로, 현재 과열되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는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있다. 부동산 시장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오프라인 공간과 권력은 온라인 공간들이 새롭게 탄생하면서 그 중요성이 격하될까, 아니면 도리어 그 희소적인 가치가 증폭될까?
박지유2021-04-07 23:28
저자는 지속적인 고밀화 및 교통기술의 발달로 인한 공간의 압축으로 전염병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고밀화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과거 예방주사의 역할을 IT 기술이 대체해 핀 포인트로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각종 기술을 동원한 방역시도에도 불구, 코로나19는 1년 넘게 지속되며 민생에 전면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게다가 시공간이 지구적으로 압축된 현재, 지구 전체에서 감염병이 종식되기 전까지 우리는 감염병의 종식을 고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저자가 팬데믹의 취약성에 대해 제시한 해결책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의 도시화, 고밀화 경향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속도를 늦추어가며 대안을 모색할 필요는 없을까.
뿐만 아니라, 팬데믹의 확산은 인간들 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에서도 기인하였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는 모두 인수공통감염병, 즉 야생동물로부터 유래된 감염병이다. 이는 인간의 지속적, 공세적인 공간 확장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훼손하고 생태계를 교란시켰기 때문에, 야생동물과 인간 간의 접촉이 늘어나며 감염병에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지리적으로 더 많은 공간을 발견하고 이용하면서 창조의 동력이 마련되었다고 바라보지만, 공간확장의 부작용 또한 직시하고 현재 인류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팬데믹의 확산은 인간들 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에서도 기인하였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는 모두 인수공통감염병, 즉 야생동물로부터 유래된 감염병이다. 이는 인간의 지속적, 공세적인 공간 확장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훼손하고 생태계를 교란시켰기 때문에, 야생동물과 인간 간의 접촉이 늘어나며 감염병에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지리적으로 더 많은 공간을 발견하고 이용하면서 창조의 동력이 마련되었다고 바라보지만, 공간확장의 부작용 또한 직시하고 현재 인류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혜송2021-04-07 23:56
안녕하세요, 지유님! 팬데믹과 환경에 대해 저와 생각이 비슷하신 것 같아 댓글 남깁니다. 저 또한 인류가 자연과 생태계의 영역을 침범하여, 현재 지구 온난화와 같은 여러 환경문제에 직면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번주 수업에서 수중공간에 대해 얘기가 나왔을 때에도, 수중 생태계마저 파괴하면서까지 인류가 영역을 확장할 필요성이 있나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지유님이 지적해주신대로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훼손되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이 늘어나 감염병에 취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생물 다양성이 적어지면서, 생태계가 단순해지면,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희석효과' 또한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동등한 지구의 거주자로서 사람들의 영역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연과 실질적으로 '대화'하는 건축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탈퇴한 회원2021-04-07 23:37
공간이 만든 공간은 공간(지리적 환경)이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건축에 반영되어 결국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등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는 세계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새로운 생각이 공간에 따라서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를 바둑, 체스, 학문 등 다양한 분야와 엮은 점도 참 재밌었습니다. 이런 저자의 폭넓은 식견에 감탄하면서 보게 되는 책인 것 같습니다. 책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세계 전체적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런지, 한국에 관한 내용이 많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공간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책이 나와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셨지만, 아무래도 공간과 관련한 최근의 중심적 화두는 온라인 공간,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의 상관관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온라인 공간이 확대되는 것은 반대로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은 익명성이라는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과밀화되어 있어서 나만의 공간을 가지기 쉽지 않고, 그렇다고 나머지 지역들이 그 안의 사람들을 온전히 그 사람으로서 포용해줄 수 있는가, 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프라나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코로나로 인해서 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들의 폭은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경향들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온라인 공간의 비중이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온라인 공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다만 오프라인 공간에서 주택 문제, 개인 공간의 부재 등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처럼 온라인 공간에서도 권력 문제, 계층 간 사용의 문제 등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 공간이든 온라인 공간이든 일종의 공간을 사용하는 선택지로서 온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 시스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셨지만, 아무래도 공간과 관련한 최근의 중심적 화두는 온라인 공간,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의 상관관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온라인 공간이 확대되는 것은 반대로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큰 도시인 서울은 익명성이라는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과밀화되어 있어서 나만의 공간을 가지기 쉽지 않고, 그렇다고 나머지 지역들이 그 안의 사람들을 온전히 그 사람으로서 포용해줄 수 있는가, 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프라나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코로나로 인해서 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들의 폭은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경향들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온라인 공간의 비중이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온라인 공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다만 오프라인 공간에서 주택 문제, 개인 공간의 부재 등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처럼 온라인 공간에서도 권력 문제, 계층 간 사용의 문제 등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라인 공간이든 온라인 공간이든 일종의 공간을 사용하는 선택지로서 온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 시스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성민2021-04-08 08:35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현재의 서울과 각종 정책들이 포용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몰리면서 보다 다양한 계층과 인종, 문화가 교류하는데, 아직 서울이란 도시는 이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더 포용적인 도시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회피로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오프라인 세계보다 더 평등하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시공간의 제약이 없다거나, 아직 계층이 없는 등) 온라인 공간을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정치적, 문화적인 교류와 소통의 장으로 사용한다면 좋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회피로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오프라인 세계보다 더 평등하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시공간의 제약이 없다거나, 아직 계층이 없는 등) 온라인 공간을 단순한 도피처가 아닌 정치적, 문화적인 교류와 소통의 장으로 사용한다면 좋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최민정2021-04-07 23:39
‘건축가가 공간으로 읽어내는 세계사’ 지난 여름 이 책을 제주도에서 사서 읽었다. 좋아하는 북튜버의 채널에서 유현준 교수님이 이 책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했다. 그 세계사에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 다채로운 요소가 가득했다. 읽으면서 모든 문장에 동의하지는 못했다 해도, 문장마다 깃들어있는 독특한 생각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 참신함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하던 차에, 해당 영상에서 교수님은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해서 본인의 책에는 각주가 별로 없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각주가 없는 주장. 논문이나 학문적 보고서를 쓸 때 환영 받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새롭게 생각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교수님께서 파주출판단지, 대덕 연구 단지 등과 같이 일정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흩어진 상황을 비판하며, fast follower일 때는 이게 좋을지 모르나 새로운 창작을 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지적한 점에 착안하여 우리 수업이 각 학과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모여 여러 주제로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논의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회가 가득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각주가 없는 주장. 논문이나 학문적 보고서를 쓸 때 환영 받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새롭게 생각하는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교수님께서 파주출판단지, 대덕 연구 단지 등과 같이 일정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이 흩어진 상황을 비판하며, fast follower일 때는 이게 좋을지 모르나 새로운 창작을 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지적한 점에 착안하여 우리 수업이 각 학과에 얽매이지 않고 함께 모여 여러 주제로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논의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회가 가득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경제웅2021-04-08 01:30
민정님 안녕하세요!
"각주가 없는 주장"이라는 표현이 유현준 교수의 저작 전반의 스타일을 탁월하게 압축하는 듯해요. 저는 "각주가 없는 주장"이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요. 지난주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부터 확인한 바로, 유현준 교수는 섬세한 논리보다는 직관으로 글을 풀어 갑니다. 이를테면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당시 단층 건물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894년 동학혁명은 실패하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1987년 6월항쟁은 성공했다고 적은 뒤, “이런 내용의 사회학 논문을 본 적은 없다”(360쪽)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근거 없는' 이런 상상력은, 각주에 각주만 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석과도 같다고 보아요. 때로는 직관이 논리보다 강력하니까요. 예수도 논증이 아닌,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같은 직관적인 은유로 수천 군중을 응집시켰듯이요.
"각주가 없는 주장"이라는 표현이 유현준 교수의 저작 전반의 스타일을 탁월하게 압축하는 듯해요. 저는 "각주가 없는 주장"이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요. 지난주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부터 확인한 바로, 유현준 교수는 섬세한 논리보다는 직관으로 글을 풀어 갑니다. 이를테면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당시 단층 건물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894년 동학혁명은 실패하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에 1987년 6월항쟁은 성공했다고 적은 뒤, “이런 내용의 사회학 논문을 본 적은 없다”(360쪽)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근거 없는' 이런 상상력은, 각주에 각주만 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석과도 같다고 보아요. 때로는 직관이 논리보다 강력하니까요. 예수도 논증이 아닌,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같은 직관적인 은유로 수천 군중을 응집시켰듯이요.
경제웅2021-04-07 23:49
공간이 사람을 그러모으는 힘에 대해 내 경험과 연결 지어 보고, 공간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10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본 적이 딱 두 번 있다. 꽤나 희귀한 경험이라 생생하다. 4년 전 낮의 양화대교, 작년 밤의 한남대교. 공교롭게도 두 날 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한강 하면 상상되는 촉촉한 운치는 즐기지 못했다(지나치게 축축했다). 게다가 두 날 다 걷고 싶어서 걸은 것이 아니었다. 4년 전에는 어떤 공모전에 출품할 영상을 찍어야 했고, 작년에는 한남동에서 술자리를 파하고 늦은 시간까지 열린 상가 화장실을 찾아다니다가 잠원동까지 이르렀다.
한강을 수백 번 건넜을 텐데 그중 걸어서 건널 일이 두 번이었다는 것은, 한강 다리가 분명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나만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임을 감안하고서도 말이다. 저자는 두 가지 문제를 짚는다. 첫째, 걸을 때 풍경이 바뀌지 않는다. 가령 이전 저작들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하듯 “마포대교를 건너려면 약 20분가량 걸리는데 걷는 내내 정면에 펼쳐진 여의도 풍경이 하나도 안 바뀌어서 지루해서 힘들다”. 둘째,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자동차로 인해 전반적인 공간의 속도가 시속 4km보다 훨씬 높아지면, 보행자는 공간에 압도되어 마음 편히 걷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과연 첫째가 공간의 보행자 친화도를 약화하는 중요한 요인인지 의문을 던지고 싶다. 집중해야 할 요인은 둘째라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해 많은 시민이 한강변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2019년 한 해 한강공원 일반이용자 수만 2,948만 명이고, 자전거이용자 수를 더하면 4,338만 명이다*. 한강변은 이벤트 밀도가 0에 수렴한다. 오래 걸어도 펼쳐지는 풍경은 똑같은 물, 똑같은 섬이다. 가게라고는 가끔 편의점이 있을 뿐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2^n이라는 이벤트 수는 매우 낮다. 그래도 괜찮다. 홍대 거리나 가로수길보다 재미는 덜해도, 바로 그 ‘재미없음’ 때문에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은 이미 이벤트로 가득 차 있다. 정적인 길을 걸으면서 덜어내야 한다. 정적이기 때문에 길 자체에 집중할 무엇이 없고, 집중할 무엇이 없기 때문에 함께 걷는 친구와 허심탄회한 고민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곳이 부족하다. 차도에 접한 인도를 걸을 때면 자동차의 속력 때문에 전혀 편하지가 않다. 지하철 환승역에서는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인파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쇼핑몰을 둘러볼 때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늘 민첩한 스텝을 유지하며 긴장해야 한다. 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다. 공간의 속도 낮추기가 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게 만드는 데 결정적이다.
* https://data.seoul.go.kr/dataList/10798/S/2/datasetView.do
한강을 수백 번 건넜을 텐데 그중 걸어서 건널 일이 두 번이었다는 것은, 한강 다리가 분명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나만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임을 감안하고서도 말이다. 저자는 두 가지 문제를 짚는다. 첫째, 걸을 때 풍경이 바뀌지 않는다. 가령 이전 저작들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하듯 “마포대교를 건너려면 약 20분가량 걸리는데 걷는 내내 정면에 펼쳐진 여의도 풍경이 하나도 안 바뀌어서 지루해서 힘들다”. 둘째,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자동차로 인해 전반적인 공간의 속도가 시속 4km보다 훨씬 높아지면, 보행자는 공간에 압도되어 마음 편히 걷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과연 첫째가 공간의 보행자 친화도를 약화하는 중요한 요인인지 의문을 던지고 싶다. 집중해야 할 요인은 둘째라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해 많은 시민이 한강변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2019년 한 해 한강공원 일반이용자 수만 2,948만 명이고, 자전거이용자 수를 더하면 4,338만 명이다*. 한강변은 이벤트 밀도가 0에 수렴한다. 오래 걸어도 펼쳐지는 풍경은 똑같은 물, 똑같은 섬이다. 가게라고는 가끔 편의점이 있을 뿐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2^n이라는 이벤트 수는 매우 낮다. 그래도 괜찮다. 홍대 거리나 가로수길보다 재미는 덜해도, 바로 그 ‘재미없음’ 때문에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은 이미 이벤트로 가득 차 있다. 정적인 길을 걸으면서 덜어내야 한다. 정적이기 때문에 길 자체에 집중할 무엇이 없고, 집중할 무엇이 없기 때문에 함께 걷는 친구와 허심탄회한 고민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곳이 부족하다. 차도에 접한 인도를 걸을 때면 자동차의 속력 때문에 전혀 편하지가 않다. 지하철 환승역에서는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인파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쇼핑몰을 둘러볼 때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늘 민첩한 스텝을 유지하며 긴장해야 한다. 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다. 공간의 속도 낮추기가 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게 만드는 데 결정적이다.
* https://data.seoul.go.kr/dataList/10798/S/2/datasetView.do
장연주2021-04-08 00:05
한강이 재미없기 때문에 더 끌린다는 말 정말 동의합니다! 제웅님 말처럼 우리 삶이 이미 너무나 많은 이벤트들도 차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적막한 곳을 찾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홍대, 가로수길, 명동 등 사람들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이 잘 와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벤트 밀도의 개념보다는 지적해주신 것처럼 차량의 속도가 더 중요한 변수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최근에 느낀건데, 차량 속도만큼 중요한 게 차량 소음인 것 같더라고요! 차가 빨리 달려도 소음이 잘 흡수되는 곳은 괜찮은데, 그렇지 못한 곳은 정말 걷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공감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오서림2021-04-08 14:36
한강의 공간 속도와 관련한 의견에 공감합니다. 다만 한강의 경우는 보행 도로와 차도는 오히려 명확히 분리되어 있고, 자전거 도로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그 점이 공간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는 것에 핵심적인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비교적 차도의 영향이 매우 큰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그리고 한강이 매력적인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중간중간 놓인 공원이 매우 활성화되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강이 서울을 크게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리할 수 있다는 점, 단지 작은 돗자리 안 공간일지라도 그곳에 자리하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한강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인 것 같아요.
임채미2021-04-07 23:50
이 책은 주로 동양과 서양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동양의 공동체주의와 서양의 개인주의가 벼농사와 밀농사의 차이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는 우열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지리적 특징, 즉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고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서양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동양이 추구해야 할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을 들이미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그래도 질문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가치관이 우세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동양의 가치관이 오히려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로웠던 개념은 해체주의이다. 인문학, 즉 관념에 의거하여 건축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소외해 버렸다는 것에서 기능을 강조하지 않는 건축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건축도 인간을 위해서 생겨난 학문일 뿐 주객전도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사회 이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인간 소외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성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기술들이 결국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면 그것보다 모순적인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을 지키며 인간과 컴퓨터가 협업한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로웠던 개념은 해체주의이다. 인문학, 즉 관념에 의거하여 건축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소외해 버렸다는 것에서 기능을 강조하지 않는 건축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건축도 인간을 위해서 생겨난 학문일 뿐 주객전도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해서 다양한 사회 이슈를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도 인간 소외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성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기술들이 결국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면 그것보다 모순적인 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을 지키며 인간과 컴퓨터가 협업한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박규리2021-04-07 23:55
우리는 으레 자연과 문명을 구분한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문명의 발전에 깊숙하게 관여해왔다. 흔히 동서양 간에 차이는 실감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자라온 땅 때문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으면서도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던 사실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자연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 나는 내가 자꾸 옛것을 쓰다듬게 되는 원인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디지털화되고 데이터화 되는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남을 수 있는 불편한 무언가를 자꾸만 찾게 된다는 지적에 크게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세상에 잡아먹혀 가는 아날로그 세상을 붙잡아두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기에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불편함은 새로운 생각을 틔워내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견뎌야 할 때 주목할 만한 가치가 나오기도 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도덕은 불편함의 감수이다. 물론 이것은 때로 폭력적인 관습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쉬운 편안함이 상식의 부재를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편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나오는 말들. 편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쉽게 쓰고 버려지는 물건들... 때로는 불편함에서 나오는 가치들이 급속도로 편해지는 세상에 쉽게 없어져 버린다. 책을 덮을 때 그런 탄식이 가장 먼저 나왔던 것 같다.
장연주2021-04-07 23:59
시간과 공간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우리는 특정 공간에서는 공적 시간을, 또 다른 공간에서는 사적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온라인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모두 무너졌음을 느낀다. 가령 코로나19 이전이었다면 상상하지도 못했을 “밤 11시 팀플”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서 회의에 참여하는 “이동 중 팀플”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책에서 자율주행 자동차가 활성화되면 이동 시간은 더 이상 낭비 시간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현상인 걸까 의문이 들었다. 늦은 밤 시간과 이동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었고, 그때만큼은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클릭 몇 번으로 만남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요즘엔 24시간을 더 잘게 쪼개서-1시간씩 24번이 아니라 30분씩 48번-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대면 만남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훨씬 바쁘게 느껴진다. 피로도는 점점 증가하고, 시간은 자꾸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나만의 공간이 없다고 느껴지니 틈새의 휴식시간에 가상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자율주행 자동차가 활성화되면 이동 시간은 더 이상 낭비 시간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현상인 걸까 의문이 들었다. 늦은 밤 시간과 이동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었고, 그때만큼은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일을 하며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클릭 몇 번으로 만남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요즘엔 24시간을 더 잘게 쪼개서-1시간씩 24번이 아니라 30분씩 48번-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대면 만남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훨씬 바쁘게 느껴진다. 피로도는 점점 증가하고, 시간은 자꾸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나만의 공간이 없다고 느껴지니 틈새의 휴식시간에 가상공간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다솔2021-04-08 13:41
연주 학우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코로나 덕분에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는 데에 매우 공감합니다.
오프라인 상에서는 10시 이후의 모든 모임이 금지되어 모든 활동이 중단된 것 같아 보이지만, 반대로 대신 밤 11시 팀플, 토론 등이 생기면서 오히려 시간이 꽉 차는 느낌이었고,
이동시간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 통학 할 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3연강을 패기롭게 신청하고, 수강하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 많이 확보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하는 물음에 인간의 노동시간을 줄여준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탁기, 식기세척기 등이 인간의 노동시간을 줄여주어 우리의 삶이 매우 편리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시간=돈'이라는 기본적인 가정이 변하지 않고, 돈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동 시간이 줄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을 오히려 속박시키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오프라인 상에서는 10시 이후의 모든 모임이 금지되어 모든 활동이 중단된 것 같아 보이지만, 반대로 대신 밤 11시 팀플, 토론 등이 생기면서 오히려 시간이 꽉 차는 느낌이었고,
이동시간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 통학 할 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3연강을 패기롭게 신청하고, 수강하고 있는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더 많이 확보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하는 물음에 인간의 노동시간을 줄여준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탁기, 식기세척기 등이 인간의 노동시간을 줄여주어 우리의 삶이 매우 편리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시간=돈'이라는 기본적인 가정이 변하지 않고, 돈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동 시간이 줄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을 오히려 속박시키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오서림2021-04-08 00:03
다른 문화권의 건축 양식의 차이는 주로 환경에 의해 생겨나 자리 잡은 사고방식과 가치관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 소통이 가능해지며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처럼 명백한 분류는 최근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찾아내기 어려워 보인다. 닮아가는 건축양식은 문화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건축은 비강제적이고 무의도적일지라도 막대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서양 건축가의 문화 유전자에 동양적 스타일이 융합된 건축 사례는 동양 문화의 소프트 파워를 생각해보게 한다. 지금까지 명백했던 힘의 우위로 인해 동양이 놓였던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를 역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이종 교배'는 유전자 차이로 비유될 정도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동서양의 거리를 실질적으로 좁히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유현준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코로나 이후의 공간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나는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활동을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다고 느낀 공간만 선택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디지털 세계에서 제공할 수 없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간이 공간을 점유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소통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상당부분 온라인 채널로 대체되었다. 업무 역시 표준화된 매뉴얼과 숙련된 경험만 있다면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부분이 하나 둘 디지털 세계에서 이루어지면, 어떤 경험이 차별성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유현준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코로나 이후의 공간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나는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활동을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다고 느낀 공간만 선택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디지털 세계에서 제공할 수 없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간이 공간을 점유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소통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상당부분 온라인 채널로 대체되었다. 업무 역시 표준화된 매뉴얼과 숙련된 경험만 있다면 온라인으로 대체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부분이 하나 둘 디지털 세계에서 이루어지면, 어떤 경험이 차별성이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윤재빈2021-04-08 00:07
<공간이 만든 공간>은 빙하기 이후 인류가 문화권별로 어떻게 적응 및 진화해 왔으며, 그러한 과정에 어떻게 건축에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동서양의 문화적 융합을 거쳐 신기술과의 융합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축물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리적 이종 교배의 시대는 끝이 났다'라고 지적하였는데, 다른 예술 분야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흐름(영감의 고갈?)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다.
특히 평소 관심이 많은 '패션' 분야와 연관지어서 생각을 해 보았다.
패션도 건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템들을 만들어냈다. 캐주얼룩에 자주 활용되는 카디건은 전쟁 당시 부상병이 옷을 쉽게 입고 벗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떡볶이 코트라 불리는 '더플코트' 역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이 장갑을 낀 채로 단추를 잠글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큰 단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의 활동은 과거와 달리 사실상 어떤 옷을 입어도 큰 제약이 없고, 환경상의 자극이 없기 때문에 새롭게 무언갈 창조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다.
최근 불고 있는 '레트로 열풍'도 이러한 소재(영감)의 고갈 상황에서 자기반복적인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였듯이 신기술과 결합한 옷들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으나, 웨어러블하지 않거나, 기술과의 결합만을 강조하는 현학적인 느낌도 든다.
마치 사진기의 발명 이후 현대미술이 난해한 형태로 발전한 것처럼, 패션도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큰 충격이었던 Thom Browne 2020 s/s Collection
https://www.thombrowne.com/kr/collection/mens-spring-summer-2020-runway
패션,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가 어떤 형태로 발전해나갈지 궁금하다.
저자는 '지리적 이종 교배의 시대는 끝이 났다'라고 지적하였는데, 다른 예술 분야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흐름(영감의 고갈?)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다.
특히 평소 관심이 많은 '패션' 분야와 연관지어서 생각을 해 보았다.
패션도 건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아이템들을 만들어냈다. 캐주얼룩에 자주 활용되는 카디건은 전쟁 당시 부상병이 옷을 쉽게 입고 벗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떡볶이 코트라 불리는 '더플코트' 역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이 장갑을 낀 채로 단추를 잠글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큰 단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의 활동은 과거와 달리 사실상 어떤 옷을 입어도 큰 제약이 없고, 환경상의 자극이 없기 때문에 새롭게 무언갈 창조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다.
최근 불고 있는 '레트로 열풍'도 이러한 소재(영감)의 고갈 상황에서 자기반복적인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였듯이 신기술과 결합한 옷들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으나, 웨어러블하지 않거나, 기술과의 결합만을 강조하는 현학적인 느낌도 든다.
마치 사진기의 발명 이후 현대미술이 난해한 형태로 발전한 것처럼, 패션도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큰 충격이었던 Thom Browne 2020 s/s Collection
https://www.thombrowne.com/kr/collection/mens-spring-summer-2020-runway
패션,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가 어떤 형태로 발전해나갈지 궁금하다.
최서원2021-04-08 00:11
글을 읽으며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건축의 미래, 새로운 기술들과 건축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건축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서 기술의 발전에 따라 크게 변화하는 부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메타버스' 안의 사람들이 소통하고 융합하는 공간들 역시도 건축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가상공간의 확장과 발전이 공간의 의미를 바꾸어놓았다는 부분이 참 기억에 남는데, SNS 상에서 일명 인스타 핫플을 소비하는 문화에 관한 것이다. 과거였다면 허름하다고 생각했을, 혹은 전혀 인체공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공간들에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는 모습은 앞으로의 건축이 결국 '소비' 위주로 굴러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동시에, 세대간의 단절 역시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한 예시처럼 을지로의 카페들은 의도적으로 찾아오기 어렵게, 특정 층만 소비하길 의도하여 건축되었기에 세대간의 단절을 심화시킨다. 사실 팬데믹 상황이 없었다면 세대간의 단절이 이미 고착화되어 건축물로서 이를 해소할 방안들은 실질적으로 효과가 없었을 것 같지만,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 위기 상황에서는 큰 변화들이 쉽게 일어나기에, 이 시기를 활용해 세대간의 소통을 활성화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이 많이 구성된다면 좋을 것 같다. 지난 시간에 등장했던 ‘도시 공원’ 활성화가 그 방안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단2021-04-08 11:45
서원 학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과 서원님이 생각하시기에 흥미로웠던 부분이 많이 겹치는 것 같아 신기하네요!
인스타 핫플과 같은 곳에 대한 생각을 저 역시 해봤지만 세대 간의 단절까지는 고려 못했던 것 같습니다. 20대들 사이에서도 인스타 감성 카페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도저히 '그 감성'을 이해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들만의 문화가 다른 세대에게는 소외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을지로, 경리단길 카페 거리와 같은 곳에서는 공감대를 찾기 힘들지만 도시 근교에 있는 넓은 카페들은 오히려 부모님 세대가 더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넓은 잔디밭과 큼지막한 공간들을 보며 숨통을 틔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근교 카페를 좋아하시고 우리 세대는 맛있는 디저트와 인스타에 올릴 수 있는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근교 카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 세대가 서로 다른 경험을 하지만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야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예시로는 어떤 공간이 있는지 학우분들의 아이디어가 궁금합니다.
인스타 핫플과 같은 곳에 대한 생각을 저 역시 해봤지만 세대 간의 단절까지는 고려 못했던 것 같습니다. 20대들 사이에서도 인스타 감성 카페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도저히 '그 감성'을 이해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들만의 문화가 다른 세대에게는 소외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을지로, 경리단길 카페 거리와 같은 곳에서는 공감대를 찾기 힘들지만 도시 근교에 있는 넓은 카페들은 오히려 부모님 세대가 더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 세대는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넓은 잔디밭과 큼지막한 공간들을 보며 숨통을 틔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근교 카페를 좋아하시고 우리 세대는 맛있는 디저트와 인스타에 올릴 수 있는 사진을 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근교 카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두 세대가 서로 다른 경험을 하지만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야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예시로는 어떤 공간이 있는지 학우분들의 아이디어가 궁금합니다.
탈퇴한 회원2021-04-08 12:26
안녕하세요 서원님 세대 단절, 소통문제를 생각하니까 개인적으로는 호칭 문화가 먼저 떠오르네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굉장히 관계중심적인 문화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과 나의 합이 잘 맞는 문제보다는 내가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가 대화의 종류, 내용 등을 정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알기 전까지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문화적 요소들과 서원님이 말씀해주신 새로운 공간적 요소들로 조금 해소가 될 수 있을지, 어떤 방향으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해나가야할지 같이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김혜령2021-04-08 00:21
확실히 지난주 도서보다 본인이 도시를 비유하고 바라보는 측면들이 더 자세하게 드러나서 납득이 가는 부분들이 생겼다.
특히 내가 서양미술사나 여러 우리나라 및 해외 미술관, 전시관들을 돌며 배우고 본 내용들, 방문했던 건축물들이 등장해서 빠르게 어떤 인류 건축관점으로의 역사를 다시 정리한 것 같아 좋았다.
허나 아쉬웠던 점은 뒷부분에 중요한 내용이 너무 짧게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 문장은, 어쩌면 이미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 책의 2/3 분량 이상을 서술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사이버공간에 대한 이야기, 안도 다다오 이후 미래의 건축의 지향점 등은 스쳐 지나갔다. 사이버공간이라는 특성이 평등함이나 민주주의를 더 가져오는지, 사람들을 더 통합시켜주는지 등의 논의나, 건축의 관점에서 실제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 3차원 공간의 어떤 좌표점을 두 개 이상의 대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이 더이상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상공간이라는 무한함, 동시에 그 무한한 전자공간은 지구어딘가 금속 서버에서 구현되는 것 또는 지구의 물리환경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인공지능 또는 맞춤 광고 정보제안 등이 오히려 내 관심사 밖의 것들은 더 배척하도록 만든다는 지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결함이나 본인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등을 고려했을 때 '가상공간에서의 건축'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건축'은 분명 깊게 다뤄져야할 현대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가상공간에서의 건축'이라면 VR이나 게임 세계관 등이 있을 것이고, 현실과 비현실의 다리 역할 또는 그 구분이 모호한 건축이라면 sns공간, 홈페이지, 블로그 등이 있을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건축할 때는 그 어떤 물리적, 재료적 제한이 없다. 예로부터 심즈(Sims),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와 같은 인생시뮬레이션 아바타 게임과 더불어, 최근 유행하는 것은 Earth2라는 것이 있다. 가상 지구에 부동산을 점유하는 것인데, 실제 현금으로 결제함으로써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게임 속 지구는 분명 현실의 시뮬라르크에 불과하지만, 그 시뮬라르크에 단 5평의 땅이라도 점유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화폐 관념을 그대로 적용시킨다.
저자가 말한 것중에 공감한 것은 바로 사이보그 대목이다. 현대인들은 이미 충분히 '사이보그화'되었다.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 현대기술문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이 짙은 안개같은 모호함을 더 열심히 부유해 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해본다. 더 운동성 있는 입자가 되어 더 깊은 사이버세계로도 가보고, 더 깊은 현실속 만남의 가치 또한 발견해 보는 것이다. 대자연과의 조우에서 한 인간의 나약함도 마주해보고, 무한할 것 같은 디지털 세계가 마비되는 현상도 겪어보며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데에 어떤 것들이 차지하는지, 즉, 생명의 공간이 현재에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지 체화해보는 것이다. 그 후에,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첨단 VR 속 세상이든, 60년대의 히피문화를 이어가는 라이프 스타일이든, 팝 뮤직을 들으며 다운타운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든, 기술과 결합된 현대문명 속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직 타임머신이라는 것은 없지만, 과거 6-70년대에는 훌륭한 음악 앨범도 시간이 지나면 '유행이 지났다'며 버렸다고 한다. 즉, 디지털 공간에 지금처럼 돌고돌아 보존되지 않고 테이프가 타고난 재로 사라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by 사이먼 레이놀즈의 음악평론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나는 디지털로 내가 60년대의 Kraut Rock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시간여행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공간의 가치는 그런 것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마음껏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그만큼 내가 내 삶을 형성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자유를 제한받거나, 감시당하거나, 나도 모르게 어떤 사상에 의해 일련의 행동양식을 하도록 만들어졌다거나 등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르코르뷔지에가 현대건축의 척도를 제시했지만, 그 '평균' 인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 투성이인 것처럼, 가상공간만큼은 건축이나 어떤 국가, 정치, 제도가 개입하여 사람들을 '정상범주화' 한다거나, 특정한 사고방식, 외적 가치들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는 건축이 되려 사이버공간을 그렇게 접근할까봐 우려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만큼 개인들은 더 감각을 넓히고 본인에 맞는 정보를, ai가 추천하는 것 외에 직접 검색하고, 고문서, 옛 신문, 박물관에서의 내용들을 또 검색해보고 등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정보취합과정을 거치고, 정보망을 구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고 사이버공간에서 그 후에 나에게 맞는 시대상, 자아,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기본 단계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가 서양미술사나 여러 우리나라 및 해외 미술관, 전시관들을 돌며 배우고 본 내용들, 방문했던 건축물들이 등장해서 빠르게 어떤 인류 건축관점으로의 역사를 다시 정리한 것 같아 좋았다.
허나 아쉬웠던 점은 뒷부분에 중요한 내용이 너무 짧게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 문장은, 어쩌면 이미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 책의 2/3 분량 이상을 서술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사이버공간에 대한 이야기, 안도 다다오 이후 미래의 건축의 지향점 등은 스쳐 지나갔다. 사이버공간이라는 특성이 평등함이나 민주주의를 더 가져오는지, 사람들을 더 통합시켜주는지 등의 논의나, 건축의 관점에서 실제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 3차원 공간의 어떤 좌표점을 두 개 이상의 대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이 더이상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상공간이라는 무한함, 동시에 그 무한한 전자공간은 지구어딘가 금속 서버에서 구현되는 것 또는 지구의 물리환경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인공지능 또는 맞춤 광고 정보제안 등이 오히려 내 관심사 밖의 것들은 더 배척하도록 만든다는 지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결함이나 본인 현실의 구속에서 벗어나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등을 고려했을 때 '가상공간에서의 건축'과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건축'은 분명 깊게 다뤄져야할 현대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가상공간에서의 건축'이라면 VR이나 게임 세계관 등이 있을 것이고, 현실과 비현실의 다리 역할 또는 그 구분이 모호한 건축이라면 sns공간, 홈페이지, 블로그 등이 있을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건축할 때는 그 어떤 물리적, 재료적 제한이 없다. 예로부터 심즈(Sims),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와 같은 인생시뮬레이션 아바타 게임과 더불어, 최근 유행하는 것은 Earth2라는 것이 있다. 가상 지구에 부동산을 점유하는 것인데, 실제 현금으로 결제함으로써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게임 속 지구는 분명 현실의 시뮬라르크에 불과하지만, 그 시뮬라르크에 단 5평의 땅이라도 점유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화폐 관념을 그대로 적용시킨다.
저자가 말한 것중에 공감한 것은 바로 사이보그 대목이다. 현대인들은 이미 충분히 '사이보그화'되었다.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 현대기술문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이 짙은 안개같은 모호함을 더 열심히 부유해 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해본다. 더 운동성 있는 입자가 되어 더 깊은 사이버세계로도 가보고, 더 깊은 현실속 만남의 가치 또한 발견해 보는 것이다. 대자연과의 조우에서 한 인간의 나약함도 마주해보고, 무한할 것 같은 디지털 세계가 마비되는 현상도 겪어보며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데에 어떤 것들이 차지하는지, 즉, 생명의 공간이 현재에 어떻게 영위되고 있는지 체화해보는 것이다. 그 후에,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첨단 VR 속 세상이든, 60년대의 히피문화를 이어가는 라이프 스타일이든, 팝 뮤직을 들으며 다운타운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든, 기술과 결합된 현대문명 속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직 타임머신이라는 것은 없지만, 과거 6-70년대에는 훌륭한 음악 앨범도 시간이 지나면 '유행이 지났다'며 버렸다고 한다. 즉, 디지털 공간에 지금처럼 돌고돌아 보존되지 않고 테이프가 타고난 재로 사라지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by 사이먼 레이놀즈의 음악평론에서 등장하는 말이다) 나는 디지털로 내가 60년대의 Kraut Rock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시간여행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공간의 가치는 그런 것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를 마음껏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그만큼 내가 내 삶을 형성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자유를 제한받거나, 감시당하거나, 나도 모르게 어떤 사상에 의해 일련의 행동양식을 하도록 만들어졌다거나 등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르코르뷔지에가 현대건축의 척도를 제시했지만, 그 '평균' 인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 투성이인 것처럼, 가상공간만큼은 건축이나 어떤 국가, 정치, 제도가 개입하여 사람들을 '정상범주화' 한다거나, 특정한 사고방식, 외적 가치들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는 건축이 되려 사이버공간을 그렇게 접근할까봐 우려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만큼 개인들은 더 감각을 넓히고 본인에 맞는 정보를, ai가 추천하는 것 외에 직접 검색하고, 고문서, 옛 신문, 박물관에서의 내용들을 또 검색해보고 등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정보취합과정을 거치고, 정보망을 구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고 사이버공간에서 그 후에 나에게 맞는 시대상, 자아,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기본 단계라고 생각한다.
윤재빈2021-04-08 01:00
"디지털로 60년대의 Kraut Rock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시간여행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깊습니다.
저는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부는 것이 더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된 부정적인 상황으로 느껴졌는데,
혜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접할 수도 없었던 무수히 많은 인간 역사 속의 창작물들을 내 취향에 맞게 골라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다고도 느껴집니다. 그간 자유라고 '착각'했던 '평균' 속에서의 자유 차원을 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부는 것이 더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된 부정적인 상황으로 느껴졌는데,
혜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접할 수도 없었던 무수히 많은 인간 역사 속의 창작물들을 내 취향에 맞게 골라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다고도 느껴집니다. 그간 자유라고 '착각'했던 '평균' 속에서의 자유 차원을 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조용수2021-04-08 11:26
앞선 두 책과는 달리, 이 책은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동양과 서양의 건축사를 자세히 살펴보는 형식을 띠고 있다. 덕분에 이전 책에서 논의된 바 있었던 동양과 서양의 농사 방식 차이에 따른 사고 방식의 차이를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다양성이 사라져가는 추세는 비단 건축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쿠팡, 아마존과 같은 대기업들이 기존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산업들을 독점해 나가는 것처럼, 서비스의 획일화와 승자독식 구조는 세계화 시대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건축 부분에 있어서 메타버스가 이러한 획일화 현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메타버스 내에서는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여러 제약 조건이 사라진다. 심지어 유현준 교수님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했던 중력의 제약도 따를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와 건축의 융합이 보여줬던 것 이상의 독특한 건축물을 메타버스 내에서는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물론 현재 소수의 다국적 기업들의 가상 공간 독점 현상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현재 메타버스 산업은 과도기에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이미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다국적 기업들의 반독점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공간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다양성이 사라져가는 추세는 비단 건축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다. 쿠팡, 아마존과 같은 대기업들이 기존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산업들을 독점해 나가는 것처럼, 서비스의 획일화와 승자독식 구조는 세계화 시대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건축 부분에 있어서 메타버스가 이러한 획일화 현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메타버스 내에서는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여러 제약 조건이 사라진다. 심지어 유현준 교수님이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했던 중력의 제약도 따를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컴퓨터와 건축의 융합이 보여줬던 것 이상의 독특한 건축물을 메타버스 내에서는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물론 현재 소수의 다국적 기업들의 가상 공간 독점 현상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현재 메타버스 산업은 과도기에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이미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 다국적 기업들의 반독점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공간에 다양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장원2021-04-08 12:28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이어 읽게 된 <공간이 만든 공간>은 기존에 유현준 교수님의 책에 쓰셨던 철학과는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서술하신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서양의 공간은 수학적·과학적으로 분석되는 공간이라면 동양의 공간은 여백의 미를 충분히 살린 공간이라는 서술이었다. 황금비율, 고딕 양식 등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축학적 개념들은 대부분 서양의 공간, 건축물들의 미를 수리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배흘림 기둥과 같이 하나의 규칙으로 변환될 수 없는 한국스러움이 동양 공간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건축의 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건축과 공간 형성이 포스트 팬데믹 이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싶다. 다시 관광 산업이 생명력을 띌 때, 우리만의 멋을 보여줄 수 있는 팬션, 건축물, 박물관 등이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옥마을처럼 발전한다면 관광 산업에서 또다른 원동력을 찾을 것이라 기대한다.
추가적으로 서울대학교에도 규장각을 제외하면 한국스러운 건축물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이전에 두레문예관에는 다향만담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이 곳의 내부 인테리어는 한옥과 유사하였고, 좌식 테이블과 원목 테이블이 조화롭게 놓여 있어, 바쁜 시험기간에 머리를 식히러 종종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다향만담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그런 공간이 밖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있었고, 그 찻집에 대한 홍보조차 많지 않았다. 여담이 길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이처럼 한국스러움을 살리는 공간들이 학교 내에 더 형성된다면 현재 딱히 존재하지 않는 우리 학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보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건축의 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건축과 공간 형성이 포스트 팬데믹 이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싶다. 다시 관광 산업이 생명력을 띌 때, 우리만의 멋을 보여줄 수 있는 팬션, 건축물, 박물관 등이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옥마을처럼 발전한다면 관광 산업에서 또다른 원동력을 찾을 것이라 기대한다.
추가적으로 서울대학교에도 규장각을 제외하면 한국스러운 건축물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이전에 두레문예관에는 다향만담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이 곳의 내부 인테리어는 한옥과 유사하였고, 좌식 테이블과 원목 테이블이 조화롭게 놓여 있어, 바쁜 시험기간에 머리를 식히러 종종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다향만담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그런 공간이 밖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있었고, 그 찻집에 대한 홍보조차 많지 않았다. 여담이 길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이처럼 한국스러움을 살리는 공간들이 학교 내에 더 형성된다면 현재 딱히 존재하지 않는 우리 학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보는 바이다.
문보설2021-04-08 13:20
서울대학교에 한국스러운 건축물을 세운다는 아이디어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다향만담은 말로만 듣고, 어디있는지도 잘 몰라서 한 번도 가지 못했는데 사라졌다니 아쉽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건물도 참 많은데, 몇개쯤 전통적 분위기의 건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에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를 통해 해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약간 선비정신이랄까.. 만약 실현된다면 윗공대에도 들어왔으면 좋겠네요. 다른 학교를 떠올리면 뭔가 랜드마크처럼 딱 떠오르는 건축물들이 있는데, 저희 학교는 그것이 없는 것 같고, 따라서 랜드마크같은 것이 필요한데 한옥풍의 랜드마크가 가능할까 싶지만 확실히 정체성이 생길 것 같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강다솔2021-04-08 13:59
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저번 시간에 강의를 들으면 들었던 생각 중에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겼던 부분은 '전염병은 인류에게 항상 있어왔고 그것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며, 여태까지 인간의 역사도(이 책에서는 특히 도시가) 그런 위기를 극복하면서 나아왔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무력하게 마냥 기다려야만 할 재앙이 아니라 길을 모색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특별한 점을 꼽아보자면, 기후변화라는 전 역사에서 한 종이 전례없이 크게 남겨놓은 자취의 부산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의 변화를 논할 때 환경을 뻬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건물, 도시, 건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저번 강의에서도 앞으로는 공간의 재활용 측면에서 이제 쓸 수 없는 건물을 허물지 않고 다시 잘 쓰려면 벽식 구조가 아니라 기둥식 구조를 더 많이 사용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이처럼 이런 구조의 변호와 더불어 재료의 변화도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콘크리트, 썩지 않는 합성구조 등이 아니라 다른 친환경적인 재료에 대한 연구, 그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건물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야 할 듯하다.
또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건물이 유기체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인데, 건물이 어떻게 인간에게 그리고 환경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친숙한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도 인간처럼 프로필을 작성할 수 있고,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면 건축에 대한 일반인들의 참여를 더 이끌어 내서 좋은 방향으로의 공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코로나-19의 특별한 점을 꼽아보자면, 기후변화라는 전 역사에서 한 종이 전례없이 크게 남겨놓은 자취의 부산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의 변화를 논할 때 환경을 뻬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건물, 도시, 건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저번 강의에서도 앞으로는 공간의 재활용 측면에서 이제 쓸 수 없는 건물을 허물지 않고 다시 잘 쓰려면 벽식 구조가 아니라 기둥식 구조를 더 많이 사용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이처럼 이런 구조의 변호와 더불어 재료의 변화도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콘크리트, 썩지 않는 합성구조 등이 아니라 다른 친환경적인 재료에 대한 연구, 그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건물에 대한 연구도 많이 이루어져야 할 듯하다.
또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건물이 유기체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인데, 건물이 어떻게 인간에게 그리고 환경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친숙한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도 인간처럼 프로필을 작성할 수 있고,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면 건축에 대한 일반인들의 참여를 더 이끌어 내서 좋은 방향으로의 공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