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 14주_고・탐] 건국대학교 철학과 김석 교수 특강
김민정2021-01-20 17:28
1기 송*우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다. 왜냐하면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욕구가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완전하게 표현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억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는 발생하는 대로 행해질 수 없고 대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을 고려하여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해결되지 못한 억압이 남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동물에게는 욕구는 있지만 욕망은 없다. 동물들의 행위는 우선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발생하는 대로 실현될 수 있으며, 또 언어를 매개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포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라캉은 대상 의존적인 타자의 욕망과 온전한 순수 욕망은 구분했지만,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은 구분하지 않은 것 같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타자의 욕망의 단계이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 순수 욕망을 찾게 된다. 첫 번째 시기는 어머니의 욕망에 의존하는, 어머니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주는 일이 욕망이 되는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에는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의 결속이 깨지고, 상상계의 아버지에 동일시하려 한다. 세 번째 시기는 아버지와의 경쟁의식을 끝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시기이다.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타자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등 타자의 욕망에 의존하는 앞선 두 시기와 달리 세 번째 시기는 추구되어야 하는 상태이지만, 둘은 라캉에 의해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구분되지 선악으로 구분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과 선악은 항상 함께 얘기되어야 하지만, 욕망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순수 욕망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선악이 없지만, 욕망을 실현하고자 할 때는 선악이 발생하게 된다. 선악은 고립된 개인일 때는 발생하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며, 라캉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라캉은 공동체가 정의한 ‘규정된 선’이 개별 주체의 실존적 본질(욕망)에는 어긋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전통적인(공동체의) 선이 꼭 진리적인 선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선이 타파의 대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순수 욕망은 타인을 벗어나 발생하는 것이지만, 실현될 때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이때 공동체의 규정된 선이 기능할 수밖에 없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다. 왜냐하면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욕구가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완전하게 표현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억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는 발생하는 대로 행해질 수 없고 대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을 고려하여 행해져야 하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해결되지 못한 억압이 남는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동물에게는 욕구는 있지만 욕망은 없다. 동물들의 행위는 우선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발생하는 대로 실현될 수 있으며, 또 언어를 매개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포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라캉은 대상 의존적인 타자의 욕망과 온전한 순수 욕망은 구분했지만,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은 구분하지 않은 것 같다.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타자의 욕망의 단계이고,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 순수 욕망을 찾게 된다. 첫 번째 시기는 어머니의 욕망에 의존하는, 어머니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주는 일이 욕망이 되는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에는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의 결속이 깨지고, 상상계의 아버지에 동일시하려 한다. 세 번째 시기는 아버지와의 경쟁의식을 끝내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시기이다.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가, 타자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등 타자의 욕망에 의존하는 앞선 두 시기와 달리 세 번째 시기는 추구되어야 하는 상태이지만, 둘은 라캉에 의해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구분되지 선악으로 구분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과 선악은 항상 함께 얘기되어야 하지만, 욕망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와 상관없이 발생하는 순수 욕망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선악이 없지만, 욕망을 실현하고자 할 때는 선악이 발생하게 된다. 선악은 고립된 개인일 때는 발생하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며, 라캉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라캉은 공동체가 정의한 ‘규정된 선’이 개별 주체의 실존적 본질(욕망)에는 어긋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전통적인(공동체의) 선이 꼭 진리적인 선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선이 타파의 대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순수 욕망은 타인을 벗어나 발생하는 것이지만, 실현될 때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이때 공동체의 규정된 선이 기능할 수밖에 없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김민정2021-01-20 21:59
1기 이*현
*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 역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정립되고 고립된 개인에게는 무의미한 개념임을 집어주신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필요하므로 공동체의 선이라는 기준이 어느정도 필요하다는 말씀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타인에게서 벗어난 개념으로서 주체의 자율성이 드러나는 ‘욕망에 대한 욕망’인 순수 욕망을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실현하려는 순간 이는 더 이상 순수 욕망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선과 악의 개념 역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정립되고 고립된 개인에게는 무의미한 개념임을 집어주신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가 필요하므로 공동체의 선이라는 기준이 어느정도 필요하다는 말씀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타인에게서 벗어난 개념으로서 주체의 자율성이 드러나는 ‘욕망에 대한 욕망’인 순수 욕망을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실현하려는 순간 이는 더 이상 순수 욕망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21:59
1기 권*현
*우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욕망은 타인을 벗어나 발생하는 것이지만, 실현될 때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밖에 없다는 *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선악자체도 타인이 없고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가 동의한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합니다.
동물이 욕망을 가질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우님의 말처럼 동물들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언어로 왜곡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는 거 아닐까요...?
다른 학우분들과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우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욕망은 타인을 벗어나 발생하는 것이지만, 실현될 때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밖에 없다는 *우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선악자체도 타인이 없고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가 동의한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합니다.
동물이 욕망을 가질 수 있는지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우님의 말처럼 동물들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언어로 왜곡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는 거 아닐까요...?
다른 학우분들과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7:28
1기 이*빈
1.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순수욕망이며, 이는 항상 불가능과 조우하여 항상 충족되지 않아 인간으로부터 욕망에 대한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하여, 어떠한 ‘욕구’가 언어를 통해 ‘요구’로 발현되며, 이 때에 욕구가 언어를 통해 완벽히 기술되지 못하기에 생기는 원억압을 ‘욕망’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라캉의 욕망은 언어를 전제조건으로 하며, 욕망을 지속시키는 지속적인 원인 또한 언어이다. 또한 라캉의 욕망에서, 욕망의 진짜 본성은 대상을 향하기 않고 주체 자신의 존재로 향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진짜 본성은 특성한 대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결여된 존재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진정한 본성은 무의식에 있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요구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러한 욕망의 본성에는 상징계에서 결여로 남아있는 주체의 존재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참고서적 188p)
정신분석학은 많이 접했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출발한 이론임에도 라캉의 이론은 어렵고 와닿지 않아 라캉이 말하는 욕망에 대해 요약하고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처음 질문을 접하고 라캉의 이론을 읽을 때에는 동물들에게도 그들만의 언어의 체계가 있을 것이고, 라캉의 이론에 의한다면 동물들도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로부터의 욕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고차원적인 무의식의 작용과, 무의식에 내재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여가 있는지 고민해볼 때, 우리가 프로이트가 인간을 대상으로 행했던 것처럼 당장 동물의 무의식까지도 연구해볼 수 없다면 동물에게는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진정한 본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라캉은 욕망을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하였는데, 동물의 욕구는 타자와의 언어를 통한 관계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라캉이 정의한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동물에게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시적인 쾌락추구의 욕망이 있을 것이다.
2.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라캉 이론이 욕망 자체를 선에 대립시킨다거나, 순수 욕망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의 구분은 잘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 욕망이 선하다/악하다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동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욕망이 생겨나는 원리 그 자체에서 선한 동기나 악한 동기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의견을 가진 학우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1.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순수욕망이며, 이는 항상 불가능과 조우하여 항상 충족되지 않아 인간으로부터 욕망에 대한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하여, 어떠한 ‘욕구’가 언어를 통해 ‘요구’로 발현되며, 이 때에 욕구가 언어를 통해 완벽히 기술되지 못하기에 생기는 원억압을 ‘욕망’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라캉의 욕망은 언어를 전제조건으로 하며, 욕망을 지속시키는 지속적인 원인 또한 언어이다. 또한 라캉의 욕망에서, 욕망의 진짜 본성은 대상을 향하기 않고 주체 자신의 존재로 향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진짜 본성은 특성한 대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결여된 존재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진정한 본성은 무의식에 있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요구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러한 욕망의 본성에는 상징계에서 결여로 남아있는 주체의 존재 자체가 있다고 말한다. (참고서적 188p)
정신분석학은 많이 접했지만 정신분석학에서 출발한 이론임에도 라캉의 이론은 어렵고 와닿지 않아 라캉이 말하는 욕망에 대해 요약하고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처음 질문을 접하고 라캉의 이론을 읽을 때에는 동물들에게도 그들만의 언어의 체계가 있을 것이고, 라캉의 이론에 의한다면 동물들도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로부터의 욕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고차원적인 무의식의 작용과, 무의식에 내재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여가 있는지 고민해볼 때, 우리가 프로이트가 인간을 대상으로 행했던 것처럼 당장 동물의 무의식까지도 연구해볼 수 없다면 동물에게는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진정한 본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라캉은 욕망을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하였는데, 동물의 욕구는 타자와의 언어를 통한 관계로부터 비롯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라캉이 정의한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동물에게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시적인 쾌락추구의 욕망이 있을 것이다.
2.
나의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라캉 이론이 욕망 자체를 선에 대립시킨다거나, 순수 욕망을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의 구분은 잘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 욕망이 선하다/악하다라고 이야기하려면 그 동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욕망이 생겨나는 원리 그 자체에서 선한 동기나 악한 동기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의견을 가진 학우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민정2021-01-20 17:28
1기 장*균
우선 인간의 욕망에 대한 라캉의 생각에는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내가 제기했던 질문들이 담겨있었다. 일리아스에 관한 토의에서 아킬레우스 및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존재가 아닐까라고 제기했던 내 질문, 그리고 옌푸와 관련한 글을 읽은 후 토의하는 과정에서 제기했던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 (언어가 사회와 그에 소속된 인간을 규정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대한 내 질문들과 맞닿아 있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라캉이 생각한 인간의 욕망이란 자신의 존재의 회복이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고, 사회의 언어적 구조에 소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기는 어렵다. 즉, 상상계를 통해 타인의 영향을 받은 자아가 형성되고, 상징계를 통해 언어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순전히 나의 존재적인 욕망은 온전한 형태로 만족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이라는 것을 타인과 언어를 넘어 순전히 존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순수욕망으로 규정한다면 나는 단순히 이것이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에 욕망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생물학적인 욕구와 언어적인 요구의 괴리에 존재하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데 이러한 괴리는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과 같은 생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물들 역시 배고픔을 느끼고, 생존을 추구하는 등 기본적인 생물학적인 욕구가 있다. 모든 동물들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동물들 역시 자신의 종족들 간에 언어체계, 소통수단이 존재하고 자신들만의 규율이 있으며 새로 태어난 새끼도 거기에 강제적으로 소속되게 된다. 또한 인간이 사회를 꾸리고 자식을 양육하듯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경우가 있으며 어렸을 때 부모가 새끼를 양육하는 과정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은 동물들의 사회가 인간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굳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인간의 경우에는 자라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 등을 통해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동물의 경우는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마주하는 다른 동물들의 모습 혹은 그 관계에서 알게 된 자신의 능력과 모습을 통해 인간에 비해 비교적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과 존재적인 것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며, 이로 인한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은 인간처럼 여전히 실재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욕망은 자신의 존재적인 욕구와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필연적인 사회적인 한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실재계에 도달이 불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욕망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이를 생각하고 표현한 주체가 이미 심리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은 자아이고, 생각과 표현의 과정 역시 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순수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존재에 대해 선악을 구분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의 욕망에 대한 라캉의 생각에는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내가 제기했던 질문들이 담겨있었다. 일리아스에 관한 토의에서 아킬레우스 및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존재가 아닐까라고 제기했던 내 질문, 그리고 옌푸와 관련한 글을 읽은 후 토의하는 과정에서 제기했던 언어와 사회와의 관계 (언어가 사회와 그에 소속된 인간을 규정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대한 내 질문들과 맞닿아 있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라캉이 생각한 인간의 욕망이란 자신의 존재의 회복이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고, 사회의 언어적 구조에 소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기는 어렵다. 즉, 상상계를 통해 타인의 영향을 받은 자아가 형성되고, 상징계를 통해 언어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순전히 나의 존재적인 욕망은 온전한 형태로 만족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지속적으로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이라는 것을 타인과 언어를 넘어 순전히 존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순수욕망으로 규정한다면 나는 단순히 이것이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에 욕망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생물학적인 욕구와 언어적인 요구의 괴리에 존재하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데 이러한 괴리는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과 같은 생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물들 역시 배고픔을 느끼고, 생존을 추구하는 등 기본적인 생물학적인 욕구가 있다. 모든 동물들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동물들 역시 자신의 종족들 간에 언어체계, 소통수단이 존재하고 자신들만의 규율이 있으며 새로 태어난 새끼도 거기에 강제적으로 소속되게 된다. 또한 인간이 사회를 꾸리고 자식을 양육하듯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경우가 있으며 어렸을 때 부모가 새끼를 양육하는 과정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측면들은 동물들의 사회가 인간 사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굳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인간의 경우에는 자라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 등을 통해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동물의 경우는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마주하는 다른 동물들의 모습 혹은 그 관계에서 알게 된 자신의 능력과 모습을 통해 인간에 비해 비교적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과 존재적인 것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며, 이로 인한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은 인간처럼 여전히 실재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욕망은 자신의 존재적인 욕구와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필연적인 사회적인 한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실재계에 도달이 불가능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욕망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이를 생각하고 표현한 주체가 이미 심리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은 자아이고, 생각과 표현의 과정 역시 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순수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존재에 대해 선악을 구분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21:59
1기 송*우
이번 학기 수업을 들으며 제기하셨다는 질문들이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생물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데, 저는 인간에게만 언어가 존재하므로 동물에게는 욕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물에게도 나름의 소통수단과 규율이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이 있을 것이라는 성균 님의 관점은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고 또 타당한 것 같습니다. 다만 동물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추상성이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로 인한 괴리가 발생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추상성이 없는 언어는 사실 실재하는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욕구와 언어가 동물에게는 완전히 일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 학기 수업을 들으며 제기하셨다는 질문들이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생물적 욕구와 언어적 요구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데, 저는 인간에게만 언어가 존재하므로 동물에게는 욕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물에게도 나름의 소통수단과 규율이 존재하기 때문에 욕망이 있을 것이라는 성균 님의 관점은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고 또 타당한 것 같습니다. 다만 동물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 달리 추상성이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로 인한 괴리가 발생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추상성이 없는 언어는 사실 실재하는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욕구와 언어가 동물에게는 완전히 일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1
1기 정*호
구체적인 욕망을 생각하고 표현한 주체가 이미 심리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은 자아이고, 생각과 표현의 과정 역시 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순수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글을 읽으면서 라캉의 욕망이 초월적이기 때문에 이지적이라고 생각했던 저의 생각이 라캉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라캉의 욕망이 주장하는 진의는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존재의 회복이겠지요. 흥미로운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욕망을 생각하고 표현한 주체가 이미 심리사회적으로 영향을 받은 자아이고, 생각과 표현의 과정 역시 언어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순수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글을 읽으면서 라캉의 욕망이 초월적이기 때문에 이지적이라고 생각했던 저의 생각이 라캉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라캉의 욕망이 주장하는 진의는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존재의 회복이겠지요. 흥미로운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7:28
1기 권*현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욕구는 생리적인 유기체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고, 요구는 이러한 욕망을 언어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며, 욕망은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 존재하며, 욕구를 요구로 전환시킬 때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부분인 것이다.(184-185)
이런 라캉의 욕구, 요구, 욕망에 대한 구분을 따라서 생각해보면,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유기체에서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욕구를 동물이나, 인간 모두에게서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사냥을 하고 안전한 장소를 찾으며, 인간 또한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식사를 챙기고 안전한 삶의 터전을 찾으려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욕구는 동물에게서는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인간에 있어서 욕구는 말,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며, 인간은 욕구를 말로 표현함에 있어서 이를 제어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욕구를 전달할 때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아.’를 ‘나는 오늘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 등과 같이 순화해서 표현하고, 이렇게 순화해서 전달할 수 없는 욕구들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이런 언어로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순화되고 제어되는, 라캉의 표현으로 욕구와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욕망은 바로 인간에게서만 관찰된다고 생각한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끝없는 결여를 바탕으로 한 욕망 자체로는 좋고/나쁨을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욕구를 요구로 나타내는 매커니즘과 그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방법 자체는 모든 인간에 있어서 보편적인 면이 있겠지만, 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좋고 나쁨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욕망은 그저 존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고 나쁨 -보통에 해당되는가 아닌가- 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은 욕구를 요구로 바꾸는 매커니즘에서 나타나게 되는 결과인 욕망의 표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욕망 그 자체와 욕망의 표출을 구분해서 생각했다. 욕구를 요구로 나타내는 매커니즘을 통해서 도출된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더라고 사람마다 그 욕망을 표출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크리"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이 극단적인 욕망 표출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더해서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이 극단적인 욕망 표출의 방법의 예시로 이야기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변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문제를 일으키는 욕망 표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욕구는 생리적인 유기체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고, 요구는 이러한 욕망을 언어로 표현해서 전달하는 것이며, 욕망은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 존재하며, 욕구를 요구로 전환시킬 때 불가피하게 소외되는 부분인 것이다.(184-185)
이런 라캉의 욕구, 요구, 욕망에 대한 구분을 따라서 생각해보면,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유기체에서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욕구를 동물이나, 인간 모두에게서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사냥을 하고 안전한 장소를 찾으며, 인간 또한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식사를 챙기고 안전한 삶의 터전을 찾으려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욕구는 동물에게서는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인간에 있어서 욕구는 말,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으며, 인간은 욕구를 말로 표현함에 있어서 이를 제어할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욕구를 전달할 때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아.’를 ‘나는 오늘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 등과 같이 순화해서 표현하고, 이렇게 순화해서 전달할 수 없는 욕구들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다.
이런 언어로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순화되고 제어되는, 라캉의 표현으로 욕구와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욕망은 바로 인간에게서만 관찰된다고 생각한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끝없는 결여를 바탕으로 한 욕망 자체로는 좋고/나쁨을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욕구를 요구로 나타내는 매커니즘과 그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방법 자체는 모든 인간에 있어서 보편적인 면이 있겠지만, 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좋고 나쁨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욕망은 그저 존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고 나쁨 -보통에 해당되는가 아닌가- 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은 욕구를 요구로 바꾸는 매커니즘에서 나타나게 되는 결과인 욕망의 표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욕망 그 자체와 욕망의 표출을 구분해서 생각했다. 욕구를 요구로 나타내는 매커니즘을 통해서 도출된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더라고 사람마다 그 욕망을 표출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에크리"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이 극단적인 욕망 표출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더해서 정신병, 신경증, 도착증이 극단적인 욕망 표출의 방법의 예시로 이야기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주변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문제를 일으키는 욕망 표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심*범
1. 욕망을 욕구라는 단어로 치환했을 때, 이 맥락에서 신경계를 가지고 자극-반응 메커니즘을 가진 생명이라면 그러한 생명체는 모두 욕망을 가지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욕구 내지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욕망이 인간에게 유달리 특별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소위 변연계와 대뇌피질 사이의 갈등으로 풀이되는 욕구와 이성이라는 시스팀의 갈등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 요소를 소거했을 때 인간과 동물,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물까지도 최소한의 생명 유지 내지 종족 번식을 위한 욕구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욕구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발달계통에 따라 많은 변주들이 이뤄지겠지만 원칙적으로 인간에게만 욕구라는 것이 전유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해, 흔히 '이기적 유전자'의 아이디어를 끌고 와 제기될 수 있는 반박은 귀기울일만 하다. 그것은 특히 신경계통이 뇌의 형태나 특질을 이룰 정도로 발달되지 않은 생명, 혹은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지 알 수 없는 식물에 대해 이들의 생존 본능 내지 종족 번성의 욕구를 유전자의 코딩을 넘어선 개체로서의 욕망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그 기준선, 그러니까 유전자의 욕망과 개체 고유의(내지 유전자에게서 약간 떨어져 있는) 욕망을 구분하는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면, 이는 역으로 상당히 발달된 뇌와 쾌고감수 능력을 가진 인간 내지 영장류에게까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다면 개체 고유의 욕망인가'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이런 설명이 그나마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애초에 생명의 근본되는 원초적인 욕구는 유전체에게서 기인하기에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개체 고유의 욕망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대신 이를 모든 생명체가 갖는 욕망의 근본적인 한계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최소한 신경계통 내지 쾌고감수, 나아가서는 자극-반응의 메커니즘을 가진 생명체라면 이런 근본적인 생명이라는 본질에서 기인한 순수하지 못하다는 한계에 봉착하는 욕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이다.
2. 이렇게 본다면,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은 단지 개인의 양심, 더 나아가서는 이를 둘러싼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욕망의 본질로써 좋고나쁨을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을 비롯한 대다수의 생명체에게 공유되는 것이고, 단지 이성과 욕구의 충돌이 일어나도록 발달계통적으로 진화인 몇몇 종만이 욕망에 대해 외부 요인(개인의 양심/도덕률/나아가서 사회상규나 형벌법규) 등에 따라 안정적인 공동체 유지를 위해 받아들인 인식의 틀을 가져다 써서 임의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불과하다.
1. 욕망을 욕구라는 단어로 치환했을 때, 이 맥락에서 신경계를 가지고 자극-반응 메커니즘을 가진 생명이라면 그러한 생명체는 모두 욕망을 가지는 것으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욕구 내지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다. 욕망이 인간에게 유달리 특별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소위 변연계와 대뇌피질 사이의 갈등으로 풀이되는 욕구와 이성이라는 시스팀의 갈등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 요소를 소거했을 때 인간과 동물,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식물까지도 최소한의 생명 유지 내지 종족 번식을 위한 욕구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욕구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발달계통에 따라 많은 변주들이 이뤄지겠지만 원칙적으로 인간에게만 욕구라는 것이 전유물로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해, 흔히 '이기적 유전자'의 아이디어를 끌고 와 제기될 수 있는 반박은 귀기울일만 하다. 그것은 특히 신경계통이 뇌의 형태나 특질을 이룰 정도로 발달되지 않은 생명, 혹은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지 알 수 없는 식물에 대해 이들의 생존 본능 내지 종족 번성의 욕구를 유전자의 코딩을 넘어선 개체로서의 욕망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그 기준선, 그러니까 유전자의 욕망과 개체 고유의(내지 유전자에게서 약간 떨어져 있는) 욕망을 구분하는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면, 이는 역으로 상당히 발달된 뇌와 쾌고감수 능력을 가진 인간 내지 영장류에게까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다면 개체 고유의 욕망인가'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이런 설명이 그나마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애초에 생명의 근본되는 원초적인 욕구는 유전체에게서 기인하기에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기준으로 해서 개체 고유의 욕망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대신 이를 모든 생명체가 갖는 욕망의 근본적인 한계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최소한 신경계통 내지 쾌고감수, 나아가서는 자극-반응의 메커니즘을 가진 생명체라면 이런 근본적인 생명이라는 본질에서 기인한 순수하지 못하다는 한계에 봉착하는 욕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라고 말이다.
2. 이렇게 본다면,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은 단지 개인의 양심, 더 나아가서는 이를 둘러싼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욕망의 본질로써 좋고나쁨을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을 비롯한 대다수의 생명체에게 공유되는 것이고, 단지 이성과 욕구의 충돌이 일어나도록 발달계통적으로 진화인 몇몇 종만이 욕망에 대해 외부 요인(개인의 양심/도덕률/나아가서 사회상규나 형벌법규) 등에 따라 안정적인 공동체 유지를 위해 받아들인 인식의 틀을 가져다 써서 임의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불과하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송*재
1.
여기서의 욕망을 단순히 본능적 충실함, 충동, 욕심으로 본다면 물론 동물에게도 다양한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욕구, 요구, 욕망을 분리하여 설명한 바와 같이 이때의 욕망은 존재에 대한 열망인 ‘순수 욕망’임을 고려한다면 나는 결코 동물에게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라캉의 욕망은 존재가 실현시키기를 원했지만 실패한 것의 결여에서 출발한다. 언어를 통한 상징계에 갇혀 완전한 자아의 온전한 욕구를 전달, 실현할 수 없는 상태 즉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서 욕망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의 상징계를 갖고 있겠지만 그것을 공유된 기표로써 표시하지 않는 즉 우리와 같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에게는 욕망이 존재하기 어렵다. 욕구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실패만이 있을 뿐, 이를 언어를 통한 요구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와 같은 언어 체계가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소통 체계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측면에서 라캉의 욕망 개념을 동물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2.
욕망을 바라봄에 있어 ‘좋고 나쁨’을 재단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욕구와 요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일치, 그리고 그것에서 주체가 느끼는 결여 그 자체인 욕망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상징계의 구속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가 정신의 심연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정한 규범에 맞지 않는 욕구와 요구는 있을 수 있지만 그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욕망에 대해서는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관지어, 교수님의 논문 중 ‘욕망이 대상에 대한 의존성과 선을 벗어나 순수한 형식적 의지로 바뀌는 죽음의 순간 아름다움이 발생한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이 질문에 답하면서도 함께 생각해보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1.
여기서의 욕망을 단순히 본능적 충실함, 충동, 욕심으로 본다면 물론 동물에게도 다양한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욕구, 요구, 욕망을 분리하여 설명한 바와 같이 이때의 욕망은 존재에 대한 열망인 ‘순수 욕망’임을 고려한다면 나는 결코 동물에게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라캉의 욕망은 존재가 실현시키기를 원했지만 실패한 것의 결여에서 출발한다. 언어를 통한 상징계에 갇혀 완전한 자아의 온전한 욕구를 전달, 실현할 수 없는 상태 즉 욕구와 요구의 사이에서 욕망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름의 상징계를 갖고 있겠지만 그것을 공유된 기표로써 표시하지 않는 즉 우리와 같은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에게는 욕망이 존재하기 어렵다. 욕구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실패만이 있을 뿐, 이를 언어를 통한 요구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와 같은 언어 체계가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소통 체계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측면에서 라캉의 욕망 개념을 동물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2.
욕망을 바라봄에 있어 ‘좋고 나쁨’을 재단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욕구와 요구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일치, 그리고 그것에서 주체가 느끼는 결여 그 자체인 욕망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상징계의 구속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가 정신의 심연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무리일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정한 규범에 맞지 않는 욕구와 요구는 있을 수 있지만 그 괴리에서 발생하는 자아의 욕망에 대해서는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관지어, 교수님의 논문 중 ‘욕망이 대상에 대한 의존성과 선을 벗어나 순수한 형식적 의지로 바뀌는 죽음의 순간 아름다움이 발생한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이 질문에 답하면서도 함께 생각해보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다.
김민정2021-01-20 22:01
1기 권*현
*재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욕구가 요구로 표현될 때, 언어가 관여하게 되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만 욕망을 가질 수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와 소통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동물들 사이에서도 서로 특정 언어 체계를 사용한다면, 욕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욕망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동물들이 가지는 욕망에 대해서 우리의 욕망이 유일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재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 :)
저도 욕구가 요구로 표현될 때, 언어가 관여하게 되면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만 욕망을 가질 수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와 소통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동물들 사이에서도 서로 특정 언어 체계를 사용한다면, 욕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욕망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동물들이 가지는 욕망에 대해서 우리의 욕망이 유일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김*현
1
라캉이 구분한 욕구, 요구, 욕망에서 욕망은 욕구를 언어를 통해 요구하며 생겨나는 차이 에 기반을 둔다. 욕구와 요구가 인간의 고유의 것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라면 욕망은 반드시 인간 고유의 것이 된다.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더라도 욕구를 가진 대상이 욕망을 갖거나, 욕망하기 위해서는 언어로 욕구를 타자에게 요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때문에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더라도 언어와 요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라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다. 동물에게는 욕구가 있으므로 언어를 통한 요구가 인간 고유의 것인지에 따라 욕망의 여부가 달라진다. 인공지능이라면 욕구의 수준에서 욕망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은 구분 불가능하다. 욕망을 대상을 향하는 욕망과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욕망의 표출과 승화가 좋고 나쁠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인물을 대상으로 그 인물의 욕망을 라캉의 방식대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글이 있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욕망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에 대해 잘 이해한 관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모든 욕망에는 표출 방법이 존재하는가? 그 표출 방법이 특정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욕망의 표출 방법이 나쁜 방법 뿐이라면 그 욕망은 나쁜 욕망인가?
1
라캉이 구분한 욕구, 요구, 욕망에서 욕망은 욕구를 언어를 통해 요구하며 생겨나는 차이 에 기반을 둔다. 욕구와 요구가 인간의 고유의 것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라면 욕망은 반드시 인간 고유의 것이 된다.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더라도 욕구를 가진 대상이 욕망을 갖거나, 욕망하기 위해서는 언어로 욕구를 타자에게 요구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때문에 욕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더라도 언어와 요구가 인간 고유의 것이라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이다. 동물에게는 욕구가 있으므로 언어를 통한 요구가 인간 고유의 것인지에 따라 욕망의 여부가 달라진다. 인공지능이라면 욕구의 수준에서 욕망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은 구분 불가능하다. 욕망을 대상을 향하는 욕망과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욕망의 표출과 승화가 좋고 나쁠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인물을 대상으로 그 인물의 욕망을 라캉의 방식대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글이 있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망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욕망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에 대해 잘 이해한 관점에서는 터무니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모든 욕망에는 표출 방법이 존재하는가? 그 표출 방법이 특정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욕망의 표출 방법이 나쁜 방법 뿐이라면 그 욕망은 나쁜 욕망인가?
김민정2021-01-20 22:01
1기 장*균
글 잘 읽었습니다. 리킹의 이론에 근거하여 욕망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지에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주신 것처럼 욕구와 언어를 통한 요구가 인간만의 영역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마지막에 제시해주신 욕망에 대한 질문들 역시 저 역시도 궁금한 부분들입니다. 과연 욕망이라는 것이 모두 다 관찰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리킹의 이론에 근거하여 욕망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지에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주신 것처럼 욕구와 언어를 통한 요구가 인간만의 영역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마지막에 제시해주신 욕망에 대한 질문들 역시 저 역시도 궁금한 부분들입니다. 과연 욕망이라는 것이 모두 다 관찰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민정2021-01-20 22:01
1기 이*빈
*현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인공지능이 욕구의 수준에서 욕망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신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가지치듯 생각해볼 것들이 많아보이네요. 마지막 질문도 이해못한 제 입장에선 참 어렵지만 답변이 궁금해지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욕망의 표출 방법과 욕망의 선악을 연관지은 생각이 인상깊었습니다.
*현님 의견 잘 읽었습니다
인공지능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인공지능이 욕구의 수준에서 욕망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신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가지치듯 생각해볼 것들이 많아보이네요. 마지막 질문도 이해못한 제 입장에선 참 어렵지만 답변이 궁금해지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욕망의 표출 방법과 욕망의 선악을 연관지은 생각이 인상깊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김*교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욕망이 무엇을 의미하냐에 따라 인간 고유의 것인지, 생물계 안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 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은 라캉이 밀하는, 욕망의 윤리학 관점에서의 '순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라캉은 욕망과 윤리, 미의 불가분한 연관성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토대로 선의 윤리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선의 윤리는 목적론적으로 해석되어 원인과 결과 사이에 불분명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며 이는 자칫 개인의 이기주의로 선이 오용될 위험이 존재한다. 또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순수한 도덕적 행위나 의무를 변질시키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와 대비되는 순수욕망은 목적론을 정면으로 대치하여 행위의 순수성에 주목한다. 좀 더 엄밀히 순수 욕망은 쾌락, 현실로부터 실재론적으로 받게되는 영향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를 초월하는 존재 결여를 받아들이는 욕망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순수 욕망은 무로의 도달, 죽음 충동의 행위로 이어지게 때문에 이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 외의 생태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곤충 혹은 몇 동물에서 번식을 마친 후 집단의 이득을 위해 개체 개인을 희생하는 사례가 발견되지만 이는 순수 욕망으로 인한 죽음 충동의 행위로 볼 수 없다.
'순수 욕망'이 가진 장점은 개인의 동기, 행동을 생각할 때 그 행동과 환경을 구분지음으로서 행위자의 의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이 순수 욕망의 최종 정착지, 미의 궁극의 추구점이라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죽음 충동 역시 하나의 행동, 발화의 한 가지 뿐이기에 죽음을 숭고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숭고히 여기는 것은 공동체 집단에서 발달시킨 사회적 감성, 인격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을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선엔 동의하기 어렵다. 죽음, 죽음 충동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 욕망의 한 양상이며 과정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 욕망'이 인간의 욕망을 개체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기에 다가오는 포스트휴머니즘 사회에서 인간, 인공지능 각각을 독립된 시선으로 이해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개체의 모든 행위와 의도를 '순수 욕망'으로 해제하는 과정은 한계가 있기에 이를 위해 '선의 논리' 혹은 다른 개념을 일부 수정하여 적용하는 과정 등이 수반된다면 인간의 욕망과 행위(정치), 미의 추구를 다가올 시기에 적합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2. 좋음/나쁨이 합리성 판단의 결과물이라면 순수 욕망과는 정확히 대치되는 개념이다. 좋은 욕망이기 때문에 목적성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면 타자의 욕망 혹은 목적론적 욕망의 추구에 빠지게 되는 것이므로 순수 욕망을 좋고 나쁨으로 구분하는 것은 개념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 욕망을 평가하는 요소로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 까 생각해보았고 1) 주체의 자율적 의지, 판단에 의한 욕망인 지 2)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 3) 행위와 의지에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지 등으로 나 자신의 순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이 가진 욕망 혹은 욕구는 사회적 관계와 개인주의적 성향이 영향을 받아 이게 정말 나의 욕망이 맞는 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점점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라캉이 순수욕망을 윤리적 추구, 미적 추구의 개념으로 제시한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좋은 해체 도구이다.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욕망이 무엇을 의미하냐에 따라 인간 고유의 것인지, 생물계 안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인 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은 라캉이 밀하는, 욕망의 윤리학 관점에서의 '순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라캉은 욕망과 윤리, 미의 불가분한 연관성을 분명히 하였고 이를 토대로 선의 윤리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선의 윤리는 목적론적으로 해석되어 원인과 결과 사이에 불분명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며 이는 자칫 개인의 이기주의로 선이 오용될 위험이 존재한다. 또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순수한 도덕적 행위나 의무를 변질시키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와 대비되는 순수욕망은 목적론을 정면으로 대치하여 행위의 순수성에 주목한다. 좀 더 엄밀히 순수 욕망은 쾌락, 현실로부터 실재론적으로 받게되는 영향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상징계를 초월하는 존재 결여를 받아들이는 욕망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순수 욕망은 무로의 도달, 죽음 충동의 행위로 이어지게 때문에 이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 외의 생태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곤충 혹은 몇 동물에서 번식을 마친 후 집단의 이득을 위해 개체 개인을 희생하는 사례가 발견되지만 이는 순수 욕망으로 인한 죽음 충동의 행위로 볼 수 없다.
'순수 욕망'이 가진 장점은 개인의 동기, 행동을 생각할 때 그 행동과 환경을 구분지음으로서 행위자의 의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죽음이 순수 욕망의 최종 정착지, 미의 궁극의 추구점이라는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죽음 충동 역시 하나의 행동, 발화의 한 가지 뿐이기에 죽음을 숭고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숭고히 여기는 것은 공동체 집단에서 발달시킨 사회적 감성, 인격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을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선엔 동의하기 어렵다. 죽음, 죽음 충동 역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 욕망의 한 양상이며 과정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 욕망'이 인간의 욕망을 개체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기에 다가오는 포스트휴머니즘 사회에서 인간, 인공지능 각각을 독립된 시선으로 이해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개체의 모든 행위와 의도를 '순수 욕망'으로 해제하는 과정은 한계가 있기에 이를 위해 '선의 논리' 혹은 다른 개념을 일부 수정하여 적용하는 과정 등이 수반된다면 인간의 욕망과 행위(정치), 미의 추구를 다가올 시기에 적합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2. 좋음/나쁨이 합리성 판단의 결과물이라면 순수 욕망과는 정확히 대치되는 개념이다. 좋은 욕망이기 때문에 목적성을 가지고 그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면 타자의 욕망 혹은 목적론적 욕망의 추구에 빠지게 되는 것이므로 순수 욕망을 좋고 나쁨으로 구분하는 것은 개념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 욕망을 평가하는 요소로 그렇다면 무엇이 있을 까 생각해보았고 1) 주체의 자율적 의지, 판단에 의한 욕망인 지 2)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 3) 행위와 의지에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지 등으로 나 자신의 순수 욕망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이 가진 욕망 혹은 욕구는 사회적 관계와 개인주의적 성향이 영향을 받아 이게 정말 나의 욕망이 맞는 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점점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라캉이 순수욕망을 윤리적 추구, 미적 추구의 개념으로 제시한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좋은 해체 도구이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이*현
*교님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대해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순수 욕망의 형태가 여러가지일텐데, 그 종착점이 어째서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는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어떤 형태로 인식하는지 등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님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대해 의문이 많이 들었습니다. 순수 욕망의 형태가 여러가지일텐데, 그 종착점이 어째서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는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어떤 형태로 인식하는지 등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송*우
글 잘 읽었습니다. 좋고 나쁨의 판단부터가 타자 의존적이고 목적론적이기 때문에, 욕망을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순수 욕망의 개념과 모순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죽음 충동에 관한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찬교 님은 죽음이 궁극적인 미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고, 죽음 충동은 욕망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과정'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신 것인지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순수 욕망은 목적론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궁극적인 또다른 미를 위한 과정을 의미하신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좋고 나쁨의 판단부터가 타자 의존적이고 목적론적이기 때문에, 욕망을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순수 욕망의 개념과 모순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죽음 충동에 관한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찬교 님은 죽음이 궁극적인 미라는 말에 동의하기 어렵고, 죽음 충동은 욕망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과정'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신 것인지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순수 욕망은 목적론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궁극적인 또다른 미를 위한 과정을 의미하신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정*호
죽음을 숭고히 여기는 것은 공동체 집단에서 발달시킨 사회적 감성의 연장선에 있기에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을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선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날카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순수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주체도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을 아는 것에 본질적인 어렵다는 다른 학우의 의견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좋은 욕망의 기준에 있어 미학적 가치를 도입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미학적 가치를 의도하신 것인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흥미로운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죽음을 숭고히 여기는 것은 공동체 집단에서 발달시킨 사회적 감성의 연장선에 있기에 순수 욕망이 죽음 충동을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선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날카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순수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주체도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을 아는 것에 본질적인 어렵다는 다른 학우의 의견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좋은 욕망의 기준에 있어 미학적 가치를 도입한 것이 흥미로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미학적 가치를 의도하신 것인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흥미로운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남*범
*교님 코멘트가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동물도 자살을 하기 때문에 1번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죽음 충동에 대한 고찰은 저도 책을 읽으며 의문으로 느낀 부분이 같아 공감되었습니다. 2번애서도 개인과 사회의 구별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교님 코멘트가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실 동물도 자살을 하기 때문에 1번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논리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죽음 충동에 대한 고찰은 저도 책을 읽으며 의문으로 느낀 부분이 같아 공감되었습니다. 2번애서도 개인과 사회의 구별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박*민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하면서 욕망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라캉의 주장을 전제로 한다면, 욕구를 가진 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비로소 욕망이 될 텐데, 그렇다면 언어를 가진 존재인 인간만이 욕망을 고유하게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욕구는 인간 고유의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동물 또한 생존을 위한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은 그 욕구를 표현하는 방식이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박쥐나 돌고래 같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지는 않지만 초음파 등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은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궁금하다. 물론 당연히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종 내에서는 서로 자신의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그저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 와 같이 가치 판단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것을 판단하기 이전에 ‘좋은’, ‘나쁜’ 이라는 단어 자체도 명확한 기준이 없이 어떻게 보면 객관적으로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주관적인 기준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좋은 욕망이라거나 나쁜 욕망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분류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떻게든 분류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렇게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저 법적 규제와 같이 사회적으로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욕망이 표현된다면 그것은 ‘수용가능한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하다.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하면서 욕망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라캉의 주장을 전제로 한다면, 욕구를 가진 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비로소 욕망이 될 텐데, 그렇다면 언어를 가진 존재인 인간만이 욕망을 고유하게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욕구는 인간 고유의 것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동물 또한 생존을 위한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은 그 욕구를 표현하는 방식이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박쥐나 돌고래 같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지는 않지만 초음파 등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동물은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궁금하다. 물론 당연히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종 내에서는 서로 자신의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그저 이것이 옳다, 저것은 그르다 와 같이 가치 판단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것을 판단하기 이전에 ‘좋은’, ‘나쁜’ 이라는 단어 자체도 명확한 기준이 없이 어떻게 보면 객관적으로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주관적인 기준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좋은 욕망이라거나 나쁜 욕망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분류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떻게든 분류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렇게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저 법적 규제와 같이 사회적으로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욕망이 표현된다면 그것은 ‘수용가능한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학우분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하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장*균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욕구라는 것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언어에 있어서는 분명히 동물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주신것처럼 표현의 측면에서는 동물끼리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도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태어날 때부터 해당 의사소통구조에 속하게 되고, 이로인해 표현이 결정되고 제한된다는 점에서 욕망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도 욕구라는 것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언어에 있어서는 분명히 동물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는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주신것처럼 표현의 측면에서는 동물끼리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도 의사소통의 측면에서 태어날 때부터 해당 의사소통구조에 속하게 되고, 이로인해 표현이 결정되고 제한된다는 점에서 욕망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2
1기 송*재
*민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동물들도 우리와 같은 언어 체계는 아닐지라도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있으니 그러한 측면에서는 욕망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하며 읽었고, 좋고 나쁨이라는 기준 또한 주관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
*민님 글 잘 읽었습니다! 저 또한 동물들도 우리와 같은 언어 체계는 아닐지라도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있으니 그러한 측면에서는 욕망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공감하며 읽었고, 좋고 나쁨이라는 기준 또한 주관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
김민정2021-01-20 17:29
1기 이*현
1.
라캉에 의하면 욕망이란 욕구를 완벽히 언어로써 요구할 수 없다는 간극에서 파생된다. 유기체의 생리적 측면에서 발현되는 자연적 욕구를 언어의 형태로 타인에 대한 요구로 전환시킬 수 있는데, 언어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완전히 발현될 수 없는 부분이 욕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고 유기체 속에 남은 욕구는 억압되어 욕망의 모습으로 발현한다.
이와 같은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생물의 유기체적 특성에서 발현되는 욕구가 요구와 욕망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언어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닌 모든 대상에 대해 욕망을 지니는지 아닌지 따져봐야 하겠지만, 동물과 AI라는 대표적 두 가지 대상에 대해서만 라캉의 ‘욕망’ 기준을 적용해보고자 한다. 첫째, 동물은 욕망을 지닐 수 없다. 생물학적 욕구는 지니고 있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 타자와의 관계와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AI 역시 욕망을 지닐 수 없다. 비록 AI가 인간의 자연어나 컴퓨터 언어 등 언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생물의 자연적 특성에서 발현되는 욕구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
라캉은 ‘선’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지양한다. 선, 정의와 같은 가치는 개인에게 오히려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은 이미 사회 내에서 정치적/법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들을 ‘악’으로 지칭하며 개개인의 선의지를 위협할 수 있다. 따라서 라캉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좋음과 나쁨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개념을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라캉은 이와 같은 선의 윤리가 아닌 욕망의 윤리를 주장한다. 이때의 욕망은 무조건적 욕망이 아닌 ‘순수 욕망’이다. 순수 욕망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순수 욕망은 타인에 대한 집착이나 의존이 없는 주체의 자율적 의지와 자율성이 발현된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즉, 대상이나 목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닌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 욕망은 욕망에 대한 대상이나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에, 좋음과 나쁨의 기준으로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 욕망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다. 순수 욕망의 표현은 어째서 죽음 충동으로 드러나는가? 순수 욕망에 대한 추구는 어째서 미학으로 연결되는가?
1.
라캉에 의하면 욕망이란 욕구를 완벽히 언어로써 요구할 수 없다는 간극에서 파생된다. 유기체의 생리적 측면에서 발현되는 자연적 욕구를 언어의 형태로 타인에 대한 요구로 전환시킬 수 있는데, 언어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완전히 발현될 수 없는 부분이 욕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고 유기체 속에 남은 욕구는 억압되어 욕망의 모습으로 발현한다.
이와 같은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생물의 유기체적 특성에서 발현되는 욕구가 요구와 욕망으로 구분되는 기준은 언어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닌 모든 대상에 대해 욕망을 지니는지 아닌지 따져봐야 하겠지만, 동물과 AI라는 대표적 두 가지 대상에 대해서만 라캉의 ‘욕망’ 기준을 적용해보고자 한다. 첫째, 동물은 욕망을 지닐 수 없다. 생물학적 욕구는 지니고 있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 타자와의 관계와 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AI 역시 욕망을 지닐 수 없다. 비록 AI가 인간의 자연어나 컴퓨터 언어 등 언어라는 도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생물의 자연적 특성에서 발현되는 욕구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2.
라캉은 ‘선’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지양한다. 선, 정의와 같은 가치는 개인에게 오히려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은 이미 사회 내에서 정치적/법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들을 ‘악’으로 지칭하며 개개인의 선의지를 위협할 수 있다. 따라서 라캉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좋음과 나쁨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개념을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라캉은 이와 같은 선의 윤리가 아닌 욕망의 윤리를 주장한다. 이때의 욕망은 무조건적 욕망이 아닌 ‘순수 욕망’이다. 순수 욕망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순수 욕망은 타인에 대한 집착이나 의존이 없는 주체의 자율적 의지와 자율성이 발현된 상태를 의미하는 듯 하다. 즉, 대상이나 목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닌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 욕망은 욕망에 대한 대상이나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에, 좋음과 나쁨의 기준으로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 욕망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다. 순수 욕망의 표현은 어째서 죽음 충동으로 드러나는가? 순수 욕망에 대한 추구는 어째서 미학으로 연결되는가?
김민정2021-01-20 22:03
1기 김*현
*현님의 글을 읽고 AI의 욕구와 인간의 욕구의 차이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AI에게 생물이 갖는 자연적 특성을 프로그래밍하는것이 가능할까요? AI를 사람이 만들고 AI가 존재하는 세계 또한 사람이 만든다면, 우리의 자연적 특성에 대응되는 성질을 AI에게도 구현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욕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것 같습니다.
*현님의 글을 읽고 AI의 욕구와 인간의 욕구의 차이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AI에게 생물이 갖는 자연적 특성을 프로그래밍하는것이 가능할까요? AI를 사람이 만들고 AI가 존재하는 세계 또한 사람이 만든다면, 우리의 자연적 특성에 대응되는 성질을 AI에게도 구현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욕구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것 같습니다.
김민정2021-01-20 17:29
1기 남*범
1.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욕망은 커녕 욕구가 있는지부터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분류를 수행할 수는 있다. 이러한 경우 정의와 분류에 의해 결정된다. 라캉의 정의를 동물에 적용하려면 더 많은 전제조건과 기초연구가 필요하다. 내 나름의 답을 하자면, 좀 더 단순화하여 "하고 싶지만 못 하는 것이 있는가?" 라는 기준을 사용해본다. 이에 따르면 아마 동물에게도 욕망이 존재할 것 같은데, 과학적인 근거는 없고 감이다.
2. 참고자료에 따르면, 겉이 선하거나 악한 욕망은 존재한다. 선을 욕망에 덧입히다와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서로 관여하지만 정의는 독립적이기 때문에 분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욕망 그 자체가 선한지 악한지는 정의 나름이라 생각한다. 겉모습 또한 사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욕망과 선악의 이항적 구분은 따로 생각했다고 보여진다. 참고자료는 개인은 공동체에 의해 정의된다는 등 다양한 전제조건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의 직관을 적기 조심스럽다. 자료 밖에서 멋대로 답하자면, 좋고 나쁨이 충분히 논의되고 동의되지 않은 기준이라 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욕망은 존재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쁘지 않은가? 현실에서 행위와 결과를 무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1.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인간이 아닌 동물이 욕망은 커녕 욕구가 있는지부터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분류를 수행할 수는 있다. 이러한 경우 정의와 분류에 의해 결정된다. 라캉의 정의를 동물에 적용하려면 더 많은 전제조건과 기초연구가 필요하다. 내 나름의 답을 하자면, 좀 더 단순화하여 "하고 싶지만 못 하는 것이 있는가?" 라는 기준을 사용해본다. 이에 따르면 아마 동물에게도 욕망이 존재할 것 같은데, 과학적인 근거는 없고 감이다.
2. 참고자료에 따르면, 겉이 선하거나 악한 욕망은 존재한다. 선을 욕망에 덧입히다와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서로 관여하지만 정의는 독립적이기 때문에 분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욕망 그 자체가 선한지 악한지는 정의 나름이라 생각한다. 겉모습 또한 사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욕망과 선악의 이항적 구분은 따로 생각했다고 보여진다. 참고자료는 개인은 공동체에 의해 정의된다는 등 다양한 전제조건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의 직관을 적기 조심스럽다. 자료 밖에서 멋대로 답하자면, 좋고 나쁨이 충분히 논의되고 동의되지 않은 기준이라 생각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욕망은 존재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쁘지 않은가? 현실에서 행위와 결과를 무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김민정2021-01-20 22:04
1기 김*현
동물이 욕구가 있는지 알수 없다는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욕구가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욕망에 관해서는, 욕망이 표출될때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억압된 상태로 머무르는 욕망은 나쁘다고 말하기 어려운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동물이 욕구가 있는지 알수 없다는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욕구가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욕망에 관해서는, 욕망이 표출될때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억압된 상태로 머무르는 욕망은 나쁘다고 말하기 어려운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김민정2021-01-20 22:04
1기 송*재
*범님 의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번질문에 대해 인간은 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상적이었고, 저는 동물에게 욕망이 없다고 글을 썼지만 승범님 글을 읽으니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겉모습 또한 존재의 일부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또한 보편적으로 동의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범님 의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번질문에 대해 인간은 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상적이었고, 저는 동물에게 욕망이 없다고 글을 썼지만 승범님 글을 읽으니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겉모습 또한 존재의 일부이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 또한 보편적으로 동의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정2021-01-20 17:30
1기 정*호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에게 있어 욕망은 욕구가 언어로 구조화되면서 만들어지는 상징을 추구하면서 채울 수 없는 결여를 뜻한다. 결국 욕망이 인간 고유의 것이냐는 물음은 동물에게도 실재를 상징화하는 추상의 능력을 물어보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욕망의 유무가 동물의 행동적인 증거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것이라면 편하겠지만, 욕망은 무의식과 관계되어 진행되는 고도로 추상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제대로 아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바람직한 접근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하되 그것이 인간만의 것이라는 단정적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작업이 인간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필수적인가는 의문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됨으로써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인간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내가 이해하기에 라캉에게 있어 나쁜 욕망이 현실에 근거하고 쾌락과 연관된 타자의 욕망이라면 좋은 욕망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존재를 추구하는 순수한 욕망이다. 그가 주장하는 순수한 욕망은 초월적인 의미로서 대상에 귀착되는 정념을 배제한 형식적인 도덕법칙이다. 순수한 욕망은 분명 잠복되어있는 현실의 부조리를 수면위로 부상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복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순수한 욕망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할 수 있는 정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공허하게 보인다. 정념을 배제한 욕망은 대상에 대한 의존성을 초탈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기 때문에 이지적인 욕망인 것 같다. 우리는 결국 현실에 귀속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정념을 충족시킴이 존재를 충만하게 만드는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현실에 딛고 있는 욕망은 대상에 귀속되어 존재의 본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현대사회의 잔혹한 낙관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금방이라도 가능할 것만 같은 환상을 주조하여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전파한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지배된 욕망은 노예적인 삶의 양식으로 자리매김한다. 현실의 욕망에서 노예적인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주체적인 가치의 정립이다. 주체적인 가치는 초월적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 있는 정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현실에 귀속됨으로써 자신이 지배되고 있는 욕망을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정념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걷어내는 과정이다. 인간마다 고유한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욕망의 개별적인 양상은 다양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의 욕망이 권력의 지배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증대할 수 있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일 것이다.
1.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라캉에게 있어 욕망은 욕구가 언어로 구조화되면서 만들어지는 상징을 추구하면서 채울 수 없는 결여를 뜻한다. 결국 욕망이 인간 고유의 것이냐는 물음은 동물에게도 실재를 상징화하는 추상의 능력을 물어보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모든 생명체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욕망의 유무가 동물의 행동적인 증거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것이라면 편하겠지만, 욕망은 무의식과 관계되어 진행되는 고도로 추상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제대로 아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바람직한 접근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말하되 그것이 인간만의 것이라는 단정적 태도를 지양하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작업이 인간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필수적인가는 의문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됨으로써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인간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
내가 이해하기에 라캉에게 있어 나쁜 욕망이 현실에 근거하고 쾌락과 연관된 타자의 욕망이라면 좋은 욕망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존재를 추구하는 순수한 욕망이다. 그가 주장하는 순수한 욕망은 초월적인 의미로서 대상에 귀착되는 정념을 배제한 형식적인 도덕법칙이다. 순수한 욕망은 분명 잠복되어있는 현실의 부조리를 수면위로 부상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복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순수한 욕망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할 수 있는 정념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공허하게 보인다. 정념을 배제한 욕망은 대상에 대한 의존성을 초탈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기 때문에 이지적인 욕망인 것 같다. 우리는 결국 현실에 귀속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정념을 충족시킴이 존재를 충만하게 만드는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현실에 딛고 있는 욕망은 대상에 귀속되어 존재의 본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현대사회의 잔혹한 낙관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금방이라도 가능할 것만 같은 환상을 주조하여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전파한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지배된 욕망은 노예적인 삶의 양식으로 자리매김한다. 현실의 욕망에서 노예적인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주체적인 가치의 정립이다. 주체적인 가치는 초월적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 있는 정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현실에 귀속됨으로써 자신이 지배되고 있는 욕망을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정념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비판적으로 걷어내는 과정이다. 인간마다 고유한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좋은 욕망의 개별적인 양상은 다양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의 욕망이 권력의 지배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증대할 수 있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일 것이다.
김민정2021-01-20 17:30
1기 조*준
라캉은 생리적 욕구가 언어를 통해 요구로 바뀌고,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요구가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 요구가 욕망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를 욕구의 전달 매개로 본다면 수화, 몸짓도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몸짓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주인에게 애정을 원하는 개는 분명히 자신의 요구를 몸짓이라는 시니피앙을 통해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 외의 동물도 욕망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동물들이 라캉이 말하는 인간의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된 언어의 상징성, 주체와 자아 사이의 모순 등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욕망이 인간 고유의 것은 아니지만 인간 고유의 욕구에 따른 인간 고유의 욕망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 고유의 욕구, 더 나아가 인간 고유의 욕망은 무엇일까? 진화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욕망에는 우선 섭식, 온도조절 등 항상성 조절을 위한, 그야말로 생리적인 욕망의 층위가 있다. 이러한 욕망은 생물 일반에 의해 공유되기에 인간 고유의 욕망이라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다음으로는 애정 욕구, 인정 욕구, 공감의 욕구 등의 일차적인 사회적 욕구가 있다. 이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에서도 어느 정도는 관찰되는 욕구이다. 인간이 매우 사회적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간 고유의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인간 고유의 욕망이라 부르기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다룬 인간의 인정 욕구, 모방 욕구 등의 사회적 욕구와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생겨나는 문화적 욕구가 있다. 문화는 거의 인간 고유의 특성이므로 문화적 욕구야말로 인간 고유의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화적 욕구는 라캉이 말한 것처럼 시네피앙으로 구성되고, 언어의 불완전성과 주체와 자아의 문제로 불완전하게 충족될 수밖에 없다. 이 문화적 욕구에 의한 문화적 욕망이 바로 인간 고유의 욕망이자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한 욕망, 타자에 의해 형성된 자아의 욕망이다. 이러한 문화적 욕망 중 무엇이 좋은 것인지 말하기는 힘들지만 무엇이 나쁜 것인지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문화적 욕망은 생리적 욕구, 사회적 욕구와 충돌한다. 이 때 이해관계, 언어를 벗어나 "그가 그이기 때문"에 생기는 순수 욕망은 그러한 문화적 욕망에 의해 억압된다. 그러한 문화적 욕망은 각 개인의 순수 욕망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생리적 욕구가 언어를 통해 요구로 바뀌고,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요구가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충족되지 못한 요구가 욕망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어를 욕구의 전달 매개로 본다면 수화, 몸짓도 언어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몸짓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한다. 이를테면 주인에게 애정을 원하는 개는 분명히 자신의 요구를 몸짓이라는 시니피앙을 통해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 외의 동물도 욕망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동물들이 라캉이 말하는 인간의 욕망과 밀접하게 관련된 언어의 상징성, 주체와 자아 사이의 모순 등을 가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욕망이 인간 고유의 것은 아니지만 인간 고유의 욕구에 따른 인간 고유의 욕망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 고유의 욕구, 더 나아가 인간 고유의 욕망은 무엇일까? 진화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욕망에는 우선 섭식, 온도조절 등 항상성 조절을 위한, 그야말로 생리적인 욕망의 층위가 있다. 이러한 욕망은 생물 일반에 의해 공유되기에 인간 고유의 욕망이라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다음으로는 애정 욕구, 인정 욕구, 공감의 욕구 등의 일차적인 사회적 욕구가 있다. 이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에서도 어느 정도는 관찰되는 욕구이다. 인간이 매우 사회적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간 고유의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인간 고유의 욕망이라 부르기엔 부족하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다룬 인간의 인정 욕구, 모방 욕구 등의 사회적 욕구와 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생겨나는 문화적 욕구가 있다. 문화는 거의 인간 고유의 특성이므로 문화적 욕구야말로 인간 고유의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화적 욕구는 라캉이 말한 것처럼 시네피앙으로 구성되고, 언어의 불완전성과 주체와 자아의 문제로 불완전하게 충족될 수밖에 없다. 이 문화적 욕구에 의한 문화적 욕망이 바로 인간 고유의 욕망이자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한 욕망, 타자에 의해 형성된 자아의 욕망이다. 이러한 문화적 욕망 중 무엇이 좋은 것인지 말하기는 힘들지만 무엇이 나쁜 것인지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문화적 욕망은 생리적 욕구, 사회적 욕구와 충돌한다. 이 때 이해관계, 언어를 벗어나 "그가 그이기 때문"에 생기는 순수 욕망은 그러한 문화적 욕망에 의해 억압된다. 그러한 문화적 욕망은 각 개인의 순수 욕망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정2021-01-20 22:04
1기 남*범
*준님의 좋고 나쁜 욕망의 정의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생리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가 문화적 욕망보다 우선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폭력의 방향성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준님의 좋고 나쁜 욕망의 정의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생리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가 문화적 욕망보다 우선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폭력의 방향성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코멘트 감사합니다.
김민정2021-01-20 17:30
1기 강*진
이 점을 논의하기 전에 요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라캉에 의하면, 요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욕구)을 언어로써 표현하고 전달하는 의미를 가진다. 욕구에는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이고 동물적인 욕구도 포함되는 것 같다. 언어로써 제한되게 표현했을 때, 이 간극 안에서 결핍을 느끼게 되면서 욕망이 생기게 되며 인간만이 언어로 욕구를 표현하는 존재라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뇌와 자연의 매커니즘 등을 아직 풀지 못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큰 미지의 영역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물의 의사소통적 매커니즘을 못 밝혔다고 해서 동물에게도 욕망이 없다라고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욕망이 실제 행동으로 실현되었을 때 공동체 안의 사회적인 규범과 가치에 부합하는 욕망((예) 기부를 해서 남을 돕고 싶다)이 있고 공동체와 타인에게 해를 주는 욕망(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다) 이 있을 것이다. 욕망이 표출되는 방법에 따라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안에서 욕망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욕망 자체는 선악의 성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욕망을 가지더라도 누군가는 예술로 승화하며, 누군가는 범죄자가 된다.
이 점을 논의하기 전에 요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라캉에 의하면, 요구는 자신이 원하는 것(욕구)을 언어로써 표현하고 전달하는 의미를 가진다. 욕구에는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이고 동물적인 욕구도 포함되는 것 같다. 언어로써 제한되게 표현했을 때, 이 간극 안에서 결핍을 느끼게 되면서 욕망이 생기게 되며 인간만이 언어로 욕구를 표현하는 존재라면 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뇌와 자연의 매커니즘 등을 아직 풀지 못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큰 미지의 영역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동물의 의사소통적 매커니즘을 못 밝혔다고 해서 동물에게도 욕망이 없다라고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욕망이 실제 행동으로 실현되었을 때 공동체 안의 사회적인 규범과 가치에 부합하는 욕망((예) 기부를 해서 남을 돕고 싶다)이 있고 공동체와 타인에게 해를 주는 욕망(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다) 이 있을 것이다. 욕망이 표출되는 방법에 따라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안에서 욕망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 욕망 자체는 선악의 성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욕망을 가지더라도 누군가는 예술로 승화하며, 누군가는 범죄자가 된다.
서양 근대 철학의 인간관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김석 지음 | 살림 | 2007년 11월 20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52207548&orderClick=LAG&Kc=
토론 자료
김석, 「선의 윤리와 순수 욕망의 윤리: 크레온과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미학예술학연구』38집 (아래첨부)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김석 지음, 살림출판사)
토론 주제
김석 교수님의 논문 「선의 윤리와 순수 욕망의 윤리: 크레온과 안티고네를 중심으로」 을 정독하고,
라캉 해설집인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를 탐독한 후,
두 글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친구의 의견에 대해서 코멘트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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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인간 고유의 것인가?
- 2 -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따로 있는가?